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권 제 4장 사마리아인들의 소요를 일으키자 빌라도가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빌라도가 고소당한 것과 비텔리우스가 유대인과 파르티아인들에게 행한 일들에 대하여

 


 제 4 장




사마리아인들의 소요를 일으키자 빌라도가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빌라도가 고소당한 것과 비텔리우스가 유대인과 파르티아인들에게 행한 일들에 대하여



1. 빌라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의 소요를 진압하다



 사마리아 소동으로 시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군중들의욕구를 만족시키는 거짓말은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유대인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자기와 함께 그리심산(Mount Gerizim)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신성한 산이라고 여겼던 산이다. 그는 무리들에게 확실하게 말하기를, 그들이 산에 도착하면 그 곳에 묻혀있는 거룩한 그릇들을 보여줄 것인데 그것들은 모세가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는 가스터(M. Gaster)의 \’사마리아인들\'(The Samaritans), 1925, pp.90~91을 보라. 그는 이곳에서 회복시키는 자(타헤브 또는 샤헤브)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신앙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그 신앙은 그들의 열 번째 계명과 신명기 18장 15절, 18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모세가 태어난 레위지파로부터 한 선지자가 나와서 성전의 숨겨진 그릇을 발견할 것이라는 신앙이다. 기름의 매장과 성전의 거룩한 그릇에 관한 탈무드의 전승에 관해서는 아프토비쳐(V.Aptowitzer)의 \’하스몬 시대의 정당정치\'(Parteipolitik der Hasmonaerzit), 1927, pp.192~193주. 2를 보라.] 무리들은그의 그럴 듯한 거짓말을 믿고 무장을 하고 나섰다. 그들은 티라다나(Tirathana)라고[㈜ 몽고메리(J. A. Montgomery)는 \’사마리아인들\'(The Samaritans) 1907, p.146 주 15에서 이곳은 아마 세겜(Shechem)으로부터 남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티레(Tire)일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장소는 그리심산(mt. Gerzim)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두와라(Duwara, 또는 Dawerta)가 또한 제안되었다. 참). 아벨(F. M. Abel)의 \’팔레스틴의 지형\'(Geographie de la Palestine), ii. 1938, p.484.] 하는 마을에 멈추어 계속 도착하고 있는사람들을 모아 큰 무리를 지어 그 산에 오를 계획이었다. 그러나그들이 산에 오르기 전에 빌라도가 기병과 중무장한 보병을 보내그들의 행로를 차단시켜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병사들은 티라다나 마을에 먼저 도착했던 사람들을 공격하여 일부는 죽고 일부는 도망치고, 또 일부는 생포되었다. 빌라도는 생포한 사람들 중에지도급 인사들을 처형시키고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도 영향력이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2.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빌라도를 로마에 보내다



 소동이 잠잠해지자, 사마리아 의회(Council)의[㈜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의는 \’사마리아(Samaria)\’라는 도시만의 회의가 아니라, 사마리아 공동체 전체의 회의였다. 존스(A.H. Jones)는 \’동로마 지방의 도시들\'(The Cities of the Eastern Roman Provinces), 1937, p.259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회의는 아마도 가비니우스<(Gabinius, 참). 고대. 14권. 5 : 4(90, 91), 그리고 전쟁. 1권. 8 : 1(169, 170)>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회 중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의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대표들은수리아의 총독이면서 집정관인 로마인 비텔리우스에게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죽인 빌라도를 고소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티라다나에 모였던 것은 로마에 반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빌라도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비텔리우스(Vitellius)는[㈜ 황제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아버지.] 그의 친구인 마르겔루스(Marcellus)를[㈜ 수리아(Syria)의 통치자로서 비텔리우스는 황제들의 권한으로 되어 있는 지방장관 임명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르셀루스(Marcellus)를 임명한 것은 유대(Judaea)의 지방장관으로 활동하도록 했음에 틀림없다. 디베료(Tiberius)가 어렴풋한 진술(\’연대기,\’ vi. 32)을 제외하고는 비텔리우스가 가이우스 가이사(Gaius Caesar)와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에 의해서 세워진 자들과 비슷하게 동방에서 특별한 권력을 가졌다는 몸센(Mommsen)과 데서(Dessau)의 가설을 위한 근거는 없다. 마기(D. Magie)의 \’소아시아에서의 로마의 통치\'(Roman Rule in Asia Minor), ii. 1950, p.1364 주 39를 보라.] 급히파송하여 유대의 행정을 보살피도록 하고,[㈜ 통치자들과 지방장관들이 공직에서 오랜 기간을 봉직하도록 디베료가 허락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대. 18권. 6 : 5(170)이하를 보라.]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하여 그가 왜 무죄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변형될 수 있다.] 죽여 고발당했는지에 대한 그 이유를 디베료 황제에게 직접 해명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래서 유대 땅에서 10년을 보낸 빌라도는 비텔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급히 로마로 왔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전에 이미 디베료 황제는 죽고 말았다.[㈜ 디베료(Tiberius)는 주후 37년 3월16일에 죽었다. 빌라도(Pilate)가 그의 지방장관직을 26년에 시작했고, 그는 10년 동안 공직에서 있었다고 진술되었으므로 그가 로마에 도착하는데 1년이나 결렸다는 사실이 추론되는데, 그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가 서둘렀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스몰우드(E. M. Smallwood)는 \”유대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의 면직 날짜\”(The Date of the Dismissal of Pontius Pilate from Judaea), \’Jour. of Jewish Stud.\’ v, 1954, p.12에서 요세푸스가 제시한 10년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가장 가까운 해로 계산된 대략의 숫자일 것이라고 언급한다. 스몰우드는 빌라도가 떠난 날짜를 36년 12월 중순 경과 37년 2월 말경 사이의 어느 날이라고 언급한다(p.14).]



3. 비텔리우스가 세금을 감면하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대제사장 의복의 보관을 다시 허락하다



 비텔리우스가[㈜ 요세푸스는 이 저서에(고대. 15권. 11 : 4(405) 비텔리우스가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것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거기에서 대제사장의 의복을 유대인들이 보관하도록 양도한 것은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디베료에게 글을 쓴 후에 이루어졌다고 덧붙인다. 요세푸스는 거기에서 방문과 연관을 지어서 축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스몰우드 축제 기간과 일치하지 않고, 비텔리우스의 두 번째 방문(고대. 18권. 5 : 3(123)은 37년의 유월절 기간 중에 일어난 것이라고 제안한다,] 유대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에 갔을 때 마침그곳에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절기를 보내고 있었다. 비텔리우스는 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 가운데 시민들에게 농산물에 부과되는 모든 세금을[㈜ 참). 아켈라오(Archelaus)가 통치를 시작할 때에 공적으로 사고 파는 것들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감면하라고 그에게 제시되었던 요구들.] 면제해 주고, 제사장들의 옷과 그들의 장식품들을 제사장들의 관리 아래 성전에서 보관하도록 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전에는 그것들을 로마의 관리하에 두었다. 그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대제사장의의복이 안토니아(Antonia)에[㈜ 성전 지역의 북서쪽이다. 고대. 12권. 5 : 4(250).] 보관되어 있었다. 제사장 중의한 사람인 힐카누스(Hyrcanus)[㈜ 하스모네안(Hasmonaean)왕조의 후손인 요한 힐카누스 I세가 주전 135년에 그의 아버지 시몬(Simon)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그리고 사실상의 왕)이 되었다.]-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여러 명 있으나 그 중 첫 번째-가 성전 근처에 큰 집을 하나 지어놓고 대부분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 그는 자기에게만 제사장 옷을 입을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옷을 보관하는 사람으로서대제사장의 의복을 그 곳에 보관해 왔다. 그는 시내로 들어갈 때에는 평상복을 입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도 그와 같이 하였다.헤롯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이 건물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여 거주하기에 매우 편리하게 재건하고 안토니(Antony)라는 친구이름을 본따서, 그것을 안토니아(Antonia)라고[㈜ 참). 빈센트(L.H. Vincent)의 \”L\’ Antonia, palais primitifd\’ Herode,\” \’Revue Biblique\’, 1xi, 1954, pp. 87~107.] 불렀다. 헤롯은 제사장 의복이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계속해서 그것을 그 곳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제사장 의복을 그 곳에 보관하면 백성들이 그에게 반역을 결코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믿었기 때문이다. 헤롯의 후계자인 그의 아들 아켈라오도 이와같이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로마인들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로마인들은 제사장 의복을 그들이 직접 관리하고석조건물에 그것을 보관한 후, 제사장과 관리인의 도장을 찍어봉하고 수비대가 밤낮으로 불을 켜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절기 때가 되면 절기를 지키기 7일 전에 수비대장이 그 옷을 제사장들에게 건네 주었고, 그 옷들에 대한 정결의식을 거행한 후에 대제사장이 그 옷을 입었다. 그리고 절기의 첫날이 저물면 대제사장은 그 의복을 벗어서 전에 보관해 두었던 곳으로 다시 반납하였다. 이같이 번거로운 일이 매년 있는 3번의 절기와 금식일마다 반복되었다.[㈜ 세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다. 그 단식일은 속죄일이다. 참) 미쉬나 \’요마\'(Yoma) I. 1. 이곳에는 속죄일이 되기 1주일 전 대제사장의 준비들이 언급되어있다.] 그런데 비텔리우스가 유대인의 율법대로 대제사장이 그 옷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재가해 준 것이다.[㈜ 또는 \”비텔리우스는 의복들을 우리의 조상들이 보관하도록 하였다.\”] 비텔리우스는수비대장에게 그 옷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묻지도 말고 언제사용하는지에 대해서 간섭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안토니아(Antonia)에 있는 로마인들에 의해서 그 의복들이 보관되는 것을 유대인들이 반대했던 데는 몇 가지의 이유들이 가능하다. 만약 안토니아가 성전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유대인들은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의복들을 성전의 바깥에 두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Yoma\’ 69a). 더구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이 의복들을 다루는 것은, 주후 66년의 랍비의 교령에 따르면 그것들을 더럽히는 것이다(\’Niddah\’ 34a :\”Tosafot on Shabbat\’ 21b를 보라). 비록 이러한 사건이 약 30년전에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그 교령은 오랫동안 존속하였던 태도를 단지 구체화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비텔리우스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호의를 베푼 후에, 가야바(Caiaphas)라고 하는 요셉(Joseph)을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고대. 18권. 2 : 2(35)를 보라.] 안나스(Annaus)의 아들인 요나단(Jonathan)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비텔리우스는 그 후 안디옥으로 떠났다.



4. 디베료가 비텔리우스에게 파르티아 왕인 아르타바누스와 우호 조약을 맺으라고 지시하다



 한편 디베료 황제는 비텔리우스에게 전갈을 보내[㈜ 다음에 나오는 파르티아(Parthia) 사건들의 언급은 Dio Cassius 1viii,, 26과 타키누스의 \’연대기\’. vi. 31이하에서의 긴 설명에 따르면, 주후 35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므로 그 사건을 36, 37년에 일어났던 비텔리우스의 처음 방문 뒤에 삽입하는 것은 요세푸스의 오류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의 요세푸스의 혼동에 대해서는 가제티(A. Garzetti)의 \”La data dell\’ Eufrate di ArtabanoⅢ e L. Vitellio di Siria\”, Stu야 in onore di A. Calderini e R. Paribeni\’, I. 1956, pp.211~229를 보라.] 파르티아의 왕인 아르타바누스(Artabanus)와 우호조약을 맺으라고 지시했다. 왜냐하면 아르타바누스는 디베료와 적대관계에 있었고또 아르메니아(Armenia)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아르타바누스(Artabanus)의 적대감의 주요 이유는, 타키투스의 설명(\’연대기\’ vi. 31~32)에 따르면, 분명히 아르타바누스를 프라테스(Phraates)로 대체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티리다테스(Tiridates)로 대체하려는 디베료의 시도였다. 또 다른 요인은 그의 성공적인 전쟁으로 인한 아르타바누스의 의기양양한 마음과 나이가 들고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디베료에 대한 그의 경멸이었다. 타키투스는 또한 \’연대기\’ vi. 31에서 아르타바누스가 그의 아들인 아르사케스(Arsaces)를 위해서 아르메니아(Armenia)의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더 심각한 재난을 입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환기시켜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다베료는 비텔리우스에게 우호조약의 신뢰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아르타바누스의 아들을 볼모로 자기에게 보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비텔리우스에게 이 편지를 쓰고 나서 황제는 이베리아와[㈜ 이베리아(Iberia)는 오늘날의 흑해와 카스피해의 중간에 있는 죠지아(Georgia)의 부분이다. 이러한 이베리아인들과 스페인의 거주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타키투스에 따르면(\’연대기\’. vi. 32), 디베료는 아르메니아를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에 있어서, 그의 도구로서 이베리아의 왕 파라스마네스(Pharasmanes)의 형제인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를 이용했다.] 알바니아의[㈜ 알바니아(Albania)는 이베리아의 동쪽에 위치했는데, 오늘날의 카스피해의 남서쪽 해안에 위치한 아셀바얀(Azerbajan)이다.] 두 왕에게 거액의 돈을 주면서 아르타바누스를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그 두 왕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직접 아르타바누스와 전쟁을 하기보다는, 알라니(Alani)사람들을[㈜ 전쟁. 7권. 7 :4(244)에 따르면, 스구디아(Scythia) 종족은 돈(Don)강과 아조프(Azov)해의 주변에 거주했다. 타키투스는 알라니(Alani)대신에, 대략적으로 같은 지역의 또 하나의 종족인 사르마타이(Sarmatae)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는 이베리아인들이 코카서스(Caucasia)지방의 길 위쪽에 있는 아르메니아로 사르마티아인들을 몰아넣었다고 진술한다. 이베리아와 알바니아의 왕들이 스구디아인들에게 통로를 제공했다는 네이버(Naber)의 주장은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를 조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러나 알라니는 스구디아족이었기 때문에, 사본과 조화하여, 종족의 이름을 알라니로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인다. 비록 타키투스가 파르티아(Parthia)인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이베리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을 명확하게 언급할지라도, 또한 비록 조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고 할지라도, 알라니 지역은 코카서스 지방으로부터 너무 먼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알라니가 이베리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에게 카스피해의 관문을 통하여 통로를 제공했다는 사본의 기록은 지리학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끌어들여 카스피해 관문(Capian Gates)을[㈜ 카스피해 근처에 있는 산의 통로나 일련의 통로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참). 전쟁. 7권. 7 : 4(245)의 각주 86. 마티유(Mathieu)와 헤르만(Hermann)은, 요세푸스 책의 프랑스어 번역에서, 이곳에서의 언급은 알바니아의 관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카스피해의 관문은, 적절하게 말해서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그것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도 \’연대기\’ vi. 33에서 카스피해의 침입로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자료는 비슷한 정보를 가졌다면, 그 침입은 카스피해의 관문을 경유해서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개방하여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아르타바누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디베료는 아르메니아를 재탈환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파르티아는 전국이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고위층들이 죽음을 당했고, 땅은 황폐케 되었으며, 왕의 아들과 수많은 군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 전쟁에 대해서 더 풍부하게 언급하고 있는 타키투스는, \’연대기\’ vi. 35에서 아르타바누스(Artabanus)의 아들인 오로데스(Orodes)가 그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말을 한다. 그가 살해되었다는 잘못된 소문은 파르티아인들을 돌연한 공포로 몰아넣었고, 이베리아인들, 알바니아인들, 사르마타이의 연합군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원인이 되었다.] 비텔리우스는 아르타바누스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르타바누스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아르타바누스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아르타바누스가 이 사실을 몰랐다면 이 음모를꾸민 사람들이 많은 고위층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다. 그는 교묘하게 충성하는 척하는 사람들이나, 실제로 적에게 가담되어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또는 \”시련의 시기에\”.] 자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상부 관할구역(uppersatrapu) 중의 한 곳으로 피신하여 숨었다. 거기서 그는 다하이(Dahae)와 사카이(Sacae)의[㈜ 다하이(Dahae)는 Pliny의 \’Hist. Nat. vi.19에 언급되어 있다. 사카이(Sacae)는 Herodotus vii. 9.에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두 스구디아족에 대한 유일한 다른 언급은 요세푸스의 고대. 6권. 3 : 6(44)에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이 두 종족은 짝을 지어 나타난다. 타키투스는 \’연대기\’ vi.44에서 아르타바누스가 스구디아에 지원군을 보냈다고 진술함으로써 요세푸스의 언급을 확증한다.] 대군을 소집하여 그의 적을 공격하여 다시 왕위를 확고히 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연대기\’ vi. 36), 아르타바누스는 스구디아와 멀리 떨어진 변경으로 도망을 했고, 거기서 그는 그가 결혼에 의해서 관계를 맺은 힐카니아인(Hyrcanians)과 카르마니아인(Carmanians)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카스피해 연안의 힐카니아(Hyrcania)에 망명 중에 있는 아르타바누스의 생생한 모습을 알려면 나키투스의 \’연대기\’ vi. 43~44를 보라. 거기서 아르타바누스는 불결한 것들에 휩싸여서 살았으며, 티리다테스(Tridates)에 대한 성공적인 전투를 위해 지원군을 모집하는 동안 그런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그후 파르티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5.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누스가 우호 조약을 맺기 위해 유브라데에서 만나다



 이 소식을 들은 디베료는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누스 간에 우호조약을 맺도록 제의하였다. 파르티아는 심사숙고한 끝에 디베료의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르타바누스와 비텔리우스는 유브라데[㈜ 이 회담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Vit.\’ 2.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비텔리우스(Vitellius)의 훌륭한 외교정책을 칭송하고 있다. Dio Cassius 1ix. 17. 5와 27.2~3에서는 그 사건의 날짜를 요세푸스가 이곳에서 하는 것처럼, 디베료의 통치기간보다는 칼리굴라(Caligula)의 통치기간 중으로 계산하고 있다. 토이블러(Taubler)는 \’Eio Parthernachrichten bei Josephus\’s, p.33이하에서 디베로에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역사가가 가의 이러한 성공을 시기하였다고 논증하면서 요세푸스의 연대 계산을 받아들인다. 타키투스가 그 사건을 생략했다는 것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런 사실은 그가 디베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편견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그런 사실은 그 사건의 칼리굴라의 통치 기간 중에 일어났으며, 타키투스의 언급이 없는 것이라고 논증할 수도 있다.] 강의 다리 중간에서 각각 호위병을 대동하고 서로 만났다. 그들이 우호조약에 조인하자, 분봉왕 헤롯은 강의 중간쯤에 화려한 천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었다. 아르타바누스는 디베료에게 자기의 아들인 다리우스(Darius)를[㈜ 칼리굴라가 바이아이(Baiae)로부터 프테올리(puteoli)로, 배로 만든 다리 위로 의기양양하게 옮긴 볼모들 중의 한 명인 다레우스(Dareus)와 아마도 동일인일 것이다.] 볼모로보내고 많은 선물도 보내 주었다. 그 선물들 가운데는 엘르아살(Eleazar)이라고 하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키가 7규빗(Cu-bit,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의 끝까지의 길이, 약 46-56cm(역자주)이나[㈜ 약 10.5피트.] 되어 거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양자의 관계를 이와 같이 정비한 그들은 비텔리우스는 안디옥으로, 아르타바누스는 바벨론으로 각각 돌아갔다. 한편 헤롯은 황제가 원하던 대로 볼모로 아르타바누스의 아들이 왔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황제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급사를 시켜 가이사 디베료에게 서신을 띄우도록 하되 비텔리우스 총독이 보고할 여지를 남겨두지 말고 상세히 보고하도록 했다. 비텔리우스는 이보다 늦게 급사를 파송하여 황제에게 위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황제는 이미 비텔리우스보다 먼저 헤롯이 보낸 전갈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텔리우스는 뒤늦게서야 그 이유를 알고 대단히 분개하였으나 가이우스(Gaius)가 황제를 계승하여 그의 허락하에 복수를 할 때까지는 자신의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었다.



  6. 분봉왕 빌립의 죽음, 그의 온순한 성품



 헤롯의 동생 빌립(Philip)이[㈜ 앞에 나온 고대. 18권. 2 :1(27, 28)을 보라.] 디베료 황제 즉위 20년이 되던해에, 그리고 그 자신이 드라고닛(Trachonitis)과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그리고 바타나이아인(Batanaeans)이라고 불리는 종족을 통치한 지 38년 되던 해[㈜ 주후 34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통치형태는 온순했고 쉽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편이었다. 그는 통치기간 중 단 한번도 자신의 영토 밖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가 지방을 순시할 때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선발하여 동행케 하였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재판하는 자리를 꼭 마련했다. 그래서 억울한 일로 그에게 호소해 오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또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날 때에는 언제든지.\”] 지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내막을 듣고 죄가 발견되는 사람은 벌을 주고, 억울하게 고소당한 사람은 풀어주었다. 빌립은 율리아스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그가 죽기 전에 손수 만들어 놓은무덤으로 옮겨져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장례식이 거행되었다.빌립은 자손을 낳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디베료는 빌립의 영토를 수리아 지역으로 병합시켰다. 그러나 빌립의 지역에서 거두어 지는 세금만큼은 자치적으로 보관하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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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권 제 4장 사마리아인들의 소요를 일으키자 빌라도가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빌라도가 고소당한 것과 비텔리우스가 유대인과 파르티아인들에게 행한 일들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4 장


    사마리아인들의 소요를 일으키자 빌라도가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빌라도가 고소당한 것과 비텔리우스가 유대인과 파르티아인들에게 행한 일들에 대하여


    1. 빌라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의 소요를 진압하다


     사마리아 소동으로 시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군중들의욕구를 만족시키는 거짓말은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유대인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자기와 함께 그리심산(Mount Gerizim)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신성한 산이라고 여겼던 산이다. 그는 무리들에게 확실하게 말하기를, 그들이 산에 도착하면 그 곳에 묻혀있는 거룩한 그릇들을 보여줄 것인데 그것들은 모세가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는 가스터(M. Gaster)의 ‘사마리아인들'(The Samaritans), 1925, pp.90~91을 보라. 그는 이곳에서 회복시키는 자(타헤브 또는 샤헤브)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신앙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그 신앙은 그들의 열 번째 계명과 신명기 18장 15절, 18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모세가 태어난 레위지파로부터 한 선지자가 나와서 성전의 숨겨진 그릇을 발견할 것이라는 신앙이다. 기름의 매장과 성전의 거룩한 그릇에 관한 탈무드의 전승에 관해서는 아프토비쳐(V.Aptowitzer)의 ‘하스몬 시대의 정당정치'(Parteipolitik der Hasmonaerzit), 1927, pp.192~193주. 2를 보라.] 무리들은그의 그럴 듯한 거짓말을 믿고 무장을 하고 나섰다. 그들은 티라다나(Tirathana)라고[㈜ 몽고메리(J. A. Montgomery)는 ‘사마리아인들'(The Samaritans) 1907, p.146 주 15에서 이곳은 아마 세겜(Shechem)으로부터 남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티레(Tire)일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장소는 그리심산(mt. Gerzim)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두와라(Duwara, 또는 Dawerta)가 또한 제안되었다. 참). 아벨(F. M. Abel)의 ‘팔레스틴의 지형'(Geographie de la Palestine), ii. 1938, p.484.] 하는 마을에 멈추어 계속 도착하고 있는사람들을 모아 큰 무리를 지어 그 산에 오를 계획이었다. 그러나그들이 산에 오르기 전에 빌라도가 기병과 중무장한 보병을 보내그들의 행로를 차단시켜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병사들은 티라다나 마을에 먼저 도착했던 사람들을 공격하여 일부는 죽고 일부는 도망치고, 또 일부는 생포되었다. 빌라도는 생포한 사람들 중에지도급 인사들을 처형시키고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도 영향력이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2.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빌라도를 로마에 보내다


     소동이 잠잠해지자, 사마리아 의회(Council)의[㈜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의는 ‘사마리아(Samaria)’라는 도시만의 회의가 아니라, 사마리아 공동체 전체의 회의였다. 존스(A.H. Jones)는 ‘동로마 지방의 도시들'(The Cities of the Eastern Roman Provinces), 1937, p.259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회의는 아마도 가비니우스<(Gabinius, 참). 고대. 14권. 5 : 4(90, 91), 그리고 전쟁. 1권. 8 : 1(169, 170)>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회 중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의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대표들은수리아의 총독이면서 집정관인 로마인 비텔리우스에게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죽인 빌라도를 고소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티라다나에 모였던 것은 로마에 반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빌라도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비텔리우스(Vitellius)는[㈜ 황제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아버지.] 그의 친구인 마르겔루스(Marcellus)를[㈜ 수리아(Syria)의 통치자로서 비텔리우스는 황제들의 권한으로 되어 있는 지방장관 임명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르셀루스(Marcellus)를 임명한 것은 유대(Judaea)의 지방장관으로 활동하도록 했음에 틀림없다. 디베료(Tiberius)가 어렴풋한 진술(‘연대기,’ vi. 32)을 제외하고는 비텔리우스가 가이우스 가이사(Gaius Caesar)와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에 의해서 세워진 자들과 비슷하게 동방에서 특별한 권력을 가졌다는 몸센(Mommsen)과 데서(Dessau)의 가설을 위한 근거는 없다. 마기(D. Magie)의 ‘소아시아에서의 로마의 통치'(Roman Rule in Asia Minor), ii. 1950, p.1364 주 39를 보라.] 급히파송하여 유대의 행정을 보살피도록 하고,[㈜ 통치자들과 지방장관들이 공직에서 오랜 기간을 봉직하도록 디베료가 허락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대. 18권. 6 : 5(170)이하를 보라.]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하여 그가 왜 무죄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변형될 수 있다.] 죽여 고발당했는지에 대한 그 이유를 디베료 황제에게 직접 해명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래서 유대 땅에서 10년을 보낸 빌라도는 비텔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급히 로마로 왔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전에 이미 디베료 황제는 죽고 말았다.[㈜ 디베료(Tiberius)는 주후 37년 3월16일에 죽었다. 빌라도(Pilate)가 그의 지방장관직을 26년에 시작했고, 그는 10년 동안 공직에서 있었다고 진술되었으므로 그가 로마에 도착하는데 1년이나 결렸다는 사실이 추론되는데, 그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가 서둘렀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스몰우드(E. M. Smallwood)는 “유대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의 면직 날짜”(The Date of the Dismissal of Pontius Pilate from Judaea), ‘Jour. of Jewish Stud.’ v, 1954, p.12에서 요세푸스가 제시한 10년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가장 가까운 해로 계산된 대략의 숫자일 것이라고 언급한다. 스몰우드는 빌라도가 떠난 날짜를 36년 12월 중순 경과 37년 2월 말경 사이의 어느 날이라고 언급한다(p.14).]


    3. 비텔리우스가 세금을 감면하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대제사장 의복의 보관을 다시 허락하다


     비텔리우스가[㈜ 요세푸스는 이 저서에(고대. 15권. 11 : 4(405) 비텔리우스가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것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거기에서 대제사장의 의복을 유대인들이 보관하도록 양도한 것은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디베료에게 글을 쓴 후에 이루어졌다고 덧붙인다. 요세푸스는 거기에서 방문과 연관을 지어서 축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스몰우드 축제 기간과 일치하지 않고, 비텔리우스의 두 번째 방문(고대. 18권. 5 : 3(123)은 37년의 유월절 기간 중에 일어난 것이라고 제안한다,] 유대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에 갔을 때 마침그곳에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절기를 보내고 있었다. 비텔리우스는 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 가운데 시민들에게 농산물에 부과되는 모든 세금을[㈜ 참). 아켈라오(Archelaus)가 통치를 시작할 때에 공적으로 사고 파는 것들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감면하라고 그에게 제시되었던 요구들.] 면제해 주고, 제사장들의 옷과 그들의 장식품들을 제사장들의 관리 아래 성전에서 보관하도록 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전에는 그것들을 로마의 관리하에 두었다. 그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대제사장의의복이 안토니아(Antonia)에[㈜ 성전 지역의 북서쪽이다. 고대. 12권. 5 : 4(250).] 보관되어 있었다. 제사장 중의한 사람인 힐카누스(Hyrcanus)[㈜ 하스모네안(Hasmonaean)왕조의 후손인 요한 힐카누스 I세가 주전 135년에 그의 아버지 시몬(Simon)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그리고 사실상의 왕)이 되었다.]-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여러 명 있으나 그 중 첫 번째-가 성전 근처에 큰 집을 하나 지어놓고 대부분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 그는 자기에게만 제사장 옷을 입을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옷을 보관하는 사람으로서대제사장의 의복을 그 곳에 보관해 왔다. 그는 시내로 들어갈 때에는 평상복을 입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도 그와 같이 하였다.헤롯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이 건물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여 거주하기에 매우 편리하게 재건하고 안토니(Antony)라는 친구이름을 본따서, 그것을 안토니아(Antonia)라고[㈜ 참). 빈센트(L.H. Vincent)의 “L’ Antonia, palais primitifd’ Herode,” ‘Revue Biblique’, 1xi, 1954, pp. 87~107.] 불렀다. 헤롯은 제사장 의복이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계속해서 그것을 그 곳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제사장 의복을 그 곳에 보관하면 백성들이 그에게 반역을 결코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믿었기 때문이다. 헤롯의 후계자인 그의 아들 아켈라오도 이와같이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로마인들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로마인들은 제사장 의복을 그들이 직접 관리하고석조건물에 그것을 보관한 후, 제사장과 관리인의 도장을 찍어봉하고 수비대가 밤낮으로 불을 켜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절기 때가 되면 절기를 지키기 7일 전에 수비대장이 그 옷을 제사장들에게 건네 주었고, 그 옷들에 대한 정결의식을 거행한 후에 대제사장이 그 옷을 입었다. 그리고 절기의 첫날이 저물면 대제사장은 그 의복을 벗어서 전에 보관해 두었던 곳으로 다시 반납하였다. 이같이 번거로운 일이 매년 있는 3번의 절기와 금식일마다 반복되었다.[㈜ 세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다. 그 단식일은 속죄일이다. 참) 미쉬나 ‘요마'(Yoma) I. 1. 이곳에는 속죄일이 되기 1주일 전 대제사장의 준비들이 언급되어있다.] 그런데 비텔리우스가 유대인의 율법대로 대제사장이 그 옷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재가해 준 것이다.[㈜ 또는 “비텔리우스는 의복들을 우리의 조상들이 보관하도록 하였다.”] 비텔리우스는수비대장에게 그 옷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묻지도 말고 언제사용하는지에 대해서 간섭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안토니아(Antonia)에 있는 로마인들에 의해서 그 의복들이 보관되는 것을 유대인들이 반대했던 데는 몇 가지의 이유들이 가능하다. 만약 안토니아가 성전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유대인들은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의복들을 성전의 바깥에 두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Yoma’ 69a). 더구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이 의복들을 다루는 것은, 주후 66년의 랍비의 교령에 따르면 그것들을 더럽히는 것이다(‘Niddah’ 34a :”Tosafot on Shabbat’ 21b를 보라). 비록 이러한 사건이 약 30년전에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그 교령은 오랫동안 존속하였던 태도를 단지 구체화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비텔리우스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호의를 베푼 후에, 가야바(Caiaphas)라고 하는 요셉(Joseph)을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고대. 18권. 2 : 2(35)를 보라.] 안나스(Annaus)의 아들인 요나단(Jonathan)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비텔리우스는 그 후 안디옥으로 떠났다.


    4. 디베료가 비텔리우스에게 파르티아 왕인 아르타바누스와 우호 조약을 맺으라고 지시하다


     한편 디베료 황제는 비텔리우스에게 전갈을 보내[㈜ 다음에 나오는 파르티아(Parthia) 사건들의 언급은 Dio Cassius 1viii,, 26과 타키누스의 ‘연대기’. vi. 31이하에서의 긴 설명에 따르면, 주후 35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므로 그 사건을 36, 37년에 일어났던 비텔리우스의 처음 방문 뒤에 삽입하는 것은 요세푸스의 오류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의 요세푸스의 혼동에 대해서는 가제티(A. Garzetti)의 “La data dell’ Eufrate di ArtabanoⅢ e L. Vitellio di Siria”, Stu야 in onore di A. Calderini e R. Paribeni’, I. 1956, pp.211~229를 보라.] 파르티아의 왕인 아르타바누스(Artabanus)와 우호조약을 맺으라고 지시했다. 왜냐하면 아르타바누스는 디베료와 적대관계에 있었고또 아르메니아(Armenia)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아르타바누스(Artabanus)의 적대감의 주요 이유는, 타키투스의 설명(‘연대기’ vi. 31~32)에 따르면, 분명히 아르타바누스를 프라테스(Phraates)로 대체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티리다테스(Tiridates)로 대체하려는 디베료의 시도였다. 또 다른 요인은 그의 성공적인 전쟁으로 인한 아르타바누스의 의기양양한 마음과 나이가 들고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디베료에 대한 그의 경멸이었다. 타키투스는 또한 ‘연대기’ vi. 31에서 아르타바누스가 그의 아들인 아르사케스(Arsaces)를 위해서 아르메니아(Armenia)의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더 심각한 재난을 입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환기시켜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다베료는 비텔리우스에게 우호조약의 신뢰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아르타바누스의 아들을 볼모로 자기에게 보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비텔리우스에게 이 편지를 쓰고 나서 황제는 이베리아와[㈜ 이베리아(Iberia)는 오늘날의 흑해와 카스피해의 중간에 있는 죠지아(Georgia)의 부분이다. 이러한 이베리아인들과 스페인의 거주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타키투스에 따르면(‘연대기’. vi. 32), 디베료는 아르메니아를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에 있어서, 그의 도구로서 이베리아의 왕 파라스마네스(Pharasmanes)의 형제인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를 이용했다.] 알바니아의[㈜ 알바니아(Albania)는 이베리아의 동쪽에 위치했는데, 오늘날의 카스피해의 남서쪽 해안에 위치한 아셀바얀(Azerbajan)이다.] 두 왕에게 거액의 돈을 주면서 아르타바누스를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그 두 왕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직접 아르타바누스와 전쟁을 하기보다는, 알라니(Alani)사람들을[㈜ 전쟁. 7권. 7 :4(244)에 따르면, 스구디아(Scythia) 종족은 돈(Don)강과 아조프(Azov)해의 주변에 거주했다. 타키투스는 알라니(Alani)대신에, 대략적으로 같은 지역의 또 하나의 종족인 사르마타이(Sarmatae)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는 이베리아인들이 코카서스(Caucasia)지방의 길 위쪽에 있는 아르메니아로 사르마티아인들을 몰아넣었다고 진술한다. 이베리아와 알바니아의 왕들이 스구디아인들에게 통로를 제공했다는 네이버(Naber)의 주장은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를 조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러나 알라니는 스구디아족이었기 때문에, 사본과 조화하여, 종족의 이름을 알라니로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인다. 비록 타키투스가 파르티아(Parthia)인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이베리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을 명확하게 언급할지라도, 또한 비록 조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고 할지라도, 알라니 지역은 코카서스 지방으로부터 너무 먼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알라니가 이베리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에게 카스피해의 관문을 통하여 통로를 제공했다는 사본의 기록은 지리학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끌어들여 카스피해 관문(Capian Gates)을[㈜ 카스피해 근처에 있는 산의 통로나 일련의 통로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참). 전쟁. 7권. 7 : 4(245)의 각주 86. 마티유(Mathieu)와 헤르만(Hermann)은, 요세푸스 책의 프랑스어 번역에서, 이곳에서의 언급은 알바니아의 관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카스피해의 관문은, 적절하게 말해서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그것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도 ‘연대기’ vi. 33에서 카스피해의 침입로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자료는 비슷한 정보를 가졌다면, 그 침입은 카스피해의 관문을 경유해서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개방하여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아르타바누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디베료는 아르메니아를 재탈환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파르티아는 전국이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고위층들이 죽음을 당했고, 땅은 황폐케 되었으며, 왕의 아들과 수많은 군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 전쟁에 대해서 더 풍부하게 언급하고 있는 타키투스는, ‘연대기’ vi. 35에서 아르타바누스(Artabanus)의 아들인 오로데스(Orodes)가 그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말을 한다. 그가 살해되었다는 잘못된 소문은 파르티아인들을 돌연한 공포로 몰아넣었고, 이베리아인들, 알바니아인들, 사르마타이의 연합군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원인이 되었다.] 비텔리우스는 아르타바누스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르타바누스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아르타바누스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아르타바누스가 이 사실을 몰랐다면 이 음모를꾸민 사람들이 많은 고위층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다. 그는 교묘하게 충성하는 척하는 사람들이나, 실제로 적에게 가담되어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또는 “시련의 시기에”.] 자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상부 관할구역(uppersatrapu) 중의 한 곳으로 피신하여 숨었다. 거기서 그는 다하이(Dahae)와 사카이(Sacae)의[㈜ 다하이(Dahae)는 Pliny의 ‘Hist. Nat. vi.19에 언급되어 있다. 사카이(Sacae)는 Herodotus vii. 9.에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두 스구디아족에 대한 유일한 다른 언급은 요세푸스의 고대. 6권. 3 : 6(44)에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이 두 종족은 짝을 지어 나타난다. 타키투스는 ‘연대기’ vi.44에서 아르타바누스가 스구디아에 지원군을 보냈다고 진술함으로써 요세푸스의 언급을 확증한다.] 대군을 소집하여 그의 적을 공격하여 다시 왕위를 확고히 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연대기’ vi. 36), 아르타바누스는 스구디아와 멀리 떨어진 변경으로 도망을 했고, 거기서 그는 그가 결혼에 의해서 관계를 맺은 힐카니아인(Hyrcanians)과 카르마니아인(Carmanians)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카스피해 연안의 힐카니아(Hyrcania)에 망명 중에 있는 아르타바누스의 생생한 모습을 알려면 나키투스의 ‘연대기’ vi. 43~44를 보라. 거기서 아르타바누스는 불결한 것들에 휩싸여서 살았으며, 티리다테스(Tridates)에 대한 성공적인 전투를 위해 지원군을 모집하는 동안 그런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그후 파르티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5.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누스가 우호 조약을 맺기 위해 유브라데에서 만나다


     이 소식을 들은 디베료는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누스 간에 우호조약을 맺도록 제의하였다. 파르티아는 심사숙고한 끝에 디베료의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르타바누스와 비텔리우스는 유브라데[㈜ 이 회담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Vit.’ 2.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비텔리우스(Vitellius)의 훌륭한 외교정책을 칭송하고 있다. Dio Cassius 1ix. 17. 5와 27.2~3에서는 그 사건의 날짜를 요세푸스가 이곳에서 하는 것처럼, 디베료의 통치기간보다는 칼리굴라(Caligula)의 통치기간 중으로 계산하고 있다. 토이블러(Taubler)는 ‘Eio Parthernachrichten bei Josephus’s, p.33이하에서 디베로에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역사가가 가의 이러한 성공을 시기하였다고 논증하면서 요세푸스의 연대 계산을 받아들인다. 타키투스가 그 사건을 생략했다는 것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런 사실은 그가 디베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편견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그런 사실은 그 사건의 칼리굴라의 통치 기간 중에 일어났으며, 타키투스의 언급이 없는 것이라고 논증할 수도 있다.] 강의 다리 중간에서 각각 호위병을 대동하고 서로 만났다. 그들이 우호조약에 조인하자, 분봉왕 헤롯은 강의 중간쯤에 화려한 천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었다. 아르타바누스는 디베료에게 자기의 아들인 다리우스(Darius)를[㈜ 칼리굴라가 바이아이(Baiae)로부터 프테올리(puteoli)로, 배로 만든 다리 위로 의기양양하게 옮긴 볼모들 중의 한 명인 다레우스(Dareus)와 아마도 동일인일 것이다.] 볼모로보내고 많은 선물도 보내 주었다. 그 선물들 가운데는 엘르아살(Eleazar)이라고 하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키가 7규빗(Cu-bit,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의 끝까지의 길이, 약 46-56cm(역자주)이나[㈜ 약 10.5피트.] 되어 거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양자의 관계를 이와 같이 정비한 그들은 비텔리우스는 안디옥으로, 아르타바누스는 바벨론으로 각각 돌아갔다. 한편 헤롯은 황제가 원하던 대로 볼모로 아르타바누스의 아들이 왔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황제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급사를 시켜 가이사 디베료에게 서신을 띄우도록 하되 비텔리우스 총독이 보고할 여지를 남겨두지 말고 상세히 보고하도록 했다. 비텔리우스는 이보다 늦게 급사를 파송하여 황제에게 위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황제는 이미 비텔리우스보다 먼저 헤롯이 보낸 전갈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텔리우스는 뒤늦게서야 그 이유를 알고 대단히 분개하였으나 가이우스(Gaius)가 황제를 계승하여 그의 허락하에 복수를 할 때까지는 자신의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었다.


      6. 분봉왕 빌립의 죽음, 그의 온순한 성품


     헤롯의 동생 빌립(Philip)이[㈜ 앞에 나온 고대. 18권. 2 :1(27, 28)을 보라.] 디베료 황제 즉위 20년이 되던해에, 그리고 그 자신이 드라고닛(Trachonitis)과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그리고 바타나이아인(Batanaeans)이라고 불리는 종족을 통치한 지 38년 되던 해[㈜ 주후 34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통치형태는 온순했고 쉽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편이었다. 그는 통치기간 중 단 한번도 자신의 영토 밖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가 지방을 순시할 때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선발하여 동행케 하였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재판하는 자리를 꼭 마련했다. 그래서 억울한 일로 그에게 호소해 오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또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날 때에는 언제든지.”] 지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내막을 듣고 죄가 발견되는 사람은 벌을 주고, 억울하게 고소당한 사람은 풀어주었다. 빌립은 율리아스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그가 죽기 전에 손수 만들어 놓은무덤으로 옮겨져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장례식이 거행되었다.빌립은 자손을 낳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디베료는 빌립의 영토를 수리아 지역으로 병합시켰다. 그러나 빌립의 지역에서 거두어 지는 세금만큼은 자치적으로 보관하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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