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유스티누스

 

순교자 유스티누스


유스티누스의 작품 가운데 자전적 언급, 그의 순교에 관한 보고,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와 에피파니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진술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사마리아의 프라비아 네아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프리스쿠스, 할아버지의 이름은 바키우스였다. 이러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로마 또는 그리스 이주민 가정 출신이다. 어쨌든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사마리아의 유다교에 관한 아무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스토아 학파, 소요학파,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지막으로 (중)플라톤 철학에서 “안식”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예언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어떤 노인과 나눈 대화가 유스티누스의 철학적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다. 마침내 그는 예언서에서 진리를 인식하였으며, 그 뒤 그리스도교 떠돌이 설교자의 표시로 철학자의 외투를 걸치고 다녔다. 이러한 자전적인 역사성은 추상적 요소를 매우 많이 싣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전형적” 인생 행로는 유스티누스가 걸어온 길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생애의 말기를 로마에서 보냈고,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지만 이 가운데 세 작품만 남아 있다. 그가 순교자로 죽을 것을 예감하게 한 견유학파의 철학자 크레센스와 유스티누스 사이에는 격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유스티누스가 루스티쿠스 총독 치하에서 실제로 크레센스 때문에 처형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부활절 연대기」에 전해지는 그의 사망 연도인 165년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유스티누스의 작품 목록을 전한다. 유스티누스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모든 수사본 가운데 150-160년에 저술된 세작품만 진본으로 인정된다. 두 개의 다른 호교서가 저술되었지, 또는 하나의 호교서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는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다. 무니어는 최근에 두번째 논제를 주장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장르의 관점에서 보면 특정한 동기에서 씌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신학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도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창조론, 성서주석 등 많은 중요한 개별 진술이 들어 있다.




2.2.1. 「첫째 호교서」


「첫째 호교서」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29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무신론자라는 고발에 변론한다. 유스티누스는 제신이 경악할 만한 사건과 재앙을 통해 인간을 미혹하여 그들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게 하는 악마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점을 시인한다. 말씀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악마가 쓰고 있는 기만의 가면을 벗겼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실제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30-60장에서는 예수가 마술사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구약성서의 구절을 증거로 제시한다. 61-67장에서는 세례미사와 주일미사에 관해 서술한다. 마지막 장인 68장 전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답서이다.


이 작품의 구성은 매우 산만하다. 유스티누스 작품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주제를 벗어나는 것은 그가 역사적 자료를 매우 종속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작품의 순서보다 사료들의 순서를 더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고 과정은 압축적이고 명료하며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그는 한편으로 철학자들이 인정한 경건한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이 사회적․정치적으로 불가피하게 도입된 국가의 제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듯이 그는 제의에 참여하면서 경건한 삶을 영위하려는 이교인의 이상을 비난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철학적 종교비판을 화제의 실마리로 삼아 제신을 공격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변론하였다.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제신의 행위는 흉악하고 비도덕적이며, 그들을 본받는 사람은 중죄에 빠지게 된다. 죽은 신상들을 숭배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유스티누스는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제신의 뒤에는 악마들의 행동이 있다고 보았다. 시인들이 표현하는 제신과 달리 참된 하느님께서는 태어나시지도 않으며 정욕에 굴복하시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수난과 부활을 통해 악마들의 우두머리인 사탄과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를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악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켰다. 사람이 된 로고스이며 하느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는 악마의 반대편에 있으며, 창조주의 중재자인 로고스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의 씨앗을 뿌렸다. 이때문에 그리스도 이전의 철학자들은 사고와 행동에서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악마들의 기만을 밝혀내고 그들에게 참된 하느님을 찾을 것을 권유한 소크라테스였다. 이때문에 그는 순교자로 죽어야만 했다.




2.2.2. 「둘째 호교서」


「둘째 호교서」는 「첫째 호교서」의 내용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실절적인 동기에서 저술되었다. 로마 시의 총독 우르비쿠스는 세명의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고백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처형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이러한 불공평하고 잔혹한 행위에 대해 로마 당국에 항의하였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당시의 많은 비판적 논점들을 반박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도인이 왜 그들의 신에게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자살을 금하는가 하는 조롱 섞인 질문에 답변하였다. 박해는 진리와 덕을 증오하는 악마들의 행위이다. 이와 같은 원수들이 이미 구약성서의 의인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고대의 의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시험과 어려움을 통해 그의 제자들을 덕과 보상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악마들은 그리스도인을 마음대로 억누를 수 없었다. 아울러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우월하다는 것을 인상깊게 실증하는 기회였다. 마지막으로 유스티누스는 황제가 정의, 경건함, 지혜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인을 판결해 주기를 호소한다.


유스티누스는 이 작품에서 초대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에 나타나는 몇 가지 전형적인 논증을 사용한다. 곧, 그는 황제에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판결이 대중의 인기에 부합하지 말고 법률과 지혜에 따라 이루어질 것을 호소하고, 예부터 의인들이 당한 경우처럼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의 원인을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덕에 대한 악의에 찬 반대자들의 시기로 분석한다.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완전함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시험하기 위하여 박해를 허용하셨다고 평가한다. 끝으로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인내는 어떤 것으로도, 죽음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그들의 신앙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2.3.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는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반유다적 호교서이며, 이 가운데 서론과 74장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120장은 「첫째 호교서」에서 인용하였듯이 호교서로 저술되었음이 확실하다. 이 작품은 유스티누스와 트라폰이라는 교양 있는 유다인과 이틀간에 걸친 대화를 기록한다. 문학적 전형은 플라톤의 「대화」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화를 직접 기술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표현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은 14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스티누스는 서론에서 자신의 교육과 개종을 자전적으로 보고한다. 첫번째 주요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구약성서를 설명한다. 모세의 율법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유효성만 지니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새롭고 영원한 율법을 인류에게 제시한다. 두번째 주요부에서는 하느님인 그리스도에 대한 흠숭을 정당화하며, 세번째 주요부에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율법을 따르는 국민은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참된 민족을 대표하고 있음을 밝힌다.


대화의 서술방식은 서로 다른 수신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에서는 호교서와 다르지만, 방법에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유스티누스는 이교인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의 작품에서, 특히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단계적인 계시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정당화한다. 그는 유다인에게는 같은 하느님이라는 관점에서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유다 민족이 계속해서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따라서 그는 구약성서를 논증의 기반으로 사용하였으며, 구약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특히 예언서들을 많이 인용하였다.




여론(餘論) 1: 고대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록


그리스 호교가들은 고전시대부터 그리스 문학과 라틴 문학에서 꽃피운 대화록의 장르를 그리스도교 문헌에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미 언급된 펠라의 아리스톤의 작품 「그리스도에 관한 야손과 파피스쿠스의 대화」는 소실되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첫번째 대화록이다. 남아 있는 첫번째 대화록은 앞에서 서술한 유스티누스의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이며, 이후의 대화록은 다양한 형태와 주제로 교부시대에 두루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시대와 같이 고전시대의 대화록에서 대화를 직접 기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일반적으로 뒤에 문학적으로 수정되었다. 보통 독자에게 윤리적․철학적․역사적 주제를 더 생생하고 인상깊게 묘사하기 위해 허구적 대화록의 형태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대화록은 논문의 형태로도 저술되었다. 그리스도교 저자들에게 이 유형의 뛰어난 본보기이자 전형은 플라톤과 치체로의 작품이었다.


문학적 대화록은 그 형태에서 직접적이고 생생한 대담으로 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화의 상대자는 뒤로 물러나 있으며, 따라서 대화록은 마치 혼자서 말하는 논문처럼 저술되었다. 이러한 경우 서론에서 활기찬 대화가 이루어진 뒤, 한 사람만 말하고 다른 사람은 결론에 이르러서만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대화록은 제3자의 보고에 의존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삽입된 이야기는 사료가 어떤 작품이었는가를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강연에서 때때로 청중이 연사의 견해에 동의하기 위하여 등장할 경우, 대화록은 순수한 논문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대화록은 논제의 질문들을 전개하기 위하여 가상의 대화자를 등장시키는 논박서에 가깝다.


그리스도교의 대화록은 당시의 사고와 불가피한 논쟁 때문에 형태나 철학적․윤리적 사고 전개에서 실질적으로 플라톤과 치체로의 고전적 전형을 따른다.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는 플라톤의 「향연」을 본받아 「향연」을,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파이돈」을 본받아 「영혼과 부활에 관한 대화」를 저술하였다. 미누치우스 펠릭스의 「옥타비우스」는 치체로의 「신들의 본성」을 전형으로 삼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치체로의 「호르텐시우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욥기의 성서적 대화 형태, 후대 유다교 랍비 문학의 대화, 신약성서의 행전 및 편지의 대화 형식을 지속시키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대화록은 내용에서 네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다.


1) 호교적 대화록. 이 대화록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구약성서의 의미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 대체로 유다인과 이교인을 대상으로 씌었다. 대화록은 그리스 교회에서는 아리스톤과 유스티누스, 라틴 교회에서는 미누치우스 펠릭스로부터 비잔틴 시대와 중세까지 이어졌다.


2) 신학적 대화록. 이 대화록은 주로 교회 안의 문제점과 이단적 사조와 논쟁을 벌인다. 이러한 양식의 뛰어난 예는 실제로 행한 담화에 근거한 오리게네스의 「성부, 성자, 영혼에 관한 헤라클레이데스와 그의 동료 주교들과의 대화」, 엔크라테이아파를 논박하는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의 「열 처녀의 향연 또는 동정성」,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변론하는 네스토리우스의 「헤라클리데스의 책」, 단성론자를 논박하는 치루스의 테오도레투스의 「에라니스테스」이다.


3) 철학적 대화록. 이 대화록은 고전 대화록의 전형을 가장 잘 따른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본보기가 이미 언급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누이 마크리나와의 대화를 기록한 「영혼과 부활에 관한 대화」, 카시치아쿰에서 쓴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대화록인 「아카데미아 학파 논박」, 「행복한 생활」, 「독백」, 「자유의지론」,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다.


4) 마지막 형태로 고전시대에 전형이 없는 자전적 대화록이 성인들의 생애를 더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러한 대화록에는 술피치우스 세베루스의 「성 마르티누스의 생애」와 이탈리아 성인들의 생애와 기적을 다룬 대 그레고리우스의 「대화」가 있다. 마지막 작품의 제2권은 성 베네딕도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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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유스티누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순교자 유스티누스

    유스티누스의 작품 가운데 자전적 언급, 그의 순교에 관한 보고,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와 에피파니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진술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사마리아의 프라비아 네아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프리스쿠스, 할아버지의 이름은 바키우스였다. 이러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로마 또는 그리스 이주민 가정 출신이다. 어쨌든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사마리아의 유다교에 관한 아무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스토아 학파, 소요학파,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지막으로 (중)플라톤 철학에서 “안식”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예언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어떤 노인과 나눈 대화가 유스티누스의 철학적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다. 마침내 그는 예언서에서 진리를 인식하였으며, 그 뒤 그리스도교 떠돌이 설교자의 표시로 철학자의 외투를 걸치고 다녔다. 이러한 자전적인 역사성은 추상적 요소를 매우 많이 싣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전형적” 인생 행로는 유스티누스가 걸어온 길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생애의 말기를 로마에서 보냈고,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지만 이 가운데 세 작품만 남아 있다. 그가 순교자로 죽을 것을 예감하게 한 견유학파의 철학자 크레센스와 유스티누스 사이에는 격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유스티누스가 루스티쿠스 총독 치하에서 실제로 크레센스 때문에 처형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부활절 연대기」에 전해지는 그의 사망 연도인 165년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유스티누스의 작품 목록을 전한다. 유스티누스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모든 수사본 가운데 150-160년에 저술된 세작품만 진본으로 인정된다. 두 개의 다른 호교서가 저술되었지, 또는 하나의 호교서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는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다. 무니어는 최근에 두번째 논제를 주장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장르의 관점에서 보면 특정한 동기에서 씌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신학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도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창조론, 성서주석 등 많은 중요한 개별 진술이 들어 있다.


    2.2.1. 「첫째 호교서」

    「첫째 호교서」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29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무신론자라는 고발에 변론한다. 유스티누스는 제신이 경악할 만한 사건과 재앙을 통해 인간을 미혹하여 그들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게 하는 악마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점을 시인한다. 말씀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악마가 쓰고 있는 기만의 가면을 벗겼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실제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30-60장에서는 예수가 마술사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구약성서의 구절을 증거로 제시한다. 61-67장에서는 세례미사와 주일미사에 관해 서술한다. 마지막 장인 68장 전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답서이다.

    이 작품의 구성은 매우 산만하다. 유스티누스 작품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주제를 벗어나는 것은 그가 역사적 자료를 매우 종속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작품의 순서보다 사료들의 순서를 더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고 과정은 압축적이고 명료하며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그는 한편으로 철학자들이 인정한 경건한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이 사회적․정치적으로 불가피하게 도입된 국가의 제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듯이 그는 제의에 참여하면서 경건한 삶을 영위하려는 이교인의 이상을 비난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철학적 종교비판을 화제의 실마리로 삼아 제신을 공격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변론하였다.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제신의 행위는 흉악하고 비도덕적이며, 그들을 본받는 사람은 중죄에 빠지게 된다. 죽은 신상들을 숭배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유스티누스는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제신의 뒤에는 악마들의 행동이 있다고 보았다. 시인들이 표현하는 제신과 달리 참된 하느님께서는 태어나시지도 않으며 정욕에 굴복하시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수난과 부활을 통해 악마들의 우두머리인 사탄과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를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악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켰다. 사람이 된 로고스이며 하느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는 악마의 반대편에 있으며, 창조주의 중재자인 로고스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의 씨앗을 뿌렸다. 이때문에 그리스도 이전의 철학자들은 사고와 행동에서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악마들의 기만을 밝혀내고 그들에게 참된 하느님을 찾을 것을 권유한 소크라테스였다. 이때문에 그는 순교자로 죽어야만 했다.


    2.2.2. 「둘째 호교서」

    「둘째 호교서」는 「첫째 호교서」의 내용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실절적인 동기에서 저술되었다. 로마 시의 총독 우르비쿠스는 세명의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고백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처형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이러한 불공평하고 잔혹한 행위에 대해 로마 당국에 항의하였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당시의 많은 비판적 논점들을 반박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도인이 왜 그들의 신에게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자살을 금하는가 하는 조롱 섞인 질문에 답변하였다. 박해는 진리와 덕을 증오하는 악마들의 행위이다. 이와 같은 원수들이 이미 구약성서의 의인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고대의 의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시험과 어려움을 통해 그의 제자들을 덕과 보상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악마들은 그리스도인을 마음대로 억누를 수 없었다. 아울러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우월하다는 것을 인상깊게 실증하는 기회였다. 마지막으로 유스티누스는 황제가 정의, 경건함, 지혜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인을 판결해 주기를 호소한다.

    유스티누스는 이 작품에서 초대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에 나타나는 몇 가지 전형적인 논증을 사용한다. 곧, 그는 황제에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판결이 대중의 인기에 부합하지 말고 법률과 지혜에 따라 이루어질 것을 호소하고, 예부터 의인들이 당한 경우처럼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의 원인을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덕에 대한 악의에 찬 반대자들의 시기로 분석한다.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완전함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시험하기 위하여 박해를 허용하셨다고 평가한다. 끝으로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인내는 어떤 것으로도, 죽음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그들의 신앙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2.3.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는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반유다적 호교서이며, 이 가운데 서론과 74장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120장은 「첫째 호교서」에서 인용하였듯이 호교서로 저술되었음이 확실하다. 이 작품은 유스티누스와 트라폰이라는 교양 있는 유다인과 이틀간에 걸친 대화를 기록한다. 문학적 전형은 플라톤의 「대화」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화를 직접 기술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표현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은 14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스티누스는 서론에서 자신의 교육과 개종을 자전적으로 보고한다. 첫번째 주요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구약성서를 설명한다. 모세의 율법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유효성만 지니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새롭고 영원한 율법을 인류에게 제시한다. 두번째 주요부에서는 하느님인 그리스도에 대한 흠숭을 정당화하며, 세번째 주요부에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율법을 따르는 국민은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참된 민족을 대표하고 있음을 밝힌다.

    대화의 서술방식은 서로 다른 수신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에서는 호교서와 다르지만, 방법에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유스티누스는 이교인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의 작품에서, 특히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단계적인 계시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정당화한다. 그는 유다인에게는 같은 하느님이라는 관점에서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유다 민족이 계속해서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따라서 그는 구약성서를 논증의 기반으로 사용하였으며, 구약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특히 예언서들을 많이 인용하였다.


    여론(餘論) 1: 고대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록

    그리스 호교가들은 고전시대부터 그리스 문학과 라틴 문학에서 꽃피운 대화록의 장르를 그리스도교 문헌에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미 언급된 펠라의 아리스톤의 작품 「그리스도에 관한 야손과 파피스쿠스의 대화」는 소실되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첫번째 대화록이다. 남아 있는 첫번째 대화록은 앞에서 서술한 유스티누스의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이며, 이후의 대화록은 다양한 형태와 주제로 교부시대에 두루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시대와 같이 고전시대의 대화록에서 대화를 직접 기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일반적으로 뒤에 문학적으로 수정되었다. 보통 독자에게 윤리적․철학적․역사적 주제를 더 생생하고 인상깊게 묘사하기 위해 허구적 대화록의 형태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대화록은 논문의 형태로도 저술되었다. 그리스도교 저자들에게 이 유형의 뛰어난 본보기이자 전형은 플라톤과 치체로의 작품이었다.

    문학적 대화록은 그 형태에서 직접적이고 생생한 대담으로 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화의 상대자는 뒤로 물러나 있으며, 따라서 대화록은 마치 혼자서 말하는 논문처럼 저술되었다. 이러한 경우 서론에서 활기찬 대화가 이루어진 뒤, 한 사람만 말하고 다른 사람은 결론에 이르러서만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대화록은 제3자의 보고에 의존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삽입된 이야기는 사료가 어떤 작품이었는가를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강연에서 때때로 청중이 연사의 견해에 동의하기 위하여 등장할 경우, 대화록은 순수한 논문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대화록은 논제의 질문들을 전개하기 위하여 가상의 대화자를 등장시키는 논박서에 가깝다.

    그리스도교의 대화록은 당시의 사고와 불가피한 논쟁 때문에 형태나 철학적․윤리적 사고 전개에서 실질적으로 플라톤과 치체로의 고전적 전형을 따른다.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는 플라톤의 「향연」을 본받아 「향연」을,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파이돈」을 본받아 「영혼과 부활에 관한 대화」를 저술하였다. 미누치우스 펠릭스의 「옥타비우스」는 치체로의 「신들의 본성」을 전형으로 삼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치체로의 「호르텐시우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욥기의 성서적 대화 형태, 후대 유다교 랍비 문학의 대화, 신약성서의 행전 및 편지의 대화 형식을 지속시키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대화록은 내용에서 네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다.

    1) 호교적 대화록. 이 대화록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구약성서의 의미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 대체로 유다인과 이교인을 대상으로 씌었다. 대화록은 그리스 교회에서는 아리스톤과 유스티누스, 라틴 교회에서는 미누치우스 펠릭스로부터 비잔틴 시대와 중세까지 이어졌다.

    2) 신학적 대화록. 이 대화록은 주로 교회 안의 문제점과 이단적 사조와 논쟁을 벌인다. 이러한 양식의 뛰어난 예는 실제로 행한 담화에 근거한 오리게네스의 「성부, 성자, 영혼에 관한 헤라클레이데스와 그의 동료 주교들과의 대화」, 엔크라테이아파를 논박하는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의 「열 처녀의 향연 또는 동정성」,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변론하는 네스토리우스의 「헤라클리데스의 책」, 단성론자를 논박하는 치루스의 테오도레투스의 「에라니스테스」이다.

    3) 철학적 대화록. 이 대화록은 고전 대화록의 전형을 가장 잘 따른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본보기가 이미 언급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누이 마크리나와의 대화를 기록한 「영혼과 부활에 관한 대화」, 카시치아쿰에서 쓴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대화록인 「아카데미아 학파 논박」, 「행복한 생활」, 「독백」, 「자유의지론」,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다.

    4) 마지막 형태로 고전시대에 전형이 없는 자전적 대화록이 성인들의 생애를 더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러한 대화록에는 술피치우스 세베루스의 「성 마르티누스의 생애」와 이탈리아 성인들의 생애와 기적을 다룬 대 그레고리우스의 「대화」가 있다. 마지막 작품의 제2권은 성 베네딕도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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