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증산 – 출생 및 어린시절 1

1. 出生


증산 강일순은 동학의 기운이 크게 무르익던 조선 왕조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년인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지금의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진주이며, 부친 흥주(興周)씨와 모친 권씨(權氏)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9세를 일기로 1909년에 사망하였는데, 성(姓)은 강(姜)이요, 본명은 일순(一淳)이며, 호(号)는 증산(甑山)이다.1) 증산교에서는 그들이 上帝라 지칭하는 증산의 탄생, 곧 강세(降世)를, 증산이 이 세상에 미리 내 보낸 석가․예수․공자를 비롯한 聖者와 哲人들이 미리 알렸다고 한다.2)




증산의 태몽에 관한 대순전경(大巡典經)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3)


 “모친이 친정에 가 있던 어느 날(1870, 庚午年 9월),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며 천하가 밝아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석달만에’ 낳았다.” 


“그를 낳을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에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로부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두르고 하늘로 뻗어 7일 동안 계속하였다.”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며, 왼손바닥에 별무자(戊) 무늬가 있고 아래 입술안에 붉은 점이 있었다.”




2. 幼小時代 


증산은 물론 어렸을 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칭호를 들었고 갖가지 비범한 행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곱살 되던 해에 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을 얻어 장성한 후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나, 농악은 흔히 구경했다고도 전해진다. 같은 해에 증산의 부친은 그 아들의 출중함을 알고 없는 살림에 훈장을 데려다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하늘 천(天)자와 땅 지(地)자는 따라 읽으나 그 다음은 아무리 타일러도 읽지 않으므로 부친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하늘 천(天)자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 지(地)자에 땅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여 그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리니 돌려보내사이다”하여 부득이 그 훈장을 돌려 보냈다고 한다.4)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늘 혼자서 태을 주문(太乙呪文)을 읽고, 七星經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그가 부친에게 청하여 뒷뜰에다 별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서 생활하면서 타인의 근접을 금하고 하루 건너 암 꿩 한 마리와 견직물 두 자씩을 구해 들이더니… 2개월 후에는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거처했던 방안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5) 이 뒤에 집으로 돌아와 자의로 외접(外接)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항상 장원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 외에 부친의 빚을 갚아 주거나, 모친의 잃어버린 모시 베를 찾아 준 일등의 기록도 多數가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보면,


증산이 열 살이 넘었을 때 하루는 그의 부친이 벼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와 닭의 무리가 벼를 쪼으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의 부친이 새들을 쫓았다. 그것을 본 증산은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렸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계속 쫓으니 별안간 한낮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증산의 가정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의 부친이 부채(負債)까지 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빈곤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상류 계층이었다. 그의 부친은 빈곤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증산을 서당에 보냈고, 증산의 학문적인 소질은 남달리 뛰어나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으로 인해 그는 서당을 통한 수업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14-15세에 학업을 중지한 그는 사방을 주유하다가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거사막(巨沙幕)에서 머슴살이도 하였으며, 장성군 백양사 부근 부여곡(扶餘谷)에서 나무를 베는 산판꾼으로 일하기도 하고, 금산사 심원암에 이르러 깊이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6)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은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의 불일치에 기인한 심리적 좌절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의 부친이 경제적인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를 서당에 보낸 것은 신분적 지위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었고, 그것은 증산에게도 강조되었을 것이다. 머슴살이 및 나무꾼 생활은 그의 실조의식을 더욱 영향을 깊게 하였으며, 동시에 증산은 주유생활(周遊生活)을 통해 그 당시에 극심했던 고부지방을 비롯한 전라도 각지에서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일반 민중의 현실 및 그들의 욕구상태를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7)






203.255.190.57 김은지: 증산교2 [02/03-16:33]
203.255.190.57 안나: 증산교2 [02/03-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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