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권 제 16장 헤롯이 마리암메와 결혼하고 소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과 하스모네안 왕조가 종말을 맞게된 것에 대하여

 


제 16 장



헤롯이 마리암메와 결혼하고 소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과 하스모네안 왕조가 종말을 맞게된 것에 대하여



 1. 소시우스와 헤롯이 세력을 합함



  헤롯이 결혼식이 끝난 후, 소시우스는 먼저 내륙지방으로 부대를 보내고 자신은 베니게를 경유하여 수많은 기병과 보병을거느리고 왔다.[㈜ 본문은 어색하며 와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그러나 \’전쟁사\’의 병행구를 볼 때 \’장군\’이 소시우스(Sossius)라는 것은 분명하다.] 헤롯왕도 이미 거느리고 있던 병력에다가 더많은 군대를 더하여 그들을 이끌고 사마리아에 올라왔는데 그수가 약 30,000명이었다.[㈜ 전쟁. 은 헤롯 부하들의 숫자는 없다.] 이 모든 병력들이 예루살렘 성벽앞에 모여 도시북쪽 성벽에 자리를 잡았다. 수리아에서 온 원군까지 합하여 보병 11개 군단과 기병 6,000명의 병력이었다.[㈜ 전쟁. 은 \'(자기 군대의 )작은 부분도 형성하지 못한\’을 첨가한다.] 이들의 지휘관은 안토니의 명을 받아 동맹군을 이끌고 온 소시우스와 헤롯이었는데, 헤롯은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어 버린 안티고누스에게서 왕권을 빼앗고,[㈜ 전쟁. 1권. (346)의 병행구에서는 안티고누스에 대해 언급이 없다.] 원로원의 결정을 따라 그대신 왕위에 오르려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2. 포위된 자들의 교묘함과 용맹함



  예루살렘 성벽안에 갇힌[㈜ 다른 \’남겨둔,\’\’잡아둔\’.] 유대인들이[㈜ 다른 본문에는 \’군중\’또는 \’대중\’.] 헤롯과 그의 일당에대항하여 싸우는 모습은 온 백성들이 함께 모였기 때문에 참으로 대단한 열정과 고통이었다.[㈜ \’열정과 비통\’대신에, 전쟁.에는 도시안에 있는 사람들의 \’동요\'(ejtetavrakto)를 말한다.] 성전을 지켜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으며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발췌본에는 동일 ; 사본들에는 \’~을 칭찬하는\’. 본문은 다소 모호하다. 그러나 \’전쟁사\’에서(메시야적) 예언자들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느님이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주실 것이라는 예언들도 많았다. 그리고 포위당한 유대인들은 성밖의 모든 것들은[㈜ 발췌문과 라틴어는 동일(\’전쟁사\’와도 일치) ; 사본들에는 \’도시안에 있는 모든 것\’.] 성안으로 모두 운반해 놓아 적이나 짐승들의 식량으로 쓸만한 것은 하나도남겨놓지 않았으며 기습공격을 시도해 식량이 부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음의 단락에서 몇 개의 투키디데스의 어조가 있다.<단지 전쟁. 1권. 18 : 1, 2(348-351)에 있는 부분적인 병해구들 만에서> : (475)에 있는 ajntetevicxou와  ajponoiva와 (479)에 나오는 (ajntivpalon)] 헤롯은 이런 일들을 보고서, 적이 기습할만한 장소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기습공격에 대비하도록 하고 멀리까지 군사들을 보내 물자를 모으도록 하여 금새 충분한 양식을 비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헤롯은 곧이어 세 개의 토성을 쉽게 쌓을수 있었는데 이는 계속[㈜ 본문은 약간 수정됨.] 일할 수 있는 인력이 충분했고 또 여름이었기 때문에[㈜ 주전 37년의 <고대. 1권. (487, 488)을 보라>. 헤롯과 소시우스는 (465)에 의하면 주전 37년 봄까지 예루살렘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 사항은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을 쌓는데 기후나 노동력에 장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성장비를 끌고와서 성벽에 돌을 날려 때렸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며 애를 썼으나, 그것으로는 성안에 있는 자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성안에 포위된 자들은적을 막는 온갖 방법을 나름대로 강구하며 대항하였다. 그들은밖으로 뛰어나와 아직 완성되지 못한 토성과 다 완성된 토성들에다 불을 지르면서 일일이 맞서 싸웠는데, 비록 과학적인 면에서는 뒤떨어졌지만 대담성에 있어서는 로마군에게 조금도뒤지지 않았다. 그들은 성벽이 무너졌을 때 공성 장비에 맞서기 위해 방어책을 만들기도 하고 지하굴속에서 적을 만나 그속에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들은 밝은 전망이 아닌 절망 속에서도 싸웠고 전쟁이 끝나는 그 마지막까지 견디었다. 그들은 엄청난 수의 적들에 포위당하고 바로 그때가 안식년이었기 때문에 기근과 생필품의 부족으로 고통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적과 대항하였다.[㈜ 이것은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사항이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공격이 안식년 즉 주전 38년 10월에서 37년 10월까지 동안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모든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식년이 주전 37년 10월에서 36년 10월까지라는 것을 믿을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고대. 12권. (378), 13권. (234), 14권. (201)과 (487)의 주를 보라>. 그러므로 다음의 세 가지 가정 중에 하나를 취해야만 한다 ; (1) 요세푸스는 공격이 주전 37년 여름에 있었다고 이라고 있다. 그러나 안식년(주전 38년 10월에 시작)에 함락됐다고 말하는 (의미하는)것은 실수였다. (2) 요세푸스는 공격이 안식년 주전 36년 여름 동안 있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소시우스(Sossius)와 헤롯이 폼페이(Pompey)가 그렇게 했었던(주전 63년)이후 28년만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고대. 14권. 16 : 4(488)의 진술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 이렇게 예루살렘은 주전 36년에 함락되었다. 이는 굼파흐(Gumpach)와 카스파리(Caspari)(Schurer, I. 358, 주 11과 함께)의 지지를 받고 있다. 자이틀린(Zeitlin)의 주장은, \’MT\’, pp.20-2를 보라. 여기에는 27년간은 주전 36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전 37년 1월(티벳월 10일)을 말한다고 한다. 이는 26년간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주전 63년 여름의 폼페이 침입의 단편은 16 :2(473)에 여름을 언급하는 다른 것들로 인해 쓸모없어졌다고 한다. (3) 요세푸스가 공격이 주전 37년 여름에 있었다고 알고 있으면서 다소 모호하게 예루살렘 함락 이후, 즉 주전 37년 10월에 곧 시작한 안식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첫 번째 보았던 것보다 그렇게 불가능하게 보이질 않는다. 만약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주전 37년 여름에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면 그들은 10월에 시작하는 안식년의 후반부를 위해 여분의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보면 16 : 4(488)의 27년간은 어렵게 된다. 또한 요세푸스가 수학적인 실수를 했다고 추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성벽을 넘은 자들은 20명의[㈜ 전쟁. 에는 숫자가 없다.] 정예병사들이었고 뒤이어 소시우스의 백부장들이 넘었다.첫 번째 성벽은 40일만에[㈜ 이 사항과 16 : 2(476-478)에 있는 사항은 전쟁. 에는 병행구가 없다.] 함락되었고 두 번째 성벽은 15일 걸렸다. 성전을 두르고 있던 회랑의 일부가 불에 탔는데, 헤롯은 안티고누스가 불을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티고누스를 유대인의 미움을 사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Laqueur, pp.213-214는 두개의 첨가된 단락에 있는 유사하게 보이는 반 헤롯적인(Anti-Herodian) 사항은 실로 요세푸스의 자료 즉 헤롯의 실고(Memoirs)의 친헤롯적인 편견을 감추고 있다.] 성전의외곽뜰과 예루살렘 하부도시가 함락되자 유대인들은 성전의 안뜰과 상부도시로[㈜ 상부 도시(The Upper City)는 서쪽 언덕에 있다.] 달아났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이 하느님께 매일 희생제사 드리는 것을 방해할까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제사에 쓸 희생짐승을 들여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헤롯은 그들이 곧 항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되어지리라고 기대했던 일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유대인들이 안티고누스의 왕위를 지키려고 결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보고, 헤롯은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성을 폭풍같이 쓸고 가듯이 함락시켰다. 진지마다 죽은 자들의 시체로 뒤덮였는데,[㈜ 이곳에서는 \’전쟁사\’와 함께 근접한 병행구를 요약하고 있다. (479-486)=전쟁. 1권. (351-356).] 이는 오랜 포위공격으로[㈜ 전쟁. 1권.(351)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제 5월에 공격받음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 (487)은 제 3월(공격의)이거나 그보다 이전에 (476)을 보라. 도시가 함락됐다고 진술하고 있다 ; 그러나 \’제 3월\’의 \’고대사\’ 언급 시점은 결코 확실치 않다.] 로마군인들이 분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헤롯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반대세력인 안티고누스의 지지자들을 단 한명도 살려두지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골목이거나 집이거나 혹은 성전안에 숨으려 한 경우라도 함께 모여있던 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해 산더미같이 쌓였다. 어린이나 노인들, 그리고 약한 여인들이라고 동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헤롯왕이 명령을 내려 진정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자기의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사람처럼 아무나 닥치는 대로 칼을 내리쳤다. 바로 그때 안티고누스가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모습을 돌아볼 새도 없이 성에서 뛰어내려와 소시우스의 발밑에 엎드렸다. 그러나 소시우스는 그의 전락한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고 거침없이 그를 모욕하며[㈜ 즉, 풍자적으로 ; 추측된 다른 본문에는 \’그를 조소했다\’\’전쟁사\’에는 \’그를 보고 과도한 웃음이 터졌다\’로 되어 있다.] 그를 안티고네라고 불렀다.[㈜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이름의 여성형.] 그렇다고 여인들 대하듯이 풀어 놓아준 것도 아니었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감금시켰다.



3. 헤롯이 로마군의 폭력을 억제함



  적을 다스린 후에 헤롯은 외국 동맹군들을 다스리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이방인 떼거리들이 돌아다니며 성전을구경하고 성소의 성물들을 보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무력을 쓰면서까지 진정시키려 하였다. 그는 만약 그들이 보아서는 안될 물건들을 보게 되는 날이면 기껏 승리한 것이 패배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헤롯은 끊임없이 도시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약탈을 막으려고 애쓰면서, 만약 로마병사들이 이 도시에서 재산과 사람들을 약탈하고 살해한다면 자기는 페허의 왕되어 버릴 수밖에 없으며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별볼일없는 왕이 된다면 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이냐고 소시우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소시우스는 이 오랜 포위공격의 수고와 댓가로약탈을 허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헤롯은 그들 모두에게 자기 주머니에서 보상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그는 나머지 도시의 안전을 돈으로 살 수 있었고 자기의 약속을다 지켰다. 그는 모든 병사들에게 훌륭한 선물을 주었고 장교들에게도 그에 걸맞는 선물을 주고 소시우스에게는 왕에 해당하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한 아름씩 재물을 안고 돌아갔다.



 4. 하스모네안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안티고누스가 처형됨



  [㈜ 소시우스(Sossius)가 금사슬을 헌납한 것에 대해 16 : 4(488)에서 진술한 것과 그가 형벌을 주기 위해 안토니에게 안티고누스를 데려간 것도 제외하고<=전쟁. 1권. 18 : 3(357)>, \’고대사\’에 있는 이 마지막 단락은 \’전쟁사\’에는 병행구가 없다.]



  예루살렘 성이 겪는 이 재난은 마르쿠스 아그립바(MarcusAgrippa)와 카니니우스[㈜ 이름은 약간 수정되었다.] 갈루스(Caninius Gallus)가 로마의집정관으로[㈜ 그들의 집정관직은 주전 37년에 없어졌다. 제185회 올림피아드(Olympiad)는 주전 37년 6월 30일에 끝난다. Dio Cassius, xlix. 22는 글라우디오(Claudius)와 노르바누스(Norbanus)가 집정관으로 있을 때의 도시 함락 날짜로 계산한다(준전 38년). 다음의 주를 보라.] 있을 때, 제 185회 올림피아드 3월 금식일이었다.마치 폼페이 통치시대에 유대인에게 닥쳤던 불행이 주기적으로돌아온 것 같았다. 왜냐하면 27년이 지난 바로 이날 소시우스에게 모두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26년간 이상. 주 729를 보라. 그리고 주전 63년에 폼페이(Pompey)를 점령한 것에 대해 4 : 3(66)을 보라. Dio Cassius는 이곳에서 안식일을 의미하는 게 확실하다고 한다(톨레미 I세의 경우처럼). 참). 고대. 12권. 1 : 1(4)와 Pompey(\’) (66)의 주  ; 그러나 nhsteiva\”는 요세푸스는 속죄의 날(the Day of Atoement)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는 주전 37년 10월 3일이다. 도시의 함락의 실제 날짜에 대한 생각 길은 논의가 있었으며 다양한 시도들이 혼동되는 날짜를 조정할 수 있다 ; Schurer, I. 358, 주 11, Otto, \’Herodes\’, p.33, 주 2, Zeitlin, \’MT\’, pp.20-27, Laqueur, pp.211-212와 Kugler, pp.418-422에 상세한 논의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전 37넌은 확실한데 달은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7월로 생각되며 10월은 아니다. 전자는 오토(Otto)와 함께 우리가 생각했었던 것과 더 유사할 것이다. 이는 속죄의 날에 대한 언급<만약 nhsyeiva\”가 여기서 달력상의 금식의 날을 의미하며 이전의 금식의 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예를 들면 담무즈 달의 금식>은 아주 성스러운 속죄의 날에 도시를 침입한 것에 대해 그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서 헤롯을 불신임하려고 한 유명한 전승에 근거하고 있다.] 소시우스는 금관을 하느님께 바친 후에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안티고누스를 사슬에 묶어 안토니에게 끌고 갔다.[㈜ 안토니는 주전 37년 가을에 헬라(Greece)로 향하려고 이달리야(Italy)를 떠났었다. 그리고 곧 안디옥(Antioch)으로 갔다. 안티고누스가 그해 겨울에 그에게로 데려온 곳이 여기이다. 참). \’PW\’, I, 2420에 나오는 Wilcken의 글과 \’CAH\’, x.54-55에 나오는 Tarn의 글을 보라.] 그러나 헤롯은 안티고누스가 안토니에게잡혀있다가 로마에까지 가게되면 원로원에 나가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헤롯이 평민일 때 자기는 왕의 혈통을 잇고 있었음을 밝히면서 비록 그가 로마에 대적한 적이 있긴 했지만[㈜ 헤롯은 그들이 주전 40년에 했던 것처럼 하스모네아인들이 자기를 계속적으로 좋아할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386)을 보라.] 그의아들이 혈통에 따라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할까두려웠다. 이런 염려 때문에 헤롯은 안토니에게 막대한 뇌물을주어 안티고누스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전쟁. 1권. (357)은 안티고누스가 도끼로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Dio Cassius, xlix. 22에 의하면 안토니는 \’로마인들의 손에 다른 왕이 당하지 않았던\’ 형벌인 십자가에 다는 하늘의 응징을 안티고누스에게 주고 그런 후 그를 참수하거나 목을 자른다.] 일이 이렇게 끝나자 비로소 헤롯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게 되었고 동시에 하스모네안 왕가의 통치는 126년만에 끝나게 되었다.[㈜ 이것은 주전 163년 또는 162년으로 돌아가게 한다. 요세푸스는 마지막 오니아드(Oniad) 대제사장 오니아스 Ⅳ세(Onias Ⅳ)가 애굽으로 달아날 때쯤 하스모네아 왕조가 위치하는 곳을 지적하는 곳이 분명하다. 참). 고대. 13권. (385-388).] 이 왕가는 그설립자들이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왕족의 혈통과 제사장 직책을 맡았다는 점으로 해서 매우 훌륭하고 이름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집안 싸움으로 인해 왕권을 잃고헤롯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헤롯은 안티파테르의 아들로서 평민출신으로 왕들[㈜ 참). 고대. 14권. 4 : 5(78)을 보라.]에게 복종하던 집안의 자식이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하스모네안 왕조의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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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권 제 16장 헤롯이 마리암메와 결혼하고 소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과 하스모네안 왕조가 종말을 맞게된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6 장


    헤롯이 마리암메와 결혼하고 소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과 하스모네안 왕조가 종말을 맞게된 것에 대하여


     1. 소시우스와 헤롯이 세력을 합함


      헤롯이 결혼식이 끝난 후, 소시우스는 먼저 내륙지방으로 부대를 보내고 자신은 베니게를 경유하여 수많은 기병과 보병을거느리고 왔다.[㈜ 본문은 어색하며 와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그러나 ‘전쟁사’의 병행구를 볼 때 ‘장군’이 소시우스(Sossius)라는 것은 분명하다.] 헤롯왕도 이미 거느리고 있던 병력에다가 더많은 군대를 더하여 그들을 이끌고 사마리아에 올라왔는데 그수가 약 30,000명이었다.[㈜ 전쟁. 은 헤롯 부하들의 숫자는 없다.] 이 모든 병력들이 예루살렘 성벽앞에 모여 도시북쪽 성벽에 자리를 잡았다. 수리아에서 온 원군까지 합하여 보병 11개 군단과 기병 6,000명의 병력이었다.[㈜ 전쟁. 은 ‘(자기 군대의 )작은 부분도 형성하지 못한’을 첨가한다.] 이들의 지휘관은 안토니의 명을 받아 동맹군을 이끌고 온 소시우스와 헤롯이었는데, 헤롯은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어 버린 안티고누스에게서 왕권을 빼앗고,[㈜ 전쟁. 1권. (346)의 병행구에서는 안티고누스에 대해 언급이 없다.] 원로원의 결정을 따라 그대신 왕위에 오르려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2. 포위된 자들의 교묘함과 용맹함


      예루살렘 성벽안에 갇힌[㈜ 다른 ‘남겨둔,”잡아둔’.] 유대인들이[㈜ 다른 본문에는 ‘군중’또는 ‘대중’.] 헤롯과 그의 일당에대항하여 싸우는 모습은 온 백성들이 함께 모였기 때문에 참으로 대단한 열정과 고통이었다.[㈜ ‘열정과 비통’대신에, 전쟁.에는 도시안에 있는 사람들의 ‘동요'(ejtetavrakto)를 말한다.] 성전을 지켜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으며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발췌본에는 동일 ; 사본들에는 ‘~을 칭찬하는’. 본문은 다소 모호하다. 그러나 ‘전쟁사’에서(메시야적) 예언자들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느님이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주실 것이라는 예언들도 많았다. 그리고 포위당한 유대인들은 성밖의 모든 것들은[㈜ 발췌문과 라틴어는 동일(‘전쟁사’와도 일치) ; 사본들에는 ‘도시안에 있는 모든 것’.] 성안으로 모두 운반해 놓아 적이나 짐승들의 식량으로 쓸만한 것은 하나도남겨놓지 않았으며 기습공격을 시도해 식량이 부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음의 단락에서 몇 개의 투키디데스의 어조가 있다.<단지 전쟁. 1권. 18 : 1, 2(348-351)에 있는 부분적인 병해구들 만에서> : (475)에 있는 ajntetevicxou와  ajponoiva와 (479)에 나오는 (ajntivpalon)] 헤롯은 이런 일들을 보고서, 적이 기습할만한 장소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기습공격에 대비하도록 하고 멀리까지 군사들을 보내 물자를 모으도록 하여 금새 충분한 양식을 비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헤롯은 곧이어 세 개의 토성을 쉽게 쌓을수 있었는데 이는 계속[㈜ 본문은 약간 수정됨.] 일할 수 있는 인력이 충분했고 또 여름이었기 때문에[㈜ 주전 37년의 <고대. 1권. (487, 488)을 보라>. 헤롯과 소시우스는 (465)에 의하면 주전 37년 봄까지 예루살렘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 사항은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을 쌓는데 기후나 노동력에 장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성장비를 끌고와서 성벽에 돌을 날려 때렸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며 애를 썼으나, 그것으로는 성안에 있는 자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성안에 포위된 자들은적을 막는 온갖 방법을 나름대로 강구하며 대항하였다. 그들은밖으로 뛰어나와 아직 완성되지 못한 토성과 다 완성된 토성들에다 불을 지르면서 일일이 맞서 싸웠는데, 비록 과학적인 면에서는 뒤떨어졌지만 대담성에 있어서는 로마군에게 조금도뒤지지 않았다. 그들은 성벽이 무너졌을 때 공성 장비에 맞서기 위해 방어책을 만들기도 하고 지하굴속에서 적을 만나 그속에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들은 밝은 전망이 아닌 절망 속에서도 싸웠고 전쟁이 끝나는 그 마지막까지 견디었다. 그들은 엄청난 수의 적들에 포위당하고 바로 그때가 안식년이었기 때문에 기근과 생필품의 부족으로 고통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적과 대항하였다.[㈜ 이것은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사항이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공격이 안식년 즉 주전 38년 10월에서 37년 10월까지 동안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모든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식년이 주전 37년 10월에서 36년 10월까지라는 것을 믿을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고대. 12권. (378), 13권. (234), 14권. (201)과 (487)의 주를 보라>. 그러므로 다음의 세 가지 가정 중에 하나를 취해야만 한다 ; (1) 요세푸스는 공격이 주전 37년 여름에 있었다고 이라고 있다. 그러나 안식년(주전 38년 10월에 시작)에 함락됐다고 말하는 (의미하는)것은 실수였다. (2) 요세푸스는 공격이 안식년 주전 36년 여름 동안 있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소시우스(Sossius)와 헤롯이 폼페이(Pompey)가 그렇게 했었던(주전 63년)이후 28년만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고대. 14권. 16 : 4(488)의 진술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 이렇게 예루살렘은 주전 36년에 함락되었다. 이는 굼파흐(Gumpach)와 카스파리(Caspari)(Schurer, I. 358, 주 11과 함께)의 지지를 받고 있다. 자이틀린(Zeitlin)의 주장은, ‘MT’, pp.20-2를 보라. 여기에는 27년간은 주전 36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전 37년 1월(티벳월 10일)을 말한다고 한다. 이는 26년간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주전 63년 여름의 폼페이 침입의 단편은 16 :2(473)에 여름을 언급하는 다른 것들로 인해 쓸모없어졌다고 한다. (3) 요세푸스가 공격이 주전 37년 여름에 있었다고 알고 있으면서 다소 모호하게 예루살렘 함락 이후, 즉 주전 37년 10월에 곧 시작한 안식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첫 번째 보았던 것보다 그렇게 불가능하게 보이질 않는다. 만약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주전 37년 여름에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면 그들은 10월에 시작하는 안식년의 후반부를 위해 여분의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보면 16 : 4(488)의 27년간은 어렵게 된다. 또한 요세푸스가 수학적인 실수를 했다고 추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성벽을 넘은 자들은 20명의[㈜ 전쟁. 에는 숫자가 없다.] 정예병사들이었고 뒤이어 소시우스의 백부장들이 넘었다.첫 번째 성벽은 40일만에[㈜ 이 사항과 16 : 2(476-478)에 있는 사항은 전쟁. 에는 병행구가 없다.] 함락되었고 두 번째 성벽은 15일 걸렸다. 성전을 두르고 있던 회랑의 일부가 불에 탔는데, 헤롯은 안티고누스가 불을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티고누스를 유대인의 미움을 사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Laqueur, pp.213-214는 두개의 첨가된 단락에 있는 유사하게 보이는 반 헤롯적인(Anti-Herodian) 사항은 실로 요세푸스의 자료 즉 헤롯의 실고(Memoirs)의 친헤롯적인 편견을 감추고 있다.] 성전의외곽뜰과 예루살렘 하부도시가 함락되자 유대인들은 성전의 안뜰과 상부도시로[㈜ 상부 도시(The Upper City)는 서쪽 언덕에 있다.] 달아났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이 하느님께 매일 희생제사 드리는 것을 방해할까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제사에 쓸 희생짐승을 들여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헤롯은 그들이 곧 항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되어지리라고 기대했던 일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유대인들이 안티고누스의 왕위를 지키려고 결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보고, 헤롯은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성을 폭풍같이 쓸고 가듯이 함락시켰다. 진지마다 죽은 자들의 시체로 뒤덮였는데,[㈜ 이곳에서는 ‘전쟁사’와 함께 근접한 병행구를 요약하고 있다. (479-486)=전쟁. 1권. (351-356).] 이는 오랜 포위공격으로[㈜ 전쟁. 1권.(351)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제 5월에 공격받음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 (487)은 제 3월(공격의)이거나 그보다 이전에 (476)을 보라. 도시가 함락됐다고 진술하고 있다 ; 그러나 ‘제 3월’의 ‘고대사’ 언급 시점은 결코 확실치 않다.] 로마군인들이 분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헤롯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반대세력인 안티고누스의 지지자들을 단 한명도 살려두지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골목이거나 집이거나 혹은 성전안에 숨으려 한 경우라도 함께 모여있던 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해 산더미같이 쌓였다. 어린이나 노인들, 그리고 약한 여인들이라고 동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헤롯왕이 명령을 내려 진정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자기의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사람처럼 아무나 닥치는 대로 칼을 내리쳤다. 바로 그때 안티고누스가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모습을 돌아볼 새도 없이 성에서 뛰어내려와 소시우스의 발밑에 엎드렸다. 그러나 소시우스는 그의 전락한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고 거침없이 그를 모욕하며[㈜ 즉, 풍자적으로 ; 추측된 다른 본문에는 ‘그를 조소했다”전쟁사’에는 ‘그를 보고 과도한 웃음이 터졌다’로 되어 있다.] 그를 안티고네라고 불렀다.[㈜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이름의 여성형.] 그렇다고 여인들 대하듯이 풀어 놓아준 것도 아니었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감금시켰다.


    3. 헤롯이 로마군의 폭력을 억제함


      적을 다스린 후에 헤롯은 외국 동맹군들을 다스리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이방인 떼거리들이 돌아다니며 성전을구경하고 성소의 성물들을 보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무력을 쓰면서까지 진정시키려 하였다. 그는 만약 그들이 보아서는 안될 물건들을 보게 되는 날이면 기껏 승리한 것이 패배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헤롯은 끊임없이 도시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약탈을 막으려고 애쓰면서, 만약 로마병사들이 이 도시에서 재산과 사람들을 약탈하고 살해한다면 자기는 페허의 왕되어 버릴 수밖에 없으며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별볼일없는 왕이 된다면 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이냐고 소시우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소시우스는 이 오랜 포위공격의 수고와 댓가로약탈을 허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헤롯은 그들 모두에게 자기 주머니에서 보상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그는 나머지 도시의 안전을 돈으로 살 수 있었고 자기의 약속을다 지켰다. 그는 모든 병사들에게 훌륭한 선물을 주었고 장교들에게도 그에 걸맞는 선물을 주고 소시우스에게는 왕에 해당하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한 아름씩 재물을 안고 돌아갔다.


     4. 하스모네안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안티고누스가 처형됨


      [㈜ 소시우스(Sossius)가 금사슬을 헌납한 것에 대해 16 : 4(488)에서 진술한 것과 그가 형벌을 주기 위해 안토니에게 안티고누스를 데려간 것도 제외하고<=전쟁. 1권. 18 : 3(357)>, ‘고대사’에 있는 이 마지막 단락은 ‘전쟁사’에는 병행구가 없다.]


      예루살렘 성이 겪는 이 재난은 마르쿠스 아그립바(MarcusAgrippa)와 카니니우스[㈜ 이름은 약간 수정되었다.] 갈루스(Caninius Gallus)가 로마의집정관으로[㈜ 그들의 집정관직은 주전 37년에 없어졌다. 제185회 올림피아드(Olympiad)는 주전 37년 6월 30일에 끝난다. Dio Cassius, xlix. 22는 글라우디오(Claudius)와 노르바누스(Norbanus)가 집정관으로 있을 때의 도시 함락 날짜로 계산한다(준전 38년). 다음의 주를 보라.] 있을 때, 제 185회 올림피아드 3월 금식일이었다.마치 폼페이 통치시대에 유대인에게 닥쳤던 불행이 주기적으로돌아온 것 같았다. 왜냐하면 27년이 지난 바로 이날 소시우스에게 모두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26년간 이상. 주 729를 보라. 그리고 주전 63년에 폼페이(Pompey)를 점령한 것에 대해 4 : 3(66)을 보라. Dio Cassius는 이곳에서 안식일을 의미하는 게 확실하다고 한다(톨레미 I세의 경우처럼). 참). 고대. 12권. 1 : 1(4)와 Pompey(‘) (66)의 주  ; 그러나 nhsteiva”는 요세푸스는 속죄의 날(the Day of Atoement)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는 주전 37년 10월 3일이다. 도시의 함락의 실제 날짜에 대한 생각 길은 논의가 있었으며 다양한 시도들이 혼동되는 날짜를 조정할 수 있다 ; Schurer, I. 358, 주 11, Otto, ‘Herodes’, p.33, 주 2, Zeitlin, ‘MT’, pp.20-27, Laqueur, pp.211-212와 Kugler, pp.418-422에 상세한 논의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전 37넌은 확실한데 달은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7월로 생각되며 10월은 아니다. 전자는 오토(Otto)와 함께 우리가 생각했었던 것과 더 유사할 것이다. 이는 속죄의 날에 대한 언급<만약 nhsyeiva”가 여기서 달력상의 금식의 날을 의미하며 이전의 금식의 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예를 들면 담무즈 달의 금식>은 아주 성스러운 속죄의 날에 도시를 침입한 것에 대해 그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서 헤롯을 불신임하려고 한 유명한 전승에 근거하고 있다.] 소시우스는 금관을 하느님께 바친 후에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안티고누스를 사슬에 묶어 안토니에게 끌고 갔다.[㈜ 안토니는 주전 37년 가을에 헬라(Greece)로 향하려고 이달리야(Italy)를 떠났었다. 그리고 곧 안디옥(Antioch)으로 갔다. 안티고누스가 그해 겨울에 그에게로 데려온 곳이 여기이다. 참). ‘PW’, I, 2420에 나오는 Wilcken의 글과 ‘CAH’, x.54-55에 나오는 Tarn의 글을 보라.] 그러나 헤롯은 안티고누스가 안토니에게잡혀있다가 로마에까지 가게되면 원로원에 나가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헤롯이 평민일 때 자기는 왕의 혈통을 잇고 있었음을 밝히면서 비록 그가 로마에 대적한 적이 있긴 했지만[㈜ 헤롯은 그들이 주전 40년에 했던 것처럼 하스모네아인들이 자기를 계속적으로 좋아할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386)을 보라.] 그의아들이 혈통에 따라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할까두려웠다. 이런 염려 때문에 헤롯은 안토니에게 막대한 뇌물을주어 안티고누스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전쟁. 1권. (357)은 안티고누스가 도끼로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Dio Cassius, xlix. 22에 의하면 안토니는 ‘로마인들의 손에 다른 왕이 당하지 않았던’ 형벌인 십자가에 다는 하늘의 응징을 안티고누스에게 주고 그런 후 그를 참수하거나 목을 자른다.] 일이 이렇게 끝나자 비로소 헤롯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게 되었고 동시에 하스모네안 왕가의 통치는 126년만에 끝나게 되었다.[㈜ 이것은 주전 163년 또는 162년으로 돌아가게 한다. 요세푸스는 마지막 오니아드(Oniad) 대제사장 오니아스 Ⅳ세(Onias Ⅳ)가 애굽으로 달아날 때쯤 하스모네아 왕조가 위치하는 곳을 지적하는 곳이 분명하다. 참). 고대. 13권. (385-388).] 이 왕가는 그설립자들이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왕족의 혈통과 제사장 직책을 맡았다는 점으로 해서 매우 훌륭하고 이름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집안 싸움으로 인해 왕권을 잃고헤롯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헤롯은 안티파테르의 아들로서 평민출신으로 왕들[㈜ 참). 고대. 14권. 4 : 5(78)을 보라.]에게 복종하던 집안의 자식이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하스모네안 왕조의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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