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敎團의 形成과 宗敎活動
증산은 1902년부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를 추종하였던 자들은 대부분 貧農의 하류 계층들이었으며, 갑오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던 동학 신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갑오농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天·地·人 三界의 대권을 지닌 主宰者로 가르치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1)
강 일순이 得道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최초로 찾아온 사람은 김형렬(金亨烈)이었다. 그는 동학교도로서 갑오 동학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이었다. 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고, 증산은 형렬의 집을 본거지로 하고 포교사업을 하였다. 김형렬은 자기의 일가 친척들과 그 전에 동학교도였던 그의 친구들에게 증산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친구들은 또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하여 敎徒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2) 증산을 따르는 종도들의 수는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된 종도3)들이 있어 24종도, 또는 28종도, 27종도, 34종도, 61종도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 후 9년동안 몇몇 제자를 데리고 전주, 금구, 익산,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4)
1) 추종자 교육
강일순은 도문(道門)에 새로 들어온 종도들에게 반드시 지금까지 지은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찾아 내어 사(赦)해 줄 것을 빌게 했다. 그는 종도들에게 태좌정심법(胎坐正心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송주(誦呪)를 장려했으며, 태을주(太乙呪), 시천주(侍天呪), 오주(五呪)를 묵송(黙誦)케 했다. 증산은 이와 같이 추종자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키는 것외에도, 환자를 치료할 때는 송주수련(誦呪修練)과 함께 의학적인 약물치료를 실시하였다. 또한 부적(符籍)을 사용하고 안수치료(按手治療)를 겸하였다. 따라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겨 추종하였으며, 이러한 소문은 인근지방에 까지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봉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지(燒紙)라는 주술(呪術)을 자주 행했다. 그것은 백지(白紙)에 부적을 써서 화로에 불사르는 것인데, 연기가 온 방에 자욱하게 되어 숨통이 막힐 정도가 되어도 다 타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또 도니원서(桃李園序)를 일천 번 이상 읽고, 큰 운수를 받기 위해 서전서문(書伝序文)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리하면 신체에 이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신이 내리는 징조로서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를 강신(降神)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종도들의 재능과 기국(器局)을 보아서, 자기를 위해 부려썼다.
2) 카리스마 강조
증산이 교단을 형성하고 포교활동을 할 때의 특징은 자신의 上帝로서의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란 웨버(M.Weber)가 정의하는 바와 같이 개인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떤 자질을 의미한다. 곧 超自然的 또는 超人間的이거나 적어도 특수하게 예외적인 힘이나 자질을 천부적(天賦的)으로 부여받은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범하고 일시적이며 창조적인 자질을 의미한다. 이 자질로 인해 그 개인이 일반인과 구별된다.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특성은 추종자들을 따르게 하고 존경심을 유발시키며 권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극대화 과정을 통하여 카리스마적 경험을 갖게 된 증산은 포교활동을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였다.6)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造化로써 天地를 開闢하고 不老長生의 仙境을 열어 苦海에 빠진 衆生을 건지려 하노라.”(大巡典經 2:5)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에 강림한 초자연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증산의 설교는 포교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 구천(九天)에 있을 때,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이 마두(利 瑪竇)가 모든 신령(神靈)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과 더불어 자기에게 와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건져 달라고 애원하기에 마침내 그 뜻을 받아 들여 천하를 대순(大巡)하는 길에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 삼계(三界)를 살피다가 드디어 동토(東土)에 이르러 金山寺 彌勒金像에 임하게 되었던 것인데, 1841년부터 1870년까지 30년간을 그곳에 臨在해 있었다. 그 동안 1860년에 최제우를 찾아내어 그에게 사명을 주어 천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게 했으나7), 그가 능히 儒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1864년이 되는 해 최제우로부터 天命과 新政을 거두었고, 그로써 최제우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1871년에 직접 地上에 降臨했다.”8)
증산의 이와 같은 설교는 자신의 권위와 규범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카리스마적 존재인 증산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와 선경(仙境)을 약속 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증산과 추종자들의 관계는 당시 정감록 사상에 의한 혁세주(革世主)의 출세(出世)나 미륵불(彌勒佛)의 출신(出身), 또는 최수운의 갱생(更生)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수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증산은 자신이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민간신앙의 혁세주 사상 뿐만 아니라 기성종교의 메시아 강림사상을 모두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곧 자신이 출세한 미륵이자 재생한 최수운이며 신선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강조는 그가 치병(治病)을 하고 死者를 부활(復活)시키며 풍운 조화를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추종자들의 신념에 의해 쉽게 메시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天神이거나 또는 분명히 하느님으로서 강림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9)
더욱이 증산의 포교활동지역이 주로 동학혁명의 발생과 전개지역이었던 전라도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全北七郡으로써 세속적 대중운동인 동학혁명이 실패한 지역인 동시에, 따라서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해결을 세속적 대중운동의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인 메시아에게 의존코자 하는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는 보다 용이하게 성립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敎團의 形成과 宗敎活動
증산은 1902년부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를 추종하였던 자들은 대부분 貧農의 하류 계층들이었으며, 갑오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던 동학 신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갑오농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天·地·人 三界의 대권을 지닌 主宰者로 가르치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1)
강 일순이 得道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최초로 찾아온 사람은 김형렬(金亨烈)이었다. 그는 동학교도로서 갑오 동학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이었다. 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고, 증산은 형렬의 집을 본거지로 하고 포교사업을 하였다. 김형렬은 자기의 일가 친척들과 그 전에 동학교도였던 그의 친구들에게 증산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친구들은 또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하여 敎徒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2) 증산을 따르는 종도들의 수는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된 종도3)들이 있어 24종도, 또는 28종도, 27종도, 34종도, 61종도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 후 9년동안 몇몇 제자를 데리고 전주, 금구, 익산,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4)
1) 추종자 교육
강일순은 도문(道門)에 새로 들어온 종도들에게 반드시 지금까지 지은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찾아 내어 사(赦)해 줄 것을 빌게 했다. 그는 종도들에게 태좌정심법(胎坐正心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송주(誦呪)를 장려했으며, 태을주(太乙呪), 시천주(侍天呪), 오주(五呪)를 묵송(黙誦)케 했다. 증산은 이와 같이 추종자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키는 것외에도, 환자를 치료할 때는 송주수련(誦呪修練)과 함께 의학적인 약물치료를 실시하였다. 또한 부적(符籍)을 사용하고 안수치료(按手治療)를 겸하였다. 따라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겨 추종하였으며, 이러한 소문은 인근지방에 까지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봉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지(燒紙)라는 주술(呪術)을 자주 행했다. 그것은 백지(白紙)에 부적을 써서 화로에 불사르는 것인데, 연기가 온 방에 자욱하게 되어 숨통이 막힐 정도가 되어도 다 타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또 도니원서(桃李園序)를 일천 번 이상 읽고, 큰 운수를 받기 위해 서전서문(書伝序文)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리하면 신체에 이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신이 내리는 징조로서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를 강신(降神)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종도들의 재능과 기국(器局)을 보아서, 자기를 위해 부려썼다.
2) 카리스마 강조
증산이 교단을 형성하고 포교활동을 할 때의 특징은 자신의 上帝로서의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란 웨버(M.Weber)가 정의하는 바와 같이 개인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떤 자질을 의미한다. 곧 超自然的 또는 超人間的이거나 적어도 특수하게 예외적인 힘이나 자질을 천부적(天賦的)으로 부여받은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범하고 일시적이며 창조적인 자질을 의미한다. 이 자질로 인해 그 개인이 일반인과 구별된다.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특성은 추종자들을 따르게 하고 존경심을 유발시키며 권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극대화 과정을 통하여 카리스마적 경험을 갖게 된 증산은 포교활동을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였다.6)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造化로써 天地를 開闢하고 不老長生의 仙境을 열어 苦海에 빠진 衆生을 건지려 하노라.”(大巡典經 2:5)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에 강림한 초자연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증산의 설교는 포교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 구천(九天)에 있을 때,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이 마두(利 瑪竇)가 모든 신령(神靈)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과 더불어 자기에게 와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건져 달라고 애원하기에 마침내 그 뜻을 받아 들여 천하를 대순(大巡)하는 길에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 삼계(三界)를 살피다가 드디어 동토(東土)에 이르러 金山寺 彌勒金像에 임하게 되었던 것인데, 1841년부터 1870년까지 30년간을 그곳에 臨在해 있었다. 그 동안 1860년에 최제우를 찾아내어 그에게 사명을 주어 천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게 했으나7), 그가 능히 儒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1864년이 되는 해 최제우로부터 天命과 新政을 거두었고, 그로써 최제우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1871년에 직접 地上에 降臨했다.”8)
증산의 이와 같은 설교는 자신의 권위와 규범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카리스마적 존재인 증산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와 선경(仙境)을 약속 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증산과 추종자들의 관계는 당시 정감록 사상에 의한 혁세주(革世主)의 출세(出世)나 미륵불(彌勒佛)의 출신(出身), 또는 최수운의 갱생(更生)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수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증산은 자신이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민간신앙의 혁세주 사상 뿐만 아니라 기성종교의 메시아 강림사상을 모두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곧 자신이 출세한 미륵이자 재생한 최수운이며 신선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강조는 그가 치병(治病)을 하고 死者를 부활(復活)시키며 풍운 조화를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추종자들의 신념에 의해 쉽게 메시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天神이거나 또는 분명히 하느님으로서 강림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9)
더욱이 증산의 포교활동지역이 주로 동학혁명의 발생과 전개지역이었던 전라도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全北七郡으로써 세속적 대중운동인 동학혁명이 실패한 지역인 동시에, 따라서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해결을 세속적 대중운동의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인 메시아에게 의존코자 하는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는 보다 용이하게 성립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