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전쟁사 1 영역자 서문

 


영역자 서문



 유대전쟁사는 요세푸스의 저서 중 가장 먼저 쓰여졌고 또 가장 유명한 책이다. 전쟁이 끝나고 로마에서 한가한 시간 중에 첫열매로 기록된 유대전쟁사는 전쟁에 직접 참여한 목격자에 의해 쓰여졌다. 그는 황제의 보조금을 받는 자로서, 베스파시안이 전에 살던 왕궁에 기거하며 최근 전투에서 지휘관이었던 황제 후원자의 \”전쟁일지\”를 참고하여 자기 마음대로 배열하였다.

 저자 자신이 그 작품에 붙인 제목은 \”유대인의 전쟁에 관하여\”(Peri;tou\’jIouda+i+kou\’ polevmou 자서. 412 ; 고대. 20권 258, 참).고대. 18권. 11)이다. 라쿠오이어(Laqueur)의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Der jud, Historiker Flavius J osephus, Giessen,1920) p.225와 p.98에서 그는 이 제목이 유대의 변절자가 순수한 로마인의 관점에서 쓴 것임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더 긴 형태인\’Iouda+i+kou\’ polevmou prov\” 가 니이제(Niese)의 주요 사본인 P의 1권과 2권 제목으로 나온다.

 이 제목은 요세푸스가 전에 붙였던 제목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해 그것을 완화시켜 보려고 새롭게 붙인 제목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어 왔다. 그러나 사본들 대부분의 다른 이름은 \”포로에 관하여\”(Perivalwvsew\” )가 붙어 있고 가끔 \’유대 역사의\'(Ioda+i+kh\’\” istoriva\” )라는 말이 그 뒤에 덧붙여져 있는 사본들을 볼수 있다.

  Peri;alwvsw\” 는 오리겐과 제롬에게서도 나타나는데 제롬은 자신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7권의 책에 \’유대의 포로에 대하여\'(Captiuitatis Judaicae)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그러므로 \”포로에 대하여 Peri;alwvsew\”라고 할 수있다(comm. in Isaiam, 64, sub fin).

 니이제(1권 p.6)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를 단권으로 묶어 요세푸스의 주요 저작으로 소개할 때 \’Iouda+i+khvstoriva 를 원제목으로 달고 부제를 Peri;alsvsew\”Arcaiologiva로 달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Peri;alwvsew\”는 요세푸스 자신이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a[lwsi\”는 최후의 비극적 장면을 묘사할 때 계속 사용되며 가끔은 관사 없이 사용된다.〈예)전쟁. 2권. 17 : 10(454) (Prooivmion alwvsew\” ), 4권 (318)과 5권 (3) (alwvsew\” a[rxai, al. kath\’rxen th\’povlei )〉.

 로버트 아이슬러 박사는 역자(1)에게 이 서문에 대해 많은 제안을 해주시고 유대전쟁사의 기원에 더 많은 시사를 줄 중요한고대 슬라브어 판을 곧 출판하실 분인데 그는 오래되고 간단한 초록인 Halosis와 후대판인 Polemos로 구별한다.

 \”유대의 역사\” 또는 \”역사\”(ivstorivai 자서. 345, 유세비우스,교회사 I.8)라는 제목은 에바브로디도가 최종적으로 출판한 요세푸스 전집에 붙인 큰 제목이라고 로버트 아이슬러는 생각한다. 슬라브어판 모든 사본들은 \”예루살렘의 함락에 대하여\”로 제목이 붙어있고 그 사본들 중 어떤 것에는 지금까지 어디에서 인용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요세푸스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라며 ejn tw\’ lovgw th\’\” slwvsew\”라는 글귀가 (Chron. Pas-ch. I. 263 Dind.에 나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강조한다.

Flauivou !Iwshvpou peri; alwvsew\” th\’\” Ierousalhvm이라는 제목으로 티투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주후 72년에 초판을 출판하였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며 일찍이 사라졌었는데 로버트 아이슬러가 곧 출판할 역본 뿐만 아니라교황 Damasus 시대의 사람인 개종 유대인 이삭(별명은 가우덴타우스 혹은 힐라리우스)이 만든 기독교화된 라틴어 번역판인일명 \”에게시프스\”(Heg.)도 그 초판에 기초했음을 증명할 수있으리라고 로버트 아이슬러는 희망했다. 이 초판은 해가 갈수록 점점 수정되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하여 증보되었을 것이다.

 로버트 아이슬러는 도미티안 치하에서 발행된 완전 개정판의 제목이 !Iouda+i+ko;\” povlemo\”라고 생각한다. 이 제목은 PA와 L사본들에 남아있다. VR과 MC는 슬라브어 번역자가 사용했던 것과같은 !Awsi\” 원본의 개정판이긴 한데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초기에 출판된 것임을 나타낸다.

 우리는 헬라어 본문이 유대전쟁사의 초록이 아니었음을 그의 서문에서 알 수 있다. 아람어로 기록된 유대전쟁사 서문에 보면\”그 지경 안에 있는 야만인들\”에게 보냈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야만인을 좀더 정확히 말하면 파르티아인, 바벨론인,아라비아인, 메소보다미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아디아베네 주민을 낮추어 부른 말이다(전쟁. 1권 3, 6).

 헬라어 유대전쟁사는 로마 제국의 유익, 즉 헬라와 로마 세계 전체의 유익을 위해 아람어 작품을 헬라어로 번역한 \”번역서\”(@Ellavdi glwvssh metabalsvn )로 묘사되어 있다.

 아람어로 된 유대전쟁사는 없어졌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두가지 추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① 아랍어로 된 책과 헬라어 사본과의 관련성과 ② 아람어 전쟁사를 쓴 목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헬라어 사본은 문자적 직역이 아니다. 헬라어 사본은 역사가의 말을 여러곳에서 따왔음이 틀림없다.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고대사를 히브리어 성경의 번역이라고 했다( ejk tw\’n Ebraikw\’n meqhrmhneumenhn grammavtwn 고대. 1권 5).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기면서 자신이 임의로 가감하지 않았다고 다시 한번 언급한다(고대. 10권. 218). 그러나 사실 그 작품은 성경 이야기를 자유롭게 재구성하고 70인역의 도움을 받았으며 다른 자료에서 인용하여 상당한 부분을 첨가했음을 알 수 있다.우리가 알기로는 유대전쟁사의 헬라어 형태는 헬라인 조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셈족 어형을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오래된 작품 (아람어 유대전쟁사)을 실제로 다시 썼다고 추정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유대전쟁사를 쓴 목적에 대해 살펴보면, 전쟁 직후에 베스파시안의 후원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서 로마의 입김(of-ficially \’inspired\’)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다(Laqueur의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126 이하를 보라).

 이 책은 유대인들이 쓸데없이 앞으로 또 다른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또 전후에 보복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열망을 달래기 위해 쓰여졌다. 만약 그들이 반역을 꾀하고자 한다면 트라얀과 하드리안 치하에서 엄청난 파멸을 초래할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르티아인들의 발흥의 위험성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 독자들에게 앞에서 언급한 야만인 목록에 가장 먼저 파르티아인들을 기록한다(전쟁. 1권 6). 그렇게 한 동기는 요세푸스가 로마군에 대한 설명을 마치면서 쓴 글을 통해 찾아볼 수있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좀더 길게 쓸 수 있다면, 나는 로마인들을 칭찬하기 보다 로마인들이 정복한 사람들을 위로하고,또 반역을 꾀하고자 하는 자들을 제지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이다.\”(전쟁. 3권 108, 전쟁. 2권 345이하에 나오는 아그립바의 연설에서 유대인들이 메소보다미아에서 도움이 오기를 바란다고 언급한 것을 참고하라)

 원 아람어판 유대전쟁사는 서방세계에서 일찍이 사라졌다.1886년에 H. Kottek이 유대전쟁사의 일부가 6세기에 수리아어로 번역되어 6권으로 남아있다고 하는 주장을 했으나 N?ldeke는 그 설을 지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 A. Ber-endts(ap. Harnack, Texte und Untersuchungen,xiv. 1, 1906)는 유대전쟁사 아람어판이 구 슬라브어 역본으로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그 슬라브어 번역본에는 헬라어판 유대전쟁사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세례자 요한, 그리스도, 초대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들이 추가되고 다른 몇가지도 변경되어 있다.

 슬라브어판은 아직 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전체가 다 번역되지 못했다. 그러나 1권에서 4권까지는 고(故) A. Berendts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K. Grass(Dorpat, 1924 – 27)가 편집 출판하여 나오게 되었다. 역자(1)가 그 책을 너무 늦게 입수하여이 영역본을 내는 데 참고하지 못했다. 그러나 3권 부록에서 생략된 부분의 목록과 함께 중요한 부분을 번역하여 첨부하고자했다.

 Eisler 박사에 의하면 Berendts의 이론은 충분한 검토를 거쳐수용해야 한다. 슬라브어판은 수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으로 수정되어 있다 해도 그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슬라브어판은 잃어버린 아람어판에서 직접 번역된 것이 아니다. 헬라어판에서 번역된 것이라는 증거가 많이 나타나고 VRC 사본과 유사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Eisler 박사는 VRC 사본에서 원래 셈족어(아람어)를나타내는 음역된 단어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Eisler에 의하면VRC 사본은 리투아니아에서 우연히 그 사본을 습득한 러시아정교회의 유대화된 이방인 사제에 의해 A.D. 1250년에서 1260년 사이에 슬라브어로 번역되었거나 아니면 원래 아람어판(theHalosis)을 다듬어지지 않은 헬라어로 초역(first version)했던 것을 복사한 것이다.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헬라어로 된 초역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전쟁사 형태로 다시 쓰여지기 전의 작품일 것이다.

 요세푸스와 아그립바 왕 간에 오랫동안 62통의 보충 서신을 교환했는데 그중 2통이 유대전쟁사 헬라어판 초고 내용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1통은 자서전에 다시 수록되었다(자서. (364)이하).

 우리는 초기 아람어판에도 아그립바의 편지가 참조되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유대전쟁사가 완성되자 요세푸스는 사본들을 그의 왕실 후원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정하였으며, 티투스는 이 책의 출판을 허락했다. \”사실 티투스 황제는 나의 저술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대전쟁의 진상을 밝히는 유일한 권위있는 책이 틀림없다 하시며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의 저술에 도장(signature)을 찍고 책을 출판하도록 명령하셨다\” (자서.363, 아피.1권.50이하).

  유대전쟁사의 출판 날짜는 A.D. 75~79년 사이로 자세히 말하면 베스파시안 황제가 죽기 전 그의 통치기 후반인 A.D. 75년 평화의 신전 봉헌식이 있은 후일 것이라고 여겨진다.(전쟁. 7권158이하, Dio Cassius, lxvi. 15) 이러한 사실은 전쟁에 대한 다른 서술 부분에서도 이미 밝혀진 바이다<전쟁.1권. 1 : (1) 이하고대. 1권. 1 : 1(4)〉.

  그러나 이 기간(신전 봉헌부터 베스파시안 사망까지)은 단지 초판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다시피 요세푸스는 다른 고대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재손질 하면서 새로운 사본이라고 하는 저술 속에 첨가시켰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말년 즉주후 93-4년에 요세푸스는 전쟁사의 새로운 판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그 새로운 전쟁사는 그때까지의 유대 역사의 후반 사건들을 내용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고대.20권.267).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존하는 요세푸스의 원문도 아마 더 짧은 초록에서 덧붙여져 왔을 것이다. 헬라어판 서문에 있는 목차는 승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Eisler 박사는 헬라어초판은 이 사건으로 끝나며 주후 71년에는 출판되었으리라고 결론 짓고 있다. Eisler 박사는 요세푸스가 승전기념일까지 자신의 저술을 완성하려고 애썼으며 이러한 기념식에 두 황제들에게 사본을 증정하려고 애썼다고 주장한다.

  또한 Eisler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요세푸스는 후편에 오니아스(Onias)가 애굽에 세운 또 하나의 유대인 성전이 주후 73년에 파괴된 사건(전쟁.7권 420-436)을 예루살렘 함락 사건 다음인 맨 끝에서 두번째 장에 추가하고 있으며, 동시에 오니아스 성전의 건축(전쟁. 1권. 33)과 하스모네안 왕조의 역사(Hasmonaeanhistory)에 대한 부분을 오니아스 성전 파괴와 조화되게 하려고 전체 저술의 맨 앞에 삽입하였다는 것이다.

  짧은 머리말(preface)은 전체 내용에 비해 다소 불확실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요약임을 보여준다(전쟁. 1권. 19-29). 또한 서론에 언급된 주요 내용은 첫번째로는 황제의 눈을 끌기 위해서이며 두번째로는 일반적인 독자를 끌기 위한 내용을 선택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1권 전부와 2권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지나치게 긴 서문도 있는데 그 내용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일차 성전 점령에서부터 로마와의 전쟁 발발까지 거의 250년의 유대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말년에 유대의 완전한 역사서를 서술할 때에 이 부분은 「고대사」 13권에서 2권까지 7권 반에 걸쳐 확대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서술을 비교해 보는 것은 유익한 연구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고대사에 있는 병행구절들을 「유대전쟁사」(하바드판 – 역자(2)주) 윗부분에 써 놓았다.

  제1권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약 170 B.C.)부터 헤롯의 죽음까지의 내용이며, 제2권은 그후부터 주후 66년 전쟁의 발발까지의 역사와 케스티우스의 진군과 갈릴리에서 요세푸스가 전쟁을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제3권은 주후 67년 베스파시안의 갈릴리 원정과 요타파타의 포위 공격과 요세푸스가 포로로 잡히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제4권은 갈릴리 전투의 결말과 예루살렘의 고립과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선포되면서 잠시 전쟁이 중단되는 것 등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며, 제5권과 제6권은 주후 70년 티투스의 예루살렘포위와 함락을 다루고 있으며, 제7권은 승리자들(티투스와 그 무리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온 내용과 개선 행진과 반란자들의 마지막 요새의 함락과 그 이후의 몇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전쟁사」전체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생각해 볼 때 큰가치가 있다. 「유대전쟁사」의 문체는 1세기 때 유행하던 아테네풍(Atticistic)의 헬라어로 탁월한 견본 문체이기 때문이다. 이문체는 알렉산드리아 시대 때 들어온 언어를 발전시키고자 하던학파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문체로서 페리클레스(Pericles) 시대의 아테네인들이 수용했던 문체이다. 잘 선택된 용어와 힘있는 문장과 문단들, 어순과 관사의 사용에 있어서의 정확성, 일정한 고전적인 문체이나 맹목적인 모방이 아닌 우아한 문체 등은자주 번역가의 능력을 무색케 한다.

 용어 – 다음 단어들은 요세푸스의 다른 작품에서는 나오지 않고 전쟁사에만 특별히 나오는 것들이다. : ajdiavleipto\”(w\”), ajnevdhn, a[tono\”(-w\”), basileia\’n, dhmovth\”, diekpaivein, dievcein(distare, ajpecevin 보다 우선하여 ), eivkai\’o\”(-w\”) ejxauivnh\”(ejxaifnh\”보다 우선하여), ejwqinov\”, qanata\’v, katalhvgein, katantibolei\’n, katorrwdei\’n and ojrrwdei\’n, kopia\’n, laqrai\’o\”(-w\”), lewfovro\”, meshmbrinov\”(\”남쪽의\”), hetagenevstero\” and progenevstero\”, hovnon ouvk(\”거의\”), ojlovfursi\”(타키투스에서), palindrohei\’n,  panou\’rgo\”(파생어), paravsthma(\”용맹\”), polivcnh and polivcnion, pro;\” dev(부사로 고대사에서는 kai; prosevti로 사용됨.), prosamuvnein, prosavrktio\”, prositov\”, ptoei\’sqai, suhmivsgein(서사시), sstadhn, dia; tacou\”  kata; tavco, tonou\’n, upodevidein(서사시), cqamalov\”, cwrismov\”(\”출발\”), cw\’ro\”.



 요세푸스는 교육받은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면서 헬라 문학에 자신이 심취되어 있다는 것(고대. 20권. 263)과 이러한 세련된 문체를 쓸 수 있기까지 상당한 노력을 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보이고 있다.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역사가에게는다른 여러 자질들 가운데 특별히 매력적인 문체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적절한 단어의 선택과 독자를 위해 무엇이든지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르러야 된다\”(고대. 14권(2)).



 요세푸스는 특히 전쟁사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음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잘 선택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문체는 오랫동안 수련해야 얻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아람어로만 글을 써왔던 요세푸스가 헬라어를 정확하게 구사하여 전쟁사를 썼다는 것은 그의 후기 저술의 부언(obiter dictum)에 의해 설명되어지지 않았다면 실로 놀라운 것이다.

 전쟁사를 쓴 지 25년만에 쓰여진 아피온 반박문에서 요세푸스는 초기 작품을 쓸 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헬라어 때문에 몇 명의 조력자를 고용했다고 말하고 있다(Crohsavmenov\” tisi pro;\” th;n Ellhnivda fwnh;n sunergoi\’\”  아피.1권.50).

 요세푸스가 이러한 조력자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증거가 저술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제7권은 다른 것과 달리 독자적이다. 즉 제7권의 문체는 고대사에 있는특징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요세푸스는 자신의 능력으로 7권을 쓴 것 같다. 요세푸스의 독자적인 문체는 자서전적인 문단이나 가끔 삽입된 문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세푸스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문체가 고르지 못한 것은 아피온 반박문에서 밝힌 조력자의 도움 때문이며 그에게 몇명의 조수들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자서전의 거칠은 문체는 요세푸스 자신의 글(ipsissima verba)임을 나타낸다. 유대고대사에도 저자 자신이 조수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대부분을쓴 것으로 보인다. 유대전쟁사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썼던 것까지는 고대사에서도 자신이 쓴 것으로 보이나 유대 전쟁사에서처럼 부분적으로, 즉 15권에서 19권까지의 5권은 다른 사람에게 대필케 했던 것 같다(15권과 16권은 전쟁사에서도 도왔던 능력있는 사람이 쓴 문체임을 보여준다. 17권에서 19권까지는 조수가 타성에 빠져 Thucydides를 맹목적으로 모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피온 반박문\’에서 보여주는 용어의 적절한 선택과 알기 어려운 고전에 대한 박식함과 주요 사건에 대한 뛰어나 배열등은 조수들이 많이 기용되어 도와 주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몇 가지 사본을 읽어보면 요세푸스가 고대사를 기록할 당시 그는 이미 헬라 시(Greek Poetry)를 포함한 헬라 문학에 완전히 정통했었음을 나타내준다. tw\’n Ellhnikw\’n de;grammavtwn ejspouvndasa metascei\’n thvn grammaikhn; ejmpeirivan ajnalabwvn (고대. 20권.263) grammavtwn 다음에 A사본과 초록에는 kai;poihgikw\’n maqhmavtwn(+ polla A)가 덧붙여 있다. 마지막 단어는 동일결어 (hom-oioteleuton)로 인하여 다른 사본에는 빠졌다. Eisler 박사의 주장대로 요세푸스가 자부심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을 알고 있는그의 조수들이 교묘한 고의적인 잘못에 의해서 빠졌을 수도 있다.

 우리는 요세푸스의 초기 저작에서, 그가 고전적인 문장이나 비유에 있어 조수들의 도움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Thucydides는 많은 역사가들이 참조로 사용하는 모델이다.고대사 제17권부터 제19권까지 Thucydides를 많이 참고한 그의 조수는 이러한 표절자에 대해 키케로가 한 농담을 들을 만하다(\”ecce autem aliqui se Thucydidios esse profiteritur, nov-um quoddam imperitorum genus.\” Orator 30).

 반면에 전쟁사에는 Thucydidies의 모방(창조)이 훨씬 적으며 가끔 한 구절이나 간단하게 기억되는 것만 참고하는데 그치고있다. 전쟁사에는 Thucydides 이외에 헤로도투스(Herodotus)크세노폰(Xenophon),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 폴리비우스(Polybius)를 참고하고 있다.

 더욱 흥미있는 사실은 요세푸스의 전쟁사와 헬라 시(詩)와 호머와 다른 비극 작가들과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 헤롯의 가정적인 문제에 대한 적나라한 이야기는 헬라의 드라마풍이라고 알려져 있다. 요세푸스의 전쟁사에서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있는데 우선 네메시스에 대한 이야기(전쟁. 1권 431)와 헤롯 왕의 집안의 타락성(Muvso\” 638. 참).445)과 헤롯 왕가의 대혼란(488), 사악함과 음모의 극화(to;n lumew\’na th\’n\” oijkiva\” kai;drama tourgo;n o[lou tou\’ mu;sou\” 530), 음모의 결말을 불안하게 기다리는이야기 (543), 하느님의 복수(Kaq!a[dou fevrein to;n ajlavstora 596), 살해된 아들들의 유령이 궁전을 배회하며 비밀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는 이야기(607)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인용된 것들도 있다. 이것은 분명히 소포클레스의 비극작품과 관련성이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유들은특히 전쟁사와 전쟁사의 문체로 쓰여진 고대사 중 제15권에서 제16권에 국한되는데, 이것은 요세푸스 자신보다는 아마 조수가 인용했을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의 전쟁사는 버질(Virgil)의비유들도 참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전쟁사는 고대사와는 달리 삽입된 자료들의 근거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요세푸스는 전쟁사에서 사료(史料)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단지 서문에서 자신의 자료는 대개 직접 구한 것이며 눈으로 목격한 것(1권 3)을 회상하여 그것을 기초로하였으며, 새로운 자료를 가지고 직접 자신이 내용의 구조를 세워(gilovpono\” o meta; tou\’ kaina; levgein kali tol sw\’ma th\’\” istoriva\” ataskeuavxwn i+dion), 조심스럽게 진실된 사실을 수집하였다고만 밝히고 있다. (1권 15이하)

 이러한 불충분한 암시는 요세푸스 말년의 작품인 \’아피온 반박문\’과 \’자서전\’에서 보여주는 몇 가지 언급들을 통해 보충될 수있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과 \’자서전\’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개인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가 로마와의 전쟁 발발시 갈릴리의 지휘관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포로로 잡힌 후에 계속해서 로마 장군들과 중재했던 일과 예루살렘 포위 공격 동안로마군의 대열 뒤에서 티투스와 관계를 가졌던 자신의 개인적인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포위 공격 동안 자신은 로마군 진영에서 포위 진행 과정을 적었으며 예루살렘성 안에서 일어났던 재난도 잘 알고 있어 그 상황에 대해서는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전쟁사에서, 요세푸스가 포위당한 예루살렘 동족들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는 중재자로서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전쟁사의 사본을 받았던 아그립바 왕이 전쟁사를 저술할 동안 내내 요세푸스와 서신교환을 했으며 요세푸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에 대한 정보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자서. 364 이하).

 더구나 요세푸스는 아그립바 왕에게서 얻은 정보와 자신이 적은 메모와 수집한 것들 이외에, 중요한 또다른 자료 즉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의 \’회고록\’이나 \’전쟁일지\’들을 가까이한 듯하다.그러나 전쟁사 자체에는 이러한 책들을 참고했다는 것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이 작품에서 어떤 근거자료도 거명하지 않으려는 것이 요세푸스의 일관성 있는 태도 때문이며, 부당한 처사가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우리에게 전쟁사의 전체적인 흐름이 자신의 입장으로 썼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회고록\’이나 \’전쟁일지\’와같은 자료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것의 비중이 크든 작든 간에 자신의 정당성을 반드시 첨가시키고 있어 오히려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을 떨어뜨리게 하고 있는 점도 있다. 어쨌든 요세푸스가 그의 헬라인 조수들의 도움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일지\’에 대한 암시는 유스투스와 그밖에 다른 요세푸스와 경쟁적인 역사가들이 그의 전쟁사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자 그에 대한 대답의 근거로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만 나타난다.

 다른 사건들( ta; mecri; nu\’n seiwphmevna)에 대해 전에 요세푸스가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히 자신의 비평가들의 불만에 나타나 있다(자서. 338 이하). \’전쟁일지\’는 3번 언급되어 있는데 디베랴 출신 유스투스의 비난에 대해 답변하면서, 요세푸스는 유스투스가 베스파시안의 도착전에 전쟁 발발의 책임이 요세푸스와 그를 따른 시민들에게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스파시안 황제의 \’전쟁일지\’에 기록 되어진 사실은 데가볼리의 주민들이 얼마나 끈질기게 베스파시안을 졸라서 톨레마이스에서 당신을 죄수로 처벌하려고 했었는지에 대해 잘 보여준다\”(자서.342). 톨레마이스는 베스파시안이 안디옥에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첫번째 장소였으며 베스파시안의 본거지였다(전쟁. 3권. 29).

 우리는 여기서 \’전쟁일지\’가 전쟁 발발로 되돌아감을 알 수 있다. 요세푸스는 다시 한번 유스투스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쓰고있다. \”아마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일지와 반대되는 당신의 견해에서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듯이 당신은 가이사의 전쟁일지도 읽지 않고 전투 현장에도 있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자서.358). 요세푸스는 자신의 전쟁사를 하찮은 학생의 전쟁이야기 (w[spew ejn scolh\’ meirakivwn uhnasma prokeivsqai nomivxonte\” )와 감히 비교한 고약한 비평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감히 이러한 비평가들이 시도했던 것은 나의 진실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들이 황실의 지휘관들의 전쟁일지를 읽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어쨌든 적의 진영에 있던 우리의 위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아피. 1권 53-56).

 결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자격과 요세푸스 자신의 자격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 두 개의 마지막 단락은 그가 전쟁사를 쓸 때\’전쟁일지\’를 앞에다 두고 보면서 글을 썼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의 작가들 (W. Weber. Josephus und Vespasian, 1921)에 의해 주장되어 왔듯이 저자가 이 자료들을 다방면에 걸쳐서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라틴어로 쓰여진 주요 전쟁일지들(commentrii Principales)은 로마의 사령관들과 참모들에 의해 실전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것은 율리우스가이사(Julius Caesar)가 쓴 골(Gaul) 사람과의 전쟁일지들(Commentarii de Bello Gallico)과 같은 전쟁 기록으로서 더우기 문학적인 형태로 쓰여졌다. 이러한 전쟁 기록이나 다른 전쟁기록 자료들로부터는 주후 66년의 로마 군대의 배치에 관한 정보가 나와야만 하는데 이것은 다른 증거들에 의해서 명확하게 확인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아그립바 왕의 대연설에 의해 확인된다(전쟁. 2권. 345이하).티투스의 전쟁일지(commentaries of Titus)에서 직접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인용문에서는 애굽에서 가이사랴까지가는 군대 여정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어 간략하게 나와 있는데그 인용문을 보면 요세푸스가 동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쟁.4권. 658-끝). 베버(Weber)는 이 자료를 언급할 때 그 이야기의 인용문 전체에다 팔레스틴의 지형에 대하여 군데군데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확한지는 의문이지만 베스파시안의 시찰을 언급할 때 사해(Dead Sea)에 대한 묘사는 그의 의견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참). 타키투스 역사서. 5권 6장에 이와 비슷한설명이 있음)

 베버는 전쟁사 전체의 근간이 되는 것은 플라비안의 작품(Flavian work)으로 그것의 주제는 플라비안의 황제로 등극(rise)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 작품에서는 주후 66년의 군대 배치에 대한 묘사를 하였는데(아그립바의 연설에서도 인용됨) 이것은 전쟁. 3권부터 6권의 자료로 쓰인것이 분명하며 요세푸스 전쟁사 7권 157에 나와 있는 인용문에서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형(兄) 플리니(Pliny)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해 인용되었다. 라쿠오이어(Laqueur)는 베버의 견해에 대해 요세푸스가 전쟁사 이전에 발행된 작품을 혹평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러한 문학 작품은 나와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전쟁. 1권 ad init.).

 전쟁이 발생하기 전(Ⅰ~Ⅱ권)의 기록에서 우리는 한 작가의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전쟁사의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라고 유대고대사에서 가끔 언급하고 있는 다메섹 출신의 니콜라스(주전 약 64에서 주전 1세기 말까지)이다. 그는 헤롯 대왕과아구스도(Augustus)의 절친한 친구이며 144권의 세계 역사서와 대헤롯의 일대기를 포함한 다수의 저서를 쓴 작가이다.

 니콜라스는 제1권에서 ⅔나 차지하는 헤롯 왕가의 상세한 역사와 아켈라오(Archelaus)의 즉위(제2권의 시작 부분)에 대해서 쓰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소 편견을갖고 이야기한다면 당대의 저술가들 중에서는 요세푸스가 가장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켈라오에 대한 내용은 불행히도 미비한 점이 있었으나 아그립바 Ⅰ세 재위 1년까지는 충분한 내용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아그립바 Ⅰ세에 대해서 요세푸스는그의 아들인 아그립바 Ⅱ세로부터 정보를 얻어낼 수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회상하여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가 쓴 역사서에서 하스모네안(Has-monaean) 왕가에 대해 약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중요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가 전쟁사를 쓸 때는 마카비1서를 인용하지 않았으나 이후에 고대사를 쓸 때는 많이 인용하여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유대전쟁사의 역사가로서의 요세푸스는 높은 신임을 얻고 있다. 어쨌든 고대나 현대의 전쟁 역사가들 중에 역사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사실 그대로 언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가장 높게 평가를 받았던 펠로폰네시안 전쟁사 (Historyof the Peloponnesian War)와 비교해 볼 때 그의 작품은 어떻게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유대인들과 아테네인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능력면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두키디데스(Thucydides)처럼 일반적인 작가로서의 기능과 역사가로서의 기능을 겸비하고 있는데 두키디데스와 같이 요세푸스도사령관으로서 실패하여 마침내는 적들과 가까이 있게 되어 전쟁에서 양쪽편 모두의 관점을 갖게 된 것이다(Thuc. iv. 104ff.,26. \”내가 추방되었기 때문에 아덴인의 관점 뿐만 아니라 펠로폰네시아인의 관점도 잘 이해할 수 있어 양자를 조화시킬 수 있었다.\”(참).요세푸스의 전쟁. 1권. 3).

 한편 유대 역사가(요세푸스)는 헬라 역사가(두키디데스)와는달리 편집된 전쟁일지를 적의 사령관들의 감독하에 이용할 수있었던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황제의 후원과 아그립바 왕이 뒤에서 지원하는 것을 통해 귀중한 자료와 근거 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으며, 약간의 의문은 있으나 좋은 도서관에서도움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요세푸스의 기록을 전부 다 진실한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두키디데스를 바르게 인용하지 못하고있으며 그는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지만 그가 사용한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애매하여 그의 말이 수정될 필요가 있을 때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일지는 로마군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며 처음부터 로마제국을 저항한다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정복자의 대변인같은 친(親) 로마적 성향이 가끔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로마의 장군들, 특히 그의 영웅이었던 티투스의 관대함에 대해 가끔 언급하고 그를 억눌린 백성들의 구원자라고 묘사하여 의혹을 사고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가장 비판받는 것 중 하나는 티투스가 성전이 보존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이다. 이 기록은 후대 사가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4세기의 기독교인 작가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는 타키투스의 분실된 저술에 근거하여 요세푸스도 기록하는 있는 것처럼 성전 문제에 대한 작전회의가있었는데 상반된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성전 파괴를 결정한 사람이 티투스였다고 요세푸스와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다(전쟁.6권 238~241 ; 술피키우스 연대기 (Chron.2권 30).

 술피키우스의 설명은 마지막 부분에 달리 어떻게 수정해 볼수도 없는 기독교(Chistianos)라는 말이 들어있어 어느 정도 의혹을 사고 있다. 요세푸스가 로마 편향적 성격을 가진 것이 확실한 만큼 티투스가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티투스의 태도를 왜곡시켰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베버는 Josephus undVerspasian 72 이하에서 요세푸스가 잘못이고 술피키우스가 옳다는것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쉬러(Sch?rer)는 유대인의 역사(Gesch. des J?d. Volkes), 3판 1권631 이하에서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면 잘못된 생각을 낳게 된다\’고 말하면서 발레톤(Valeton)과 요세푸스의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전쟁의 전 역사에 대해 요세푸스가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전해주는 것을 통해 그의 진술을 비교 검토해 볼 수 있고 그가 자료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평가해 볼 수 있으나 두 진술들을 여기서 정확하게 고려해 볼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요세푸스가 전쟁사에서 사용한 자료와 그 후에 얻은 자료들을 모아 고대사에서는 보다 많은 자료들을 활용했다는 것과 주제들도 때로는 재정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전쟁사의 헤롯 통치 후반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외부 역사와 국내 역사를 따로 떼어 설명하지만고대사에서는 역사적 순서대로 함께 설명한다. 그래서 두 설명이 불일치한 곳이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자료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전쟁사의 내용들이 자서전과 겹치기도 하지만 양자는 상당히 불일치한 점이 많다. 그러므로 자서전이야말로 그의 기록들 중 가장 믿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사소한 부분이든 큰 부분이든 갈릴리에서 자신이 지휘한 내용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너무 부주의하든지 아니면 실제로 거짓말하여 양자간에 너무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그 차이에 대해서는 전쟁사2권 569~646의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다).

 라쿠오이어는 자서전을 다른 저서보다 먼저 썼다고 보기도 하고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라고 여기는데, 요세푸스가 자신의 또다른 후원자인 아그립바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쟁사를 쓸 때몇 가지 세목에서 고의적으로 허위 진술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요세푸스가 서문에서 비판한 사람은 아마도 로마인일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쓴 전쟁사는 남아있지 않다. 또한 주후100년 직후에 요세푸스의 작품을 비판한 디베랴의 유스투스가 쓴 유대역사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2세기 초반 타키투스가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준비한 사실에 대해 간단하게 묘사한 것(Hist. V.1~13)을 가지고 있으나 그 뒷부분은 없어졌다. 우리는 2세기 초에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의 전기를 쓴 것을 가지고 있으며, 3세기 초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가 대로마 역사를 썼는데 그중 로마와 유대의 전쟁 부분(66권)을 키필리누스(Xiphilinus)가 11세기에 발췌본을 만든 것을 가지고 있다. 타키투스의 기록은 전쟁사 뿐만 아니라 아피온 반박문에 나오는 유대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서도 흥미있는 대조를 나타낸다. 타키투스나 익명의 로마인이 쓴 역사서들은 요세푸스 생전에 로마에서 쓰여졌을 것이지만 유대인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 때문에 요세푸스의 저서들을 참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일반적인 자료 즉 플라비안의 전쟁일지 등을 참고했을 것이다.

 이 책(하바드 판)에 쓰인 헬라어 본문은 니이제(Niese)의 본문을 주로 참고하고 니이제가 대판(great edition)에 모아놓은 사본들을 세심하게 그리고 하나하나 조사해서 결정한 것이다.사본들과 니이제에 의해 이용 가능하게 된 다른 고대 문헌들은



다음과 같은 약어로 이 책에서 사용되었다.

 P Codex Parisinus Graecud 1425, 10 또는 11세기

 A Codex Ambrosianus(Mediolanensis) D.50 sup., 10 또는  11세기

 M Codex Marcianus(Venetus) Gr.383, 11 또는 12세기

 L Codex Laurentianus, plut. 1xix. 19, 11 또는 12세기

 V Codex Vaticanus Gr. 148, 약11세기

 R Codex Palatinus(Vaticanus) Gr. 284, 11 또는 12세기

 C Codex Urbinas(Vaticanus) Gr. 84, 11세기

 Exc. 콘스탄틴Ⅶ세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의 명에 의해 10세기에 만든 발췌본.

 Lat. 5세기에 카시도루스(Cassidorus)가 알고 있었고 4세기의 루피누스(Rufinus)가 번역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라틴어 역본.

 Heg. 헤게시푸스(Hegesippus)는 요세푸스 작품의 변조품이며 또 다른 라틴어 역본인데 성 암브로스의 작품으로 잘못 알져졌으며 사실은 주후 370여년에 개종 유대인인 이삭이 쓴 것이다. 이삭은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힐라리우스(Hilarius) 혹은 가우덴티우스(Gaudenti- us)라고도 불리우며, 암부로시아스터(Ambrosiaster)라고도 불리우는 교황 다마수스(Damasus) (Jos. Wit- tig in Max Sdralek\’s Kirchengesch. Abhandlungen iv;ed. Keber-Caesar, Marburg,1864을 보라)와 동시대 인물이다. 새 판(new edition)이 Vinc. Ussani에 의해 비엔나 전집(Vienna Corpus)에 포함되어 곧 출판될 예정이다.

 Syr. 암브로시아누스 판에서 Syra Pescitto가 전쟁사 6권을 수리아어로 번역한 것.

 Yos Breithaupt, Gotha가 1727년에 편집한 것으로 히브리어가 병행된 요세푸스 저작이며 헤게시푸스에서 나온 것이다.

 Slav. 구 러시아 역본으로 Vladimir Istrin이 비평적으로 편집한 것이며 곧 완성될 것이다. 1권에서 4권까지는 Konrad Grass가 독일어로 출판하였다.

 니이제가 인용한 다른 사본들은 다음과 같다.

 NCD Codex Laurentianus, plut. 1xix. 17, 약12세기

 T Codex Philippicus,전에는 고(故) Thomas Philips, Cheltenham의 도서관에 속해 있었다. 약12세기



 사본들은 PA(ML)와 VR(C)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ML과 C사본은 어떤 한 그룹에 지속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때로는이쪽에 때로는 저쪽에 속하게 된다. 첫째 그룹(PA)이 둘째 그룹(VR)보다 결정적으로 우수하다. 두가지 형태의 본문은 니이제의 가장 오래된 사본보다 훨씬 앞선 것들이다.

 \’열등\’한 형태도 이미 3세기의 포르피리(Porphyry)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독해의 다양성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후대판에서 요세푸스 자신이 정정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문(異文)이 있을 수밖에 없다. 두가지 그룹의 형태가 혼합된 것은 초기서부터 시작되어 4세기의 라틴어 번역에서이미 이문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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