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권 제 10장 헤롯이 자기 아들들을 로마에 보내게 된 경위와 또한 제노도루스와 가다라인들이 그를 가이사에게 고소하였으나 고소된 사실에 혐의가 없음이 명백하여 가이사의 호의를 얻게 된 것에 대하여, 또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마나헴에 대하여

 


제 10 장




헤롯이 자기 아들들을 로마에 보내게 된 경위와 또한 제노도루스와 가다라인들이 그를 가이사에게 고소하였으나 고소된 사실에 혐의가 없음이 명백하여 가이사의 호의를 얻게 된 것에 대하여, 또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마나헴에 대하여




1. 헤롯이 그의 아들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로마에 보내다. 아구스도가 그에게 요르단을 가로지르는 북부지역을 소유지로 주다




  [㈜ 10장에서는 단지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만이 \’유대 전쟁사\’에 병행구절을 지니고 있다. 고대. 15권. 10 : 1(344)는 전쟁. 1권. 20 : 4(398)의 병행 구절이며, 고대. 15권. 10 :3(360-364)는 전쟁. 1권. 20 : 4(399)에서 21 : 1-3(406)까지 병행구절이다.]




  이 무렵, 헤롯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를[㈜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손녀인 마리암메( I 세)에게서 낳은 그의 아들들.] 로마에 보내 가이사를 알현하게 하고, 이미 세워진 도시 세바스테(Sebaste)에 대해 알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폴리오(Polio)의[㈜ 추측컨대 그는 주전 40년 경의 집정관이었던 아시니우스 폴리오(C. Asinius Pollio)였을 것이다. 버질(Virgel)은 그에게 그의 네 번째 발시(Fourth Epilogue)를 봉헌했다. 이방인 지지자로서 폴리오가 나타낸 유대주의에 대한 상당한 관심에 대해서는 \’TAPA\’ 84(1953), 73-80에 나오는 Louis H. Feldman의 글 \”Asinius Pollio and his Jewish Interests\”를 보라.] 집에 머물렀는데, 그는 자신이 헤롯의 가장 헌신적인 친구들 중의 하나라고 공언했다. 가이사는 그 소년들을 크게 환대하며 영접하고 그와 함께 머물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는 또한 헤롯에게 그가 원한다면 그의 아들 중 하나가 그의 왕국을 소유하도록 보장하겠노라고 확답했다. 그리고 추가로 가이사는 헤롯에게 드라고닛(Trachonitis),[㈜ 갈릴리 바다의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 바타나이아(Batanaea)[㈜ 드라고닛(Trachonitis)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역.] 그리고 아우라니티스(Auranitis)[㈜ 바타나이아(Batanaea)의 동쪽이자 드라고닛의 남쪽에 위치한 구릉 지역. 이 세 지역을 합하면 야르묵(Yarmuk)강의 동부와 북부, 즉 요단강 인근지역인 성경의 바산과 길르앗 지방을 이룬다. Dussaud의 글, 6장 p.323을 보라.] 지역을 영토로 주었다. 헤롯은 다음과 같은이유 때문에 이 지역을 인계받았다.[㈜ 다른 본문에는 \”그가 인수 받았던\”이란 말은 나와 있지 않다.]

  제노도루스(Zenodoru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라사니아스(Lysanias)[㈜ 레바논에 있는 갈기스 혹은 이두래 지방의 통치자<고대. 14권. 13 : 3(330-332)>.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사주를 받은 마르크 안토니에 의해 살해 당하였다<고대. 15권. 4 : 1(92), 전쟁. 1권.22 : 3(440)>. 제노도루스의 동전에는 전설과 함께 \”분봉왕이며 대제사장인 제노도루스\”가 새겨있다. Schurer의 I : 714-716을 보라 .Schurer에 대해 Otto는 p.72 주에서 제노도루스는 루사니아스의 영토에서 모두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지에서만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안을 차가(借家)하였었다. 고용된 리사니아스는 만족할 만한 수입이 못되자 드라고닛에 거주하는 도적떼와한 통속이 되어 수입을 늘렸다. 드라고닛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은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고, 다메섹 지역의 영토를 약탈하였다.제노도루스는 그들을 금지시키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소득을 나누어 가졌다. 그 근처 주민들은 타격이 심하자 그들의 통치자인[㈜ 몇몇 왕들은 확실치 않다. 쉬러(Schurer) I : 319-320을 참조하라.] 바로(Varro)에게 항의하였고, 제노도루스의 범죄를 가이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 보고서가 가이사에게 보내졌을 때 가이사는 바로에게 서신을 써보냈는데, 그 내용은 도적떼를 축출한 후에 헤롯에게 그 영토를 양도하여 인근주민들이 성가신 일을 당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약탈 행위를 습관적으로 일삼고 살아가며 어떠한 다른 삶의 방법도 없는이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그들은 그들 소유의 도시나 토지가 전혀 없었고 단지 땅 밑의 은신처나 동굴 정도가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그들의 가축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필요한 물과 음식을 수중에 비축하고 있어서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비밀 은신처에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통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 동굴의 입구는 비좁아 한번에 한 사람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에 내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방이 충분하게 마련되어 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거주지위의 땅은 높지 않고, 대개 주변 표면이 평평했다. 그러나 전체지형이 바위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칠거칠하고, 길은 인도하는안내자가 없으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거기다 길들을 직선으로 곧게 뻗은 것이 아니고, 꼬불꼬불하고 여러 방향으로 꺾여져 있는 길이었다. 이 도적떼들은 인근 주민들을 약탈하는 것이 막혔을 때, 자기들끼리 도적질하는 것이 의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무법 천지의 세계였다. 그러나 헤롯이 가이사의 위임을받고 경험이 많은 안내자를 대동하여 도적떼들의 지역에 다다랐을 때, 헤롯은 이들의 약탈 행위를 근절시키고 인근 주민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주었다.




2. 아랍인들이 헤롯의 새로 점령한 영토의 일부를 침략하다




  그러나 제노도루스(Zenodorus)는 자신의 통치 지역(epar-chy)을[㈜ 본문은 4두정치(tetrarchy)와 동의어로 쓰임, 위의 주 319를 보라.] 잃게 된 것에 대해 화가 났고, 헤롯이 그 지역을 차지하게 된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노도루스는 다시그 지역의 권한을 회복하기 위해 로마로 갔지만, 아무런 성과도얻지 못하고 되돌아 오고 말았다. 바로 그 때 아그립바(Agr-ippa)가[㈜ 아구스도의 부왕이자 의붓형제였던 빕사니우스 아그립바(M. Vipsanius Agrippa). 그가 헤롯과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었던 호의에 관하여는 고대. 12권. 3 : 2(125), 16권. 2 : 3(27) 이하를 보라.] 가이사의 대리자로서[㈜ 그는 총독의 명령(proconsulare imperium)을 받았다. Meyer Reinhold의 \’Marcus Agrippa\'(제네바, 뉴욕, 1933) p.83을 보라.] 이오니아 해(Ionian Sea)에속한 나라들을 다스리기 위해 파송되었다. 아그립바가 미티레네(Mitylene)에서[㈜ 레스보스(Lesbos)의 섬에 있는 지역. 헤롯이 아그립바를 방문했던 것은 주전 22-21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주전 23-22년에 있었던 일일 것으로 추정된다. Reinhold, 상게서.p.84, 각주 47.]  겨울을 보내기 위해 왔을 때, 아그립바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헤롯이 아그립바를 만나기 위해 미티레네에 왔다가 유대로 돌아갔다.

  가다라인들(Gadarenes),[㈜ 위의 7 : 3(217)을 참조하라.] 몇 명이 헤롯에게 불만을 품고 아그립바에게 왔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그들의 얘기를 청취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헤롯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할 것을 명령하여 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헤롯의 통치에 예전부터 반감을 갖고 있던 아랍인들(Arabs)이 흥분하여 헤롯의 권위에 반역을 일으킬 시도를 하였다. 아랍인들은 이것을 매우 이성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헤롯 격하 운동의 실패로 실망 중에 있던제노도루스는 그의 통치 영역의 일부인, 주로 아우라니티스(Auranitis) 땅을 50달란트를 받고 아랍인들에게 서둘러서 팔았다. 그러나 이 땅은 가이사가 헤롯에게 수여한 땅 중에 포함된것이었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그 땅을 박탈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아랍인들은 또한 가난하고 적대감을 가진 병사들을 일으켜 헤롯에게 대항하도록 하였고, 항상 혁명을 일으키려는 희망에젖어 있었다.[㈜  ejpelpivxein은 투키디데스가 사용한 단어이다.] 그래서 특별히 생활이 극도로 열악한 이들이 여기에 적극 동참했다. 이런 일이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일임을 헤롯이 알고 있었지만, 당장에 격퇴하려는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랍인들을 부드럽게 무마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헤롯은 혼란의 원인을 아랍인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3. 아구스도가 유대를 방문하여, 가다라인들에 의해 고발된 헤롯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해 헤롯의 책임을 면제하다




  헤롯이 재위한지 17년이 되던 해에 가이사가 수리아에 왔다.[㈜ 헤롯이 왕이 된지 17년째가 되는 해는 주전 21-20년이었다. Dio Cassius, 1iv. 7에는 주전 20년에 요세푸스의 날을 정하는 M. Apuleius와 P. Silius의 사절로 수리아에 아구스도가 방문한 것이 나온다.] 가다라에 사는 대다수의 주민들은 헤롯이 매우 매정하고 압제적인 통치자라고 하였다. 감히 이런 비난을 아랍인들이 헤롯에게가한 이유는 제노도루스가 특별히 헤롯에 반대하는 고발을 계속해서 하고 있고, 또한 제노도루스가 헤롯의 왕국에 자신과 아랍인들을 귀속시키지 않게 하려는 노력과 그 영토를 가이사의 통치권 안으로[㈜ 본문의 내용이 다소 불확실하다.] 합병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런 제노도루스의 확실한 행동에 설득되어 가다라인들이 크게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다라인들은 아그립바가 처벌하라고 헤롯에게 보낸 죄수들을 헤롯이 처벌하지 않자, 이를 빌미로 더욱대담하게 소란을 일으켰다. 실제로 헤롯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다스렸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외국인에 대하여서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헤롯이 자신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자신을 약탈했으며 신전들을 파괴했다고헤롯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침착하게 스스로를 신속히 방어하였고, 군중들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는 여전히 우정으로 헤롯을 맞이하였으며 헤롯에 대한 선의적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첫째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성토가 있었지만, 다음날까지 조사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가다라인들은 가이사나 가이사의 의회원들 모두가 그에 대한 조사를 중지시키려 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이 헤롯왕에게 넘겨져 학대받는 존재가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그들 중 몇 명은 밤중에 혀를 끊어자결하고 어떤 이들은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 죽고 혹은 강[㈜ 아마도 야르묵 강(Yarmuk Rever)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으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그들의 이런 무분별함과 죄가 유죄판결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가이사는 지체없이 헤롯에게 지워졌던 책임을 사면시켰다. 이와 함께 본질적으로 더 좋은 행운의 기회가 헤롯에게 찾아왔다. 제노도루스가 장 파열로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수리아(Syria)의 안디옥(Antioch)에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구스도가 제노도루스의 영토를 헤롯에게 주다]




 그러므로 가이사는 적지 않은 제노도루스의 영토를 헤롯에게 주었다. 가이사가 하사한 영토는 드라고닛(Trachonitis)과 갈릴리(Galilee)사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울라다(Ulatha)와[㈜ 메롬(Meron) 호수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 탈무드에는 이 지역이 Holthah로 나와 있는데, 오늘날의 훌레(\’uleh).] 파네아스(Paneas)와[㈜ 훌레의 동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바니야스(Baniyas). 요단강의 근원지와 훗날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아구스도가 헤롯에게 제노도루스(Zenodorus)지역을 봉토로 주었던 사실이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1iv. 9)에 의하여 기록되어 있다.] 주변의 나라를 포함하고 있었다. 가이사는또한 헤롯을 수리아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전쟁 1권. 20 : 4(399)에 의하면 아구스도는 헤롯을 \”수리아 전 지역의 행정 장관\”으로 임명하였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수리아 전지역\'(All Syria)이란 말을 코엘레수리아\'(Coele-Syria)로 바꾸지 않는 한 과장된 표현일 것으로 생각된다. Ottodmlcor p.74의 주를 보라.] 수리아인들이 모든 행동을 할 때 헤롯의 승낙을 얻고 실행하도록 하게 하였다.요컨대 헤롯은 로마제국의 강력한 두 사람인 가이사와 아그립바와 마찬가지로 굉장한 행운의 최고점에 이르게 되었다. 헤롯은 이 두사람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가이사는 헤롯보다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이 아그립바 외에는 없었고, 아그립바도 헤롯보다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이 가이사 밖에는 없었다. 헤롯은 그의 동생페로라스(Pheroras)를 그 지역[㈜ 전쟁. 1권. 24 : 5(483)에 의하면 요단강 인근 지역인 페라이아(Peraea).]의 분봉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헤롯은 자신의 나라에서 거둬들이는 세입의 100달란트를 페로라스에게 할당하겠다고 하였다. 만약 헤롯 자신이 죽더라도 페로라스의 지위를 안전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들이 분봉왕의 지위를 가로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헤롯이 바다까지 가이사를 수행하여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헤롯은 파네이온(Paneion)이라[㈜ 이 신전은 훗날 이 지역의 영주가 되었던 헤롯의 아들 빌립이 동전에 새겨 놓았던 바로 그 신전을 가리킨다. G. F. Hill의 \’Catalogue of the GreekConis of Palestine\'(런던, 1914(, Plate 24 혹은 Reifenberg의 \’Ancient Jewish Coins\'(예루살렘, 1947), Plate 4, Nr. 43을 보라.] 불리는 지역 근처의 제노도루스영토 안에 흰 돌로 매우 아름다운 신전을 가이사를 위해 세웠다. 거기 산 위에는 아름다운 동굴이 있고, 그 땅 밑에는 가파르게 경사져 있어서 가까이 가기 어렵게 깊었다.  그 깊은 곳에는[㈜ 다른 본문에는 \”밝혀지지 않은\”으로 나와 있다. \’유대전쟁사\’에는 \”측량할 수 없는\”으로 나와 있다. 이 지점에 관하여 더 상세한 설명을 원하거든 전쟁. 3권. 10 : 7(509-515)를 참조하라.] 물이 가득차 있다. 반면에 그 위로는 굉장히 높은 산이[㈜ 헐몬산(Mt. Hermon).] 있다. 이 동굴 밑에서 요단강의 물이 발원하여 흘렀다. 헤롯은 이 축복받은 장소에 신전을 세운 후 더 많은 장식을 하여 가이사에게 바쳤다.




  4. 헤롯이 그의 부하들의 반란을 막기 시작하다




  이 때에[㈜ 주전 약 20년. 위에 나오는 고대. 15권. 10 :3(354)를 보라.] 곡식이 부족하게 되자 헤롯은 백성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세금을 삼분의 일로 감축하였다. 그러나 세금 감축의보다 중요한 실제적인 이유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어 보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유대인들(백성들)은 그들의 관습을 소멸시키고 그들의 종교를 와해시키는 수단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화정책에 분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백성 모두에게 토론거리가 되었다. 백성들은 어느 곳에서나 헤롯에 반대하는 얘기를 나누었고, 헤롯의 이방 풍습을 도입하는 절차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헤롯은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백성들이 동요를 일으키려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고, 모든 시간을 자신들의 일에 집중하도록 지시했다. 시민들이 모임을 갖는 것도 금지되었고, 함께 길을 걷는 것과 함께 모여있는 것까지도 금지되었다. 바로 백성들의 모든 수단과 모든생활을 감시하였던 것이다. 붙잡힌 사람들은 엄격하게 처벌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검거되었고, 힐카니아(Hyrcania)의[㈜ 오늘날의 \’키르벧 미르드\'(Khirber Mird)로서 예루살렘 남동쪽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 고대. 13권. 16 : 3(417).] 성채에 붙들려 가서 처형되었다. 흔히 도시와 대로변에서 함께 만나는 사람들을 많은 이들이 정탐하였다. 백성들은 말하기를, 헤롯이 이런 감시행동을 지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주 밤을 이용해서 평민의 복장을 입고 스스로 무리들 속에 섞여서 백성들이 그들의 통치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았다고 한다.[㈜ 본문이 다소 불확실하다.] 헤롯은 자기의 새로운 정책에 따르지 않고 완고하게 거절하는 백성들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박해하였다. 또한 나머지 백성들에게 헤롯은 왕권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도록 요구하였고,자신의 법에 우호적인 입장을 계속 지지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하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의 대부분이 고분고분하게 혹은 두려움 때문에라도 헤롯이 강요하는 요구에 응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마땅히 여기거나 반감을 보이는 사람들은 헤롯이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죽였다.

 헤롯은 또한 바리새인인 폴리온(Pollion)과 사마이아스(Sa-maias)를[㈜ 이 사람들에 관하여는 앞에 나오는 고대. 15권. 1 : 1(3)을 보라.] 설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제자들은 거의 다복종서약에 맹세를 하였지만, 이 둘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루이스 긴즈버그(Louis Ginzberg)는 \’무명의 유대 종파(Eine unbekannte judische Sekte) 뉴욕, 1922, 132 각주에서 바리새인들이 맹세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맹세하는 일에 사용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만은 거절했던 다른 사람들이 처벌받은 것처럼 벌을 받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헤롯이 폴리온의 이야기(답변)를 통해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에세네파라고 부르던 종파도 또한 헤롯의 이 명령에서 제외되었다. 이 에세네파는 헬라인들이 피타고라스(Pythoago-ras)[㈜ 요세푸스는 아마도 생각하기로 에세네파의 금욕적이고도 신비적인 모습이 마치 일종의 피타고라스파의 특성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비교는 그가 바리새인들과 스토아 학파를, 그리고 사두개파를 에피쿠로스 학파와 비교했던 것보다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에세테파에게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의 문제점에 관하여는 젤러(E. Zeller)의 \’헬라 철학\’)9Philosphie der Grischen)(제4판) iii, 2 p.307-377을 참조하라. 또한 Isidore Levy  \’La Legende de Pythagore de Grece en Palestine (파리, 1927), \’C. -R. De l\’Acad. d. Inscript. et Belles-Lettres\’, (1930), 99-112에 나오는 f. Cumont의 글 \”Esseniens et Phthagoriciens d\’apreph\”를 보라. 또한 A Sommer의 \’Nouveaux Apercus sur les manuscrits de la mer Morte(파리, 1953), 155-156을 보라.] 학파라고 부르던 이들과 동일한 삶의 양식을 갖고 있는 종파였다. 이 종파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고대. 18권. 1 : 5(18-22)에 있음. 그러나 요세푸스 책에서 에세네(Essenes)파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설명을 얻기 위하여는 전쟁. 2권. 8 : 2-13(119-161)을 볼 것.] 더 자세하게[㈜ 異文에는 \”더 신중하게\”로 되어 있음.] 언급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헤롯이 에세네파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이유와 에세네파에 속한 이들이 보통의 단순한 인간 본성[㈜ 에세네(Essenes)파에 대한 헤롯(Herod)의 관심에 대한 이 진술에도 불구하고 \’Journal of Biblical Literafure\’ 74(1955), 173-181에 나오는 프릿취(C. T. Fritsch)의 \”대헤롯과 쿰란 공동체\”(Herod the Great and the Qumran Community)에서 헤롯(Herod)은 에세네(Essenes)파에 대하여 그렇게 적대적이어서 그들은 사해 북단 가까이에 있는 유대광야(이곳에서 사해 사본이 발견됨)에 있는 쿰란의 그들 본부로 억지로 다메섹으로 이주해야 했다고 지시했다.] 보다 더 높은 고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이유에 대해 적절한 정도의 설명을 하겠다. 이런 설명은 역사를 연구대상 밖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일반적인 견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5. 에세네파에 속한 마나헴이 헤롯에 대해 예언함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으로 마나헴(Mana\’mus, Manahem)이라는[㈜ 히브리어로 \’므나헴(Mena\’em)\’ 루이스 긴즈버그(Louis Ginzberg)는 사후 출판물 \’유대율법과 그 전승\'(On Jewish Law and Lore) (Philadelphia, 1955)에 포함되어 번역되어진 \”유대 역사에 있어서 힐라카의 위치\”(The Place of Halakah in Jewish History)에 대한 히브리어 논문 p.101에서 므나헴(Menahem)은 바리새파의 보수파그룹의 지도자였고 그가 에세네(Essenes)파로 돌아섰을 때 이 관직에서 면직되었다고 한다. 이는 팔레스틴 탈무드(Palestine Talmud)의 해석에 따라서 미쉬나(Mishna)에 나오는 \’메나홑\'(Mena\’ot), 9 : 2에 진술된 대로이다. 므나헴에 대한 다른 랍비전승 자료에 대하여는 클라우스 4. 148을 보라. 그는 므나헴에 대한 탈무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몇 개 진술들은 갈릴리 사람 유다의 아들 므나헴과 헤롯가(家)의 므나헴의 혼동에 기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거의 일세기 후 로마에 대한 반역 무리들을 이끌었다(참). 전쟁. 2권. 17 : 9(443-449)>.]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좋은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전체 삶에 대한 훌륭한 행동양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미래에 대한 선견적 지식을[㈜ 예언이라는 선물은 요세푸스에 의해 다른 에세네(Essenes)파, 예를 들면 아리스토불루스 I(Aristobulus I)와 동시대의 유다라는 사람이 행하게 된다. 고대. 13권. 11 : 2(311)를 볼 것.] 하느님으로부터 얻는다는것이었다. 마나헴은 전에 헤롯이 소년이었을 때, 선생님께[㈜ 추측컨대 이 사람은 헬라어 공부를 가리키는 헤롯(Herod)의 개인 교사였다.] 가고 있는 헤롯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인사를 한 적이있었다. 그러자 소년 헤롯이 저 사람은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나를 놀리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한낱 평범한 시민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마나헴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소년 헤롯의 등을 다독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왕이 될 것이고 이 왕국을 행복하게 다스리게 될 것이다.[㈜ 약간 수정된 본문.] 왜냐하면 네가 하느님께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마나헴에게 인사를 받았다는 것이 너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임을 잊지 마라. 네가 왕이 되어 취할 최선의 자세는 백성들에 대하여서는 온유함이요,하느님에 대하여서는 경건함이니 정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이러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전체 정황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너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귀한 축복의 기회가 주어질것이고 궁극적으로 영광을 얻게 될 것이지만, 너는 정의와 경건을 잊게 될 것이다. 너는 하느님의 경고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너의 생의 종말에 이르러서는 하느님의 진노가 너의 지은 죄들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때 헤롯은 마나헴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년 헤롯은 이런 왕국을 차지하리라고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점점 왕권을 취할 수 있는 존재로 삶이 전개되었고 드디어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헤롯은 권력의 정상에 다다라 마나헴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재위에 있게 되는 기간에 관해 질문했다. 마나헴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마나헴의 침묵 앞에서헤롯은 자신이 십년 내지는 십년보다 더 재위에 올라있을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마나헴은 이십년 혹은 삼십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마나헴은 정해진 기간을 정확하게 한정짓지는 않았다. 이에 헤롯은 이 대답에 지극히 만족하여 절친한 태도로 마나헴을 대하며 물러가도록 하였다. 그 때부터 헤롯은 에세네파라면 누구나 계속하여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독자들에게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났던 사실을 밝혀 놓은 것이다. 에세네파의 많은 사람들이[㈜ 약간 모호한 본문.] 그들의 도덕적인 미덕으로 인해 거룩한 계시에 대한지식을 실제로 하느님으로부터 허락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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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권 제 10장 헤롯이 자기 아들들을 로마에 보내게 된 경위와 또한 제노도루스와 가다라인들이 그를 가이사에게 고소하였으나 고소된 사실에 혐의가 없음이 명백하여 가이사의 호의를 얻게 된 것에 대하여, 또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마나헴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0 장


    헤롯이 자기 아들들을 로마에 보내게 된 경위와 또한 제노도루스와 가다라인들이 그를 가이사에게 고소하였으나 고소된 사실에 혐의가 없음이 명백하여 가이사의 호의를 얻게 된 것에 대하여, 또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마나헴에 대하여


    1. 헤롯이 그의 아들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로마에 보내다. 아구스도가 그에게 요르단을 가로지르는 북부지역을 소유지로 주다


      [㈜ 10장에서는 단지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만이 ‘유대 전쟁사’에 병행구절을 지니고 있다. 고대. 15권. 10 : 1(344)는 전쟁. 1권. 20 : 4(398)의 병행 구절이며, 고대. 15권. 10 :3(360-364)는 전쟁. 1권. 20 : 4(399)에서 21 : 1-3(406)까지 병행구절이다.]


      이 무렵, 헤롯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를[㈜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손녀인 마리암메( I 세)에게서 낳은 그의 아들들.] 로마에 보내 가이사를 알현하게 하고, 이미 세워진 도시 세바스테(Sebaste)에 대해 알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폴리오(Polio)의[㈜ 추측컨대 그는 주전 40년 경의 집정관이었던 아시니우스 폴리오(C. Asinius Pollio)였을 것이다. 버질(Virgel)은 그에게 그의 네 번째 발시(Fourth Epilogue)를 봉헌했다. 이방인 지지자로서 폴리오가 나타낸 유대주의에 대한 상당한 관심에 대해서는 ‘TAPA’ 84(1953), 73-80에 나오는 Louis H. Feldman의 글 “Asinius Pollio and his Jewish Interests”를 보라.] 집에 머물렀는데, 그는 자신이 헤롯의 가장 헌신적인 친구들 중의 하나라고 공언했다. 가이사는 그 소년들을 크게 환대하며 영접하고 그와 함께 머물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는 또한 헤롯에게 그가 원한다면 그의 아들 중 하나가 그의 왕국을 소유하도록 보장하겠노라고 확답했다. 그리고 추가로 가이사는 헤롯에게 드라고닛(Trachonitis),[㈜ 갈릴리 바다의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 바타나이아(Batanaea)[㈜ 드라고닛(Trachonitis)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역.] 그리고 아우라니티스(Auranitis)[㈜ 바타나이아(Batanaea)의 동쪽이자 드라고닛의 남쪽에 위치한 구릉 지역. 이 세 지역을 합하면 야르묵(Yarmuk)강의 동부와 북부, 즉 요단강 인근지역인 성경의 바산과 길르앗 지방을 이룬다. Dussaud의 글, 6장 p.323을 보라.] 지역을 영토로 주었다. 헤롯은 다음과 같은이유 때문에 이 지역을 인계받았다.[㈜ 다른 본문에는 “그가 인수 받았던”이란 말은 나와 있지 않다.]

      제노도루스(Zenodoru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라사니아스(Lysanias)[㈜ 레바논에 있는 갈기스 혹은 이두래 지방의 통치자<고대. 14권. 13 : 3(330-332)>.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사주를 받은 마르크 안토니에 의해 살해 당하였다<고대. 15권. 4 : 1(92), 전쟁. 1권.22 : 3(440)>. 제노도루스의 동전에는 전설과 함께 “분봉왕이며 대제사장인 제노도루스”가 새겨있다. Schurer의 I : 714-716을 보라 .Schurer에 대해 Otto는 p.72 주에서 제노도루스는 루사니아스의 영토에서 모두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지에서만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안을 차가(借家)하였었다. 고용된 리사니아스는 만족할 만한 수입이 못되자 드라고닛에 거주하는 도적떼와한 통속이 되어 수입을 늘렸다. 드라고닛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은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고, 다메섹 지역의 영토를 약탈하였다.제노도루스는 그들을 금지시키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소득을 나누어 가졌다. 그 근처 주민들은 타격이 심하자 그들의 통치자인[㈜ 몇몇 왕들은 확실치 않다. 쉬러(Schurer) I : 319-320을 참조하라.] 바로(Varro)에게 항의하였고, 제노도루스의 범죄를 가이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 보고서가 가이사에게 보내졌을 때 가이사는 바로에게 서신을 써보냈는데, 그 내용은 도적떼를 축출한 후에 헤롯에게 그 영토를 양도하여 인근주민들이 성가신 일을 당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약탈 행위를 습관적으로 일삼고 살아가며 어떠한 다른 삶의 방법도 없는이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그들은 그들 소유의 도시나 토지가 전혀 없었고 단지 땅 밑의 은신처나 동굴 정도가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그들의 가축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필요한 물과 음식을 수중에 비축하고 있어서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비밀 은신처에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통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 동굴의 입구는 비좁아 한번에 한 사람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에 내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방이 충분하게 마련되어 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거주지위의 땅은 높지 않고, 대개 주변 표면이 평평했다. 그러나 전체지형이 바위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칠거칠하고, 길은 인도하는안내자가 없으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거기다 길들을 직선으로 곧게 뻗은 것이 아니고, 꼬불꼬불하고 여러 방향으로 꺾여져 있는 길이었다. 이 도적떼들은 인근 주민들을 약탈하는 것이 막혔을 때, 자기들끼리 도적질하는 것이 의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무법 천지의 세계였다. 그러나 헤롯이 가이사의 위임을받고 경험이 많은 안내자를 대동하여 도적떼들의 지역에 다다랐을 때, 헤롯은 이들의 약탈 행위를 근절시키고 인근 주민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주었다.


    2. 아랍인들이 헤롯의 새로 점령한 영토의 일부를 침략하다


      그러나 제노도루스(Zenodorus)는 자신의 통치 지역(epar-chy)을[㈜ 본문은 4두정치(tetrarchy)와 동의어로 쓰임, 위의 주 319를 보라.] 잃게 된 것에 대해 화가 났고, 헤롯이 그 지역을 차지하게 된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노도루스는 다시그 지역의 권한을 회복하기 위해 로마로 갔지만, 아무런 성과도얻지 못하고 되돌아 오고 말았다. 바로 그 때 아그립바(Agr-ippa)가[㈜ 아구스도의 부왕이자 의붓형제였던 빕사니우스 아그립바(M. Vipsanius Agrippa). 그가 헤롯과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었던 호의에 관하여는 고대. 12권. 3 : 2(125), 16권. 2 : 3(27) 이하를 보라.] 가이사의 대리자로서[㈜ 그는 총독의 명령(proconsulare imperium)을 받았다. Meyer Reinhold의 ‘Marcus Agrippa'(제네바, 뉴욕, 1933) p.83을 보라.] 이오니아 해(Ionian Sea)에속한 나라들을 다스리기 위해 파송되었다. 아그립바가 미티레네(Mitylene)에서[㈜ 레스보스(Lesbos)의 섬에 있는 지역. 헤롯이 아그립바를 방문했던 것은 주전 22-21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주전 23-22년에 있었던 일일 것으로 추정된다. Reinhold, 상게서.p.84, 각주 47.]  겨울을 보내기 위해 왔을 때, 아그립바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헤롯이 아그립바를 만나기 위해 미티레네에 왔다가 유대로 돌아갔다.

      가다라인들(Gadarenes),[㈜ 위의 7 : 3(217)을 참조하라.] 몇 명이 헤롯에게 불만을 품고 아그립바에게 왔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그들의 얘기를 청취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헤롯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할 것을 명령하여 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헤롯의 통치에 예전부터 반감을 갖고 있던 아랍인들(Arabs)이 흥분하여 헤롯의 권위에 반역을 일으킬 시도를 하였다. 아랍인들은 이것을 매우 이성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헤롯 격하 운동의 실패로 실망 중에 있던제노도루스는 그의 통치 영역의 일부인, 주로 아우라니티스(Auranitis) 땅을 50달란트를 받고 아랍인들에게 서둘러서 팔았다. 그러나 이 땅은 가이사가 헤롯에게 수여한 땅 중에 포함된것이었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그 땅을 박탈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아랍인들은 또한 가난하고 적대감을 가진 병사들을 일으켜 헤롯에게 대항하도록 하였고, 항상 혁명을 일으키려는 희망에젖어 있었다.[㈜  ejpelpivxein은 투키디데스가 사용한 단어이다.] 그래서 특별히 생활이 극도로 열악한 이들이 여기에 적극 동참했다. 이런 일이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일임을 헤롯이 알고 있었지만, 당장에 격퇴하려는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랍인들을 부드럽게 무마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헤롯은 혼란의 원인을 아랍인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3. 아구스도가 유대를 방문하여, 가다라인들에 의해 고발된 헤롯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해 헤롯의 책임을 면제하다


      헤롯이 재위한지 17년이 되던 해에 가이사가 수리아에 왔다.[㈜ 헤롯이 왕이 된지 17년째가 되는 해는 주전 21-20년이었다. Dio Cassius, 1iv. 7에는 주전 20년에 요세푸스의 날을 정하는 M. Apuleius와 P. Silius의 사절로 수리아에 아구스도가 방문한 것이 나온다.] 가다라에 사는 대다수의 주민들은 헤롯이 매우 매정하고 압제적인 통치자라고 하였다. 감히 이런 비난을 아랍인들이 헤롯에게가한 이유는 제노도루스가 특별히 헤롯에 반대하는 고발을 계속해서 하고 있고, 또한 제노도루스가 헤롯의 왕국에 자신과 아랍인들을 귀속시키지 않게 하려는 노력과 그 영토를 가이사의 통치권 안으로[㈜ 본문의 내용이 다소 불확실하다.] 합병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런 제노도루스의 확실한 행동에 설득되어 가다라인들이 크게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다라인들은 아그립바가 처벌하라고 헤롯에게 보낸 죄수들을 헤롯이 처벌하지 않자, 이를 빌미로 더욱대담하게 소란을 일으켰다. 실제로 헤롯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다스렸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외국인에 대하여서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헤롯이 자신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자신을 약탈했으며 신전들을 파괴했다고헤롯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침착하게 스스로를 신속히 방어하였고, 군중들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는 여전히 우정으로 헤롯을 맞이하였으며 헤롯에 대한 선의적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첫째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성토가 있었지만, 다음날까지 조사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가다라인들은 가이사나 가이사의 의회원들 모두가 그에 대한 조사를 중지시키려 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이 헤롯왕에게 넘겨져 학대받는 존재가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그들 중 몇 명은 밤중에 혀를 끊어자결하고 어떤 이들은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 죽고 혹은 강[㈜ 아마도 야르묵 강(Yarmuk Rever)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으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그들의 이런 무분별함과 죄가 유죄판결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가이사는 지체없이 헤롯에게 지워졌던 책임을 사면시켰다. 이와 함께 본질적으로 더 좋은 행운의 기회가 헤롯에게 찾아왔다. 제노도루스가 장 파열로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수리아(Syria)의 안디옥(Antioch)에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구스도가 제노도루스의 영토를 헤롯에게 주다]


     그러므로 가이사는 적지 않은 제노도루스의 영토를 헤롯에게 주었다. 가이사가 하사한 영토는 드라고닛(Trachonitis)과 갈릴리(Galilee)사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울라다(Ulatha)와[㈜ 메롬(Meron) 호수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 탈무드에는 이 지역이 Holthah로 나와 있는데, 오늘날의 훌레(‘uleh).] 파네아스(Paneas)와[㈜ 훌레의 동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바니야스(Baniyas). 요단강의 근원지와 훗날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아구스도가 헤롯에게 제노도루스(Zenodorus)지역을 봉토로 주었던 사실이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1iv. 9)에 의하여 기록되어 있다.] 주변의 나라를 포함하고 있었다. 가이사는또한 헤롯을 수리아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전쟁 1권. 20 : 4(399)에 의하면 아구스도는 헤롯을 “수리아 전 지역의 행정 장관”으로 임명하였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수리아 전지역'(All Syria)이란 말을 코엘레수리아'(Coele-Syria)로 바꾸지 않는 한 과장된 표현일 것으로 생각된다. Ottodmlcor p.74의 주를 보라.] 수리아인들이 모든 행동을 할 때 헤롯의 승낙을 얻고 실행하도록 하게 하였다.요컨대 헤롯은 로마제국의 강력한 두 사람인 가이사와 아그립바와 마찬가지로 굉장한 행운의 최고점에 이르게 되었다. 헤롯은 이 두사람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가이사는 헤롯보다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이 아그립바 외에는 없었고, 아그립바도 헤롯보다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이 가이사 밖에는 없었다. 헤롯은 그의 동생페로라스(Pheroras)를 그 지역[㈜ 전쟁. 1권. 24 : 5(483)에 의하면 요단강 인근 지역인 페라이아(Peraea).]의 분봉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헤롯은 자신의 나라에서 거둬들이는 세입의 100달란트를 페로라스에게 할당하겠다고 하였다. 만약 헤롯 자신이 죽더라도 페로라스의 지위를 안전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들이 분봉왕의 지위를 가로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헤롯이 바다까지 가이사를 수행하여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헤롯은 파네이온(Paneion)이라[㈜ 이 신전은 훗날 이 지역의 영주가 되었던 헤롯의 아들 빌립이 동전에 새겨 놓았던 바로 그 신전을 가리킨다. G. F. Hill의 ‘Catalogue of the GreekConis of Palestine'(런던, 1914(, Plate 24 혹은 Reifenberg의 ‘Ancient Jewish Coins'(예루살렘, 1947), Plate 4, Nr. 43을 보라.] 불리는 지역 근처의 제노도루스영토 안에 흰 돌로 매우 아름다운 신전을 가이사를 위해 세웠다. 거기 산 위에는 아름다운 동굴이 있고, 그 땅 밑에는 가파르게 경사져 있어서 가까이 가기 어렵게 깊었다.  그 깊은 곳에는[㈜ 다른 본문에는 “밝혀지지 않은”으로 나와 있다. ‘유대전쟁사’에는 “측량할 수 없는”으로 나와 있다. 이 지점에 관하여 더 상세한 설명을 원하거든 전쟁. 3권. 10 : 7(509-515)를 참조하라.] 물이 가득차 있다. 반면에 그 위로는 굉장히 높은 산이[㈜ 헐몬산(Mt. Hermon).] 있다. 이 동굴 밑에서 요단강의 물이 발원하여 흘렀다. 헤롯은 이 축복받은 장소에 신전을 세운 후 더 많은 장식을 하여 가이사에게 바쳤다.


      4. 헤롯이 그의 부하들의 반란을 막기 시작하다


      이 때에[㈜ 주전 약 20년. 위에 나오는 고대. 15권. 10 :3(354)를 보라.] 곡식이 부족하게 되자 헤롯은 백성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세금을 삼분의 일로 감축하였다. 그러나 세금 감축의보다 중요한 실제적인 이유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어 보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유대인들(백성들)은 그들의 관습을 소멸시키고 그들의 종교를 와해시키는 수단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화정책에 분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백성 모두에게 토론거리가 되었다. 백성들은 어느 곳에서나 헤롯에 반대하는 얘기를 나누었고, 헤롯의 이방 풍습을 도입하는 절차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헤롯은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백성들이 동요를 일으키려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고, 모든 시간을 자신들의 일에 집중하도록 지시했다. 시민들이 모임을 갖는 것도 금지되었고, 함께 길을 걷는 것과 함께 모여있는 것까지도 금지되었다. 바로 백성들의 모든 수단과 모든생활을 감시하였던 것이다. 붙잡힌 사람들은 엄격하게 처벌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검거되었고, 힐카니아(Hyrcania)의[㈜ 오늘날의 ‘키르벧 미르드'(Khirber Mird)로서 예루살렘 남동쪽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 고대. 13권. 16 : 3(417).] 성채에 붙들려 가서 처형되었다. 흔히 도시와 대로변에서 함께 만나는 사람들을 많은 이들이 정탐하였다. 백성들은 말하기를, 헤롯이 이런 감시행동을 지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주 밤을 이용해서 평민의 복장을 입고 스스로 무리들 속에 섞여서 백성들이 그들의 통치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았다고 한다.[㈜ 본문이 다소 불확실하다.] 헤롯은 자기의 새로운 정책에 따르지 않고 완고하게 거절하는 백성들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박해하였다. 또한 나머지 백성들에게 헤롯은 왕권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도록 요구하였고,자신의 법에 우호적인 입장을 계속 지지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하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의 대부분이 고분고분하게 혹은 두려움 때문에라도 헤롯이 강요하는 요구에 응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마땅히 여기거나 반감을 보이는 사람들은 헤롯이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죽였다.

     헤롯은 또한 바리새인인 폴리온(Pollion)과 사마이아스(Sa-maias)를[㈜ 이 사람들에 관하여는 앞에 나오는 고대. 15권. 1 : 1(3)을 보라.] 설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제자들은 거의 다복종서약에 맹세를 하였지만, 이 둘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루이스 긴즈버그(Louis Ginzberg)는 ‘무명의 유대 종파(Eine unbekannte judische Sekte) 뉴욕, 1922, 132 각주에서 바리새인들이 맹세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맹세하는 일에 사용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만은 거절했던 다른 사람들이 처벌받은 것처럼 벌을 받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헤롯이 폴리온의 이야기(답변)를 통해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에세네파라고 부르던 종파도 또한 헤롯의 이 명령에서 제외되었다. 이 에세네파는 헬라인들이 피타고라스(Pythoago-ras)[㈜ 요세푸스는 아마도 생각하기로 에세네파의 금욕적이고도 신비적인 모습이 마치 일종의 피타고라스파의 특성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비교는 그가 바리새인들과 스토아 학파를, 그리고 사두개파를 에피쿠로스 학파와 비교했던 것보다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에세테파에게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의 문제점에 관하여는 젤러(E. Zeller)의 ‘헬라 철학’)9Philosphie der Grischen)(제4판) iii, 2 p.307-377을 참조하라. 또한 Isidore Levy  ‘La Legende de Pythagore de Grece en Palestine (파리, 1927), ‘C. -R. De l’Acad. d. Inscript. et Belles-Lettres’, (1930), 99-112에 나오는 f. Cumont의 글 “Esseniens et Phthagoriciens d’apreph”를 보라. 또한 A Sommer의 ‘Nouveaux Apercus sur les manuscrits de la mer Morte(파리, 1953), 155-156을 보라.] 학파라고 부르던 이들과 동일한 삶의 양식을 갖고 있는 종파였다. 이 종파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고대. 18권. 1 : 5(18-22)에 있음. 그러나 요세푸스 책에서 에세네(Essenes)파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설명을 얻기 위하여는 전쟁. 2권. 8 : 2-13(119-161)을 볼 것.] 더 자세하게[㈜ 異文에는 “더 신중하게”로 되어 있음.] 언급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헤롯이 에세네파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이유와 에세네파에 속한 이들이 보통의 단순한 인간 본성[㈜ 에세네(Essenes)파에 대한 헤롯(Herod)의 관심에 대한 이 진술에도 불구하고 ‘Journal of Biblical Literafure’ 74(1955), 173-181에 나오는 프릿취(C. T. Fritsch)의 “대헤롯과 쿰란 공동체”(Herod the Great and the Qumran Community)에서 헤롯(Herod)은 에세네(Essenes)파에 대하여 그렇게 적대적이어서 그들은 사해 북단 가까이에 있는 유대광야(이곳에서 사해 사본이 발견됨)에 있는 쿰란의 그들 본부로 억지로 다메섹으로 이주해야 했다고 지시했다.] 보다 더 높은 고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이유에 대해 적절한 정도의 설명을 하겠다. 이런 설명은 역사를 연구대상 밖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일반적인 견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5. 에세네파에 속한 마나헴이 헤롯에 대해 예언함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으로 마나헴(Mana’mus, Manahem)이라는[㈜ 히브리어로 ‘므나헴(Mena’em)’ 루이스 긴즈버그(Louis Ginzberg)는 사후 출판물 ‘유대율법과 그 전승'(On Jewish Law and Lore) (Philadelphia, 1955)에 포함되어 번역되어진 “유대 역사에 있어서 힐라카의 위치”(The Place of Halakah in Jewish History)에 대한 히브리어 논문 p.101에서 므나헴(Menahem)은 바리새파의 보수파그룹의 지도자였고 그가 에세네(Essenes)파로 돌아섰을 때 이 관직에서 면직되었다고 한다. 이는 팔레스틴 탈무드(Palestine Talmud)의 해석에 따라서 미쉬나(Mishna)에 나오는 ‘메나홑'(Mena’ot), 9 : 2에 진술된 대로이다. 므나헴에 대한 다른 랍비전승 자료에 대하여는 클라우스 4. 148을 보라. 그는 므나헴에 대한 탈무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몇 개 진술들은 갈릴리 사람 유다의 아들 므나헴과 헤롯가(家)의 므나헴의 혼동에 기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거의 일세기 후 로마에 대한 반역 무리들을 이끌었다(참). 전쟁. 2권. 17 : 9(443-449)>.]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좋은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전체 삶에 대한 훌륭한 행동양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미래에 대한 선견적 지식을[㈜ 예언이라는 선물은 요세푸스에 의해 다른 에세네(Essenes)파, 예를 들면 아리스토불루스 I(Aristobulus I)와 동시대의 유다라는 사람이 행하게 된다. 고대. 13권. 11 : 2(311)를 볼 것.] 하느님으로부터 얻는다는것이었다. 마나헴은 전에 헤롯이 소년이었을 때, 선생님께[㈜ 추측컨대 이 사람은 헬라어 공부를 가리키는 헤롯(Herod)의 개인 교사였다.] 가고 있는 헤롯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인사를 한 적이있었다. 그러자 소년 헤롯이 저 사람은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나를 놀리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한낱 평범한 시민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마나헴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소년 헤롯의 등을 다독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왕이 될 것이고 이 왕국을 행복하게 다스리게 될 것이다.[㈜ 약간 수정된 본문.] 왜냐하면 네가 하느님께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마나헴에게 인사를 받았다는 것이 너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임을 잊지 마라. 네가 왕이 되어 취할 최선의 자세는 백성들에 대하여서는 온유함이요,하느님에 대하여서는 경건함이니 정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이러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전체 정황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너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귀한 축복의 기회가 주어질것이고 궁극적으로 영광을 얻게 될 것이지만, 너는 정의와 경건을 잊게 될 것이다. 너는 하느님의 경고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너의 생의 종말에 이르러서는 하느님의 진노가 너의 지은 죄들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때 헤롯은 마나헴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년 헤롯은 이런 왕국을 차지하리라고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점점 왕권을 취할 수 있는 존재로 삶이 전개되었고 드디어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헤롯은 권력의 정상에 다다라 마나헴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재위에 있게 되는 기간에 관해 질문했다. 마나헴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마나헴의 침묵 앞에서헤롯은 자신이 십년 내지는 십년보다 더 재위에 올라있을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마나헴은 이십년 혹은 삼십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마나헴은 정해진 기간을 정확하게 한정짓지는 않았다. 이에 헤롯은 이 대답에 지극히 만족하여 절친한 태도로 마나헴을 대하며 물러가도록 하였다. 그 때부터 헤롯은 에세네파라면 누구나 계속하여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독자들에게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났던 사실을 밝혀 놓은 것이다. 에세네파의 많은 사람들이[㈜ 약간 모호한 본문.] 그들의 도덕적인 미덕으로 인해 거룩한 계시에 대한지식을 실제로 하느님으로부터 허락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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