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아리스토불루스가 머리에 왕관을 쓴 첫 사람(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이었지만 왕이 된 후 어떻게 자기 어머니와 동생을 죽이고 자신도 나라를 다스린지 1년도 못되어 죽었는지에 대하여
1. 아리스토불루스 Ⅰ세〔주전 105 – 104년〕
힐카누스가 사망한 후 장자인 아리스토불루스는 통치 형태를왕국으로 바꾸었으며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고 본국으로 돌아온 지 471년[㈜ 고대. 13권. 11 : 1 (301)에 의하면 481년. 이 숫자들은 둘 다 너무 차이가 많다. 고레스 왕의 유대인 귀환 포고령은 아리스토불루스 Ⅰ세의 432년 전인 주전 537년이다. 요세푸스의 연대 계산은 단 9 : 24에 나오는 \”70이레\”(490년)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3개월만에 처음으로 머리에 왕관을 쓴 왕이 되었다. 그는 형제 중에 자기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안티고누스를 특별히 사랑하고 그를 자기와 동등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 나머지 동생들은 결박해서 감금시켰다. 또한 자기 어머니가 자신의 통치 방식을 모욕했다 하여 어머니까지 구속했다. 그녀가 아리스토불루스 Ⅰ세의 통치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있었던 것은 요한이 그녀에게 공무 집행자로서의 권한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불르스는 야만스런 행위가 도에 지나쳐서 자신의 어머니를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기까지 이르렀다.
2. 〔안티코누스에 대한 중상모략〕
그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불루스는 그가 무척 아끼고 자기 왕국을 위한 동역자(partner)로 여겼던 동생 안티고누스에게도 처절한 보복을 자행하였다.[㈜ 전쟁.1권. 3:6(81)이하를 보라.] 그 이유는 왕궁에 대해 악의를 갖고있던 자들이 안티고누스를 모함하는 모략을 아리스토불루스가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리스토불루스도 중상가들의 모략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동생에 대한 애정과 또 한편으로는 이 모략의 대부분이 관련자들의 질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옛부터의 관습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장막을 세우는 그 절기에[㈜ 숙곳(Sukkoth)의 가을 축제 혹은 장막절] 한번은 안티고누스가 화려한 차림으로 군대와 함께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때는 아리스토불루스가 아팠을 적이었고 절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안티고누스가 무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그는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치장을 했었고, 당당한 태도로 자기형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바로 이때 이 중상가들이왕에게 달려가서는 무장한 병사들이 얼마나 거만하게 들어오고 얼마나 무례하게 안티고누스가 들어왔는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그리고 안티고누스가 혼자서는 감히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례한 것을 보니 그가 왕을 죽이려고 일단의 병사들을 대동하고 왔다고 왕에게 거짓 보고했다. 그리고는 덧붙이기를 안티고누스는 왕관이 탐이 나 기회를 엿보다가 이런 일을 감행하였다고 말하였다.
3. 〔안티고누스를 죽이기 위한 아리스토불루스의 계획〕
이에 아리스토불루스는 점차로 이런 중상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의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리고 어느 어두운 지하 통로에 자신의 은신처를 확보해 놓고 경호병을 배치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불루스는 바리스(Baris)라고 부르다 후에 안토니아(Antonia)라고 개명된 성채(Citadel)에 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만일 안티고누스가 무장하지 않고 들어오면 그를 살려 두고, 만일 그가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면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또한 아리스토불루스는 몇 명을 시켜서 동생에게 무기를 갖고들어오지 말도록 사전에 알려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왕후가 매우 교활하게도 안티고누스를 죽이려는 무리들과 이 문제를 궁리한 끝에 왕후는 안티고누스에게 왕의 전갈을 전하러 가는 사신에게 왕의 전갈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 대신 안티고누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다. \”당신의형 아리스토불루스께서 갈릴리에서 만들었다는 매우 훌륭한 갑옷을 당신 안티고누스가 갖고 계시다는 것을 들으셨으나, 왕은 현재 병환중에 계시므로 당신에게 오셔서 당신의 그 화려한 갑옷을 보실 수 없는 고로 당신이 그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형님께 가면 형님이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4. 〔안티고누스의 죽음〕
안티고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는 형이 지금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형이 기뻐할 것이라는 말만 믿고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갑옷을 입고 왕에게로 갔다. 그러나 그가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불리는 지하 통로에 들어섰을 때 안티고누스는 그만 왕의 친위병사들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중상(中傷)이 모든 선한 뜻과 자연스런 애정을 어떻게 파괴해 버리는가를 보여주며, 우리의 애정들 가운데 하나라도 질투를 영원히 막기에는 그리 강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된다.
5. 에세네파 유다가 살해될 것을 예언함
여기에서는 누구나 유다(Judas)라는 인물의 행동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에세네파 일원인데 예언을 함에 있어 틀리거나 속이는 적이 결코 없었다. 언젠가 이 사람이 안티고누스가 성전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선지자들로서의 에세네파에 관해서는 전쟁. 2권. 8 : 12(159)를 각주와 함께 보라.] 옆에 있는 자들에게 외쳐 댔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제자들로서 그를 따랐다) \”아! 진리가 내 앞에서 죽어버렸고 또 내가 예언한 것이 거짓말이 되어 버렸으니, 나는 이제 죽는 것이 더 낫겠구나! 안티고누스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그는 오늘 죽어야 하는건데. 운명적인 선고에 따르면 그가 죽음을 맞이할 곳은 여기서 6백 퍼얼롱(furlong : 1퍼얼롱은 1/8마일) 떨어진 스트라토의 망대이다. 그런데 이제 오늘도 4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내 예언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하구나\”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하고는 계속 낙담하고 있는데 잠시후 안티고누스가 지하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장소는 해변가에 위치한 가이사랴(Caesarea)의 스트라토의 망대와[㈜ 훗날 대헤롯에 의해 재건되어 가이사랴(Caesarea)라고 새이름을 붙인 해변가의 스트라토 망대(Strato\’s Tower)에 관하여는 전쟁. 1권. 21 : 5 (408)를 보라. 예루살렘에 있는 이 지역의 이름은 고대. 13권에 나오는 병행구절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동일한 이름이어서 노인이 혼동하였던 것이다.
6. 아리스토불루스의 최후에 대해
아리스토불루스는 자기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에 크게 후회했으며 이로 인해 기력이 점점 떨어져 갔다. 그는 점점 더 병세가악화되어 갔으며 그의 영혼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상심하여 계속 혼란스러웠고, 급기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통으로 인해 창자가 끊어질 만큼 괴로워하다가 결국 많은 양의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시중들던 시종들 중 하나가 그 토한 피를 옮기다가 하느님의 섭리로 인해 안티고누스가 살해당한 바로그 장소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시종은 살해당한 동생의 피가 얼룩진 바로 그 지점에 살해자의 피를 엎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마치 그 시종이 고의로 그 지점에 왕의 피를 엎지른 것처럼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화를 내며 소리질렀다. 왕은 그외침 소리를 듣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에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왕은 왜 그러냐고 더욱 다그쳐 물었다. 계속해서 왕이 그들을 다그치자 그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왕은 울음을 터뜨리며 마음의 고통으로신음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저지른 그 무서운 죄악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느님의 눈으로부터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내 동생의피에 대한 복수가 이렇게 속히 나에게 당도하다니. 오, 이 뻔뻔스런 육체여!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죄값을 받아 마땅한 이 영혼,죽어야만 할 이 영혼이 더 살아서 무엇하리! 얼마나 오랫동안내 몸 속에 고여있는 피를 한방울씩 흘려야만 할까! 즉시 내 목숨을 거두어가 주소서! 하늘이시여 모친과 동생의 영혼이 실망하지 않도록 어서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이 말을 남기고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년도 채 다스리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요새 아리스토불루스를 계승한 그의 형제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전장에서는 대체로 불운하였지만 빌라델비아를 제외한 이스라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시켰으며 여러 원수들을 물리치는 일에도 성공하였다.

제 3 장
아리스토불루스가 머리에 왕관을 쓴 첫 사람(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이었지만 왕이 된 후 어떻게 자기 어머니와 동생을 죽이고 자신도 나라를 다스린지 1년도 못되어 죽었는지에 대하여
1. 아리스토불루스 Ⅰ세〔주전 105 – 104년〕
힐카누스가 사망한 후 장자인 아리스토불루스는 통치 형태를왕국으로 바꾸었으며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고 본국으로 돌아온 지 471년[㈜ 고대. 13권. 11 : 1 (301)에 의하면 481년. 이 숫자들은 둘 다 너무 차이가 많다. 고레스 왕의 유대인 귀환 포고령은 아리스토불루스 Ⅰ세의 432년 전인 주전 537년이다. 요세푸스의 연대 계산은 단 9 : 24에 나오는 “70이레”(490년)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3개월만에 처음으로 머리에 왕관을 쓴 왕이 되었다. 그는 형제 중에 자기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안티고누스를 특별히 사랑하고 그를 자기와 동등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 나머지 동생들은 결박해서 감금시켰다. 또한 자기 어머니가 자신의 통치 방식을 모욕했다 하여 어머니까지 구속했다. 그녀가 아리스토불루스 Ⅰ세의 통치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있었던 것은 요한이 그녀에게 공무 집행자로서의 권한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불르스는 야만스런 행위가 도에 지나쳐서 자신의 어머니를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기까지 이르렀다.
2. 〔안티코누스에 대한 중상모략〕
그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불루스는 그가 무척 아끼고 자기 왕국을 위한 동역자(partner)로 여겼던 동생 안티고누스에게도 처절한 보복을 자행하였다.[㈜ 전쟁.1권. 3:6(81)이하를 보라.] 그 이유는 왕궁에 대해 악의를 갖고있던 자들이 안티고누스를 모함하는 모략을 아리스토불루스가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리스토불루스도 중상가들의 모략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동생에 대한 애정과 또 한편으로는 이 모략의 대부분이 관련자들의 질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옛부터의 관습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장막을 세우는 그 절기에[㈜ 숙곳(Sukkoth)의 가을 축제 혹은 장막절] 한번은 안티고누스가 화려한 차림으로 군대와 함께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때는 아리스토불루스가 아팠을 적이었고 절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안티고누스가 무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그는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치장을 했었고, 당당한 태도로 자기형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바로 이때 이 중상가들이왕에게 달려가서는 무장한 병사들이 얼마나 거만하게 들어오고 얼마나 무례하게 안티고누스가 들어왔는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그리고 안티고누스가 혼자서는 감히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례한 것을 보니 그가 왕을 죽이려고 일단의 병사들을 대동하고 왔다고 왕에게 거짓 보고했다. 그리고는 덧붙이기를 안티고누스는 왕관이 탐이 나 기회를 엿보다가 이런 일을 감행하였다고 말하였다.
3. 〔안티고누스를 죽이기 위한 아리스토불루스의 계획〕
이에 아리스토불루스는 점차로 이런 중상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의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리고 어느 어두운 지하 통로에 자신의 은신처를 확보해 놓고 경호병을 배치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불루스는 바리스(Baris)라고 부르다 후에 안토니아(Antonia)라고 개명된 성채(Citadel)에 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만일 안티고누스가 무장하지 않고 들어오면 그를 살려 두고, 만일 그가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면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또한 아리스토불루스는 몇 명을 시켜서 동생에게 무기를 갖고들어오지 말도록 사전에 알려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왕후가 매우 교활하게도 안티고누스를 죽이려는 무리들과 이 문제를 궁리한 끝에 왕후는 안티고누스에게 왕의 전갈을 전하러 가는 사신에게 왕의 전갈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 대신 안티고누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다. “당신의형 아리스토불루스께서 갈릴리에서 만들었다는 매우 훌륭한 갑옷을 당신 안티고누스가 갖고 계시다는 것을 들으셨으나, 왕은 현재 병환중에 계시므로 당신에게 오셔서 당신의 그 화려한 갑옷을 보실 수 없는 고로 당신이 그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형님께 가면 형님이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4. 〔안티고누스의 죽음〕
안티고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는 형이 지금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형이 기뻐할 것이라는 말만 믿고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갑옷을 입고 왕에게로 갔다. 그러나 그가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불리는 지하 통로에 들어섰을 때 안티고누스는 그만 왕의 친위병사들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중상(中傷)이 모든 선한 뜻과 자연스런 애정을 어떻게 파괴해 버리는가를 보여주며, 우리의 애정들 가운데 하나라도 질투를 영원히 막기에는 그리 강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된다.
5. 에세네파 유다가 살해될 것을 예언함
여기에서는 누구나 유다(Judas)라는 인물의 행동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에세네파 일원인데 예언을 함에 있어 틀리거나 속이는 적이 결코 없었다. 언젠가 이 사람이 안티고누스가 성전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선지자들로서의 에세네파에 관해서는 전쟁. 2권. 8 : 12(159)를 각주와 함께 보라.] 옆에 있는 자들에게 외쳐 댔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제자들로서 그를 따랐다) “아! 진리가 내 앞에서 죽어버렸고 또 내가 예언한 것이 거짓말이 되어 버렸으니, 나는 이제 죽는 것이 더 낫겠구나! 안티고누스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그는 오늘 죽어야 하는건데. 운명적인 선고에 따르면 그가 죽음을 맞이할 곳은 여기서 6백 퍼얼롱(furlong : 1퍼얼롱은 1/8마일) 떨어진 스트라토의 망대이다. 그런데 이제 오늘도 4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내 예언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하구나”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하고는 계속 낙담하고 있는데 잠시후 안티고누스가 지하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장소는 해변가에 위치한 가이사랴(Caesarea)의 스트라토의 망대와[㈜ 훗날 대헤롯에 의해 재건되어 가이사랴(Caesarea)라고 새이름을 붙인 해변가의 스트라토 망대(Strato’s Tower)에 관하여는 전쟁. 1권. 21 : 5 (408)를 보라. 예루살렘에 있는 이 지역의 이름은 고대. 13권에 나오는 병행구절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동일한 이름이어서 노인이 혼동하였던 것이다.
6. 아리스토불루스의 최후에 대해
아리스토불루스는 자기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에 크게 후회했으며 이로 인해 기력이 점점 떨어져 갔다. 그는 점점 더 병세가악화되어 갔으며 그의 영혼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상심하여 계속 혼란스러웠고, 급기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통으로 인해 창자가 끊어질 만큼 괴로워하다가 결국 많은 양의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시중들던 시종들 중 하나가 그 토한 피를 옮기다가 하느님의 섭리로 인해 안티고누스가 살해당한 바로그 장소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시종은 살해당한 동생의 피가 얼룩진 바로 그 지점에 살해자의 피를 엎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마치 그 시종이 고의로 그 지점에 왕의 피를 엎지른 것처럼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화를 내며 소리질렀다. 왕은 그외침 소리를 듣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에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왕은 왜 그러냐고 더욱 다그쳐 물었다. 계속해서 왕이 그들을 다그치자 그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왕은 울음을 터뜨리며 마음의 고통으로신음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저지른 그 무서운 죄악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느님의 눈으로부터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내 동생의피에 대한 복수가 이렇게 속히 나에게 당도하다니. 오, 이 뻔뻔스런 육체여!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죄값을 받아 마땅한 이 영혼,죽어야만 할 이 영혼이 더 살아서 무엇하리! 얼마나 오랫동안내 몸 속에 고여있는 피를 한방울씩 흘려야만 할까! 즉시 내 목숨을 거두어가 주소서! 하늘이시여 모친과 동생의 영혼이 실망하지 않도록 어서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이 말을 남기고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년도 채 다스리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요새 아리스토불루스를 계승한 그의 형제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전장에서는 대체로 불운하였지만 빌라델비아를 제외한 이스라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시켰으며 여러 원수들을 물리치는 일에도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