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11-20 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

 


11. 저서의 주제



 제가 본론에서 떠나 잠시 지엽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은 역사를 기록하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충분히 말씀드렸듯이 고대의 역사를 전승시켜 주는 관습은 헬라인들보다도 야만족으로 칭해지는 사람들[㈜ \’야만인\’.] 사이에서 더욱 온전히 보존되어져 왔습니다 먼저[㈜ 아피. 1권. 12(60-68)] 저는 유대의 기원이 얼마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들에 대해 몇마디 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마치 헬라 역사가들이 유대민족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 다음[㈜ 아피. 1권. 13-23(69-218)] 저는 유대국의 고대성에 관한 증거를 외국인들의 글에서 찾아 제시하겠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아피. 1권. 24(219)-아피. 2권. 13(144)] 우리 민족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매우 부당하다는 사실을 예증하겠습니다.



  12. 유대역사에 대한 헬라역사가들의 침묵



 한편 우리 유대민족은 해양국가에 거주하는 것도 아니며, 장사로 재미를 보거나 또는 그런 나라의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성읍들은 바다로부터멀리 격리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복받은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에 오직 이 땅을 경작하면서 고생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모든 백성들에 대한 주요 관심사는 우리의 자녀들을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유대민족은 우리에게 내려온율법들을 지키며 지금까지 전승된 경건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우리 일생 중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니고있기 때문에 고대에도 헬라인들과 관계를 맺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상품을 수출입하는 애굽인이나 또한 해변가에서 살던 베니게인들이 장사에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 헬라와관계를 갖던 사실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라서 강도짓을[㈜ 투키디데스 ⅰ.5이하. 미노스(Minos)시대 이전에 그는 해적이 존경스러운 직업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참). 호머 \’오딧세 이\’ⅲ. 71이하.] 하거나 또는 수많은 용사들이 있었음에도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외국과 전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베니게인들이 무역과항해술로 헬라 세계까지 금방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베니게인들의 중개로 애굽인들도 헬라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베니게인들이 애굽 상품을 지중해를 건너 헬라로 운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를 지배했던 메대(Medes)와 바사인들(Per-sians),도 헬라인들에게 잘 알려졌는데 대륙을 건너 유럽에까지군대를 이끌고 원정했던 바사인들은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트라키아 사람들(Thracians)도 인접국이었으므로 헬라인들에게 익히 알려질 수 있었으며 스구디아 사람들(Scythians)은 본도(Pontus)로 항해해 간 사람들에 의해 헬라인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모든 해양 민족들과 동해나 서해 근처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해양으로부터 멀리떨어져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헬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례는 유럽에 관해서도 적용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많은 전쟁들에서 엄청난 활동을 수행해온 로마시에 대해서 헤로도투스(Herdotus)나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물론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이 헬라인들에게[㈜ 할리카르나수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Halicarnassus)저 서인 주전 1세기의 \’로마고대사\’ⅰ. 4, 2 :\”로마시의 고대사는 거의 모든 헬라인들에게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지게 되었던 것은 매우 뒤늦은 때였고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역사가들조차도 [예를 들어 에포루스(Ephorus)] 골 사람들(Gauls)이나 스페인 사람들(Iberians)에 관해 아주 무지하였기 때문에 지구 서쪽의 광활한 지역을 접하며 살아가는 스페인 사람들이 겨우 한 개의 도시에서 살 것이라고 짐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가들은 골사람들이나 스페인 사람들이 사용하지도 않은 풍습들을 감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들이 그들의 삶에 관한 실상을 잘 알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과[㈜ 혹은, 추측컨대\'(이민족들의)세계로부터의 완전한 격리에 의해\’.] 아무런 교역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처럼 거짓 사실을 기록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한 사실들을 아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국이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생활의 모습 또한 독특하기 때문에 많은 헬라 사람들이 우리민족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들의 기록에 언급을 하지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3. 유대의 고대성에 대한 여러 나라의 증거



 역사가들의 저술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원이 오래지않았다는 사실이 성립된다면 이것을 헬라인에게 거꾸로 적용할수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저술에 헬라인이 언급되지 않았으니헬라인들의 기원도 얼마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해헬라인들도 웃어 넘기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고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근 국가들의 기록에서 그 증거를 대려고 할 것입니다. 저자는 이제 이와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저는 유대의 고대성을 입증해 줄 중요한 증인으로 애굽 사람들과 베니게 사람들을 인용할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악의를 품어온 사람들로 유명하므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증거를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악의는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히 심했으며, 두로인(The Tyrians)이라고 알려진 베니게 사람들(Phoenicians)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갈대아인들(Chaldaeans)은 이와는 경우가 달랐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초창기 지도자와 조상들이 그들 민족에게서 유래했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 가운데 있는 그들의 친족 관계 때문에 그들의 기록에다 유대 민족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남과 관련된 사실에 한하여는 저는 공정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일부 헬라인들이 유대인을 언급한 사실도 생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공연히 유대인을 시기하는 자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애굽인 마네토의 증거



 저는 먼저 애굽인들의 역사 기록에서부터 언급을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저는 애굽 문자를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기록은 애굽어로 쓴 역사를 보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네토(Manetho)라는[㈜ 톨레미(Ptolemy) Ⅰ,Ⅱ세 지배하에 살았던 애굽의 제사장으로 추 정됨. \”그는 애굽의 기록에 근거하여 자기 나라의 교리, 지혜, 역 사, 연대기 등을 헬라어로 설명해 주었던 최초의 사람\”으로 그의 역사서는 세 권으로 나뉘어졌다.] 매우 현명한 애굽 태생의 사람이있는데 그는 헬라어에 능통합니다. 그는 자기 나라인 애굽의 역사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록을\’거룩한 책들\'(The Sacred books)로부터[㈜ 혹은 \’서판들\’] 인용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헤로도투스가 애굽의 역사에 관한 무지와 편견 때문에 잘못 기록한 사항들을 많이 찾아냈습니다. 한편그는\’애굽역사\’제2권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바로 이 사람을 마치 증인으로 채택하여 법정으로 데려온 것처럼 그의 한 말들을 그대로기록하겠습니다.

 \”토티마이우스(Tutimaeus)라는 왕이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그의 통치기간 중에 신께서 애굽인을 저버리신 일이 발생하였다. 그때 동방으로부터 갑자기 미개한출신들이 일어나 우리들을 침공해 왔다. 그들의 침입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힘든 전쟁도 하지 않고 우리 나라를 손쉽게 무력으로 장악하였다. 그들은 애굽의 지도자들을 굴복시키고 난 후에 우리의 성읍들을 불태웠고, 신전들을 파괴하였으며매우 야만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다루었다. 일부는 무참하게 학살되었고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은[㈜ \’남자들과…아내들과 아이들을 학살함\’으로 추정됨] 노예로 전락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한 사람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그의 이름은 살리티스(Salitis)였다. 그도 또한 멤피스(Memphis)에서 살았으며상부 애굽과 하부 애굽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히 조세를 부과하고 적절한 여러 곳에는 수비 대원들을 남겨 두었다. 주로 그는 동부지역의 안보에 중점을 두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 가장 막강한 세력을 지녔던 앗수르(Assyrians)가 애굽을 탐하여 침략할것을 예견하였던 까닭이다. 그는 사이테 노모스(The SaiteNomos : Sethroite)에 그의 목적에 적절한 도시를 건립하였다.이 도시는 부바스티스 해협(The Bubastis Channel)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 신학적인 관념을 곁들여서 아우아리스(Auaris : 탐욕)라고[㈜ 참). 아피. 1권. 26(237). 아우아리스(Auaris)는 아마도 펠루시움 (Pelusium)일 것이다.] 이름하였다. 그는 이 성 주위 벽을 다시 세움으로써더욱 강하게 하였으며, 무려 240,000명이나 되는 수비대원들을 무장시켜서 그 성읍 안에 투입시켰다. 살리티스는 매년 여름철마다 그곳을 방문하였는데 그것은 식량을 거둬들일 목적도 있었지만 군사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그들을 훈련시켜서 외국인들을 위협코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살리티스가 19년의 통치를마친 후에는 브논(Bnon)이라는 사람이 그 뒤를 이어 44년간 지배하였다. 그 다음에는 아파크나스(Apachnas)라는 사람이 뒤를 이어 36년 7개월 동안 지배하였다. 그 뒤를 이어 아포피스(Apophis)라는 사람이 나와서 61년을 지배했으며 얀나스(Jan-nas)라는 사람이 그 뒤를 이어 50년 1개월 지배하였다. 마지막으로 아시스(Assis)라는 사람이 49년 2개월을 지배하였다. 이여섯 사람은 그들의 야망을 점차로 확대시켰지만 특히 첫 번째지배자는 애굽을 뿌리채 멸망시키고자 했다. 이 왕국은 힉소스(Hycsos),[㈜ 정확한 형태는 힉쿠소스(Hucussos)로서 뜻은(W.E. Crum에 따르 자면)\’남 수리아지역) 베다윈(Bedawin)의 촌장\'(Hastings의 \’B.D\’.i.659b). 최근 주석에서 그는 이 단어 마지막 음절인 sos 의 의미를 \’목자\’로 해석하고 있다. 힉소스의 지배는 주 전1,800년경부터 주전 1,58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제 18 대 왕조를 세운 아모세(Ahmose)에 결국 추방을 당하였다. 그들 이 유대인과 관계성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 나 몇몇 비평가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Dr. H. R. Hall)의 출애굽 기에 기록된 사실대로 그들이 추방되었다고 말한 요세푸스의 기 록은 옳은 것이다.] 즉 목자 – 왕(King-shepherds)으로 불렀다. 힉소스의 첫음절인 힉(HYC)은 거룩한 방언(sacred dialect)으로 \’왕\’이라는 뜻이며, 일반 방언(common dialect)인 소스(SOS)는 목자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힉소tm(HYCSOS)는 이 두말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그런데 어떤 다른 사본에서는 이 단어가 \’왕들\’을 뜻하지 않고 반대로 그 목자들은 \’포로\’라는 뜻이며 이것은 분사인 힉(HYC)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기음(氣音:aspiration)으로 시작되는 학(HAC)뿐만 아니라 힉(HYC)은\’포로\’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문구가 진짜라면 \’또 다른 사본에서\’란 표현의 의미는\'(마네토의) 또 다른 저서에서는\’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 참). 아피. 1권.14(91). 그러나 여기에서 사본(ajntivgrafon)이란 단어를 책(bivblo\”)이란 단어와 혼용할 수는 없으며 이 단락은 다른 문제를 내포하지 않은가 의심이 간다. 즉(1)아피. 1권. 14(91)에서는 bivblo\”한 단어만이 반복되어 있다는 점. (2)요세푸스의 사본 ; 아피. 1권. 14(91)에서는\’요세푸스의 저작\’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이는 \’또 다른 사본에서\’라는 문구에서 발견된 이문(異文)에 관하여 언급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괄호로 묶 어진 문장은 본문으로 삽입된 주석 비슷한 것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본\’이란 말이 사실 그런 뜻이었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 주제를 보다 심도있게 다뤘던 사람으로서 \’유대고대사\’를 개정하면서 이 부분도 수정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생각해 보건대 이와같은 해석 속에는 또 다른 사본의 잔재가 있을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언급된 \’견해\’는 힉소스가 유대인들의 조상이었던 아랍인들이었다는 것으로서 요세푸스는 이 견해를 나중의 것보다도 더 가능성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견해가 저에게도 보다 타당성이 있으리라 보이며 고대사에 더 합치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마네토에 따르면 앞에서 왕이라 이름하거나 목자라고 부르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511년동안이나 애굽을 지배했습니다 그때[㈜ 이 단락에서 요세푸스는 마네토에 대한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데바이드(Thebaid)의왕들과 애굽의 여타 지역의 왕들은 목자들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지긋지긋하고도 긴 전쟁이 그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미스프라그무도시스(Misphragmouthosis)라는 이름을가진 왕에게 목자들은 정복당했으며 그들은 애굽의 다른 지역으로 축출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우아리스(Auaris)라는이름의 10,000 아루래(arourae)[㈜ 문자적으로는\’10,000 아루래(arourae)의 영역을 지닌\’. 아루래 는 애굽의 측량 단위로서 약 1/2에이커에 해당하며 요세푸스는 이 부연설명을 하면서 길이의 단위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같 다. 아우아리스(Auaris)에 대해서는 아피. 1권. 14(78)을 보라.]의 땅에 완전히 갇히게 되었습니다.

 마네토는 말하기를 \”그 목자들은 이 지역의 온 둘레에 거대하고 강한 벽으로써 둥그런 벽을 쌓았다. 이 벽들은 아주 그들의재산과 전리품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하려고 쌓은 것이었다. 그러나 미스프라그무도시스의 아들 둠모시스(Thoummosis)는 480,000의 대군을 이끌고 그들을 포위하여 강제로 그 재산을강탈하려 하였다. 그러나 무력으로 그 지역을 점령시킬 가능성이 사라지자 목자들과 화해하였고 어느 곳을 가든지 해를 받지않고 애굽을 떠날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은 화해하게 됨에 따라240,000여 명에[㈜ 수비대의 수에 관하여는 아피. 1권. 14(78)에 언급되어 있다.] 달하는 백성들과 재산을 가지고 광야를 지나애굽에서 수리아(Syria)로 향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시아에서지배자로 군림하던 앗수르(Assyria)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유대라는 나라 안에다 240,000명이라는 많은 수의 백성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성읍을 건설하였는데 그 성읍을 예루살렘(J-erusalem)이라 일컬었다.\” 다른 책에서 마네토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은 그의 나라의 성경(The Sacred books)에서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성경에\’. 아피. 1권. 14(92)의 글을 애굽 의 서적들을 의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로들(The Captives)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이 아주 먼 옛날에 종사하던 일은 양을 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양을 치며 유랑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목자들이라고 일컬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또한 애굽의 포로로 일컬어졌다는 사실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들 중의 한 사람인 요셉(Joseph)은 애굽의 왕에게[㈜ 성경의 내용에 보면 그는 그의 술맡은 자에게 말했다(창40:5). 플 로렌틴(Florentine) 사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난외주를 첨가시킨 다 : 또 \’다른 사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케 된다 : 그 의 형제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결국 애굽의 왕에게까지 나 아갔다 : 그리고 다시 그는 왕의 재가를 얻어 그의 형제들을 데 리러 사람을 보냈다.\’] 이르기를 그가 포로이며 후에 왕의 허락을 받아 그의 형제들을 애굽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좀더 상세하게 다루겠습니다.[㈜ 아피. 1권. 26(227)이하를 주의해서 살펴보면 그가 마네토에게로 귀속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5. 애굽의 왕들



 그러나 이제 저는 우리 민족의 고대성에 관한 증인으로서 애굽 사람들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에서 마네토의 말과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그의 글을 인용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민족, 혹은 목자들이 애굽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난 후, 그들을 내쫓은 왕인 테드모시스(Tethmosis)가[㈜ 위의 아피. 1권. 14(88)에서는 둠모시스(Thoummosis)로 불려짐. 이는 아마 아피. 1권. 15(96)의 드모시스(Thmosis)라고 써야 옳 을 것이다.] 25년 4개월을 통치하다가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인 케브론(Chebron)이 13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그가 죽자 아메노피스(Amenophis)가20년 7개월간 다스렸다. 그 이후 그의 누이인 아메세스(Amesses)가 21년 9개월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메프레스(Mephres)가 12년 9개월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메프라무도시스(Mep-hramuthosis)가 25년 10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드모시스(Thmosis)가 9년 8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아메노피스(Amenophis)가 30년 10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오루스(Orus)가 36년 5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그의 딸인 아켄케레스(Akencheres)가 12년 1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 아켄케레스가 12년 5개월을 다스렸으며, 그후 또 다른 아켄케레스가 12년 3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하르마이스(Har-mais)가 4년 1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라메세스(Ramesses)가 1년 4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하르메세스 미아문(Harmeses Miamoun)이 66년 2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아메노피스(Amenophis)가 19년 6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라메세스라고도 부르는 세도시스(Set-hosis)[㈜ 아마도 \”세도스\”(Sethos) 참). 아피. 1권. 26(231)]가 다스렸다. 기병과 함대를 가진 이 왕은 그의 형제인하르마이스(Harmais)를[㈜ 아피. 1권. 26(231)에서는 헤르마이우스로 칭해짐.] 애굽을[㈜ 그 사본에는 난외주가 나와있다. \”또 다른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견된다. \’그 이후로 세도시스(Sethosis)와 라메세스 (Ramesses) 두 형제가 등극했다. 세도시스는 매우 강한 해군력 을 가지고 많은 인명을 살상시키는 적들을 방어하였다. 얼마 후 그는 라메세스, 하르마이스(Harmais), 그의 형제 중의 또 다른 한 사람과 애굽의 총독을 살해하였다.\’\”각주 55를 보라 그리고 홍해에서의 세도스의 해상활동에 관하여는 \’헤로도투스\’ⅱ. 102와 고대. 8권. 10:3(260) 이하를 보라. 헤로도투스는 그를 세 소스트리스(Sesostris)로 칭하였고 요세푸스는 그를 르호보암의 적이었던 시삭(Shishak)으로 간주하였다. 라메세스와 세도스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본문에서는 라 메세스가 세도스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하며 난외주에서는 그 가 세도스의 형제라고 씌여 있다. 아피. 1권. 26(231)에는 라메세 스가 세도스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다스리는 총독으로 삼았다. 그는 또한 그의 형제에게 왕의 모든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단지 몇가지의 금지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왕관을써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자기 자녀들의 어미인 왕비에게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과, 왕의 다른 첩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들었다. 그러는 동안 왕은 구브로(Cyprus)와 베니게(Pho-enicia) 뿐만 아니라 앗수르(Assyria)와 메대(Medes)에까지 원정을 했다. 그는 이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였는데 일부는 군사력으로, 일부는 싸우지도 않고, 일부는 그의 엄청난 대군의 위용으로 이를 가능케 했다. 그가 거두어 온 계속된 전승에 고무된 왕은더욱 대담해져서 동부에 위치해 있는 성읍들과 나라들을 계속정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자 애굽에 남은 하르마이스는 왕에게 대항할 셈으로 그의 형인 왕이 금지한 사항들을 두려움도 없이 행하였다. 왕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왕의 첩들을 남김없이 계속적으로 건드려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의 권고를 듣고 그는 왕관을 썼으며 결국 그의 형인 왕에게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제사장들을 다스리는 직을 가진 한사람이 일어난 모든 사항들과 그의 동생이 형인왕에게 얼마나 반역적인가에 관해 알리는 편지를 썼다. 이에 왕은 즉시 펠루시움(Pelusium)으로 돌아와 그의 왕위를 다시 회복하였다. 또한 그가 아이깁투스(Aegyptus)라고 불려지는 것을따라 그 나라의 이름도 불려지게 되었다. 또한 마네토는 세도스(Sethos)는 아이굽투스(Aegyptus)로, 그의 동생 하르마이스(Harmais)는 다나우스(Danaus)로[㈜ 참0. 아피. 1권. 26(231)] 불렀다고 합니다.



 16. 마네토 증언의 중요성



 이상은 마네토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목자라고 불리워지는 우리 조상들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우리나라에[㈜ 문자적으로는 \’여기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나우스(Danaus)가 아르고스(Argos)로 오기 393년 전의[㈜ 15장에서 열거된 열왕들의 총 통치기간을 합산해 보면 힉소스의 추방으로부터 세도스의 등극까지 다 해도 겨우 333년 밖에 안된 다. 이 기간에다가 요세푸스는 아피. 1권. 26(231)에 기록된 것처 럼 세도스의 통치기간 60년을 더 가산한 것으로 보인다.] 일임은 마네토스가 기록한 연수를 두고 보더라도 명백해 집니다.아르기브인들(Argives)은 다나우스를 애굽의 최고(最高)의 왕으로[㈜ 신화속의 이나쿠스(Inachus)가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어 졌다.] 인정하고 있는 점은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마네토는 애굽의 기록들로부터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사실에대하여 우리의 취지에 맞는 증거를 제시해 줍니다. 첫째로 우리유대 민족이 다른 나라에서 애굽으로 왔다는 사실과 둘째로 애굽에서의 탈출 사건이 시간상으로 트로이 전쟁보다 무려 1,000여년을 앞선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마네토가애굽의 기록들을 근거로 하기보다 출처가 분명치 않은 몇몇 이야기들을 기술한다고 스스로 고백하면서, 유대사에 첨가시킨 사건들을 저는 나중에[㈜ 아피. 1권. 26(227)이하] 반박하겠으며 그러한 이야기들은 한낱 ale을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17. 베니게의 증거



 그러므로 본인은 이제 애굽의 기록들로부터 눈을 돌려 베니게(페니키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록들을 언급하겠으며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우리 유대 민족의 기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이제까지 제가 말씀 드렸던 사실들을 증명해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오랜 역사 속에서 취한 기록들이 두로인들(Tyrians)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상당한 정확성을 지니고 있으며그들 민족에게 생겨난 여러 사건들에 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나라들과의 접촉에 관한 부분들도 관심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것임을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자면 예루살렘의 성전이솔로몬 왕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이것은 두로 사람들이 카르타고성을 건축하기 143년 8개월 전의[㈜ 두로의 왕들(Tyrian Kings)의 재위기간을 합산한 것이다. 아피. 1권. 18과 특히 아피. 1권. 18(126)을 보라. 카르타고(Carthage)의 건국연도에 대한 견해도 주전 1,234년에서 주전 793년까지 각기 다양하다.] 사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연대기에 보면 우리 유대의 성전 건축과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두로의 왕인 히람(Hirom)[㈜ 성경의 히람(Hiram)이 때로는 히롬(Hirom)으로 나온다.] 유대의 왕인 솔로몬(Solo-mon)과 친구 사이였으며, 그러한 우호관계는 그의 부친 때[㈜ 참). 삼하 5:1. 여기에 보면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하람과의 우정 을 물려받았던 사람이 솔로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터 그에게까지 이어 온 것이었다. 따라서 히람왕은 장엄한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크게 기여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120달란트나 되는 금을 솔로몬에게 선물하였으며, 리바누스(Libanus)라고 하는 산에서 가장 좋은 목재만을 잘라서 성전의 지붕을 장식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솔로몬에게 보냈다. 솔로몬 역시 그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보답하는 뜻으로 가불(Chabulon)이란[㈜ 왕상 9:10-13, 자서. 13(213)에 보면 이 지역의 이름은 분명히 가 볼로(Chabolo)로도 불리워지는 가불(Cabul)이란 성읍(혹은 마을) 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갈릴리의 한 지역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우정을 더욱 공고하게 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상호간에 철학적 열의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문제들을 서로 교환하였는데 이것은 서로의 문제점들을 풀어 주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다른 점에서도 그보다 지혜로왔지만 특히 이점에서는 그보다 우수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오갔던 많은 서한들이[㈜ 하람왕과 솔로몬의 성전을 지으면서 주고 받았던 서신에 관한 기사는 왕상 5장과 요세푸스의 고대. 8권. 2:6,7(50-54)에 설명되 어 있다. 그러나 이 문헌들에는 다음에 나오는 수수께끼에 대한 설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들의 출처는 아마도 시 바(Sheba)여왕과 그녀의 \’어려운 질문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왕상10:1)] 아직까지도 두로인들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제 말뿐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 저는 베니게 역사를 아주 정확하게 서술한 것으로 믿어지는 디우스(Diu-s)라는[㈜ 이와 똑같은 초록(抄錄)이 고대. 8권. 5:3(147)에 인용되어 있다. 디우스(Dius)에 관하여 이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사람을 중인으로 삼고자 합니다. 디우스는 \’베니게인의 역사\’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발루스(Abibalus)가 죽자 그의 아들 히람(Hirom)이 그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왕은 시의 동쪽 지역에 성을 쌓아도시를 확장시켰다. 그는 또한 전에는 섬 안에 홀로 서 있던 올핌피안 제우스(Olympian Zeus)의 신전을 도시와 연결시키기위해 도시와 섬 사이에다 둑길을 축조하였으며 금장식물로 신전을 치장하였다. 더욱이 그는 리바누스산에 올라가 목재들을 잘라 신전의 건축에 이용하였다. 그들은 계속 말하기를 솔로몬은그가 예루살렘의 왕위에[㈜ 혹은\’전제 군주\’.] 있을 당시 히람에게 문제들을 보내어풀도록 하였다. 또한 그러한 문제들을 풀어오도록 사람들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는 문제를 풀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를 푼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러자 히람은 이 제안에 동의하였으며 막상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된 그는 문제를 못푼 대가로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 아브데문(Abd-emun)이라는[㈜ 고대. 8권. 5:3(149)에 나오는 \”압데문\”(Abdeum)] 두로인이 그 문제를 풀었고 그가 솔로몬이 풀수 없는 다른 문제들을 제출하게 되자 솔로몬은 이제 히람에게엄청난 돈을 다시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디우스(Dius)에 의해 증명이 되어지며 우리가 이전에 이와 똑같은 주제들에 관해 언급했던 내용을 확인시켜 줍니다.



 18. 에베소의 메난데르



 이제 본인은 또 다른 증인으로서 에베소 사람(Ephesus)인 메난데르(Menander)라는[㈜ 다음에 나오는 초록이 고대. 8권. 5:3(144)에도 인용되었다. 이 저 자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인용한 말처럼 페르가뭄 (Pergamum)의 메난데르(Menander)와 동일한 인물인 것으로 추 측 된다. 이 초록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메넬라우 스(Menelaus)가 드로아(Troy)를 정복한 후 베니게(Phoenicia)를 방문했을 때에 히람은 솔로몬에게 그의 땅을 주어 혼인시켰다.\”] 사람을 추가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메난데르는 두로 왕들의 통치하에서 헬라인들과 야만인들이[㈜ \’야만인\’] 남긴 행적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두로인 자신의 기록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를 이해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메난데르는 두로를 통치해 온 왕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가운데 히람의 순서에 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비발루스(Abibalus)가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인 히람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53년을 살았으며 34년동안 다스렸다. 그는 또한 광장(the Broad Place)이라고[㈜ 본토에 있는 옛 두로(Tyre)와 새로운 섬도시를 연결시킴.] 불리우는 곳에다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제우스 신전에다가 황금기둥을[㈜ 유폴레무스에 따르면 솔로몬이 수론(=히람)에게 보낸 선물 : 유 세비우스 \’교회사\’ⅸ34, 헤로도투스 ⅱ.44.] 봉헌하였다. 그는 또한 리바누스라고 하는 산에 올라가서 목재들을 잘라내어백향목 목재들을 신전들의 지붕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는또한 예 신전들을 무터뜨리고 새로운 신전들을 건축하였으며 더우기 헤라클레스(Heracles)와 아스다롯(Astarte)의 신전들을봉헌하였다. 그는 먼저 페리티우스월(the month Peritius)에[㈜ 마게도냐 력으로 4번째(1월로 추정됨).] 헤라클레스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그는 조공을 바치지 않는 우티카 사람들(Utica)을 정벌하였다. 히람은 그들을 모두 정복한후에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히람왕의 통치 시기에 아브데문(Abdemun)이라는 나이 어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의 왕인 솔로몬이 풀도록 내준 문제들을 모두 풀어 낸 사람이었다.\”

 한편 히람왕으로부터 카르타고의 건설 시기까지의 기간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습니다.

 \”히람이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인 발바세르(Balbazer)가 그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는 17년간의 통치를 하고 43세에 죽었다. 그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아브다스타르투스(Abdastartus)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9년간의 통치를 하고 29세에 죽었다. 이때에그의 유모의 네 아들들이 그에 대한 음모를 꾸몄고 결국 그를 살해하였다. 유모의 아들 중 큰 아들 므두사스타르투스(Methu-sastartus)는 델레아스타르투스(Deleastartus)의 아들인데, 그가 등극하여 12년간 다스리다 54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뒤를이어 그의 형제인 아스다리무스(Astharymus)가 등극하여 9년간 다스리다가 54세의 일기로 죽었다. 그는 그의 형제인 펠레스(Phelles)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후에 펠레스는 왕권을 쥐었으나 겨우 8개월을 다스리고 50세에 죽었다. 그는 아스다롯의 제사장인 이도발(Ithobal)에게 살해되었으며 이도발은 32년간 통치하다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그의 아들 발레졸(Balezor)이 왕위를 계승하여 45세를 사는 동안 6년간 통치하였다.그 이후 그의 아들인 메텐(Metten)이 왕위를 계승하여 32세를사는 동안 29년간 통치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피그말리온(Pyg-malion)이 왕위를 계승하여 58세를 살면서 47년간 다스렸다. 한편 그의 재위 7년째 되던 해, 그의 누이는[㈜ 흔히 디도(Dido)로 알려진 엘리사(Elissa).] 그로부터 도망하여 리비아(Libya)에다 카르타고 시를 건설하였다.\”[㈜ 이 문단에서 요세푸스는 그의 권위성을 분명하게 부연 설명한다.]

 따라서 히람왕의 통치로부터 카르타고의 건설 시기까지의 총시간은 대략 155년 8개월 가량됩니다.[㈜ 개인적으로 통치를 하기 위하여 거물 인사들 사이에 부패가 행 해져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전체가 다 부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히람왕 재위 12년 되는 해에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의 자료는 알려지지 않는다. 고대. 8권. 3:1(62)에 보 면 이 건물의 완공이 히람왕이 통치한지 11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전 건축때부터 카르타고 성의 건축 때까지는 143년 8개월이 됩니다. 이제 제가 말씀드렸던 내용이 이미 완전히 확인이 되었기 때문에베니게인의 역사를 통해서 더 이상의 증거들을 제시할 필요가없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성전건축 훨씬 이전에 이 유대나라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전을 지은 것은 전쟁으로 전국을 장악하고 난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의 성경을 통해 저의 저서 \’유대고대사\’에서[㈜ 고대. 8권. 3:1(61)이하.] 분명히 증거한 요지입니다.



19. 갈대아 베로수스의 증거



 이제 저는 갈대아의 기록이나 문학에서 이제까지 기록된 우리에 관련된 사실들을 언급하겠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다른 여러가지 사건들에 있어서도 우리 유대의 서적들과 상당한 일치를보여줍니다. 베로수스(Berosus)는[㈜ 약 주전 330-250경의 바벨론의 벨(Bel)신전의 제사장으로서 적어 도 세권 이상의 바벨론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게다가 점성술과 천문학에 관한 저서들도 남겼다.] 제가 말씀드린 사실에 대한 증인입니다. 그는 갈대아 출생으로서 지식인들 사이에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가 헬라인들 사이에서 철학과 천문학에 관한 갈대아 책들을 출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이 베로수스라는 사람은 갈대아 민족의 최고(最古)의 기록에 근거하여 그 당시 발생한 대홍수의 역사와 그 홍수로 인한 인류의멸망에 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또한 이 기록은 홍수에 관한 모세의 기록과도 일치됩니다.[㈜ 고대. 1권.3:6(93)에 보면 홍수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발췌한 내용 이 언급되어 있다. 베로수스가 언급한 이름은 노아가 아니라 신 켈루스(Syncellus)로부터 알 수 있듯이 크시수드루스 (Xisuthru- s)였다] 또 베로수스는 인류의 기원이 된노아가 탓던 방주에 관하여서도 설명하는데 아르메니아의 산맥(Armenian mountains)의 일부에 그 배가 다다랐을 당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노아 후손의 계보를 남겨주며 거기다 연대기표를 첨가하였으며 마침내는 바벨론과 갈대아의 왕이었던 나보팔라살(Naopalassar)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의 행적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어떻게 그의 아들인 느부갓네살(Nabuchodonosor)을애굽과 유대를 치러 막강한 군대와 함께 보냈는지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와 애굽의 민족들이 그가 반역하였다는 소식들 듣고 행해졌는데, 그 군대의 힘으로 그들을 모두정복하고 우리의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렸으며[㈜ 다음에 나오는 발췌문에서는 이 성전의 화재가 언급되지 않았는 데 요세푸스에 의해 삽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느무갓네살왕 통 치시기에 위치가 전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민족들을 거의 다 조국으로부터 추방시켜 그들을 바벨론으로 이송시켰던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자 유대의 도시 예루살렘은 바사(Persia)의 왕 고레스(cyrus)가 등극하기까지 70년의 시간 동안 황폐해졌습니다. 베로수스는 말하기를 \”바벨론의 왕은 애굽과 수리아와 베니게와 아라비아를 정복하였는데 그의 업적은 바벨론과 갈대아 또는그보다 앞선 어떤 왕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주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베로수스(Berosus)의 이러한 설명은 그의 바벨론 역사서에 인용되어 있다\'(혹은 고대. 10권. (219)와 관련하여 나온다).] 저는 베로수스 자신의 설명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려고 합니다.[㈜ 이 문구는 고대. 10권. (220)이하에 인용되어 있다.]

 \”느부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보팔라살은 그가 애굽과 코엘레 수리아(Coele Syria)와 베니게를 통치하도록 세운 총독이 그를 반역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사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군대의 일부를 그 당시 어린 아들 느부갓네살에게 주어 그에게 모반을 꾀하는 총독을 치러 보내었다. 느부갓네살은 그들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그들을 정복하고 그 나라를 다시그의 지배하에 두도록 진압하였다. 한편 이때에 그의 아버지 나보팔라살은 병이 들었고, 21년의 통치를 끝으로 바벨론 성에서 죽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은 느부갓네살은 서둘러 애굽과 그 이외의 다른 나라의 정치 질서를 바로 잡은 뒤 유대와 베니게, 수리아와 애굽 민족에게서 취한 포로들을 그의 친구들에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중무장한 병력과 남은 짐들을 베벨론으로 호송하도록하는 한편 그는 서둘러 소수의 호위병들과 함께 사막을 지나 바벨론으로 왔다. 바벨론에 돌아온 그는 공공 업무들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으며, 그들 중 주요 인물들이 자기를 위해 나라를 보존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그는 이제 그의아버지가 누렸던 지배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령하기를 바벨론의 가장 적절한 장소에 포로들을 수용하여 식민지처럼 하라고 명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벨(Bel)신전과 다른 신전들을 그가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들로 우아하게 장식하였다. 또한 바벨론 성을 보수하여 훗날 어느 누구도 그 성을손쉽게 쳐들어와 물줄기를 바꾸어 그 성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러한 요새화 작업을 위하여 내부 성곽에 3개의 벽을 쌓았고 바깥 성곽에도 3개의 벽을 쌓았다. 그는 일부 벽들을구운 벽돌과 역청으로, 그리고 어떤 것은 단지 벽돌만으로 쌓았다. 또한 이처럼 엄청난 규모로 성을 요새화하고 뛰어난 기술로문들을 장엄하게 치장한 다음, 그는 그의 아버지가 살았던 궁전가까이에 새로운 궁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훨씬 더 놓고화려한 궁전이었다. 이 사실을 기록하자면 너무 많은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간략하게 기록하면 웅장하고 거대한 만큼 그궁전 건립은 15년이나 걸려서 끝났다. 그 궁전 안에다 그는 돌기둥들로 지탱해 만든 매우 높은 고가도로를 건축하였고, 소위\’가(架)공원\'(hanging garden)이라고[㈜ 고대 세계의 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간주됨. 보다 충분한 설명 이 크테시아스(Ctesias)의 디오도루스(Diodorus) ⅱ : 7이하에 인 용되어 있다.] 하는 공원을 건립하여 그곳에 온갖 나무를 심어 마치 산이 많은 시골을 꼭닮은 경치를 만들었다. 그가 이같이 건설한 것은 그의 왕비를 기쁘게 하려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녀가 메대(Media)에서 자라났으며 따라서 산이많은 전경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20. 베로수스의 다른 증거



 이상이 베로수스가 느부갓네살왕에 관한 그의 저서 \’갈대아 역사\’ 제3권에서 기록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헬라 역사가들에[㈜ 4세기 사람 크테시아스는(Ctesias) 앗수르 제국의 신화적 창건자 인 세미라미스(Semiramis)와 니누스(Ninus)의 이야기에 관해 대 권위자임. 참). 헤로도투스, ⅰ. 184] 대한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앗수르의 여왕인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바벨론을 건설하였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가 그 장엄한 건축물들이 마치 그녀 자신의 공적인 양 거짓되게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일들에서 보듯이그의 저서\’갈대아의 역사\’는 가장 신임할 만한 책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베로수스가 말한 사실들, 즉 모든 수리아와 베니게를정복하였다는 사실들은 느부갓네살왕에 관한 베니게인들의 유물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에 관해서는 필로스트라투스(Philostratus)도[㈜ \’인도와 베니게의 역사\'((Indian and Phoenician History)의 저 자 필로스트라투스(Philostratus)는 요세푸스 저서에만 유일하게 언급된다. 참). 고대. 10권. 11:1(228)] 다른 역사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두로의 포위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인도의 역사\'(Indian History)를 쓴 메가스데네스(Megas-thenes)도[㈜ 후기 헬라 저술가들이 인도에 관한 지식을 얻는데 주로 영향을 입었던 이 저자는 셀류쿠스 Ⅰ세의 대사로 주전 약 300년경 인 도의 왕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게로 파송되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앞서 언급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헤라클레스(Heracles)보다 힘이 강하며위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증거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똑같은 문구가 고대. 10권. 11:1(227)에 언급되었고, 또한 유 세비우스의\’복음에의 준비 \'(Praep. Evang.) ⅸ. 41에도 인용되 어 있다] 필로스트라투스는 그 왕이 리비아의 대부분과 이베리아(Ibe-ria)도 정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아피. 1권. 19(132)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분명히 이러한 주장 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 예루살렘 성전에 관해말씀드리겠는데, 이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고레스(Cyrus)왕이 아시아를 제패하게 되자 다시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베로수스의 기록을 조금만 더 인용하면 분명하게 증명이 될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느부갓네살왕은 앞서 말한 벽들을 축조하기 시작한후 병이 들었고 43년간의 통치를 마치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Evilmaraduch)이 왕위에올랐다. 그는 불법적이고도 불손한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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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권 11-20 아피온(Apion)에 대한 요세푸스의 반박과 유대인의 고대성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1. 저서의 주제


     제가 본론에서 떠나 잠시 지엽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은 역사를 기록하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충분히 말씀드렸듯이 고대의 역사를 전승시켜 주는 관습은 헬라인들보다도 야만족으로 칭해지는 사람들[㈜ ‘야만인’.] 사이에서 더욱 온전히 보존되어져 왔습니다 먼저[㈜ 아피. 1권. 12(60-68)] 저는 유대의 기원이 얼마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들에 대해 몇마디 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마치 헬라 역사가들이 유대민족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 다음[㈜ 아피. 1권. 13-23(69-218)] 저는 유대국의 고대성에 관한 증거를 외국인들의 글에서 찾아 제시하겠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아피. 1권. 24(219)-아피. 2권. 13(144)] 우리 민족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매우 부당하다는 사실을 예증하겠습니다.


      12. 유대역사에 대한 헬라역사가들의 침묵


     한편 우리 유대민족은 해양국가에 거주하는 것도 아니며, 장사로 재미를 보거나 또는 그런 나라의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성읍들은 바다로부터멀리 격리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복받은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에 오직 이 땅을 경작하면서 고생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모든 백성들에 대한 주요 관심사는 우리의 자녀들을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유대민족은 우리에게 내려온율법들을 지키며 지금까지 전승된 경건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우리 일생 중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니고있기 때문에 고대에도 헬라인들과 관계를 맺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상품을 수출입하는 애굽인이나 또한 해변가에서 살던 베니게인들이 장사에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 헬라와관계를 갖던 사실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라서 강도짓을[㈜ 투키디데스 ⅰ.5이하. 미노스(Minos)시대 이전에 그는 해적이 존경스러운 직업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참). 호머 ‘오딧세 이’ⅲ. 71이하.] 하거나 또는 수많은 용사들이 있었음에도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외국과 전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베니게인들이 무역과항해술로 헬라 세계까지 금방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베니게인들의 중개로 애굽인들도 헬라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베니게인들이 애굽 상품을 지중해를 건너 헬라로 운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를 지배했던 메대(Medes)와 바사인들(Per-sians),도 헬라인들에게 잘 알려졌는데 대륙을 건너 유럽에까지군대를 이끌고 원정했던 바사인들은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트라키아 사람들(Thracians)도 인접국이었으므로 헬라인들에게 익히 알려질 수 있었으며 스구디아 사람들(Scythians)은 본도(Pontus)로 항해해 간 사람들에 의해 헬라인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모든 해양 민족들과 동해나 서해 근처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해양으로부터 멀리떨어져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헬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례는 유럽에 관해서도 적용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많은 전쟁들에서 엄청난 활동을 수행해온 로마시에 대해서 헤로도투스(Herdotus)나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물론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이 헬라인들에게[㈜ 할리카르나수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Halicarnassus)저 서인 주전 1세기의 ‘로마고대사’ⅰ. 4, 2 :”로마시의 고대사는 거의 모든 헬라인들에게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지게 되었던 것은 매우 뒤늦은 때였고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역사가들조차도 [예를 들어 에포루스(Ephorus)] 골 사람들(Gauls)이나 스페인 사람들(Iberians)에 관해 아주 무지하였기 때문에 지구 서쪽의 광활한 지역을 접하며 살아가는 스페인 사람들이 겨우 한 개의 도시에서 살 것이라고 짐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가들은 골사람들이나 스페인 사람들이 사용하지도 않은 풍습들을 감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들이 그들의 삶에 관한 실상을 잘 알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과[㈜ 혹은, 추측컨대'(이민족들의)세계로부터의 완전한 격리에 의해’.] 아무런 교역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처럼 거짓 사실을 기록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한 사실들을 아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국이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생활의 모습 또한 독특하기 때문에 많은 헬라 사람들이 우리민족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들의 기록에 언급을 하지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3. 유대의 고대성에 대한 여러 나라의 증거


     역사가들의 저술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원이 오래지않았다는 사실이 성립된다면 이것을 헬라인에게 거꾸로 적용할수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저술에 헬라인이 언급되지 않았으니헬라인들의 기원도 얼마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해헬라인들도 웃어 넘기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고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근 국가들의 기록에서 그 증거를 대려고 할 것입니다. 저자는 이제 이와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저는 유대의 고대성을 입증해 줄 중요한 증인으로 애굽 사람들과 베니게 사람들을 인용할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악의를 품어온 사람들로 유명하므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증거를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악의는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히 심했으며, 두로인(The Tyrians)이라고 알려진 베니게 사람들(Phoenicians)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갈대아인들(Chaldaeans)은 이와는 경우가 달랐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초창기 지도자와 조상들이 그들 민족에게서 유래했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 가운데 있는 그들의 친족 관계 때문에 그들의 기록에다 유대 민족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남과 관련된 사실에 한하여는 저는 공정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일부 헬라인들이 유대인을 언급한 사실도 생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공연히 유대인을 시기하는 자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애굽인 마네토의 증거


     저는 먼저 애굽인들의 역사 기록에서부터 언급을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저는 애굽 문자를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기록은 애굽어로 쓴 역사를 보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네토(Manetho)라는[㈜ 톨레미(Ptolemy) Ⅰ,Ⅱ세 지배하에 살았던 애굽의 제사장으로 추 정됨. “그는 애굽의 기록에 근거하여 자기 나라의 교리, 지혜, 역 사, 연대기 등을 헬라어로 설명해 주었던 최초의 사람”으로 그의 역사서는 세 권으로 나뉘어졌다.] 매우 현명한 애굽 태생의 사람이있는데 그는 헬라어에 능통합니다. 그는 자기 나라인 애굽의 역사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록을’거룩한 책들'(The Sacred books)로부터[㈜ 혹은 ‘서판들’] 인용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헤로도투스가 애굽의 역사에 관한 무지와 편견 때문에 잘못 기록한 사항들을 많이 찾아냈습니다. 한편그는’애굽역사’제2권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바로 이 사람을 마치 증인으로 채택하여 법정으로 데려온 것처럼 그의 한 말들을 그대로기록하겠습니다.

     “토티마이우스(Tutimaeus)라는 왕이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그의 통치기간 중에 신께서 애굽인을 저버리신 일이 발생하였다. 그때 동방으로부터 갑자기 미개한출신들이 일어나 우리들을 침공해 왔다. 그들의 침입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힘든 전쟁도 하지 않고 우리 나라를 손쉽게 무력으로 장악하였다. 그들은 애굽의 지도자들을 굴복시키고 난 후에 우리의 성읍들을 불태웠고, 신전들을 파괴하였으며매우 야만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다루었다. 일부는 무참하게 학살되었고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은[㈜ ‘남자들과…아내들과 아이들을 학살함’으로 추정됨] 노예로 전락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한 사람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그의 이름은 살리티스(Salitis)였다. 그도 또한 멤피스(Memphis)에서 살았으며상부 애굽과 하부 애굽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히 조세를 부과하고 적절한 여러 곳에는 수비 대원들을 남겨 두었다. 주로 그는 동부지역의 안보에 중점을 두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 가장 막강한 세력을 지녔던 앗수르(Assyrians)가 애굽을 탐하여 침략할것을 예견하였던 까닭이다. 그는 사이테 노모스(The SaiteNomos : Sethroite)에 그의 목적에 적절한 도시를 건립하였다.이 도시는 부바스티스 해협(The Bubastis Channel)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 신학적인 관념을 곁들여서 아우아리스(Auaris : 탐욕)라고[㈜ 참). 아피. 1권. 26(237). 아우아리스(Auaris)는 아마도 펠루시움 (Pelusium)일 것이다.] 이름하였다. 그는 이 성 주위 벽을 다시 세움으로써더욱 강하게 하였으며, 무려 240,000명이나 되는 수비대원들을 무장시켜서 그 성읍 안에 투입시켰다. 살리티스는 매년 여름철마다 그곳을 방문하였는데 그것은 식량을 거둬들일 목적도 있었지만 군사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그들을 훈련시켜서 외국인들을 위협코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살리티스가 19년의 통치를마친 후에는 브논(Bnon)이라는 사람이 그 뒤를 이어 44년간 지배하였다. 그 다음에는 아파크나스(Apachnas)라는 사람이 뒤를 이어 36년 7개월 동안 지배하였다. 그 뒤를 이어 아포피스(Apophis)라는 사람이 나와서 61년을 지배했으며 얀나스(Jan-nas)라는 사람이 그 뒤를 이어 50년 1개월 지배하였다. 마지막으로 아시스(Assis)라는 사람이 49년 2개월을 지배하였다. 이여섯 사람은 그들의 야망을 점차로 확대시켰지만 특히 첫 번째지배자는 애굽을 뿌리채 멸망시키고자 했다. 이 왕국은 힉소스(Hycsos),[㈜ 정확한 형태는 힉쿠소스(Hucussos)로서 뜻은(W.E. Crum에 따르 자면)’남 수리아지역) 베다윈(Bedawin)의 촌장'(Hastings의 ‘B.D’.i.659b). 최근 주석에서 그는 이 단어 마지막 음절인 sos 의 의미를 ‘목자’로 해석하고 있다. 힉소스의 지배는 주 전1,800년경부터 주전 1,58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제 18 대 왕조를 세운 아모세(Ahmose)에 결국 추방을 당하였다. 그들 이 유대인과 관계성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 나 몇몇 비평가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Dr. H. R. Hall)의 출애굽 기에 기록된 사실대로 그들이 추방되었다고 말한 요세푸스의 기 록은 옳은 것이다.] 즉 목자 – 왕(King-shepherds)으로 불렀다. 힉소스의 첫음절인 힉(HYC)은 거룩한 방언(sacred dialect)으로 ‘왕’이라는 뜻이며, 일반 방언(common dialect)인 소스(SOS)는 목자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힉소tm(HYCSOS)는 이 두말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그런데 어떤 다른 사본에서는 이 단어가 ‘왕들’을 뜻하지 않고 반대로 그 목자들은 ‘포로’라는 뜻이며 이것은 분사인 힉(HYC)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기음(氣音:aspiration)으로 시작되는 학(HAC)뿐만 아니라 힉(HYC)은’포로’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문구가 진짜라면 ‘또 다른 사본에서’란 표현의 의미는'(마네토의) 또 다른 저서에서는’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 참). 아피. 1권.14(91). 그러나 여기에서 사본(ajntivgrafon)이란 단어를 책(bivblo”)이란 단어와 혼용할 수는 없으며 이 단락은 다른 문제를 내포하지 않은가 의심이 간다. 즉(1)아피. 1권. 14(91)에서는 bivblo”한 단어만이 반복되어 있다는 점. (2)요세푸스의 사본 ; 아피. 1권. 14(91)에서는’요세푸스의 저작’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이는 ‘또 다른 사본에서’라는 문구에서 발견된 이문(異文)에 관하여 언급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괄호로 묶 어진 문장은 본문으로 삽입된 주석 비슷한 것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본’이란 말이 사실 그런 뜻이었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 주제를 보다 심도있게 다뤘던 사람으로서 ‘유대고대사’를 개정하면서 이 부분도 수정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생각해 보건대 이와같은 해석 속에는 또 다른 사본의 잔재가 있을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언급된 ‘견해’는 힉소스가 유대인들의 조상이었던 아랍인들이었다는 것으로서 요세푸스는 이 견해를 나중의 것보다도 더 가능성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견해가 저에게도 보다 타당성이 있으리라 보이며 고대사에 더 합치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마네토에 따르면 앞에서 왕이라 이름하거나 목자라고 부르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511년동안이나 애굽을 지배했습니다 그때[㈜ 이 단락에서 요세푸스는 마네토에 대한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데바이드(Thebaid)의왕들과 애굽의 여타 지역의 왕들은 목자들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지긋지긋하고도 긴 전쟁이 그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미스프라그무도시스(Misphragmouthosis)라는 이름을가진 왕에게 목자들은 정복당했으며 그들은 애굽의 다른 지역으로 축출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우아리스(Auaris)라는이름의 10,000 아루래(arourae)[㈜ 문자적으로는’10,000 아루래(arourae)의 영역을 지닌’. 아루래 는 애굽의 측량 단위로서 약 1/2에이커에 해당하며 요세푸스는 이 부연설명을 하면서 길이의 단위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같 다. 아우아리스(Auaris)에 대해서는 아피. 1권. 14(78)을 보라.]의 땅에 완전히 갇히게 되었습니다.

     마네토는 말하기를 “그 목자들은 이 지역의 온 둘레에 거대하고 강한 벽으로써 둥그런 벽을 쌓았다. 이 벽들은 아주 그들의재산과 전리품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하려고 쌓은 것이었다. 그러나 미스프라그무도시스의 아들 둠모시스(Thoummosis)는 480,000의 대군을 이끌고 그들을 포위하여 강제로 그 재산을강탈하려 하였다. 그러나 무력으로 그 지역을 점령시킬 가능성이 사라지자 목자들과 화해하였고 어느 곳을 가든지 해를 받지않고 애굽을 떠날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은 화해하게 됨에 따라240,000여 명에[㈜ 수비대의 수에 관하여는 아피. 1권. 14(78)에 언급되어 있다.] 달하는 백성들과 재산을 가지고 광야를 지나애굽에서 수리아(Syria)로 향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시아에서지배자로 군림하던 앗수르(Assyria)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유대라는 나라 안에다 240,000명이라는 많은 수의 백성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성읍을 건설하였는데 그 성읍을 예루살렘(J-erusalem)이라 일컬었다.” 다른 책에서 마네토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은 그의 나라의 성경(The Sacred books)에서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성경에’. 아피. 1권. 14(92)의 글을 애굽 의 서적들을 의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로들(The Captives)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이 아주 먼 옛날에 종사하던 일은 양을 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양을 치며 유랑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목자들이라고 일컬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또한 애굽의 포로로 일컬어졌다는 사실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들 중의 한 사람인 요셉(Joseph)은 애굽의 왕에게[㈜ 성경의 내용에 보면 그는 그의 술맡은 자에게 말했다(창40:5). 플 로렌틴(Florentine) 사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난외주를 첨가시킨 다 : 또 ‘다른 사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케 된다 : 그 의 형제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결국 애굽의 왕에게까지 나 아갔다 : 그리고 다시 그는 왕의 재가를 얻어 그의 형제들을 데 리러 사람을 보냈다.’] 이르기를 그가 포로이며 후에 왕의 허락을 받아 그의 형제들을 애굽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좀더 상세하게 다루겠습니다.[㈜ 아피. 1권. 26(227)이하를 주의해서 살펴보면 그가 마네토에게로 귀속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5. 애굽의 왕들


     그러나 이제 저는 우리 민족의 고대성에 관한 증인으로서 애굽 사람들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에서 마네토의 말과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그의 글을 인용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민족, 혹은 목자들이 애굽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난 후, 그들을 내쫓은 왕인 테드모시스(Tethmosis)가[㈜ 위의 아피. 1권. 14(88)에서는 둠모시스(Thoummosis)로 불려짐. 이는 아마 아피. 1권. 15(96)의 드모시스(Thmosis)라고 써야 옳 을 것이다.] 25년 4개월을 통치하다가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인 케브론(Chebron)이 13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그가 죽자 아메노피스(Amenophis)가20년 7개월간 다스렸다. 그 이후 그의 누이인 아메세스(Amesses)가 21년 9개월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메프레스(Mephres)가 12년 9개월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메프라무도시스(Mep-hramuthosis)가 25년 10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드모시스(Thmosis)가 9년 8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아메노피스(Amenophis)가 30년 10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오루스(Orus)가 36년 5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에 그의 딸인 아켄케레스(Akencheres)가 12년 1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후 아켄케레스가 12년 5개월을 다스렸으며, 그후 또 다른 아켄케레스가 12년 3개월간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하르마이스(Har-mais)가 4년 1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라메세스(Ramesses)가 1년 4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하르메세스 미아문(Harmeses Miamoun)이 66년 2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아메노피스(Amenophis)가 19년 6개월간 다스렸으며, 그 뒤를 이어 라메세스라고도 부르는 세도시스(Set-hosis)[㈜ 아마도 “세도스”(Sethos) 참). 아피. 1권. 26(231)]가 다스렸다. 기병과 함대를 가진 이 왕은 그의 형제인하르마이스(Harmais)를[㈜ 아피. 1권. 26(231)에서는 헤르마이우스로 칭해짐.] 애굽을[㈜ 그 사본에는 난외주가 나와있다. “또 다른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견된다. ‘그 이후로 세도시스(Sethosis)와 라메세스 (Ramesses) 두 형제가 등극했다. 세도시스는 매우 강한 해군력 을 가지고 많은 인명을 살상시키는 적들을 방어하였다. 얼마 후 그는 라메세스, 하르마이스(Harmais), 그의 형제 중의 또 다른 한 사람과 애굽의 총독을 살해하였다.'”각주 55를 보라 그리고 홍해에서의 세도스의 해상활동에 관하여는 ‘헤로도투스’ⅱ. 102와 고대. 8권. 10:3(260) 이하를 보라. 헤로도투스는 그를 세 소스트리스(Sesostris)로 칭하였고 요세푸스는 그를 르호보암의 적이었던 시삭(Shishak)으로 간주하였다. 라메세스와 세도스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본문에서는 라 메세스가 세도스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하며 난외주에서는 그 가 세도스의 형제라고 씌여 있다. 아피. 1권. 26(231)에는 라메세 스가 세도스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다스리는 총독으로 삼았다. 그는 또한 그의 형제에게 왕의 모든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단지 몇가지의 금지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왕관을써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자기 자녀들의 어미인 왕비에게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과, 왕의 다른 첩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들었다. 그러는 동안 왕은 구브로(Cyprus)와 베니게(Pho-enicia) 뿐만 아니라 앗수르(Assyria)와 메대(Medes)에까지 원정을 했다. 그는 이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였는데 일부는 군사력으로, 일부는 싸우지도 않고, 일부는 그의 엄청난 대군의 위용으로 이를 가능케 했다. 그가 거두어 온 계속된 전승에 고무된 왕은더욱 대담해져서 동부에 위치해 있는 성읍들과 나라들을 계속정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자 애굽에 남은 하르마이스는 왕에게 대항할 셈으로 그의 형인 왕이 금지한 사항들을 두려움도 없이 행하였다. 왕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왕의 첩들을 남김없이 계속적으로 건드려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의 권고를 듣고 그는 왕관을 썼으며 결국 그의 형인 왕에게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제사장들을 다스리는 직을 가진 한사람이 일어난 모든 사항들과 그의 동생이 형인왕에게 얼마나 반역적인가에 관해 알리는 편지를 썼다. 이에 왕은 즉시 펠루시움(Pelusium)으로 돌아와 그의 왕위를 다시 회복하였다. 또한 그가 아이깁투스(Aegyptus)라고 불려지는 것을따라 그 나라의 이름도 불려지게 되었다. 또한 마네토는 세도스(Sethos)는 아이굽투스(Aegyptus)로, 그의 동생 하르마이스(Harmais)는 다나우스(Danaus)로[㈜ 참0. 아피. 1권. 26(231)] 불렀다고 합니다.


     16. 마네토 증언의 중요성


     이상은 마네토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목자라고 불리워지는 우리 조상들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우리나라에[㈜ 문자적으로는 ‘여기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나우스(Danaus)가 아르고스(Argos)로 오기 393년 전의[㈜ 15장에서 열거된 열왕들의 총 통치기간을 합산해 보면 힉소스의 추방으로부터 세도스의 등극까지 다 해도 겨우 333년 밖에 안된 다. 이 기간에다가 요세푸스는 아피. 1권. 26(231)에 기록된 것처 럼 세도스의 통치기간 60년을 더 가산한 것으로 보인다.] 일임은 마네토스가 기록한 연수를 두고 보더라도 명백해 집니다.아르기브인들(Argives)은 다나우스를 애굽의 최고(最高)의 왕으로[㈜ 신화속의 이나쿠스(Inachus)가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어 졌다.] 인정하고 있는 점은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마네토는 애굽의 기록들로부터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사실에대하여 우리의 취지에 맞는 증거를 제시해 줍니다. 첫째로 우리유대 민족이 다른 나라에서 애굽으로 왔다는 사실과 둘째로 애굽에서의 탈출 사건이 시간상으로 트로이 전쟁보다 무려 1,000여년을 앞선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마네토가애굽의 기록들을 근거로 하기보다 출처가 분명치 않은 몇몇 이야기들을 기술한다고 스스로 고백하면서, 유대사에 첨가시킨 사건들을 저는 나중에[㈜ 아피. 1권. 26(227)이하] 반박하겠으며 그러한 이야기들은 한낱 ale을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17. 베니게의 증거


     그러므로 본인은 이제 애굽의 기록들로부터 눈을 돌려 베니게(페니키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록들을 언급하겠으며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우리 유대 민족의 기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이제까지 제가 말씀 드렸던 사실들을 증명해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오랜 역사 속에서 취한 기록들이 두로인들(Tyrians)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상당한 정확성을 지니고 있으며그들 민족에게 생겨난 여러 사건들에 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나라들과의 접촉에 관한 부분들도 관심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것임을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자면 예루살렘의 성전이솔로몬 왕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이것은 두로 사람들이 카르타고성을 건축하기 143년 8개월 전의[㈜ 두로의 왕들(Tyrian Kings)의 재위기간을 합산한 것이다. 아피. 1권. 18과 특히 아피. 1권. 18(126)을 보라. 카르타고(Carthage)의 건국연도에 대한 견해도 주전 1,234년에서 주전 793년까지 각기 다양하다.] 사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연대기에 보면 우리 유대의 성전 건축과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두로의 왕인 히람(Hirom)[㈜ 성경의 히람(Hiram)이 때로는 히롬(Hirom)으로 나온다.] 유대의 왕인 솔로몬(Solo-mon)과 친구 사이였으며, 그러한 우호관계는 그의 부친 때[㈜ 참). 삼하 5:1. 여기에 보면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하람과의 우정 을 물려받았던 사람이 솔로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터 그에게까지 이어 온 것이었다. 따라서 히람왕은 장엄한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크게 기여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120달란트나 되는 금을 솔로몬에게 선물하였으며, 리바누스(Libanus)라고 하는 산에서 가장 좋은 목재만을 잘라서 성전의 지붕을 장식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솔로몬에게 보냈다. 솔로몬 역시 그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보답하는 뜻으로 가불(Chabulon)이란[㈜ 왕상 9:10-13, 자서. 13(213)에 보면 이 지역의 이름은 분명히 가 볼로(Chabolo)로도 불리워지는 가불(Cabul)이란 성읍(혹은 마을) 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갈릴리의 한 지역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우정을 더욱 공고하게 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상호간에 철학적 열의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문제들을 서로 교환하였는데 이것은 서로의 문제점들을 풀어 주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다른 점에서도 그보다 지혜로왔지만 특히 이점에서는 그보다 우수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오갔던 많은 서한들이[㈜ 하람왕과 솔로몬의 성전을 지으면서 주고 받았던 서신에 관한 기사는 왕상 5장과 요세푸스의 고대. 8권. 2:6,7(50-54)에 설명되 어 있다. 그러나 이 문헌들에는 다음에 나오는 수수께끼에 대한 설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들의 출처는 아마도 시 바(Sheba)여왕과 그녀의 ‘어려운 질문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왕상10:1)] 아직까지도 두로인들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제 말뿐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 저는 베니게 역사를 아주 정확하게 서술한 것으로 믿어지는 디우스(Diu-s)라는[㈜ 이와 똑같은 초록(抄錄)이 고대. 8권. 5:3(147)에 인용되어 있다. 디우스(Dius)에 관하여 이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사람을 중인으로 삼고자 합니다. 디우스는 ‘베니게인의 역사’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발루스(Abibalus)가 죽자 그의 아들 히람(Hirom)이 그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왕은 시의 동쪽 지역에 성을 쌓아도시를 확장시켰다. 그는 또한 전에는 섬 안에 홀로 서 있던 올핌피안 제우스(Olympian Zeus)의 신전을 도시와 연결시키기위해 도시와 섬 사이에다 둑길을 축조하였으며 금장식물로 신전을 치장하였다. 더욱이 그는 리바누스산에 올라가 목재들을 잘라 신전의 건축에 이용하였다. 그들은 계속 말하기를 솔로몬은그가 예루살렘의 왕위에[㈜ 혹은’전제 군주’.] 있을 당시 히람에게 문제들을 보내어풀도록 하였다. 또한 그러한 문제들을 풀어오도록 사람들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는 문제를 풀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를 푼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러자 히람은 이 제안에 동의하였으며 막상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된 그는 문제를 못푼 대가로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 아브데문(Abd-emun)이라는[㈜ 고대. 8권. 5:3(149)에 나오는 “압데문”(Abdeum)] 두로인이 그 문제를 풀었고 그가 솔로몬이 풀수 없는 다른 문제들을 제출하게 되자 솔로몬은 이제 히람에게엄청난 돈을 다시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디우스(Dius)에 의해 증명이 되어지며 우리가 이전에 이와 똑같은 주제들에 관해 언급했던 내용을 확인시켜 줍니다.


     18. 에베소의 메난데르


     이제 본인은 또 다른 증인으로서 에베소 사람(Ephesus)인 메난데르(Menander)라는[㈜ 다음에 나오는 초록이 고대. 8권. 5:3(144)에도 인용되었다. 이 저 자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인용한 말처럼 페르가뭄 (Pergamum)의 메난데르(Menander)와 동일한 인물인 것으로 추 측 된다. 이 초록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메넬라우 스(Menelaus)가 드로아(Troy)를 정복한 후 베니게(Phoenicia)를 방문했을 때에 히람은 솔로몬에게 그의 땅을 주어 혼인시켰다.”] 사람을 추가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메난데르는 두로 왕들의 통치하에서 헬라인들과 야만인들이[㈜ ‘야만인’] 남긴 행적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두로인 자신의 기록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를 이해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메난데르는 두로를 통치해 온 왕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가운데 히람의 순서에 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비발루스(Abibalus)가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인 히람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53년을 살았으며 34년동안 다스렸다. 그는 또한 광장(the Broad Place)이라고[㈜ 본토에 있는 옛 두로(Tyre)와 새로운 섬도시를 연결시킴.] 불리우는 곳에다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제우스 신전에다가 황금기둥을[㈜ 유폴레무스에 따르면 솔로몬이 수론(=히람)에게 보낸 선물 : 유 세비우스 ‘교회사’ⅸ34, 헤로도투스 ⅱ.44.] 봉헌하였다. 그는 또한 리바누스라고 하는 산에 올라가서 목재들을 잘라내어백향목 목재들을 신전들의 지붕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는또한 예 신전들을 무터뜨리고 새로운 신전들을 건축하였으며 더우기 헤라클레스(Heracles)와 아스다롯(Astarte)의 신전들을봉헌하였다. 그는 먼저 페리티우스월(the month Peritius)에[㈜ 마게도냐 력으로 4번째(1월로 추정됨).] 헤라클레스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그는 조공을 바치지 않는 우티카 사람들(Utica)을 정벌하였다. 히람은 그들을 모두 정복한후에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히람왕의 통치 시기에 아브데문(Abdemun)이라는 나이 어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의 왕인 솔로몬이 풀도록 내준 문제들을 모두 풀어 낸 사람이었다.”

     한편 히람왕으로부터 카르타고의 건설 시기까지의 기간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습니다.

     “히람이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인 발바세르(Balbazer)가 그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는 17년간의 통치를 하고 43세에 죽었다. 그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아브다스타르투스(Abdastartus)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9년간의 통치를 하고 29세에 죽었다. 이때에그의 유모의 네 아들들이 그에 대한 음모를 꾸몄고 결국 그를 살해하였다. 유모의 아들 중 큰 아들 므두사스타르투스(Methu-sastartus)는 델레아스타르투스(Deleastartus)의 아들인데, 그가 등극하여 12년간 다스리다 54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뒤를이어 그의 형제인 아스다리무스(Astharymus)가 등극하여 9년간 다스리다가 54세의 일기로 죽었다. 그는 그의 형제인 펠레스(Phelles)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후에 펠레스는 왕권을 쥐었으나 겨우 8개월을 다스리고 50세에 죽었다. 그는 아스다롯의 제사장인 이도발(Ithobal)에게 살해되었으며 이도발은 32년간 통치하다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그의 아들 발레졸(Balezor)이 왕위를 계승하여 45세를 사는 동안 6년간 통치하였다.그 이후 그의 아들인 메텐(Metten)이 왕위를 계승하여 32세를사는 동안 29년간 통치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피그말리온(Pyg-malion)이 왕위를 계승하여 58세를 살면서 47년간 다스렸다. 한편 그의 재위 7년째 되던 해, 그의 누이는[㈜ 흔히 디도(Dido)로 알려진 엘리사(Elissa).] 그로부터 도망하여 리비아(Libya)에다 카르타고 시를 건설하였다.”[㈜ 이 문단에서 요세푸스는 그의 권위성을 분명하게 부연 설명한다.]

     따라서 히람왕의 통치로부터 카르타고의 건설 시기까지의 총시간은 대략 155년 8개월 가량됩니다.[㈜ 개인적으로 통치를 하기 위하여 거물 인사들 사이에 부패가 행 해져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전체가 다 부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히람왕 재위 12년 되는 해에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의 자료는 알려지지 않는다. 고대. 8권. 3:1(62)에 보 면 이 건물의 완공이 히람왕이 통치한지 11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전 건축때부터 카르타고 성의 건축 때까지는 143년 8개월이 됩니다. 이제 제가 말씀드렸던 내용이 이미 완전히 확인이 되었기 때문에베니게인의 역사를 통해서 더 이상의 증거들을 제시할 필요가없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성전건축 훨씬 이전에 이 유대나라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전을 지은 것은 전쟁으로 전국을 장악하고 난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의 성경을 통해 저의 저서 ‘유대고대사’에서[㈜ 고대. 8권. 3:1(61)이하.] 분명히 증거한 요지입니다.


    19. 갈대아 베로수스의 증거


     이제 저는 갈대아의 기록이나 문학에서 이제까지 기록된 우리에 관련된 사실들을 언급하겠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다른 여러가지 사건들에 있어서도 우리 유대의 서적들과 상당한 일치를보여줍니다. 베로수스(Berosus)는[㈜ 약 주전 330-250경의 바벨론의 벨(Bel)신전의 제사장으로서 적어 도 세권 이상의 바벨론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게다가 점성술과 천문학에 관한 저서들도 남겼다.] 제가 말씀드린 사실에 대한 증인입니다. 그는 갈대아 출생으로서 지식인들 사이에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가 헬라인들 사이에서 철학과 천문학에 관한 갈대아 책들을 출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이 베로수스라는 사람은 갈대아 민족의 최고(最古)의 기록에 근거하여 그 당시 발생한 대홍수의 역사와 그 홍수로 인한 인류의멸망에 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또한 이 기록은 홍수에 관한 모세의 기록과도 일치됩니다.[㈜ 고대. 1권.3:6(93)에 보면 홍수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발췌한 내용 이 언급되어 있다. 베로수스가 언급한 이름은 노아가 아니라 신 켈루스(Syncellus)로부터 알 수 있듯이 크시수드루스 (Xisuthru- s)였다] 또 베로수스는 인류의 기원이 된노아가 탓던 방주에 관하여서도 설명하는데 아르메니아의 산맥(Armenian mountains)의 일부에 그 배가 다다랐을 당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노아 후손의 계보를 남겨주며 거기다 연대기표를 첨가하였으며 마침내는 바벨론과 갈대아의 왕이었던 나보팔라살(Naopalassar)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의 행적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어떻게 그의 아들인 느부갓네살(Nabuchodonosor)을애굽과 유대를 치러 막강한 군대와 함께 보냈는지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와 애굽의 민족들이 그가 반역하였다는 소식들 듣고 행해졌는데, 그 군대의 힘으로 그들을 모두정복하고 우리의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렸으며[㈜ 다음에 나오는 발췌문에서는 이 성전의 화재가 언급되지 않았는 데 요세푸스에 의해 삽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느무갓네살왕 통 치시기에 위치가 전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민족들을 거의 다 조국으로부터 추방시켜 그들을 바벨론으로 이송시켰던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자 유대의 도시 예루살렘은 바사(Persia)의 왕 고레스(cyrus)가 등극하기까지 70년의 시간 동안 황폐해졌습니다. 베로수스는 말하기를 “바벨론의 왕은 애굽과 수리아와 베니게와 아라비아를 정복하였는데 그의 업적은 바벨론과 갈대아 또는그보다 앞선 어떤 왕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주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베로수스(Berosus)의 이러한 설명은 그의 바벨론 역사서에 인용되어 있다'(혹은 고대. 10권. (219)와 관련하여 나온다).] 저는 베로수스 자신의 설명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려고 합니다.[㈜ 이 문구는 고대. 10권. (220)이하에 인용되어 있다.]

     “느부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보팔라살은 그가 애굽과 코엘레 수리아(Coele Syria)와 베니게를 통치하도록 세운 총독이 그를 반역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사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군대의 일부를 그 당시 어린 아들 느부갓네살에게 주어 그에게 모반을 꾀하는 총독을 치러 보내었다. 느부갓네살은 그들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그들을 정복하고 그 나라를 다시그의 지배하에 두도록 진압하였다. 한편 이때에 그의 아버지 나보팔라살은 병이 들었고, 21년의 통치를 끝으로 바벨론 성에서 죽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은 느부갓네살은 서둘러 애굽과 그 이외의 다른 나라의 정치 질서를 바로 잡은 뒤 유대와 베니게, 수리아와 애굽 민족에게서 취한 포로들을 그의 친구들에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중무장한 병력과 남은 짐들을 베벨론으로 호송하도록하는 한편 그는 서둘러 소수의 호위병들과 함께 사막을 지나 바벨론으로 왔다. 바벨론에 돌아온 그는 공공 업무들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으며, 그들 중 주요 인물들이 자기를 위해 나라를 보존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그는 이제 그의아버지가 누렸던 지배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령하기를 바벨론의 가장 적절한 장소에 포로들을 수용하여 식민지처럼 하라고 명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벨(Bel)신전과 다른 신전들을 그가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들로 우아하게 장식하였다. 또한 바벨론 성을 보수하여 훗날 어느 누구도 그 성을손쉽게 쳐들어와 물줄기를 바꾸어 그 성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러한 요새화 작업을 위하여 내부 성곽에 3개의 벽을 쌓았고 바깥 성곽에도 3개의 벽을 쌓았다. 그는 일부 벽들을구운 벽돌과 역청으로, 그리고 어떤 것은 단지 벽돌만으로 쌓았다. 또한 이처럼 엄청난 규모로 성을 요새화하고 뛰어난 기술로문들을 장엄하게 치장한 다음, 그는 그의 아버지가 살았던 궁전가까이에 새로운 궁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훨씬 더 놓고화려한 궁전이었다. 이 사실을 기록하자면 너무 많은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간략하게 기록하면 웅장하고 거대한 만큼 그궁전 건립은 15년이나 걸려서 끝났다. 그 궁전 안에다 그는 돌기둥들로 지탱해 만든 매우 높은 고가도로를 건축하였고, 소위’가(架)공원'(hanging garden)이라고[㈜ 고대 세계의 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간주됨. 보다 충분한 설명 이 크테시아스(Ctesias)의 디오도루스(Diodorus) ⅱ : 7이하에 인 용되어 있다.] 하는 공원을 건립하여 그곳에 온갖 나무를 심어 마치 산이 많은 시골을 꼭닮은 경치를 만들었다. 그가 이같이 건설한 것은 그의 왕비를 기쁘게 하려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녀가 메대(Media)에서 자라났으며 따라서 산이많은 전경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20. 베로수스의 다른 증거


     이상이 베로수스가 느부갓네살왕에 관한 그의 저서 ‘갈대아 역사’ 제3권에서 기록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헬라 역사가들에[㈜ 4세기 사람 크테시아스는(Ctesias) 앗수르 제국의 신화적 창건자 인 세미라미스(Semiramis)와 니누스(Ninus)의 이야기에 관해 대 권위자임. 참). 헤로도투스, ⅰ. 184] 대한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앗수르의 여왕인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바벨론을 건설하였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가 그 장엄한 건축물들이 마치 그녀 자신의 공적인 양 거짓되게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일들에서 보듯이그의 저서’갈대아의 역사’는 가장 신임할 만한 책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베로수스가 말한 사실들, 즉 모든 수리아와 베니게를정복하였다는 사실들은 느부갓네살왕에 관한 베니게인들의 유물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에 관해서는 필로스트라투스(Philostratus)도[㈜ ‘인도와 베니게의 역사'((Indian and Phoenician History)의 저 자 필로스트라투스(Philostratus)는 요세푸스 저서에만 유일하게 언급된다. 참). 고대. 10권. 11:1(228)] 다른 역사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두로의 포위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인도의 역사'(Indian History)를 쓴 메가스데네스(Megas-thenes)도[㈜ 후기 헬라 저술가들이 인도에 관한 지식을 얻는데 주로 영향을 입었던 이 저자는 셀류쿠스 Ⅰ세의 대사로 주전 약 300년경 인 도의 왕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게로 파송되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앞서 언급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헤라클레스(Heracles)보다 힘이 강하며위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증거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똑같은 문구가 고대. 10권. 11:1(227)에 언급되었고, 또한 유 세비우스의’복음에의 준비 ‘(Praep. Evang.) ⅸ. 41에도 인용되 어 있다] 필로스트라투스는 그 왕이 리비아의 대부분과 이베리아(Ibe-ria)도 정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아피. 1권. 19(132)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분명히 이러한 주장 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 예루살렘 성전에 관해말씀드리겠는데, 이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고레스(Cyrus)왕이 아시아를 제패하게 되자 다시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베로수스의 기록을 조금만 더 인용하면 분명하게 증명이 될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느부갓네살왕은 앞서 말한 벽들을 축조하기 시작한후 병이 들었고 43년간의 통치를 마치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Evilmaraduch)이 왕위에올랐다. 그는 불법적이고도 불손한 태도로 정사를 다스렸고 따라서 그의 매부인 네리글리살(Neriglisar)로부터 반역을 당하였고 겨우 2년의 통치 끝에 매부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그가 살해당한 후 그에게 반역했던 네리글리살이 왕권을 계승하여 4년간을 다스렸다. 그후 그의 아들인 라보로소아르도크(Laborosoar-doch)가 어린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9개월여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보여준 나쁜 성격과 나쁜 생활때문에 그의 친구들에 의한 반역이 일어났고 결국 그는 비참하게맞아 죽고 말았다. 그가 죽게 되자 반역을 주동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며 일치된 합의에 따라 바벨론 사람이자 그 반역에 참가했던 사람인 나본네두스(Nabonnedus)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었다. 바벨론 성벽들이 구운 벽돌과 역청으로 신기하게 축조되었던 것은 바로 그의 통치 기간에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재위 17년에 이르자 고레스가 대군을 이끌고 바사( Persia)로부터 쳐들어왔다. 이미 고레스는 아시아의 전 지역을 정복한 후에 바벨론으로쳐들어 온 것이었다. 나본네두스왕은 고레스가 자기를 공격하러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고레스와의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수의 군대와 함께 도망쳤으며 결국 보르시파(Borsippa)시에[㈜ 바벨론 남부 지방에 있는 비르스 니르무드(Birs Nirmud)의 옛 이름.] 숨었다. 이에 따라 고레스왕은 바벨론을 장악하였고 바벨론 성의 외곽 벽들을무너뜨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그 성은 매우 끔찍하고 무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고레스는 보르시파 시로 나본네두스를 체포하기 위해 행군해 갔다. 그러나 막상 나본데두스가 그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고레스에게 양도되었을때 고레스는 그를 일단 친절히 다루었으며 비록 그를 바벨론 밖으로 추방하기로 했으나 그가 거주할 수 있는 땅으로 카르마니아(Carmania)를[㈜ 바사 만에 위치한 한 지역.] 주었다. 따라서 나본네두스는 그의 여생을그곳에서 보내다가 거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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