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권 제 8장 아그립바가 죽을 때까지 행한 다른 일들과 그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제 8 장



아그립바가 죽을 때까지 행한 다른 일들과 그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1. 아그립바가 디베랴에서 몇몇 왕들을 대접하다



 아그립바왕은 베리투스에서 앞서 말한 일을 끝낸 후 갈릴리(Galilee)의 한 도시인 디베랴(Tiberias)로 갔다. 이제 왕은 다른왕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다. 하여튼 그는 콤마게네(Com-magene)왕 안티오쿠스(Antiochus),[㈜ 참). 고대. 19권. 5 : 1(276).] 에메사(Emesa)의[㈜ 레바논 국경 북동쪽, 오론테스(Orontes) 강변에 있는 수리아 아파메네(Apamene)의 현재의 Homs.] 왕삼프시게라무스(Sampsigeramus)와[㈜ 그의 딸 요타페(Jotape)는 아그립바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혼인하였다. 참). 고대. 18권. 5 : 4(135).] 소 아르메니아(Armenia Minor)[㈜ 아르메니아 본토 서쪽 소지역.] 왕 코티스(Cotys)[㈜ 동일하게 불리우는 드라케(Thrace)왕의 아들. 37년 소 아르메니아(Armenia Minor)왕으로 가이우스가 임명함. 참). Dio 1ix. 12 : 2. 타키투스 \’연대기\’ xi :9에서는 47년에 그가 아르메니아의 통치자로 로마의 후원을 받았던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의 복귀를 글라우디오 황제의 전보를 보내 무력으로 방해하던 것을 중단했다고 전한다.] 뿐 아니라 폰투스를 다스리는왕 폴레모(Polemo)와[㈜ 소 아르메니아 코티스(Cotys)의 형제인 율리우스 폴레모(Julius Polemo)(\’Pap. Brit. Mus\’. iii : 1178, 22째줄을 참조). 그는 37년부터 63년까지 본도(Pontus)의 왕이었다. Dio 1x 8 : 2는 이제 말한 풀레모를 길리기아(Cilicia)의 왕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폴레모(Marcus Antonius Polemo)와 혼동한다. 그러나 고대. 20권. 7 : 3(145)는 D. Magie가 \’소 아시아에서의 로마 통치자들\’ ii : 1950, p. 1407 주. 26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후자를 따로 언급한다.] 칼키스(Chalcis)의 통치자인 헤롯의[㈜ 참). 고대. 18권. 5 : 4(133)이하. 그의 칼기스(Chalcis) 왕국은 레바논 산의 기슭에 있었다. 참). 고대. 14권. 3 : 2(40).] 방문을 받았다. 아그립바왕이 그들에게 정중함을 표시하고 접대한 후, 그들 모두와 나눈 그의 대화는 왕들의 방문으로인해 자신이 영화롭게 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기분의 향상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그립바왕이 그들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에 수리아의 왕 마르수스(Marsus)가 그를 찾아왔다. 따라서 아그립바왕은 로마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그를 마중하려고 도시 밖 7퍼얼롱(furlongs)까지 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일로 인해 마르수스와 불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왕이 자신과 함께 다른 왕들을 데리고 자신의 병거에다가 그들을 태웠기 때문이었다. 이에 마르수스는 그들과의일치와 친밀한 교분을 의심했다. 마르수스는 그러한 많은 왕들의 친밀한 교분을 의심했다. 마르수스는 그러한 많은 왕들의 친밀함이 로마의 이익에 불리할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마르수스는 부하들을 보내어 각 왕들에게 지체없이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아그립바왕은 이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그 후에 마르수스와 불화하게 되었다. 아그립바왕은 또한 마티아스에게서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였고 대신에 칸데라스(Can-theras)의[㈜ 이 본문은 라틴역과 여러 사본들중 한 사본의 난외에서 발견된다. 여러 사본들은 Chithaerus라고 나오지만 고대. 20권. 1 : 3(16)에서는 대제사장직에서의 다음 교체가 기록되었을 때 \”별명이 칸데라스(Cantheras)인 대제사장\”의 파면이 언급되었다. Mishnah \’Parah\’ iii : 5에서는 하코르(Hakkof 혹은 Hakkayaf)의 아들 엘리에호나이(Eliehonai 혹은 Elioenai) ben Hakkof(or Hakkayaf)로 불리는 대제사장직을 말하고 있다. 엘리오나이우스(Elionaeus)는 요셉 카이아파스(Joseph Caiaphas)의 아들로 명확히 간주하고 있다.] 아들인 엘리오나이우스(Elionaeus)를 대제사장직에 임명했다.



 2. 아그립바가 가이사랴의 극장에서 신이라고 불리우며 환영받다



 아그립바왕은 전 유대를 3년간 통치한 후에[㈜ 병행구, 전쟁. 2권. 11 : 6(219)에서도 마찬가지임.] 전에는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현재의 야파(Jaffa)와 탄투라(Tantura)사이의 베니게에 있음. 헤롯은 그곳에 웅장한 항구를 건조하여 아구스도를 기리기 위해서 그 도시를 가이사랴로 불렀다. 참). 고대. 15권. 9 : 6(331-341)과 전쟁. 1권. 2 : 5-7 Eastrern Roman Provinces) 1037, p.231은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가 4세기에 시돈의 왕이었던 Strato 왕가의 누군가에 의해 건조되었거나 혹은 Strato가 Abd Astart를 표현하는 것과 같이 문자적으로 아스타르테의 망대를 뜻하는 믹돌 아스타르트(Migdol Astart)의 헬라화된 형태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리웠던 가이사랴로 왔다.[㈜ 행 12 : 19-20은 또한 가이사랴에서 아그립바 사후의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에서는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것과 같이 아그립바가 두로와 시돈의 사절과 회합을 가졌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왕은 가이사의 행복을 위한 일종의 축제가[㈜ Thackeray가 수정한 문장인 \”그(아그립바)가 제정했다\”는 헤롯이 제정했고 가이사의 명칭을 따라 명명되어 5년마다 실시되는 경기(전쟁. 1권. 2 : 7(414)이었을 것이므로 적합지 않다.]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가이사의 영예를 기념하는 축제를 거행했다.이 때 그 나라에서 직책을 가졌거나 두 번째 날에, 아그립바왕은 순은으로 짜여진 참으로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으로들어갔다. 태양광선이[㈜ J. Morgenstern, \”하눅카 축제와 고대 이스라엘의 달력.\”(The Chanukkah Festival and the Calendar of Ancient Israel), \’Hebrew Union Coll. Ann\’. xx, 1947, pp.90-91은 아그립바가 태양신의 역할을 하였고 축제는 실제로 주야 평분시(平分時)와 하지의 정월 초하루 축제였다는 특이한 암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Lower Moesia의 두로스토룸(Durostorum)에 주둔한 로마 군단이 거행한 축제와 비교하였는데 그 축제에서는 왕의 복장을 입고서 30일 후에 자신을 희생시켜야 하는 신성한 왕의 역할을 하는 인신(人身)제물이 있다.] 찬란하게 비치자 은으로 짜여진 그 옷은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반짝임에 의해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아첨꾼들은 왕에게는 유익하지 않았지만 아그립바왕을 신이라고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행 12 : 21-22는 헤롯 아그립바가 왕의 복장을 하고서 권좌에 앉은 후 연설했을 때 군중들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목소리다\”라고 외쳤다고 유사하게 전한다.] 그들은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가 지금까지는 한 인간으로서 당신을존경해 왔으나 앞으로는 당신이 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아닌그 이상의 존재라는데 동의합니다.\” 왕은 그들을 꾸짖지도 않았고 그들은 아첨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일 직후에 왕은 고개를 쳐들고 그의 머리위에 있는 줄 위에 올빼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아그립바왕은 올빼미가 전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 왔었으나,[㈜ 고대. 18권 6 ; 7(195)에서 요세푸스는 아그립바가 디베료에 의해 구속된 후 아그립바가 기대었던 나무에 올빼미가 내려 앉았다고 언급한다. 또다른 죄수인 한명의 게르만인은 이러한 일을 아그립바가 구금에서 속히 석방되어 대권을 차지할 조짐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다시 올빼미를 보게 될 경우에는 자신의 죽음이 5일 이내에 닥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대. 18권. 6 : 7(200)).] 이번에는 재난의 전조임을 인식하면서 마음속을 비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행 12 : 23은 그 올빼미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군중들이 아그립바를 신으로 부른 직후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천사가 그를 쳤고 충이 먹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 유세비우스, \’교회사\'(Hist. Eccl) ii : 10에서는 아그립바가 그의 머리 위로 본 것은 올빼미가 아니라 천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사인 E. M. Merrins는 \”안티오쿠스 Ⅳ세, 대헤롯 헤롯 아그립바 Ⅰ세의 죽음,\” \’Bibliotheca Sacra\’ 1xi, 1904, pp.561-562에서 아그립바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복막염이며 아그립바가 여기서 서술된 것과 같은 복부 통증의 빈번한 원인이 된 복막염으로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따라서 동양에서 흔한 회충이 아그립바의 소화관에서 활동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앞당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회충은 신체의 어떤 부분이 병에 걸렸을 때 보다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 잡았다. 왕은 그의 친구들에게로 뛰어가면서[㈜ 이문은 \”오르면서\”임.] 말하기를 \”그대들의 눈에 신으로 비친 나의 운명이, 조금전에 나에게 부과된 말에 즉각적으로 반박하여 생명을 내던지라는 명령을 받았네. 그대들에 의해 불멸의 존재로 불리워진 나는 이제 죽음의 판결을 받았네 이제 나는 신이 원하신 것과 같이 나의 몫을 받아야만 하네. 사실상 나는 평범한 방식으로 살지 않았고 참된 기쁨으로 환호하는 커다란 명성으로 살았네.\” 이 말을 할 때에도 왕은 보다 강한고통에 휩싸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서둘러 왕을 왕궁으로 옮겼으며 그가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여성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군중들은 조상들의 관례를 따라서 베옷을 입고 앉아서 왕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하였다. 곡하는 소리와 비탄의 소리가 모든 곳에 가득찼다. 왕은 높은 곳에 위치한 침상에 누워서, 엎드려 있는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5일간의 복부의 진통으로 탈진한[㈜ 다른 사본에는 \”끊임없는 고통을 당한지 5일 후 지쳐버린\”임] 앙은 그의 나이 54세에 그리고그가 즉위한지 7년이 되는 때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4년 동안[㈜ 7-41년임. 참). 병행구, 전쟁. 2권. 11 : 6(219)보다 정확치 않는 문장.] 가이우스 가이사(Gaius Caesar)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중3년간은 빌립(Philip)이 다스리던 분봉국의 직위에 올라 통치하였고 4년이 되는 해에 헤롯의[㈜ 분봉왕직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던 *고대. 18권. 7 : 2(252)) 아그립바에게 가이우스가 허용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권리를 주려고 로마로 갔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영토를 통치하였다. 그는 그후 3년동안[㈜ 41-44년.] 황제 글라우디오 가이사의 통치하에서 왕의 자리를 감당했다. 그동안 그는 위에 언급한 영토를 통치했고 부가적으로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가이사랴를 다스렸다. 그는 이들 영토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세를 받았는데, 13,000,000드라크마에 달했다.[㈜ 약 1,157,143파운드, 혹은 3,240,000달러. 드라크마(drachma)는 본문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추측될 수 있는 듯하다. pleivsta\”로 읽는다면 그 의미는 아그립바가 이러한 영토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가 한창일 때는 1천200만 드라크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관대함으로 인해 많은 돈을 빌렸고, 그의 지출은 수입을 초과하였으며 그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지출은 끝이 없었다.[㈜ 혹은 \”그의 야심은 그러한 비용에 의존하지 않았다.\” 모미글리아노(A. Momigliano)는 \’Camb. Anc. Hist\’. x, 1934, p.851 주. 1에서 아그립바의 악화된 재정관리가 유대가 로마로 재흡수되는데 일익을 담당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3. [칼키스의 헤롯이 실라스를 죽임]



 아그립바왕이 죽었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기 전에, 칼키스(Chalcis)의 분봉왕[㈜ 그는 전 군의 총 사령관인 실라스(Silas)가 이전에 차지한 지위를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W.Otto, in Pauly-Wissowa, viii : 1913, p.96과 마찬가지임).]인 헤롯(Herod)은[㈜ 위의 고대. 19권. 8 : 1(338).] 왕의 친구인 헬키아스(Helcias)와[㈜ 고대. 18권. 8 : 4(273)을 참조.]공모하여, 부하들 중에 가장 적합한 아리스톤(Ariston)을 보내어 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처럼 가장하여, 그들의 적인 실라스(Silas)를 [㈜ 투옥된 아그립바의 군 사령관. 참). 고대. 19권. 6 : 3(299)과 7 : 1(317-325).]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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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권 제 8장 아그립바가 죽을 때까지 행한 다른 일들과 그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8 장


    아그립바가 죽을 때까지 행한 다른 일들과 그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1. 아그립바가 디베랴에서 몇몇 왕들을 대접하다


     아그립바왕은 베리투스에서 앞서 말한 일을 끝낸 후 갈릴리(Galilee)의 한 도시인 디베랴(Tiberias)로 갔다. 이제 왕은 다른왕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다. 하여튼 그는 콤마게네(Com-magene)왕 안티오쿠스(Antiochus),[㈜ 참). 고대. 19권. 5 : 1(276).] 에메사(Emesa)의[㈜ 레바논 국경 북동쪽, 오론테스(Orontes) 강변에 있는 수리아 아파메네(Apamene)의 현재의 Homs.] 왕삼프시게라무스(Sampsigeramus)와[㈜ 그의 딸 요타페(Jotape)는 아그립바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혼인하였다. 참). 고대. 18권. 5 : 4(135).] 소 아르메니아(Armenia Minor)[㈜ 아르메니아 본토 서쪽 소지역.] 왕 코티스(Cotys)[㈜ 동일하게 불리우는 드라케(Thrace)왕의 아들. 37년 소 아르메니아(Armenia Minor)왕으로 가이우스가 임명함. 참). Dio 1ix. 12 : 2. 타키투스 ‘연대기’ xi :9에서는 47년에 그가 아르메니아의 통치자로 로마의 후원을 받았던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의 복귀를 글라우디오 황제의 전보를 보내 무력으로 방해하던 것을 중단했다고 전한다.] 뿐 아니라 폰투스를 다스리는왕 폴레모(Polemo)와[㈜ 소 아르메니아 코티스(Cotys)의 형제인 율리우스 폴레모(Julius Polemo)(‘Pap. Brit. Mus’. iii : 1178, 22째줄을 참조). 그는 37년부터 63년까지 본도(Pontus)의 왕이었다. Dio 1x 8 : 2는 이제 말한 풀레모를 길리기아(Cilicia)의 왕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폴레모(Marcus Antonius Polemo)와 혼동한다. 그러나 고대. 20권. 7 : 3(145)는 D. Magie가 ‘소 아시아에서의 로마 통치자들’ ii : 1950, p. 1407 주. 26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후자를 따로 언급한다.] 칼키스(Chalcis)의 통치자인 헤롯의[㈜ 참). 고대. 18권. 5 : 4(133)이하. 그의 칼기스(Chalcis) 왕국은 레바논 산의 기슭에 있었다. 참). 고대. 14권. 3 : 2(40).] 방문을 받았다. 아그립바왕이 그들에게 정중함을 표시하고 접대한 후, 그들 모두와 나눈 그의 대화는 왕들의 방문으로인해 자신이 영화롭게 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기분의 향상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그립바왕이 그들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에 수리아의 왕 마르수스(Marsus)가 그를 찾아왔다. 따라서 아그립바왕은 로마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그를 마중하려고 도시 밖 7퍼얼롱(furlongs)까지 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일로 인해 마르수스와 불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왕이 자신과 함께 다른 왕들을 데리고 자신의 병거에다가 그들을 태웠기 때문이었다. 이에 마르수스는 그들과의일치와 친밀한 교분을 의심했다. 마르수스는 그러한 많은 왕들의 친밀한 교분을 의심했다. 마르수스는 그러한 많은 왕들의 친밀함이 로마의 이익에 불리할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마르수스는 부하들을 보내어 각 왕들에게 지체없이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아그립바왕은 이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그 후에 마르수스와 불화하게 되었다. 아그립바왕은 또한 마티아스에게서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였고 대신에 칸데라스(Can-theras)의[㈜ 이 본문은 라틴역과 여러 사본들중 한 사본의 난외에서 발견된다. 여러 사본들은 Chithaerus라고 나오지만 고대. 20권. 1 : 3(16)에서는 대제사장직에서의 다음 교체가 기록되었을 때 “별명이 칸데라스(Cantheras)인 대제사장”의 파면이 언급되었다. Mishnah ‘Parah’ iii : 5에서는 하코르(Hakkof 혹은 Hakkayaf)의 아들 엘리에호나이(Eliehonai 혹은 Elioenai) ben Hakkof(or Hakkayaf)로 불리는 대제사장직을 말하고 있다. 엘리오나이우스(Elionaeus)는 요셉 카이아파스(Joseph Caiaphas)의 아들로 명확히 간주하고 있다.] 아들인 엘리오나이우스(Elionaeus)를 대제사장직에 임명했다.


     2. 아그립바가 가이사랴의 극장에서 신이라고 불리우며 환영받다


     아그립바왕은 전 유대를 3년간 통치한 후에[㈜ 병행구, 전쟁. 2권. 11 : 6(219)에서도 마찬가지임.] 전에는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현재의 야파(Jaffa)와 탄투라(Tantura)사이의 베니게에 있음. 헤롯은 그곳에 웅장한 항구를 건조하여 아구스도를 기리기 위해서 그 도시를 가이사랴로 불렀다. 참). 고대. 15권. 9 : 6(331-341)과 전쟁. 1권. 2 : 5-7 Eastrern Roman Provinces) 1037, p.231은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가 4세기에 시돈의 왕이었던 Strato 왕가의 누군가에 의해 건조되었거나 혹은 Strato가 Abd Astart를 표현하는 것과 같이 문자적으로 아스타르테의 망대를 뜻하는 믹돌 아스타르트(Migdol Astart)의 헬라화된 형태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리웠던 가이사랴로 왔다.[㈜ 행 12 : 19-20은 또한 가이사랴에서 아그립바 사후의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에서는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것과 같이 아그립바가 두로와 시돈의 사절과 회합을 가졌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왕은 가이사의 행복을 위한 일종의 축제가[㈜ Thackeray가 수정한 문장인 “그(아그립바)가 제정했다”는 헤롯이 제정했고 가이사의 명칭을 따라 명명되어 5년마다 실시되는 경기(전쟁. 1권. 2 : 7(414)이었을 것이므로 적합지 않다.]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가이사의 영예를 기념하는 축제를 거행했다.이 때 그 나라에서 직책을 가졌거나 두 번째 날에, 아그립바왕은 순은으로 짜여진 참으로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으로들어갔다. 태양광선이[㈜ J. Morgenstern, “하눅카 축제와 고대 이스라엘의 달력.”(The Chanukkah Festival and the Calendar of Ancient Israel), ‘Hebrew Union Coll. Ann’. xx, 1947, pp.90-91은 아그립바가 태양신의 역할을 하였고 축제는 실제로 주야 평분시(平分時)와 하지의 정월 초하루 축제였다는 특이한 암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Lower Moesia의 두로스토룸(Durostorum)에 주둔한 로마 군단이 거행한 축제와 비교하였는데 그 축제에서는 왕의 복장을 입고서 30일 후에 자신을 희생시켜야 하는 신성한 왕의 역할을 하는 인신(人身)제물이 있다.] 찬란하게 비치자 은으로 짜여진 그 옷은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반짝임에 의해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아첨꾼들은 왕에게는 유익하지 않았지만 아그립바왕을 신이라고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행 12 : 21-22는 헤롯 아그립바가 왕의 복장을 하고서 권좌에 앉은 후 연설했을 때 군중들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목소리다”라고 외쳤다고 유사하게 전한다.] 그들은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가 지금까지는 한 인간으로서 당신을존경해 왔으나 앞으로는 당신이 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아닌그 이상의 존재라는데 동의합니다.” 왕은 그들을 꾸짖지도 않았고 그들은 아첨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일 직후에 왕은 고개를 쳐들고 그의 머리위에 있는 줄 위에 올빼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아그립바왕은 올빼미가 전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 왔었으나,[㈜ 고대. 18권 6 ; 7(195)에서 요세푸스는 아그립바가 디베료에 의해 구속된 후 아그립바가 기대었던 나무에 올빼미가 내려 앉았다고 언급한다. 또다른 죄수인 한명의 게르만인은 이러한 일을 아그립바가 구금에서 속히 석방되어 대권을 차지할 조짐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다시 올빼미를 보게 될 경우에는 자신의 죽음이 5일 이내에 닥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대. 18권. 6 : 7(200)).] 이번에는 재난의 전조임을 인식하면서 마음속을 비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행 12 : 23은 그 올빼미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군중들이 아그립바를 신으로 부른 직후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천사가 그를 쳤고 충이 먹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 유세비우스, ‘교회사'(Hist. Eccl) ii : 10에서는 아그립바가 그의 머리 위로 본 것은 올빼미가 아니라 천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사인 E. M. Merrins는 “안티오쿠스 Ⅳ세, 대헤롯 헤롯 아그립바 Ⅰ세의 죽음,” ‘Bibliotheca Sacra’ 1xi, 1904, pp.561-562에서 아그립바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복막염이며 아그립바가 여기서 서술된 것과 같은 복부 통증의 빈번한 원인이 된 복막염으로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따라서 동양에서 흔한 회충이 아그립바의 소화관에서 활동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앞당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회충은 신체의 어떤 부분이 병에 걸렸을 때 보다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 잡았다. 왕은 그의 친구들에게로 뛰어가면서[㈜ 이문은 “오르면서”임.] 말하기를 “그대들의 눈에 신으로 비친 나의 운명이, 조금전에 나에게 부과된 말에 즉각적으로 반박하여 생명을 내던지라는 명령을 받았네. 그대들에 의해 불멸의 존재로 불리워진 나는 이제 죽음의 판결을 받았네 이제 나는 신이 원하신 것과 같이 나의 몫을 받아야만 하네. 사실상 나는 평범한 방식으로 살지 않았고 참된 기쁨으로 환호하는 커다란 명성으로 살았네.” 이 말을 할 때에도 왕은 보다 강한고통에 휩싸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서둘러 왕을 왕궁으로 옮겼으며 그가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여성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군중들은 조상들의 관례를 따라서 베옷을 입고 앉아서 왕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하였다. 곡하는 소리와 비탄의 소리가 모든 곳에 가득찼다. 왕은 높은 곳에 위치한 침상에 누워서, 엎드려 있는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5일간의 복부의 진통으로 탈진한[㈜ 다른 사본에는 “끊임없는 고통을 당한지 5일 후 지쳐버린”임] 앙은 그의 나이 54세에 그리고그가 즉위한지 7년이 되는 때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4년 동안[㈜ 7-41년임. 참). 병행구, 전쟁. 2권. 11 : 6(219)보다 정확치 않는 문장.] 가이우스 가이사(Gaius Caesar)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중3년간은 빌립(Philip)이 다스리던 분봉국의 직위에 올라 통치하였고 4년이 되는 해에 헤롯의[㈜ 분봉왕직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던 *고대. 18권. 7 : 2(252)) 아그립바에게 가이우스가 허용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권리를 주려고 로마로 갔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영토를 통치하였다. 그는 그후 3년동안[㈜ 41-44년.] 황제 글라우디오 가이사의 통치하에서 왕의 자리를 감당했다. 그동안 그는 위에 언급한 영토를 통치했고 부가적으로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가이사랴를 다스렸다. 그는 이들 영토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세를 받았는데, 13,000,000드라크마에 달했다.[㈜ 약 1,157,143파운드, 혹은 3,240,000달러. 드라크마(drachma)는 본문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추측될 수 있는 듯하다. pleivsta”로 읽는다면 그 의미는 아그립바가 이러한 영토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가 한창일 때는 1천200만 드라크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관대함으로 인해 많은 돈을 빌렸고, 그의 지출은 수입을 초과하였으며 그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지출은 끝이 없었다.[㈜ 혹은 “그의 야심은 그러한 비용에 의존하지 않았다.” 모미글리아노(A. Momigliano)는 ‘Camb. Anc. Hist’. x, 1934, p.851 주. 1에서 아그립바의 악화된 재정관리가 유대가 로마로 재흡수되는데 일익을 담당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3. [칼키스의 헤롯이 실라스를 죽임]


     아그립바왕이 죽었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기 전에, 칼키스(Chalcis)의 분봉왕[㈜ 그는 전 군의 총 사령관인 실라스(Silas)가 이전에 차지한 지위를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W.Otto, in Pauly-Wissowa, viii : 1913, p.96과 마찬가지임).]인 헤롯(Herod)은[㈜ 위의 고대. 19권. 8 : 1(338).] 왕의 친구인 헬키아스(Helcias)와[㈜ 고대. 18권. 8 : 4(273)을 참조.]공모하여, 부하들 중에 가장 적합한 아리스톤(Ariston)을 보내어 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처럼 가장하여, 그들의 적인 실라스(Silas)를 [㈜ 투옥된 아그립바의 군 사령관. 참). 고대. 19권. 6 : 3(299)과 7 : 1(317-325).]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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