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온 반박문 자서전

 


〔자서전(Vita)〕



 「자서전」은 \’유대고대사\'(Antiquities)의 부록으로 \’유대고대사\’의 재판 혹은 후대판에 첨가되어져 있었으며 초판에는 없었다. 「자서전」은「유대고대사」20권의 결론 단락과 자연스럽게이어지고 있다. 「유대고대사」는 두가지 결론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작가의 글에는 〔고대.20권 12:1(259)〕 \”여기서 나는 나의고대 연구를 끝내려 한다\”라고 말한 후에 약간의 요약과 스스로를 과시하는 글을 적은 뒤〔고대.20권 12 1(266)〕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한 말에 대해 계속해서 논박을 하든 입증을 하든 내가 내 가족과 내 경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확한 날짜를 밝히고 있다〔고대.20권 12:1(267)〕\”그러나 나는 고대사를 끝마치려 합니다. 도미티안(Domitian)13년그리고 그의 나이 56세 되던 해\” 그때가 주후 93-94이다 그렇지만, 앞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자서전」은 100년이 지나야출판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두가지의 결론을 내릴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오늘날 저서처럼 고대사와 자서전을 나누어 출판하기 위해 서론에서 순서를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원래 결말을 그대로 두되 그앞에 다음권인 「자서전」의 결론을 붙여 놓으면서 새로운 사건들을 전개해 나갔다. 이 자서전이 첨가되게 된 사건은 디벨II 출신의 유스투스가 유대전쟁사를 출간하면서 요세푸스가 그의 고향 디벨I의 주민을 선동하여 로마군에 반역을 하게 했다고 요세푸스를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요세푸스를 비난하는 유스투스의 비난은 요세푸스를 위험에 빠뜨리기에 적합했고 그것은 요세푸스의 저술을 판매하는 것뿐만아니라, 그의 튼튼한 로마에서의 위치 또한 위협했다. 그들은 당장에 요세푸스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서전」에서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것은 완벽한 자서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대부분은 요타파타(Jotapata)가 적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작가가 갈릴리의 총 사령관으로 제직했던 반년동안의 방어행위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팔레스틴에서 그의 젏은 시절과 나이들어 로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서론과 결론으로 짧게 적고 있을 뿐이다. 이 저술에서 작가는 사건이나 태도에 있어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으며 자신의 저술에 대한 만족감을 보인다. 그가 그렇게 자랑했지만 그의 약점은 그의 문체의 미숙함에 있다. 최근 이글의 결점을 설명하는데 크게 공헌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라쿠오이어(Laquer)가 주장하는 이론으로 그는 계속해서 「자서전」의 골자가64세의 노년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30세 정도의 매우 이른 나이에 저술한 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서전」은 요타파타가 포위당하기 전에 예루살렘을 굴복시키기 위해 갈릴리에서 징집한 사건에 대한 요세푸스의 행동을 적은공식문서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 「자서전」은 기스칼라 출신의 요한과 다른 사람들이 요세푸스를 폭군()으로 몰면서이 일에 책임을 요세푸스에게 전가한 것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그가 갈릴리에서 통치했던 부분과,「자서전」과 「유대전쟁사」에서 겹쳐져 나타났던 약간의 사건을 비고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라쿠오이어는 「자서전」이 더 오래되고 믿을 만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있다. 이 비문학적인 보고서는 그 당시에는 별 유용성 없이 만들어졌으나 후년에 가서 유스투스의 공격에 대항하여 쓸모있게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약간 교정되어 자서전 속에서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이론이다. 요세푸스가 갈릴리 총사령관 때의 자신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능한 이야기라 생각된다.

  만약 라쿠오이어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요세푸스가 로마에서 그이 문학 동인들의 영향을 받기 전에 그의 글쓰는 양식에 대한 흥미진진한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서전」이 나중에 쓰여졌다면 문학적인 마무리가 부족한 것은 이전과는 달리 〔참).아피. 1권950)〕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급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유대고대사」의 마지막권과 「자서전」이 전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연결점들 때문에 옳지 못하다. 따라서 「자서전」은 요세푸스가 젊었을 때 아람어로 쓴 일종의 보고서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정도로 라쿠오이어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피온 반박문 (Contra Apionem)〕



  아피온 반박문은 「자서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저술로 요세푸스의 가장 뛰어난 저서이다. 「아피온반박문」은 훌륭히 설계되어진 계획과 두드러진 무학적 재능 헬라의 철학과 시(詩)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과 그의 조국 유대의 종교에 대한 열렬하고 진실한 갈망이 잘 나타난 작가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아피온반박문」이라는 제목은 작가가 붙인 것이 아니며 그리 기분좋은 제목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피온(Apion)은 하나의 이스라엘의 적들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오래된 제목으로는 \”고대 유대인들에 대하여\”(이것은 책의 뜻을 충분히 나타내주는 분명한 제목은 아닌 것같다)나 \”헬라인들에 대한 반박\”등이 있다. 「아피온 반박문」은「유대고대사」의 비난에 대한 답변으로, 또한 그 당시 유행하던 편견들에 대한 반박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대 유대인들의 반란과 함께 유대주의에 대한 변증을 포함하고 있다.

  1세기의 반(反)유대주의 (Anti-Semitism)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헬라인들의 극단적인 고대성에 도전하여 유대역사에 관해 그들이 지켰던 침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조국 유대의  고대성에 대한 분명한 정리를 보여주며 반 유대주의자들이 불합리하게 꾸며낸 이야기와 악의에 찬 비난에 대해 훌륭하게 반박하고 있으며 율법을 주신자와 그율법에 대한 열렬한 방어와 함께 헬라인들의 그 당시 내세관과 대조를 이루는 하느님에 대한 그의 수준높은 사고를 보여주고 있으며 잃어버린 글 속에 있는 수 많은 인용문들은 이 저작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4. 헬라어 원문을 위한 사본들과 그외의 고대의 권위서들



 (a) 「자서전」사본들

P    Codex Palatinus(Vaticanus) Graecus 14,9세기 혹은 10세기

R    Codex Regius(Parisinus) Gr.1,423, 14세기

A    Codex Ambrosianus(Mediolanensis)F. 128.11세기

M    Codex Mediceo-Laurentianus, plut. lxix, cod 10,15세기

W    Codex Vaticanus Gr. 984,주후. 1,354. 유세비우스(교회사 ⅲ.10)는 자서.(361-364)를 인용한다



위에서 나열한 사본외에도 비잔틴(Byzantine)시대에 만들어진 초록들도 볼 수 있다.

  이 사본들은 P(R)과 (A)MW의 두 개의 그룹으로 대략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여기서 R과A는 변화의 요소가 많기 때문에 괄호속에 집어 넣었다. 왜냐하면 A는 일반적으로 MW그룹에 속하며 R은 자주 이 그룹과 관련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구분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명의 현대 편집자들 중의 한사람이 니이제(Niese)의 저술은 주로 가장 오래된 사본인 P를 기초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한명인 네이버(Naber)는 A.M.W그룹의 사본을 더 신뢰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관한 모든 비평서들은 니이제의 공로에 감사를 표해야만 하며 그들은 니이제가 자신의 저서에서 모아놓은 근거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니이제가 결정적인 판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네이버(Naber)가 지적했듯이니이제는 하나의 잘못 기록된 사본의 가치를 다소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원본이나 원본과 가장 가까운 사본을 때때로 자신의 비평장치(Apparatus Criticus)로 사용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편집자들이 직면한 어려움들은 고대사본이 상대적으로 얼마 없다는 점과 일부 사본들의 불확실성 때문에 전체 원문에 영향을 주어 뜻이 변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해 고려해 볼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역자(1)의 추측으로 수정보충하는 범위가 상당하다. 그것은 곧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게 그들의 창작력을 사용케 했다. 니이제가  P사본의 가치에 대해 과대평가 하고 있다면,네이버(Naber)는 A.M.W사본을 너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책에 있는 원문은 P,R 또는A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것은 PRA의 결합은 좀처럼 결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MW는 분명히 PRA보다 열등하며 수정된 원문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MW가 특별히 P에  의해 지지된다면 MW의 명백성도 소홀히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채택한 원문은 니이제와 네이버의 연구에 기초를 두면서 사본에 대한 주의깊고 독자적인 연구의 결과이다.



 (b)「아피온 반박문」사본들「아피온 반박문」은 다음의 단 하나뿐인 불완전한 사본에 의존하고 있다. S Codex Laurentianus Plut. lxix. 22, 11세기 현존하는 다른 모든 사본들은 바로 이 사본의 복사본이다. 모든사본에 공통적으로 꽤 긴 부분〈아피.2권 5~9(52~113〉이 빠져있는이것에 대해서는 데오도릭(Theodoric)의 총독인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의 지시로 만들어진 오래된 라틴어 번역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ed. C. Boysen in the Vienna \’Corpus Scr-iptorum Eccles. Lat.\’vol.xxxvii.,1898).게다가 여기서 라틴어 번역가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헬라어로 복구시키는 작업은 힘든 일이다. 가치 있는 많은 인용구절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글에서 따왔다. 따라서 원문은 다양한 변모의 단계를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시대전부터 시작하여 L사본의 본문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니이제의 주장에 의하면 그 상대적인 가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쓸 수 있다.(1) 유세비우스 (2)라틴어 번역판(3)Cod. L. 또한 헬라원문(Basel, 1544)의 초판(edi-tio princeps)은 중요하며, 이것은 니이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본을  부분적으로  참고하고  있다.



 5. 헬라 원문의 최근 판(版)들



니이제(B. Niese) : Editio major(비평장치수록) 총 6권, 베를린, 1887 – 1889.

니이제(B. Niese) : Editio minor(본문만 수록됨), 6권, 베를린, 1889 – 1895

네이버(S. A. Naber)〈벡커판(Bekker\’s edition)에 근거한 본문으로 비평이 수록됨〉,총6권,튜브너 시리즈)Teubner Series),라이프찌히, 1888 – 1896



 6. 그밖의 다른 저술들



「자서전」에 대해서는 리차드 라쿠오이어(Richard Laqueur)의 「Der J\’dische Histoiker Flavios Josephus (einbiographischer Versuch aufneuer quellenkritiskher Grundlage)」, Giessen, 1920에서 불확실하지만 암시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아피온반박문(contra Apionem) 」에 대해서는 뮐러(J. G. Muller; Basel, 1877)의 풍부한 주석과 충실한 각주가 달린 프랑스 번역판 <Oeuvres completes de Flav. Josephe traduites en Fransais sous la direction de Theodore Reinach, tome vii. fasc. 1(Paris, 1902)>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 원문에서 추측해 삽입한 부분들은 괄호〈 〉안에 지적해놓았으며, 확실치 않은 사본의 기록은 괄호〔 〕안에 명백히 주석을 달아 넣었다. 헬라 원문의 왼쪽 여백에는 니이제가 해놓은구분을 참고하여 따랐으며 각장의 구분은 헬라어 원문과 영어 원문 양쪽 페이지에 모두 표시해 놓았다.

  본 역자(1)는 여기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많은 학자들의 저술들, 특히 니이제(Benedict Niese), 라이나흐(Theodore Rei-nach), 그리고 「자서전」과 「전쟁사」에서의 트레일(RobertTraill)의 저술을 계속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더 오래된 번역판인 휘스톤(William Whiston)판도 간혹 참고하였다.

 아울러 이 자리를 빌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태동」(Judaismand the Beginnings of Chrstaninity)의 편집자들과 출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923년 런던 유대인 대학(Jew\’s College)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책에서 서론 부분을 많이 참조하였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6. 그밖의 다른 저술들



「자서전」에 대해서는 리차드 라쿠오이어(Richard Laqueur)의 「Der J\’dische Histoiker Flavios Josephus (einbiographischer Versuch aufneuer quellenkritiskher Grundlage)」, Giessen, 1920에서 불확실하지만 암시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아피온반박문(contra Apionem) 」에 대해서는 뮐러(J. G. Muller; Basel, 1877)의 풍부한 주석과 충실한 각주가 달린 프랑스 번역판 <Oeuvres completes de Flav. Josephe traduites en Fransais sous la direction de Theodore Reinach, tome vii. fasc. 1(Paris, 1902)>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 원문에서 추측해 삽입한 부분들은 괄호〈 〉안에 지적해놓았으며, 확실치 않은 사본의 기록은 괄호〔 〕안에 명백히 주석을 달아 넣었다. 헬라 원문의 왼쪽 여백에는 니이제가 해놓은구분을 참고하여 따랐으며 각장의 구분은 헬라어 원문과 영어 원문 양쪽 페이지에 모두 표시해 놓았다.

  본 역자(1)는 여기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많은 학자들의 저술들, 특히 니이제(Benedict Niese), 라이나흐(Theodore Rei-nach), 그리고 「자서전」과 「전쟁사」에서의 트레일(RobertTraill)의 저술을 계속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더 오래된 번역판인 휘스톤(William Whiston)판도 간혹 참고하였다.

 아울러 이 자리를 빌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태동」(Judaismand the Beginnings of Chrstaninity)의 편집자들과 출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923년 런던 유대인 대학(Jew\’s College)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책에서 서론 부분을 많이 참조하였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6. 그밖의 다른 저술들



「자서전」에 대해서는 리차드 라쿠오이어(Richard Laqueur)의 「Der J\’dische Histoiker Flavios Josephus (einbiographischer Versuch aufneuer quellenkritiskher Grundlage)」, Giessen, 1920에서 불확실하지만 암시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아피온반박문(contra Apionem) 」에 대해서는 뮐러(J. G. Muller; Basel, 1877)의 풍부한 주석과 충실한 각주가 달린 프랑스 번역판 <Oeuvres completes de Flav. Josephe traduites en Fransais sous la direction de Theodore Reinach, tome vii. fasc. 1(Paris, 1902)>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 원문에서 추측해 삽입한 부분들은 괄호〈 〉안에 지적해놓았으며, 확실치 않은 사본의 기록은 괄호〔 〕안에 명백히 주석을 달아 넣었다. 헬라 원문의 왼쪽 여백에는 니이제가 해놓은구분을 참고하여 따랐으며 각장의 구분은 헬라어 원문과 영어 원문 양쪽 페이지에 모두 표시해 놓았다.

  본 역자(1)는 여기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많은 학자들의 저술들, 특히 니이제(Benedict Niese), 라이나흐(Theodore Rei-nach), 그리고 「자서전」과 「전쟁사」에서의 트레일(RobertTraill)의 저술을 계속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더 오래된 번역판인 휘스톤(William Whiston)판도 간혹 참고하였다.

 아울러 이 자리를 빌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태동」(Judaismand the Beginnings of Chrstaninity)의 편집자들과 출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923년 런던 유대인 대학(Jew\’s College)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책에서 서론 부분을 많이 참조하였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1. 나의 가문



  나의 가문은 족보를 추적하여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조상들이 제사장이었으므로 미천한 가문이 아니다. 민족들 마다각기  다른 근거에서 귀족성을 주장하는데 우리 민족은 제사장 집안을 명문으로 여긴다. 더구나 나의 조상들이 제사장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은 제사장 24반차 중에서 첫 번째 반차에[㈜ 여호야립(대상 24:7) 요세푸스의 고대. 7권 14:7(366)에 보면 제사장들의 조직이 24반차로 나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속하기 때문에 제사장 가문 중에서도 단연 탁월하고 특별히 구별되는 집안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어머니 쪽으로 보더라도나는 왕족의 피를 받았다. 나의 모친은 아사모나이우스(Asa-monaeus)의[㈜ 시조인 하쉬몬(Hashmon)의 이름을 따라 하스모네안(Hasmonaeans)혹은 마카비(Maccabees)라고 불리웠다.] 자손이었는데, 그 가계를 더듬어 보면 우리나라의 대제사장직과 왕직을 오랫동안 함께 공유했던 집안임을 알수 있다. 나는 나의 족보를 차례대로 기록하려고 한다. 나의 5대조부는 시몬(Simon)이며, 프셀루스(Psellus)[㈜ \”말더듬이\”]라고도 부른다. 5대 조부는 대제사장 힐카누스(Hyrcanus)와 동시대에 사셨는데힐카누스는 그의 부친 시몬(Simon)에게서 대제사장직을 이어받았고 힐카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 첫 번째 사람이었다. 5대 조부\’말더듬이\’시몬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한분이(요세푸스의 고조부 – 역자주)마티아스(Matthias)인데에파이우스(Ephaeus)라고도 불리운다. 그분은 대제사장 아사모나이우스(Asamonaeus)의 장자이며 대제사장 시몬(Simon)의 형인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의 딸과 결혼했다.[㈜ 마카비 1서 10:21]마티아스(Matthias)는 쿠루투스(Curutus)라고도[㈜ \”곱추\”]부르는 아들 마티아스(증조부-역자주)를 힐카누스(Hyrcanus)를 통치 원년에 얻었다. 아들 마티아스(쿠루투스)는 알렉산드라(Alexandra)재위 9년에 요셉(조부-역자주)을 낳았다. 요셉은 아르켈라우스 재위10년에 마티아스(나의 부친-역자주)를 낳았다. 그리고 나는 가이우스 가이사(Gaius Casear)가 황제가 된 해에 이 마티아스(Matthias)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세명의 아들을 낳았다 : 첫째 아들 힐카누스(Hyrcanus)는 베스파시안(Vespasian) 재위 4년에 태어났으며, 둘째인 유스투스는 7년에 태어났고, 그리고 막내 아그립바(Agrippa)가베스파시안 가이사 통치 제9년에 태어났다. 이와 같이 나는 내가 발견한 공문서안에 기록된 것을 본 그대로 인용하여 내 가족의 족보를 씀으로 나의 가문을 비방한 사람들에게 답변을 대신하겠다.



 2. 나의 교육



  나의 아버지 마티아스(Matthias)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유명하였고, 그의 곧은 성품으로 인해 더욱 존경을 받았는데 나라 최대의 도시 예루살렘(Jerusalem)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들축에 끼었다. 나는 나의 친형제 마티아스(Matthias)와 함께 부모님에게서 양육받았다. 나는 공부를 매우 잘했는데 특히 굉장한 기억력과 이해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더구나 내가 14살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사랑한다는 것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많은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고위 직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율법의 특이한 점들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구하려고 항상 나를 찾아왔다. 내가 16살이 되었을 때, 나는우리나라에 서로 갈라져 있는 여러 종파들을 체험해 볼 결심을했다. 그 종파들은 3개인데 내가 여러번 언급한 대로[㈜ 전쟁.2권8 : 2(119);고대.13권.5 : 9(171),18권1 : 2(11)을 보라] 그 첫 번째로는 바리새파, 두 번째로는 사두개파, 세 번째로는 에세네파이다. 나는 이들을 전부 조사해 본 후에야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된 훈련과 상당한 노력으로 세 종파가 요구하는 과정을 다 마쳤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얻은 경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누스(Banus)라는 사람이 사막에 살면서 나무에서 나온 것으로 만든 옷만[㈜ 아마도 나뭇잎사귀나 나무껍질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입고,[㈜ 저절로] 자란 것만 먹으며 그의 육체적인 순결을 위하여 밤이나 낮이나 자주 찬물로 목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원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와 함께 3년을살면서 나의 목적을 달성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와왔다. 19살이되자 나는 헬라인들이 스토아 학교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은 바리새파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시작하였다.



  3. 로마방문



  26세 때, 나는 로마로 여행을 떠나는 행운이 있었는데 그 원인을 지금 말하고자 한다. 벨릭스(Felix)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때, 나와 친분이 있던 뛰어난 제사장 몇 명이 작고 사소한 한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가이사(Caesar)에게[㈜ 네로] 호소하자, 벨릭스가 그들을 로마로 보냈다. 나는 그들을 구출할 몇가지 방법을 찾고자 애썼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화과 열매와 견과로[㈜ eijdwlovquta – 이방인들이 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를 피하기 위한 것임 :참).고전 8장] 연명하는 고통속에서도 신앙적 경건 훈련을 잃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바다의 위험을 겪으면서 나는 로마로 가게 되었다. 배가 아드리아 해(the Adriatid Sea)에서 가라 앉았을 때, 우리와 함께 있던 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헤엄을 쳐야했다. 동이 틀 무렵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는 구레네(Cyrene)의 배 한 척을 발견하였다. 나와 나 외에 80여 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구출하여 갑판으로 끌어올렸다. 이달리야 사람들이 푸테올리(Puteoli)라고 부르는 디카이아르키아(Dicaear-chia)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 나는 유대출신이며 네로(Nero)의 총애를 받는 연극 배우 알리투리우스(Aliturius)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가이사(Caesar)의 아내 포파이아(Poppaea)를 알게 되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제사장들이 석방되도록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간청했다. 이러한 대접 외에도 나는 폽파이아(Poppaea)로부터 많은 선물들을 받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4. 전쟁 전야(前夜)



  그 후 반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로마에 대항하는 폭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확대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소요의 선동자들을 진압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돌려 놓기 위해 설득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나는 그들에게 전쟁 상대국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들이 로마 사람들에 비해 군사력으로나, 재력으로나 훨씬 열등하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간청했다. 나는 또 그들에게 그들의 나라와 가족들과 그들 스스로를 명약관화한 위험에 노출시키는, 그토록 경솔하고 완전히 미친 짓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나는 이 전쟁의 끝이 우리 모두에게 최악의 재앙이 될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계획을 포기하라고 끊임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나의 수고는 애쓴 보람도 없이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는데이는 자포자기한 자들의 광기를 제어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5. 폭도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요세푸스



  나는 이런 경고를 계속적으로 반복할 경우 매국노라는 의심과 증오를 자초하게 되어 그들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성전의 안쪽 뜰로 피했다. 안토니아(Antonia)요새는[㈜ 성전의 북서쪽편에 우뚝 솟아 있으며 헤롯이 마크 안토니(Ma가 Antony)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행 21:34에 나오는 성(城)은 바로 이성을 지칭한다.] 이미 그들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므나헴(Menahem)과 강도떼의 우두머리들이 사형에 처해졌을 때[㈜ 참).전쟁.2권.17:8,9(433-448).므나헴(M두모드)dms 비정규 군대를 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반(反)로마당을 통솔하다가 적수들에 의해 피살당했다.] 나는 가까스로 성전에서 벗어났고, 한번 더 대제사장 및 지도급 바리새인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당황해서 무엇을 해야할지도 몰랐으며 반란을 저지할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한 명백하고도 급박한 위험 때문에 우리는 반란자들과 같은 의견을 가진 척 했지만, 단지 자기 방어 목적에서만 무기를 사용한다는 명분 때문에라도 만일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그가 나아간다면[㈜ 본문과 의미가 불확실하다. 아마도\”적들로 하여금 퇴각하도록 해주었다\”는 뜻일 것이다.로마 수비대는 예루살렘성에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 당하다가 반역에 의해 모두 살해당하였다:전쟁.2권.17:10(449)이하.] 움직이지 말고 적을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고 반란자들에게 충고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오래지 않아 케스티우스(Cestius)가[㈜ 수리아의 총독] 대군을 이끌고 와서 반란을 진압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6. 케스티우스의 패배 주후 66년



  정말로  케스티우스가 왔지만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말았다.[㈜ 전쟁.2권.18:9(499)] 케스티우스(Cestius)가 당한 망신은 우리 국가 전체에 대한 대재앙을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전쟁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그로부터 얻은 승리로 의기양양해져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여 마지막으로는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도 그들이 적대감을 품게 된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수리아(Syria)의 이웃 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 가운데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이유없이  공격하여,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들에게 살해된 자들은 로마 제국에 대해 봉기 또는 반란을 시도해 본 적이없었을 뿐 아니라 수리아((Syria)를 향한 적의를 품거나 악한계획을 세운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인공노할 가장가증스러운 죄악이 스구도볼리(Scythopolis)[㈜ (구약의)벧산(Bethshan)] 사람들에 의해자행되었다. 적대적인 외부의 유대인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자그들은 그들 가운데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동족들을 향하여 싸우게 하여 유대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강요했다. 그때 그들은 그들과 함께 거하는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침략자들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승리 후에 그들은 그들의 동료시민들이었고 우방이었던 유대인들에게 사의(謝意)를 표하는 대신에, 수천명 이상의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 같은 불행한일들은 다메섹(Damascus)에 살던 유대인들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아주 상세하게 \’유대전쟁사\’에 다루었다.[㈜ 전쟁.2권 18:3(466)이하 ,2권.20:2(259)이하.참)아피. 2권40(287).] 단지 내가 지금 그것들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로마제국과 유대인들의 전쟁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었음을 명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7. 갈릴리에서의 요세푸스의 임무



  그래서 우리가 이미 얘기하였던 케스티우스(mCestius)의 패배후에 예루살렘(Jerusalem)의 지도자들은 도둑들과 반란자들이 완전 중무장한 것을 보고, 자신들이 무장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적들에게 침략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후에 그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때 갈릴리(Galilee)전역이 로마제국에 아직 봉기를 든 것이 아니고 몇 지역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은 나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제사장인 요아자르(Joazar)와 유다(Judas)를 보냈다. 우리의 임무는 불만 세력들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 놓게 하고 그들로 국가의 선별된 훌륭한 전사들을 위해 보관하게끔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전사들은 미래의 우발적 사건들에 대처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뽑힌 자들로 \’D임없이 무장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야하는 자들이었지만, 로마가 취할 행동을 지켜보면서 기다려야만 했다.



 8. 갈릴리의 상황



  그리하여 내가 이러한 임무를 띠고 갈릴리로 들어갔을 때, 갈릴리에 거주하는 세포리스(Sepphoris)의 주민들이 그들의 고향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적잖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세포리스인들이 로마제국과 함께 우호관계를 맺고, 수리아의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갈릴리 거주 세포리스인들이 갈릴리 사람들에 의해 약탈을 당할 지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포리스 주민들을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갖도록 갈릴리 군중들을 설득했다. 그리고나는 베니게의 한 성읍인 도라(Dora)에 있는 케스티우스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그들의 동료들과 그들이 어느때든지 연락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디베랴(Tiberia) 주민들이 전쟁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9. 디베랴의 세 당파



  이 도시에는 세 개의 당파가 있었다. 그 첫 번째 당파는 명망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졌으며 율리우스 카펠루스(Julius Cap-ellus)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지금 그와 그의 동료들, 미아루스(Maiarus)의 아들인 헤롯(Herod)과 가말루스(Gamalus) 의아들인 헤롯(Herod), 그리고 콤프수스(Compsus)의 아들 콤프수스(Compsus)〔나는 그의 형제 크리프스(Cripus)를 포함시키지 않는데, 그는 전에는 대왕(great king)[㈜ 헤롯 아그립바 Ⅰ세.] 수하에 있었지만,요단강 너머의 그의 영지에 가 있어서 디베랴에 없었기 때문이다〕는 그 당시에 열심히 로마와 왕에게[㈜ 아그립바 Ⅱ세 참). 자서.17(88),54(279), 65(336-367), 70(390-393),  74(410)] 계속 충성을 바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유스투스(Justus)의 사악한 영향 외에도 그의 본성상 광기가 번뜩이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 당파는 대부분이 비천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졌고, 그들은 전쟁을치룰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당파의 우두머리이며,피스투스(Pistus)의 아들인 유스투스(Justus)는 비록 그가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체 할지라도 정부의 교체가 그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반라에 대다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군중 가운데로 들어가 군중을 설득시키려고애썼다. \”그 도시 디베랴(Tiberia)는 갈릴리(Galilee)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를 거설한 분봉왕 헤롯(Herod)이후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포리스(Sepphoris)시가 디베랴(Tiberia)시로 종속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아그립바(Agippa) Ⅰ 세 치하에서도 이 도시는 탁월함을 잃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벨릭스(Felix)가 부임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에게 불행하게도 우리가 네로황제의 아그립바(Agippa) Ⅱ세에게 하사되는 선물로 마련되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세포리스(Sepphoris)는 갈릴리(Galilee)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국고와 공문서들이 우리들에게서부터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말들을 끝내자, 수많은 군중들이 왕 아그립바(Agr-ippa)의 반대편에 서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이 봉기하도록 선동하기 위하여 더욱 더 소리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을 할 절호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동맹 갈릴리 사람들과 합세합시다(갈리리 사람들은 로마에게 복종하는 세포리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증오를 표시하고 있으므로 우리를 기쁘게 원조할 것이며. 우리들도 기꺼이 그들의 도움을 요구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포리스 시를 징벌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합칩시다.\” 그의 열변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비록 그의 반대편 사람들이 무엇이 그들(군중)의이익에 보탬이 될 것이냐고 충고를 할지라도, 그의 열변은 그의반대편 사람들도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대단한 달변가요 선동자였던 것이다. 그는 헬라 문화에도 정통하여, 그 재능을 사용하여 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이 사건들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의 타락한 심성과 우리들의 멸망의 거의 전적인 원인이 된 그와 그의 형제에 대해서는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증거가 첨가될 것이다.

  그래서 유스투스(Justus)가 그의 설득력으로 디베랴의 시민들에게 무기를 들게 한 후, 아니 수많은 시민들을 반 강제로 무기를 들게 한 후에, 그는 그들을 이끌고 가서 스구도볼리(Scy-thopolis) 지역에 속하며 디베랴 국경에 위치한 가다라(Gad-ara)와 힙포스(Hippos) 마을들을 불질러 소멸시켰다.



10. 기스칼라의 상황



  디벨I 시가 처한 상황이 이와 같았던 반면에 기스칼라(Gis-dhala)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레위(Levi)의 아들 요한(Joh-n)은 로마에 대해 봉기를 일으켜 보려는 약간의 시민들을 보고 그들을 자제케 하는 한편 로마에 계속 충성을 바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을지라도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기스칼라에 인접한 두로사람(Tyrians)들과 함께 소가나(Sogana), 가바라(Gabara),가다라(Gadara)의 주변 사람들이 대 병력을 이끌고 몰려와, 기스칼라를 강제로 점령하여 불살라 버렸고 그곳을 완벽하게 파괴시킨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요한(John)은 너무 격분하여 그의 부하들을 모두 무장시켜 앞에서 언급된 사람들과 전쟁을 치렀고 그리고 기스칼라(Gischala)를전보다 더 훌륭히 재건시켰으며, 장래의 안전을 위해 벽을 쌓아도시를 요새화 했다.



 11. 가말라와 야키무스의 아들 빌립



  그러나 가말라(Gamala)가 로마제국에게 충성하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 아그립바왕 밑에서 가말라(Gam-ala)총독을 맡고 있던 야키무스(Jacimus)의 아들 빌립(Philip)은 예루살렘 왕궁이 포위 되었을 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리하여 그는 그곳에서 간신히 달아났으나 므나헴(Menahem)과그와 함께 있었던 도적들에 의해 잡혀 목숨을 잃을 또 다른 위험속에 처하게 되었다.[㈜ 참). 전쟁. 2권 20:1 (556)이하:17:8 (433)이하.] 그러나 마침 예루살렘에 있었던 그의 몇몇 바벨론 친척들이 그 도적들의 살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이렇게 해서 빌립(Philip)은 4일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5일째 되던 날 그 자신이 발각되지 않도록 가발로변장하여 달아났다. 그리고 그가 관할했던 마을중 가말라(Gam-ala)의 요새 변경에 위치해 있던 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에게 소식을 보내어서 자기에게 오라고명령했다. 하느님께서 그의 계획을 방해하셨으나 그것은 그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 얼마후 그는 열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아그립바(Agrippa)Ⅱ세와 버니게(Bernice)에게 편지를 썼다.그리고 그의 부하인 자유민을 시켜서 그것들을 그때 당시 왕궁의 행정관이었던 바루스(Varus)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때 바루스는 왕과 그의 누이가 베리투스(Berytus)로 케스티우스를 만날 목적으로 가 있는 동안 모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바루스(Varus)는 빌립(Philip)의 편지들을 받고 그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만약 빌립이 나타난다면 자신은 왕과 그이 누이에게 더이상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불안해 하였다. 따라서 바루스는 빌립의 편지를 가져온 자를 대중들 앞에 세워  그가 빌립(Philip)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로마를 대항해 싸우고 있다고 허위 진술하고 편지를 위조했다는 죄목으로 비난하고 죽여버렸다. 한편 빌립(Philip)은 부하인 자유민이 돌아오지 않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부하를 서신과 함께 보내어 앞서 파송된 부하가 왜 그렇게 늦는지 알아보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 보도록 하였다. 바루스(Varus)는 이 두 번째 사신도 역시터무니 없는 구실로 정죄하여 살해하였다. 그는 가이사랴(Cae-sarea)에 살고 있는 수리아인들로 인하여 우쭐해 하고 있었으며, 지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수리아이들은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이 범한 죄에 의해서 로마인들에게 살해당할 것이며, 왕의 혈통을 지닌 바루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왔던 것이다. 바루스는 레바논 지역을 다스리던 소에무스(Soemus)의 자손으로서 왕족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왕이 되겠다는 야심에 들뜬 바루스는 그 편지들을 간직하였고 어느 한 사람도 탈출하여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리지 못하도록 모든 통행을 감시함으로써 왕이 그 서신들을 접할 수 없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다. 게다가 그는 가이사랴(Caesarea)의 수리아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또한 그는 바타나이아(Baanaea)의 드라고닛 사람들(Trachonites0과 함께 합세하기로 마음먹고 엑바타나(Ecbatana)에[㈜ 갈릴리 해번의 동쪽 고원지방, 즉 바타나이아〔Batanaea-바산(Bashan)〕와 드라곤, 즉 드라고닛(Trachon or Tachontitis)의 화산지역은 아랍 침략자들에게 공격당하기 쉬운 지역이었다. 따라서 대헤롯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직통 노상에 놓인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바산 지방에다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Philip)의 조부인 사마리스(Zamaris)의 통솔하에 바벨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고대.17권,2:1(23)이하.엑바타나(Ecbatana)는 메대(Media)에 있는 성읍이 아니고 이 지방에 세워진 여러 요새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다. 전쟁.2권 18:6(481)이하에는 위에 언급된 내용에 관한 다른 견해가 있음을 보게된다.] 있는 바벨론 유대인들(Babylonian Jews)-이러한 이름으로 불리워졌었다 -을 습격하기로 계획했다. 따라서 그는 훌륭한 인품을 갖춘 가이살ICaearea)의 12명의 유대인들을 불러 그들이 엑바타나(Ecbatana)로 가도록 명령했다.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의 동족들에게 \”바루스(Varus)가 듣기로는 당신들이 왕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 하지만, 그러한 보고서를 믿지 않고 그는 우리를 당신들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설득시키려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낸 사실이 당신들에 관한 보고서들을 올린 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징표인 것입니다\”라고 말하도록 시켰다 바루스(Varus).는 또한 그들을 향한 이러한 모함이 사실이 아님을 스스로 변호할 수있는 유능한 사람 70여명을 뽑아서 자신에게 보낼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그 12명의 사신들은(Ecbatana)에 있는 그들의 동족들에게 갔지만 반역의 기미를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들은 엑바타나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무죄를 변호할 70명을 파견할 것을 권고했다. 자신들이 처할 운명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은 이 유대인들은 전갈을 가지고 온 12명의 사절과 함께 70명을 가이사랴에게 내려 보냈다.



〔아그립바의 부왕(副王)  바루스〕



  그런데 바루스(Varus)는 왕의 군대를 데리고 나가, 그들을 12명의 사절들과 함께 모두 살해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엑바타나(Ecbatana)의 유대인들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대를 결성했다.그러나 그 살해당한 70명들 중에 한 사람이 간신히 도먕쳐나와 유대인들에게 바루스의 군대가 쳐들어 옴을 알렸다. 그 유대인 동족들은 무기를 들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그들 마을의 온갖 좋은 물건들과 10,000 마리의 양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가말라(Gamala) 요새로 피신했다. 빌립(Philip)의 요새로왔다.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 군중들은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빌립이 정권을 되찾아 바루스(Varus)와 가이사랴I(Cae-sarea)의 수리아인들을 정복할 원정대를 만들기를 갈망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왕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빌립(Philip)은 그들의 열정을 저지하면서 왕이 그들에게 베풀어준 은혜와 로마군대가 얼마나 강한가를 생가가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로마군들과의 전쟁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wu다 줄 수 없다고 진정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는 그들과 함께 그같은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왕은 자식들과 아내들을 포함하여 10,000명이나 되는 가이사랴(Casearea)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바루스의 계획을 알아 차리고, 우리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대로[㈜ 참).전쟁.2권.18:6(483)이곳에 보면 바루스(Varus)의 면직된 사실은 언급되어있으나 그 후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더 자세한 상황을 알려면 자서.36(179)이하를 보라] 에퀴쿨루스 모디우스(Equiculus Modius)를 불러 그를 바루스의 후임자로 임명하여 보냈다. 빌립이 가말라요새와 인근지역에 머무름에 따라 그들은 계속 로마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12. 디베랴의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고 무질서를 바로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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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온 반박문 자서전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자서전(Vita)〕


     「자서전」은 ‘유대고대사'(Antiquities)의 부록으로 ‘유대고대사’의 재판 혹은 후대판에 첨가되어져 있었으며 초판에는 없었다. 「자서전」은「유대고대사」20권의 결론 단락과 자연스럽게이어지고 있다. 「유대고대사」는 두가지 결론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작가의 글에는 〔고대.20권 12:1(259)〕 “여기서 나는 나의고대 연구를 끝내려 한다”라고 말한 후에 약간의 요약과 스스로를 과시하는 글을 적은 뒤〔고대.20권 12 1(266)〕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한 말에 대해 계속해서 논박을 하든 입증을 하든 내가 내 가족과 내 경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확한 날짜를 밝히고 있다〔고대.20권 12:1(267)〕”그러나 나는 고대사를 끝마치려 합니다. 도미티안(Domitian)13년그리고 그의 나이 56세 되던 해” 그때가 주후 93-94이다 그렇지만, 앞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자서전」은 100년이 지나야출판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두가지의 결론을 내릴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오늘날 저서처럼 고대사와 자서전을 나누어 출판하기 위해 서론에서 순서를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원래 결말을 그대로 두되 그앞에 다음권인 「자서전」의 결론을 붙여 놓으면서 새로운 사건들을 전개해 나갔다. 이 자서전이 첨가되게 된 사건은 디벨II 출신의 유스투스가 유대전쟁사를 출간하면서 요세푸스가 그의 고향 디벨I의 주민을 선동하여 로마군에 반역을 하게 했다고 요세푸스를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요세푸스를 비난하는 유스투스의 비난은 요세푸스를 위험에 빠뜨리기에 적합했고 그것은 요세푸스의 저술을 판매하는 것뿐만아니라, 그의 튼튼한 로마에서의 위치 또한 위협했다. 그들은 당장에 요세푸스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서전」에서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것은 완벽한 자서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대부분은 요타파타(Jotapata)가 적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작가가 갈릴리의 총 사령관으로 제직했던 반년동안의 방어행위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팔레스틴에서 그의 젏은 시절과 나이들어 로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서론과 결론으로 짧게 적고 있을 뿐이다. 이 저술에서 작가는 사건이나 태도에 있어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으며 자신의 저술에 대한 만족감을 보인다. 그가 그렇게 자랑했지만 그의 약점은 그의 문체의 미숙함에 있다. 최근 이글의 결점을 설명하는데 크게 공헌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라쿠오이어(Laquer)가 주장하는 이론으로 그는 계속해서 「자서전」의 골자가64세의 노년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30세 정도의 매우 이른 나이에 저술한 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서전」은 요타파타가 포위당하기 전에 예루살렘을 굴복시키기 위해 갈릴리에서 징집한 사건에 대한 요세푸스의 행동을 적은공식문서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 「자서전」은 기스칼라 출신의 요한과 다른 사람들이 요세푸스를 폭군()으로 몰면서이 일에 책임을 요세푸스에게 전가한 것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그가 갈릴리에서 통치했던 부분과,「자서전」과 「유대전쟁사」에서 겹쳐져 나타났던 약간의 사건을 비고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라쿠오이어는 「자서전」이 더 오래되고 믿을 만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있다. 이 비문학적인 보고서는 그 당시에는 별 유용성 없이 만들어졌으나 후년에 가서 유스투스의 공격에 대항하여 쓸모있게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약간 교정되어 자서전 속에서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이론이다. 요세푸스가 갈릴리 총사령관 때의 자신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능한 이야기라 생각된다.

      만약 라쿠오이어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요세푸스가 로마에서 그이 문학 동인들의 영향을 받기 전에 그의 글쓰는 양식에 대한 흥미진진한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서전」이 나중에 쓰여졌다면 문학적인 마무리가 부족한 것은 이전과는 달리 〔참).아피. 1권950)〕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급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유대고대사」의 마지막권과 「자서전」이 전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연결점들 때문에 옳지 못하다. 따라서 「자서전」은 요세푸스가 젊었을 때 아람어로 쓴 일종의 보고서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정도로 라쿠오이어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피온 반박문 (Contra Apionem)〕


      아피온 반박문은 「자서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저술로 요세푸스의 가장 뛰어난 저서이다. 「아피온반박문」은 훌륭히 설계되어진 계획과 두드러진 무학적 재능 헬라의 철학과 시(詩)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과 그의 조국 유대의 종교에 대한 열렬하고 진실한 갈망이 잘 나타난 작가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아피온반박문」이라는 제목은 작가가 붙인 것이 아니며 그리 기분좋은 제목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피온(Apion)은 하나의 이스라엘의 적들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오래된 제목으로는 “고대 유대인들에 대하여”(이것은 책의 뜻을 충분히 나타내주는 분명한 제목은 아닌 것같다)나 “헬라인들에 대한 반박”등이 있다. 「아피온 반박문」은「유대고대사」의 비난에 대한 답변으로, 또한 그 당시 유행하던 편견들에 대한 반박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대 유대인들의 반란과 함께 유대주의에 대한 변증을 포함하고 있다.

      1세기의 반(反)유대주의 (Anti-Semitism)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헬라인들의 극단적인 고대성에 도전하여 유대역사에 관해 그들이 지켰던 침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조국 유대의  고대성에 대한 분명한 정리를 보여주며 반 유대주의자들이 불합리하게 꾸며낸 이야기와 악의에 찬 비난에 대해 훌륭하게 반박하고 있으며 율법을 주신자와 그율법에 대한 열렬한 방어와 함께 헬라인들의 그 당시 내세관과 대조를 이루는 하느님에 대한 그의 수준높은 사고를 보여주고 있으며 잃어버린 글 속에 있는 수 많은 인용문들은 이 저작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4. 헬라어 원문을 위한 사본들과 그외의 고대의 권위서들


     (a) 「자서전」사본들

    P    Codex Palatinus(Vaticanus) Graecus 14,9세기 혹은 10세기

    R    Codex Regius(Parisinus) Gr.1,423, 14세기

    A    Codex Ambrosianus(Mediolanensis)F. 128.11세기

    M    Codex Mediceo-Laurentianus, plut. lxix, cod 10,15세기

    W    Codex Vaticanus Gr. 984,주후. 1,354. 유세비우스(교회사 ⅲ.10)는 자서.(361-364)를 인용한다


    위에서 나열한 사본외에도 비잔틴(Byzantine)시대에 만들어진 초록들도 볼 수 있다.

      이 사본들은 P(R)과 (A)MW의 두 개의 그룹으로 대략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여기서 R과A는 변화의 요소가 많기 때문에 괄호속에 집어 넣었다. 왜냐하면 A는 일반적으로 MW그룹에 속하며 R은 자주 이 그룹과 관련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구분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명의 현대 편집자들 중의 한사람이 니이제(Niese)의 저술은 주로 가장 오래된 사본인 P를 기초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한명인 네이버(Naber)는 A.M.W그룹의 사본을 더 신뢰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관한 모든 비평서들은 니이제의 공로에 감사를 표해야만 하며 그들은 니이제가 자신의 저서에서 모아놓은 근거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니이제가 결정적인 판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네이버(Naber)가 지적했듯이니이제는 하나의 잘못 기록된 사본의 가치를 다소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원본이나 원본과 가장 가까운 사본을 때때로 자신의 비평장치(Apparatus Criticus)로 사용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편집자들이 직면한 어려움들은 고대사본이 상대적으로 얼마 없다는 점과 일부 사본들의 불확실성 때문에 전체 원문에 영향을 주어 뜻이 변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해 고려해 볼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역자(1)의 추측으로 수정보충하는 범위가 상당하다. 그것은 곧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게 그들의 창작력을 사용케 했다. 니이제가  P사본의 가치에 대해 과대평가 하고 있다면,네이버(Naber)는 A.M.W사본을 너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책에 있는 원문은 P,R 또는A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것은 PRA의 결합은 좀처럼 결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MW는 분명히 PRA보다 열등하며 수정된 원문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MW가 특별히 P에  의해 지지된다면 MW의 명백성도 소홀히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채택한 원문은 니이제와 네이버의 연구에 기초를 두면서 사본에 대한 주의깊고 독자적인 연구의 결과이다.


     (b)「아피온 반박문」사본들「아피온 반박문」은 다음의 단 하나뿐인 불완전한 사본에 의존하고 있다. S Codex Laurentianus Plut. lxix. 22, 11세기 현존하는 다른 모든 사본들은 바로 이 사본의 복사본이다. 모든사본에 공통적으로 꽤 긴 부분〈아피.2권 5~9(52~113〉이 빠져있는이것에 대해서는 데오도릭(Theodoric)의 총독인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의 지시로 만들어진 오래된 라틴어 번역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ed. C. Boysen in the Vienna ‘Corpus Scr-iptorum Eccles. Lat.’vol.xxxvii.,1898).게다가 여기서 라틴어 번역가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헬라어로 복구시키는 작업은 힘든 일이다. 가치 있는 많은 인용구절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글에서 따왔다. 따라서 원문은 다양한 변모의 단계를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시대전부터 시작하여 L사본의 본문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니이제의 주장에 의하면 그 상대적인 가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쓸 수 있다.(1) 유세비우스 (2)라틴어 번역판(3)Cod. L. 또한 헬라원문(Basel, 1544)의 초판(edi-tio princeps)은 중요하며, 이것은 니이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본을  부분적으로  참고하고  있다.


     5. 헬라 원문의 최근 판(版)들


    니이제(B. Niese) : Editio major(비평장치수록) 총 6권, 베를린, 1887 – 1889.

    니이제(B. Niese) : Editio minor(본문만 수록됨), 6권, 베를린, 1889 – 1895

    네이버(S. A. Naber)〈벡커판(Bekker’s edition)에 근거한 본문으로 비평이 수록됨〉,총6권,튜브너 시리즈)Teubner Series),라이프찌히, 1888 – 1896


     6. 그밖의 다른 저술들


    「자서전」에 대해서는 리차드 라쿠오이어(Richard Laqueur)의 「Der J’dische Histoiker Flavios Josephus (einbiographischer Versuch aufneuer quellenkritiskher Grundlage)」, Giessen, 1920에서 불확실하지만 암시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아피온반박문(contra Apionem) 」에 대해서는 뮐러(J. G. Muller; Basel, 1877)의 풍부한 주석과 충실한 각주가 달린 프랑스 번역판 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 원문에서 추측해 삽입한 부분들은 괄호〈 〉안에 지적해놓았으며, 확실치 않은 사본의 기록은 괄호〔 〕안에 명백히 주석을 달아 넣었다. 헬라 원문의 왼쪽 여백에는 니이제가 해놓은구분을 참고하여 따랐으며 각장의 구분은 헬라어 원문과 영어 원문 양쪽 페이지에 모두 표시해 놓았다.

      본 역자(1)는 여기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많은 학자들의 저술들, 특히 니이제(Benedict Niese), 라이나흐(Theodore Rei-nach), 그리고 「자서전」과 「전쟁사」에서의 트레일(RobertTraill)의 저술을 계속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더 오래된 번역판인 휘스톤(William Whiston)판도 간혹 참고하였다.

     아울러 이 자리를 빌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태동」(Judaismand the Beginnings of Chrstaninity)의 편집자들과 출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923년 런던 유대인 대학(Jew’s College)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책에서 서론 부분을 많이 참조하였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6. 그밖의 다른 저술들


    「자서전」에 대해서는 리차드 라쿠오이어(Richard Laqueur)의 「Der J’dische Histoiker Flavios Josephus (einbiographischer Versuch aufneuer quellenkritiskher Grundlage)」, Giessen, 1920에서 불확실하지만 암시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아피온반박문(contra Apionem) 」에 대해서는 뮐러(J. G. Muller; Basel, 1877)의 풍부한 주석과 충실한 각주가 달린 프랑스 번역판 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 원문에서 추측해 삽입한 부분들은 괄호〈 〉안에 지적해놓았으며, 확실치 않은 사본의 기록은 괄호〔 〕안에 명백히 주석을 달아 넣었다. 헬라 원문의 왼쪽 여백에는 니이제가 해놓은구분을 참고하여 따랐으며 각장의 구분은 헬라어 원문과 영어 원문 양쪽 페이지에 모두 표시해 놓았다.

      본 역자(1)는 여기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많은 학자들의 저술들, 특히 니이제(Benedict Niese), 라이나흐(Theodore Rei-nach), 그리고 「자서전」과 「전쟁사」에서의 트레일(RobertTraill)의 저술을 계속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더 오래된 번역판인 휘스톤(William Whiston)판도 간혹 참고하였다.

     아울러 이 자리를 빌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태동」(Judaismand the Beginnings of Chrstaninity)의 편집자들과 출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923년 런던 유대인 대학(Jew’s College)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책에서 서론 부분을 많이 참조하였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6. 그밖의 다른 저술들


    「자서전」에 대해서는 리차드 라쿠오이어(Richard Laqueur)의 「Der J’dische Histoiker Flavios Josephus (einbiographischer Versuch aufneuer quellenkritiskher Grundlage)」, Giessen, 1920에서 불확실하지만 암시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아피온반박문(contra Apionem) 」에 대해서는 뮐러(J. G. Muller; Basel, 1877)의 풍부한 주석과 충실한 각주가 달린 프랑스 번역판 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 원문에서 추측해 삽입한 부분들은 괄호〈 〉안에 지적해놓았으며, 확실치 않은 사본의 기록은 괄호〔 〕안에 명백히 주석을 달아 넣었다. 헬라 원문의 왼쪽 여백에는 니이제가 해놓은구분을 참고하여 따랐으며 각장의 구분은 헬라어 원문과 영어 원문 양쪽 페이지에 모두 표시해 놓았다.

      본 역자(1)는 여기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많은 학자들의 저술들, 특히 니이제(Benedict Niese), 라이나흐(Theodore Rei-nach), 그리고 「자서전」과 「전쟁사」에서의 트레일(RobertTraill)의 저술을 계속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더 오래된 번역판인 휘스톤(William Whiston)판도 간혹 참고하였다.

     아울러 이 자리를 빌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태동」(Judaismand the Beginnings of Chrstaninity)의 편집자들과 출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923년 런던 유대인 대학(Jew’s College)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책에서 서론 부분을 많이 참조하였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1. 나의 가문


      나의 가문은 족보를 추적하여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조상들이 제사장이었으므로 미천한 가문이 아니다. 민족들 마다각기  다른 근거에서 귀족성을 주장하는데 우리 민족은 제사장 집안을 명문으로 여긴다. 더구나 나의 조상들이 제사장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은 제사장 24반차 중에서 첫 번째 반차에[㈜ 여호야립(대상 24:7) 요세푸스의 고대. 7권 14:7(366)에 보면 제사장들의 조직이 24반차로 나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속하기 때문에 제사장 가문 중에서도 단연 탁월하고 특별히 구별되는 집안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어머니 쪽으로 보더라도나는 왕족의 피를 받았다. 나의 모친은 아사모나이우스(Asa-monaeus)의[㈜ 시조인 하쉬몬(Hashmon)의 이름을 따라 하스모네안(Hasmonaeans)혹은 마카비(Maccabees)라고 불리웠다.] 자손이었는데, 그 가계를 더듬어 보면 우리나라의 대제사장직과 왕직을 오랫동안 함께 공유했던 집안임을 알수 있다. 나는 나의 족보를 차례대로 기록하려고 한다. 나의 5대조부는 시몬(Simon)이며, 프셀루스(Psellus)[㈜ “말더듬이”]라고도 부른다. 5대 조부는 대제사장 힐카누스(Hyrcanus)와 동시대에 사셨는데힐카누스는 그의 부친 시몬(Simon)에게서 대제사장직을 이어받았고 힐카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 첫 번째 사람이었다. 5대 조부’말더듬이’시몬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한분이(요세푸스의 고조부 – 역자주)마티아스(Matthias)인데에파이우스(Ephaeus)라고도 불리운다. 그분은 대제사장 아사모나이우스(Asamonaeus)의 장자이며 대제사장 시몬(Simon)의 형인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의 딸과 결혼했다.[㈜ 마카비 1서 10:21]마티아스(Matthias)는 쿠루투스(Curutus)라고도[㈜ “곱추”]부르는 아들 마티아스(증조부-역자주)를 힐카누스(Hyrcanus)를 통치 원년에 얻었다. 아들 마티아스(쿠루투스)는 알렉산드라(Alexandra)재위 9년에 요셉(조부-역자주)을 낳았다. 요셉은 아르켈라우스 재위10년에 마티아스(나의 부친-역자주)를 낳았다. 그리고 나는 가이우스 가이사(Gaius Casear)가 황제가 된 해에 이 마티아스(Matthias)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세명의 아들을 낳았다 : 첫째 아들 힐카누스(Hyrcanus)는 베스파시안(Vespasian) 재위 4년에 태어났으며, 둘째인 유스투스는 7년에 태어났고, 그리고 막내 아그립바(Agrippa)가베스파시안 가이사 통치 제9년에 태어났다. 이와 같이 나는 내가 발견한 공문서안에 기록된 것을 본 그대로 인용하여 내 가족의 족보를 씀으로 나의 가문을 비방한 사람들에게 답변을 대신하겠다.


     2. 나의 교육


      나의 아버지 마티아스(Matthias)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유명하였고, 그의 곧은 성품으로 인해 더욱 존경을 받았는데 나라 최대의 도시 예루살렘(Jerusalem)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들축에 끼었다. 나는 나의 친형제 마티아스(Matthias)와 함께 부모님에게서 양육받았다. 나는 공부를 매우 잘했는데 특히 굉장한 기억력과 이해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더구나 내가 14살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사랑한다는 것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많은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고위 직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율법의 특이한 점들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구하려고 항상 나를 찾아왔다. 내가 16살이 되었을 때, 나는우리나라에 서로 갈라져 있는 여러 종파들을 체험해 볼 결심을했다. 그 종파들은 3개인데 내가 여러번 언급한 대로[㈜ 전쟁.2권8 : 2(119);고대.13권.5 : 9(171),18권1 : 2(11)을 보라] 그 첫 번째로는 바리새파, 두 번째로는 사두개파, 세 번째로는 에세네파이다. 나는 이들을 전부 조사해 본 후에야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된 훈련과 상당한 노력으로 세 종파가 요구하는 과정을 다 마쳤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얻은 경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누스(Banus)라는 사람이 사막에 살면서 나무에서 나온 것으로 만든 옷만[㈜ 아마도 나뭇잎사귀나 나무껍질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입고,[㈜ 저절로] 자란 것만 먹으며 그의 육체적인 순결을 위하여 밤이나 낮이나 자주 찬물로 목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원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와 함께 3년을살면서 나의 목적을 달성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와왔다. 19살이되자 나는 헬라인들이 스토아 학교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은 바리새파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시작하였다.


      3. 로마방문


      26세 때, 나는 로마로 여행을 떠나는 행운이 있었는데 그 원인을 지금 말하고자 한다. 벨릭스(Felix)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때, 나와 친분이 있던 뛰어난 제사장 몇 명이 작고 사소한 한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가이사(Caesar)에게[㈜ 네로] 호소하자, 벨릭스가 그들을 로마로 보냈다. 나는 그들을 구출할 몇가지 방법을 찾고자 애썼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화과 열매와 견과로[㈜ eijdwlovquta – 이방인들이 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를 피하기 위한 것임 :참).고전 8장] 연명하는 고통속에서도 신앙적 경건 훈련을 잃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바다의 위험을 겪으면서 나는 로마로 가게 되었다. 배가 아드리아 해(the Adriatid Sea)에서 가라 앉았을 때, 우리와 함께 있던 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헤엄을 쳐야했다. 동이 틀 무렵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는 구레네(Cyrene)의 배 한 척을 발견하였다. 나와 나 외에 80여 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구출하여 갑판으로 끌어올렸다. 이달리야 사람들이 푸테올리(Puteoli)라고 부르는 디카이아르키아(Dicaear-chia)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 나는 유대출신이며 네로(Nero)의 총애를 받는 연극 배우 알리투리우스(Aliturius)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가이사(Caesar)의 아내 포파이아(Poppaea)를 알게 되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제사장들이 석방되도록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간청했다. 이러한 대접 외에도 나는 폽파이아(Poppaea)로부터 많은 선물들을 받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4. 전쟁 전야(前夜)


      그 후 반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로마에 대항하는 폭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확대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소요의 선동자들을 진압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돌려 놓기 위해 설득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나는 그들에게 전쟁 상대국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들이 로마 사람들에 비해 군사력으로나, 재력으로나 훨씬 열등하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간청했다. 나는 또 그들에게 그들의 나라와 가족들과 그들 스스로를 명약관화한 위험에 노출시키는, 그토록 경솔하고 완전히 미친 짓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나는 이 전쟁의 끝이 우리 모두에게 최악의 재앙이 될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계획을 포기하라고 끊임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나의 수고는 애쓴 보람도 없이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는데이는 자포자기한 자들의 광기를 제어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5. 폭도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요세푸스


      나는 이런 경고를 계속적으로 반복할 경우 매국노라는 의심과 증오를 자초하게 되어 그들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성전의 안쪽 뜰로 피했다. 안토니아(Antonia)요새는[㈜ 성전의 북서쪽편에 우뚝 솟아 있으며 헤롯이 마크 안토니(Ma가 Antony)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행 21:34에 나오는 성(城)은 바로 이성을 지칭한다.] 이미 그들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므나헴(Menahem)과 강도떼의 우두머리들이 사형에 처해졌을 때[㈜ 참).전쟁.2권.17:8,9(433-448).므나헴(M두모드)dms 비정규 군대를 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반(反)로마당을 통솔하다가 적수들에 의해 피살당했다.] 나는 가까스로 성전에서 벗어났고, 한번 더 대제사장 및 지도급 바리새인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당황해서 무엇을 해야할지도 몰랐으며 반란을 저지할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한 명백하고도 급박한 위험 때문에 우리는 반란자들과 같은 의견을 가진 척 했지만, 단지 자기 방어 목적에서만 무기를 사용한다는 명분 때문에라도 만일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그가 나아간다면[㈜ 본문과 의미가 불확실하다. 아마도”적들로 하여금 퇴각하도록 해주었다”는 뜻일 것이다.로마 수비대는 예루살렘성에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 당하다가 반역에 의해 모두 살해당하였다:전쟁.2권.17:10(449)이하.] 움직이지 말고 적을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고 반란자들에게 충고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오래지 않아 케스티우스(Cestius)가[㈜ 수리아의 총독] 대군을 이끌고 와서 반란을 진압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6. 케스티우스의 패배 주후 66년


      정말로  케스티우스가 왔지만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말았다.[㈜ 전쟁.2권.18:9(499)] 케스티우스(Cestius)가 당한 망신은 우리 국가 전체에 대한 대재앙을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전쟁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그로부터 얻은 승리로 의기양양해져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여 마지막으로는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도 그들이 적대감을 품게 된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수리아(Syria)의 이웃 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 가운데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이유없이  공격하여,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들에게 살해된 자들은 로마 제국에 대해 봉기 또는 반란을 시도해 본 적이없었을 뿐 아니라 수리아((Syria)를 향한 적의를 품거나 악한계획을 세운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인공노할 가장가증스러운 죄악이 스구도볼리(Scythopolis)[㈜ (구약의)벧산(Bethshan)] 사람들에 의해자행되었다. 적대적인 외부의 유대인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자그들은 그들 가운데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동족들을 향하여 싸우게 하여 유대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강요했다. 그때 그들은 그들과 함께 거하는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침략자들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승리 후에 그들은 그들의 동료시민들이었고 우방이었던 유대인들에게 사의(謝意)를 표하는 대신에, 수천명 이상의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 같은 불행한일들은 다메섹(Damascus)에 살던 유대인들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아주 상세하게 ‘유대전쟁사’에 다루었다.[㈜ 전쟁.2권 18:3(466)이하 ,2권.20:2(259)이하.참)아피. 2권40(287).] 단지 내가 지금 그것들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로마제국과 유대인들의 전쟁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었음을 명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7. 갈릴리에서의 요세푸스의 임무


      그래서 우리가 이미 얘기하였던 케스티우스(mCestius)의 패배후에 예루살렘(Jerusalem)의 지도자들은 도둑들과 반란자들이 완전 중무장한 것을 보고, 자신들이 무장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적들에게 침략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후에 그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때 갈릴리(Galilee)전역이 로마제국에 아직 봉기를 든 것이 아니고 몇 지역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은 나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제사장인 요아자르(Joazar)와 유다(Judas)를 보냈다. 우리의 임무는 불만 세력들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 놓게 하고 그들로 국가의 선별된 훌륭한 전사들을 위해 보관하게끔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전사들은 미래의 우발적 사건들에 대처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뽑힌 자들로 ‘D임없이 무장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야하는 자들이었지만, 로마가 취할 행동을 지켜보면서 기다려야만 했다.


     8. 갈릴리의 상황


      그리하여 내가 이러한 임무를 띠고 갈릴리로 들어갔을 때, 갈릴리에 거주하는 세포리스(Sepphoris)의 주민들이 그들의 고향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적잖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세포리스인들이 로마제국과 함께 우호관계를 맺고, 수리아의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갈릴리 거주 세포리스인들이 갈릴리 사람들에 의해 약탈을 당할 지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포리스 주민들을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갖도록 갈릴리 군중들을 설득했다. 그리고나는 베니게의 한 성읍인 도라(Dora)에 있는 케스티우스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그들의 동료들과 그들이 어느때든지 연락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디베랴(Tiberia) 주민들이 전쟁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9. 디베랴의 세 당파


      이 도시에는 세 개의 당파가 있었다. 그 첫 번째 당파는 명망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졌으며 율리우스 카펠루스(Julius Cap-ellus)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지금 그와 그의 동료들, 미아루스(Maiarus)의 아들인 헤롯(Herod)과 가말루스(Gamalus) 의아들인 헤롯(Herod), 그리고 콤프수스(Compsus)의 아들 콤프수스(Compsus)〔나는 그의 형제 크리프스(Cripus)를 포함시키지 않는데, 그는 전에는 대왕(great king)[㈜ 헤롯 아그립바 Ⅰ세.] 수하에 있었지만,요단강 너머의 그의 영지에 가 있어서 디베랴에 없었기 때문이다〕는 그 당시에 열심히 로마와 왕에게[㈜ 아그립바 Ⅱ세 참). 자서.17(88),54(279), 65(336-367), 70(390-393),  74(410)] 계속 충성을 바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유스투스(Justus)의 사악한 영향 외에도 그의 본성상 광기가 번뜩이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 당파는 대부분이 비천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졌고, 그들은 전쟁을치룰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당파의 우두머리이며,피스투스(Pistus)의 아들인 유스투스(Justus)는 비록 그가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체 할지라도 정부의 교체가 그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반라에 대다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군중 가운데로 들어가 군중을 설득시키려고애썼다. “그 도시 디베랴(Tiberia)는 갈릴리(Galilee)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를 거설한 분봉왕 헤롯(Herod)이후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포리스(Sepphoris)시가 디베랴(Tiberia)시로 종속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아그립바(Agippa) Ⅰ 세 치하에서도 이 도시는 탁월함을 잃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벨릭스(Felix)가 부임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에게 불행하게도 우리가 네로황제의 아그립바(Agippa) Ⅱ세에게 하사되는 선물로 마련되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세포리스(Sepphoris)는 갈릴리(Galilee)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국고와 공문서들이 우리들에게서부터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말들을 끝내자, 수많은 군중들이 왕 아그립바(Agr-ippa)의 반대편에 서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이 봉기하도록 선동하기 위하여 더욱 더 소리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을 할 절호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동맹 갈릴리 사람들과 합세합시다(갈리리 사람들은 로마에게 복종하는 세포리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증오를 표시하고 있으므로 우리를 기쁘게 원조할 것이며. 우리들도 기꺼이 그들의 도움을 요구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포리스 시를 징벌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합칩시다.” 그의 열변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비록 그의 반대편 사람들이 무엇이 그들(군중)의이익에 보탬이 될 것이냐고 충고를 할지라도, 그의 열변은 그의반대편 사람들도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대단한 달변가요 선동자였던 것이다. 그는 헬라 문화에도 정통하여, 그 재능을 사용하여 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이 사건들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의 타락한 심성과 우리들의 멸망의 거의 전적인 원인이 된 그와 그의 형제에 대해서는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증거가 첨가될 것이다.

      그래서 유스투스(Justus)가 그의 설득력으로 디베랴의 시민들에게 무기를 들게 한 후, 아니 수많은 시민들을 반 강제로 무기를 들게 한 후에, 그는 그들을 이끌고 가서 스구도볼리(Scy-thopolis) 지역에 속하며 디베랴 국경에 위치한 가다라(Gad-ara)와 힙포스(Hippos) 마을들을 불질러 소멸시켰다.


    10. 기스칼라의 상황


      디벨I 시가 처한 상황이 이와 같았던 반면에 기스칼라(Gis-dhala)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레위(Levi)의 아들 요한(Joh-n)은 로마에 대해 봉기를 일으켜 보려는 약간의 시민들을 보고 그들을 자제케 하는 한편 로마에 계속 충성을 바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을지라도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기스칼라에 인접한 두로사람(Tyrians)들과 함께 소가나(Sogana), 가바라(Gabara),가다라(Gadara)의 주변 사람들이 대 병력을 이끌고 몰려와, 기스칼라를 강제로 점령하여 불살라 버렸고 그곳을 완벽하게 파괴시킨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요한(John)은 너무 격분하여 그의 부하들을 모두 무장시켜 앞에서 언급된 사람들과 전쟁을 치렀고 그리고 기스칼라(Gischala)를전보다 더 훌륭히 재건시켰으며, 장래의 안전을 위해 벽을 쌓아도시를 요새화 했다.


     11. 가말라와 야키무스의 아들 빌립


      그러나 가말라(Gamala)가 로마제국에게 충성하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 아그립바왕 밑에서 가말라(Gam-ala)총독을 맡고 있던 야키무스(Jacimus)의 아들 빌립(Philip)은 예루살렘 왕궁이 포위 되었을 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리하여 그는 그곳에서 간신히 달아났으나 므나헴(Menahem)과그와 함께 있었던 도적들에 의해 잡혀 목숨을 잃을 또 다른 위험속에 처하게 되었다.[㈜ 참). 전쟁. 2권 20:1 (556)이하:17:8 (433)이하.] 그러나 마침 예루살렘에 있었던 그의 몇몇 바벨론 친척들이 그 도적들의 살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이렇게 해서 빌립(Philip)은 4일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5일째 되던 날 그 자신이 발각되지 않도록 가발로변장하여 달아났다. 그리고 그가 관할했던 마을중 가말라(Gam-ala)의 요새 변경에 위치해 있던 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에게 소식을 보내어서 자기에게 오라고명령했다. 하느님께서 그의 계획을 방해하셨으나 그것은 그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 얼마후 그는 열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아그립바(Agrippa)Ⅱ세와 버니게(Bernice)에게 편지를 썼다.그리고 그의 부하인 자유민을 시켜서 그것들을 그때 당시 왕궁의 행정관이었던 바루스(Varus)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때 바루스는 왕과 그의 누이가 베리투스(Berytus)로 케스티우스를 만날 목적으로 가 있는 동안 모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바루스(Varus)는 빌립(Philip)의 편지들을 받고 그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만약 빌립이 나타난다면 자신은 왕과 그이 누이에게 더이상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불안해 하였다. 따라서 바루스는 빌립의 편지를 가져온 자를 대중들 앞에 세워  그가 빌립(Philip)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로마를 대항해 싸우고 있다고 허위 진술하고 편지를 위조했다는 죄목으로 비난하고 죽여버렸다. 한편 빌립(Philip)은 부하인 자유민이 돌아오지 않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부하를 서신과 함께 보내어 앞서 파송된 부하가 왜 그렇게 늦는지 알아보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 보도록 하였다. 바루스(Varus)는 이 두 번째 사신도 역시터무니 없는 구실로 정죄하여 살해하였다. 그는 가이사랴(Cae-sarea)에 살고 있는 수리아인들로 인하여 우쭐해 하고 있었으며, 지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수리아이들은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이 범한 죄에 의해서 로마인들에게 살해당할 것이며, 왕의 혈통을 지닌 바루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왔던 것이다. 바루스는 레바논 지역을 다스리던 소에무스(Soemus)의 자손으로서 왕족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왕이 되겠다는 야심에 들뜬 바루스는 그 편지들을 간직하였고 어느 한 사람도 탈출하여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리지 못하도록 모든 통행을 감시함으로써 왕이 그 서신들을 접할 수 없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다. 게다가 그는 가이사랴(Caesarea)의 수리아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또한 그는 바타나이아(Baanaea)의 드라고닛 사람들(Trachonites0과 함께 합세하기로 마음먹고 엑바타나(Ecbatana)에[㈜ 갈릴리 해번의 동쪽 고원지방, 즉 바타나이아〔Batanaea-바산(Bashan)〕와 드라곤, 즉 드라고닛(Trachon or Tachontitis)의 화산지역은 아랍 침략자들에게 공격당하기 쉬운 지역이었다. 따라서 대헤롯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직통 노상에 놓인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바산 지방에다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Philip)의 조부인 사마리스(Zamaris)의 통솔하에 바벨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고대.17권,2:1(23)이하.엑바타나(Ecbatana)는 메대(Media)에 있는 성읍이 아니고 이 지방에 세워진 여러 요새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다. 전쟁.2권 18:6(481)이하에는 위에 언급된 내용에 관한 다른 견해가 있음을 보게된다.] 있는 바벨론 유대인들(Babylonian Jews)-이러한 이름으로 불리워졌었다 -을 습격하기로 계획했다. 따라서 그는 훌륭한 인품을 갖춘 가이살ICaearea)의 12명의 유대인들을 불러 그들이 엑바타나(Ecbatana)로 가도록 명령했다.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의 동족들에게 “바루스(Varus)가 듣기로는 당신들이 왕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 하지만, 그러한 보고서를 믿지 않고 그는 우리를 당신들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설득시키려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낸 사실이 당신들에 관한 보고서들을 올린 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징표인 것입니다”라고 말하도록 시켰다 바루스(Varus).는 또한 그들을 향한 이러한 모함이 사실이 아님을 스스로 변호할 수있는 유능한 사람 70여명을 뽑아서 자신에게 보낼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그 12명의 사신들은(Ecbatana)에 있는 그들의 동족들에게 갔지만 반역의 기미를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들은 엑바타나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무죄를 변호할 70명을 파견할 것을 권고했다. 자신들이 처할 운명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은 이 유대인들은 전갈을 가지고 온 12명의 사절과 함께 70명을 가이사랴에게 내려 보냈다.


    〔아그립바의 부왕(副王)  바루스〕


      그런데 바루스(Varus)는 왕의 군대를 데리고 나가, 그들을 12명의 사절들과 함께 모두 살해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엑바타나(Ecbatana)의 유대인들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대를 결성했다.그러나 그 살해당한 70명들 중에 한 사람이 간신히 도먕쳐나와 유대인들에게 바루스의 군대가 쳐들어 옴을 알렸다. 그 유대인 동족들은 무기를 들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그들 마을의 온갖 좋은 물건들과 10,000 마리의 양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가말라(Gamala) 요새로 피신했다. 빌립(Philip)의 요새로왔다.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 군중들은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빌립이 정권을 되찾아 바루스(Varus)와 가이사랴I(Cae-sarea)의 수리아인들을 정복할 원정대를 만들기를 갈망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왕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빌립(Philip)은 그들의 열정을 저지하면서 왕이 그들에게 베풀어준 은혜와 로마군대가 얼마나 강한가를 생가가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로마군들과의 전쟁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wu다 줄 수 없다고 진정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는 그들과 함께 그같은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왕은 자식들과 아내들을 포함하여 10,000명이나 되는 가이사랴(Casearea)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바루스의 계획을 알아 차리고, 우리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대로[㈜ 참).전쟁.2권.18:6(483)이곳에 보면 바루스(Varus)의 면직된 사실은 언급되어있으나 그 후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더 자세한 상황을 알려면 자서.36(179)이하를 보라] 에퀴쿨루스 모디우스(Equiculus Modius)를 불러 그를 바루스의 후임자로 임명하여 보냈다. 빌립이 가말라요새와 인근지역에 머무름에 따라 그들은 계속 로마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12. 디베랴의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고 무질서를 바로잡다


      갈릴리(Galilee)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러한 사건의 정황들을 곧 알게 되었다. 나는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에 그들의 동태를 알리고 향후의 조치에 대한 적적한 지시를 바라는 편지를 썼다. 그들은 내가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자 만약 나의 동료들이 원한다면 그들과 함께 갈릴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의 동료들은 제사장들로부터 받는 십일조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잠시 남아서 공적인 사건들을 함께 해결하지 않겠느냐고 요청하자 그들은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세포리스 시를 떠나 디베랴(Tib-eria)시에서 4퍼얼롱(furlong) 떨어진 베드마우스(Bethmaus)라고 불리는 마을로 와서 그 도시의 유력인사를 만나길 희망한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리하여 유스투스(Justus)를 포함하여 그들이 왔을 때 나는그들에게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사절로서 분봉왕 헤롯(Herod the tetrarch)이 세운 건물과 유대 율법이 금하고 있는 그안에 설치된 동물들의 형상을 파괴시키도록 설득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출 20: 4]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즉시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구했다. 그러나 한동안 카펠루스(Capellus)와[㈜ 혹은 위의(9)에 언급된 카펠루스(Capellus)] 도시의 유력인사들은 쉽사리 허락하지 않다가 끝내는 우리와 우리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언급하였던 대로[㈜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위에서 본 (9)의 내용을 참조해 보면 명백히 “주요 인사들의 제2의 당파”에 대해 명백히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빈민층과 어부들의 폭동의 주동자인 사피아스(Sapphias)의 아들 예수(Jesus)가 선수를 쳤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갈릴리 사람들을 데리고 와 궁전 전체에 불을 놓았다. 왜냐하면 그는 궁전의 지붕들이 황금으로 도금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우리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수많은 가구들을 약탈해 갔다. 우리들은 이 도시의 유력인사들과 카펠루스(Cap-ellus)와 함께 담화를 한 후에 베드마우스를 떠나 상 갈릴리(Upper Galilee)로 갔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부하들은 디베랴의 거주하는 모든 헬라인들과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적이었던 모든 사람들도 살해하였다.


     13. 기스칼라 요한의 전략


      이같은 상황에 대해 듣게 된 나는 상당히 격분하여 디베랴로 내려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왕궁의 기구들을 모두 보호하는 한편, 그것들을 약탈해간 사람들로부터 되찾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되찾았다. 그 가운데는 고린도(Cor-inthian)산(産) 청동으로 만든 촛대와 왕실 탁자, 그리고 주조되지 않은 굉장한 양의 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든지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왕을 위해 지킬 것을 맹세했다.그래서 의회의 유력인사 10명과 안틸루스(Antyllus)의 아들 카펠루스(Capellus)를 불러서 그 기구들을 그들에게 위탁하고, 그들에게 나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기구들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분명하게 지시했다. 여기에서 나와 동료 사절들은 요한(John)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기스칼라(Gischala)로 갔다.그 결과 그가 곧 반란을 바라고 있으며 권력을 장악할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상부 갈릴리(Uupper Galilee)에 보관중인 왕의 곡식에 대한 관할권과 그의도시(기스칼라) 성벽을 건설하는데 드는 모든 비용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중을 알아챈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예루살렘당국이 내게 부여한 권위는 그 지역까지도 미쳤으므로 나는 그곡식을 왕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보관하려 하였다. 그는 나를 설득할 수 없게 되자 나의 동료 사절들에게로 목표를 바꿨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래에 대한 밝은 식견을 가지지도 못했고, 또 뇌물이 아주 쉽게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뇌물로 그들을 매수하여 그의 관할하에 있는 곡식들을 그에게 운반하라는 선고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고, 투표수에서도 열세였기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요한(John)은 또 다른 그의 교활한 계획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목적에 사용할 순수한 기름이 부족하므로 만약 그가 상당한 분량의 기름들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들은 헬라인들로부터 만들어진 기름을 강제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유태인의 율법에 벗어나는 일이되므로, 그들이 그에게 기름을 보내달라고 자신에게 요청했다고 꾸며댔다. 이것은 그의 종교적인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사악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가이사랴에서 두 파인트(pint-액량의 단위 ; 약 0.57ι-역자주)에 한 드라크마인데 비해서 기스칼라에서는 80파인트에 4드라크마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외양상 내게서 허가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 곳의 모든 기름들을 운반해 갔다. 이것은 내가 그를 자발적으로 승인한 것이 아니었고 만약 내가 그를 거절한다면 나는 군중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의 동의를 얻어낸 요한은 교묘한 속임수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14. 갈릴리의 평화를 지키려는 요세푸스


      나는 동료 사절들을 해산하여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뒤 곧바로 무기를 정비하고 도시들을 요새화 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도둑들 중에서 가장 극악한 자를 소집하였고, 그들을 강제적으로  무장 해제시키기에는 내 힘이 역부족한 것을 알게 된 군중들이 도둑들에게 돈을 바치도록 설득했다. 나는 그들이 도둑들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약탈당하는 것을(강압에 의해) 그냥 바라보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돈을 바치는 것이 더 좋은 일임을 말했다. 나는 도둑들에게 그들이 마을로 오도록 초청을 받았거나 기부금을 받지 않았을 경우 외에는 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떠나보내며 그들이 로마를 향해 싸우려고 원정대를 만들지 않으며 또한 그들과 인접한 이웃들을 약탈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왜냐하면 나의 첫 번째 관심사는 갈릴리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갈릴리인들의 신실성에 대한 보장으로서 유력인사 70명을 인질로 삼았다. 그러나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밑바닥에 깔려 있었으므로 여행하면서 그들을 나의친구 그리고 동료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동의하에 그들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나는 공정한 판결을 위해 이 문제에 관한 한 뇌물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하였다.


     15. 자신의 고결함에 대한 변명


      나는 이제 나이 30이 되었다. 인생에 있어서 이 시기는 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은, 비록 그가 어떤 불법적인 욕구에서 그 자신을 멀리하려고 애쓸지라도, 시샘에 의한 중상모략을 피하기에 무척 어려운 때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여성들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으며, 그들이 나에게 제공하는 선물들에 대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뿐만아니라 제사장으로써 마땅히 받아도 되는 십일조 조차도 받지않았다. 그러나 내가 인정해야 하는 것들이 있음을 고백한다. 나는 우리 ‘P처 도시에 살고 있는 수리아인들을 침공하여 그들에게서 금품을 갈취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예루살렘에 살고있는 내 친척들에게로 보냈다. 비록 내가 강제로 세포리스를 두 번, 디베랴를 네 번, 그리고 가다라(Gadara)를 한번 정복했을지라도, 나를 잡으려고 여러번 덫을 놓기까지 한 요한을 사로잡았을 때 조차도, 요한이나 그 밖의 전에 언급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앞으로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여질 것이다. 나는 내가 당면했던 수많은 위험들의 한 복판에서 계속 보호받고 구원되었던 사실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자를 감찰하시는 하느님의 보호의 손길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16.요세푸스의 인기가 요한의 시기심을 자극하다


      이제 수많은 갈릴리인들은 나를 무척이나 친절하게 대했고, 나에게 충성을 바쳤는데, 그들의 도시가 강제로 침략당해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이 노예로 끌려갔을 때에도 그들은 나의 안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들이 당한 불행에 대해 그리 깊게 비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보고 나를 시샘한 요한은 나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은 자신의 몸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 디베랴(Tiberias)의 뜨거운 열탕에서 목욕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와 함께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전쟁.2권.21 : 6(614)이하를 참조하라] 따라서 나는 그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막지 않았고, 디베랴 시의 담당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로 하여금 요한과 같이 간 부하들이 묵을 처소를 준비하고 그가 머무는데 조금이라도 필요한것이 있다면 가능한 한 보내주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 가나라는 이름의 한 갈릴리 마을에 체류하고 있었다.


    17. 요한이 디베랴에서 폭동을 일으키도록 선동하다


      그러나 요한(John)이 디베랴 시로 왔을 때 그는 나에게 충성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의 편이 되어 달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난동을 즐거워하고 본성적으로 변화를 좋아하면서 반란을 기뻐하는 많은 이들이 기꺼이 그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특히 그들의 우두머리인 유스투스(Justus)와 그의 아버지 피스투스(Pistus)가 나를  버리고 요한을 추종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나는신속한 대응으로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다시 말하면 이미 언급했던 자,[㈜ 전쟁.2권.21 : 6(616)을 보라]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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