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론

          제5장 부활론




 성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흙 속에 파묻혀 삭아져버린 모든 성도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나올 것으로 보아야 한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마태복음 27장 52절).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적인 처지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제1절 부활




 부활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므로, 우리가 부활의 의의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Ⅰ.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 개념


 누가복음 9장 603절의 기록을 보면,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가려고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죽음과 삶에 각각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장사를 치루어야 할 그 제자의 부친과 같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삶’은 그 육신이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그 죽은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모여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말하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현재 그 육신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던가 ?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버린 자리, 즉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사탄 주관권내에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삶’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서 그의 뜻대로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육신이 활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관 권을 벗어나서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창조본연의 가치기준으로 보아 죽은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계시록 3장 1절에 기록된 바, 비신앙적인 세례교회의 신도들에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한 말씀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반면에 이미 육신의 목숨이 끊어진 인가니라 할지라도, 그의 영인 체가 영계의 천상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 있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장 25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사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지고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영인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관권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또 계속하여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신을 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 살아 있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후일 그가 죽어 육신을 벗어버리고 지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품 속에서 여전히 삶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위의 성구에 보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 있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그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하신 누가복음 17장 33절의 말씀도,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사람은, 비록 그 육신이 활동하고 있어도 그는 죽은 자요, 또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육신을 희생하는 사람이고 보면, 설혹 그 육신은 흙 속에 묻혀 썩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영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곧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Ⅱ. 타락으로 인한 죽음


 우리는 위에서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 중 어느 것이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죽음일 것인가 ?


 하나님은 원래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어도, 노쇠하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930세에 죽어 그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락 때문에 온 죽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창조원리에 의하면, 육신은 영인체의 옷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옷이 더러워지면 벗는 것 같이 육신도 노쇠하면 벗어버리고, 그 영인체만이 무형세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로 된 생물체로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도 이 창조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으므로, 인간의 육신이라고 해서 영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지상에서 육신을 쓴 채로 영존 한다면, 영인체의 가 곳인 무형세계는 당초부터 창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무형세계는 타락한 인간의 영인체가 가서 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들이 지상에서 생활하다가, 육신을 벗은 후에 그 영인체가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서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인간이 육적인 생명에 강한 미련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이 원래 육신을 벗은 후에는 보다 아름답고 영원한 무형세계에가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타락으로 인하여 알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상에 있어서의 육신생활과 무형세계에 있어서의 영인생활은, 애벌레와 나비의 생활에 비교할 수 있다. 만일 애벌레에게 의식이 있다고 하면, 마치 인간이 육신생활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고 있듯이, 그도 역시 허물 속에 삶에 애착을 느끼어 벗고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애벌레가 일단 나비가 된 후에는 향기로운 꽃과 단 꿀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인과 영인과의 관계는 바로 이 애벌레와 나비와의 관계와 흡사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지상인들은 같은 지상인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인들과도 자유로이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벗는 것이 결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완성되어 생활하다가 노쇠한 후에,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하며 고대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논술한 두 가지의 죽음 중에서,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탄 주관군내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곧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성서를 중심하고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곧 인간시조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초래된 바로 그 죽음을 말한다. 그러면 그 죽음은 어떠한 죽음이었을 것인가 ?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은 따먹은 그 날을 기해서 정녕 죽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아담과 해와는 오늘날의 우리들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상에서 육신생활을 계속하면서 자손을 번식하여, 마침내 오늘의 타락한 인류사회를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그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주관권으로부터 사탄의 악주관권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서에서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요한 1서 3장 14절에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상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동일한 뜻으로서 로마서 6장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고 하였고, 또 로마서 8장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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