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 제 9장가다라를 점령한 후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준비를 했으나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꾼 것과 거라사의 시몬에 대하여

 


제 9 장




 가다라를 점령한 후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준비를 했으나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꾼 것과 거라사의 시몬에 대하여




1. 베스파시안이 여리고와 아디다에 진을 치다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주변 모든 곳을 강화했으며, 여리고(Jericho)와 아디다(Adida)에[㈜ 룻다(Lydda)에서 동쪽으로 3마일,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하디데(Haditheh).] 요새를 건축했고, 그곳에 수비대를 배치시켰는데 로마군과 원군을 반반 섞어 배치했다. 그는또한 거라사(Gerasa)에[㈜ 페라이아(Peraea)북동쪽 국경지방의 길르앗(Gilead)에 있는 예라쉬(Jerash).전쟁.3권. 3:3(47).] 루키우스 얀니우스(Lucius Annius)를 보내면서 그에게 기병과 상당히 많은 보병을 함께 보내주었다. 그래서 루키우스 얀니우스는 단 한번 공격으로 거라사를 점령하고 도망가지 못한 젊은이를 천명 가량 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들은 포로로 잡고, 병사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도록 허락했다. 그후 루키우스 얀니우스는 집들을 불태우게 하고 주변마을로 가서 공격했다. 반면 힘있는 자들은 도망가고, 약한자들은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남아있던 모든 것들은 불타 없어졌다. 이제 전쟁은 전 평야 지역뿐 아니라 전 산악지방을 지나계속 확산되어서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은 빠져 나갈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도망가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열심당이 감시하고 있었으며, 로마군 쪽으로 아직 넘어가지 않은 자들이 사방에 도시를 포위하면서 군대로 하여금 도망자들을 감시했기 때문이다.




 2. 베스파시안이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주후 68년 6월 9일]




 베스파시안이 가이사랴로 돌아와서 전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준비가 되었을 때, 네로가 13년 8일 동안[㈜ 그의 실제 재위 기간은 54년 10월 13일부터 68년 6월 9일 가지인 13년 7개월 28일이다.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63:29에서 13년 8개월로 대략 계산한다. 이 계산과 같이 요세푸스는 본문에서 hmevra\”(날들)을 mh\”na\”(달들)로 바꿈으로써 일치시키려고 했을 수도 있다. 니이제(Niese)가 제시한대로 kai; mh\’na\” ojkt w;(그리고 8개월)이란 단어가 비슷하기 때문에 누락되었다고 보는것도 가능하다. 이 단어들을 삽입해서 요세푸스는 그 재위기간을 10일 더 길게 잡고 있다. 참.)전쟁.2권. 9:1, 5(168,180), 11:1(204)에서도 이와 유사한 약간의 차이들이 나타남.] 통치를 끝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로가 통치할 때 권력을 남용했으며, 님피디우스(Nymphidius)와[㈜ 자유인이 된 여자의 아들인 님피디우스(Nymphidius)는 네로(Nero)치하 말년경에 관정(Praetorian)경비대장인 티겔리누스(Tigellinus)를 따랐다. 네로가 죽자 그는 스스로 제국을 장악하려 했지만 갈바(Galba)의 친구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티겔리누스(Tigelli-nus)[㈜ 출생이 명백하지 않은 소포니우스 티켈리누스(Sophonius Tigellinus)는 주후 63년에 관정 경비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네로(Nero)통치의 말년을 특정 짓는 독재와 방탕의 주요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는 오토(Otho)의, 즉위시에 자살했다.]같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노예[㈜ 혹은 아마도 \’무가치한 평민(freedmen)에게\’ 일것이다.]의 신분에서 해당된 사람에게 국정을 맡겼으나 바로 이들의 음모에 빠졌으며, 그의 모든 경호원들에 의해 배척 당해, 그가 가장 신임했던 4명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자유민과[㈜ 로마로부터 4마일 떨어진 그의 저택에 그를 숨겨주었던 파온(Phaon), 에파프로디투스(Epaphroditus),스포루스((sprous)그리고 또 한명이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저 \’Nero 47 하반부와 Dion Cassius의 63:27에 나온다.]함께 도망갔으나, 로마의 교외에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에파프로디투스(Epaphroditus)가 보조함.] 그리고 네로의 죽음을 몰고 온 자들이 오래지 않아 곧 처벌당했다는 것과, 골(Gaul)지방에 전쟁이 끝난 것과 갈바가 무기력하고 겁쟁이라고 병사들에게 비난받고,[㈜ 그는 님피디우스(Nymphidius)가 그의 이름으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거절함으로써 관정(Praetorian)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로마의 광장 한가운데에서[㈜ 쿠르티우스(Curtius)풀장 근처.] 반역의 음모로 살해된 것과, 오토(Otho)가황제가 된 것과 그가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지휘관들과 싸우다 죽고 실권을 잃게 된 것에 대해 들었다. 또한 비텔리우스 치하의 온갖 문제점들과 원로원 의사당(Capitol)근처에서의 전투와 안토니우스 프리므스(Antonius Primns)와 무키아누스(Muc-ianus)가 비텔리우스와 그의 게르만군대를 죽이고, 시민내란을 종결한 경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이 마지막 사건은 545~8, 585이하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그것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많은 헬라와 로마 저술가들이 여기에 대해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의 맥락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일관성이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간단히 언급해 보았다. 반면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원정을 잠시 중단하고, 네로의 죽음 이후에 로마제국이 실권이 어떻게 옮겨질 것인가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갈바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쟁에 관해 지시들을 들은 후에야 움직이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아들 티투스를 갈바에게 보내 문안인사를 드리면서 유대인들에대한 지시를 받으라고 시켰다. 바로 같은 목적으로 아그립바왕도 티투스와 함께 갈바에게 가기 위해 배를 탔다. 그들이 아가야(Achaea)해변을[㈜ \’아가야(Achaea)를 통하여\’라는 의미는 명확치 않음. 제시되어진대로 \”(겨울이었기 때문에)그들이 아가야(Achaea)를 통해 육로로 가는 동안에 그 나머지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일순(日巡)했던 \”펠로폰네스(Peloponnese)라고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 탈자(脫字)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대로 볼 때 삽입구가 그 여행하는 걸린 시간을 설명해 줄 것이다. 네로에 의해 시작되어진(전쟁.3권. 10:10(540) 고린도(Corinth)해협을 통하는 운하작업은 결코 완성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68년 6월9일 네로(Nero)의 죽음부터 69년 1월15일 갈바(Galba)의 죽음까지. 이 계산은 정확한 것임.] 항해하고 있을 때(왜냐하면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미처 그에게 가기도 전에 갈바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갈바가 7개월 간의 통치 끝에 살해되었던 것이다. 갈바가 죽은 후 오토가 정권을 잡고 국정을 맡아보았다.아그립바는 정권교체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없이 로마로 가기로결심했다. 그러나 티투스는 신의 충동(divine impulse)에 의해 헬라에서 수리아로 뱃머리를 돌려서 급히 서둘러 그의 아버지가있는 가이사랴로 왔다. 티투스와 베스파시안은 국정에 대해 염려했고, 로마 황제가 유동적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공격하러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인들에게 어떤 공격을 하는 것은 시기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국내사정이 불안한데 유대공격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기오라의 아들 시몬이 마사다의 강도떼와 손을잡다




 이때 예루살렘에는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다. 기오라(Gioras)의 아들이며, 거라사[㈜ 예라쉬(Jerash),전쟁.4권. 9:1(487).] 출신인 시몬(Simon)이라는[㈜ 전쟁.2권. 19:2(521)에 의하여 보면 케스티우스(Cestius)에 대한 개시공격에서 활약했던 그는 그후로 약탈자가 되었다.(전쟁.2권. 22:2(652)).] 젊은이가있었다. 그는 전에 이미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요한만큼 교활한자는 아니었으나 신체와 용기에 있어서는 월등했다. 이 때문에그는 대제사장 아나누스에 의해 아크라바테네(Acranattene)지역에서[㈜ 유대 북쪽에 있는] 쫓겨나서 마사다를[㈜ 참). 전쟁. 2권. 22:2(652)와 마사다(Massada)에 대해서는 전쟁.4권. 7:2(399)를 볼것.]장악한 도적의 무리에게로 왔다. 처음에 도적단들은 그를 의심하여, 성채의 아래 부분에서 그가 데려온 부인과 함께 살도록 하고 자신들은 높은 지역에 거주했다. 그러나 시몬의 태도가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해서 아주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시몬은 도적단들과 함께 마사다 근처에 있는 지역을 약탈하고 습격하러 다녔다. 그러나 시몬이 그들에게 더 큰 일을 하자고 설득했으나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채에 거주하는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인데, 그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폭군적인 즐기고 원래 큰일을 저지르기 좋아하기 때문에 아나누스의 죽음을[㈜ 전쟁.4권. 5:2(316).] 전해듣자, 산악지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노예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선언하였고, 이미 자유의 몸이 된 자들에게는 보상을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모든 지역에서 사악한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4. 시몬이 열심당을 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다




 시몬이 주위에 막강한 사람들을 거느리게 되자 산악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정복했다. 점점 더 그에게로 오는 자가 많아지자,그는 그 지역의 아래 지역가지 내려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시몬이 이제 도시 중에서 굉장히 막강하게 되자 권력을 가진 많은 자들이 그에 의해 매수당했다. 그래서 시몬의 군대는 노예와 도적들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그를 왕으로 섬겼다. 그른 아크라바테네 지역을 정복하고 대 이두매(Great Idu-mea)까지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는 나인(Nain)이라 불리는 어떤 마을에[㈜ 불확실함. 전쟁.4권. 9:5(517)에 있는 이두매(Idumaea)국경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있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갈릴리에 있는 나인은 아니다).] 성벽을 건축하고, 그것을 그의 무리의 안전을 위한 요새로 사용했다. 또한 그는 페레타이(Pheretae)라고 불리는 골짜기에[㈜ 아마 예루살렘 북동쪽 약 6마일 떨어져 있는 골짜기인 쿠르벧 파라(Khurbet Fara)임.] 많은 동굴을 팠으며, 그의 목적에 맞는 이미 파여진 많은 다른 동굴들을 찾아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재물창고로 이용하거나 약탈물 보관창고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안에 약탈한 과일들을 비축했다. 많은 그의 부하들이 그곳에 거주했다. 그는 미리 부하들을 훈련시켜 예루살렘 공격을 준비한다는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말했다.




5. 시몬이 열심당의 공격을 격퇴하다




 반면 열심당원들은 시몬이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장을 하고 시몬을 공격하러 갔다. 시몬은 열심당원들을 맞아 전투를 했고, 상당한 숫자의 열심당원들을 죽였으며, 나머지는 예루살렘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감히 예루살렘 성벽을 공격할정도로 자기 군대가 그렇게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두매를 먼저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20,000명의 군사를거느리고 이두매 지역의 경계선 쪽으로 진군했다. 이두매의 통치자들은 재빨리 백성들 중 가장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사람들을 약25,000명을 불러모으고, 그 이외의 인원들은 이두매를지키기로 명령했다. 나머지 병사들을 이두매를 지키게 한 이유는 마사다에 있던 시카리(Sicarii)파의 침입에 대비해서 취한 조치였다. 이두매인들은 그들의 경계지역에서 시몬을 맞아 싸웠고, 그날 하루종일 전투를 계속했다. 이두매인들이 이겼는지 졌는지에 대한 논쟁은 분분하다. 아무튼 시몬은 나인(Nain)으로 돌아갔고 다시 이두매를 공격하러 왔다. 그는 데쿠에(Thekoue)라는[㈜ 베들레헴(Bethlehem)의 남쪽 5마일 떨어진 드고아(Tekoa).] 마을에 진을 치고, 친구 엘르아살(Eleazar)을 헤로디온(Herodion)에서[㈜ 드고아(Tekoa)의 북동쪽으로 약 3마일 떨어져 있음.전쟁.1권. 13:8(265), 21:10(419)이하에 있는 대헤롯에 의해 건축되어진 성이며, 그는 이곳에 장사되었다고 1:673에 기록되어 있음.] 수비하는 자들에게 보내 그 요새를 넘겨 달라고 말하도록 시켰다. 수비대는 먼저 엘르아살이 왜 왔는지를모르고 기꺼이 맞아주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넘겨달라고 말하자, 수비대들은 칼을 빼들고 그를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부치자, 그는 성벽 아래 골짜기로 뛰어내렸으나 곧 즉사했다. 그러나 이두매인들은 시몬의 막강한 세력에 대해 전부터 많이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싸우기 전에 적군의 동태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6. [이두매의 지휘관인 야고보가 시몬에게 돌아섬]




 이두매인들의 지휘관중 야고보가 기꺼이 그 임무를 자기가 맡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두매를 배신할 작정이었다. 따라서 야고보는 이두매 군대가 모여있는 알루루스(Alurus)마을을[㈜ Hulhul, 헤브론 북족 약 4마일 그리고 드고아에 있는 시몬의 진영에서는 남서쪽 7마일 떨어진 지점.]떠나 시몬에게 왔다. 먼저 야고보는 그에게 이두매를 넘겨줄 것에 동의하고, 자신에게 좋은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나서 야고보는 전 이두매가 시몬의 손 아래 정복될 때까지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으로 인해 야고보는 시몬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갖가지 약속을 받아 의기양양해졌다. 야고보는 이두매로 돌아오자 시몬의 군대에대해 과장하면서 사실보다 더 숫자가 많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뒤, 그는 지휘관들을 입에 바른 소리로 시몬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하지 말고 그에게 전 통치권을 넘겨주라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신들을 시몬에게 보내 군사를 이끌고 이두매로 오면 적당한 시간에 이두매 군사들을 흩어 놓겠다고 약속하였다.시몬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는 먼저 말을 잡아타고 그가 매수한 자들과 함께 도망갔다. 공포심이 전 주민들을 휩쓸었으며, 주민들은 싸움도 하기 전에 대열을 이탈하고 각자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7. 시몬이 헤브론을 점령




 이렇게 하여 시몬은 뜻밖에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두매를 통과해 계속 진군했으며, 헤브론(Hebron)을 갑자기 습격하여 장악했다. 그곳에서는 그는 상당히 많은 노획물들을 탈취했으며엄청난 나무 열매들을 빼앗았다. 헤브론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헤브론은 이 지역에서 뿐 아니라 애굽의 멤피스(Memphis)보다 더 고대도시였다.[㈜ 참).민 13:22(23) \”헤브론(Hebron)은 애굽 소안(Zoan,칠십인역과 고대.1권. 170에서는 타니스)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다.\”타니스(Tanis)는 여하튼 \”주전 2000년전에 세워졌다 (G.B.Gray. \’Internat, Crit. Comm\’, 민 13:22(23). 멤피스(Memphis)의 기초년대는 애굽역사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브론(Hebron)의 유물은 확정되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보다 앞서는 것 같다\”(위의 책).] 따라서 헤브론은 2,300년 정도된 도시였다.또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이 메소보다미아(Me-sopotamia)를 떠나[㈜ 창13:18.] 거주했던 곳이었다. 헤브론의 주민들에따르면,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곳에서부터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며[㈜ 헤브론(Hebron)에서 야곱의 체류는 창35:27, 37:14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지방전승에 신빙성을 두고 성경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있다.] 그 기념비들이 이 작은 도시에 아직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념비들의 구조물은 가장 훌륭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가장 고상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다.[㈜ 막벨라(Machpelah)굴임.창23장의 사라, 25장 9절의 아브라함 35:27이하의 이삭 그리고 50:13에 나오는 야곱이 묻힌 곳으로 현재 회교 사원 밑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유대, 기독교 그리고 회교적 전승들은 그 장소에 관해서 일치하고 있다. 회교사원들은 두르고 있는 벽은 헤롯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Conder, \’Tent Work in Palestine\’, 239).] 또한 헤브론에서 6퍼얼롱 떨어진 곳에 아주 큰 데레빈드나무(Ter-ebinth-tree)가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천지창조부터 계속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Abraham)의 \’상수리 나무\’ (칠십인역도 같음, 히브리어로는 \’상수리 나무들\’혹은 \’테레빈 나무들\’)는 창13:18과 14:13, 18:1에 나온다. 주후 5세기에는 terevbinqo\”라고 불리워졌으며 매년 축제가 열리거나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리던 곳이었다.(Sozomen, \’H.E\’, 2:4) (Robertson Smith).] 시몬은 헤브론에서부터 전 이두매를 휩쓸고 다니면서 도시와 마을들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왜냐하면 시몬은 완전무장한 병사이외에도 그를 따르는 40,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만큼 식량이 부족했다. 이러한 식량부족의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시몬은 원래 야만스러운 성격이였으며, 이두매에 대한 크나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이두매를 휩쓸고 다녔고, 따라서 이두매인들의 인구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시몬과 그 일당들이 지나간 후에는 마치 메뚜기들의 습격으로 온통 잎사귀가 망가진 나무들을 보는 듯 했다. 따라서 시몬의 군대가 지나가 버린 뒤 남는 것이라곤 폐허 뿐이었다. 그들은 어떤 곳은 불을 질렀고, 어떤 곳은 거의 파괴시켰으며, 그 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짓밟아 뭉개거나 먹어치워버렸다. 이렇게 계속 진군하면서 그들은 경작된 땅을 불모지보다 더 힘들고 손대기 어려운 땅으로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시몬이 황폐하게 만든 땅과 원래 불모지였던 땅이 구분이 안될 지경이었다.




 8. 열심당원들이 시몬의 아내를 감금하다




 이러한 시몬의 성공은 열심당원들을 다시 한번 자극했다. 비록 열심당들이 그와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히 싸우는 것을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길목에 사람을 매복시켜 시몬의 아내와 상당한숫자에 달하는 그녀의 수행원들을 붙잡았다. 그들은 마치 시몬을 포로로 잡은 듯이 인근 도시로 되돌아와서는, 시몬이 무장을해제하고 부인을 돌려달라고 간청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신, 사랑하는 아내를 붙잡아간 그들에 대한 분노만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는 마치 피해당한 야수가 자신을 해친 자를 공격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벽으로 진격해 왔으나 공격을 할 수 없자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무조건 해침으로 화풀이를 했다. 따라서 그는 성문 밖으로 나온 자들을 모두 잡았으며, 무장을 하지 않은 사람과 늙은이들을 나뭇가지나 막대기로 묶어서 고문을 하고 죽여버렸다. 게다가 시몬의 분노가 대단했기 때문에 막 죽은 시체를 물어 뜯을 정도로 잔인해졌다.[㈜ 일종의 유사한 \’과장법\'(역사가가 그 단어를 보충설명해주고 있다)은 전쟁.6권. 7:3(373)에서 나타난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잘라서 적들에게 보냈다. 이렇게 적들을 위협하여 주민들이 내란을 일으키고, 그의 부인을 붙잡아간 당사자들을 쫓아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지전능한 만유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니와, 부인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성벽을부숴뜨리고 전 예루살렘 주민들을 나이나 죄의 유무(有無)에 관계없이 똑같은 처벌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무서운 위협은 주민들 뿐 아니라 열심당들도 떨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몬의 아내를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시몬은 약간 부드러워졌으며 계속적으로 피를 흘려 살생하는 것을 멈췄다.




 9. [이달리야에서도 내란이 일어나고, 베스파시안은 계속해서 예루살렘까지 진군함]




 내란과 시민전쟁이 유대지역 뿐 아니라 이달리야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갈바(Galna)가 로마의 광장(Roman fo-rum)한 가운데에서 살해[주후 69년 1월 15일]되어서[㈜ 전쟁.4권. 9:2(494,499).] 오토(Otho)가 황제가 되었고, 그는 역시 황제로 옹립된 비텔리우스와전쟁을 했다. 게르만에 있는 군대들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토가 베드리아쿰(Bedriacum)에서[㈜ 베로나(Verona)와 크레모나(Cremona)사이에 있는 시살피네골(Cisalpine Gaul)에 있는 조그만 도시. 비텔리안(Vitellian)인들은 차례로 전쟁.4권. 11:2(634)이하에 나오는 같은 부근에서 패배했다. 타키투스(Ticitus)의 \’박물학\'(H.N.)ii : 41-49에서 전쟁과 오토(Otho)의 죽음을 기술하고 있다.] 비텔리우스의 부하장군이었던 발렌스(Valens), 카이킨나(Cae-cinna)와[㈜ 파비우스 발렌스(Fabius Valens)와 A. 카이킨나 알리에누스.(A. Caecina Alienus)] 전쟁을 했을 때 첫 날에는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 날 비텔리우스의 병사가 승리를 했다. 오토는 많은 부하들이죽고 대패했다는 소식을 브릭셀룸(Brixellum)에서[㈜ 파르마(Parma)북동쪽 약 12마일쯤 떨어진 브레스켈로(Brescello)임.]듣고 그곳에서 자살했다[주후 49년 4월 17일]. 그는 석달 이틀 간을[㈜ 69년 1월15일부터 4월17일 까지.] 다스리고 자살함으로써 그의 통치를 마감하였다. 오토의 군대 역시비텔리우스 부하장군들에게로 왔으며, 비텔리우스는 군대와 함께 로마로 내려왔다. 한편, 베스파시안은 가이사랴를 다이시우스(시반) Daesius[Sivan]월 5일에 떠나 아직 정복되지 않은 유대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주후 68년 6월 약23일]. 베스파시안은 산악지역까지 가서 고프나(Gophna)와[㈜ 예루살렘 정북쪽 약 12마일쯤 떨어져 있음.] 아크라베타(Acr-abetta)라[㈜ 유대 북동구(區)에 있음.] 불리는 두 지역을 점령했다. 그후 그는 베델(Bet-hela)과[㈜ 고프나(Gophna)의 남동쪽 2~3마일쯤 떨어져 있음.] 에브라임(Ephraim)의[㈜ 벧엘(Bethel)의 북동쪽에 있는 엣타이이베(et-Taiyibeh)임.] 두 작은 도시를 장악했으며, 그곳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예루살렘까지 계속 말을 타고 진군했다. 이렇게 진군하면서 베스파시안은 많은 죄수들과 포로들을 체포했다. 게다가 케레알리우스(Cerealius)라는[㈜ 제5군단의 사절인 섹스투스 케레알리우스 베틸리아누스(Sextus Cerealius Vetilianus)는 전쟁.3권. 7:32(310)이하에서 사마리아(Samaritan)인들을 패배시켰다.] 베스파시안의 지휘관이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상부 이두매(UpperIdumea)라 불리는 이두매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카페드라(Caphethra)를[㈜ 불확실함.] 공격했다. 이 도시는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한번 공격으로 완전히 장악하여 불질러버렸다. 그는 또한 카파라비스(Capharabis)를 공격했는데, 이곳은 매우 튼튼한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포위만 했다. 그는 이런 포위상태에서 아주 오랜시간을 보내려고 생각했는데, 그 성안에 있던 자들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용서를 구하러 와서 스스로 그에게 항복했다. 케레알리우스(Cerealius)는 그들을 정복한 뒤 헤브론, 즉 또 다른 고대 도시 헤브론으로 갔다. 이미 언급했듯이[㈜ 전쟁.4권. 9:7(530).] 이 도시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직선거리로 약 18마일 정도임.] 산악지방에 위치해 있다. 케레알리우스가 무력으로 이 도시를 공격했을 때, 그는 그 도시 안에 남은 젊은이나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따라서 이제 헤로디움(Herodium), 마사다(Masada), 마카이루스(Ma-chaerus)를 제외한 전 지역이 점령당한 것이다. 이 세 도시는 강도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제 남은 예루살렘이 로마군의 공격대상이 된 것이었다.




  10. 아무런 제재없이 시몬의 손에 좌우되는 예루살렘




[㈜ 전쟁.4권. 9:8(544)에서 발췌한 이야기를 요약한 것임.]




 시몬은 아내를 열심당의 손으로부터 구해내자 곧 이두매의 남은 지역으로 되돌아와서, 전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시몬은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성벽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방으로 가려는 일꾼들도 죽였다. 이 시몬은 주민들에게 있어 로마군보다 더 큰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예루살렘안에 있는 열심당이 시몬과 로마군보다 더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기간 동안 요한의 용기와 사악한 계략이 갈릴리인들을 부패시켰다. 왜냐하면 이 갈릴리인들은 요한을 추대하여 그를 매우 영향력 있는 유력인사로 만들었으며,요한은 그들 덕분에 얻은 권력으로 알맞은 적절한 보상을 그들에게 보답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게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라고 허락했다. 따라서 그들의 약탈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부유한 집을 습격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겁탈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유희였다. 그들은 또한 탈취한 노획물들을 그들의 피와 함께 삼켜버리는[㈜ 참). 6:372, 빼앗고 그리고…취하여 피와 섞인 음식물을 그들은 먹어치웠다 (ejsuvlwn kai;   trofh;n arpavxonte\” ai$mati pefurmenhn katepinon).] 그야말로 포악한 인명살상을 감행했다. 그들은 또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여장(女裝)을 즐기면서, 진력이 날때까지 계속 그런 행동을 했다. 즉, 여자 가발을 쓰고 여성용 장신구들을 걸치고 화장품을 잔뜩 발라 아주 아름답게 꾸미고, 눈화장까지 했으며 여자의 몸치장 뿐 아니라 여성 특유의 욕정까지[㈜ 혹은 \”경험들\”.] 흉내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불미스러운 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율법에서 금하는 더러운 짓들을 자행했다. 게다가 그들은 예루살렘 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예루살렘을 매음굴로 만들고, 더러운 행위로 완전히 예루살렘을 뒤덮었다. 그들의 얼굴을 여자의 얼굴처럼 꾸미고 다니면서 손으로는 사람을 죽였다. 그들은 여자처럼 걸으며 접근하여 갑자기 공격하는 전사로 돌변해 화려하게 물들인 옷 안에서 칼을 뽑아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한편 시몬은 요한에게서도망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몬은 요한보다 더 피흘리기를 좋아하는 악랄한 사람이었다. 성벽안에서 폭군 요한을 떠나 도망나온 자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몬에 의해 살해당한셈이다. 따라서 로마군에게 도망가려는 모든 길을 완전히 차단되었던 것이다.




 11. 열심당원들 간의 배반




 한편 요한 휘하에 있던 군대가 요한에게 대항하여 내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든 이두매인들도[㈜ 이로부터 몇 명의 이두매(Idumean)인들은 주력부대가 퇴각했을 때에 아직까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요한으로부터 이탈하여그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그의 권력에 대한 시기심과 그의 잔인성에 대한 증오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 많은 열심당원들을 죽이고, 나머지는 아디아베네(Adiabene)의 왕 이자스(Izas)의[㈜ 다른곳(전쟁.5권. 4:2(147), 6권. 6:4(356), 6:356, ; 고대,20권. 2:1(17)등에서는 이자테스(Izates)라고 불리워지는데, 여기서도 이렇게 읽혀질 수 있다. 티그리스강(the Tigris)상단부 지역에 있는 아디아베네(Adiabene)의 여왕인 헬레나(Helena)와 그녀의 아들 이자테스(Izates)가 유대교로 개종한 이야기는 고대. 20권. 2:1(17)이하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이 왕가는 큰 건물들을 예루살렘에 지었다. 그 도시안에 그녀의 왕궁(전쟁.5권. 6:1(253))과 외곽으로 3퍼얼롱(furlong)떨어져 있는 파라미드식의 무덤들-그안에 그녀와 그녀의 아들 이자테스(Izates)가 묻혀있음(고대.20권. 4:3(95), 전쟁.5권. 2:2(55), 3:3(119), 4:2(147))-이 있다. 또한 다른 아들인 모노바주스(Monobazus)(전쟁.5권. 6:1(252))의 왕궁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라프테(Grapte)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바울과 바나바(Barnabas)처럼 헬레나여왕(Queen Helena)은 글라우디오(Claudius)치하의 기근 시에 예루살렘을 원조해주었다.(고대.20권. 2:5(51)).] 친척인 그라프테(Grapte)가 지은 궁정으로 몰아 넣었다. 이두매인들은 열심당원들을 공격해 그들을 성전으로 몰아넣고 요한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을했다. 왜냐하면 요한이 그 궁전에 있으면서 그곳에서 폭정으로 얻은 노획물들을 쌓아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졌던 많은 열심당들은 함께 성전으로 달려가 그곳으로 도망친 자들에게로 갔다. 요한은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주민들과 이두매인들과 대항하여 싸우러 내려갈 준비를 했다. 예루살렘 주민들과 이두매인들은 열심당의 공격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자신들이 그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열심당원들이 욱하는 감정으로 개인적으로 성전에서 나와 공격하여 그들을 죽이거나 혹은 도시를 불지르거나 않을까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였으며 대제사장도 참석하여 열심당의 공격을 피할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가 말해 주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의 판단을 가장 나쁜 길로 되돌려 놓으셨다. 즉 그들은 그들을 구해줄 치료책을 궁리해 냈는데, 그것은 병 자체보다 오히려 그 치료책이 더 나쁜 그런 해결방법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요한을 정복하기 위해서 시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며, 도시안으로 제2의 폭군이 입성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그들은 이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대제사장 마티아스(Matthias)를[㈜ 보에투스(Boethus)의 아들 마티아스(Matthias)는 대제사장 가문의 한 사람으로 후에 세아들을 둔 후 시몬(Simon)에 의해 살해되었다(전쟁.5권. 13:1(527)).] 그들이 두려워했던 시몬에게 보내 입성하라고 간청하게 했다.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을 피해 도망간자들도 그들의 집과 재산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합세하여 그에게 와서 간청했다. 따라서 그는 거만한 태도로 그들에게 도와준다고 장담하고, 열심당의 손아귀에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위해 입성하였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시몬을 기쁜 환호성으로 영접하면서 마치 그들의 구세주나 보호자인 것처럼 맞아들였다.그러나 시몬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자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으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예루살렘 주민들을 열심당못지 않게 적으로 간주하였다.




12. 시몬은 3년간의 전쟁 끝에 예루살렘을 차지함[주후 69년 4월~5월]




 이렇게 하여 시몬은 3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크산티쿠스(니산)(Xanthicus, Nisan)월에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다. 요한은 그의 많은 열심당원들과 함께 성전 밖으로 나오는 것도 금지되었고,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재산도 잃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기 시작했다(왜냐하면 시몬과 그의 일당들은 열심당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약탈했기 때문이다) 시몬은 또한 주민의 도움으로 성전을 공격했으며, 상대방인 열심당들은 회랑과 흉벽(胸壁)에 서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시몬이 이끄는 군대의상당한 숫자가 죽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왜냐하면 열심당은 높은 곳에서 쉽게 던질 수 있었으며 거의 적들을 명중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잇점 뿐 아니라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쏘도록 4개의 아주 큰 망대를 높이 건축했기 때문이이었다.

 그 4개의 망대는 다음과 같다. 즉 뜰의 북동쪽 모퉁이에 하나가 있고, 실내경기장(Xystus)[㈜ 성전(Temple)의 서쪽 편에 있음. 실내경기장(Xystus)은 티로포에온(Tyropoeon)계곡 안에 있거나 바로 위에 있었다(전쟁.2권. 16:3(344)).] 위에도 하나가 있고, 하부도시(lower town)맞은 편의 모퉁이 위에도 하나가 있고[㈜ 성전(Temple)의 남서각(南西角)에.] 제사장들의 방 지붕 위에 또 하나가 건축되었다.[㈜ 제사장들이 사용하며 기구들을 저장하는 조그만 방들로 삼면이 안 마당으로 둘러 있으며, 여러층으로 되어있다.] 제사장들의 방 지붕위에 있는 망루는 제사장이 매 7일을 시작하는 새벽과 땅거미지는 저녁과 또한 하루가 끝나는 저녁에 나팔을 불어 신호하던 곳이었다.[㈜ 참).바벨론 탈무드. \’숙카(Sukkah)\’. 5절을 Greenup. S.P.C.K., 1925년판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평일에는 매일 21번씩 나팔을 부는데 안식일 전야에는 보통때보다 6번을 더 불었다. 세 번은 백성들이 일을 쉬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세 번은 성일과 평일을 구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관습은 또한 바벨론 탈무드(T.B) Shabbath. 35하반절에 그리고 예루살렘 탈무드(Talm. Jer. Shabbath. xvii : 16상반절에 언급되어 있다.] 주민에게 일을 끝내는 시각과 다시 시작하는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 나팔을 부는 것이다. 열심당들은 화살과 돌을던지는 투석기를 망대 위에 설치했으며, 활쏘는 자들과 돌쏘는자들을 망대에 배치했다. 시몬은 그의 부하들의 대부분이 점점 기진맥진 했기 때문에 들이기로 격을 조금 늦추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군대는 상대방보다 숫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비록 투석기로 던져대는 돌이 멀리까지 날아와서 군사들을 많이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격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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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권 제 9장가다라를 점령한 후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준비를 했으나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꾼 것과 거라사의 시몬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9 장


     가다라를 점령한 후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준비를 했으나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꾼 것과 거라사의 시몬에 대하여


    1. 베스파시안이 여리고와 아디다에 진을 치다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주변 모든 곳을 강화했으며, 여리고(Jericho)와 아디다(Adida)에[㈜ 룻다(Lydda)에서 동쪽으로 3마일,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하디데(Haditheh).] 요새를 건축했고, 그곳에 수비대를 배치시켰는데 로마군과 원군을 반반 섞어 배치했다. 그는또한 거라사(Gerasa)에[㈜ 페라이아(Peraea)북동쪽 국경지방의 길르앗(Gilead)에 있는 예라쉬(Jerash).전쟁.3권. 3:3(47).] 루키우스 얀니우스(Lucius Annius)를 보내면서 그에게 기병과 상당히 많은 보병을 함께 보내주었다. 그래서 루키우스 얀니우스는 단 한번 공격으로 거라사를 점령하고 도망가지 못한 젊은이를 천명 가량 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들은 포로로 잡고, 병사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도록 허락했다. 그후 루키우스 얀니우스는 집들을 불태우게 하고 주변마을로 가서 공격했다. 반면 힘있는 자들은 도망가고, 약한자들은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남아있던 모든 것들은 불타 없어졌다. 이제 전쟁은 전 평야 지역뿐 아니라 전 산악지방을 지나계속 확산되어서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은 빠져 나갈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도망가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열심당이 감시하고 있었으며, 로마군 쪽으로 아직 넘어가지 않은 자들이 사방에 도시를 포위하면서 군대로 하여금 도망자들을 감시했기 때문이다.


     2. 베스파시안이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주후 68년 6월 9일]


     베스파시안이 가이사랴로 돌아와서 전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준비가 되었을 때, 네로가 13년 8일 동안[㈜ 그의 실제 재위 기간은 54년 10월 13일부터 68년 6월 9일 가지인 13년 7개월 28일이다.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63:29에서 13년 8개월로 대략 계산한다. 이 계산과 같이 요세푸스는 본문에서 hmevra”(날들)을 mh”na”(달들)로 바꿈으로써 일치시키려고 했을 수도 있다. 니이제(Niese)가 제시한대로 kai; mh’na” ojkt w;(그리고 8개월)이란 단어가 비슷하기 때문에 누락되었다고 보는것도 가능하다. 이 단어들을 삽입해서 요세푸스는 그 재위기간을 10일 더 길게 잡고 있다. 참.)전쟁.2권. 9:1, 5(168,180), 11:1(204)에서도 이와 유사한 약간의 차이들이 나타남.] 통치를 끝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로가 통치할 때 권력을 남용했으며, 님피디우스(Nymphidius)와[㈜ 자유인이 된 여자의 아들인 님피디우스(Nymphidius)는 네로(Nero)치하 말년경에 관정(Praetorian)경비대장인 티겔리누스(Tigellinus)를 따랐다. 네로가 죽자 그는 스스로 제국을 장악하려 했지만 갈바(Galba)의 친구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티겔리누스(Tigelli-nus)[㈜ 출생이 명백하지 않은 소포니우스 티켈리누스(Sophonius Tigellinus)는 주후 63년에 관정 경비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네로(Nero)통치의 말년을 특정 짓는 독재와 방탕의 주요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는 오토(Otho)의, 즉위시에 자살했다.]같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노예[㈜ 혹은 아마도 ‘무가치한 평민(freedmen)에게’ 일것이다.]의 신분에서 해당된 사람에게 국정을 맡겼으나 바로 이들의 음모에 빠졌으며, 그의 모든 경호원들에 의해 배척 당해, 그가 가장 신임했던 4명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자유민과[㈜ 로마로부터 4마일 떨어진 그의 저택에 그를 숨겨주었던 파온(Phaon), 에파프로디투스(Epaphroditus),스포루스((sprous)그리고 또 한명이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저 ‘Nero 47 하반부와 Dion Cassius의 63:27에 나온다.]함께 도망갔으나, 로마의 교외에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에파프로디투스(Epaphroditus)가 보조함.] 그리고 네로의 죽음을 몰고 온 자들이 오래지 않아 곧 처벌당했다는 것과, 골(Gaul)지방에 전쟁이 끝난 것과 갈바가 무기력하고 겁쟁이라고 병사들에게 비난받고,[㈜ 그는 님피디우스(Nymphidius)가 그의 이름으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거절함으로써 관정(Praetorian)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로마의 광장 한가운데에서[㈜ 쿠르티우스(Curtius)풀장 근처.] 반역의 음모로 살해된 것과, 오토(Otho)가황제가 된 것과 그가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지휘관들과 싸우다 죽고 실권을 잃게 된 것에 대해 들었다. 또한 비텔리우스 치하의 온갖 문제점들과 원로원 의사당(Capitol)근처에서의 전투와 안토니우스 프리므스(Antonius Primns)와 무키아누스(Muc-ianus)가 비텔리우스와 그의 게르만군대를 죽이고, 시민내란을 종결한 경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이 마지막 사건은 545~8, 585이하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그것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많은 헬라와 로마 저술가들이 여기에 대해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의 맥락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일관성이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간단히 언급해 보았다. 반면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원정을 잠시 중단하고, 네로의 죽음 이후에 로마제국이 실권이 어떻게 옮겨질 것인가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갈바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쟁에 관해 지시들을 들은 후에야 움직이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아들 티투스를 갈바에게 보내 문안인사를 드리면서 유대인들에대한 지시를 받으라고 시켰다. 바로 같은 목적으로 아그립바왕도 티투스와 함께 갈바에게 가기 위해 배를 탔다. 그들이 아가야(Achaea)해변을[㈜ ‘아가야(Achaea)를 통하여’라는 의미는 명확치 않음. 제시되어진대로 “(겨울이었기 때문에)그들이 아가야(Achaea)를 통해 육로로 가는 동안에 그 나머지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일순(日巡)했던 “펠로폰네스(Peloponnese)라고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 탈자(脫字)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대로 볼 때 삽입구가 그 여행하는 걸린 시간을 설명해 줄 것이다. 네로에 의해 시작되어진(전쟁.3권. 10:10(540) 고린도(Corinth)해협을 통하는 운하작업은 결코 완성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68년 6월9일 네로(Nero)의 죽음부터 69년 1월15일 갈바(Galba)의 죽음까지. 이 계산은 정확한 것임.] 항해하고 있을 때(왜냐하면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미처 그에게 가기도 전에 갈바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갈바가 7개월 간의 통치 끝에 살해되었던 것이다. 갈바가 죽은 후 오토가 정권을 잡고 국정을 맡아보았다.아그립바는 정권교체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없이 로마로 가기로결심했다. 그러나 티투스는 신의 충동(divine impulse)에 의해 헬라에서 수리아로 뱃머리를 돌려서 급히 서둘러 그의 아버지가있는 가이사랴로 왔다. 티투스와 베스파시안은 국정에 대해 염려했고, 로마 황제가 유동적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공격하러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인들에게 어떤 공격을 하는 것은 시기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국내사정이 불안한데 유대공격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기오라의 아들 시몬이 마사다의 강도떼와 손을잡다


     이때 예루살렘에는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다. 기오라(Gioras)의 아들이며, 거라사[㈜ 예라쉬(Jerash),전쟁.4권. 9:1(487).] 출신인 시몬(Simon)이라는[㈜ 전쟁.2권. 19:2(521)에 의하여 보면 케스티우스(Cestius)에 대한 개시공격에서 활약했던 그는 그후로 약탈자가 되었다.(전쟁.2권. 22:2(652)).] 젊은이가있었다. 그는 전에 이미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요한만큼 교활한자는 아니었으나 신체와 용기에 있어서는 월등했다. 이 때문에그는 대제사장 아나누스에 의해 아크라바테네(Acranattene)지역에서[㈜ 유대 북쪽에 있는] 쫓겨나서 마사다를[㈜ 참). 전쟁. 2권. 22:2(652)와 마사다(Massada)에 대해서는 전쟁.4권. 7:2(399)를 볼것.]장악한 도적의 무리에게로 왔다. 처음에 도적단들은 그를 의심하여, 성채의 아래 부분에서 그가 데려온 부인과 함께 살도록 하고 자신들은 높은 지역에 거주했다. 그러나 시몬의 태도가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해서 아주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시몬은 도적단들과 함께 마사다 근처에 있는 지역을 약탈하고 습격하러 다녔다. 그러나 시몬이 그들에게 더 큰 일을 하자고 설득했으나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채에 거주하는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인데, 그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폭군적인 즐기고 원래 큰일을 저지르기 좋아하기 때문에 아나누스의 죽음을[㈜ 전쟁.4권. 5:2(316).] 전해듣자, 산악지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노예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선언하였고, 이미 자유의 몸이 된 자들에게는 보상을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모든 지역에서 사악한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4. 시몬이 열심당을 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다


     시몬이 주위에 막강한 사람들을 거느리게 되자 산악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정복했다. 점점 더 그에게로 오는 자가 많아지자,그는 그 지역의 아래 지역가지 내려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시몬이 이제 도시 중에서 굉장히 막강하게 되자 권력을 가진 많은 자들이 그에 의해 매수당했다. 그래서 시몬의 군대는 노예와 도적들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그를 왕으로 섬겼다. 그른 아크라바테네 지역을 정복하고 대 이두매(Great Idu-mea)까지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는 나인(Nain)이라 불리는 어떤 마을에[㈜ 불확실함. 전쟁.4권. 9:5(517)에 있는 이두매(Idumaea)국경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있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갈릴리에 있는 나인은 아니다).] 성벽을 건축하고, 그것을 그의 무리의 안전을 위한 요새로 사용했다. 또한 그는 페레타이(Pheretae)라고 불리는 골짜기에[㈜ 아마 예루살렘 북동쪽 약 6마일 떨어져 있는 골짜기인 쿠르벧 파라(Khurbet Fara)임.] 많은 동굴을 팠으며, 그의 목적에 맞는 이미 파여진 많은 다른 동굴들을 찾아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재물창고로 이용하거나 약탈물 보관창고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안에 약탈한 과일들을 비축했다. 많은 그의 부하들이 그곳에 거주했다. 그는 미리 부하들을 훈련시켜 예루살렘 공격을 준비한다는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말했다.


    5. 시몬이 열심당의 공격을 격퇴하다


     반면 열심당원들은 시몬이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장을 하고 시몬을 공격하러 갔다. 시몬은 열심당원들을 맞아 전투를 했고, 상당한 숫자의 열심당원들을 죽였으며, 나머지는 예루살렘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감히 예루살렘 성벽을 공격할정도로 자기 군대가 그렇게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두매를 먼저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20,000명의 군사를거느리고 이두매 지역의 경계선 쪽으로 진군했다. 이두매의 통치자들은 재빨리 백성들 중 가장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사람들을 약25,000명을 불러모으고, 그 이외의 인원들은 이두매를지키기로 명령했다. 나머지 병사들을 이두매를 지키게 한 이유는 마사다에 있던 시카리(Sicarii)파의 침입에 대비해서 취한 조치였다. 이두매인들은 그들의 경계지역에서 시몬을 맞아 싸웠고, 그날 하루종일 전투를 계속했다. 이두매인들이 이겼는지 졌는지에 대한 논쟁은 분분하다. 아무튼 시몬은 나인(Nain)으로 돌아갔고 다시 이두매를 공격하러 왔다. 그는 데쿠에(Thekoue)라는[㈜ 베들레헴(Bethlehem)의 남쪽 5마일 떨어진 드고아(Tekoa).] 마을에 진을 치고, 친구 엘르아살(Eleazar)을 헤로디온(Herodion)에서[㈜ 드고아(Tekoa)의 북동쪽으로 약 3마일 떨어져 있음.전쟁.1권. 13:8(265), 21:10(419)이하에 있는 대헤롯에 의해 건축되어진 성이며, 그는 이곳에 장사되었다고 1:673에 기록되어 있음.] 수비하는 자들에게 보내 그 요새를 넘겨 달라고 말하도록 시켰다. 수비대는 먼저 엘르아살이 왜 왔는지를모르고 기꺼이 맞아주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넘겨달라고 말하자, 수비대들은 칼을 빼들고 그를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부치자, 그는 성벽 아래 골짜기로 뛰어내렸으나 곧 즉사했다. 그러나 이두매인들은 시몬의 막강한 세력에 대해 전부터 많이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싸우기 전에 적군의 동태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6. [이두매의 지휘관인 야고보가 시몬에게 돌아섬]


     이두매인들의 지휘관중 야고보가 기꺼이 그 임무를 자기가 맡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두매를 배신할 작정이었다. 따라서 야고보는 이두매 군대가 모여있는 알루루스(Alurus)마을을[㈜ Hulhul, 헤브론 북족 약 4마일 그리고 드고아에 있는 시몬의 진영에서는 남서쪽 7마일 떨어진 지점.]떠나 시몬에게 왔다. 먼저 야고보는 그에게 이두매를 넘겨줄 것에 동의하고, 자신에게 좋은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나서 야고보는 전 이두매가 시몬의 손 아래 정복될 때까지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으로 인해 야고보는 시몬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갖가지 약속을 받아 의기양양해졌다. 야고보는 이두매로 돌아오자 시몬의 군대에대해 과장하면서 사실보다 더 숫자가 많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뒤, 그는 지휘관들을 입에 바른 소리로 시몬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하지 말고 그에게 전 통치권을 넘겨주라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신들을 시몬에게 보내 군사를 이끌고 이두매로 오면 적당한 시간에 이두매 군사들을 흩어 놓겠다고 약속하였다.시몬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는 먼저 말을 잡아타고 그가 매수한 자들과 함께 도망갔다. 공포심이 전 주민들을 휩쓸었으며, 주민들은 싸움도 하기 전에 대열을 이탈하고 각자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7. 시몬이 헤브론을 점령


     이렇게 하여 시몬은 뜻밖에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두매를 통과해 계속 진군했으며, 헤브론(Hebron)을 갑자기 습격하여 장악했다. 그곳에서는 그는 상당히 많은 노획물들을 탈취했으며엄청난 나무 열매들을 빼앗았다. 헤브론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헤브론은 이 지역에서 뿐 아니라 애굽의 멤피스(Memphis)보다 더 고대도시였다.[㈜ 참).민 13:22(23) “헤브론(Hebron)은 애굽 소안(Zoan,칠십인역과 고대.1권. 170에서는 타니스)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다.”타니스(Tanis)는 여하튼 “주전 2000년전에 세워졌다 (G.B.Gray. ‘Internat, Crit. Comm’, 민 13:22(23). 멤피스(Memphis)의 기초년대는 애굽역사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브론(Hebron)의 유물은 확정되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보다 앞서는 것 같다”(위의 책).] 따라서 헤브론은 2,300년 정도된 도시였다.또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이 메소보다미아(Me-sopotamia)를 떠나[㈜ 창13:18.] 거주했던 곳이었다. 헤브론의 주민들에따르면,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곳에서부터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며[㈜ 헤브론(Hebron)에서 야곱의 체류는 창35:27, 37:14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지방전승에 신빙성을 두고 성경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있다.] 그 기념비들이 이 작은 도시에 아직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념비들의 구조물은 가장 훌륭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가장 고상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다.[㈜ 막벨라(Machpelah)굴임.창23장의 사라, 25장 9절의 아브라함 35:27이하의 이삭 그리고 50:13에 나오는 야곱이 묻힌 곳으로 현재 회교 사원 밑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유대, 기독교 그리고 회교적 전승들은 그 장소에 관해서 일치하고 있다. 회교사원들은 두르고 있는 벽은 헤롯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Conder, ‘Tent Work in Palestine’, 239).] 또한 헤브론에서 6퍼얼롱 떨어진 곳에 아주 큰 데레빈드나무(Ter-ebinth-tree)가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천지창조부터 계속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Abraham)의 ‘상수리 나무’ (칠십인역도 같음, 히브리어로는 ‘상수리 나무들’혹은 ‘테레빈 나무들’)는 창13:18과 14:13, 18:1에 나온다. 주후 5세기에는 terevbinqo”라고 불리워졌으며 매년 축제가 열리거나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리던 곳이었다.(Sozomen, ‘H.E’, 2:4) (Robertson Smith).] 시몬은 헤브론에서부터 전 이두매를 휩쓸고 다니면서 도시와 마을들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왜냐하면 시몬은 완전무장한 병사이외에도 그를 따르는 40,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만큼 식량이 부족했다. 이러한 식량부족의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시몬은 원래 야만스러운 성격이였으며, 이두매에 대한 크나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이두매를 휩쓸고 다녔고, 따라서 이두매인들의 인구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시몬과 그 일당들이 지나간 후에는 마치 메뚜기들의 습격으로 온통 잎사귀가 망가진 나무들을 보는 듯 했다. 따라서 시몬의 군대가 지나가 버린 뒤 남는 것이라곤 폐허 뿐이었다. 그들은 어떤 곳은 불을 질렀고, 어떤 곳은 거의 파괴시켰으며, 그 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짓밟아 뭉개거나 먹어치워버렸다. 이렇게 계속 진군하면서 그들은 경작된 땅을 불모지보다 더 힘들고 손대기 어려운 땅으로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시몬이 황폐하게 만든 땅과 원래 불모지였던 땅이 구분이 안될 지경이었다.


     8. 열심당원들이 시몬의 아내를 감금하다


     이러한 시몬의 성공은 열심당원들을 다시 한번 자극했다. 비록 열심당들이 그와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히 싸우는 것을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길목에 사람을 매복시켜 시몬의 아내와 상당한숫자에 달하는 그녀의 수행원들을 붙잡았다. 그들은 마치 시몬을 포로로 잡은 듯이 인근 도시로 되돌아와서는, 시몬이 무장을해제하고 부인을 돌려달라고 간청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신, 사랑하는 아내를 붙잡아간 그들에 대한 분노만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는 마치 피해당한 야수가 자신을 해친 자를 공격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벽으로 진격해 왔으나 공격을 할 수 없자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무조건 해침으로 화풀이를 했다. 따라서 그는 성문 밖으로 나온 자들을 모두 잡았으며, 무장을 하지 않은 사람과 늙은이들을 나뭇가지나 막대기로 묶어서 고문을 하고 죽여버렸다. 게다가 시몬의 분노가 대단했기 때문에 막 죽은 시체를 물어 뜯을 정도로 잔인해졌다.[㈜ 일종의 유사한 ‘과장법'(역사가가 그 단어를 보충설명해주고 있다)은 전쟁.6권. 7:3(373)에서 나타난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잘라서 적들에게 보냈다. 이렇게 적들을 위협하여 주민들이 내란을 일으키고, 그의 부인을 붙잡아간 당사자들을 쫓아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지전능한 만유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니와, 부인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성벽을부숴뜨리고 전 예루살렘 주민들을 나이나 죄의 유무(有無)에 관계없이 똑같은 처벌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무서운 위협은 주민들 뿐 아니라 열심당들도 떨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몬의 아내를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시몬은 약간 부드러워졌으며 계속적으로 피를 흘려 살생하는 것을 멈췄다.


     9. [이달리야에서도 내란이 일어나고, 베스파시안은 계속해서 예루살렘까지 진군함]


     내란과 시민전쟁이 유대지역 뿐 아니라 이달리야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갈바(Galna)가 로마의 광장(Roman fo-rum)한 가운데에서 살해[주후 69년 1월 15일]되어서[㈜ 전쟁.4권. 9:2(494,499).] 오토(Otho)가 황제가 되었고, 그는 역시 황제로 옹립된 비텔리우스와전쟁을 했다. 게르만에 있는 군대들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토가 베드리아쿰(Bedriacum)에서[㈜ 베로나(Verona)와 크레모나(Cremona)사이에 있는 시살피네골(Cisalpine Gaul)에 있는 조그만 도시. 비텔리안(Vitellian)인들은 차례로 전쟁.4권. 11:2(634)이하에 나오는 같은 부근에서 패배했다. 타키투스(Ticitus)의 ‘박물학'(H.N.)ii : 41-49에서 전쟁과 오토(Otho)의 죽음을 기술하고 있다.] 비텔리우스의 부하장군이었던 발렌스(Valens), 카이킨나(Cae-cinna)와[㈜ 파비우스 발렌스(Fabius Valens)와 A. 카이킨나 알리에누스.(A. Caecina Alienus)] 전쟁을 했을 때 첫 날에는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 날 비텔리우스의 병사가 승리를 했다. 오토는 많은 부하들이죽고 대패했다는 소식을 브릭셀룸(Brixellum)에서[㈜ 파르마(Parma)북동쪽 약 12마일쯤 떨어진 브레스켈로(Brescello)임.]듣고 그곳에서 자살했다[주후 49년 4월 17일]. 그는 석달 이틀 간을[㈜ 69년 1월15일부터 4월17일 까지.] 다스리고 자살함으로써 그의 통치를 마감하였다. 오토의 군대 역시비텔리우스 부하장군들에게로 왔으며, 비텔리우스는 군대와 함께 로마로 내려왔다. 한편, 베스파시안은 가이사랴를 다이시우스(시반) Daesius[Sivan]월 5일에 떠나 아직 정복되지 않은 유대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주후 68년 6월 약23일]. 베스파시안은 산악지역까지 가서 고프나(Gophna)와[㈜ 예루살렘 정북쪽 약 12마일쯤 떨어져 있음.] 아크라베타(Acr-abetta)라[㈜ 유대 북동구(區)에 있음.] 불리는 두 지역을 점령했다. 그후 그는 베델(Bet-hela)과[㈜ 고프나(Gophna)의 남동쪽 2~3마일쯤 떨어져 있음.] 에브라임(Ephraim)의[㈜ 벧엘(Bethel)의 북동쪽에 있는 엣타이이베(et-Taiyibeh)임.] 두 작은 도시를 장악했으며, 그곳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예루살렘까지 계속 말을 타고 진군했다. 이렇게 진군하면서 베스파시안은 많은 죄수들과 포로들을 체포했다. 게다가 케레알리우스(Cerealius)라는[㈜ 제5군단의 사절인 섹스투스 케레알리우스 베틸리아누스(Sextus Cerealius Vetilianus)는 전쟁.3권. 7:32(310)이하에서 사마리아(Samaritan)인들을 패배시켰다.] 베스파시안의 지휘관이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상부 이두매(UpperIdumea)라 불리는 이두매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카페드라(Caphethra)를[㈜ 불확실함.] 공격했다. 이 도시는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한번 공격으로 완전히 장악하여 불질러버렸다. 그는 또한 카파라비스(Capharabis)를 공격했는데, 이곳은 매우 튼튼한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포위만 했다. 그는 이런 포위상태에서 아주 오랜시간을 보내려고 생각했는데, 그 성안에 있던 자들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용서를 구하러 와서 스스로 그에게 항복했다. 케레알리우스(Cerealius)는 그들을 정복한 뒤 헤브론, 즉 또 다른 고대 도시 헤브론으로 갔다. 이미 언급했듯이[㈜ 전쟁.4권. 9:7(530).] 이 도시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직선거리로 약 18마일 정도임.] 산악지방에 위치해 있다. 케레알리우스가 무력으로 이 도시를 공격했을 때, 그는 그 도시 안에 남은 젊은이나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따라서 이제 헤로디움(Herodium), 마사다(Masada), 마카이루스(Ma-chaerus)를 제외한 전 지역이 점령당한 것이다. 이 세 도시는 강도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제 남은 예루살렘이 로마군의 공격대상이 된 것이었다.


      10. 아무런 제재없이 시몬의 손에 좌우되는 예루살렘


    [㈜ 전쟁.4권. 9:8(544)에서 발췌한 이야기를 요약한 것임.]


     시몬은 아내를 열심당의 손으로부터 구해내자 곧 이두매의 남은 지역으로 되돌아와서, 전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시몬은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성벽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방으로 가려는 일꾼들도 죽였다. 이 시몬은 주민들에게 있어 로마군보다 더 큰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예루살렘안에 있는 열심당이 시몬과 로마군보다 더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기간 동안 요한의 용기와 사악한 계략이 갈릴리인들을 부패시켰다. 왜냐하면 이 갈릴리인들은 요한을 추대하여 그를 매우 영향력 있는 유력인사로 만들었으며,요한은 그들 덕분에 얻은 권력으로 알맞은 적절한 보상을 그들에게 보답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게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라고 허락했다. 따라서 그들의 약탈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부유한 집을 습격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겁탈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유희였다. 그들은 또한 탈취한 노획물들을 그들의 피와 함께 삼켜버리는[㈜ 참). 6:372, 빼앗고 그리고…취하여 피와 섞인 음식물을 그들은 먹어치웠다 (ejsuvlwn kai;   trofh;n arpavxonte” ai$mati pefurmenhn katepinon).] 그야말로 포악한 인명살상을 감행했다. 그들은 또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여장(女裝)을 즐기면서, 진력이 날때까지 계속 그런 행동을 했다. 즉, 여자 가발을 쓰고 여성용 장신구들을 걸치고 화장품을 잔뜩 발라 아주 아름답게 꾸미고, 눈화장까지 했으며 여자의 몸치장 뿐 아니라 여성 특유의 욕정까지[㈜ 혹은 “경험들”.] 흉내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불미스러운 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율법에서 금하는 더러운 짓들을 자행했다. 게다가 그들은 예루살렘 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예루살렘을 매음굴로 만들고, 더러운 행위로 완전히 예루살렘을 뒤덮었다. 그들의 얼굴을 여자의 얼굴처럼 꾸미고 다니면서 손으로는 사람을 죽였다. 그들은 여자처럼 걸으며 접근하여 갑자기 공격하는 전사로 돌변해 화려하게 물들인 옷 안에서 칼을 뽑아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한편 시몬은 요한에게서도망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몬은 요한보다 더 피흘리기를 좋아하는 악랄한 사람이었다. 성벽안에서 폭군 요한을 떠나 도망나온 자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몬에 의해 살해당한셈이다. 따라서 로마군에게 도망가려는 모든 길을 완전히 차단되었던 것이다.


     11. 열심당원들 간의 배반


     한편 요한 휘하에 있던 군대가 요한에게 대항하여 내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든 이두매인들도[㈜ 이로부터 몇 명의 이두매(Idumean)인들은 주력부대가 퇴각했을 때에 아직까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요한으로부터 이탈하여그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그의 권력에 대한 시기심과 그의 잔인성에 대한 증오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 많은 열심당원들을 죽이고, 나머지는 아디아베네(Adiabene)의 왕 이자스(Izas)의[㈜ 다른곳(전쟁.5권. 4:2(147), 6권. 6:4(356), 6:356, ; 고대,20권. 2:1(17)등에서는 이자테스(Izates)라고 불리워지는데, 여기서도 이렇게 읽혀질 수 있다. 티그리스강(the Tigris)상단부 지역에 있는 아디아베네(Adiabene)의 여왕인 헬레나(Helena)와 그녀의 아들 이자테스(Izates)가 유대교로 개종한 이야기는 고대. 20권. 2:1(17)이하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이 왕가는 큰 건물들을 예루살렘에 지었다. 그 도시안에 그녀의 왕궁(전쟁.5권. 6:1(253))과 외곽으로 3퍼얼롱(furlong)떨어져 있는 파라미드식의 무덤들-그안에 그녀와 그녀의 아들 이자테스(Izates)가 묻혀있음(고대.20권. 4:3(95), 전쟁.5권. 2:2(55), 3:3(119), 4:2(147))-이 있다. 또한 다른 아들인 모노바주스(Monobazus)(전쟁.5권. 6:1(252))의 왕궁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라프테(Grapte)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바울과 바나바(Barnabas)처럼 헬레나여왕(Queen Helena)은 글라우디오(Claudius)치하의 기근 시에 예루살렘을 원조해주었다.(고대.20권. 2:5(51)).] 친척인 그라프테(Grapte)가 지은 궁정으로 몰아 넣었다. 이두매인들은 열심당원들을 공격해 그들을 성전으로 몰아넣고 요한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을했다. 왜냐하면 요한이 그 궁전에 있으면서 그곳에서 폭정으로 얻은 노획물들을 쌓아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졌던 많은 열심당들은 함께 성전으로 달려가 그곳으로 도망친 자들에게로 갔다. 요한은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주민들과 이두매인들과 대항하여 싸우러 내려갈 준비를 했다. 예루살렘 주민들과 이두매인들은 열심당의 공격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자신들이 그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열심당원들이 욱하는 감정으로 개인적으로 성전에서 나와 공격하여 그들을 죽이거나 혹은 도시를 불지르거나 않을까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였으며 대제사장도 참석하여 열심당의 공격을 피할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가 말해 주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의 판단을 가장 나쁜 길로 되돌려 놓으셨다. 즉 그들은 그들을 구해줄 치료책을 궁리해 냈는데, 그것은 병 자체보다 오히려 그 치료책이 더 나쁜 그런 해결방법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요한을 정복하기 위해서 시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며, 도시안으로 제2의 폭군이 입성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그들은 이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대제사장 마티아스(Matthias)를[㈜ 보에투스(Boethus)의 아들 마티아스(Matthias)는 대제사장 가문의 한 사람으로 후에 세아들을 둔 후 시몬(Simon)에 의해 살해되었다(전쟁.5권. 13:1(527)).] 그들이 두려워했던 시몬에게 보내 입성하라고 간청하게 했다.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을 피해 도망간자들도 그들의 집과 재산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합세하여 그에게 와서 간청했다. 따라서 그는 거만한 태도로 그들에게 도와준다고 장담하고, 열심당의 손아귀에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위해 입성하였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시몬을 기쁜 환호성으로 영접하면서 마치 그들의 구세주나 보호자인 것처럼 맞아들였다.그러나 시몬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자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으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예루살렘 주민들을 열심당못지 않게 적으로 간주하였다.


    12. 시몬은 3년간의 전쟁 끝에 예루살렘을 차지함[주후 69년 4월~5월]


     이렇게 하여 시몬은 3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크산티쿠스(니산)(Xanthicus, Nisan)월에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다. 요한은 그의 많은 열심당원들과 함께 성전 밖으로 나오는 것도 금지되었고,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재산도 잃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기 시작했다(왜냐하면 시몬과 그의 일당들은 열심당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약탈했기 때문이다) 시몬은 또한 주민의 도움으로 성전을 공격했으며, 상대방인 열심당들은 회랑과 흉벽(胸壁)에 서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시몬이 이끄는 군대의상당한 숫자가 죽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왜냐하면 열심당은 높은 곳에서 쉽게 던질 수 있었으며 거의 적들을 명중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잇점 뿐 아니라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쏘도록 4개의 아주 큰 망대를 높이 건축했기 때문이이었다.

     그 4개의 망대는 다음과 같다. 즉 뜰의 북동쪽 모퉁이에 하나가 있고, 실내경기장(Xystus)[㈜ 성전(Temple)의 서쪽 편에 있음. 실내경기장(Xystus)은 티로포에온(Tyropoeon)계곡 안에 있거나 바로 위에 있었다(전쟁.2권. 16:3(344)).] 위에도 하나가 있고, 하부도시(lower town)맞은 편의 모퉁이 위에도 하나가 있고[㈜ 성전(Temple)의 남서각(南西角)에.] 제사장들의 방 지붕 위에 또 하나가 건축되었다.[㈜ 제사장들이 사용하며 기구들을 저장하는 조그만 방들로 삼면이 안 마당으로 둘러 있으며, 여러층으로 되어있다.] 제사장들의 방 지붕위에 있는 망루는 제사장이 매 7일을 시작하는 새벽과 땅거미지는 저녁과 또한 하루가 끝나는 저녁에 나팔을 불어 신호하던 곳이었다.[㈜ 참).바벨론 탈무드. ‘숙카(Sukkah)’. 5절을 Greenup. S.P.C.K., 1925년판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평일에는 매일 21번씩 나팔을 부는데 안식일 전야에는 보통때보다 6번을 더 불었다. 세 번은 백성들이 일을 쉬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세 번은 성일과 평일을 구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관습은 또한 바벨론 탈무드(T.B) Shabbath. 35하반절에 그리고 예루살렘 탈무드(Talm. Jer. Shabbath. xvii : 16상반절에 언급되어 있다.] 주민에게 일을 끝내는 시각과 다시 시작하는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 나팔을 부는 것이다. 열심당들은 화살과 돌을던지는 투석기를 망대 위에 설치했으며, 활쏘는 자들과 돌쏘는자들을 망대에 배치했다. 시몬은 그의 부하들의 대부분이 점점 기진맥진 했기 때문에 들이기로 격을 조금 늦추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군대는 상대방보다 숫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비록 투석기로 던져대는 돌이 멀리까지 날아와서 군사들을 많이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격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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