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2장 쿠마누스 때 많은 소요가 있었으나 쿠아드라투스가 진압한 것과 벨릭스가 유대의 총독이 된 것과 아그립바가 칼키스 왕에게 더 큰 왕국 왕으로 승진한 것에 대하여

 


제 12 장



 쿠마누스 때 많은 소요가 있었으나 쿠아드라투스가 진압한 것과 벨릭스가 유대의 총독이 된 것과 아그립바가 칼키스 왕에게 더 큰 왕국 왕으로 승진한 것에 대하여



1. 칼키스의 왕 아그립바 Ⅱ세와 총독 쿠마누스[주후 48-52년]



 칼키스의 지배자 헤롯이 죽자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의 아들이자 헤롯에게는 조카가 되는 아그립바 Ⅱ세로 하여금 통치권을 잇게 했다. 그리하여 나머지 지역의 총독으로 있던(디베료) 알렉산더를 이어 쿠마누스가 총독에 올랐다.[㈜ 티그라네스는 아구스도에 의하여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었으나 곧 퇴위당하였다. 알렉산더 Ⅱ세의 아들인 또 다른 티그라네스는 네로에게서 그 왕국을 받았다.(고대.18권. 5:4(139)dlgk.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 3를 참조하라).] 그런데 그의 통치기간 중에 또 다시 수많은 유대인들의 희생을 초래한 사건이 발생했다.[㈜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타키투스 \’연대기\’, xii : 54).] 그 사건은 다음과 같다. 무교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로마의 1개 부대가 성전의 옥상에진을 치고 무장한 여러 군인들이 군중 속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폭동에 대비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참).전쟁.2권. 3:4(51).] 그때 군인 중 한 명이겉옷을 벗어들고 추태를 보이고, 유대인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매우 소란을 떨었다.[㈜ 라이나흐가 말한 대로 우리도 현재 시제로서는 추론할 수가 없다. 라이나흐는 호라시우스,\’Sat\’. i. 9. 69를 적절히 인용한다. \”hodie tricesima sab bata : vin tu / curtis Iudaeis oppedere?\”] 이러한 모욕적인 행위에 분노한 백성들이 소리치며 쿠마누스에게 그 군인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중에서도 젊은이와 몇몇 선동적인 사람은 더욱 흥분하여 돌을 집어 들고 군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싸움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에 두려움을 느낀 쿠마누스는 증원부대를 불러들였다. 이 부대가 주랑 현관으로 밀려 들어왔고,이에 겁먹은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나가 시내로 달아나려 하였다. 이렇게 갑작스런 상황에 이르게 되자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출구 주위에서는 서로서로 밟고 밟히어 죽게 되었는데 거의 30,000명이 사망했다.[㈜ 고대.20권. 5:3(112)에 의하면 그 수가 2만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명절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고 온 나라가 통곡에 휩싸였다



 2. 성경 모독사건



 이러한 사건에 이어 산적들에게서 비롯된 또 한번의 재난이있었다. 벧호론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각기 약 10마일에서 1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지역인 욥바로 향해 가는 노상에 위치해 있는 두 개의 벧호론(Bethhoron)(위쪽과 아랫쪽). 이 작은 골짜기는 아래에 기술된 케스티우스가 패배했던 현장이었다(전쟁.2권.19:8(546)이하).] 강도 떼가 스데반이라고하는 가이사의 종을 덮쳐서 짐을 모두 탈취해 달아났다. 이에 대해 쿠마누스는 그 주위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모든 주민들을[㈜ 고대. 20권. 5:4(114) \”유명한 인사들.\”] 사슬에 채워서 끌고 오게 하고, 그 산적들을 추적해서 잡아들이지 않는다면 징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어떤 군인이 마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에 태워 버린 일이 발생했다.[㈜ 책의 소각에 관한 내용은 고대.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마치 나라 전체가 불에 타버린 것처럼 분개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종교적 열정으로[㈜ 달리 말하자면 자석(磁石).] 한곳에 모여 가이사랴에 있는 쿠마누스에게로 달려갔다. 그래서이들은 하느님과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와 같은 무례한 행위를한 작자를 그냥 두어선 안된다며 처벌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대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총독은 청을 들어주지 않을경우 잠잠하게 있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사건의 발단이 된그 병사를 소환해서 그들의 원대로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나서야 유대인들은 돌아갔다.



3. 갈릴리인의 살해로 비롯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전 쟁



 이 사건에 이어 갈릴리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라이나흐에 의하면 3-7에 기록된 사건들에 관하여 타키투스의 \’연대기\’ xii : 54에는 다른 설명이 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쿠마누스는 갈릴리 지방과 사마리아의 펠릭스 지방의 총독이었다.] 사마리아의 평야지대에 위치한 게마(gema)라 이름하는 마을에서,[㈜ (고대.20권.)기나이(Ginae) ; (전쟁.34njs. 3:4(48)) 기나이아(Ginaea). 이곳은 사마리아의 북쪽 변방 지역으로서 구약 수19:21에 나오는 \’엔간님(Engannim)\’을 가리킨다. 에스드라엘론(Esdra- elon) 대평원 정상에 있는 지역. 눅9:52이하를 참조하라.] 축제 길에 올랐던 유대인들 중 갈릴리인 한 명이 살해당하였다.[㈜ 고대.20권. 6:1(118)에 의하면 수명의 순례자들이 살해당하였다.] 즉시 갈릴리로부터, 사마리아와 전쟁을 해야 한다는 뜻을 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이때 그 지역의 몇몇 관리들이 황급히 쿠마누스를 찾아가 돌이킬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갈릴리에 와서 살인범을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그것만이 큰 불행없이 군중들을 해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쿠마누스는 당장 주어진 다른많은 일보다 그 일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고대.에 보면 \”사마리아인에게 뇌물을 받았다.\”] 그냥 돌려보냈다.



4.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대학살이 자행됨]



 살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백성들은 심한 동요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축제 행사를 포기하고, 행정관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도 없이 사마리아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 중 강도떼와 폭도들은 데이나이우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알렉산더를 지도자로 삼고[㈜ 고대.에 보면 알렉산더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크라바테네 접경 지대에[㈜ 세겜의 남동쪽에 위치함.] 이르러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자행하고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5. [폭동 주동자 색출 작업]



 쿠마누스는 그제서야 가이사랴로부터 세바스테니안이라[㈜ 전쟁.2권 3:4(52)의 각주를 보라. 고대.는 \”4개의 보병 중대\”를 첨가시키고 있다.] 불리는 기병대를[㈜ 라틴어로는 ala.] 이끌고, 이 폭동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출발했다. 엘르아살이 이끄는 많은 무리를 사로잡고 그보다 더 많은 수를 죽였다. 사마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달려가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고 달려온 예루살렘 관리들의 호소에 승복해서 해산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에대한 적대감 때문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로마인들에게까지 분노를 확대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아내와 처자를 생각해서, 더 크게는 나라를 위해서 흥분을 가라 앉히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면서 만일 자제력을 잃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갈릴리인 한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보복할 수 있겠지만 그 대신 자신들과 처자의 목숨, 그리고 나라까지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폭동 이후에도 이렇다 할 처벌이 자신들에게는 내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대담해져, 계속해서 나라전체를 돌아다니며 강도, 약탈, 폭동을 일삼았다. 사마리아 지도자들은 뜻을 합쳐서 수리아의 통치자인 움미디우스 쿠아드라투스(Ummidius Quadratus)를 만나기 위해 두로로 가서 이러한약탈자들을 처벌해 줄 것을 간청했다. 아나누스의 아들, 대제사장 요나단을[㈜ 나중에 시카리파(sicarii)의 첫 희생자가 됨, 전쟁.2권.13:3(256).] 포함한 유대인 지도자들도 그를 찾아가서 이러한 사태의 근본 원인은, 문제의 살인을 자행한 사마리아인들에게 있으며, 또한 암살자에 대한 처벌 요구를 거절한 쿠마누스가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6. 사마리아의 통치자 쿠아드라투스의 중재



 쿠아드라투스는 일단 양편 모두에게 대답을 보류하고, 후에 그곳을 방문해서 자세한 것을 조사해 보겠다고 말했다. 곧, 그는가이사랴로[㈜ \”사마리아를 향하여\”(고대.20권. 6;2(129)).] 가서 쿠마누스가 잡아들인 모든 사람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는 다시 룻다(Lydda)로 가서 사마리아인들의 말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폭동에 가담했다는 유대인 18명을 소환해서[㈜ 고대.20권. 6:2(130)에 보면 \’도에투스(Doetus)라는 사람이 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라고 나와 있다.] 참수형에 처했다. 그는 아나니아의 아들인 아나누스를 중심으로, 몇몇 유대인 지도자들과 특히 대제사장 요나단과 아나아와[㈜ 고대. 20권. 6:2(130)에는 (성전의) 대장인 아나누스(Ananus). 여기에는 요나단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 ] 또 사마리아인 중 최고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함께 가이사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쿠마누스와 호민관 켈레르(Celer)에게 명하여 배를 타고 로마로 가서 글라우디오에게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그는 일단 이렇게 사태를 수습해 놓고는 룻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백성들이 평화롭게 무교절 축제를[㈜ \”민족적인 축제\” 고대.20권. 6:2(133). 전쟁.에 의하면 이 장에 기술된 이 혼란은 유월절로부터 다음 유월절까지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음이 분명하다.]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7. 글라우디오는 유대인을 재판하고 쿠마누스를 유배보냈다



 로마에서 가이사는 쿠마누스와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 아그립바가 배석해서 유대인 편을 들었고 많은 고위 관직자들은 쿠마누스를 두둔했다. 황제는 사마리아인들을 벌주어, 가장 유력한 인물 세 명을 처형하도록 했다. 그리고 쿠마누스는 유배 보내고, 켈레르는 사슬에 묶인 채, 예루살렘에 보내어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주게 했는데 그들은 시내를 돌며 끌려다니다가 끝내 참수당했다.



8. 벨릭스 총독 [주후 52-60]



 그후 글라우디오는 팔라스의 형제인 벨릭스를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페라이아 등지의 총독으로 파견했다.[㈜ 안토니우스 벨릭스(Antonius Felix)는 그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형 팔라스(Pallas)와 같이 글라우디오(Claudius)의 어머니인 안토니아(Antonia)의 해방 노예였을 것이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그는 이미 사마리아의 집정관직을 지내었다.] 그리고 아그립바에게는 칼키스(Chalcis)를 떠나 더 큰 왕국을 차지하게 했는데, 곧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드라고닛, 바타나이아, 가울라니티스 지역이었다. 여기다가 루사니안(Lysanians) 왕국과 바루스(Varus)의 옛 영토를 더해 주었다.[㈜ 바루스(Varus)는 자서. 11.(48) 이하에 언급되어 있는 아그립바Ⅱ세 휘하의 장관이었던 사람으로 쉬러(Schurer)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여기에 보면 바루스는 레바논 지역의 분봉왕을 지내왔던 소에무스(Soemus)의 자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한때 이 영토의 일부를 물려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글라우디오는 13년8개월 20일의 통치를 끝내고,[㈜ 고대.20권. 8:1(148)에도 나오는데, 여기에 있는 계산이 정확하다. 글라우디오는 주후 41년 1월 24일로부터 54년 10월 14일까지 통치하였다.] 네로를 후계자로 남기고 죽었다. 사실 글라우디오는 전처인 메살리나에게서 낳은, 적법한 계승자인 브리타쿠스가 있었지만, 아내 아그리피나의 계략으로 이네로 왕자를 왕위 계승자로 두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딸 옥타비아와, 페티나가 낳은 또 다른 딸 안토니아가 있었다. 그중 옥타비아는 네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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