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가)

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
우선 구약성서에서 창조에 관한 기록들은 우선 창세기 1-2장, 제2이사야(40-55)를 바롯한 예언서들과 욥기와 시편, 그리고 마카베오서이다.
1) 제관계 문헌 : 창세기 1.1-2,4a
2) 야휘스트계 문헌 : 창세기 2,4b-25
3) 제 2 이사야 40-55 44:24-28
4) 시편 8장, 19장, 24장, 33장, 74장, 75장, 90장, 95장, 104장, 136장, 148장-150장
5) 잠언 8,22-31
6) 전도서 3,18
7) 욥기 30 – 40
8) 마카베오 후서 7,28
이와같은 구약성서의 창조에 관한 기록들른 자연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학적으로 하느님의 본성과 그분의 권능,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고귀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세상과 인간의 창조 과정이 관심이 아니라 하느님 야훼가 창조주이심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창조에 관해서 구약성서의 창세기 1-3장을 언급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시원사건으로서의 4-11장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성서작가는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이 사악한 존재로서 하느님과의 관계(3장)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와의 관계(4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교회는 1-3장을 4장 이후와 분리시킴으로써 창조와 타락을 대립시키는 관계로 정립하였고, 4-11장은 3장에 나타나는 인간의 타락이 그 후로는 눈덩이 처럼 죄를 불어나게 했다는 것으로 이해토록 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베스터만의 의견은 창세기 1-11장이 모두 서로 보충하는 창조사건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사악성과 한계성을 인간의 신분으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컨데 4장에서 농경(4,1)과 도시의 건설(4,17), 가축사육과 더불은 유목생활, 금속을 다루는 작업, 음악의 발달(4,18-22)과 같은 인간문명의 발생은 땅을 지배하여 다스리라는 사명과 그것과 연계된 축복(1,26-28)이나, 하느님이 인간을 데러다 놓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라는 사명(2,15)과 전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4,17-26은 일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1-3장과 4-11장을 분리할 때, 일은 인간의 번죄로 그에 대한 벌로써 이해될 뿐 인간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명령으로서의 문명의 진보, 예술과 과학 기술상의 진보를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노동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 분명히 일은 벌로써가 아니라 축복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으로붙의 신성한 사명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6-9장의 홍수 설화 역시 세계와 인간창조와 깊이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창조자 자신이, 자신이 이룬 창조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삶에 대한 위협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설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땅이 이어가는 동안”은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창조와 그 보존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창조와 그 보존이 밀접하게 연결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창조의 진술이 단지 제 1원인으로서의 하느님으로서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정보만을 전달해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제 1원인의 하느님으로서 우리 체험과는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추론의 하느님으로만 머물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홍수설화는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 신분에 의한 본질적인 요소로서의 죽음을 맞이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고, 인루가 역사의 마지막을 맞게 되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 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베스터만은 죽음 역시도 인간의 타락에 의한 벌로써가 아니라 창조된 사실 자체안에 본질적으로 한계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의견대문에 과거에 창조론과 원죄론을 분리해서 가르쳤던 것을 시원론이라 해서 다시 창족론과 원죄론을 하나로 합친 것이 정당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1 세계창조와 인간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증언
1. 창세기 1-2장
2. 창세기 14,19-20
3, 신명기
4. 시편
창세기 첫머리에 기술되어 있는 창조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서로 다른 두개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두가지 창조 이야기의 주제는 같지만 배경과 문체, 서술방식, 기록자등은 서로 다르다. 문헌 가설에 의하면, 1,1-2,a의 이야기는 제관계 문헌에 속하고, 2,4b-3,24은 야훼스트계 문헌에 속한다고 본다.
이렇게 볼때 이스라엘의 창조관은 그들이 가나안과 바빌론에 있을 때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야훼스트계 문헌은 솔로몬(기원전 962-922)시대 유다 지방에서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고, 또한 제관계 문헌은 유다왕궁이 멸망하고(기원전 587)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립의 희망마저 포기하고 지내던 시기에 바빌론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주변 세계는 신화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환경속에서 이스라엘은 야훼께 대한 신앙을 보존하고 키워가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 이스라엘에서 야훼를 우주의 창조자로 고백하는 것은 상당히 후기였다고 보여진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창조주로서가 아니라 계약의 주님으로 체험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새성의 만백성 가운데에서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어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그리하여 그 분 이외에 또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는 오직 유일한 하느님, 그리고 계약의 주님으로 체험하였던 것이다. 유일신론과 계약 이 두 가지가 곧 구약성서의 일차적 자료이고 모든 다른 자료는 이 두 자료로부터 추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 점은 창조론에도 해당한다.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핵심신앙은 신명기 26,5-9에 나타나는 것처럼 야훼 하느님이 이집트 탈출을 성공 시켜준 구원 행위에 대한 사건에서 민족의 수호자로서의 하느님이었다. 따라서 우주의 창조자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귀양살이 중이거나 아니면 귀양살이 후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세오경이 기원전 400년경 이후 최종 편집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게 하신 분이며 이스라엘의 존재를 세워 주시고 만들어 주신 분이다. 이러한 신앙과 체험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에서 그 당시 주위 환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창조에 대한 신화들을 해석해야 했다고 보여진다.
야훼이신 하느님께서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화고부동한 신앙은 야훼께서 우주의 창조주가 되신 까닭이다. 다시 말해 야훼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골풀바다를 가르고 이끌어 내신 것은 그분이 본래 태초의 물을 가르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별들을만드신 하느님이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햐웨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바로 우주의 창조주요 절대자라는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긴 해도 반대로 야훼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체홈한 구원행위를 통해서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구원 사건때문에 창조주라는 신앙이 고백된 것이냐, 창조주이기 때문에 구원자라는 믿음이 나온 것인가 ?).
창세기의 창조 진술방법은 역사적 원인론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원인론이란 현재의 어떤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그 원인에 대한 과거를 소급하여 묘사하는 진술이다. 예를 들면 현재 행해지고 있는 의식적인 금기(tabu)에 대한 해명방법을 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짐승의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아니한다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야곱이 하느님과 겨룰 때 하느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쳤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리는 것이다(창세기 32,32).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이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과거의 출애굽, 가나안 정착, 성조들의 역사,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스라엘의 뿌리를 서술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창조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준비하는 예비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근동지방의 주변국가의 신화들과 다른 점은 신화들에 있어서 신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신이 아니고 다만 형이상학적인 시원에 관한 원인과 이유가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있을 뿐인데 반해서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을 시간과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으로 기술하고 있고, 아울러 창조 이야기 역시 역사가 이루어지는 장소,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는 역사진행의 원시작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신화에서는 창조사실과 제신이 다만 한 민족이나 한 세력권에만 중요하고 다른 민족이나 다른 신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나,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하느님 야훼간에는 극복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와 거리가 있다. 스스로를 가장 작은 민족으로 자처하고 반면에 하느님을 처음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신명기 7,7-9).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들의 야훼 하느님이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라는 인삭에 도달할 수 있었을가 ?
1) 아담으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이야기를 외워 기억하는 비상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최근 알렉스 헤일리가 「뿌리」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을 기억한다. 그는 캄비보롱고 등의 몇 마디의 자신의 부족어를 토대로 캄비아 근처에 사는 주푸레 마을까지 찾아가 7대조 할아버지 쿤타킨테의 역사를 찾아낸다. 이렇게 그가 7대조 할아버지의 역사를 찾을 수 있었던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구준 전승의 방법이었다. 그 부족은 한 사람의 역사가가 다른 일은 하지 낳고 자기 부족에서 생긴 일만을 암기한다. 그가 늙으면 새로 기억력이 좋은 젊은이를 뽑아 그에게 모든 기억을 전수한다. 이 「뿌리」라는 책에서 구전전승의 위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긴 해도 창세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주장에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여진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이 150만년전에서 200만년전까지 소급되고, 적어도 최초로 석기를 사용했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출현한 것이 50만년전이다. 더우기 우주 창조, 지구나 태양의 탄생은 더욱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이다. 자연과학자들의 의견을 따르면 현재 태양의 나이가 40억년, 그 수명은 수백억년, 지구의 나이 역시 45억년에서 35억년으로 추정한다. 실정이 이렇다고 볼 때 아담으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다는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
2) 하느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자구적으로 직접 계시하셨다는 주장이다. 가장 편리한 설명이다. 가장 편리한 설명인 만큼 가장 신빙성 없는 설명일 수 있다. 창세기 뿐 아니라 우리는 성서안에 서로 모순되고, 반복되고 있는 상이한 진술들을 발견한다. 그런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결코 전능하신 하느님도 아니요, 그야말로 변덕쟁이일 수도 있다.
3)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역사적 원인론적 진술이라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결과에서 원인에 대한 진상과 해명을 찾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깊은 산골짜기에 폐쇄되어 사는 한 부락민의 전통과 문학과 시들로부터 그 마을의 과거를 낱낱이 해명할 수는 없다고 치더라도 어느 정도 과거를 규명해 낼 수 있고 또 고고학으로 어떤 사건을 복원시켜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적 영역 안에서 체험하는 상태나 사건을 보고 이전에 일어난 현상이나 사건을 이들의 원인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시대의 인간들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때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고, 빗방울이 야구공 만하고, 인간수명이 500살ㆍ900살이 되고, 사람 만나듯이 하느님을 직접 만나고 하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론에 따라서 뱀이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는 것은, 인간이 고통스럽게 일을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결론 짓는 것이다(인간의 노동은 과연 하느님의 벌일까 ?).
이러한 기원론에는 두가지가 있다.
신화적 원인론 : 역사 이전의 사실이 환상과 상상에 의해 만들어지고 시적인 형태로 역사 이전의 것을 현상태의 원인과 토대로 설정하는 기원론.
역사적 원인론 : 현재 사실의 근원과 토대로 주어진 전역사적인 사실이 실제로 일어났을때에 이를 역사적 기원론이라고 한다.
그러면 창세기의 창조진술을 놓고 볼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디로부터 그것을 알았는가,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것보다 ‘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 하는 점이 더 앞서는 문제라는 것이다.
칼 라너는 ‘무엇’과 ‘어떻게’를 구별해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하느님의 유일한 동반자이고 그와 대화하고 더불어 행동하며, 시초부터 양성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창조적 행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느님께 향한 인간의 직접성은 인간의 불안정과 죽음의 지상세력에 내 맡겨진 존재로서 한줌의 흙과 같은 연약성 속에서도 이를 성취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창세기 1-2장의 핵심이며, 그 나머지는 수식과 방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 설화의 근본 취지는 세계 생성의 양상이나 방법이 아니라 그 연원을 규명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창조 설화는 자연과학적 또는 자연 철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체결한 계약 때문에, 세계 창조와 관련된 이 물음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창세기의 창조 진술만이 아니라 모든 성서가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해서 자구대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감이란 무엇인가? 학기초 피정을 지도해 주기 위해 오신 연제식 신부님과 우연히 몇마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그림을 게속하면서 고투하고있는데 어느날 하두 그림이 되지 않아서 전통적인 동양화의 기법을 벗어나 붓대로 저녁해가 지는 바다 한 가운데의 섬을 그렸는데, 집에 와서 보니 뭔가 그림 같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가끔 자기가 생각해도 잘 그린 그림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런 그림을 두고 하늘이 내린 그림이라고들 말한다고 한다. 때때로 우리도 우리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내 능력 이상의 것을 창출해 내는 경우가 있다. 바로 그런 것, 우리능력 이상의 어떤 것이 우리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순간에 주어지는, 그런 힘과 능력이 영감의 적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영감이라고 해서 어떤 기상천외한 것만을 생각하는 것 같다. 기적에 대한 생각도 일반적으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기적이나 영감이나 반드시 자연법칙을 파괴하고 등장하는 특수한 사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떻든 우리는 창세기의 창조설화 안에서 하느님의 영감이 작용한 만큼의 놀라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1.1 제관계 문헌 ; 창세기 1.1 – 2,4a

2.1.1.1제관계 문헌의 역사적 배경과 목적
제관계 문헌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관들이 쓴 것으로서 오경의 다른 문현, 야휘스트계, 엘로히스트계, 신명기계 문헌보다도 훨씬 나중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경신 예배를 위하여 여러 전승 자료들과 공문서, 제사 자료들을 수집하여 다시 배열하고 수정하고 보완하여 신학적으로 완성시킨 문헌이다. 제관계 문헌의 최종 편찬 시기는 바빌론 유배시절이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했던 것은 살아 남는 것만이아니라 어떤 뚜렷한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관계 저자는 백성들이 미래를 믿고 기다리게끔 그들에게 화려했던,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 시켜줄 필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유배 생활을 통하여 직접 이방인들의 세계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중심의 구원관과 세계관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확장시켜 보여 줄 필요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제관계 저자는 과거에 이스라엘을 형성시킨 야훼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밝히는 것 뿐 만 아니라 모든 민족 안에 역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새롭게 부각 시켰다. 또한 그들의 역사 한가운데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하상 예배드리는 행위를 주요시 하였다. 따라서 전례와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구원의 보편성과 하느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제관계 문헌은 시편, 지혜서와 같은 성무서들이 찬가의 형식안에 신화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데 비해서, 무미 건조하고 추상적이며, 사무적인 문체로 백성들에게 이야기하고 가르치려는 교훈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

2.1.1.2 창조 설화에 있어서 제관계 문헌의 특성
제관계 문헌의 첫번째 특징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창조되고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 족보를 중시하고 설화를 교훈적 목적으로 사용한다. 홍수 설화에서 중요한 것은 홍수 사건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계약으로 나타나는 자비이다. 인간이 공동체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인간관이 야휘스트계와 비슷하지만 특별히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동물을 지배하는 권한이 인간에게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위치를 부각시키면서도 인간의 문화, 경제, 정치보다는 제의적 공동체라는 점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2.1.1.3 창조주 하느님
제관계 문헌은 하느님은 그의 활동에 있어서 아무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분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한 처음>이라는 시작을 설정하는 창조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창 1,1). 여기서 bara(만들다, 창조하다)라는 용어는 고유한 하느님의 행위로서 언급되고 있다. 하느님의 전용어로서 이미 있는 기성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 특성을 말해주는 것은 하느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는 매우 고도로 발전된 형태의 창조다.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과학적인 설명이 시도되던 시대 이전에는 창조를 진술하는 데는 4가지 방식만이 있었을 뿐이다. ㄱ) 만들기나 행위를 통한 창조, ㄴ) 생식과 출생을 통한 창조, ㄷ) 투쟁을 통한 창조, ㄹ) 말을 통한 창조. 행위를 통한 창조는 완전히 원시적인 그룹에 속하고, 세계 전지역의 원시적 창조 설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진흙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한 예가 그렇다. 생식과 출생을 통한 창조와 투쟁을 통한 창조는 다신론적 신화 그룹에 속한다.이 둘은 신들의 복수성과 그들간의 대결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는 사랑(성적 결합)과 투쟁이 창조의 전형적인 모티브(구성요소, 주제, 소재)로 나타난다. 특히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고전적인 양식으로나타난다. 마르둑과 티아맛의 투쟁에서 갈가리 찢긴 티아맛의 몸에서 세계의 창조가 발생한다. 이런 표상은 널리 유포되어 있어서 구약성서안에도 가끔 발견된다. 예를 들면 이사야 51,9-10: : “라합을 찢던 이가, 용을 꿰 지르신 이가 당신이 아니십니까?” 창세기에 ‘심연’은 흐릿하게 티아맛을 떠올리지만 전혀 투쟁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생식과 출생을 통한 창조는 수메르의 신화들과 이집트의 우주 창조 설화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다. 물론 그 외의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이 이야기들의 전형은 바다, 바람, 땅 등 우주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계속적인 출생 또는 생성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창조가 처음으로 계보를 따라서 생성 또는 출생의 대물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들이 나타나는 곳이 여기다. 예컨데 족보 또는 계보를 연상시켜주는 구절들이 동일하게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창세기 제관게의 창조설화는 “이것이 하늘과 땅의 족보다 =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순서다.”라고 매듭을 짓고 있다. 한편 말씀에 의한 창조는 기원전 2500년경 에집트 멤피스의 프타(Ptah)의 신화에 나타난다. 신이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비슷한 내용이 있다. 멤피스의 창조신 프타에게 속한 하위 신들이 프타의 입술과 이빨이 되어 프타가 각 창조물의 이름을 일컬으면 곧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신화는 손이나 또는 출산, 그 밖의 다른 행위로 창조하는 다른 신보다도 프타 신이 더 우월한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위해 쓰여 졌다고 한다.
이 신화와 제관계 문헌이 차이는 어떤 투쟁이나 수고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하시자 그대로 되었다.”라는 표현으로써 하느님의 명령과 성취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주는 말씀의 창조는 어느 지역의 신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말씀 하시자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형식은 시편 148,5에 다시 반복되어 나타난다. “야훼가 명령하자 생겨났다”. 이 말씀에 의한 창조에서 제관계 작가나 성서 작가들은 신적 위격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보여진다. 제관계 작가는 그전의 오래된 창조 기록들, 특히 행위를 통한 창조의 자료들을 말씀을 통한 창조안에 내포 시키고 있다. 1장에 사용되고 있는 동사들을 보면, 가르셨다(4,7,9), 일컬으셨다(5,8,10), 만드셨다(7,16,25), 두셨다(17), 창조하셨다(21,27), 축복하셨다(22,28) 등이다. 여기서 말씀을 통한 창조는 창조의 충만으로 묘사된다.
제관계의 도식은 ㄱ) 명령의 도입부로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ㄴ) 명령으로서 ‘생겨라’ 또는 ‘있어라’ ㄷ) 명려의 완성으로서 ‘그대로 되었다’ ㄹ) 명령에 대한 판단으로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이러한 제관계의 진술은 그 이후 모든 사건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예컨데 하느님은 모세에게 파라오와 대결하라고 명령하신다. 장막을 세우라고 명령하신다. 물론 여기에는 명령의 수신자가 모세로 등장하고 있고 창조에 있어서는 명령의 수신자가 없다는 점에서 출애급에서의명령 이상의 이해가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관계는 하느님의 명령 말씀에 모든 사건의 기원을 두고자 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다.
이미 말한 바이지만 제관게는 하느님께 대한 예배, 의식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제 7일째의 휴식이다. 제7일의 하느님의 휴식에 초점을 두면서 앞선 제 6일간의 창조 행업은 하느님의 안식의 서곡으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느님 경배에 있어서 태양도, 달도,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 신성시되던 것들이 단지 하느님의 창조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신화한 점에서도 창조 설화의 목적이 하느님께 대한 공경과 관련을 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신화에서도 하늘과 땅의 창조가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신성과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 bara라는 용어는 단지 하늘과 땅, 즉 세상 창조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비록 제관계 문헌은 아니지만, 시편 89,47 (당신께서 만드신 이 인생의 덧없음을 기억하소서)에서는 인간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은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되고, 이사야 45,7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빛을 만든 것도 나요, 어둠을 지은 것도 나다. 행복을 주는 것도 나요,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나다)에서는 모든 구원과 불행의 원인과 관련되고, 이사야 54,16 (자기가 쓸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를 나 말고 누가 만들었겠느냐? 닥치는 대로 부수는 파괴자를 나 말고 누가 만들었겠느냐?)은 구원 역사에 있어서 세우고 부수는 창조자의 활동과 관련되고, 이사야 41,20; 42,5(이것은 야훼께서 손수 하신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루신 일임을 그들에게 깨우쳐 알리시려고 이모든 일을 똑똑히 보여 주신 것이다; 하늘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땅을 밟아 늘이시고 온갖 싹이 돋게 하신 하느님,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입김을 넣어 주시고 거기 움직이는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는 하느님 야훼께서이렇게 말씀하신다)은 그의 완벽한 작업과 관련된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65,17이하에서는 세상 마지막에 이룰 세샹의 구원과 영광으로서 새 하늘과 새땅과 관련된다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또 이 bara라는 용어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오늘날 철학자들의 도움으로 이해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존재와 대치되는 개념 무(無)는 이제관계 작가에게 아직 인식되고 있지 않았다고 본다. 성서작가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논리를 전개할 수도 없었고, 세상이 어디로부터 솟아 나왔는지에 대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단순히 ‘있었다’또는 ‘아직 없었다’라고 말할 뿐이며, 한 처음에 창조자 하느님이 활동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2절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덮여 있었고 그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은 바빌론 창조 설화에서 영향받은 듯이 보인다. 바빌론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신들의 우두머리인 마르둑(Marduk)은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태고의 홍수와 암흑에 싸여 있는 혼돈의 신 티아맛(Tiaamat)을 물리쳐야만 했다. 이 다신론적 신화에서는 신들간의 갈등과 모순 상황이 인간 세계에서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반하여 제관계 작가는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느님이 창조하시기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창조의 시발점으로서 신비로운 tohuwabohu(카오스, 혼돈)이란 말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마치 ‘아직 경작되지 않아서 황무지인 땅’(창세기 2,5참조)처럼, 정리가 되지 않은 무질서, 무엇보다 생명이 없는 어떤 상태를 지시한 것으로 희랍어 chaos(깊은 심연)로 번역된다. 그러니까 2절에서의 땅은 1절에서와 같이 하늘에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깊은 물, 또는 심연과 더불어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한 혼돈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땅은 사람이 살수 없는 사막이나 황야를 지시하며, 또한 허무, 무의미, 무가치함의 추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제관계 작가는 결코 이 tohuwabohu(카오스)로부터 하느님이 빛과, 별들과 동물들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지않는다.나중에 이 카오스를 존재의 반대 개념으로서 무라고 해석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 조정현 신부님은 1절에 이미 bara라는 동사가 사용되긴 하지만 제목에 불과하고, 카오스에대해 이야기하는 2절은 수식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1절의 카오스는 창조된 것이 아니며 다만 창조의 대당 개념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에 연연 하는 것은 바빌론 신화에서 마르둑 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카오스로부터 창조한 것처럼, 하느님도 카오스로부터 창조한 것이나? 카오스 역시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나?
하느님이 진실로 부로부터 창조한 것이냐를 분명히 하고자 한 까닭이다. 창세기의 창조는 무에서의 창조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bara동사와 잘 밪아 떨어지는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사고 방식은 아직도 희랍적, 스콜라적 개념을 알고 있지 못했다. 또 고대 동방의 사고 방식에 의하면 카오스는 도저히 하느님의 창조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셈족 사고 방식에서는 카오스는 단순히 없는 무가 아니라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로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홍수로서, 위협적인 세력으로서의 무로 나타난다.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카오스에 의해 질서가 위협당하는 것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 카오스의 심연을 갈라 놓음으로써 질서를 세우고 생활의 토대를 세우셨다.인간은 카오스에 계속디는 위협중에 야훼께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존재이다(시편 104: 시편 73,13-15).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숨을 거두어 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와 집니다.(시편 104,29-30)

당신은 그 크신 힘으로 바다를 가르시고
바다위에 괴물들의 머리를 짓부수신 분
레비아단 그 머리를 깨뜨리시고
그 고기로 사막의 짐승들을 먹이신 분… (시편 74,13-15)

창조 신앙은 구원신앙과 깊이 연관을 지니고 있다. 창조 신앙은 구원신앙의 시작이다. 즉, 하늘과 땅을 만드신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믿음이 구약 전체의 주제가 되고 있다.
한편 창조와 카오스 사이에 빠져 있는 중재 개념으로서 원인이 사유되고 있지 않다. 야휘스트계처럼 따이라든가 또는 플라톤처럼 ‘무정형의 질료’라든가 하는 것이 bara라는 신적 행위를 정당하게 할 수 있는 물질적 원료라든가 전제로서 창조주가 그 행위를 할 수 있는 어떤 근거, 또 그로부터 창조가 사건으로 진행되어 나오는 무엇으로말할 수 없었다. 창세기 1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빛을 창조하기 전에는 어둠이 있었고, 그로부터 질서를 세우신 분, 혼란속에 질서를 부여하신분, 세상의 모든 사건이 발생하는 생명과 방법에 있어서 질서를 이룩하신 분 역시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이다.
좀 더 분명히 하자면, tohuwabohu라는 용어에 주의 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는 이 용어를 ‘무’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서 nihil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고정되어 있고, 생명적이나 능력에 있어서의 결핍 또는 부족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사야 45,18은 생명력이 없는 사막을 의미한다. 이사야 29,21에서는 재판에 있어서 어떤 합당한 근거가 없음을 의미한다. 사무엘 상권 12,21에서는 우상과 관련해서 도움이 못되는 것, 무용한 것임을 의미한다. 보다 추상적 개념으로서 이 ‘무’는 욥기 26,7에서 발견된다: “하느님은 ‘땅덩어리를 허공(tohu-nihil)에 달아놓으신 분’. 더욱 발전된 개념은 마카베오 하권 7,28에서 발견된다. 마카베오는 희랍어로 쓰여졌다. “얘야, 내 부탁을 들어다고. 하늘과 땅을 바라 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 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어떤 형이상학적인 무로 개념된 것은 상당히 후대이다. 제관계에서는 자연에 있어서 생명이 없는 어떤 상태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2.1.1.4 세상 창조
창세기만큼 문학적으로도 시간과 공간 양차원에 있어서 세계에 대하여 완전한 성찰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사실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는 세계가 존재하게 되는 그 맥락에서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6일간의 작업’이 ‘창조적 분리’로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제관계가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핵심 사건이었던 출이급이 골풀바다의 ‘분리’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이 구원의 배경으로 빛의 창조, 하늘과 천체의 창조, 고정된 따의 창조가 묘사되고 있다. 비체계적인 상태에 체계적 질서가 마련된다. 비신화화 작업으로 태양과 해와 별들이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아님을 밝힌다. 창조주와 창조물의 깊은 간격과 차이를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태양과 달과 별들이 신성을 상실 당한채 근본적으로 인간이 탐사할 수 있는 세계의 구성 요소로 전락한다. 하늘의물체들이 전적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이와 같은 혁명적인 진술은 일찌기 없었다. 여기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이 더욱 강조된다.

<한 처음>
이 말은 모든 것에 앞서 있는 절대적인 시작을 말한다. 한 처음보다 앞선 상태는 있을 수 없다. 영원하신 하느님이 곧 처음이자 마침이시라는(묵시록 22,12)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제관계 작가는 단지 하늘과 땅의 시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시작은 마침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이 대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시작된 세상은 마칠 때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우리는 종말론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작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마침은 하느님께로 되돌아 간다고 보는 것이다.

< 하늘과 땅 >
여기서 하늘과 땅은 우주의 일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는 일체의 음식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늘과 땅의 창조는 시작이 있었음을 뜻하고,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일부 자연과학자들은 자연 발생설을 주장한다. 이 주장에도 근거는 없다. 자연 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드러나는 현상과 성질을 규명할 뿐이다.

< 빛의 창조 >
1절이 창조 이야기의 전체 요약이며, 2절은 창조 이전의 상태에 관한 서술이며, 3절은 창조 과정의 시작이다. 창조 이전의 상태인 혼돈의 특성이 어둠이라고 앟ㄴ다면 질서는 어둠을 제거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빛은 개별적인 창조 작업을 이루어 나가기 전의 준비작업으로 창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빛이 생겨나자 낮과 밤이 구별되어 여기서 시간이 생겨난다. (빛과 태양의 관계) 하느님의 빛과 어둠을 나눈다는 ‘분리’는 고대 우주론에서 창조를 이루는 결정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제관계의 이러한 표현은 고대 전승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면 어둠은 창조된 것인가? 어둠은 혼돈의 어두움과 동일한 것인가? 어둠 역시 하느님이 창조한 것인가? 제관계 작가는 여기에 침묵하고 있다. 단지 빛과 어둠을 분리하여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도록 하는데 관심을 가질 뿐이다.)
빛을 낮이라 이름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이름 지으며 창조의 첫 과정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을 주관하고 지배하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아담이 낙원을 돌볼 때, 지배권으로 동물 하나 하나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창세기 2,19). 열왕기 하권 23,34에서는 에집트 파라오 느고가 요시아의 아들 엘리야킴을 여호아킴으로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다. 이것은 파라오 느고가 이스라엘왕 여호아킴에 대해 지배권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밤 낮 하루가 지났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현대인들과 달리 하루를 해질 때부터 다음날로 계산하는 풍습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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