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제 3장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에 대한 설명

 


제 3 장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에 대한 설명



1. 갈릴리에 관한 묘사



 상부와 하부 갈릴리로 알려진 두 지역으로 나뉜 갈릴리는 베니게(Phoenicia)와 수리아(Syria)로 싸여 있었다. 그 서쪽 경계는 톨레마이스(Ptolemais)와 갈멜산의 외진 변방과 접하고 있었다. 갈멜산은 한때 갈릴리에 속했다가 지금은 두로(Tyre)에속한다. 갈멜은 가바에 인접한 곳으로 가바는 헤롯왕이 해고한기병들이 이 소읍에[㈜ 참).고대. 15권. 8:5(294) : 플리니(Pliny)가 \”Nat. Hist.\’ v : 19, 75에서 게바(Geba)라고 부름.] 살았으므로 \’기병들의 도시\’라고 불렸다.갈릴리는 남쪽으로는 사마리아를 경계로 하고 요단강까지는 스구도볼리(Scythopolis) 지역을 경계로 했다. 또 동쪽으로는 히포스(Hippos), 가다라(Gadara),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지역과 아그립바 왕국의 변경으로 나눠지고 북쪽으로는 두로와 거기 붙은 지역으로 경계선이 되었다. 하부 갈릴리는 종으로는 디베랴(Tiberias)에서 스불론(Chabulon)까지 뻗어 있는데, 스불론은 톨레마이스와 멀지 않은 해변에 위치하였다. 횡으로는 대평야(the Great Plain)에 있는 마을에서 크살롯(Xaloth)이라[㈜ 자서.44(227)에는 남쪽 국경지방으로 언급됨. \”나는(예루살렘으로 갈릴리로 가는 사절단을 만나기 위하여) Xaloth을 지나가야만 한다\”; 다볼산의 측면에 있는 지방으로 구약성경에는 Chisloth-tabor으로 현 지명은 Iksal으로 부름. 요세푸스가 여기서 \”길이\”라고 표현한 것은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측정을 의미하며, \”넓이\”라고 표기한 것은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측정을 의미한다. ]고 하는 베르사베(Bersabe)까지였다. 한편 상부 갈릴리는 횡으로는 두로 지역의 변경인 바카(Baca) 마을에서 시작하였고, 종으로는 요단 가까운 델라(Thella) 마을에서 메롯(Meroth)까지이르렀다.



 2. [토양과 목초지가 비옥함]



 이 한정된 지역 앞에서 양 갈릴리는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항상 적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 지역 주민들은 어려서부터 전쟁에 익숙하고 항상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 중에는 소심한 주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땅은 토양과 목초지가 비옥했고 다양한 나무들을 산출했다. 이러한상황들은 가장 게으른 자까지도 경작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되었다. 사실 모든 땅이 갈릴리인에 의해 경작되었고 거기는 버려진 땅이 한 부분도 없었다. 또한 이 곳은 마을까지도 비옥한 토양 덕분에 소출이 많았고 심지어 가장 작은 마을도 인구가 15,000명 이상되었다.[㈜ 과장된 표현. 갈릴리에는 204개의 시와 촌락이 있었다(자서. 45(235) : 가장 큰 촌락은 야파(Japha)(자서.45(230))였으며, 가장 큰 시는 세포리스(Sepphoris)(자서. 45(232)).]



3. [갈릴리와 페라이아]



 갈릴리가 면적은 페라이아 보다 작다고 생각될지라도 풍부한 자원에 있어서는 페라이아에 앞섰다. 이는 갈릴리 땅의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농작물을 경작하고 소산을 내는 반면, 페라이아는 더 광활한 땅이지만 거의 버려진 땅이고 맛좋은 과실이 성숙하기에는 너무 황폐하다. 그러나 갈릴리는 온갖 종류의 나무에서 과실이 나오는 좋은 땅을 많이 갖고 있었고, 평야는 온갖 나무들로 덮여 있었는데 감람나무, 포도나무, 종려나무가 경작되었다. 이 고장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전혀 마르지 않은 샘의수원(水原)이었고, 삼복더위 중에 물이 점점 작아지는 때에도 물은 충분히 공급되었다. 페라이아는 종(縱)으로는 마카이루스(Machaerus)에서 펠라(Pella)까지[㈜ 데가볼리(Decapolis)에 있는 Machaerus를 포함하지 않고 Pella(현 지명은 Fahil)를 배제하고 있음 : 베레아는 북쪽 트랜스 요르단 지역(데가볼리)을 포함하지 않은 유대 영지이다.] 뻗어 있었고, 횡(橫)으로는 빌라델비아(Philadelphia)에서[㈜ 구약성경의 암몬의 랍바(Rabbah of Ammon)는 톨레미Ⅱ세인 필라델푸스의 이름을 따라 빌라델비아라고 불리워졌다. 현재 지명은 암만 : 그 도시는 데가볼리에 있지만 인접 촌락은 그 촌락의 거주민들과 베레아 유대인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경계 분쟁이 있었던 곳이었다(고대.20권. 1:1(2)).] 요단까지 펼쳐있었다. 그북쪽 경계는 바로 전에 얘기한 펠라(Pella)였고, 서쪽 경계는 요단이었다. 모압 땅은 남쪽 경계였고, 아라비아, 헤스본(Hes-hboniti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거라사(Gerasa)는 동쪽경계였다.



. 4. 사마리아와 유대



 사마리아 지경은 갈릴리와 유대 사이에 있었다. 즉 대평원(the Great Plain)에 있는 기나이아(Ginaea) 마을에서[㈜ 참). 전쟁. 2권. 12:3(232) (Gema).] 시작하여 아크라바테네 소국에서 끝났다.[㈜ 세겜의 남동쪽.] 그러나 그 특성에 있어서는 유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 지역은 기름진 평야로 이뤄졌고 경작하기 쉽고 비옥했다. 또 삼림이 우거졌으며, 거친 땅이든 경작된 땅이든 간에 소출이 많았는데, 이는 건조한 사막지대가 없고 식물에 필요한 비가 충분히 내려주기 때문이었다. 흐르는 물은 참으로 맛이 좋았으며, 가축들이 먹기에 매우 적합한 목초지가 많아 다른 지역보다 훨씬 양질의 젖을 생산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장점들과 생활 환경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양 지역 모두 인구 밀도가 높다는 것이다.



5. 유대



 사마리아와 유다를 나누는 경계에는 유대의 사마리아 북쪽 끝에 위치한 아누앗 보르카이우스(Anuath Borcaeus)라[㈜ 라틴성경은 \”보르카이스라고도 불리는 아누앗\”이라고 나온다. 또한 보르케아스(Borceas)는 세겜의 정남(正南) 9마일에 있는 곳으로 현재명은 Berkit이다.]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그 지역을 종(縱)으로[㈜ 혹은 \”최대의 길이\”일 것임.] 측정한다면 아라비아 변방에 있는 마을로써 구분되었는데 유대 거주민(the local Jews)들은 이 마을을 이아르단(Iardan)이라고 불렀다.[㈜ 혹은 Iarda ; 아마도 현 지명은 헤브론 거의 정남(正南) 16마일에 있는 텔 아랏(Tell Arad)일 것이다.] 또한 유대는 횡으로는 요단강에서 욥바(Joppa)까지 뻗어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 지역의 바로 중앙에 있었는데[㈜ 엄격히 말해서 유대 중심부의 북동쪽에 있다. 그러나 일반 랍비 전승은(델피(Delphi)가 헬라의 중심인 것처럼) 예루살렘이 전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인데, 어떤 중세 지도에는 세계의 중심이 예루살렘으로 그려져 있다. 쥬빌리서 8:19의 \”세계의 중심의 중심인 시온(Zion)산\”이란 구절을 보라 : 이러한 견해는 그중에서도 겔38 : 12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그 지역의\’배꼽(navel)\’이라 불리웠었다. 더욱이 유대의 옆으로는 쾌적한 바다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산마루에서 해변쪽으로 비탈져 내려 와서 톨레마이스(Ptolemais)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난해한 구절. 연해(沿海) 평원이 유대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톨레마이스까지 뻗어있는 연안을 소유하지 못함 : 그리고 베니게(Phoenician) 영토에 있는 톨레마이스는 유대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에서도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지중해 서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유대고원과 에브라임산을 지나서 북쪽으로 뻗어서 톨레마이스의 약간 남쪽에 있는 갈멜(Carmel)산에서 끝난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아마도 거기서부터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유대는 11개 구역으로 구분되었으며,[㈜ 혹은 \”할당.\”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할당은 klhroucivai(분깃)이자만,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행정과 쟁세를 위한 toparcivai(행정구)였다. Pliny, \’Hist. Nat.\’ v.14. 70에서는 유대를 10개의 분할구역으로 나누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플리니는 이두매와 엔게디를 빼고 욥바를 넣었으며 펠라 대신 베돌레데페네(=베들렙테파)를 넣었다.] 그중 예루살렘은 모든 인근 도시에 대해 수위(首位)를 차지하는 최고의 도시였다. 다른 소구획(小區劃)에 있어서도 소국들(toparchies)과 마찬가지로 분할되었다. 고프나(Gophna)는 두번째의 도시였으며, 그 다음은 아크라베타(Acrabeta), 담나(Thamna), 룻다(Lydda), 엠마오(Emmaus), 펠라(Pella),[㈜ 앞(26)의 각주를 보라.] 이두매(Idumaea),엔게디(Engaddi), 헤로디온(Herodion), 여리고(jerich)로 이어졌다. 여기에 주변 지방들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얌니아(Jamnia)와 욥바(Joppa)가 더해져야 하고[㈜ 요세푸스는 여기서 유대 영토의 4개의 주된 지역을 추가하고 있다. (1) 두 연해 도시의 인구는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2) 북쪽 아그립바 왕의 영토는 거대한 유대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국의 통치 지역인 가말라(Gamala),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바타나이아(Batanaea), 드라고닛(Trachonitis)이 있었다.

 [아그립바 Ⅱ세의 왕국] 아그립바 왕국은 리바누스산(Mt. Libanus)에서 시작해 요단강의 근원(the sources of Jordan)을 지나, 횡으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디베랴호수(the lake of Tiberias)까지 이르고, 종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아르파(Arp-ha)라[㈜ 확인되지 않음(드라고닛(Trachonitis)의 동쪽).] 하는 마을에서 율리아스(Julias)까지[㈜ 갈릴리 바다의 상부에 있는 벳세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 뻗어있었다. 그런데 왕국에는 유대인과 수리아(Syrians)인들이 혼합되어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유대와 인근 지역들에 관하여 잠깐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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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 장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에 대한 설명


    1. 갈릴리에 관한 묘사


     상부와 하부 갈릴리로 알려진 두 지역으로 나뉜 갈릴리는 베니게(Phoenicia)와 수리아(Syria)로 싸여 있었다. 그 서쪽 경계는 톨레마이스(Ptolemais)와 갈멜산의 외진 변방과 접하고 있었다. 갈멜산은 한때 갈릴리에 속했다가 지금은 두로(Tyre)에속한다. 갈멜은 가바에 인접한 곳으로 가바는 헤롯왕이 해고한기병들이 이 소읍에[㈜ 참).고대. 15권. 8:5(294) : 플리니(Pliny)가 “Nat. Hist.’ v : 19, 75에서 게바(Geba)라고 부름.] 살았으므로 ‘기병들의 도시’라고 불렸다.갈릴리는 남쪽으로는 사마리아를 경계로 하고 요단강까지는 스구도볼리(Scythopolis) 지역을 경계로 했다. 또 동쪽으로는 히포스(Hippos), 가다라(Gadara),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지역과 아그립바 왕국의 변경으로 나눠지고 북쪽으로는 두로와 거기 붙은 지역으로 경계선이 되었다. 하부 갈릴리는 종으로는 디베랴(Tiberias)에서 스불론(Chabulon)까지 뻗어 있는데, 스불론은 톨레마이스와 멀지 않은 해변에 위치하였다. 횡으로는 대평야(the Great Plain)에 있는 마을에서 크살롯(Xaloth)이라[㈜ 자서.44(227)에는 남쪽 국경지방으로 언급됨. “나는(예루살렘으로 갈릴리로 가는 사절단을 만나기 위하여) Xaloth을 지나가야만 한다”; 다볼산의 측면에 있는 지방으로 구약성경에는 Chisloth-tabor으로 현 지명은 Iksal으로 부름. 요세푸스가 여기서 “길이”라고 표현한 것은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측정을 의미하며, “넓이”라고 표기한 것은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측정을 의미한다. ]고 하는 베르사베(Bersabe)까지였다. 한편 상부 갈릴리는 횡으로는 두로 지역의 변경인 바카(Baca) 마을에서 시작하였고, 종으로는 요단 가까운 델라(Thella) 마을에서 메롯(Meroth)까지이르렀다.


     2. [토양과 목초지가 비옥함]


     이 한정된 지역 앞에서 양 갈릴리는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항상 적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 지역 주민들은 어려서부터 전쟁에 익숙하고 항상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 중에는 소심한 주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땅은 토양과 목초지가 비옥했고 다양한 나무들을 산출했다. 이러한상황들은 가장 게으른 자까지도 경작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되었다. 사실 모든 땅이 갈릴리인에 의해 경작되었고 거기는 버려진 땅이 한 부분도 없었다. 또한 이 곳은 마을까지도 비옥한 토양 덕분에 소출이 많았고 심지어 가장 작은 마을도 인구가 15,000명 이상되었다.[㈜ 과장된 표현. 갈릴리에는 204개의 시와 촌락이 있었다(자서. 45(235) : 가장 큰 촌락은 야파(Japha)(자서.45(230))였으며, 가장 큰 시는 세포리스(Sepphoris)(자서. 45(232)).]


    3. [갈릴리와 페라이아]


     갈릴리가 면적은 페라이아 보다 작다고 생각될지라도 풍부한 자원에 있어서는 페라이아에 앞섰다. 이는 갈릴리 땅의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농작물을 경작하고 소산을 내는 반면, 페라이아는 더 광활한 땅이지만 거의 버려진 땅이고 맛좋은 과실이 성숙하기에는 너무 황폐하다. 그러나 갈릴리는 온갖 종류의 나무에서 과실이 나오는 좋은 땅을 많이 갖고 있었고, 평야는 온갖 나무들로 덮여 있었는데 감람나무, 포도나무, 종려나무가 경작되었다. 이 고장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전혀 마르지 않은 샘의수원(水原)이었고, 삼복더위 중에 물이 점점 작아지는 때에도 물은 충분히 공급되었다. 페라이아는 종(縱)으로는 마카이루스(Machaerus)에서 펠라(Pella)까지[㈜ 데가볼리(Decapolis)에 있는 Machaerus를 포함하지 않고 Pella(현 지명은 Fahil)를 배제하고 있음 : 베레아는 북쪽 트랜스 요르단 지역(데가볼리)을 포함하지 않은 유대 영지이다.] 뻗어 있었고, 횡(橫)으로는 빌라델비아(Philadelphia)에서[㈜ 구약성경의 암몬의 랍바(Rabbah of Ammon)는 톨레미Ⅱ세인 필라델푸스의 이름을 따라 빌라델비아라고 불리워졌다. 현재 지명은 암만 : 그 도시는 데가볼리에 있지만 인접 촌락은 그 촌락의 거주민들과 베레아 유대인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경계 분쟁이 있었던 곳이었다(고대.20권. 1:1(2)).] 요단까지 펼쳐있었다. 그북쪽 경계는 바로 전에 얘기한 펠라(Pella)였고, 서쪽 경계는 요단이었다. 모압 땅은 남쪽 경계였고, 아라비아, 헤스본(Hes-hboniti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거라사(Gerasa)는 동쪽경계였다.


    . 4. 사마리아와 유대


     사마리아 지경은 갈릴리와 유대 사이에 있었다. 즉 대평원(the Great Plain)에 있는 기나이아(Ginaea) 마을에서[㈜ 참). 전쟁. 2권. 12:3(232) (Gema).] 시작하여 아크라바테네 소국에서 끝났다.[㈜ 세겜의 남동쪽.] 그러나 그 특성에 있어서는 유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 지역은 기름진 평야로 이뤄졌고 경작하기 쉽고 비옥했다. 또 삼림이 우거졌으며, 거친 땅이든 경작된 땅이든 간에 소출이 많았는데, 이는 건조한 사막지대가 없고 식물에 필요한 비가 충분히 내려주기 때문이었다. 흐르는 물은 참으로 맛이 좋았으며, 가축들이 먹기에 매우 적합한 목초지가 많아 다른 지역보다 훨씬 양질의 젖을 생산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장점들과 생활 환경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양 지역 모두 인구 밀도가 높다는 것이다.


    5. 유대


     사마리아와 유다를 나누는 경계에는 유대의 사마리아 북쪽 끝에 위치한 아누앗 보르카이우스(Anuath Borcaeus)라[㈜ 라틴성경은 “보르카이스라고도 불리는 아누앗”이라고 나온다. 또한 보르케아스(Borceas)는 세겜의 정남(正南) 9마일에 있는 곳으로 현재명은 Berkit이다.]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그 지역을 종(縱)으로[㈜ 혹은 “최대의 길이”일 것임.] 측정한다면 아라비아 변방에 있는 마을로써 구분되었는데 유대 거주민(the local Jews)들은 이 마을을 이아르단(Iardan)이라고 불렀다.[㈜ 혹은 Iarda ; 아마도 현 지명은 헤브론 거의 정남(正南) 16마일에 있는 텔 아랏(Tell Arad)일 것이다.] 또한 유대는 횡으로는 요단강에서 욥바(Joppa)까지 뻗어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 지역의 바로 중앙에 있었는데[㈜ 엄격히 말해서 유대 중심부의 북동쪽에 있다. 그러나 일반 랍비 전승은(델피(Delphi)가 헬라의 중심인 것처럼) 예루살렘이 전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인데, 어떤 중세 지도에는 세계의 중심이 예루살렘으로 그려져 있다. 쥬빌리서 8:19의 “세계의 중심의 중심인 시온(Zion)산”이란 구절을 보라 : 이러한 견해는 그중에서도 겔38 : 12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그 지역의’배꼽(navel)’이라 불리웠었다. 더욱이 유대의 옆으로는 쾌적한 바다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산마루에서 해변쪽으로 비탈져 내려 와서 톨레마이스(Ptolemais)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난해한 구절. 연해(沿海) 평원이 유대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톨레마이스까지 뻗어있는 연안을 소유하지 못함 : 그리고 베니게(Phoenician) 영토에 있는 톨레마이스는 유대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에서도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지중해 서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유대고원과 에브라임산을 지나서 북쪽으로 뻗어서 톨레마이스의 약간 남쪽에 있는 갈멜(Carmel)산에서 끝난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아마도 거기서부터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유대는 11개 구역으로 구분되었으며,[㈜ 혹은 “할당.”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할당은 klhroucivai(분깃)이자만,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행정과 쟁세를 위한 toparcivai(행정구)였다. Pliny, ‘Hist. Nat.’ v.14. 70에서는 유대를 10개의 분할구역으로 나누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플리니는 이두매와 엔게디를 빼고 욥바를 넣었으며 펠라 대신 베돌레데페네(=베들렙테파)를 넣었다.] 그중 예루살렘은 모든 인근 도시에 대해 수위(首位)를 차지하는 최고의 도시였다. 다른 소구획(小區劃)에 있어서도 소국들(toparchies)과 마찬가지로 분할되었다. 고프나(Gophna)는 두번째의 도시였으며, 그 다음은 아크라베타(Acrabeta), 담나(Thamna), 룻다(Lydda), 엠마오(Emmaus), 펠라(Pella),[㈜ 앞(26)의 각주를 보라.] 이두매(Idumaea),엔게디(Engaddi), 헤로디온(Herodion), 여리고(jerich)로 이어졌다. 여기에 주변 지방들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얌니아(Jamnia)와 욥바(Joppa)가 더해져야 하고[㈜ 요세푸스는 여기서 유대 영토의 4개의 주된 지역을 추가하고 있다. (1) 두 연해 도시의 인구는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2) 북쪽 아그립바 왕의 영토는 거대한 유대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국의 통치 지역인 가말라(Gamala),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바타나이아(Batanaea), 드라고닛(Trachonitis)이 있었다.

     [아그립바 Ⅱ세의 왕국] 아그립바 왕국은 리바누스산(Mt. Libanus)에서 시작해 요단강의 근원(the sources of Jordan)을 지나, 횡으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디베랴호수(the lake of Tiberias)까지 이르고, 종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아르파(Arp-ha)라[㈜ 확인되지 않음(드라고닛(Trachonitis)의 동쪽).] 하는 마을에서 율리아스(Julias)까지[㈜ 갈릴리 바다의 상부에 있는 벳세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 뻗어있었다. 그런데 왕국에는 유대인과 수리아(Syrians)인들이 혼합되어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유대와 인근 지역들에 관하여 잠깐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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