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권 제 3장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로마에 사는 파울리나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제 3 장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로마에 사는 파울리나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1. 빌라도가 황제의 흉상을 예루살렘에 세웠으나 유대인들에 의해 제거되다



  [㈜ 고대. 18권. 3 : 1(55-62)는 전쟁. 2권. 9 : 2-4(169-177)과 병행구이다.]



 유대의 총독 빌라도[㈜ 전쟁사와 고대사의 빌라도 기사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이 삽화의 가장 적당한 연대는 빌라도 총독부임의 첫해인 주후 26년이다.]는 그의 군대를 가이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그 곳에 겨울을 지낼 진영(winer quarters)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흉상이 그려진 군기를[㈜ 이것은 아마도 군호(signa)일 거이다. 여기에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곤 하였다. 크라일링(C. H. Kraeling)은 그의 논문인 \”예루살렘의 로마 군기에 관한 삽화\”(The Episode of the Roman Standards at jerusalem) \’Harv. Theol. Rev.\’ xxxv, 1942, pp.263-289에서 이 사건을 숙고하면서, 그것들이 군기(vexilla)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군기에는 어떤 형상도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사용한 ( )라는 단어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앞세우고 예루살렘에 들어옴으로써 유대인들의 관례를 정면으로파괴하려 하였다.[㈜ 스몰우드(E. M. Smallwood)는 \”디베료 치하의 유대에 대한 소고\”(Some Notes on the jews under Tiberius), \’Latomus\’ xv, 1956, p.327에서 황제 흉상 사건과 수로(水路)건설사업중의 빌라도의 도발적인 행위는 디베료의 측근 고문인 세자누스(Sejanus)에 의하여 그의 죽기 직전인 주후 31년에 반유대정책의 일환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제안하고 있다(필로의 \’In Flacc.\’ 1과 \’Leg. ad Gaium\’ 159-161을 참조하라).] 왜냐하면 우리 유대인의 율법에는[㈜ 출 20 : 4, 신 4: 16을 보라.] 어떠한 형상도[㈜ 이 형상들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불유쾌한 감정을 느꼈을까\’ 크라일링(Kraeling)은 그의 논문 p.275에서 보면 그러한 반대가 로마 군기의 종료적 의미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들은 누미나(numina)로 여겼으며, 특별한 성소에 보관하였다. 군기에 대한 숭배에 대해서는 녹크(A. D. Nock)의 \”로마군과 로마의 종교 해\”(The Roman Army and the Roman Religiou Year) \’Harv. Theol. Rev.\’ xiv, 1952, p.239를 참조하라. 그러나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유대인들은 왜 상징적인 군기에 먼저 반대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필로는(Leg. ad Gaium 299-305) 빌라도가 그의 통치후기에 예루살렘의 헤롯궁에 황제를 기리기 위하여 상징적인 봉헌 방패를 세웠을 때 유대인들이 반대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크라일링은 p.280에서 실제적인 반대는 안토니아에 우상의 형상을 도입한 것에 대해서였다고 제안하였는데<참). 고대. 18권. 4 : 3(90-95)>, 이곳에서 형상들을 없애기 위한 특별히 악명 높은 법이 제정되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형상에 대한 예배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제사장의 의복들의 신성을 더럽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글에는 그 형상들이 안토니아에 들여졌다는 기록이 없다. 분명히 안토니아는 요새로서 도시를 통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군사적 요지임이 명백한데도 말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형상이 새겨진것뿐만이 아니라 우상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는 것들까지 제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는 크라일리의 추축은(P.281)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전쟁. 2권. 9 : 2(170)에 따르면 항의는 예루살렘에 어떠한 형상도 세우지 말라고 금지한 유대의 율법을 범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적용할 형상에 관한 특별한 법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거룩함을 인하여 율법을 범하는 것에 대하여 더 예민하게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유대인들은 인간을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을 범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참).\’Abodah Zarah\’ 47b). 참). 베반(E. Bevan)의 \’거룩한 형상들\'(Holy Images) 1940, pp.48-63 ; 구덴노흐(E. R. Goodenough)의 \’헬라 로마 시대의 유대의 상징들\'(Jewish Symbols in the Greco- Roman Period), iv, 1954, pp.11-24 ; 로쓰(C.Roth), \”주후 66년 예루살렘에서의 형상들에 반대하는 법령\”(An Ordinance againse Images in jerusalem A. D. 66). \’Harv. Theol. Rev.\’ xlix, 1956, pp.169-177.]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느 총독도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이와 같이형상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들어온 총독은 없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상(像)이 그려진 깃발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온 최초의 인물이 되었는데, 교활하게도 그는 백성들이모르게 한밤중에 이 일을 진행하였다.[㈜ 유세비우스의 \’Dem. Evang.\’ viii : 2, 123에서 인용된 대로 필로는 빌라도가 밤 중에 군기(shma\’iai)를 세운 것은 성전 안에서 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가이사랴로 가서 그 황제의 상(像)을 없애달라고 빌라도에게 여러날 요구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은 황제에게 모욕이 된다고 하며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묵살하였다. 그러나 몇일이 지나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요구를 멈추지 않자, 6일째 되는 날 빌라도는 비밀리에 병력을 무장시킨 다음 원형경기장 내에 설치된 발언대로 나아가면서 그 무장한 군인들로 하여금 그 주변에 숨어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다른 본문에는 \”그곳에 그는 군대를 숨겨 놓았다\”고 되어 있다.] 이윽고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다시 간청하기 위해 몰려들었을 때, 빌라도는 미리 약속된 신호를 보내 무장 군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포위하게 하고, 그들이 소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율법을 거역하느니 차라리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겠노라고 부르짖으면서 모두 그 자리에 드러누워목을 내놓았다. 마침내 빌라도는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와같은 헌신적인 결단에 크게 감동되어서 그 즉시 가이사의 상(像)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다시 옮기도록 명령하였다.[㈜ 메길랏 타아닛\’ (Megillat Taanit) xviii 에서는 \”기슬르(Kislev) 월 3일에 군기를 왕궁(성전\’)에서 제거하였다\”고 한다. 챠이틀린(S. Zeitlin)은 \’Megillat Taanit\’, 1922, p.87에서 이러한 진술에는 빌라도가 예루살렘으로부터 군기를 제거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2. 빌라도는 성전 소유의 돈을 수로공사를 위해 사용하다



빌라도는 성물(聖物)을 돈으로 환전하여[㈜ 전쟁. 2권. 9.4(175)의 병행구절에서 요세푸스는 \”코르보나스(Corbonas)로 알려진 성스러운 보물들을\” 빌라도가 끌어내었다. 택커래이는 그의 주(註)에서 코르보나스란 제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라는 사실과 그리고 빌라도는 제물로 드릴 짐승을 구매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유대인들이 기부하였던 shekalim을 자신의 세속적 목적을 위하여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격노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미쉬나(Mishnah) ·Shekalim\’ iii : 2을 보라] 예루살렘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공사를 했는데, 이것은 수원지로부터 약200퍼얼롱(furlong : 1마일의 1/8, 약 201.17m-역자주)[㈜ 약 23마일. 전쟁 2권. 9 : 4(175)에 의하면 거리는 두배정도 더 멀었다. ] 떨어진 곳에서 수로를 차단하여 벌이는 공사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공사에 투입되어 일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수만명의유대인들이 모여 빌라도에게 그 일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군중 속에 싸여 빌라도에게 입에 담기에도 험한 욕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빌라도는 상당수의 군인들을 유대인의 복장으로 가장하게 한 다음, 진압봉을 휴대하여 잠입시키고 유대인들을 포위하여 그들을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시위군중들이 빌라도를 향해 마구 욕설을 퍼붓자, 빌라도는 그들 속에 잠입한 군인들에게 약속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군인들은 빌라도가 명령한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유대인들을 구타했으며 폭동을 일으킨 자나 일으키지 않은 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진압봉을 휘둘러 댔다.[㈜ 니이제(Niese)의 판독(判讀)에 의하면 이 의미는 \”반란을 일으킨 자들뿐만 아니라,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까지도 모두 처벌을 하였고, 따라서 비무장한 자들을 체포하였다‥‥‥‥\”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군처럼 무장하지도 않았고 이와 같은 공격에 대한 사전의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또 상당수는 구타에 의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다. 폭동은 이렇게 끝이 났다.



3. 예수(플라비우스의 증언)



[㈜ 아이슬러(R.Eisiler), \’메시야 예수(The Messiah Jesus : A .H.Krappe에 의해서 번역됨), 1931, p.61에서 전통적인 본문이 물론 요세푸스의 어휘와 문장형식과 비슷하지만, 기독교 검열관들이 그의 문장을 변조한 것으로 생각되어, 고대. 18권. 2 : 3(63.64)의 원문을 교정하였다. \”이제 그의 시간이 되자(새로운 소동의 때) 예수라 하는, 그가 만약 인간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면 마술장이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그는 진실로 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적들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사실 그는 그 이상한 가르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속임수에 능한 선생이었다…·\”그러고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또한 헬라의 많은 사람들까지도 유혹하여 꾀었으며 (그들에 의해서) 메시야로(받아들여 졌다)‥‥ 우리 중의 유력인사들이 고소하여,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그러나 그렇게 되었어도 전에 그를 그토록 찬양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헛소리를) 예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3일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나타난다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이 그에 관하여-다시 살아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수만가지의 놀라운 일들을-예언한대로 된다고 그들은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라 \’메시아 주의자들\'(Messianists)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이 즈음에[㈜ 스칼리거(Scaliger)가 16세기에 처음으로 소위 Testimonium Flavianum이라 불리우는 이 문서에 대한 신빙성을 의시하기 시작한 뒤로<특별히 쉬러(Schuer) I : 544-545와 아이슬러(Eisler)의 위의 책 pp.36이하를 보라>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쉬러(Schuer), 니이제(Niese), 노덴(Norden), 챠이틀린(Zeitlin), 레위(Lewy), 져스터(Juster) 등은 이 문서의 진정성에 반대한다. 그 주장의 가장 중요 쟁점은 모든 사본들에서 나타나 있고, 유세비우스에 의해서도 인용되었지만- Hist. Eccl.\’ I : 11과 \’Dem, Evang,\’ iii : 5, 105-그 사용되는 단어와 문장 형식이 요세푸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요 쟁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 요세푸스는 충실한 바리새파 유대인이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슬라브역 요세푸스(the Slavonic Josephus)에서 나오는 예수에 대한 언급내용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요세푸스의 성향을 증명하는 것으로 거의 사용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슬라브역(The Slavonic Version) 너무 많은 문제점들로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다>.(2) 오리겐(Orgin, \’Contra Celsum\’ I.47과 \’마 13 :55 주석\’이 요세푸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명백하게 진술한다(주흐280년경).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주후 324년경에 우리가 갖고 있던 이 문서를 소유하고 있었다 : 어찌되었든 간에 노르위치(Norwich)의 감독인 리챠드 몬태규(Richard Montague)가 \”그는 메시야였다\”라는 구절을 기독교의 허위로 선언한 17세기 이래로, 몇몇 학자들이 280에서 324사이의 문장들이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어떠한 증거도 없지만 유세비우스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3) 이 구절이 일련의 반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진술의 연속성을 끊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 18권. 3 : 4(65)부분은 고대. 18권. 3 : 2(62) 바로 뒤에 위치해야 옳은 것처럼 보인다. (4) 몇가지 문장 형식에 문제가 있다. (예). tw\’n prwvtwn ajndrw\’n par! hmi\’n은 요세푸스가 유대인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택커래이와 리챠드(Richards) 그리고 셧(Shutt)은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어휘들은 예로 들고 있다. 곧 hdonh\’ devcesqai 그리고 trivrhn e[cwn hme\’vran 등이다. 라쿠오이어(R. Laqueur)의 논문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Der Judische Historiker Flavius Josephus), 1920, pp.274이하에서 그는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요세푸스는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요세푸스는 부흥하는 기독교 종파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본문을 끼워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측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견해는 현재 우리가 가진 본문을 실제로 요세푸스가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가필자(加筆者)가 변조했을 가능성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예수라고 하는 현자(wise man) 한 사람이 살았다. 예수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으며 그의 진리를[㈜ 다른 사본에는(택커래이의 교정문) \”특이한 것\”(the unusual).]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 되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 명성이 놓았다. 그는바로 메시야(Messiah)였다.[㈜ 다른 사본에는 <Class. Quart.\’xxi. 1937, p.176에 있는 리챠드(Richards)와 셧(shutt)의 교정문> \”소위(所謂)) 그리스도\”(the so-called christ).] 빌라도는 우리 유대인 중 고위층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도록 명령했으나, 처음부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에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예수가 죽은지 3일째 되는날,[㈜ 리챠드(Richards)와 셧(shutt)은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이라는 부분이 기독교 검열관에 의해서 삭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했던 바, 예수에 대한 많은 불가사의한 일들 중의하나였다.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



4. 파울리나와 그녀의 애인 ; 이시스의 사제들이 속임수를 쓰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85에 의하면 실제로는 주후19년이다. 그리고 주후30년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기에 대한 이야기 중간에 이 사건들이 끼어들어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츠측해낼 수 있다. 스몰우드(E. M. Smallwood)는 그의 논문 \”디베료 치하의 유대에 대한 소고\”(Some Notes on the Jews under Tiberius), \’Latomus\’ xv, 1956, p.326에서 요세푸스가 제시한 연대를 거부한다. 그는 이 연대를 세자누스(sejanus)의 핍박으로 인해서 주후 30년에 겪었던 유대인들의 위험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비행(非行)이 유대인들을 소란스럽게 했다. 또 동시에 로마의 이시스(Isis)신전과 연루된 일련의 불명예스러운 추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시스 신전과 관계된 일을 먼저 설명하고 그 다음에 유대인의 운명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 85와 수에토니우스 \’Tib.\’36 둘 다 애굽인들과 유대인들의 예배 행위에 대한 디베료의 핍박을 연결시킨다.] 로마에는 파울리나(Paulina)라는[㈜ 파르(C. Pharr)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요세푸스의 증언\”(The Testimony of Josephyus to Christianity), \’Am. Jour. of Philol.\’ xlviii, 1927, p.144에서 문두스와 파울리나(Mundus and Paulina)이야기의 문학 형태가 애굽의 왕이었던 넥타네부스 Ⅱ세(Nectanebus Ⅱ)의 고전적인 속임수 이야기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위(僞) 칼리스테네스(Pseudo-Callisthenes)의 \’알렉사더의 역사\'(History of Alexander) 1 : 4이하에 의하면 이 애굽의 왕은 마게도냐의 왕 빌립(Philp)의 아내인 올림피아스(olympias)를 속여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제우스 암몬(Jeus Ammon)으로 믿게 하여, 그녀를 통해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아버지가 되었다.]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그녀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이고 품행이 단정했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여자였다. 또한 그녀는 부(富)의 특권도 누리고 있었고 뛰어난 미모에다 여자로서는 가장 좋은 나이였으며 정숙한 품행으로 일상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녀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그로그(E. Groag)는 \’Prosopog. Lmp.\’ ii. A. 1528에서 다음과 같이 그럴 듯하게 추측한다. \’이 사투르니누스(Saturnius)는 두 명의 사투르니누스, 즉 가이우스(Gaius, 주후 4세기의 집정관)나 그의 형제 중의 한명임에 틀림없다.\’] 결혼했는데 그자도 역시 그녀의 명성에 못지 않은 그런 남자였다. 그런데 그 시대의 기사단 중에서고위급인 데키우스 문두스(Decius Mundus)라는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데키우스 문두스는 그녀에게 많은 선물공세를 폈지만, 그녀는 선물 앞에 무릎을 꿇을 여자가 아니었다.그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 여자는 오히려 그를 더 경멸한다는사실을 알고는 그녀에 대한 열정이 더욱 더욱 더 뜨겁게 타올라 그녀에게 자기와 단 한번만 동침하면 200,000아덴 드라크마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조차 거절당하자, 그는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굶어죽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실제로 행동에옮겼다. 그러나 문두스에게는 그의 부친의 종이었다가 자유의몸이 된, 모든 종류의 불행을 해결해 주는 이다(Ida)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문두스가 죽기를 결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그에게로 급히 달려와서, 그가 파울리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수 있는 그럴 듯한 방법이 자기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또는, \”그는 사라져버릴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문두스는 이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다는먼저 파울리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최소한 50,000드라크마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돈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문두스는 파울리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하여 그녀의 요구대로 해주었다. 그러나 이다는 파울리나가 뇌물 앞에서 결코굴복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문두스가 시도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이다(Ida)는 그녀가 이시스 신전 예배에 매우 열심이라는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은계략을 세웠다. 이다(Ida)는 몇 명의 제사장을 만나서 자기에게협조하는 댓가로 25,000드라크나를 1차로 주고, 일이 성공적으로 달성될 경우 2차로 그만큼 더 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런 뒤 그들에게 먼저 파울리나를 향한 문두스의 열정적인 애정을 설명해주고 그 애정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 달라고부탁했다. 25,000드라크마라는 돈의 위력에 사로잡힌 사제들은 기꺼이 그 일에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사제가 파울리나의 집에 급히 찾아가 그녀에게 개인 면담을 요청하였다. 이 면담이 이루어지자 그는 그녀에게 지금 자신은 아누비스(Anubis)신의[㈜ 이시스(Isis)의 남편인 오시리스(Osiris)가 죽은 후에, 오시리스의 잘라진 몸의 조각들을 이시스가 모으는데 도와주도록 요청받은 자는 아누비스(Anubis)였다. 따라서 아누비스는 죽음의 신이 되었다.] 명에 따라 그녀를 만나는것이라고 말했다. \”아누비스 신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데려오라고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녀에게 더 할 수 없는 소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누비스 신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아누비스 신이 자신을 초대해 동침하기를 원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남편은 그녀의 정절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일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전으로 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사제는 사당 안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문두스는 미리 그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거절 없이 그녀와 동침하였다. 그가 아누비스 신인 줄로만 알았던 파울리나는 밤새껏 그에게 봉사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문두스는 그 계획을 모르고 있던 사제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곳을 빠져나왔다. 파울리나도 아침 일찍 집으로 가서 남편에게 아누비스의 신성한 자태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다른 부인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침이 마르도록 그에 관해이야기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도무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정숙한 행동과 사회적지위를 생각하면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믿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일이 있은지 이틀 후에 문두스는파울리나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울리나,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줄 뻔했던 200,000드라크마를 절약하게 해주었소. 당신은 내가 주겠다던 300,000드라크마 중 단 한푼도 받지 않고 내가 당신에게 요구했던 봉사를 완전하게 해주었소. 당신은 문두스라는이름을 비웃겠지만 내가 아누비스 신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얻은기쁨을 생각하면, 이름이야 어찌됐던 무슨 상관이요\’ 이제부터내 이름을 아누비스라 하겠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떠났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그의 이와 같은 비겁한 행위를 알고 옷을 찢으며 원통해 하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일을 사실대로 고백하고 반드시 보복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즉시 황제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디베료 황제는 사제들을 심문하여 자세한 경위를 조사한 후, 사제들과 이다(Ida)를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이다(Ida)의 행위는 파렴치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파울리나로 하여금 정절을 더럽히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또한 그 신전을파괴하고 이시스의 신상을 티베르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문두스에게는 추방령이 떨어진 것으로 그쳤는데, 그 이유는 디베료 황제가, 범한 죄에 대해 더 심한 형벌을 주어서는 안될 정도로 사랑에 눈이 멀어 저지른 가벼운 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이시스신전에서 이 사제들의 뻔뻔스러운 행위는 이와 같았다. 이제는 이와 동시에 있었던 일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5. 로마에서의 유대인의 횡령으로 디베료가 유대인들의 추방을 명하다



 로마에 무례한 한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율법을 어기고 고소를당했는데, 벌을 받을까 두려워 자기 나라를 떠나온 사람이었다.그는 로마에 살면서 모세 율법과 그 지혜를 해석하면서 살아왔다.그는 자기와 같이 사악한 세 사람을 공모자를 끌어들였다. 그런데유대교 개종자로서[㈜ 로마에서의 개종을 위한 유대인의 열정에 대해서는, 특히 호레이스(Horace)의 \’Sat.\’ I. 4. 142이하. 와 타키투스의 \’Hist.\’ v.5를 보라.] 고위층의 부인인 풀비아(Fulvia)가 그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녀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자주색 옷감과 금을 보내도록 시킨 다음,[㈜ 풀비아(Fulvia)가 성전의 창기가 되도록 실제로 초청되었다는 하이델(W. A. Heidel)의 공상적인 제안은(\”유대인들은 주후 19년에 왜 이달리야로부터 추방되었는가\”\’\”, /Am. Joru. of Philol.\’ xil, 1920, pp.38~47). 타키투스(Tacitus)진술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그 진술은, \’추방\’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장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디베료(Tiberius)가 말을 타는 부족들 중 여인들이 매춘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했다는 진술이다. 그러나 이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종교적인 매춘행위는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에 그것들을 갈취하여 자기들의 용돈으로 써버렸다. 이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풀비아의 남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는[㈜ 풀비아(Fulvia)의 남편의 이름과 파울리나(Paulina, 고대. 18권. 3 : 4(66)의 남편의 이름의 동일성은 우연한 일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저스(R. S. Rogers)는 그의 \”Fulvia Paulina, C. Sentii Saturnini\”, \’Am. Jour. of Philol.\’ 1iii, 1932, pp.252~!256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같은 사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언급되었고, 이 사투르니누스의 아내의 이름은 풀비아 파울리나(Fulvia Paulina)였다.] 아내의 재촉으로 그의 친구였던 디베료 황제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렸다.황제는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추방은, 수에토니우스의 \’Tib.\’ 36과 Dio. Cass. 1vii. 18, 그리고 타키누스의 \’연대기\’. ii. 85(추방을 애굽의 제의의 지지자들에게까지 확대시킨다)에서 언급되었다. 참). Sen. Epist. cviii. 22. 떠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강제로 추방되거나, 그들의 질서에 반항할 경우에는 노예로 전락하게 됨으로 위협을 받았다. 디오(Dio)는 그가 유대인들의 추방에 대한 이유로 제시한 것, 즉 유대인들이 많은 로마인들을 그들의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있었다는 이유를 제시한 것에 있어서 옳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건과 개종 사건과의 연결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해 확실시된다. 애굽의 예배의식이나 유대의 예배의식을 신봉하는 자는 그들의 종교적인 예복이나 장식품들을 태워버리도록 강요받았다. 수에토니우스는 나아가서, 개종한다는 것은 추방에 포함되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마찬가지로, 타키투스(Tacitus)도 그가 \”미신에 오염된 자\”로서 추방된 자들에 대해서 언급할 때, 역시 개종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추방 사건에 대해서는, 특히 법적인 관점에서의 추방 사건에 대해서는, 라댕(M. Radin)의 \’헬라인과 로마인들 사이에서의 유대인들\'(The jews among the Greeks and Romans), 1915, pp.306-313을 보라. ] 그래서 로마집정관(Consul)들은 군대 사역을 위해 유대인들 중에서 4천명을 뽑아 사르디니아(Sar-dinia)섬으로 보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85에 따르면, 유대인뿐만 아니라 애굽의 예배의식의 지지자들도 사르디니아(Sardinia)섬으로 추방되었다. 타키투스는 또한 전체 숫자를 4000명으로 언급하고, 그들은 징병을 받을 연령에 있는 자들이었다고 언급한다. 그는 또한 그들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 계급이었다고 덧붙여서 말한다. 그들은 사르디니아 섬의 도적들을 저지하도록 그 섬으로 보내졌다고 타키투스는 말한다. 수에토니우스는 \’Tib.\’ 3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을 군대로 징집하는 것은 그들을 사르디니아의 위험한 지역으로 보내려는 하나의 구실이었는데, 추방된 그들은 죽게 되리라는 것이 거의 분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르디니아섬의 기후는 이달리야 반도의 기후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기후의 심각성에 대한 언급은 일리가 없는 것이며, 사르디니아로의 추방은 단지 개종자들을 유대의 영향으로부터 멀리 한다는 의도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제안하는 라댕(M. Radin)의 언급(전게서 p.312)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유대 율법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봉사하기를 거절한 많은 유대인들은 처벌당하였다. 이렇게 네 사람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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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권 제 3장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로마에 사는 파울리나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3 장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로마에 사는 파울리나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1. 빌라도가 황제의 흉상을 예루살렘에 세웠으나 유대인들에 의해 제거되다


      [㈜ 고대. 18권. 3 : 1(55-62)는 전쟁. 2권. 9 : 2-4(169-177)과 병행구이다.]


     유대의 총독 빌라도[㈜ 전쟁사와 고대사의 빌라도 기사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이 삽화의 가장 적당한 연대는 빌라도 총독부임의 첫해인 주후 26년이다.]는 그의 군대를 가이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그 곳에 겨울을 지낼 진영(winer quarters)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흉상이 그려진 군기를[㈜ 이것은 아마도 군호(signa)일 거이다. 여기에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곤 하였다. 크라일링(C. H. Kraeling)은 그의 논문인 “예루살렘의 로마 군기에 관한 삽화”(The Episode of the Roman Standards at jerusalem) ‘Harv. Theol. Rev.’ xxxv, 1942, pp.263-289에서 이 사건을 숙고하면서, 그것들이 군기(vexilla)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군기에는 어떤 형상도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사용한 ( )라는 단어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앞세우고 예루살렘에 들어옴으로써 유대인들의 관례를 정면으로파괴하려 하였다.[㈜ 스몰우드(E. M. Smallwood)는 “디베료 치하의 유대에 대한 소고”(Some Notes on the jews under Tiberius), ‘Latomus’ xv, 1956, p.327에서 황제 흉상 사건과 수로(水路)건설사업중의 빌라도의 도발적인 행위는 디베료의 측근 고문인 세자누스(Sejanus)에 의하여 그의 죽기 직전인 주후 31년에 반유대정책의 일환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제안하고 있다(필로의 ‘In Flacc.’ 1과 ‘Leg. ad Gaium’ 159-161을 참조하라).] 왜냐하면 우리 유대인의 율법에는[㈜ 출 20 : 4, 신 4: 16을 보라.] 어떠한 형상도[㈜ 이 형상들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불유쾌한 감정을 느꼈을까’ 크라일링(Kraeling)은 그의 논문 p.275에서 보면 그러한 반대가 로마 군기의 종료적 의미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들은 누미나(numina)로 여겼으며, 특별한 성소에 보관하였다. 군기에 대한 숭배에 대해서는 녹크(A. D. Nock)의 “로마군과 로마의 종교 해”(The Roman Army and the Roman Religiou Year) ‘Harv. Theol. Rev.’ xiv, 1952, p.239를 참조하라. 그러나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유대인들은 왜 상징적인 군기에 먼저 반대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필로는(Leg. ad Gaium 299-305) 빌라도가 그의 통치후기에 예루살렘의 헤롯궁에 황제를 기리기 위하여 상징적인 봉헌 방패를 세웠을 때 유대인들이 반대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크라일링은 p.280에서 실제적인 반대는 안토니아에 우상의 형상을 도입한 것에 대해서였다고 제안하였는데<참). 고대. 18권. 4 : 3(90-95)>, 이곳에서 형상들을 없애기 위한 특별히 악명 높은 법이 제정되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형상에 대한 예배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제사장의 의복들의 신성을 더럽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글에는 그 형상들이 안토니아에 들여졌다는 기록이 없다. 분명히 안토니아는 요새로서 도시를 통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군사적 요지임이 명백한데도 말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형상이 새겨진것뿐만이 아니라 우상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는 것들까지 제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는 크라일리의 추축은(P.281)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전쟁. 2권. 9 : 2(170)에 따르면 항의는 예루살렘에 어떠한 형상도 세우지 말라고 금지한 유대의 율법을 범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적용할 형상에 관한 특별한 법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거룩함을 인하여 율법을 범하는 것에 대하여 더 예민하게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유대인들은 인간을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을 범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참).’Abodah Zarah’ 47b). 참). 베반(E. Bevan)의 ‘거룩한 형상들'(Holy Images) 1940, pp.48-63 ; 구덴노흐(E. R. Goodenough)의 ‘헬라 로마 시대의 유대의 상징들'(Jewish Symbols in the Greco- Roman Period), iv, 1954, pp.11-24 ; 로쓰(C.Roth), “주후 66년 예루살렘에서의 형상들에 반대하는 법령”(An Ordinance againse Images in jerusalem A. D. 66). ‘Harv. Theol. Rev.’ xlix, 1956, pp.169-177.]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느 총독도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이와 같이형상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들어온 총독은 없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상(像)이 그려진 깃발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온 최초의 인물이 되었는데, 교활하게도 그는 백성들이모르게 한밤중에 이 일을 진행하였다.[㈜ 유세비우스의 ‘Dem. Evang.’ viii : 2, 123에서 인용된 대로 필로는 빌라도가 밤 중에 군기(shma’iai)를 세운 것은 성전 안에서 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가이사랴로 가서 그 황제의 상(像)을 없애달라고 빌라도에게 여러날 요구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은 황제에게 모욕이 된다고 하며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묵살하였다. 그러나 몇일이 지나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요구를 멈추지 않자, 6일째 되는 날 빌라도는 비밀리에 병력을 무장시킨 다음 원형경기장 내에 설치된 발언대로 나아가면서 그 무장한 군인들로 하여금 그 주변에 숨어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다른 본문에는 “그곳에 그는 군대를 숨겨 놓았다”고 되어 있다.] 이윽고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다시 간청하기 위해 몰려들었을 때, 빌라도는 미리 약속된 신호를 보내 무장 군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포위하게 하고, 그들이 소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율법을 거역하느니 차라리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겠노라고 부르짖으면서 모두 그 자리에 드러누워목을 내놓았다. 마침내 빌라도는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와같은 헌신적인 결단에 크게 감동되어서 그 즉시 가이사의 상(像)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다시 옮기도록 명령하였다.[㈜ 메길랏 타아닛’ (Megillat Taanit) xviii 에서는 “기슬르(Kislev) 월 3일에 군기를 왕궁(성전’)에서 제거하였다”고 한다. 챠이틀린(S. Zeitlin)은 ‘Megillat Taanit’, 1922, p.87에서 이러한 진술에는 빌라도가 예루살렘으로부터 군기를 제거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2. 빌라도는 성전 소유의 돈을 수로공사를 위해 사용하다


    빌라도는 성물(聖物)을 돈으로 환전하여[㈜ 전쟁. 2권. 9.4(175)의 병행구절에서 요세푸스는 “코르보나스(Corbonas)로 알려진 성스러운 보물들을” 빌라도가 끌어내었다. 택커래이는 그의 주(註)에서 코르보나스란 제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라는 사실과 그리고 빌라도는 제물로 드릴 짐승을 구매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유대인들이 기부하였던 shekalim을 자신의 세속적 목적을 위하여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격노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미쉬나(Mishnah) ·Shekalim’ iii : 2을 보라] 예루살렘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공사를 했는데, 이것은 수원지로부터 약200퍼얼롱(furlong : 1마일의 1/8, 약 201.17m-역자주)[㈜ 약 23마일. 전쟁 2권. 9 : 4(175)에 의하면 거리는 두배정도 더 멀었다. ] 떨어진 곳에서 수로를 차단하여 벌이는 공사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공사에 투입되어 일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수만명의유대인들이 모여 빌라도에게 그 일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군중 속에 싸여 빌라도에게 입에 담기에도 험한 욕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빌라도는 상당수의 군인들을 유대인의 복장으로 가장하게 한 다음, 진압봉을 휴대하여 잠입시키고 유대인들을 포위하여 그들을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시위군중들이 빌라도를 향해 마구 욕설을 퍼붓자, 빌라도는 그들 속에 잠입한 군인들에게 약속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군인들은 빌라도가 명령한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유대인들을 구타했으며 폭동을 일으킨 자나 일으키지 않은 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진압봉을 휘둘러 댔다.[㈜ 니이제(Niese)의 판독(判讀)에 의하면 이 의미는 “반란을 일으킨 자들뿐만 아니라,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까지도 모두 처벌을 하였고, 따라서 비무장한 자들을 체포하였다‥‥‥‥”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군처럼 무장하지도 않았고 이와 같은 공격에 대한 사전의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또 상당수는 구타에 의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다. 폭동은 이렇게 끝이 났다.


    3. 예수(플라비우스의 증언)


    [㈜ 아이슬러(R.Eisiler), ‘메시야 예수(The Messiah Jesus : A .H.Krappe에 의해서 번역됨), 1931, p.61에서 전통적인 본문이 물론 요세푸스의 어휘와 문장형식과 비슷하지만, 기독교 검열관들이 그의 문장을 변조한 것으로 생각되어, 고대. 18권. 2 : 3(63.64)의 원문을 교정하였다. “이제 그의 시간이 되자(새로운 소동의 때) 예수라 하는, 그가 만약 인간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면 마술장이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그는 진실로 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적들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사실 그는 그 이상한 가르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속임수에 능한 선생이었다…·”그러고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또한 헬라의 많은 사람들까지도 유혹하여 꾀었으며 (그들에 의해서) 메시야로(받아들여 졌다)‥‥ 우리 중의 유력인사들이 고소하여,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그러나 그렇게 되었어도 전에 그를 그토록 찬양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헛소리를) 예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3일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나타난다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이 그에 관하여-다시 살아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수만가지의 놀라운 일들을-예언한대로 된다고 그들은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라 ‘메시아 주의자들'(Messianists)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이 즈음에[㈜ 스칼리거(Scaliger)가 16세기에 처음으로 소위 Testimonium Flavianum이라 불리우는 이 문서에 대한 신빙성을 의시하기 시작한 뒤로<특별히 쉬러(Schuer) I : 544-545와 아이슬러(Eisler)의 위의 책 pp.36이하를 보라>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쉬러(Schuer), 니이제(Niese), 노덴(Norden), 챠이틀린(Zeitlin), 레위(Lewy), 져스터(Juster) 등은 이 문서의 진정성에 반대한다. 그 주장의 가장 중요 쟁점은 모든 사본들에서 나타나 있고, 유세비우스에 의해서도 인용되었지만- Hist. Eccl.’ I : 11과 ‘Dem, Evang,’ iii : 5, 105-그 사용되는 단어와 문장 형식이 요세푸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요 쟁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 요세푸스는 충실한 바리새파 유대인이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슬라브역 요세푸스(the Slavonic Josephus)에서 나오는 예수에 대한 언급내용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요세푸스의 성향을 증명하는 것으로 거의 사용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슬라브역(The Slavonic Version) 너무 많은 문제점들로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다>.(2) 오리겐(Orgin, ‘Contra Celsum’ I.47과 ‘마 13 :55 주석’이 요세푸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명백하게 진술한다(주흐280년경).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주후 324년경에 우리가 갖고 있던 이 문서를 소유하고 있었다 : 어찌되었든 간에 노르위치(Norwich)의 감독인 리챠드 몬태규(Richard Montague)가 “그는 메시야였다”라는 구절을 기독교의 허위로 선언한 17세기 이래로, 몇몇 학자들이 280에서 324사이의 문장들이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어떠한 증거도 없지만 유세비우스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3) 이 구절이 일련의 반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진술의 연속성을 끊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 18권. 3 : 4(65)부분은 고대. 18권. 3 : 2(62) 바로 뒤에 위치해야 옳은 것처럼 보인다. (4) 몇가지 문장 형식에 문제가 있다. (예). tw’n prwvtwn ajndrw’n par! hmi’n은 요세푸스가 유대인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택커래이와 리챠드(Richards) 그리고 셧(Shutt)은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어휘들은 예로 들고 있다. 곧 hdonh’ devcesqai 그리고 trivrhn e[cwn hme’vran 등이다. 라쿠오이어(R. Laqueur)의 논문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Der Judische Historiker Flavius Josephus), 1920, pp.274이하에서 그는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요세푸스는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요세푸스는 부흥하는 기독교 종파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본문을 끼워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측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견해는 현재 우리가 가진 본문을 실제로 요세푸스가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가필자(加筆者)가 변조했을 가능성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예수라고 하는 현자(wise man) 한 사람이 살았다. 예수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으며 그의 진리를[㈜ 다른 사본에는(택커래이의 교정문) “특이한 것”(the unusual).]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 되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 명성이 놓았다. 그는바로 메시야(Messiah)였다.[㈜ 다른 사본에는 “소위(所謂)) 그리스도”(the so-called christ).] 빌라도는 우리 유대인 중 고위층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도록 명령했으나, 처음부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에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예수가 죽은지 3일째 되는날,[㈜ 리챠드(Richards)와 셧(shutt)은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이라는 부분이 기독교 검열관에 의해서 삭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했던 바, 예수에 대한 많은 불가사의한 일들 중의하나였다.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


    4. 파울리나와 그녀의 애인 ; 이시스의 사제들이 속임수를 쓰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85에 의하면 실제로는 주후19년이다. 그리고 주후30년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기에 대한 이야기 중간에 이 사건들이 끼어들어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츠측해낼 수 있다. 스몰우드(E. M. Smallwood)는 그의 논문 “디베료 치하의 유대에 대한 소고”(Some Notes on the Jews under Tiberius), ‘Latomus’ xv, 1956, p.326에서 요세푸스가 제시한 연대를 거부한다. 그는 이 연대를 세자누스(sejanus)의 핍박으로 인해서 주후 30년에 겪었던 유대인들의 위험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비행(非行)이 유대인들을 소란스럽게 했다. 또 동시에 로마의 이시스(Isis)신전과 연루된 일련의 불명예스러운 추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시스 신전과 관계된 일을 먼저 설명하고 그 다음에 유대인의 운명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 85와 수에토니우스 ‘Tib.’36 둘 다 애굽인들과 유대인들의 예배 행위에 대한 디베료의 핍박을 연결시킨다.] 로마에는 파울리나(Paulina)라는[㈜ 파르(C. Pharr)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요세푸스의 증언”(The Testimony of Josephyus to Christianity), ‘Am. Jour. of Philol.’ xlviii, 1927, p.144에서 문두스와 파울리나(Mundus and Paulina)이야기의 문학 형태가 애굽의 왕이었던 넥타네부스 Ⅱ세(Nectanebus Ⅱ)의 고전적인 속임수 이야기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위(僞) 칼리스테네스(Pseudo-Callisthenes)의 ‘알렉사더의 역사'(History of Alexander) 1 : 4이하에 의하면 이 애굽의 왕은 마게도냐의 왕 빌립(Philp)의 아내인 올림피아스(olympias)를 속여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제우스 암몬(Jeus Ammon)으로 믿게 하여, 그녀를 통해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아버지가 되었다.]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그녀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이고 품행이 단정했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여자였다. 또한 그녀는 부(富)의 특권도 누리고 있었고 뛰어난 미모에다 여자로서는 가장 좋은 나이였으며 정숙한 품행으로 일상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녀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그로그(E. Groag)는 ‘Prosopog. Lmp.’ ii. A. 1528에서 다음과 같이 그럴 듯하게 추측한다. ‘이 사투르니누스(Saturnius)는 두 명의 사투르니누스, 즉 가이우스(Gaius, 주후 4세기의 집정관)나 그의 형제 중의 한명임에 틀림없다.’] 결혼했는데 그자도 역시 그녀의 명성에 못지 않은 그런 남자였다. 그런데 그 시대의 기사단 중에서고위급인 데키우스 문두스(Decius Mundus)라는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데키우스 문두스는 그녀에게 많은 선물공세를 폈지만, 그녀는 선물 앞에 무릎을 꿇을 여자가 아니었다.그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 여자는 오히려 그를 더 경멸한다는사실을 알고는 그녀에 대한 열정이 더욱 더욱 더 뜨겁게 타올라 그녀에게 자기와 단 한번만 동침하면 200,000아덴 드라크마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조차 거절당하자, 그는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굶어죽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실제로 행동에옮겼다. 그러나 문두스에게는 그의 부친의 종이었다가 자유의몸이 된, 모든 종류의 불행을 해결해 주는 이다(Ida)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문두스가 죽기를 결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그에게로 급히 달려와서, 그가 파울리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수 있는 그럴 듯한 방법이 자기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또는, “그는 사라져버릴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문두스는 이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다는먼저 파울리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최소한 50,000드라크마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돈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문두스는 파울리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하여 그녀의 요구대로 해주었다. 그러나 이다는 파울리나가 뇌물 앞에서 결코굴복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문두스가 시도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이다(Ida)는 그녀가 이시스 신전 예배에 매우 열심이라는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은계략을 세웠다. 이다(Ida)는 몇 명의 제사장을 만나서 자기에게협조하는 댓가로 25,000드라크나를 1차로 주고, 일이 성공적으로 달성될 경우 2차로 그만큼 더 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런 뒤 그들에게 먼저 파울리나를 향한 문두스의 열정적인 애정을 설명해주고 그 애정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 달라고부탁했다. 25,000드라크마라는 돈의 위력에 사로잡힌 사제들은 기꺼이 그 일에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사제가 파울리나의 집에 급히 찾아가 그녀에게 개인 면담을 요청하였다. 이 면담이 이루어지자 그는 그녀에게 지금 자신은 아누비스(Anubis)신의[㈜ 이시스(Isis)의 남편인 오시리스(Osiris)가 죽은 후에, 오시리스의 잘라진 몸의 조각들을 이시스가 모으는데 도와주도록 요청받은 자는 아누비스(Anubis)였다. 따라서 아누비스는 죽음의 신이 되었다.] 명에 따라 그녀를 만나는것이라고 말했다. “아누비스 신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데려오라고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녀에게 더 할 수 없는 소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누비스 신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아누비스 신이 자신을 초대해 동침하기를 원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남편은 그녀의 정절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일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전으로 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사제는 사당 안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문두스는 미리 그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거절 없이 그녀와 동침하였다. 그가 아누비스 신인 줄로만 알았던 파울리나는 밤새껏 그에게 봉사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문두스는 그 계획을 모르고 있던 사제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곳을 빠져나왔다. 파울리나도 아침 일찍 집으로 가서 남편에게 아누비스의 신성한 자태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다른 부인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침이 마르도록 그에 관해이야기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도무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정숙한 행동과 사회적지위를 생각하면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믿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일이 있은지 이틀 후에 문두스는파울리나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울리나,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줄 뻔했던 200,000드라크마를 절약하게 해주었소. 당신은 내가 주겠다던 300,000드라크마 중 단 한푼도 받지 않고 내가 당신에게 요구했던 봉사를 완전하게 해주었소. 당신은 문두스라는이름을 비웃겠지만 내가 아누비스 신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얻은기쁨을 생각하면, 이름이야 어찌됐던 무슨 상관이요’ 이제부터내 이름을 아누비스라 하겠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떠났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그의 이와 같은 비겁한 행위를 알고 옷을 찢으며 원통해 하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일을 사실대로 고백하고 반드시 보복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즉시 황제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디베료 황제는 사제들을 심문하여 자세한 경위를 조사한 후, 사제들과 이다(Ida)를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이다(Ida)의 행위는 파렴치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파울리나로 하여금 정절을 더럽히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또한 그 신전을파괴하고 이시스의 신상을 티베르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문두스에게는 추방령이 떨어진 것으로 그쳤는데, 그 이유는 디베료 황제가, 범한 죄에 대해 더 심한 형벌을 주어서는 안될 정도로 사랑에 눈이 멀어 저지른 가벼운 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이시스신전에서 이 사제들의 뻔뻔스러운 행위는 이와 같았다. 이제는 이와 동시에 있었던 일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5. 로마에서의 유대인의 횡령으로 디베료가 유대인들의 추방을 명하다


     로마에 무례한 한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율법을 어기고 고소를당했는데, 벌을 받을까 두려워 자기 나라를 떠나온 사람이었다.그는 로마에 살면서 모세 율법과 그 지혜를 해석하면서 살아왔다.그는 자기와 같이 사악한 세 사람을 공모자를 끌어들였다. 그런데유대교 개종자로서[㈜ 로마에서의 개종을 위한 유대인의 열정에 대해서는, 특히 호레이스(Horace)의 ‘Sat.’ I. 4. 142이하. 와 타키투스의 ‘Hist.’ v.5를 보라.] 고위층의 부인인 풀비아(Fulvia)가 그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녀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자주색 옷감과 금을 보내도록 시킨 다음,[㈜ 풀비아(Fulvia)가 성전의 창기가 되도록 실제로 초청되었다는 하이델(W. A. Heidel)의 공상적인 제안은(“유대인들은 주후 19년에 왜 이달리야로부터 추방되었는가”‘”, /Am. Joru. of Philol.’ xil, 1920, pp.38~47). 타키투스(Tacitus)진술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그 진술은, ‘추방’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장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디베료(Tiberius)가 말을 타는 부족들 중 여인들이 매춘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했다는 진술이다. 그러나 이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종교적인 매춘행위는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에 그것들을 갈취하여 자기들의 용돈으로 써버렸다. 이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풀비아의 남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는[㈜ 풀비아(Fulvia)의 남편의 이름과 파울리나(Paulina, 고대. 18권. 3 : 4(66)의 남편의 이름의 동일성은 우연한 일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저스(R. S. Rogers)는 그의 “Fulvia Paulina, C. Sentii Saturnini”, ‘Am. Jour. of Philol.’ 1iii, 1932, pp.252~!256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같은 사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언급되었고, 이 사투르니누스의 아내의 이름은 풀비아 파울리나(Fulvia Paulina)였다.] 아내의 재촉으로 그의 친구였던 디베료 황제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렸다.황제는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추방은, 수에토니우스의 ‘Tib.’ 36과 Dio. Cass. 1vii. 18, 그리고 타키누스의 ‘연대기’. ii. 85(추방을 애굽의 제의의 지지자들에게까지 확대시킨다)에서 언급되었다. 참). Sen. Epist. cviii. 22. 떠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강제로 추방되거나, 그들의 질서에 반항할 경우에는 노예로 전락하게 됨으로 위협을 받았다. 디오(Dio)는 그가 유대인들의 추방에 대한 이유로 제시한 것, 즉 유대인들이 많은 로마인들을 그들의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있었다는 이유를 제시한 것에 있어서 옳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건과 개종 사건과의 연결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해 확실시된다. 애굽의 예배의식이나 유대의 예배의식을 신봉하는 자는 그들의 종교적인 예복이나 장식품들을 태워버리도록 강요받았다. 수에토니우스는 나아가서, 개종한다는 것은 추방에 포함되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마찬가지로, 타키투스(Tacitus)도 그가 “미신에 오염된 자”로서 추방된 자들에 대해서 언급할 때, 역시 개종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추방 사건에 대해서는, 특히 법적인 관점에서의 추방 사건에 대해서는, 라댕(M. Radin)의 ‘헬라인과 로마인들 사이에서의 유대인들'(The jews among the Greeks and Romans), 1915, pp.306-313을 보라. ] 그래서 로마집정관(Consul)들은 군대 사역을 위해 유대인들 중에서 4천명을 뽑아 사르디니아(Sar-dinia)섬으로 보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85에 따르면, 유대인뿐만 아니라 애굽의 예배의식의 지지자들도 사르디니아(Sardinia)섬으로 추방되었다. 타키투스는 또한 전체 숫자를 4000명으로 언급하고, 그들은 징병을 받을 연령에 있는 자들이었다고 언급한다. 그는 또한 그들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 계급이었다고 덧붙여서 말한다. 그들은 사르디니아 섬의 도적들을 저지하도록 그 섬으로 보내졌다고 타키투스는 말한다. 수에토니우스는 ‘Tib.’ 3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을 군대로 징집하는 것은 그들을 사르디니아의 위험한 지역으로 보내려는 하나의 구실이었는데, 추방된 그들은 죽게 되리라는 것이 거의 분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르디니아섬의 기후는 이달리야 반도의 기후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기후의 심각성에 대한 언급은 일리가 없는 것이며, 사르디니아로의 추방은 단지 개종자들을 유대의 영향으로부터 멀리 한다는 의도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제안하는 라댕(M. Radin)의 언급(전게서 p.312)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유대 율법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봉사하기를 거절한 많은 유대인들은 처벌당하였다. 이렇게 네 사람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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