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부 록 1
사마리아의 분열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고대. 11권. 297-347)
\’유대고대사\’ 11권에 보면 아카이메니드 왕조(the Ach-aemenid)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Cyrys)로부터 마지막 왕이었던 다리오 Ⅲ세(Darius Ⅲ)까지의 바사(Persia) 왕국의 지배를받던 유대인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고 있다. 고대. 11권. 297까지의 내용은 성경의 세 권에 근거하여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에스드라 1서, 느헤미야서의 헬라어 번역본(아마도 축약된 사본이었거나 현존하는 사본과는 다소 다른 개정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내용을 보라), 그리고 에스더서의 헬라어 번역본이다. 그런데 297이후의 내용을 보면 요세푸스가 성경 이외의 자료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가 기록해 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을 뻔했던 두가지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첫 번째 사건은 대제사장이었던 요안네스<Joannes, 성경의 요하난(Johanan)>와 바사의 총독이었던 바고세스(Bagoses)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그의 형제 예수(Jesus, 예수아(Jeshua)>와의전투였다. 두 번째 사건은 대제사장이었던 야두스<Jaddus, 성경에는 야두아(Jaddua)>와 사마리아의 지도자였던 장인의 도움을 받았던 그의 형제 마낫세스<Manasses, 성경에는 므낫세(Manassen)>와의 전투였다. 그의 장인은 훗날 알렉산더 대왕과 관계를 지녔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297의 각주), 바고세스가 소개되어 있는 구문의본문이 확실하지 않다. (상당히 수정된)어느판에스는 \”바고세스, 아닥사스다 Ⅱ세의 장군(혹은 총독)\”이라고나와 있다. 또 다른 본문에는 어떤 왕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바고세스, 아닥사스다의 장구\”이라고만 나와 있다. 비록 첫 번째 인용했던 판에 \”Ⅱ세\”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는 상당히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이 문맥은 명백한것이 아니다. 그 이전의 부문에서는 에스더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요세푸스는 이 에스더가 아닥사스다 I 세 시대(주전464-424년)의 인물로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아닥사스다 Ⅱ세\” 대신에 그냥 아닥사스다로만 읽게 된다면 우리는동일한 왕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반면에 다음에나오느 본문은 다리오 Ⅲ세와 알렉산더 대왕과 동시대 인물이라고 말해야 옳을 요하난(Johanan)의 직계 후계자인 야두아(Jad-염)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보면 바고세스가 아닥사스다 Ⅲ세 오쿠스(Artaxerxes Ⅲ Ochus)의 통치 시대에 살았던 인물임을 누차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I 세의이야기에서 아닥사스다 Ⅲ세의 이야기로 건너 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닥사스다 Ⅱ세\”라고 되어 잇는 본문을 수용해야만 하며 바고세스를 아닥사스다 Ⅱ세 므네몬(Artaxerxes Ⅱ Mnemon)의 시대(주전 404-359년) 인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 xvi, 47에보면 동일한 이름1을 가진 바사의 장군이 아닥사스다 Ⅲ세와 관련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그이름은 그리 드문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지닌몇 명의 바사장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우기 디오도루스의 바고세스는 유대와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 애굽(the Upper Egypt)의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출토된 아람어 파피루스에 보면 바고세스가 아닥사스다 Ⅱ세 시대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더욱 화가연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통하여 주전 408넌 경(아닥사스다 Ⅱ세 시대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더욱 확연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통하여 주전 408년 경(아닥사스다 Ⅱ세의 선임자였던 다리오 Ⅱ세의 통치 말기 무렵)의 유대의 바사인 총독은 비그와이(Big-wai)(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형태는 바고세스이다)였다는 사실과 그는 대제사장이었던 요하난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한편 그후 50년 뒤 대제사장이었던 요하난과 동시대 인물인 비그와이라고 일컬어진 또 다른 바사의 장군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요세푸스가 기록한 바로게스가 바로 파피루스에 기록되어있던 비그와이였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피루스에나와있는 정치적 상황들을 보면 요세푸스의 공상적인 이야기 기록을 보는 것보다는 파피루스에 적혀 있는 정치적 상황들을 통해서 당시 바사의 총독과 대제사장 간에 있었던 갈등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간략히 말해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주전 5세기 말 마지막10년 동안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주전 408년에 상 애굽의 엘레판틴에 있던 유대인 지구의 지도자들은 애굽 사람들이 바사의지방 관리였던 와이드랑(Waidrang)과 결탁하여 그들의 신전을파괴한 사실을 불평하면서 비그와이에게 호소의 편지를 띄웠다.즉 부숴진 신전을 재건해 줄 것과 곡식, 향 그리고 번제용 짐승들을 제공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 편지의 내용에는 3년전에 그들이 \”대제사장인 요하난(Johanan)과 예루살렘의 인사(人士)들이었던 그의 동료 제사장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띄웠으나 답신을 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비그와이에게 호소를 하는 편지에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Sanballat)의 두 아들 델라이아(Delaiah)와 셀레미야(Selemiah)에게 우리의 이름으로 보냈던편지의 내용에 이 모든 사실도 다 기록해 놓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 후에 비그와이와 데라이아는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을 지어도 좋으며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대로 제물과 향으로 제단에서 제사를 드려도 좋다\”는 회답을 보냈었다. 이 사실에 관하여 코울리(Cowley)는 \’alwth\’가 의도적으로 생략된 사실을 주목하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주자앴던 견해나 비그와이가 공감하거나 혹은 공감하지 않았던 견해는별 문제로 하고, 동물로 제물을 삼은 것이 애굽인들을 화난게 했들 것이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비그와이로 하여금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ㄴ다.그러나 마이아(Ed. Meyer)가 지적했던대로 애굽인들도 그들스스로 특정 짐승들로 제물로 바쳤으며 이러한 금지가 생겨나게되었던 것은 불이 죽은 시체와 접촉함으로써 더럽혀졌다는 조로아스터교의 견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후자의 거부는 예루살렘에 잇는 짐승 제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보다 더 개연성이 있는 것은 미트보흐(Mit-tboch)에 의해 제공된 설명이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의 여러 제사장들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자기들이 별도로세운 성전과 그곳에서 지내는 제사에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는반면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바깥지역에서 희생제를드리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그와이(Bigwai)의경우, 그는 사마리아인들과 예루살렘의 제사장들 사이의 서로모순된 견해 때문에 매우 어려운 입장에 자신이 저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엘레판틴(Elephantine)의 유대인들에게그들의 성전을 재건하고 번제를 제외한 다른 일상적인 제사를그곳에서 드릴 수 있도록 절충하였다. 정치적 상황이 부흥된 것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모르겐스턴(Morgenstern)에 의해서 제공되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자료가 파피루스(pa-pyrus)와 요세푸스를 통해서 암시받았던 비그와이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가장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해준 것으로 평가한다. 그의 가성에는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점들이있으나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와 연관을 맺고 이야기하여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용할 가치가 있다. \”요하난(Johanan)에 의한 예수(Jesus)의 살해는 단순히 개인적인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요세푸스는 예수도 역시 대제사장직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야심 가운데서 그는 후에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된 바고아스(Bagoas)의 지원을 즐겼다. 이 바고아스는 바로 직후의 계승자인 까닭에 증거의 부족으로 우리들의 결정을 금하였지만 고위직에 있었던 느헤미야(Nehemiah)의후계자였음이 틀림없다. 요세푸스는 이곳 바고아스를 팔레스틴의 유대인 억압정책을 추구했던 자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아마도 그 사례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요세푸스는 적시에,그리고 다소 수정되기는 하였지만 수세기 동안 유대주의 정신을지배하기 위해 출현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극단적인 배타주의의 입장에서 저술하였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 바고아스가 예수(Jesus)를 대제사장직에 오르도록 후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고아스는 주전 408년에 엘레판틴(Elephan-tine)의 유대인들에게 야훼의 성전을 재건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라는 연설을 하였던 그 바고아스와 동일한 자임이 확실하다고말하고 있다. 게다가 바고아스는 열망하였던 청원을 승인하였을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Sanballat)의 아들 델라이아(Delaiah)와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고아스는 유대인들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정책을 입안할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함에 따라 전체 윧인 공동체에게 더 이상 탄압자나 적이 아니었으미 분명하다. 그의 동맹자 역시 유대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동맹자 산발랏의 아들델라이아처럼 친 바벨론 성향을 띤 자들에 대항하는 유대인들임이 명백하다.\” 우리가 조금 전에 언급하였던 것처럼 엘레판틴(Elephantine)의 유대인들의 청원에 대한 승인에 관하여 진술한 모르겐스턴(Morgenstern)의 각주는 특별히 더 중요하다.\”엘레판틴(Elephantine)에게 지어진 야훼의 신전의 제단위에소제와 분향하는 것은 허락하였으나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제사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을 지켰던 바고아스(Bagoas)이 명령은추가적인 관심과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문제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침묵은 동물 희생제사는 코울리(Cowley)가 추측한바와 같이(앞의 책, 124) 허용되지 않았음을 암시하였다.왜냐하면 이러한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하면 질투심 많은 배화교(拜火敎) 신자들이 종교적인 거리낌으로 훼방을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지의 동기가 어떤 이유였든지간에 \’바고아스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성전에서 상번제를 드리기 위해사용되는 잡은 양 한 마리당 50세겔의 세금을 부과하였다\’고 요세푸스가 기록한 사실과 연관시키지 않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불가능하다. 막대한 세금 부과가 희생제를 금하게 하는 커다란제사를 드리는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바고아스가 들고 나온 표면적인 외교적 수단이었다.\”
이제 우리는 가능한 한 간략히 유대인과 세겜이나 사마리아지역 주변의 거주민들에게 있었던 문제에 대하여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예루살렘과 그 북쪽(성경에는 에브라임)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다윗시대 이후로 오랫동안 서로 적대관계가 유지되어 왔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느헤미야 이후시대라 하더라도 최소한 예루살렘 공동체와 사마리아인 지도자들 간에는 우호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 당시의 대다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절대적인 이질감이 상존하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분열이 성경에서 암시하고있듯이 주전 5세기에 시작이 되었는지 아니면 요세푸스가 진술한 대로 알렉산더 대제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세푸스의 저서에 등장하는 산발랏(Sanballat)과 구약성경 느헤미야에서 나오는 산발랏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이를 분명히 규명해야 한다.
첫째, 바사(Persia)시대의 여사에 대한 자료로서의 에스라와느헤미야서에 관한 문제이다. 원래는 한권이었다가 따로 분리된이 두권의 책은 구약의 마지막 책인 역대기 상하 바로 전에 발견된다(역대기 상하도 원래는 전(前)에스라 – 느헤미야로서 한권으로 묶여 있었다). 문체에 있어서 에스라 – 느헤미야서와 역대기 상하는 유사점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이 두권의 책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의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앗수르에 의해 사마리아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한동부지방의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참 이스라엘인이아니라고 간주하는 심한 편견에 사로잡힌 저자(著者)가 쓴 방대한 저서의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근년에 성경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역대기 저술가로 알려진 이 저자는 비록 몇몇 학자들이 느헤미야 이후시대에 대한 언급은 후에 역대기 저자에 의하여 첨가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출판 연대를 1세기 더 전일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으나 아마 이 저자는 주전 약3세기 경에 그의 저서를 출판하였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역대기저자는 느헤미야 시대의 느헤미야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느헤미야 자신의 기록에 근거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는 느1-7장에 기초한다. 그 다음 장인 8-10장은 에스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11-13장은 느헤미야 시대 이후의 시기에 대한 많은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느헤미야 이야기가 실제적인 역사라는 가설을 수용한다. 그러나 두 번에 걸쳐느헤미야가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날짜에 관해서는 그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느 2 : 1이하에 따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처음 간 때는아닥사스다(Artaxerxes) 20년 무렵이었으나 성경은 어떤 아닥사스다를 의미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름의 한 자음이 에스라서 내의 아람문서에 아닥사스다(Artaxerxes)라는 이름에 사용된 한 자음의 음운학적 변형이라는사실이 역대기 기자나 훗날의 사본가들이 동일한 이름을 가진두 바사 왕을 구별하는데는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설혹 그 사실이 두 아닥사스다를 구분하는데는 도움을 주었다.하더라도 그구분은 느헤미야의 연대를 추정하는데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일 그 왕이 아닥사스다 I 세(주전 464-424년)라면 느헤미야는 주전 444년에 예루살렘에 갔을 것이고,아닥사스다 Ⅱ세(주전 404-359년)였다면 주전 384년에 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견해는 후네커(Hoonacker)에 의해 제기된 가설로, 이는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이 아닥사스다 Ⅱ세라고 믿고 있지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I 세 밑에서 그를시중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엘레판틴(Elephantine)파피루스의 증거자료와는 별도의 가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파피루스의 증거자료를 고려한다면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가예루살렘에 갔다고 보는 견해를 더 타당성있는 것으로 여길 수있다.느헤미야는 대제사장 엘리아십(Eliaship)과 같은 시대의인물이었다. 엘리아십은 그의 아들 요야다(Hoiada)에게 그의자리를 넘겨주었으며 그는 다시 요하난(Jjohanan)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느 12 : 11과 11 : 22에서 \”요나단\”(Jonathan)을(Johanan)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제사장이 한명 뿐이었으므로이 요하난은 주전 411년의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파피리의 요하난의 동일인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느 13 ; 28에 따르면 요야다의 아들이며 요하난의 형제는 산발랏(Sanballat)의 사위였다.그러므로 요하난의 조부(祖父)와 동시대의인물인 느헤미야는아닥사스다 I세 치세 때 예루살렘에 갔으며, 그의 적 산발랏은파피루스에 언급된 산발랏과 동일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산발랏의 아들 델라이아(Delaiah)가 주전 411년에 이미 성인(成人)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보다 30년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산발랏도 이미 성인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만일 이 가정이 옳다면 사마리아인에 대한 분열은 요세푸스가말한 주전 4세기 전반이 아니라 주전 5세기 전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토레이(Torrey)는 주전 408년 비그와이(Gigwai)와 같이 사마리아 지도자들에게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호소하였다는 사실은 그때 까지는 아직 예루살렘 백성과 사마리아 백성들사이에 단절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이러한 추론은 필요한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대제사장 요하난, 그리고 \”유대 귀족들\”로부터 무시된 후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호소하였다는 점, 그리고 바사의 통치자 비그와이가사마리아인들과는 동맹을 맺고 요하난과는 적대관계를 가졌다는(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이미 단절이 있었으며,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주전 408년 이전에 알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주전 411년에 처음으로 요하난에게 호소할 때 그 사실을 알았던지 혹은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열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두 번째 방문했을 때인 주전 432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일 느헤미야와 호로닛(Horonite)의 신발랏이 주전 5세기의 사람이라면 야두아(Jaddua), 마낫세스(Manasses),그리고 산발랏(Sanballat)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느헤미야의 적대자는요세푸스의 산발랏이 아니라 스패크(Spak)가 추측하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의지도자였던 부친 델라이아와 유대의 지도자였던바고세스의 뒤를 이은 산발랏의 손자 산발랏 Ⅱ세였다는 스패크의 추론에 동의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패크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였듯이 산발랏이 바사의 마지막 왕 다리오 Ⅲ세에 의하여 \”태수\”로 사마리아에 파견되었다는 요세푸스의진술(302)을 정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패크의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답변이 코울리(Cowley)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두 산발랏이 있어서 하나는 사마리아를 다스리고 하나는대제사장에게 시집간 딸이 있었다는 견해는 납득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여기에 대하여 토레이(Torrey)는 조금 다른 이론을 제시하였다.토레이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분리정책이 알렉산더대제가 원정을 당시에 시작되었다는 요세푸스의 이야기를 수용하면서 두 산발럇이 존재했다고 추정한 반면 느헤미야가 분리정책이 시작되기 전인 주전 384년 아닥사스다 치세 때 예루살렘에귀환하였다고 가정함으로써 산발랏이 동일인물이라는 스패크의가설을 거부한다. 토레이는 파피루스의 증거에 따라(이 논쟁에대한 대답으로 이전의 기록을 보라) 느헤미야의 산발랏을 주전5세기에 생존했던 파피루스의 산발랏이 아니라 요세푸스가 기록한 산발랏Ⅱ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레이는 느헤미야가아닥사스다 Ⅱ세 때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비록 느헤미야가 주전 384년에 귀환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기 딸을 대제사장의 형제와 결혼시키기 위해 주었던 자가 바로 산발랏 Ⅱ세라는 토레이의 가설을 수용하기에는 연대(年代)가 잘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를 반대하였던 산발랏이 주전 384년에 이미 40세전후의 성인이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알렉산더가 그곳에 도착한주전 332년에는 요세푸스의 기록대로 그는 이미 쇠약한 노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노인에게 대제사장의 형제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고 젊은 딸이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참). 309). 왜냐하면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의 남자들은 어렸을 때 결혼하여 일찍 자녀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마낫세스와 산발랏의 이야기는 비록 알렉산더를 언급하고있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사마리아 전통에서는 이를 찾아 볼 수없다는 사실이 더욱 더 그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요세푸스가 사마리아인에게 대한 분리정책이 성경에기록된 것처럼 주전 430년에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고 그보다훨씬 후인 주전 330년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그의 착오라고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운 날짜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성전은 주전 4세기에 세워졌다.
주전 430년 심각한 단절이 있은 후 오랜 기간 동안 사마리아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성전 건축을 삼갔다고 말할수 있다.그 이유는 그들이 언젠가는 최소한 예루살렘 성전의 일부분에 대한 관리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않았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나(궁극적으로 그에 반(反)하였던)그의 인접한 자료는 왜 산발랏을 알렉산더대제와 연관을 시켰느냐 하는 문제가남는다. 휠셔(Holsch)가 가정하는 것처럼 만일 요세푸스의산발랏에 관한 기사의 인접한 가료가 알렉산더 폴리히스테르(alexander Polyhister)라면 알렉산더 대제의 호의를 과시해보이기 위해 건축한 그리심산의 성전을 찬양하는 사마리아인들의이야기를 그가 인계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r대. 10장후반부를 분석하였던 뷔흘러(Buchler)도 역시 야두아가 알렉산더를 만난 이야기와 바사와 마게도냐의 이야기가 알렉산더 대제가 사마리아인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을 띤 요세푸스의 인근자료에 의한 산발랏 이야기와 결합되어, 야두아(Jaddua)가 알렉산더와 만난 이야기와 바사와 마게도냐 역사에대한 언급이 원래 유대 자료와는 다른 반면 마낫세스와 산발랏의이야기는 원래 사마리아 자료라고 믿는다. 뷔흘러의 사마리아와 유대 자료의 차이점을 보완해 주는 요세푸스의 일부 기사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체리코버(Tscherikower)가 지적한 대로, 어떤 단락에는(322 이하)산발랏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허락을 알렉산더로부터 받아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342) 어떤 사람이 알렉산더가 오기 전에 사마리아 성전이 이미 건축되어 있었다는 자료를 모았다. 다시 343에서는 알렉산더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321에서는 산발랏이 두로를 포위공격하는 알렉산더를 돕기 위하여 병사들을 파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쪼(Motzo)는 고대.10장과 12장 전부, 그리고 13장의 일부는 사마리아와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의 제사장직에 반대하여 예루살렘의제사장직을 찬양하는 단독적인 반(反) – 사마리아 자료로부터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모쪼는 이 책들이 주전 100년에서 63년 사이에기록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모쪼가 에스드라1서, 느헤미야, 마카비1서 등과 같은 성경과 묵시서를 직접 참고하는 것보다 요세푸스의 고대. 11-13장을 더 신빙성 있는 자료 된다고 주장하고있는지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나는 각주에서 요세푸스는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 기사를 서술해야 할 때마다 성경을 참고하였음을 지적하였기 때문이다.확신하는 것은174에서 요세푸스는 산발랏이 느헤미야의 원수 가운데 하나임을 언급하지 못했으며 느 5, 7-8장을 거의 대부분 무시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리오 Ⅲ세와 알렉산더 시대에 살면서 느헤미야의 원수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던 산발랏에관한 전통을 모으면서 요세푸스가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것처럼산발랏 이야기를 생략함으로써 연대(年代)적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단순한 길을 택하였다. 이 과정에 따라 에스라 – 느헤미야에 나오는 바사왕의 연대기에 대하여 그가 약간 수정한 수정본 안에 평행본문이 있는데 특히 21각주와 88각주 97각주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에스라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사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추가 발굴작업에 착수하기 위한 에스드라 1서 본문을 변경하거나 강화하는 단락이 몇 곳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 관하여 객관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그의초기의 관점에서(참. 고대. 9권. 288), 나는 요세푸스 자신이 후기의 전통을 성경과 연계시켰다기 보다는 요세푸스의 \”반(反)사마리아 자료\”라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알렉산더와 유다의 이야기의 자료에 대한 문제는 부록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겠다.
부 록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들
(고대. XI : 317~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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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제 (Alexander the Great)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는 것을 다룬 내용이 요세푸스 저작에 여러번 나온다. 이 번역본의 마지막 권에서도 이 주제에 대하여 부록에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알렉산더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가진 거부적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예루살렘 유대인들과 만나서 그들을 우호적으로 대하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유대고대사 11권. 317이하의 내용에 대한 역사성과 자료들을 다루겠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한 고대의 병행구절을 살펴 보자. 이 병행구절중의 하나는위(僞) 칼리스데네스(Pseudo Callisthenes)가 헬라인 알렉산더로만스(Alelnnder Romance)의 C교정본을 냈는데 거기서 발견된다. 이 저술은 문헌의 자료에서 발췌한 역사적 기록을 많이 삽입한 전설 모음집이다. 문체의 유사성에서부터 70인역 에 이르기까지 피스터(Pfister)가 계시해온 것처럼 헬라의 유대인 저술가가 한 것이 분명한, 알렉산더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에다 많이부가된 내용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유대인이 삽입시킨 목적은 위대한 마게도냐의 정복자 알렉산더를 유대인의 친구이며유대인의 하느님을 경배하는 자로 표현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에 대한 요구를 후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위(僞) 칼리스데네스에 대한 유대적 첨가는 피스터(Pfister)에 의해 주후 1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이런 첨가는 개관(recen$io vetusta)으로서 크롤(W. Kroll)이편집한 교정본(\’Historia Alexandria Magni, 1926)보다는 연대가 이른 것이다. 이는 크롤의 교정본을 주후 300년 경으로 가정했을 경우이다. 문제의 문장은(C. Mu,ller, 빠리. 1877)에 따르면 위(僞) 칼리스데네스 ii : 24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알렉산더는 유대국을 정복했으며, 유대인들은 알렉산더에게 저항하고자 사철로 위장한 침자를 보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러한 책략에 속지 않았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밀집군대(phalanx) 중 소수의 가장 용감한 병사들에게 명하여 가까운 협곡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마게도냐 군대는 알렉산더의 명령을성실하게 수행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알렉산더의 명령을 매우신속하게 순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침자임을 자인하는 자들을 심문할 때에 알렉산더가 말하기를 \’유대국의 사절인 너희들은 마게도냐 군대가 죽음을 하찰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 너희가 할 수 있는일을 하라. 나는 내일 너희에게로 가서 신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a[rcousi)에게로 돌아가서 이르기를 \’우리는 알렉산더 대제에게 항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하리라는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게도냐 군대는 인간이 지닌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끔찍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게도냐인들에게는 죽음이 전혀 그렇지않습니다. 그러기는커념 죽음을 아주 얕잡아 볼 것입니다. 우리는 마게도냐인들이 죽음을 사랑하여 매일의 일과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게도냐 젊은이들은 마치 바다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이 깊은 계곡에 몸을 던질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마게도냐 젊은이들에게 명하자마자 그들은 그의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용감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죽음으로부터 받을 어떠한 이익도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들 자원자들은 기꺼이 죽고자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어떤 이익을 바랐더라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우리를 정복하기 전에 당신이 가장 최선책이라고 여기는 것을 행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계획용 쓸데없는 것이 되었으며 탐탁치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유대국의 지도자는 이것을 듣고 알렉산더에게 항복을 결의하였고 제사장들은 제사장복을 입고 모든 군대와 함께 알렉산더를 마중했다 알렉산더가그들을 보았을 때 알렉산더는 그들의 출현으로 두려움을 느끼고서 자기에게 더이상 가까이 오지말고 도기엔 머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서 제사장들 중의 한명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기를 \’성스러운 그대의 모습이여! 바라건대 그대가 경배하는 신이 어떠한 신인지 나에게 말해 주오. 왜냐하면 우리 신의 제사장들 가운데서 그렇게 품위있는 제사장의 복장을 결코 본적이 없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그러자 제사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한분 하느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그분의 칭호를 부를 수 없습니다\'(auto;n eJrmhneu\’sai)이에 알렉산더는 이르기를 \’참된 하느님의 종들이 평화를 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평화합시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나는 그대들과 화친할 것이며, 내가 다른나라들을 침략한 것처럼 그대의 나라를 침략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것은 그대들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그때 유대인들은 풍부한 돈으로 금과 은을 사서 알렉산더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것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따로 떼어둔 금액과 함께 야훼 하느님께 이것을 바치도록 합시다. 나는 그대들로부터 어떤 것도받지 않을 것이오 \’라고 했다. \”
이 이야기의 전설적인 특성은 어떤 논평이 필요없을 정도로 너무 확실하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던 당시에 유대인의 하느님을 경배하는 자로 알렉산더를 묘사하고 있는 또다른 유사한 원문과 이러한 위(僞) 칼리스데네스의 유대적 해석과의 관련성에 관해서 피스터(Pfister)의 논평을 인용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가 검토해 왔던 유대의 알렉산드리아 건설(ktivsi\” !Alexandreia\”)은 로만스(Romance)에서 발견되는다른 고대 창건 이야기들에서 유추하여 구성되었다는 것이며특히 야웨(Yahweh)숭배의 소개로 인하여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세라피스(Serapls) 숭배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야웨숭배의 유사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는 알렉산더가선지자 예레미야의 뼈를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왔다는 예레미야삽화는 또한 고대 이야기와 일치한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건설과 특히 세라피스 숭배의 창시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몬(Amon)신전 방문과 이 신의 신탁에 의해 촉진되었다. 유대전승에 따르면 그 도시의 건설은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방문과 유대 종교의추종자가 되는 이야기보다 선행한다. 유대의 건설(ktivsi\”)은 고대(이방)도시의 형태를 따라 표현된 것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방문 전설은 아몬(Amon)의 오아시스의 여행 전승에서 형성되었다. \”
알렉산더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 관한 요세푸스 이야기의다른 병행귀절은 랍비문학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탈무드(Talmud)와 미드라쉼(Midrashim, 성경에 대한 교훈적인 주석)에 약 12개이상의 알렉산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삽화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명백히 민간 설화들이다 ; 그들중대부분은 아마도 위(僞) 칼리스데네스 대중 역본의 증보로부터파생되었을 것이다 ; 관심있는 독자는 위의 목록에서 인용된Levi의 저작중 첫번째 것에서 민간 설화들에 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와 관계된 랍비적 이야기는 어떤즐거운 사건을 기념하려고 금식이 금지된 날의 목록인 초기 랍비적 작품 \’메릴랏 타아닛\'(Megillath Ta\’anith)의 주석에서 발견된다. 그 주석(또한 바델론 탈뚜드(Bab. Talmud)\’Voma\’69a에서의 약간의 이문(異文)과 함께)은 \”그리심(Gerizim)의 날\”인 기슬르(Kislew) 訓일의 항목에 들어있다. 그리고 리히텐슈타인(또chtensteln)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이 날은 구다인(Cuthim,사마리아 사람)이 마게돈(Macedon)의 알렉산더에게 우리의 성전(의 파괴 허용)을 요청하면서 알렉산더에게 모리아산(Mount Moriah)의 5 kurs의 땅을 주십시오\”라고 말한 날이었다. 알렉산더는 그들에게 이것을 주었다.그러나 그들이 왔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이 나가서 막대기로 그들을 격퇴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이 일을 의인 시몬(Simonthe Just)에게 통지했다. 즉시 그는 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제사장의 겉옷을 걸치고(wrapped oneself in) 흰옷을 입은 예루살렘의 귀족들과 1,000명의 고문들(bouleutai), 그리고 신성한 악기를 연주하는 젊은 제사장들을 동행하고 나갔다. 그들이 언덕을 지나 행군하였을 때, 마게도냐인들이 그들의 불타는 횃불들을 보았고, 왕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이들은 \’당신을 모반하려는 유대인들입니다\’ 라고 우두머리가 대답하였다 유대인들이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에 도달했을 때, 태양이 빛나고 있었으며, 첫번째 장소에 왔을 때, 마게도냐인들이 \’너희들은 누구냐\’라고 묻자, 유대인들이 \’우리는 왕께 인사하려고 온 예루살렘주민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마게돈의 알렉산더가 의인 시몬을 보았을 때, 알렉산더는 전차에서 내려와 그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외쳐 이르기를 \’왕께서는 단지 하나의 인생에 불과찬 이 사람에게 엎드리십니까\’\’그러자 알렉산더는 \’내가 출전(出戰)하여 승리할 때마다 그의 모습을 보았노라\’라고대답하였다. 그리고서 왕은 시몬에게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라고 물었다. 제사장 시몬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왕의 통치에 번영을 가져오도록 기원하던 성전에 관하여 이방인들이 왕을 기만하여, 왕께서는 성전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왕은 묻기를 \’누가 나를 속였단 말이오\’\’시몬이 대답하기를 \’왕앞에 서 있는 이 구다인들이 왕을 속인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 알렉산더는 \’이 기회에 그대의 처분에 저들을 맡기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때 유대인들은 구다인들의 뒤꿈치를 꿰뚫어 그들의 말꼬리에 매어달고 가시와 찔레 위로 그들을 질질 끌면서그리심산에 도달했다. 그들이 그리심산에 도달했을 때 구다인들이 성전에다가 하려고 하였던 것처럼 그곳을 갈아서 완두씨를뿌렀다. 그리고서 그들이 이 일을 행했던 그 날을 축제일로 정했다.\”
이 이야기에서의 몇가지 시대착오적인 묘사는 간결한 논평을요한다. 첫째는 알렉산더를 만난 대제사장은 요세푸스의 저작에나오는 야두아(Jaddua)가 아니라, 알렉산더가 죽은지 한 세기가 훨씬 더 되는 주전 200년경에 대제사장직을 맡은 의인 시몬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비록 안티파트리스라는 명칭이 대헤롯에 의해 문제의 그 장소<Kephar Saba, 참). 고대. 11권.(329)각주>에 주어지기는 하였지만 알렉산더가 유대인을 만난 그 도시의 명칭이 안티파트리스라는 점이다. 요세푸스는 회합장소를사폐인(Sapheln)(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스코푸스산(Mt. Sco-pus))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아마도 랍비 역본의작가는 사페인(Saphein)을 사바(Saba)와 혼돈하였을 것이다.그리고 당시 사바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요세푸스 자신이 사바를 사페인으로 오판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가 아래서 살펴보겠지만 각각의 장소는 지형학적으로는 적절하다. 세번째의 시대착오는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통치 마지막 해인 주전 110년경에 실제로 일어났던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인 성전의 아래를 경작한 것에 관한 언급이다(참). 고대. 13권. 281=전쟁, 1권. 65 . 이 사건은 마르헤쉬완(Marheshwan) 25일의 날짜로 된 \’Megillath Ta\’anith\’의 또 다른 본문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사마리아인들에게 집행한 이상한 처벌이 Qu. Curtius. iv. 6\”per talos enim spirantis lorn traiecta aunt, religatumque adcurrum traxere circa urbem equi\”에 의하면 가사(Gaza)의 바사 총독인 바티스(Batis) (참). 고대. 11권. (320))에게 알렉산더가 가한 고문과 약간의 관계가 있다는 스팍(Spak)의 제안을주목해야 할 것이다.
두번째의 랍비적 이야기는 이러한 관계에 다소 중요하지만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사마리아인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되었다. 이이야기는 \”demosionai\”(세리\’)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부터 제거되었을 때인 시완(Siwan) 25일의 날짜로 \’메길랏 타이닛\'(Megillath Ta\’anith)의 주석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로마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아람의 주서(Aramaic ru-bric)는 여기서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히브리사본 주석의 기원에 관해 레위(Levi)가 그 기원이 알렉산더의 유대인들의 변증문학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옳을 것이다. 여기서 생략된 당시 유대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져온 재산에 관하여 한편으로는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과 관련이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인들, 이스라엘인들, 그리고 애굽인들 사이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알렉산더 대제는 이러한 논쟁의 심판자로 묘사되고 있다. 각각의 논쟁에서 유대인들의 대변자로 나타나는 전설상의 게비하 벤 페시사(Gebiha ben Pes-isa)는 논쟁거리에 대하여 성경구절을 현명하게 적용함으로써이방의 적대자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여기서 번역된 그 주석의마지막 부분은 사본 \’Megillath Ta\’anith\’의 Parma나 바벨론 탈무드(Bab. Talmud)\’Sanhedrin\’91 a의 병행구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본들과 같이) Midrash,\’Bere sh-ith Rabba\’xii. 6에서 나타난다.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이 편집한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게돈의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다인(Cuthim, 사마리아인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유다의 귀족들은왕께서 무할례자(즉 이방인)이므로 자신들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Gebiha ben Pesisa (\’BereshithRabba\’: Gebi\’a ben Qosem=\”Sorcerer의 아들, Hunchbac-k\”)는 어떻게 하였을까\’ 그는 금(실)로 된 두개의 슬리퍼를 만들어 은 50,000므나(manehs)에 해당되는 두개의 보석을 그것에 장식하고자 알렉산더가 성전 언덕에 이르렀을 때 게비하(Gebiha)가 그에게 이르기를, \’나의 주 왕이시여 당신의 신을벗으시고 이 슬리퍼를 신도록 하십시오.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지성소에 이르렀을 때 게비하(Gebiha)가 그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이르기를 \’나는 들어갈 것이다. 내가 나을 때 너(Gebiha)의 등이 펴질 것이다. \’ 그때 게비하가 그에게 이르기를 \’만일 왕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왕께서는 능란한 의사로 불리워질 것이며, 많은 답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유대인들은 뱀이 그(Alexander)를 물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말하였다. 현자(賢者)들이 그(Gebiha)에게 이르기를, 당신에관하여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 : 25)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고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대답할 수 있겠노라\”(잠 27 : 11)로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한 유대의 전설로부터 헬라와 로마의 역사가들인 아리안(Arrian), 디오도루스(Diodorus), 시클루스(Siculus), 퀸투스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 플루타르크(Plutarch), 유스티누스(Justinus)와 단편적 인 형식으로는 유세비우스(Eusebius),제롬(Jerome), 그리고 신켈루스(SynCelIUS)와 같은 후기 크리스챤 저술가들이 기록한 주전 332~331년 동안의 수리아와 팔레스틴에서의 알렉산더 정복 이야기로 우리는 되돌아가야만 한다.
알렉산더는 다리오(Darius)의 도주와 그의 일족 여인들의 생포를 가져온 주전 333년 10월 길리기아(Cilicia)의 잇수스(Iss-us) 전투에서 다리오를 이긴 후에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연안을따라 마라두스(Marathus)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이곳에서 알렉산더는 다메섹을 점령하기 위하여 파르메니온(Parmenion)을보내었다. 이곳에서 또한 바사의 왕가를 석방하고 동맹을 맺을것을 요청하는 다리오의 서신도 받았다. 알렉산더는 마라두스로부터 기꺼이 그를 맞아들인 두 도시 비블루스(Byblus)와 시돈(Sidon)에 갔다. 또한 두로의 대표단은 마게도냐인들에게 복종하겠다고 말하였지만 알렉산더가 헤라클레스-멜카르트(Her-acles-Melkart)에 제사하도록 그들의 도시를 그에게 허용하는것은 거절하였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두로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이것은 주전 333년 12월의 일이었다. 7개월간 베니게의 전함이 걸출한 활약을 한 해상 공격 후에 주전 332년 7월에 그 도시를 강제 점령하였다. 공격하는 동안 알렉산더는 반(反) 레바논지역의 아랍인들을 간단하게 습격을 하였다. 아리안(Arrian)ii. 25. 4 kai; maujtw\’ta; me;n a[lla th\’\” Palaistivnhs\” kaloumevnh\” Suriva\” proskecwfkovta h[dh에 따르면, 팔레스틴의 모든 도시들이 알렉산더에게 항복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Pfre Abel은\’Alexandro Magno res ibi gerente toto die aestivo unamconcham impleri iustum erat,\’라고 여리고의 발삼(balsam)재배지를 묘사하고 있는 플리니(Pliny), \’박물학\'(Hist. Nat.)xii. 25. 117의 문장을 언급하면서 알렉산더가 두로를 공격하는 동안 그의 병사들을 팔레스틴 내륙의 여리고(Jericho)까지 파견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또한 알렉산더가 그곳에 헬라식도시들을 건설하고자 하였다는 비잔틴(Byzantine)의 자료를 토대로 하여 그가 트렌스 요르단까지 그의 군대를 보냈다고 PefeAbel이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역사적인 자료였다면 고대 자료들이 이러한 사건들을 침묵으로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며빌리히 (Willrich)가 아마도 이러한 진술들을 신뢰 할 수 없는 것으로 기각하는 것이 옳다고는 볼 수 없는 것 같다. 두로의 멸망후 알렉산더는 애굽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고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통치하기 위하여 파르메니온(Parmenion)은 다메섹으로부터떠났다. 파르메니온이 다메섹에 얼마나 체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리안(Arrian)에 있는 그에 관한 자료들은 일치하지 않으며, 쿠르티우스(Curtius)와 플루타르크(Plutarch)의 기록과도상이하다. 알렉산더가 바사의 총독 마자이우스(Mazaeus)를 조사하기 위하여 파르메니안을 타프사쿠스(Tapsacus)로 보내었는데, 파르메니안이 주전 331년 봄 이전에 유브라데강 유역의타프사쿠스(Thapsacus)를 떠난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분명치않다. 그러나 주전 332년 7월에의 두로의 멸망과 주전 331년 봄에 애굽으로부터의 알렉산더의 귀환사이의 시기동안에 파르메니안은 코엘레 수리아(Coele-Syria)의 장관으로 안드로마쿠스(Andromachus)로 떠났으며(아래에서 살펴 본) 파르메니안의죽음 이후에는 메논(Menon)이 이 직을 계승하였다<쿠르티우스(Curtius) iv, 5는 알렉산더가 두로를 공격하기 이전에 메논이이 직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언급한 아리안(Arrian) ii. 13. 7과는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상당히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주전 332년 9월에 가사(Gaza)로 올 때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고 두로로부터 팔레스틴 연안을 따라서 행진하였다. 바사의 총독 바티스(Batis, 그 이름에 관해서는 고대. 11권.320절 주를 참조)가 통치하는 이 도시는 튼튼하게 요새화 되어있어서 알렉산더는 어절 수 없이 2개월 동안 그 도시를 포위하였는데 결국 그 도시는 항복하고 말았다. 가사(Gaza)의 멸망 조금후에 알렉산더는 애굽을 출발하여 7일 만에 펠루시움(Pel-usium)에 도달하였다(아리안(Arrian) iii. 1 ;플루타르크(Plu-rch),\’Alex.\’xxvi. ; 디오도루스(Diodorus) xvii. 49 : 쿠르티우스(Curtius) iv. 7). (물론 요세푸스의 저술을 제외 한) 고대의어떤 자료도 이러한 특정 시기에 그밖의 다른 곳에서의 어떤 행군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알렉산더는 다른 장소들 가운데 시바(Siwah)의 오아시스에 있는 암몬(Ammon)의 유명한 지성소를방문하면서 주전 331년 봄까지 애굽에 체류하였다. 요세푸스의저술과 Megillath Ta\’anith에 나타나는 알렉산더와 유대 제사장들과의 화합 이야기와 유사한 디오도루스(Diedorus) xvii.50~51에 기록된 알렉산더 암몬성전 방문에 관한 설명에서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전혀 허구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너무 적어서 현재의 진술 이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알렉산더는 애굽으로부터 두로로 돌아와서는 그곳에서소 아시아, 수리아, 그리고 베니게에서의 점령지를 다스릴 여러관리들을 임명 하였다. 알렉산더가 멤피스(Memphis)를 출발하여 두로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이에 일어난 어떤 사건도 아리안,디오도루스, 그리고 플루타르크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주르티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더가 애굽에 없는 동안에 사마리아인들이 코엘레-수리아 장관인 안드로마쿠스를 반항하여 일어나서는 그를 산채로 화형에 처하였다. 알렉산더는 애굽으로돌아와서는 반란을 일으킨 사마리아의 수령들을 처벌하였다. 후대의 저자들인 유세비우스(Eusebius), 제롬(Jerome), 그리고신켈루스(Syncellus)는 알렉산더가 사마리아인들을 진압하여그 도시에 있는 마게도냐인들을 정착시켰다고 이 이야기에다 부연하였다. 이 사건은 물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알렉만더의 관계를 다룬 요세푸스의 설명을 약간 담고 있으며, 언급된 자료를 인용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쿠르터우스, iv, 8, 9는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Oneravit hunc dolorem nuntiusmortis Andromachi quem praefecerat Syriae. Vivum Sam-artiae cremaverunt. Ad cuius interitum vindicandum quantamaxima celeritate potuit contendit, advenientique sunt traditi tanti sceleris auctores. Andromacho deinde Memnonasubstituit, affectis supplicio qui praetorem interemerant, \’유세비우스의 \’연대기\'(Chronicon), ii. 223 판. Aucher(=ii.114판. Schoene)의 아르메니아 본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알렉산더가 두로를 공격하였고 유대를 정복하여 영예를얻은 후 그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고 대제사장을 예우하였다.그리고 알렉산더는 그 지역의 총독(문자적으로는 \”감독자\”)으로 사마리아의 도시 주민들을 살해한 안드로마쿠스(And-romachus)를 임명하였다. 그는 애굽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마리아인들을 처벌 하였고 그 도시를 점령한 후 그곳에 마게도냐인들을 정 착시 켰다. \” 제롬(Jerome), \’urbem captam Macedonlbusad inhabitandum tradit\’와 신켈루스(Syncellus), p.496 ed.Bonn, thn; Samavreian povlin eJlw;n !Alevxand ro\” Makedvona\” ejn aujth\’ katwvkisen는 각각 유사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세비우스의 \’연대기\'(Chronicon), ii. 229 판. Aucher(=ii. 118 판. Schoene)의또 다른 본문에서 우리는 을림피아드(Olympiad), 121(주전296-5년)에서 \”아시아의 왕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Demetrius Poliorcetes)는 페르디카스(Perdiccas)에 의해 정착되었던 모든 사마리아인들의 도시를 포획하였다(제롬은 이곳을 \’urbem vastat quam Perdicca ante construxerat\’로 기록함). 빌리히(Willich)는 이 분문으로부터 사마리아에 마게도냐인들을 처음부터 정착시킨 사람은 알렉산더가 아니라 페르디카스(Perdiccas)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에 반(反)해 스팍(Spa-k)은 알렉산더 자신이 그 도시에 마게도냐인들을 정착시켰으며, 반면에 페르디카스는 후에 그 도시를 요새로 세웠다고 논증하면서 주(註)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construere만이사용될 수 있다 ; Constructam<유세비우스를 페테르만(Pet-ermann)과 아우허(Aucher)의 견지에서 보면>, construxerat<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견지에서 보면>는 katw\’kisen

부록
부 록 1
사마리아의 분열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고대. 11권. 297-347)
‘유대고대사’ 11권에 보면 아카이메니드 왕조(the Ach-aemenid)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Cyrys)로부터 마지막 왕이었던 다리오 Ⅲ세(Darius Ⅲ)까지의 바사(Persia) 왕국의 지배를받던 유대인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고 있다. 고대. 11권. 297까지의 내용은 성경의 세 권에 근거하여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에스드라 1서, 느헤미야서의 헬라어 번역본(아마도 축약된 사본이었거나 현존하는 사본과는 다소 다른 개정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내용을 보라), 그리고 에스더서의 헬라어 번역본이다. 그런데 297이후의 내용을 보면 요세푸스가 성경 이외의 자료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가 기록해 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을 뻔했던 두가지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첫 번째 사건은 대제사장이었던 요안네스와 바사의 총독이었던 바고세스(Bagoses)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그의 형제 예수(Jesus, 예수아(Jeshua)>와의전투였다. 두 번째 사건은 대제사장이었던 야두스와 사마리아의 지도자였던 장인의 도움을 받았던 그의 형제 마낫세스와의 전투였다. 그의 장인은 훗날 알렉산더 대왕과 관계를 지녔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297의 각주), 바고세스가 소개되어 있는 구문의본문이 확실하지 않다. (상당히 수정된)어느판에스는 “바고세스, 아닥사스다 Ⅱ세의 장군(혹은 총독)”이라고나와 있다. 또 다른 본문에는 어떤 왕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바고세스, 아닥사스다의 장구”이라고만 나와 있다. 비록 첫 번째 인용했던 판에 “Ⅱ세”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는 상당히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이 문맥은 명백한것이 아니다. 그 이전의 부문에서는 에스더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요세푸스는 이 에스더가 아닥사스다 I 세 시대(주전464-424년)의 인물로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아닥사스다 Ⅱ세” 대신에 그냥 아닥사스다로만 읽게 된다면 우리는동일한 왕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반면에 다음에나오느 본문은 다리오 Ⅲ세와 알렉산더 대왕과 동시대 인물이라고 말해야 옳을 요하난(Johanan)의 직계 후계자인 야두아(Jad-염)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보면 바고세스가 아닥사스다 Ⅲ세 오쿠스(Artaxerxes Ⅲ Ochus)의 통치 시대에 살았던 인물임을 누차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I 세의이야기에서 아닥사스다 Ⅲ세의 이야기로 건너 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닥사스다 Ⅱ세”라고 되어 잇는 본문을 수용해야만 하며 바고세스를 아닥사스다 Ⅱ세 므네몬(Artaxerxes Ⅱ Mnemon)의 시대(주전 404-359년) 인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 xvi, 47에보면 동일한 이름1을 가진 바사의 장군이 아닥사스다 Ⅲ세와 관련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그이름은 그리 드문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지닌몇 명의 바사장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우기 디오도루스의 바고세스는 유대와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 애굽(the Upper Egypt)의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출토된 아람어 파피루스에 보면 바고세스가 아닥사스다 Ⅱ세 시대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더욱 화가연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통하여 주전 408넌 경(아닥사스다 Ⅱ세 시대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더욱 확연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통하여 주전 408년 경(아닥사스다 Ⅱ세의 선임자였던 다리오 Ⅱ세의 통치 말기 무렵)의 유대의 바사인 총독은 비그와이(Big-wai)(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형태는 바고세스이다)였다는 사실과 그는 대제사장이었던 요하난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한편 그후 50년 뒤 대제사장이었던 요하난과 동시대 인물인 비그와이라고 일컬어진 또 다른 바사의 장군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요세푸스가 기록한 바로게스가 바로 파피루스에 기록되어있던 비그와이였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피루스에나와있는 정치적 상황들을 보면 요세푸스의 공상적인 이야기 기록을 보는 것보다는 파피루스에 적혀 있는 정치적 상황들을 통해서 당시 바사의 총독과 대제사장 간에 있었던 갈등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간략히 말해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주전 5세기 말 마지막10년 동안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주전 408년에 상 애굽의 엘레판틴에 있던 유대인 지구의 지도자들은 애굽 사람들이 바사의지방 관리였던 와이드랑(Waidrang)과 결탁하여 그들의 신전을파괴한 사실을 불평하면서 비그와이에게 호소의 편지를 띄웠다.즉 부숴진 신전을 재건해 줄 것과 곡식, 향 그리고 번제용 짐승들을 제공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 편지의 내용에는 3년전에 그들이 “대제사장인 요하난(Johanan)과 예루살렘의 인사(人士)들이었던 그의 동료 제사장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띄웠으나 답신을 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비그와이에게 호소를 하는 편지에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Sanballat)의 두 아들 델라이아(Delaiah)와 셀레미야(Selemiah)에게 우리의 이름으로 보냈던편지의 내용에 이 모든 사실도 다 기록해 놓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 후에 비그와이와 데라이아는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을 지어도 좋으며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대로 제물과 향으로 제단에서 제사를 드려도 좋다”는 회답을 보냈었다. 이 사실에 관하여 코울리(Cowley)는 ‘alwth’가 의도적으로 생략된 사실을 주목하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주자앴던 견해나 비그와이가 공감하거나 혹은 공감하지 않았던 견해는별 문제로 하고, 동물로 제물을 삼은 것이 애굽인들을 화난게 했들 것이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비그와이로 하여금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ㄴ다.그러나 마이아(Ed. Meyer)가 지적했던대로 애굽인들도 그들스스로 특정 짐승들로 제물로 바쳤으며 이러한 금지가 생겨나게되었던 것은 불이 죽은 시체와 접촉함으로써 더럽혀졌다는 조로아스터교의 견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후자의 거부는 예루살렘에 잇는 짐승 제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보다 더 개연성이 있는 것은 미트보흐(Mit-tboch)에 의해 제공된 설명이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의 여러 제사장들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자기들이 별도로세운 성전과 그곳에서 지내는 제사에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는반면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바깥지역에서 희생제를드리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그와이(Bigwai)의경우, 그는 사마리아인들과 예루살렘의 제사장들 사이의 서로모순된 견해 때문에 매우 어려운 입장에 자신이 저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엘레판틴(Elephantine)의 유대인들에게그들의 성전을 재건하고 번제를 제외한 다른 일상적인 제사를그곳에서 드릴 수 있도록 절충하였다. 정치적 상황이 부흥된 것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모르겐스턴(Morgenstern)에 의해서 제공되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자료가 파피루스(pa-pyrus)와 요세푸스를 통해서 암시받았던 비그와이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가장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해준 것으로 평가한다. 그의 가성에는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점들이있으나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와 연관을 맺고 이야기하여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용할 가치가 있다. “요하난(Johanan)에 의한 예수(Jesus)의 살해는 단순히 개인적인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요세푸스는 예수도 역시 대제사장직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야심 가운데서 그는 후에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된 바고아스(Bagoas)의 지원을 즐겼다. 이 바고아스는 바로 직후의 계승자인 까닭에 증거의 부족으로 우리들의 결정을 금하였지만 고위직에 있었던 느헤미야(Nehemiah)의후계자였음이 틀림없다. 요세푸스는 이곳 바고아스를 팔레스틴의 유대인 억압정책을 추구했던 자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아마도 그 사례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요세푸스는 적시에,그리고 다소 수정되기는 하였지만 수세기 동안 유대주의 정신을지배하기 위해 출현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극단적인 배타주의의 입장에서 저술하였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 바고아스가 예수(Jesus)를 대제사장직에 오르도록 후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고아스는 주전 408년에 엘레판틴(Elephan-tine)의 유대인들에게 야훼의 성전을 재건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라는 연설을 하였던 그 바고아스와 동일한 자임이 확실하다고말하고 있다. 게다가 바고아스는 열망하였던 청원을 승인하였을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Sanballat)의 아들 델라이아(Delaiah)와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고아스는 유대인들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정책을 입안할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함에 따라 전체 윧인 공동체에게 더 이상 탄압자나 적이 아니었으미 분명하다. 그의 동맹자 역시 유대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동맹자 산발랏의 아들델라이아처럼 친 바벨론 성향을 띤 자들에 대항하는 유대인들임이 명백하다.” 우리가 조금 전에 언급하였던 것처럼 엘레판틴(Elephantine)의 유대인들의 청원에 대한 승인에 관하여 진술한 모르겐스턴(Morgenstern)의 각주는 특별히 더 중요하다.”엘레판틴(Elephantine)에게 지어진 야훼의 신전의 제단위에소제와 분향하는 것은 허락하였으나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제사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을 지켰던 바고아스(Bagoas)이 명령은추가적인 관심과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문제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침묵은 동물 희생제사는 코울리(Cowley)가 추측한바와 같이(앞의 책, 124) 허용되지 않았음을 암시하였다.왜냐하면 이러한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하면 질투심 많은 배화교(拜火敎) 신자들이 종교적인 거리낌으로 훼방을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지의 동기가 어떤 이유였든지간에 ‘바고아스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성전에서 상번제를 드리기 위해사용되는 잡은 양 한 마리당 50세겔의 세금을 부과하였다’고 요세푸스가 기록한 사실과 연관시키지 않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불가능하다. 막대한 세금 부과가 희생제를 금하게 하는 커다란제사를 드리는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바고아스가 들고 나온 표면적인 외교적 수단이었다.”
이제 우리는 가능한 한 간략히 유대인과 세겜이나 사마리아지역 주변의 거주민들에게 있었던 문제에 대하여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예루살렘과 그 북쪽(성경에는 에브라임)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다윗시대 이후로 오랫동안 서로 적대관계가 유지되어 왔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느헤미야 이후시대라 하더라도 최소한 예루살렘 공동체와 사마리아인 지도자들 간에는 우호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 당시의 대다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절대적인 이질감이 상존하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분열이 성경에서 암시하고있듯이 주전 5세기에 시작이 되었는지 아니면 요세푸스가 진술한 대로 알렉산더 대제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세푸스의 저서에 등장하는 산발랏(Sanballat)과 구약성경 느헤미야에서 나오는 산발랏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이를 분명히 규명해야 한다.
첫째, 바사(Persia)시대의 여사에 대한 자료로서의 에스라와느헤미야서에 관한 문제이다. 원래는 한권이었다가 따로 분리된이 두권의 책은 구약의 마지막 책인 역대기 상하 바로 전에 발견된다(역대기 상하도 원래는 전(前)에스라 – 느헤미야로서 한권으로 묶여 있었다). 문체에 있어서 에스라 – 느헤미야서와 역대기 상하는 유사점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이 두권의 책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의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앗수르에 의해 사마리아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한동부지방의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참 이스라엘인이아니라고 간주하는 심한 편견에 사로잡힌 저자(著者)가 쓴 방대한 저서의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근년에 성경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역대기 저술가로 알려진 이 저자는 비록 몇몇 학자들이 느헤미야 이후시대에 대한 언급은 후에 역대기 저자에 의하여 첨가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출판 연대를 1세기 더 전일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으나 아마 이 저자는 주전 약3세기 경에 그의 저서를 출판하였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역대기저자는 느헤미야 시대의 느헤미야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느헤미야 자신의 기록에 근거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는 느1-7장에 기초한다. 그 다음 장인 8-10장은 에스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11-13장은 느헤미야 시대 이후의 시기에 대한 많은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느헤미야 이야기가 실제적인 역사라는 가설을 수용한다. 그러나 두 번에 걸쳐느헤미야가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날짜에 관해서는 그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느 2 : 1이하에 따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처음 간 때는아닥사스다(Artaxerxes) 20년 무렵이었으나 성경은 어떤 아닥사스다를 의미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름의 한 자음이 에스라서 내의 아람문서에 아닥사스다(Artaxerxes)라는 이름에 사용된 한 자음의 음운학적 변형이라는사실이 역대기 기자나 훗날의 사본가들이 동일한 이름을 가진두 바사 왕을 구별하는데는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설혹 그 사실이 두 아닥사스다를 구분하는데는 도움을 주었다.하더라도 그구분은 느헤미야의 연대를 추정하는데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일 그 왕이 아닥사스다 I 세(주전 464-424년)라면 느헤미야는 주전 444년에 예루살렘에 갔을 것이고,아닥사스다 Ⅱ세(주전 404-359년)였다면 주전 384년에 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견해는 후네커(Hoonacker)에 의해 제기된 가설로, 이는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이 아닥사스다 Ⅱ세라고 믿고 있지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I 세 밑에서 그를시중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엘레판틴(Elephantine)파피루스의 증거자료와는 별도의 가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파피루스의 증거자료를 고려한다면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가예루살렘에 갔다고 보는 견해를 더 타당성있는 것으로 여길 수있다.느헤미야는 대제사장 엘리아십(Eliaship)과 같은 시대의인물이었다. 엘리아십은 그의 아들 요야다(Hoiada)에게 그의자리를 넘겨주었으며 그는 다시 요하난(Jjohanan)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느 12 : 11과 11 : 22에서 “요나단”(Jonathan)을(Johanan)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제사장이 한명 뿐이었으므로이 요하난은 주전 411년의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파피리의 요하난의 동일인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느 13 ; 28에 따르면 요야다의 아들이며 요하난의 형제는 산발랏(Sanballat)의 사위였다.그러므로 요하난의 조부(祖父)와 동시대의인물인 느헤미야는아닥사스다 I세 치세 때 예루살렘에 갔으며, 그의 적 산발랏은파피루스에 언급된 산발랏과 동일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산발랏의 아들 델라이아(Delaiah)가 주전 411년에 이미 성인(成人)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보다 30년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산발랏도 이미 성인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만일 이 가정이 옳다면 사마리아인에 대한 분열은 요세푸스가말한 주전 4세기 전반이 아니라 주전 5세기 전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토레이(Torrey)는 주전 408년 비그와이(Gigwai)와 같이 사마리아 지도자들에게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호소하였다는 사실은 그때 까지는 아직 예루살렘 백성과 사마리아 백성들사이에 단절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이러한 추론은 필요한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대제사장 요하난, 그리고 “유대 귀족들”로부터 무시된 후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호소하였다는 점, 그리고 바사의 통치자 비그와이가사마리아인들과는 동맹을 맺고 요하난과는 적대관계를 가졌다는(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이미 단절이 있었으며,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주전 408년 이전에 알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주전 411년에 처음으로 요하난에게 호소할 때 그 사실을 알았던지 혹은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열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두 번째 방문했을 때인 주전 432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일 느헤미야와 호로닛(Horonite)의 신발랏이 주전 5세기의 사람이라면 야두아(Jaddua), 마낫세스(Manasses),그리고 산발랏(Sanballat)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느헤미야의 적대자는요세푸스의 산발랏이 아니라 스패크(Spak)가 추측하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의지도자였던 부친 델라이아와 유대의 지도자였던바고세스의 뒤를 이은 산발랏의 손자 산발랏 Ⅱ세였다는 스패크의 추론에 동의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패크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였듯이 산발랏이 바사의 마지막 왕 다리오 Ⅲ세에 의하여 “태수”로 사마리아에 파견되었다는 요세푸스의진술(302)을 정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패크의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답변이 코울리(Cowley)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두 산발랏이 있어서 하나는 사마리아를 다스리고 하나는대제사장에게 시집간 딸이 있었다는 견해는 납득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여기에 대하여 토레이(Torrey)는 조금 다른 이론을 제시하였다.토레이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분리정책이 알렉산더대제가 원정을 당시에 시작되었다는 요세푸스의 이야기를 수용하면서 두 산발럇이 존재했다고 추정한 반면 느헤미야가 분리정책이 시작되기 전인 주전 384년 아닥사스다 치세 때 예루살렘에귀환하였다고 가정함으로써 산발랏이 동일인물이라는 스패크의가설을 거부한다. 토레이는 파피루스의 증거에 따라(이 논쟁에대한 대답으로 이전의 기록을 보라) 느헤미야의 산발랏을 주전5세기에 생존했던 파피루스의 산발랏이 아니라 요세푸스가 기록한 산발랏Ⅱ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레이는 느헤미야가아닥사스다 Ⅱ세 때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비록 느헤미야가 주전 384년에 귀환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기 딸을 대제사장의 형제와 결혼시키기 위해 주었던 자가 바로 산발랏 Ⅱ세라는 토레이의 가설을 수용하기에는 연대(年代)가 잘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를 반대하였던 산발랏이 주전 384년에 이미 40세전후의 성인이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알렉산더가 그곳에 도착한주전 332년에는 요세푸스의 기록대로 그는 이미 쇠약한 노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노인에게 대제사장의 형제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고 젊은 딸이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참). 309). 왜냐하면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의 남자들은 어렸을 때 결혼하여 일찍 자녀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마낫세스와 산발랏의 이야기는 비록 알렉산더를 언급하고있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사마리아 전통에서는 이를 찾아 볼 수없다는 사실이 더욱 더 그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요세푸스가 사마리아인에게 대한 분리정책이 성경에기록된 것처럼 주전 430년에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고 그보다훨씬 후인 주전 330년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그의 착오라고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운 날짜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성전은 주전 4세기에 세워졌다.
주전 430년 심각한 단절이 있은 후 오랜 기간 동안 사마리아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성전 건축을 삼갔다고 말할수 있다.그 이유는 그들이 언젠가는 최소한 예루살렘 성전의 일부분에 대한 관리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않았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나(궁극적으로 그에 반(反)하였던)그의 인접한 자료는 왜 산발랏을 알렉산더대제와 연관을 시켰느냐 하는 문제가남는다. 휠셔(Holsch)가 가정하는 것처럼 만일 요세푸스의산발랏에 관한 기사의 인접한 가료가 알렉산더 폴리히스테르(alexander Polyhister)라면 알렉산더 대제의 호의를 과시해보이기 위해 건축한 그리심산의 성전을 찬양하는 사마리아인들의이야기를 그가 인계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r대. 10장후반부를 분석하였던 뷔흘러(Buchler)도 역시 야두아가 알렉산더를 만난 이야기와 바사와 마게도냐의 이야기가 알렉산더 대제가 사마리아인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을 띤 요세푸스의 인근자료에 의한 산발랏 이야기와 결합되어, 야두아(Jaddua)가 알렉산더와 만난 이야기와 바사와 마게도냐 역사에대한 언급이 원래 유대 자료와는 다른 반면 마낫세스와 산발랏의이야기는 원래 사마리아 자료라고 믿는다. 뷔흘러의 사마리아와 유대 자료의 차이점을 보완해 주는 요세푸스의 일부 기사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체리코버(Tscherikower)가 지적한 대로, 어떤 단락에는(322 이하)산발랏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허락을 알렉산더로부터 받아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342) 어떤 사람이 알렉산더가 오기 전에 사마리아 성전이 이미 건축되어 있었다는 자료를 모았다. 다시 343에서는 알렉산더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321에서는 산발랏이 두로를 포위공격하는 알렉산더를 돕기 위하여 병사들을 파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쪼(Motzo)는 고대.10장과 12장 전부, 그리고 13장의 일부는 사마리아와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의 제사장직에 반대하여 예루살렘의제사장직을 찬양하는 단독적인 반(反) – 사마리아 자료로부터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모쪼는 이 책들이 주전 100년에서 63년 사이에기록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모쪼가 에스드라1서, 느헤미야, 마카비1서 등과 같은 성경과 묵시서를 직접 참고하는 것보다 요세푸스의 고대. 11-13장을 더 신빙성 있는 자료 된다고 주장하고있는지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나는 각주에서 요세푸스는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 기사를 서술해야 할 때마다 성경을 참고하였음을 지적하였기 때문이다.확신하는 것은174에서 요세푸스는 산발랏이 느헤미야의 원수 가운데 하나임을 언급하지 못했으며 느 5, 7-8장을 거의 대부분 무시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리오 Ⅲ세와 알렉산더 시대에 살면서 느헤미야의 원수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던 산발랏에관한 전통을 모으면서 요세푸스가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것처럼산발랏 이야기를 생략함으로써 연대(年代)적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단순한 길을 택하였다. 이 과정에 따라 에스라 – 느헤미야에 나오는 바사왕의 연대기에 대하여 그가 약간 수정한 수정본 안에 평행본문이 있는데 특히 21각주와 88각주 97각주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에스라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사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추가 발굴작업에 착수하기 위한 에스드라 1서 본문을 변경하거나 강화하는 단락이 몇 곳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 관하여 객관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그의초기의 관점에서(참. 고대. 9권. 288), 나는 요세푸스 자신이 후기의 전통을 성경과 연계시켰다기 보다는 요세푸스의 “반(反)사마리아 자료”라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알렉산더와 유다의 이야기의 자료에 대한 문제는 부록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겠다.
부 록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들
(고대. XI : 317~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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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lrich, H., Juden und der makkabaischen Erhebung. 1895(ch. i) .
알렉산더 대제 (Alexander the Great)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는 것을 다룬 내용이 요세푸스 저작에 여러번 나온다. 이 번역본의 마지막 권에서도 이 주제에 대하여 부록에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알렉산더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가진 거부적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예루살렘 유대인들과 만나서 그들을 우호적으로 대하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유대고대사 11권. 317이하의 내용에 대한 역사성과 자료들을 다루겠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한 고대의 병행구절을 살펴 보자. 이 병행구절중의 하나는위(僞) 칼리스데네스(Pseudo Callisthenes)가 헬라인 알렉산더로만스(Alelnnder Romance)의 C교정본을 냈는데 거기서 발견된다. 이 저술은 문헌의 자료에서 발췌한 역사적 기록을 많이 삽입한 전설 모음집이다. 문체의 유사성에서부터 70인역 에 이르기까지 피스터(Pfister)가 계시해온 것처럼 헬라의 유대인 저술가가 한 것이 분명한, 알렉산더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에다 많이부가된 내용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유대인이 삽입시킨 목적은 위대한 마게도냐의 정복자 알렉산더를 유대인의 친구이며유대인의 하느님을 경배하는 자로 표현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에 대한 요구를 후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위(僞) 칼리스데네스에 대한 유대적 첨가는 피스터(Pfister)에 의해 주후 1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이런 첨가는 개관(recen$io vetusta)으로서 크롤(W. Kroll)이편집한 교정본(‘Historia Alexandria Magni, 1926)보다는 연대가 이른 것이다. 이는 크롤의 교정본을 주후 300년 경으로 가정했을 경우이다. 문제의 문장은(C. Mu,ller, 빠리. 1877)에 따르면 위(僞) 칼리스데네스 ii : 24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알렉산더는 유대국을 정복했으며, 유대인들은 알렉산더에게 저항하고자 사철로 위장한 침자를 보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러한 책략에 속지 않았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밀집군대(phalanx) 중 소수의 가장 용감한 병사들에게 명하여 가까운 협곡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마게도냐 군대는 알렉산더의 명령을성실하게 수행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알렉산더의 명령을 매우신속하게 순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침자임을 자인하는 자들을 심문할 때에 알렉산더가 말하기를 ‘유대국의 사절인 너희들은 마게도냐 군대가 죽음을 하찰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 너희가 할 수 있는일을 하라. 나는 내일 너희에게로 가서 신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a[rcousi)에게로 돌아가서 이르기를 ‘우리는 알렉산더 대제에게 항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하리라는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게도냐 군대는 인간이 지닌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끔찍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게도냐인들에게는 죽음이 전혀 그렇지않습니다. 그러기는커념 죽음을 아주 얕잡아 볼 것입니다. 우리는 마게도냐인들이 죽음을 사랑하여 매일의 일과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게도냐 젊은이들은 마치 바다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이 깊은 계곡에 몸을 던질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마게도냐 젊은이들에게 명하자마자 그들은 그의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용감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죽음으로부터 받을 어떠한 이익도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들 자원자들은 기꺼이 죽고자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어떤 이익을 바랐더라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우리를 정복하기 전에 당신이 가장 최선책이라고 여기는 것을 행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계획용 쓸데없는 것이 되었으며 탐탁치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유대국의 지도자는 이것을 듣고 알렉산더에게 항복을 결의하였고 제사장들은 제사장복을 입고 모든 군대와 함께 알렉산더를 마중했다 알렉산더가그들을 보았을 때 알렉산더는 그들의 출현으로 두려움을 느끼고서 자기에게 더이상 가까이 오지말고 도기엔 머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서 제사장들 중의 한명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기를 ‘성스러운 그대의 모습이여! 바라건대 그대가 경배하는 신이 어떠한 신인지 나에게 말해 주오. 왜냐하면 우리 신의 제사장들 가운데서 그렇게 품위있는 제사장의 복장을 결코 본적이 없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그러자 제사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한분 하느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그분의 칭호를 부를 수 없습니다'(auto;n eJrmhneu’sai)이에 알렉산더는 이르기를 ‘참된 하느님의 종들이 평화를 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평화합시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나는 그대들과 화친할 것이며, 내가 다른나라들을 침략한 것처럼 그대의 나라를 침략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것은 그대들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그때 유대인들은 풍부한 돈으로 금과 은을 사서 알렉산더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것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따로 떼어둔 금액과 함께 야훼 하느님께 이것을 바치도록 합시다. 나는 그대들로부터 어떤 것도받지 않을 것이오 ‘라고 했다. “
이 이야기의 전설적인 특성은 어떤 논평이 필요없을 정도로 너무 확실하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던 당시에 유대인의 하느님을 경배하는 자로 알렉산더를 묘사하고 있는 또다른 유사한 원문과 이러한 위(僞) 칼리스데네스의 유대적 해석과의 관련성에 관해서 피스터(Pfister)의 논평을 인용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가 검토해 왔던 유대의 알렉산드리아 건설(ktivsi” !Alexandreia”)은 로만스(Romance)에서 발견되는다른 고대 창건 이야기들에서 유추하여 구성되었다는 것이며특히 야웨(Yahweh)숭배의 소개로 인하여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세라피스(Serapls) 숭배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야웨숭배의 유사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는 알렉산더가선지자 예레미야의 뼈를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왔다는 예레미야삽화는 또한 고대 이야기와 일치한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건설과 특히 세라피스 숭배의 창시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몬(Amon)신전 방문과 이 신의 신탁에 의해 촉진되었다. 유대전승에 따르면 그 도시의 건설은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방문과 유대 종교의추종자가 되는 이야기보다 선행한다. 유대의 건설(ktivsi”)은 고대(이방)도시의 형태를 따라 표현된 것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방문 전설은 아몬(Amon)의 오아시스의 여행 전승에서 형성되었다. “
알렉산더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 관한 요세푸스 이야기의다른 병행귀절은 랍비문학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탈무드(Talmud)와 미드라쉼(Midrashim, 성경에 대한 교훈적인 주석)에 약 12개이상의 알렉산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삽화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명백히 민간 설화들이다 ; 그들중대부분은 아마도 위(僞) 칼리스데네스 대중 역본의 증보로부터파생되었을 것이다 ; 관심있는 독자는 위의 목록에서 인용된Levi의 저작중 첫번째 것에서 민간 설화들에 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와 관계된 랍비적 이야기는 어떤즐거운 사건을 기념하려고 금식이 금지된 날의 목록인 초기 랍비적 작품 ‘메릴랏 타아닛'(Megillath Ta’anith)의 주석에서 발견된다. 그 주석(또한 바델론 탈뚜드(Bab. Talmud)’Voma’69a에서의 약간의 이문(異文)과 함께)은 “그리심(Gerizim)의 날”인 기슬르(Kislew) 訓일의 항목에 들어있다. 그리고 리히텐슈타인(또chtensteln)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이 날은 구다인(Cuthim,사마리아 사람)이 마게돈(Macedon)의 알렉산더에게 우리의 성전(의 파괴 허용)을 요청하면서 알렉산더에게 모리아산(Mount Moriah)의 5 kurs의 땅을 주십시오”라고 말한 날이었다. 알렉산더는 그들에게 이것을 주었다.그러나 그들이 왔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이 나가서 막대기로 그들을 격퇴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이 일을 의인 시몬(Simonthe Just)에게 통지했다. 즉시 그는 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제사장의 겉옷을 걸치고(wrapped oneself in) 흰옷을 입은 예루살렘의 귀족들과 1,000명의 고문들(bouleutai), 그리고 신성한 악기를 연주하는 젊은 제사장들을 동행하고 나갔다. 그들이 언덕을 지나 행군하였을 때, 마게도냐인들이 그들의 불타는 횃불들을 보았고, 왕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이들은 ‘당신을 모반하려는 유대인들입니다’ 라고 우두머리가 대답하였다 유대인들이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에 도달했을 때, 태양이 빛나고 있었으며, 첫번째 장소에 왔을 때, 마게도냐인들이 ‘너희들은 누구냐’라고 묻자, 유대인들이 ‘우리는 왕께 인사하려고 온 예루살렘주민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마게돈의 알렉산더가 의인 시몬을 보았을 때, 알렉산더는 전차에서 내려와 그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외쳐 이르기를 ‘왕께서는 단지 하나의 인생에 불과찬 이 사람에게 엎드리십니까”그러자 알렉산더는 ‘내가 출전(出戰)하여 승리할 때마다 그의 모습을 보았노라’라고대답하였다. 그리고서 왕은 시몬에게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라고 물었다. 제사장 시몬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왕의 통치에 번영을 가져오도록 기원하던 성전에 관하여 이방인들이 왕을 기만하여, 왕께서는 성전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왕은 묻기를 ‘누가 나를 속였단 말이오”시몬이 대답하기를 ‘왕앞에 서 있는 이 구다인들이 왕을 속인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 알렉산더는 ‘이 기회에 그대의 처분에 저들을 맡기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때 유대인들은 구다인들의 뒤꿈치를 꿰뚫어 그들의 말꼬리에 매어달고 가시와 찔레 위로 그들을 질질 끌면서그리심산에 도달했다. 그들이 그리심산에 도달했을 때 구다인들이 성전에다가 하려고 하였던 것처럼 그곳을 갈아서 완두씨를뿌렀다. 그리고서 그들이 이 일을 행했던 그 날을 축제일로 정했다.”
이 이야기에서의 몇가지 시대착오적인 묘사는 간결한 논평을요한다. 첫째는 알렉산더를 만난 대제사장은 요세푸스의 저작에나오는 야두아(Jaddua)가 아니라, 알렉산더가 죽은지 한 세기가 훨씬 더 되는 주전 200년경에 대제사장직을 맡은 의인 시몬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비록 안티파트리스라는 명칭이 대헤롯에 의해 문제의 그 장소에 주어지기는 하였지만 알렉산더가 유대인을 만난 그 도시의 명칭이 안티파트리스라는 점이다. 요세푸스는 회합장소를사폐인(Sapheln)(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스코푸스산(Mt. Sco-pus))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아마도 랍비 역본의작가는 사페인(Saphein)을 사바(Saba)와 혼돈하였을 것이다.그리고 당시 사바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요세푸스 자신이 사바를 사페인으로 오판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가 아래서 살펴보겠지만 각각의 장소는 지형학적으로는 적절하다. 세번째의 시대착오는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통치 마지막 해인 주전 110년경에 실제로 일어났던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인 성전의 아래를 경작한 것에 관한 언급이다(참). 고대. 13권. 281=전쟁, 1권. 65 . 이 사건은 마르헤쉬완(Marheshwan) 25일의 날짜로 된 ‘Megillath Ta’anith’의 또 다른 본문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사마리아인들에게 집행한 이상한 처벌이 Qu. Curtius. iv. 6″per talos enim spirantis lorn traiecta aunt, religatumque adcurrum traxere circa urbem equi”에 의하면 가사(Gaza)의 바사 총독인 바티스(Batis) (참). 고대. 11권. (320))에게 알렉산더가 가한 고문과 약간의 관계가 있다는 스팍(Spak)의 제안을주목해야 할 것이다.
두번째의 랍비적 이야기는 이러한 관계에 다소 중요하지만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사마리아인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되었다. 이이야기는 “demosionai”(세리’)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부터 제거되었을 때인 시완(Siwan) 25일의 날짜로 ‘메길랏 타이닛'(Megillath Ta’anith)의 주석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로마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아람의 주서(Aramaic ru-bric)는 여기서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히브리사본 주석의 기원에 관해 레위(Levi)가 그 기원이 알렉산더의 유대인들의 변증문학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옳을 것이다. 여기서 생략된 당시 유대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져온 재산에 관하여 한편으로는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과 관련이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인들, 이스라엘인들, 그리고 애굽인들 사이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알렉산더 대제는 이러한 논쟁의 심판자로 묘사되고 있다. 각각의 논쟁에서 유대인들의 대변자로 나타나는 전설상의 게비하 벤 페시사(Gebiha ben Pes-isa)는 논쟁거리에 대하여 성경구절을 현명하게 적용함으로써이방의 적대자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여기서 번역된 그 주석의마지막 부분은 사본 ‘Megillath Ta’anith’의 Parma나 바벨론 탈무드(Bab. Talmud)’Sanhedrin’91 a의 병행구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본들과 같이) Midrash,’Bere sh-ith Rabba’xii. 6에서 나타난다.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이 편집한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게돈의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다인(Cuthim, 사마리아인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유다의 귀족들은왕께서 무할례자(즉 이방인)이므로 자신들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Gebiha ben Pesisa (‘BereshithRabba’: Gebi’a ben Qosem=”Sorcerer의 아들, Hunchbac-k”)는 어떻게 하였을까’ 그는 금(실)로 된 두개의 슬리퍼를 만들어 은 50,000므나(manehs)에 해당되는 두개의 보석을 그것에 장식하고자 알렉산더가 성전 언덕에 이르렀을 때 게비하(Gebiha)가 그에게 이르기를, ‘나의 주 왕이시여 당신의 신을벗으시고 이 슬리퍼를 신도록 하십시오.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지성소에 이르렀을 때 게비하(Gebiha)가 그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이르기를 ‘나는 들어갈 것이다. 내가 나을 때 너(Gebiha)의 등이 펴질 것이다. ‘ 그때 게비하가 그에게 이르기를 ‘만일 왕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왕께서는 능란한 의사로 불리워질 것이며, 많은 답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유대인들은 뱀이 그(Alexander)를 물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말하였다. 현자(賢者)들이 그(Gebiha)에게 이르기를, 당신에관하여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 : 25)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고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대답할 수 있겠노라”(잠 27 : 11)로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한 유대의 전설로부터 헬라와 로마의 역사가들인 아리안(Arrian), 디오도루스(Diodorus), 시클루스(Siculus), 퀸투스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 플루타르크(Plutarch), 유스티누스(Justinus)와 단편적 인 형식으로는 유세비우스(Eusebius),제롬(Jerome), 그리고 신켈루스(SynCelIUS)와 같은 후기 크리스챤 저술가들이 기록한 주전 332~331년 동안의 수리아와 팔레스틴에서의 알렉산더 정복 이야기로 우리는 되돌아가야만 한다.
알렉산더는 다리오(Darius)의 도주와 그의 일족 여인들의 생포를 가져온 주전 333년 10월 길리기아(Cilicia)의 잇수스(Iss-us) 전투에서 다리오를 이긴 후에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연안을따라 마라두스(Marathus)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이곳에서 알렉산더는 다메섹을 점령하기 위하여 파르메니온(Parmenion)을보내었다. 이곳에서 또한 바사의 왕가를 석방하고 동맹을 맺을것을 요청하는 다리오의 서신도 받았다. 알렉산더는 마라두스로부터 기꺼이 그를 맞아들인 두 도시 비블루스(Byblus)와 시돈(Sidon)에 갔다. 또한 두로의 대표단은 마게도냐인들에게 복종하겠다고 말하였지만 알렉산더가 헤라클레스-멜카르트(Her-acles-Melkart)에 제사하도록 그들의 도시를 그에게 허용하는것은 거절하였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두로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이것은 주전 333년 12월의 일이었다. 7개월간 베니게의 전함이 걸출한 활약을 한 해상 공격 후에 주전 332년 7월에 그 도시를 강제 점령하였다. 공격하는 동안 알렉산더는 반(反) 레바논지역의 아랍인들을 간단하게 습격을 하였다. 아리안(Arrian)ii. 25. 4 kai; maujtw’ta; me;n a[lla th'” Palaistivnhs” kaloumevnh” Suriva” proskecwfkovta h[dh에 따르면, 팔레스틴의 모든 도시들이 알렉산더에게 항복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Pfre Abel은’Alexandro Magno res ibi gerente toto die aestivo unamconcham impleri iustum erat,’라고 여리고의 발삼(balsam)재배지를 묘사하고 있는 플리니(Pliny), ‘박물학'(Hist. Nat.)xii. 25. 117의 문장을 언급하면서 알렉산더가 두로를 공격하는 동안 그의 병사들을 팔레스틴 내륙의 여리고(Jericho)까지 파견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또한 알렉산더가 그곳에 헬라식도시들을 건설하고자 하였다는 비잔틴(Byzantine)의 자료를 토대로 하여 그가 트렌스 요르단까지 그의 군대를 보냈다고 PefeAbel이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역사적인 자료였다면 고대 자료들이 이러한 사건들을 침묵으로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며빌리히 (Willrich)가 아마도 이러한 진술들을 신뢰 할 수 없는 것으로 기각하는 것이 옳다고는 볼 수 없는 것 같다. 두로의 멸망후 알렉산더는 애굽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고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통치하기 위하여 파르메니온(Parmenion)은 다메섹으로부터떠났다. 파르메니온이 다메섹에 얼마나 체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리안(Arrian)에 있는 그에 관한 자료들은 일치하지 않으며, 쿠르티우스(Curtius)와 플루타르크(Plutarch)의 기록과도상이하다. 알렉산더가 바사의 총독 마자이우스(Mazaeus)를 조사하기 위하여 파르메니안을 타프사쿠스(Tapsacus)로 보내었는데, 파르메니안이 주전 331년 봄 이전에 유브라데강 유역의타프사쿠스(Thapsacus)를 떠난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분명치않다. 그러나 주전 332년 7월에의 두로의 멸망과 주전 331년 봄에 애굽으로부터의 알렉산더의 귀환사이의 시기동안에 파르메니안은 코엘레 수리아(Coele-Syria)의 장관으로 안드로마쿠스(Andromachus)로 떠났으며(아래에서 살펴 본) 파르메니안의죽음 이후에는 메논(Menon)이 이 직을 계승하였다<쿠르티우스(Curtius) iv, 5는 알렉산더가 두로를 공격하기 이전에 메논이이 직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언급한 아리안(Arrian) ii. 13. 7과는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상당히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주전 332년 9월에 가사(Gaza)로 올 때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고 두로로부터 팔레스틴 연안을 따라서 행진하였다. 바사의 총독 바티스(Batis, 그 이름에 관해서는 고대. 11권.320절 주를 참조)가 통치하는 이 도시는 튼튼하게 요새화 되어있어서 알렉산더는 어절 수 없이 2개월 동안 그 도시를 포위하였는데 결국 그 도시는 항복하고 말았다. 가사(Gaza)의 멸망 조금후에 알렉산더는 애굽을 출발하여 7일 만에 펠루시움(Pel-usium)에 도달하였다(아리안(Arrian) iii. 1 ;플루타르크(Plu-rch),’Alex.’xxvi. ; 디오도루스(Diodorus) xvii. 49 : 쿠르티우스(Curtius) iv. 7). (물론 요세푸스의 저술을 제외 한) 고대의어떤 자료도 이러한 특정 시기에 그밖의 다른 곳에서의 어떤 행군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알렉산더는 다른 장소들 가운데 시바(Siwah)의 오아시스에 있는 암몬(Ammon)의 유명한 지성소를방문하면서 주전 331년 봄까지 애굽에 체류하였다. 요세푸스의저술과 Megillath Ta’anith에 나타나는 알렉산더와 유대 제사장들과의 화합 이야기와 유사한 디오도루스(Diedorus) xvii.50~51에 기록된 알렉산더 암몬성전 방문에 관한 설명에서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전혀 허구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너무 적어서 현재의 진술 이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알렉산더는 애굽으로부터 두로로 돌아와서는 그곳에서소 아시아, 수리아, 그리고 베니게에서의 점령지를 다스릴 여러관리들을 임명 하였다. 알렉산더가 멤피스(Memphis)를 출발하여 두로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이에 일어난 어떤 사건도 아리안,디오도루스, 그리고 플루타르크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주르티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더가 애굽에 없는 동안에 사마리아인들이 코엘레-수리아 장관인 안드로마쿠스를 반항하여 일어나서는 그를 산채로 화형에 처하였다. 알렉산더는 애굽으로돌아와서는 반란을 일으킨 사마리아의 수령들을 처벌하였다. 후대의 저자들인 유세비우스(Eusebius), 제롬(Jerome), 그리고신켈루스(Syncellus)는 알렉산더가 사마리아인들을 진압하여그 도시에 있는 마게도냐인들을 정착시켰다고 이 이야기에다 부연하였다. 이 사건은 물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알렉만더의 관계를 다룬 요세푸스의 설명을 약간 담고 있으며, 언급된 자료를 인용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쿠르터우스, iv, 8, 9는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Oneravit hunc dolorem nuntiusmortis Andromachi quem praefecerat Syriae. Vivum Sam-artiae cremaverunt. Ad cuius interitum vindicandum quantamaxima celeritate potuit contendit, advenientique sunt traditi tanti sceleris auctores. Andromacho deinde Memnonasubstituit, affectis supplicio qui praetorem interemerant, ‘유세비우스의 ‘연대기'(Chronicon), ii. 223 판. Aucher(=ii.114판. Schoene)의 아르메니아 본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알렉산더가 두로를 공격하였고 유대를 정복하여 영예를얻은 후 그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고 대제사장을 예우하였다.그리고 알렉산더는 그 지역의 총독(문자적으로는 “감독자”)으로 사마리아의 도시 주민들을 살해한 안드로마쿠스(And-romachus)를 임명하였다. 그는 애굽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마리아인들을 처벌 하였고 그 도시를 점령한 후 그곳에 마게도냐인들을 정 착시 켰다. ” 제롬(Jerome), ‘urbem captam Macedonlbusad inhabitandum tradit’와 신켈루스(Syncellus), p.496 ed.Bonn, thn; Samavreian povlin eJlw;n !Alevxand ro” Makedvona” ejn aujth’ katwvkisen는 각각 유사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세비우스의 ‘연대기'(Chronicon), ii. 229 판. Aucher(=ii. 118 판. Schoene)의또 다른 본문에서 우리는 을림피아드(Olympiad), 121(주전296-5년)에서 “아시아의 왕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Demetrius Poliorcetes)는 페르디카스(Perdiccas)에 의해 정착되었던 모든 사마리아인들의 도시를 포획하였다(제롬은 이곳을 ‘urbem vastat quam Perdicca ante construxerat’로 기록함). 빌리히(Willich)는 이 분문으로부터 사마리아에 마게도냐인들을 처음부터 정착시킨 사람은 알렉산더가 아니라 페르디카스(Perdiccas)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에 반(反)해 스팍(Spa-k)은 알렉산더 자신이 그 도시에 마게도냐인들을 정착시켰으며, 반면에 페르디카스는 후에 그 도시를 요새로 세웠다고 논증하면서 주(註)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construere만이사용될 수 있다 ; Constructam<유세비우스를 페테르만(Pet-ermann)과 아우허(Aucher)의 견지에서 보면>, construxerat<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견지에서 보면>는 katw’kisen <신켈루스(Syncellus)의 견지에서 보면>과 collocavit <아우허(Aucher)와 페테르만(Petermann)의 견지에서 보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 스팍은 불행하게도 유세비우스의 아르메니아 본문의 현대 라틴역에 의해 오인되었다. 두 문장에서 동사인bnakecoucanem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거주하게 하다”이다. 아르메니아 성경에서는 katoikivxein를 번역한 것이 사용된다. 따라서 유세비우스의 두개의 본문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유세비우스가 어떤 곳에서는 알렉산더가 사마리아에 마게도냐인들을 정착시켰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페르디카스가그렇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자의 사실에 대한 역사성은쿠르티우스와 신켈루스 만의 진술을 기초로 하여 심사되어야 한다. 이제 신켈루스는 이 기간동안에 특별히 신켈루스 대신에 장관으로 임명했다고 단순하게 언급하였다. 우리는 알렉산더가 장기간 동안 사마리아에 있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제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위에 인용된 자료에서 나온 정보를 미루어 볼 때 알렉산더가디움(Dium)에서 꾼 야두아(Jaddua)에 관한 꿈과 다니엘서를읽었다는 그러한 명백한 전설상의 설명은 별문제로 하고 알렉산더의 유대인들과의 회합과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 태도에 관한요세푸스 이야기의 사실성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견해를 지녀야하겠는가’ 위에 있는 목록에서 언급된 학자들 가운데 이스라엘아브라함스(Israel Abrahams)는 알렉산더가 가사 멸망후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고 언급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정확하다고 논증하였다. 가사 멸망이후에 그렇게 우회 (迂廻)할 시간이 없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진전된 논증은 “아리안과 나머지 권위있는 문서들을 철저히 오독(誤讀)하였고…그러나 아리안은 그런 것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알렉산더가 그의 군대를 가사로부터 애굽으로 이동시켰을 때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의 행군은 신속했다. 그러나 가사가 멸망하자마자 즉시로 가사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알렉산더는 그곳을 떠나기전에 많은 일을 행하였다. 아리안과 쿠르티우스에는 시간으로인해 요세푸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가사의 항복 직후 알렉산더가 애굽을 떠났다. 그러나 “시간으로 인해 요세푸스가 묘사한것과 같은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리안과 쿠르티우스에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옳지 않다. 알렉산더가 애굽을 떠나기 전에 열중한 어떤 일들이 있었는데예를 들면 가사의 재건설과 트라이림(trireme, 3층으로 노가 달린 갤리(galley)선-역자주)으로 아민타스(Amyntas)를 마게도냐로 파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할 자료들은 알렉산더가당장 하여야만 하는 것을 충분히 할 정도로 오랫동안 애굽에로의 행군을 지연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가리켜 준다. 그는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려고 그렇게 노력하지는 않았다 ;참).Arrian iii. 1. 1 ejp! Aijgyvptou i{naper tu; prw’ton wJrmhqh ejstvelleto와 Curtius iv. 6 ‘regis qui Aegyptum adire festinans Amy-ntam cum decem triremibus in Macedoniam misit.’ 말하자면, 알렉산더가 레오니다스(Leonidas)로 보낸 향(香)은 플루타르크,’Alex.”xxv에 따르면 가사로부터 생산되었을 것이다(그러나 보다 초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가사는 바사시대 동안에 서로마 대국으로 동양의 사치품을 수출하는 중심지였다. 그러나아브라함스가 지적한 한가지 사항은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가사로부터 오고 있는 알렉산더는 북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다가오고 있다고 요세푸스가 말할 때 어떤 큰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고 아브라함스는 주장하였다. “아마도 정상적인(normal)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익숙한 해안 위쪽으로 나아가서 야파(Jaffa)의 근처로부터 동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권위있는 문서의 명확한 함축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알렉산더가 가사 별방 이후 그리고 그의 애굽 여행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다른 시기에,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의 반란을 겪었을때인 주전 331년 봄 애굽으로부터의 귀환시 유대인과 개인적으로 교제를 하였는지의 여부가 아직도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한견해는 스팍(Spak)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스팍은 다음과 같이그러한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였다. 알렉산더는 애굽을 떠나자마자 이러한 지역들중에서 마게도냐인들이 최초로 직면한 중대한 저항이었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공격하였다. 알렉산더는 사마리아로 가는 도중에 유대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가사(Gaza, 요세푸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알렉산더의 가사 방문은 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 방문이었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갔다. 알렉산더의 분노는 두로(Tyre) 공격시 자신을 지원해 줄 것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반란의 주동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알렉산더가 애굽에 8,000명의 사마리아 병사들을 정착시킨 것은 보다 초기에 일어난일이었고 그들은 애굽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도록 강제되었다.스팍(Spak)은 한 고대. 11권에서가 아니라, 아피. 11권. 43에서 요세푸스가 진술한 것과 같이 알렉산더가 사마리아 영토의일부를 유대인들에게 하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 근거하고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아피. 11권. 43에는 알렉산더가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경의와 충성에 보답하여 그들의 영토에다조공없이 사마리아 지역을 추가로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 실제로 헤카타이우스(Hecataeus)(fl,. 주전3세기초)로부터 나왔는지 그리고 신빙성이 있는지 혹은 변증적목적을 위하여 이야기를 창안한 소위 가짜 헤카타이우스(Hec-ataeus)라는 헬라주의화한 유대 작가의 작품인지의 여부는 알수 없다. 태커래이(Thackeray)는 이 부분에 대한 주(註)에서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짜 헤카타이우스의’) 이러한진술은 분명히 과장되었으며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사마리아의 세개 소(小)지역(사마리아 친체가 아니라)은 데메트리우스(Demetrius) Ⅱ세에 의해 약 주전 145년경에 조공없이 유대에양도되었다<마카비 1서(1 Macc.) 11 : 34 ; 참). 10 : 30, 38>.그러나 마카비 I서의 언어는 데메트리우스가 보다 초기의 어떤특권을 확립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 ‘아피온반박문’의 문장은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에 의해 실제로 수여된 특권을 알렉산더가 수여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는 뷔흘러(Buchler)의 주장은 그것의 신범성에 관한 스팍(Spak)의주장보다 더 나에게는 설득력이 있다. 스팍의 견해와 다소 유사한 것으로는 체리커버(Tscherikower)의 견해인데 체리커버는알렉산더가 실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는 생각지 않는 반면에 애굽에서 두로로 귀환할 때 사마리아인들의 반란 소식을 듣고서 반란을 진압하기 이하여 페르디카스(Perdiccas)를 파견하였으며<참). 위에 인용된 쿠르티우스와 유세비우스의 문장>, 그리고 유대와 알렉산더 사이에 우호관계가 성사되었으므로 유대는 사마리아를 진압하는 페르디카스를 원조하려고 소규모의 보조병력을 보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같은 견해는 쿠르티우스가사마리아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알렉산더였다고 주장하고 있는것과 그리고 어떤 곤경도 없이 팔레스틴 주민들로부터 어떤 원조도 받지 않고 사마리아를 진압하였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는사실과 마찰을 빚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사마리아 반란의시기에 (팔레스틴의 어떤 것에서) 유대인들과 개인적으로 교제하였을지도 모른다고 스팍과 체리커버가 가정 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실제 방문에 관해서는, 나는 니이제, 빌리히, 체리커버와 그리고 다른 저술가들 만큼 이 견해를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주저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의 균형은 그것에 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오래된 헬라어 자료와 라틴어 사료가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강력한 반대논증(그 방문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간략한 언급은 물론 요세푸스에 근거하고 있다) 이외에도 알렉산더 시대에 헬라인에 비해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하찰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그런데이것은 아브라함스(Abrahams)에게는 실례지만, 알렉산더가예루살렘과 성전에 관심 있었다는 견해를 의심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우리는 요세푸스가 그의 역사기록에서 의존한 헬라화한유대자료들이 변증적 목적을 위하여 알렉산더 대제를 예루살렘과 연관지운 것이 아닌가하고 공정 하게 생각하는 적극적인 논쟁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위(僞) 칼리스테네스에 나오는 유대 이야기의 가필자에 의해서 (참). 피스터(Pfister)), 그리고랍비 문학에 나오는 알렉산더 이야기의 저자에 해서(참). 레위(Levi)) 만들어졌다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앞서 알렉산더의예루살렘 방문과 성전 제사에 관한 요세푸스의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변증문학에서 나온 전설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요세푸스(혹은 그의직접적인 자료)가 산발랏(Sanballat) 이야기와 결합한 알렉산더 이야기의 구성시기에 관한 것이다. 빌리히(Willrich)는 알렉산더 이야기가 대헤롯의 통치시 마르쿠스 아그립바(NarcosAgrippa)의 예루살렘 방문 이후에 구성되었으며, 아그립바의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는 알렉산더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전설을 기초로 하였다고 가정한 반면에 소 아시아와 그 밖의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시민권에 관하여 아그립바가 우호적으로 결정한 것은 메대(Media)와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특권을준 알렉산더 전설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빌리히는 더 나아가 사마리아인들과 알렉산더와의 교제에 관한 요세푸스의 암시는 주후 52년의 사건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고대. 20권.118=전쟁. 2권, 232). 그 당시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가는 도중에 몇명의 갈릴리인들이 살해당하여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유대의 수령들은 쿠마누스(Cumanus) 총독으로 부터 어떤 만족할 만한 사항도 얻어내지 못하여 사마리아의 수령들이 두로에서 행하였던 것처럼 수리아의 총독인 움미디우스 쿠아드라투스(Ummidius Quadratus)에게 호소하였다. 쿠아드라투스는 유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입수할 때까지 그의 결정을 유보하였다. 일견 빌리히의 설명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것의 두개의 부분에 있어서 중대한 이의가있다. 아그립바-알렉산더 병행구에 관한한 유대인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두 인물들 사이의 유사성은 뷔흘러(Buchler)가 제시한 것처럼 다소 적다. 그리고 알렉산더 시대의 분쟁과 주후 52년의 사마리아인-유대인 분쟁 사이의 병행구철에 관한한, 요세푸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으며, 그의 초기 작품인 ‘유대전쟁사’에기록된 그 사건에 판한 믿을만한 기사는 변증적인 허구로 바뀌었으며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를 기록하기 전에 야두아(Jad-dua)와 알렉산더에 관한 오랜 전승을 결합하였을 것이라고 볼수 없다.
전반적으로 볼 때보다 만족스럽고 정확한 견해는 알렉산더이야기의 구성에 관한 뷔흘러의 견해로, 상당히 길지만 나는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알렉산더가 수여한 것으로 보이는 안식 년(the Sabbatical year) 동안의세금 면제를 논의하면서 힐카누스 Ⅱ세와 율리우스 가이사의 시기에 있어서 고대. 14친. 202에 역사적 병행구를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배열)는 우리들의 자료가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만큼 어떠한 부분도 새롭게 수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가이사의 행동이 알렉산더 대제가 부여했던 특권의개념을 생각나게 했다고 인성 하도록 한다.
이 경우 유대인들을 대표하여 그(가이사) 앞에 싫던 대제사장은 실상 유대인의 대표자로서 나타났던 힐카누스 Ⅱ세였을 것이다. 가이사의 명령서가 지시하는 외국의 모든 유대인들은 바벨론과 메대 치하의 유대인들이라는 지칭으로 이해되었던 듯하며,가이사는 이오니의 유대인들에게는 자유로운 종료 행위를 보장해 주었고(고대. 14권. 10, 8과 10, 20-24), 그리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애굽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명백하게 확증해 주었다… 가이사가 부여했던 사제직과사제 재위기간에 대한 권리의인정서는 종교예식을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녔음을 암시한다. 이 인정서는 알렉산더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 그들 선조들의 율법을 자유롭게 준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가이사가 유대명절에 관해 그의 칙령에서 다루었다는 것과, 이 특권을 언급한 데메트리우스왕의 서신(마카비 1서, 10 : 36)이 가이사의 재위기간에 속했었다는 것은명백하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언급한 이 특별한 시기를 규정하기 위해서, 알렉산더 대제가 유대인들의 용기와 충성심에 대한보상은 결과적으로 다른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에서수리아 총독 앙드로마끄(Andromaque)가 화형되었을 때 -사실이것은 전혀 그럴듯하지 않는 것이지만- … 유대인들이 그들의관리들 앞에서 자신들의 특징을 명백히 보였다는 것을 인정하는한, 전체적인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그 특징을 드러냈었던경우를 찾는다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실제적으로 가이사가 사마리아 영토내에서 세금을 면제했다는 것과, 그조치는 애굽과의 전쟁동안 유대인들의 충성심과 용기에 의해서자극을 받아 취해졌음을 보았다. 결국 알렉산더는 가이사가 의도한 것을 명확하게 해주게 된다” 요세푸스가 쓴 진술 중의 알렉산드리아인에 대한 자료속에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어떻게 알렉산더(Alexander-Jauuda)와 관련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 뷔흘러(Buchler)의 설명은 덜 그럴듯하지만 고려할 만한 가치는 있다. “아마 애굽의 영토내에 대제사장(Hyrcanus Ⅱ, 주전 47년) 군대의 출현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일깨웠으며 사마리아 작가는 세겜(Sichem) 성전을 처음 의도한 위치에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호기적인 조건들을 이용하였다.” 결론적으로 나는 고대. 11권. 302이하에서 나오는 요세푸스의 진술들과 관련되는 뷔흘러가 발견한 것들 중에서 그의경탄적인 요약문을 인용하는 것보다 아마 더 나은 어떤 것은 없다고 본다. “팔레스틴에서의 알렉산더의 체류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에 관한 요세푸스의연관성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각각 쉽게 구분되어질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대부분 병렬되어 있기 때문이다.그중 둘은 유대적인 기원이고, 세 번째 것은 사마리아적인 기원이다. 첫 번째 것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루며 두 번째 것은 유대인들을 취급하는데 전혀 서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세번째 것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것으로, 알렉산더가이들에 대해 반대하며 거부했던 부분들을 내심 기뻐하면서 나쁜의도로 다루고 있다. 첫 번째의 유대적인 관련성은 아마도 정확한 세부설명들을 성경에 나오는 산발랏(Sanballat)의이야기와연관을 지으면서, 그리심(Garizim) 성전의 알렉산더대제에게기인한다는 것을 알렉산드리아인들에게 어떤 한가지 이유로 보여주려고 했었던 사마리아인들과의관련성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유대적인 이야기는 즉각적으로 애굽에 대한 가이사의 원정이후에 구성되어졌으며, 그리고 이 왕자(가이사)의 수 많은 자비로운 행위들을 알렉산더에게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 시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마리아 이야기와 두 번째의 유대적인 관념성또한 이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요세푸스가 모임을주도했는지 혹은 그보다 앞서 그것이 존재했는지에 대해 결정을내릴 수 없다.어쨌든 역사가는 알렉산드리아와 사마리아에 대한 원정과 관계하는 많은 세부설명을 첨가시켰다.
그가 주는 설명들은 우리에게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주후 1세기 중엽 유대 – 헬라적인 학문 연구소의 작업들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