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티투스가 자기 형제와 부친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과 안티오쿠스라는 유대인 한 사람의 범죄와 사악한 행위 때문에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이 위험에 빠진 사건에 대하여
1. 티투스가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에 대하여 [주후 70년 10월]
티투스가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동생의 생일을[㈜ 도미티안(Domitian)은 현재 18살이며, 주후 52년 10월24일에 태어났다.] 아주 성대하게 치르면서 이 생일 잔치를 통해 동생을 즐겁게 하기[㈜ 또는 \’명예를 바쳐서\’. 그러나 동사(동사적 형용사처럼)는 분명히 \’연기하다\’를 함축하고 있다.] 위해서 유대인 포로들을 많이 처형시켰다.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맹수와 싸우다가 죽거나, 서로 편을 갈라 결투하다가 죽거나, 혹은 화형을 당해 죽거나 하여 이 숫자가 2,500명을 넘었다. 그러나 로마군들에게는, 이렇게 갖가지 방법으로 유대인 포로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처벌들이 너무 가벼운 듯이 보였다. 이렇게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후에, 티투스는 베니게(Phonicia)의 베리투스(Berytus)라는[㈜ 베이루트(Beirut).] 로마의 식민지 도시로갔다. 그곳에서 티투스는 오랜동안 머물렀으며 아버지의 생일을[11월][㈜ 베스파시안(Vespasian)은 현재 61세였으며, 주후 9년 11월 17일에 태어났다.] 맞이하여 더욱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훨씬 더 값비싼 구경거리와 여러 다양한 순서들을 마련하여 화려하게 연회를 치루었다. 이때도 동생의 생일에 희생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2. 안디옥(Antioch)에 있던 유대인들이 위험에 처함
한편 바로 이 때에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 잔류자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극심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디옥 주민들과 유대인들의 반목이 극심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에 대한 거짓고소 때문 뿐만 아니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얼마전에 일어나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 다음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간단히 언급을하고자 한다.
3. 사건의 진상
유대인들은 세계의 전 지역 주민들 가운데 여기저기 밀집해서 흩어져 있었으며, 특히 수리아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수리아에 특히 많은 유대인들이 섞여 살게 된 것은 두 나라가 지형적으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이 수리아에서도 안디옥에 모여산 이유는 안디옥이 아주 큰 도시였다는 점도 있지만 안티오쿠스(Antiochus)왕[㈜ 안티오쿠스 1세 소테르(Antiochus I Soter:주전 280-261년 통치)를 의미한다.]과 그 이후의 많은 왕들이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배려해 주었던 점이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 주전 175-164).]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약탈했지만[㈜ 약 주전 170년경. 전쟁. 1권. 1:1(31)이하.]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안디옥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동(銅)으로 만든 많은 헌납물들을 돌려주어 유대인들과 회당에보관하도록 해주었으며 게다가 그들에게 헬라인들과 똑같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아피. 2권. 4(39)에 의하면 이 권리들은 그 도시와 셀류키드(Seleucid)왕조의 시조인 셀류쿠스 1세 니카톨(Seleucus I Nicator, 주전 28년 사망)이 안디옥(Antioch)의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곳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 후의왕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좋은 대우를 계속 받았기 때문에 그수가 점점 많아졌으며, 훌륭하고 값비싼 헌납물로 성전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성전\’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의미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Whiston과 Traill은 \”그들의 성전\”이라 번역하였는데 그 의미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회당\”을 의미한다.]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종교적의식으로 많은 헬라인을 끌어들였으며 헬라인들을 자신들과 어느정도 결속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유대인과 로마군과의 전쟁이 선포되었으며, 베스파시안은 수리아에 도착하자,곧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곳곳에서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이때 안티오쿠스(Antiochus)라는 한 유대인이 안디옥 주민들이 모여있는 극장에[㈜ 극장은 헬라 도시들 가운데서 회합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었다;참). 에베소(Ephesus)에 있는 연극장의 장면. 행 19:29.] 들어가서 자기 아버지와 유대인 몇 명이하룻밤 사이에 도시 전체를 불질러 파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있다고 고발하였다. 안티오쿠스의 아버지는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최고 행정관이었기 때문에 안티오쿠스는 아버지 때문에 상당히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안티오쿠스는 또한 도시를 방화하려는 음모의 공범자로서 안디옥에 살고 있는 유대인 몇 명을 넘겨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디옥 주민들은 격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넘겨 받은 유대인들을 즉시 화형에 처하라고 요구하여 잡힌 자들은 모두 극장안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나서 안디옥 주민들은 안디옥이 살길은 빨리 안디옥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징벌하는 데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곳을 습격하였다. 한편 안티오쿠스는 더욱 더 안디옥 주민의 격노를 부채질 하였다. 안티오쿠스는 헬라인들의 방식대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개종과 자신이 유대 풍습을 싫어한다는 증거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유대인들도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드릴 것을 강요하였다. 헬라식 제사를 거부하는 자들은 안디옥을 불지르려한 공모자로 몰아부쳤다.이렇게 협박하여 안디옥에 사는 유대인 몇 명은 헬라식으로 제사를 드려 목숨을 부지하게 했으나 말 안듣는 자들은 모두 살해하였다. 안티오쿠스는 로마 지휘관으로부터 로마 병사의 원군을 얻어서 가혹하게 유대인 동료시민들에게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유대인들이 제7일 안식일에 쉬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안식일에도 다른 날처럼 모든 것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안티오쿠스는하도 가혹하게 안식을 지키지 못하게 강용하여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쉬는 것이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디옥에서 시작한 이사례가 짧은 시간 내에 다른 도시까지도 확산되었다.
4. 안디옥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사건이 유대인의 과실로 전가됨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 당시 재난들을 겪고 있을 때, 제2의 재난이 또 그들에게 닥쳐왔다. 내가이 재난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전에 있었던 사건을 먼저 설명했던 것이다. 대형 화재가 일어나 사각형모양의 시장과 행정관서와 공문서 보관소와 법정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며, 불길이도시 전체를 무섭게 휩쓸면서 확산되어 겨우겨우 어렵게 진화한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안티오쿠스는 이러한 방화 사건을 유대인의 짓으로 고발하였다. 안디옥 주민들은 설사 그들과 유대인간에 반목이 그전에 없었다 하더라도 이 사건으로 너무 격분하여 안티오쿠스의 중상모략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도 방화 음모사건이 있었던 터라 안디옥 주민들은 안티오쿠스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으며, 유대인들이 도시에 불지르는 것을 마치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안디옥 주민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 마냥 격분하여 유대인을 습격하였다.
이 때 부총독(deputy-governor)인 그나이우스 콜레가(Gna-eus Collega)가[㈜ 폼페이우스 콜레가 장군(Gn. Pompeius Collega)은 주후 93년에 집정관이었다(타키투스. \’Agr.\’44).] 아주 어렵게 안디옥 주민들의 격분을 진정시켰으며, 베스파시안이 수리아 총독으로 이미 파견한 카이세니우스 파이투스(Caesennius Paetus)가[㈜ 61년에 집정관이었던 카이세니우스 파이투스(C. Caesennius Paetus)는 63년에 파르티아(Parthia)에 대적한 군사 행동으로 망신을 당하고 네로가 그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그는 수리아의 통치자로서 순진한 콤마게네(Commagene)의 왕 안티오쿠스를 공격하는 불명예스런 일도 있었다. 이것은 다음에 서술되어 있다. 전쟁. 7권. 7:1(219)이하.] 아직 안디옥에 도착하지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가이사 앞에 제소하여 해결하자고 주민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콜레가는 그 사건을 신중하게조사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다. 그 진상을 조사한 결과 안티오쿠스가 죄가 있다고 뒤집어 씌운 유대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방화사건과 관련이 없으며, 빚에 쪼들린 일부 불한당들이 시장과 공문서 보관서를 불지른다면 모든 빚이 청산될 것이라 생각하여 저지른 악당들의 소행임이 들어났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덮친 이러한 비난 때문에 그 결과를 조심스럽게 기다리면서 두려움과 극심한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제 3 장
티투스가 자기 형제와 부친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한 것과 안티오쿠스라는 유대인 한 사람의 범죄와 사악한 행위 때문에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이 위험에 빠진 사건에 대하여
1. 티투스가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에 대하여 [주후 70년 10월]
티투스가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동생의 생일을[㈜ 도미티안(Domitian)은 현재 18살이며, 주후 52년 10월24일에 태어났다.] 아주 성대하게 치르면서 이 생일 잔치를 통해 동생을 즐겁게 하기[㈜ 또는 ‘명예를 바쳐서’. 그러나 동사(동사적 형용사처럼)는 분명히 ‘연기하다’를 함축하고 있다.] 위해서 유대인 포로들을 많이 처형시켰다.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맹수와 싸우다가 죽거나, 서로 편을 갈라 결투하다가 죽거나, 혹은 화형을 당해 죽거나 하여 이 숫자가 2,500명을 넘었다. 그러나 로마군들에게는, 이렇게 갖가지 방법으로 유대인 포로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처벌들이 너무 가벼운 듯이 보였다. 이렇게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후에, 티투스는 베니게(Phonicia)의 베리투스(Berytus)라는[㈜ 베이루트(Beirut).] 로마의 식민지 도시로갔다. 그곳에서 티투스는 오랜동안 머물렀으며 아버지의 생일을[11월][㈜ 베스파시안(Vespasian)은 현재 61세였으며, 주후 9년 11월 17일에 태어났다.] 맞이하여 더욱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훨씬 더 값비싼 구경거리와 여러 다양한 순서들을 마련하여 화려하게 연회를 치루었다. 이때도 동생의 생일에 희생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2. 안디옥(Antioch)에 있던 유대인들이 위험에 처함
한편 바로 이 때에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 잔류자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극심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디옥 주민들과 유대인들의 반목이 극심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에 대한 거짓고소 때문 뿐만 아니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얼마전에 일어나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 다음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간단히 언급을하고자 한다.
3. 사건의 진상
유대인들은 세계의 전 지역 주민들 가운데 여기저기 밀집해서 흩어져 있었으며, 특히 수리아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수리아에 특히 많은 유대인들이 섞여 살게 된 것은 두 나라가 지형적으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이 수리아에서도 안디옥에 모여산 이유는 안디옥이 아주 큰 도시였다는 점도 있지만 안티오쿠스(Antiochus)왕[㈜ 안티오쿠스 1세 소테르(Antiochus I Soter:주전 280-261년 통치)를 의미한다.]과 그 이후의 많은 왕들이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배려해 주었던 점이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 주전 175-164).]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약탈했지만[㈜ 약 주전 170년경. 전쟁. 1권. 1:1(31)이하.]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안디옥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동(銅)으로 만든 많은 헌납물들을 돌려주어 유대인들과 회당에보관하도록 해주었으며 게다가 그들에게 헬라인들과 똑같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아피. 2권. 4(39)에 의하면 이 권리들은 그 도시와 셀류키드(Seleucid)왕조의 시조인 셀류쿠스 1세 니카톨(Seleucus I Nicator, 주전 28년 사망)이 안디옥(Antioch)의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곳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 후의왕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좋은 대우를 계속 받았기 때문에 그수가 점점 많아졌으며, 훌륭하고 값비싼 헌납물로 성전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성전’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의미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Whiston과 Traill은 “그들의 성전”이라 번역하였는데 그 의미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회당”을 의미한다.]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종교적의식으로 많은 헬라인을 끌어들였으며 헬라인들을 자신들과 어느정도 결속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유대인과 로마군과의 전쟁이 선포되었으며, 베스파시안은 수리아에 도착하자,곧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곳곳에서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이때 안티오쿠스(Antiochus)라는 한 유대인이 안디옥 주민들이 모여있는 극장에[㈜ 극장은 헬라 도시들 가운데서 회합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었다;참). 에베소(Ephesus)에 있는 연극장의 장면. 행 19:29.] 들어가서 자기 아버지와 유대인 몇 명이하룻밤 사이에 도시 전체를 불질러 파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있다고 고발하였다. 안티오쿠스의 아버지는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최고 행정관이었기 때문에 안티오쿠스는 아버지 때문에 상당히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안티오쿠스는 또한 도시를 방화하려는 음모의 공범자로서 안디옥에 살고 있는 유대인 몇 명을 넘겨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디옥 주민들은 격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넘겨 받은 유대인들을 즉시 화형에 처하라고 요구하여 잡힌 자들은 모두 극장안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나서 안디옥 주민들은 안디옥이 살길은 빨리 안디옥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징벌하는 데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곳을 습격하였다. 한편 안티오쿠스는 더욱 더 안디옥 주민의 격노를 부채질 하였다. 안티오쿠스는 헬라인들의 방식대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개종과 자신이 유대 풍습을 싫어한다는 증거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유대인들도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드릴 것을 강요하였다. 헬라식 제사를 거부하는 자들은 안디옥을 불지르려한 공모자로 몰아부쳤다.이렇게 협박하여 안디옥에 사는 유대인 몇 명은 헬라식으로 제사를 드려 목숨을 부지하게 했으나 말 안듣는 자들은 모두 살해하였다. 안티오쿠스는 로마 지휘관으로부터 로마 병사의 원군을 얻어서 가혹하게 유대인 동료시민들에게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유대인들이 제7일 안식일에 쉬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안식일에도 다른 날처럼 모든 것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안티오쿠스는하도 가혹하게 안식을 지키지 못하게 강용하여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쉬는 것이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디옥에서 시작한 이사례가 짧은 시간 내에 다른 도시까지도 확산되었다.
4. 안디옥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사건이 유대인의 과실로 전가됨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 당시 재난들을 겪고 있을 때, 제2의 재난이 또 그들에게 닥쳐왔다. 내가이 재난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전에 있었던 사건을 먼저 설명했던 것이다. 대형 화재가 일어나 사각형모양의 시장과 행정관서와 공문서 보관소와 법정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며, 불길이도시 전체를 무섭게 휩쓸면서 확산되어 겨우겨우 어렵게 진화한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안티오쿠스는 이러한 방화 사건을 유대인의 짓으로 고발하였다. 안디옥 주민들은 설사 그들과 유대인간에 반목이 그전에 없었다 하더라도 이 사건으로 너무 격분하여 안티오쿠스의 중상모략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도 방화 음모사건이 있었던 터라 안디옥 주민들은 안티오쿠스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으며, 유대인들이 도시에 불지르는 것을 마치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안디옥 주민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 마냥 격분하여 유대인을 습격하였다.
이 때 부총독(deputy-governor)인 그나이우스 콜레가(Gna-eus Collega)가[㈜ 폼페이우스 콜레가 장군(Gn. Pompeius Collega)은 주후 93년에 집정관이었다(타키투스. ‘Agr.’44).] 아주 어렵게 안디옥 주민들의 격분을 진정시켰으며, 베스파시안이 수리아 총독으로 이미 파견한 카이세니우스 파이투스(Caesennius Paetus)가[㈜ 61년에 집정관이었던 카이세니우스 파이투스(C. Caesennius Paetus)는 63년에 파르티아(Parthia)에 대적한 군사 행동으로 망신을 당하고 네로가 그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그는 수리아의 통치자로서 순진한 콤마게네(Commagene)의 왕 안티오쿠스를 공격하는 불명예스런 일도 있었다. 이것은 다음에 서술되어 있다. 전쟁. 7권. 7:1(219)이하.] 아직 안디옥에 도착하지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가이사 앞에 제소하여 해결하자고 주민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콜레가는 그 사건을 신중하게조사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다. 그 진상을 조사한 결과 안티오쿠스가 죄가 있다고 뒤집어 씌운 유대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방화사건과 관련이 없으며, 빚에 쪼들린 일부 불한당들이 시장과 공문서 보관서를 불지른다면 모든 빚이 청산될 것이라 생각하여 저지른 악당들의 소행임이 들어났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덮친 이러한 비난 때문에 그 결과를 조심스럽게 기다리면서 두려움과 극심한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