제 14권 제 3장 누가 왕좌를 차지해야 하는지를 송사하기 위하여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가 폼페이에게 온 것과, 아리스토불루스가 알렉산드리움 요새로 도망하자 폼페이가그의 군대를 이끌고가 그가 차지하고 있는 요새를 내어놓으라고 명령한 것에 대하여

 


제 3 장



누가 왕좌를 차지해야 하는지를 송사하기 위하여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가 폼페이에게 온 것과, 아리스토불루스가 알렉산드리움 요새로 도망하자 폼페이가그의 군대를 이끌고가 그가 차지하고 있는 요새를 내어놓으라고 명령한 것에 대하여



 1. 다메섹에서 폼페이가 유대인들로부터 선물을 받다



그 후 오래지 않아 폼페이가 다메섹에 와서 코엘레-수리아로 나아가고 있을 때[㈜ 고대. 14권.(34-36)에서는 주전 63년 봄이라고 나와 있는 반면에 고대. 14권. (37)이하에서는 주전 64년 가을로 나와 있음을 주목하라.] 수리아와 애굽과 유대 전역으로부터 사절들이 그를 방문하러 왔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그에게 화려한 선물을 제공하였는데, 그것은 500달란트 상당의 황금제 포도나무였다. 이 선물에 대해서는 갑바도기아의 스트라보도 다음과 같은 말로 언급하고 있다.\’또한 애굽으로부터 한명의 사절과 금4,000조각 값어치의 왕관이 왔으며, 유대로부터는 포도나무라고도 하고 정원이라고도 하는 선물을 보내 왔는데 그들은 이 예술작품을 환희(terpo1e)라고 불렀다.[㈜ 대상을 포도 나무 혹은 정원으로 지술하고 있음을 볼 때 히브리어로는 \’기쁨\’이란 뜻을 지닌\’\’에덴\'(eden)이 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것은 로마의 쥬피터 카피톨리누스 사원에 있는 것을 우리가 직접[㈜ 스트라보(Strrabo)의 글에서의 인용문은 네이버(Naber)가 추정한 대로 앞서 나온 문장과 함께 끝나고 있는가\’ 아니면 니이제(Niese)가 주장한 대로 계속해서 \’500달란트\’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에 더하여 라이나흐나 쉬러가 주장한 대로 \’유대인의 통치자\’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있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 자신\’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의 해답은 이에 달려 있다 쉬러는 i : 295에서 만일 요세푸스가 여기에서 1인칭을 사용했다면 그는 주후 69년에 있었던 쥬피터의 신전이 불탔던 사실을 기록했을 것임을 지적한다. 더우기 라이나흐는 \’유대인의 통치자\’라는 구절이 요세푸스의 문체나 니콜라스의 문체,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은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니콜라스가 관련되어 있는지가 불확실하긴 하지만 이는 스트라보의 문체일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역자는 \’우리 자신\’이 스트라보일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조사해 보았는데거기에 \’알렉산더[㈜ 발췌문에는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만 나와 있으나, 라틴어 사본에는 \’알렉산더 (Alexander)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라고 나와 있다. 이것은 서기관들의 수정이라고 생각된다.] 유대인들의 왕으로부터\’라고 하는 명각이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500달란트의 가치로 평가되었다. 또한그것은 유대인들의 지배자 아리스토불루스가 보낸 것으로 언급되었다.



 2. 수리아에서 유세한 후 폼페이는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을 듣다.



  그후 오래지 않아[㈜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37 : 7에 의하면 폼페이가 수리아에 있는 아스피스(Aspis)(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음)에 있었던 주전 64년 가을에 .] 다시 사절들이 그에게로 왔는데, 힐카누스를 대신하여 안티파테르가 왔고,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신하여 니고데모(Nicodemus)가[㈜ 라틴어 사본에는 \’니코메데스\'(Nicomedos)라고 나와 있다.] 왔다. 니고데모는 가비니우스(Gabinius)와[㈜ 가비누스(Gabinus)는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참). 각주 44.] 스카우루스가 자기에게서 돈을 빼앗아 갔는데가비니우스가 먼저 300달란트를 가져가고 나중에 스카우루스가400달란트를 가져갔다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리스토불루스는 원래 있었던 적들에 더하여 이 사람들 또한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곧 폼페이는 논쟁자들을 그에게로 오라고 말하고는[㈜ 라틴어 사본에는 \’다메섹으로 오도록\’이라고 나와 있다.] 이른 봄에 겨울용 막사로부터 그의 군대를 이끌어 내어 다메섹 지역으로 출발시켰다. 그리로 가는 도중에 폼페이는아파메아에 있던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가 세운 성채를 함락시켰고 또한 멘나이우스의 아들인[㈜ 참). 고대. 13권.(392), (418).] 톨레미의 지경을 황폐화시켰는데,[㈜ 약간 수정된 본문.] 톨레미는 결혼에 의하여 톨레미의 친척이 되었다가 참수된 트리폴리의 디오니시우스[㈜ 쉬러(Scurer) i . 295주 14에서 라이나흐는 주전 54년경의 조영관(造營官)이었던 플라티우스(A. Platius)의 동전에 나와 있는 바키우스 유다이우스(Bacchius Judaeus)로 추정하고 있다.] 만큼이나 쓸모없는 놈팽이였다. 그러나 톨레미는1,000달란트를 지불함으로써 그의 죄에 대한 처벌을 모면하였는데, 그 돈으로 폼페이는 군사들의 급료를 지불하였다. 그는 또한 루시아(Lysias)의 성채를[㈜ 정확한 지점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레바논지역에 있는 한 곳으로 추정된다.]  파괴하였는데그 성채는 유대인 실라가 주인이었다. 그리고 헬리오폴리스와 칼키스의 여러 도시들을 지난 후에 그는 코엘레 수리아 지역과 여타 수리아를 양분하는 산을 넘어서[㈜ 다른 본문들에 나오는 \’펠라\'(Pella)는 내용에 나와 있지 않다. 폼폐이는 북쪽지방에서 남으로 행군하였다. -즉 아파메아(Apamea),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칼키스(Chalcls), 다메섹(Damascus) 순으로 진군하였다. 코엘레수리아(즉 팔레스틴과 트랜스 요르단)와 수리아 나머지 지역인 북부 수리 아 사이의 설명은 (니이제의 본문을 받아들인다면) 14권.(79)에 나와 있으며  이전의 주석가들과 같이 델로의 \’Leg. ad Galum36\’에 나온다. 이 산은 레바논 맞은편이라고 언급된다. 이 산악 지역에 대해 탈무드를 참고하기 위해서 데렌부르크(Derenbourg)의 책 p.100을 보라.] 다메섹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폼페이는 유대인들의 송사를 들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인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는 서로 싸우고 있고, 그 반면에 그 나라는 두 지도자 모두를 반대하고 있으며 한사람의 왕에 의해 이 나라가 통치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고주장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존경하는 하느님의 제사장들을 복종하는 것이 그들 나라의 관습이지만, 제사장들의 후손인 이 두 지도자가 자기 나라로 노예국을 만들려고 그들의 정부 형태를 변경하려 고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가 폼페이 앞에서 서로 비난하다.]



  힐카누스는 자기가 비록 형이지만 자기의 장자로서의 권리를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박탈당하였고, 거기다가 자신은 나라의 극히 일부분만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며,[㈜  안티파테르가 우세한 지역이었던 이두매 (Idumaea) 지방으로 추정됨] 아리스토불루스는 그 나머지를 힘으로 차지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또한아리스토불루스를 주변에 있는 나라의 백성들을 침략하고 바다에서의 해적 행위들을 선동하였던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하였으며,[㈜ 아리스토불루스가 주전 1세기 초반 경에 길리기아(Cilicia)의 해안 지방에 큰 위협이 되었던 해적 노략질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이 해적들의 침략을 진압하는 일에 폼페이가 임명되었다.] 또한 유대는 아리스토불루스가 폭력과 무질서를조장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반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비난들을 말함에 있어서 힐카누스는 가장 명망있는1,000명 이상의 유대 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하여 안티파테르가 제공해 준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아리스토불루스는 힐카누스가 권좌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은 무능하고 경멸을 불러 일으키는 본인 자신의 성격탓이라고 비난하였다. 자신에 대해서 그는 그 왕좌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것을 염려하여[㈜ 라틴어 사본에는 \’통치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두려움 때문에\’로 나와 있다.] 왕권을 넘겨받아야 할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그의 자격은 자기 아버지인 알렉산더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것이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 진술들에대한 증인으로 몇명의 젊은 허풍쟁이들을 불렀는데,\’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그들의 소송을 변론하기 보다는 축제에서 행진하고있는 것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들의 자주빛 의복들과 긴 머리, 금속제 장신구들과 다른 아름다운 장식품들을 비위에 거슬리도록 자랑해 보였다.[㈜ 고대. 14권.(173)에 나오는 이와 유사한 경우에서의 헤롯의 외모에 관하여 기술된 부분을 참고하라.



3. 폼페이가 결정을 연기하고 아리스토불루스는 저항할 준비를 하다



  폼페이는 이러한 주장들을 듣고서 아리스토불루스의 폭력을정죄하였지만 당분간은 정중한 말로써 고소인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리고 우선 나바타이아인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본 후에 자기가 그들의 나라로 오게 되면,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다른 본문에는 \’만족스럽게\’라는 말이 부가되어 있다.] 말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평  화를 유지하라고 말하였다. 동시에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가그 나라틀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고 그것을 통하여 그의 통행을 차단하는 것을 염려하여 그를 정중하게 대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불루스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왜냐하면 폼페이가 그에게 명령한 것들 중 어떤 것도 실행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는 디움(Dium)의[㈜ 전쟁.의 사본애서 ( Diospovlew\” ) 데일룸(Deilum), 혹은 델리움(Delium)으로 추정된다.] 도시로 나아갔으며, 거기서 유대를 향하여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4.폼페이가 아리스토볼루스에게 투항하라고 명령하다



  [㈜ 14권.(48-56)의 내용과 전쟁. 1권.(133-140)에 나오는  내용 간의 병행 구절에 관하여는 라구오이어(Laqueur) pp.158-161을 참조하라.]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 격분한 폼페이는 그가 나바타이아인들에 대항하여 준비하였던 군대와 이미 그의 수하에 있던 로마의 군단들과 마찬가지로 다메섹과 여타의 수리아 지역 출신의 외인부대들을 이끌고 아리스토불루스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펠라와스구도볼리를 통과한 후에 그는 코레아(Coreae)로[㈜ 얍복강과 요단강의 접합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3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알렉산드리온 복동쪽에서도 이와 동일한 거리에 위치한 카라와(Qaraw\’)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텔 마자르(Tell Maz\’r)임.] 나아갔는데, 그곳은 내지로 들어가는 유대의 관문이었다. 거기에서, 폼페이는 산꼭대기에 있는[㈜ 오늘날의 카른 사르타베(Qarn Sar\’abeh). 참). 고대. 13권. (417) 각주 565.] 아주 아름다운[㈜ 전쟁.에는 \’함부로 설치되어 있는\’으로 되어 있다.] 요새인 알렉산드레이온(Alexandreion)에 피신해 있던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리스토불루스가 자기에게 오도록 명령하였다. 거기서아리스토불루스의 많은 측근들이 그에게 로마와[㈜ 전쟁 .에는 \’로마인들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이라고 나와 있다. 라쿠오이어는   이 문구가 전쟁. 에는 빠져 있는데 이는 요세푸스가 공식적으로 로마 정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주 102를 보라. ] 교전하지 말도록 그에게 충고하자 내려와서 권좌에 대한 그의 권리에 대하여 형과 논쟁을 벌인 후에 다시 폼페이의 동의를 얻어 성채로 올라갔다. 그는 두 세번 이렇게 내려 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폼페이로부터 왕국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을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본문에는 \’그는 그(폼페이 )에게 희망을 품고 아첨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그는 폼페이가 명령하였던 모든 것에 복종하는 체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폼페이가 왕권을 힐카누스에게[㈜ \’그를 해임하고\’라는 말이 이곳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아리스토불루스의 동기 문제에 관하여는 전쟁.에 나오는 병행 구절보다 고대.에 더욱 충실히 설명되어 있다.]  넘겨줄 경우 자기 의 군대를 약화시키지 않고 또한 자기 스스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공급품들을 준비하기 위하여 요새로[㈜ 다른 본문에는 \’요새들\’로 나와 있다.]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에게 그의 요새들을 내어 놓을 것을 명령하였으며 이일로 인하여 자신의 필적으로 된 명령들을 그의 주둔군 사령관들에게 하달하였는데, 그것은 사령관들이 그 밖의 다른 형태로는 명령을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그는 복종하게 되었지만 분개하여 예루살렘으로 퇴각하였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오래지 않아 폼페이가 아리스토불루스를 향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으며 가는 도중에 폰투스로부터 사신들이 그에게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그에게 미드리다테스가 자기 아들인 파르나케스(Pharnaces)의 손에 의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주전 63년 봄에. 아피안(Appian)의 \’미드리다테스\'(Mitidates)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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