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공의 형성 >
빛의 창조로 혼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땅을 뒤덮고 있는 물을 분리시켜야 했다. 제괸계 저자는 그들이 전해 받은 우주관을 따라 천체와 하늘을 묘사하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관이란 3층 구조적이다. 천상세계, 지상세계, 지하세계의 구조다. 천상 세계는 신이 거주하고, 지상세계에는 인간과 세계 사물들이 거처하고, 지하세계에는 악신, 또는 악마가 거주한다고 보았다. 또 하늘도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1층은 새들이 날아 다니는 대기권, 2층은 해와 달과 별들이 결려 있는 천체권, 3층은 하느님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보았다. 땅은 견고한 받침대로 받쳐져 있는데, 누군가가 이 받침대를 흔들어대면 지진이 발생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지하세계인 셰올로 내려 간다고 보았다. 하늘을 받치고 있는 창공은 ‘발로 딛다, 다지다, 짓밟다, 두드려서 펴다, 넓히다, 늘이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동사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두드려 펴 놓아 고정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 둥근 구리판 같은 총공은 하느님이 하늘에 쉬운 하나의 칸막이로서 땅에 남아있는 혼돈의 물과 창공 위에 있는 혼돈의 물이 섞이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가끔 이 창고에 구멍이나 창문을 열면 창공 위의 물이 흘러 내려 비가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창세 7,11 : 바로 그날 당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 그래서 사십일 동안 밤낮 땅 위에 폭우가 쏟아졌다).
이제 창공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늘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이미 언급한대로 하늘 역시 어떤 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칸막이에 불과하다는 비신화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다와 육지>
낮과 밤, 하늘과 땅, 물과 바다의 세 가지 분리 작업으로 첫 사흗날의 창조가 완료된다. 제관계 작가는 낮과 밤의 분리에서 보여지는 시간의 차원을 하늘을 위 아래로, 바다와 땅을 분리하는 공간의 차원보다 앞세우고 있다. 이와같은 창조적 작업으로써의 분리는 혼돈을 극복한다.
<초목의 창조>
11-13절의 식물의 창조는 새로운 창조과정으로 접어든다. 혼돈에서 분리작업으로 꼴을 갖춘 우주의 공간을 채우는 일이다. 여기서 첫번재로 식물의 창조가 언급되고 있다. “당에서 움이 돋아났다”라는 12절의 표현은 땅이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신비로운 생명의 힘은 하느님의 말슴에 의한 것(11절)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 땅의 능력을 신격화하는 이방인들의 신화적 우상숭배도 실격화되고 있다.
식물들이 종류에 따라 생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전에 형성되어 왔던 배경과는 어긋나는 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 신화에서는 식물과 동물들의 창조가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메르의 한 신화는 여덟개의 과일 식물들은 남신 엔키와 초목의 여신 우투의 결합으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나중에 다시 또 다른 8개의 초목이 나타난다. 이 이야기의 목적으로 식물의 기원에 관하여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단지 특정한 초목들이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식물의 창조는 세계창조와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창세기 1장은, 식물과 동물의 창조는 두 단계의 깊은 이해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물계와 대비되는 식물계로 이해되고, 세계창조의 전과정에 맞추어진 질서 안에서 한 구성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의 관심은 창조주와 창조물간의 관계이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땅 위의 식물체는 분명히 하나의 종에 속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 하나하나의 개체가 모두 각각의 종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질서지워진 전체, 하느님으 창조에로 질서지워져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이러한 생물의 출현에 대해서 이미 말한 자연발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주장은 먼지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석은 흙에서 풀이 생겨 나오며, 식물에서 양새끼가 나온다고 믿었다. 17세기 이후 이런 자연발생설이 일반상식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런에 1860년경 파스퇴르가 수년에 걸친 실험에서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날 수 없고, 비록 단세포 생물이 세균일지라도 반드시 생물에서 생물이 생긴다는 것을 검증한 바 있다.
<해, 달, 별들의 창조>
고대 동방지역에서 신들로 여겼던 해와 달과 별이 창세기에서는 단지 창공을 장식하는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천체 숭배를 우상으로 간주한다. 해와 달에 대한 숭배는 꼭 고대 문명권만도 아니고, 바빌론이나 에집트만도 아니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근세기에 이르러서도 해와 달에 비는 일을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별의 신적인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의 운세처럼 서양에서는 별자리로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제관계 작가들의 이러한 주장은 가히 놀랄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물고기와 새, 짐승들의 창조>
동물의 창조에는 어떤 새로운 것이 덧붙여지는데, 축복이 바로 그것이다. 동물위 창조는 식물의 창조와 다른 것이다. 여기 1,21에서 다시 한번 동사 bara를 사용함으로써 다시 한번 생명체의 창조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생물들이 그들 나름대로 종족을 번성시킬 생식력을 부여 받아 그들이 받은 생명을 이어 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인간 창조를 향한 준비 단계를 마련해 준다. 여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에 공통된 것에 대한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이 창조 행위는 자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향함으로써 창조된 각각의 종류를 증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축복의 근본적인 의미다. 이 능력없이 참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새끼치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축복 말씀을 통해 제관계 작가는 생식력이 존족 보존을 위한 하느님의 귀한 선물임을 암시하고, 이방인들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생식력의 신화화를 배격하고 있다. 제관계가 전해주는 원역사에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축복 말씀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인간에게(1,28),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8,17; 9,1), 성조들에게(28,3; 35,11; 47,27; 48,4) 하느님은 똑같은 축복을 내리신다. 이 축복에서 창조물의 유지 보존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배려가 깔려 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근거도 바로 이러한 창조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제관게의 창조 진술은 창조가 시작한 바로 그때부터 현재의 체험 세계를 하나의 분명한 전체로서 인식하고 포용하고 진술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2.1.1.5 인간 창조
여기서는 다른 창조와 같이 말씀을 통한 창조가 아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 되어야 하는가? 우선 창세기 1,26-31은 독립된 전승으로서 나중에 세계 창조의 한부분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야휘스트계 2,4b-24에 나타나는 인간 창조와 병행을 이루는데, 그 차이점은 야휘스트계는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이야기 하는데 비해서, 제관계 인간 창조는 그 과정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창조된 것과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관심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있다. 우선 2장의 인간 창조 설화가 더 오래된 기록이라는 점에 서 왜 제관계는 아담과 에와의 이야기나, 창조의 과정이 생략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질문될 수 있겠다. 이것은 인간 정신이 도달하지 못하는 창조의 비밀을 보존하자는 것과 아울러 알지 못하는 것의 자세한 과정 기술에 대한 유보 측면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가 개진하고 있는 인간 창조에 관한 진술과 인류 초기 역사에 대한 과학적인 추구와 서로 대립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겠다.
인류 기원에 관한 신앙과 과하가자들의 논쟁은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실상 제관계 문헌은 그 전단계의 신화적 진술과 과학적 진술 사이의 중간적 위치를 차자한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은 정확한 규정에 대해서는 개방적이다.
<‘우리’>
인간 창조가 그 이전의 창조 작업들과는 다르게 진술되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우선 도입부부터 특이하다.; “우리 .. 사람들을 만들자”(1,26) 학자들 중에는 ‘우리’라는 표현을 하느님의 삼위일체가 암시적으로 계시된 것으로, 또한 왕들의 장엄성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라는 표현은 3,22에 다시 한번 나타난다. 이 복수형 주어는 왕들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회의를 할 때의 모습을 하느님께 적용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예컨대, 열왕기 상권 22,19이하, 욥기 1,6; 2,1이하에 하느님이 천상회의를 소집하고 주관하는 모습이 전해진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무엇을 결정할 때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였음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 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
우선 제관계 인간 창조는 인간의 각별한 위치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첫번째 특성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인간의 다른 동물들에 대한 지배권이 부여되고 있다. 또 한가지 특징은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자식을 낳아 번성하고 온 땅을 채우는, 완성하는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왜 인간이 존엄한가? 일찌기 희랍 철학가 크세파노스는 ‘만일 소나 말이 손을 가지고 있다면 신을 소나 말의 모습으로 그렸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신화에서 신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 낸 것에 대해서 실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말은 인간이 생각과 말과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화사켰다는 비난과 함께 왜 인간이 존엄한가 하는 것도 우리가 인간이니까? 우리가 정신을 가지고 말을 하고 글을 쓰니까? 그래서 아니냐 하는 비난도 암시적으로 내포한다고 본다. 여러분은 왜 인간이 존엄합니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사화는 인간의 창조를 신들이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 불쾌하고 귀찮은 노동을 대신하도록 뒤늦게 만든 하층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화와는 달리 창세기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Selem과 Demut라는 두 단어이다. Selem은 본래 조각의 상을 뜻하는 히브리어로 모습 또는 모상(image,imago,eikon)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아모스 5,26에서는 이방인들이 지니고 다니는 신들의 조각상을 두고 Sele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모상 또는 모습은 상당히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demut은 selem보다 추산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경우에 상용되고 있기도 하다. 열왕기 하 16,10이하에서 아하즈왕은 아씨리아를 방문하여 아름다운 신전의 제단을 보고 그 도본(demut)를 만들어 이스라엘에 돌아와 똑같은 신전 제단을 만든다. demut를 영어로는 likeness, 라틴어로는 similitudo, 희랍어로는 homoiosis으로 번역되는 바 유사함, 비슷함을 뜻한다. 창세기 5,3에는 셋이 아담을 닮았다고 전한다. 다시말하면 셋은 아담의 selem이요,demut이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 용어는 하느님과 인간의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이러한 인간의 특별한 위치를 잘 드러내는 성서귀절이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의 영광의 관을 씌어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시편 8,5-6)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일정한 수명을 주시고,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권
한을 주셨다. 또한 그들을 당신 자신처럼 여겨서 힘을 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모양대로 만드셨다. (집회서 17,2-3)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따서
인간을 만드셨다. (지혜서 2,23)
이와같이 성서귀절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특별한 배려 가운데 창조된 인간이라는 점에는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하느님과 닮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다. 시편은 ‘하느님의 영광에의 차며’, 내지는 ‘영광의 관’이 인간이 하느님과 닮은 점과연결되고, 지혜서는 ‘불멸성’, 집회서와 창세기는다른 동물과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하느님의 보상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관계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selem과 demut은 인간의 탁월함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가.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인간의 특성으로서의 하느님의모상과 인간의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구별하기도 한다.
(1)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탁월성
하느님의 모상을 전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세기 1,26에서 모든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선언한다.어린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정상인과 장애자,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없이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전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세기 1,26에서 모든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선언한다. 어린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정상인과 장애자,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이 없이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다.
(2)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세계통치권
하느님은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이 축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존재인 인간에게 내리는 것인 만큼 짐승들과는 달리 직접 말씀하신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1,28).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첫말씀이다 .이처럼 인츄역사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출발한다. 이제 인간은 하느니으로부터 받은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하느님께 봉사하게 된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인간은 세상 만물에 대하여 왕다운 지배권을 ‘부려라’하는 권위의 위임과 더불어받는다. 이 말은 권력을 남용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이 단어를 착취와 정복의 뜻으로 해석하여 자연을 철저하게 이용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서구강국들이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는데 이 말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인간에게 땅과 자연을 위림하신 하느님의 뜻을 목자요, 관리자로서의 사명을 맡기신데 있다. 왕의 기능과 사명에서도 이것은 분명하다. 착취와 남용, 파괴의 오용이 아니라 번성하도록 돌보아 주고 지켜줄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공해의 심각성을 보고 느끼고 있다. 여기에 대한 인간은 공동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고 본다(맺음말-인간의 존엄성 창조)
(3)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남자와 여자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창조사업을 끝내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평가하신다. 매번 창조가 한가지씩 이루어 질 때마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공동 번역이 번역하고 있지만, 본래는 인간창조 후에만 매우(very)라는 부사가 첨가되고 있다. 여기서 ‘좋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심미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좋다’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적합한, 친절한, 실질적인 등등의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구약에서 ‘좋다’라는 말은 잘 생긴 사람을 지칭할 때처럼 대상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도 사용하지만, 어떤 사건이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가르키는 기능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시편 92,2). “아침에 당신의 사랑을 알이여, 밤마다 당신의 미쁘심을 전하는 일,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읍니까 ?”. 1,31의 ‘좋았다’라는 판정도 세계의 창조라는 역사적 사건이 하느님의 뜻대로 조화롭게 잘 이루어졌고, 모든 창조물이 제 기능을 제 위치에서 발휘하고 있음을 말한다. 시편은-특히 148편-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하늘에서 야훼를 찬양하라…해야 달아 하느님을 찬양하여라…땅에서도 야훼를 찬양하여라…큰 물고기도, 깊은 바다도, 번개와 우박…). 제관계 작가는 찬조물의 하느님 찬미 대신에 하느님 자신이 창조물을 ‘좋다’고 인정하신다고 기록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좋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성서의 결론과 달리 철학가들의 영향으로 특히 플라톤의 영향으로 이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고,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았던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2.1.1.6 인간의 창조 사명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1,28).
같은 목적과 사명을 위해 하느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축복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신적 축복 능력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 창조의 사명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계속되는 창조로서의 출산을 첫자리에 둘 수 있다(pro-creatio). 이 생식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였다.
생식으로 인한 번성에 대해서 어떤 기준이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이론들이 있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경우는 로핑크와 반대 입장에 선다. 베스터만은 한계나 기준이 없다는 것이요, 로핑크는 한계나 그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제관계문헌의 배경을 놓고 볼 때, 실제로 인구과잉에 대한 Atrachasi의 신화의 어떤 귀절을 만날 수 있었고, 또 한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있음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해서 이 제관계 문헌의 귀절은 :‘땅을 채워라. 하느님이 세워준 규정을 따라서 이미 너희에게 준 이 땅위에’라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증가되는 것을 제한하는 인구조절 정책은 다른 어떤 성서적 자료와 대조되는 방식안에서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말해 오늘날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는 인구조절 정책으로서의 낙태문제를 어떻게 성서의 근거를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인구조절정책은 필요하다. 그래서 하느님의 세워준 규정이라는 어떤 기준이 있다고 보는 입장과 인구조절 정책은 전적으로 하느님에 달린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는냐 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인구조절정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것은 자연적인 주기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낙태라는 살인을 통해서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땅에 대한 정복은 Kabash라는 동사를 통해서 언급된다. 이 동사는 원수를 ’짓밟다‘, ‘굴복시키다’, ’폭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다‘라는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또 ‘땅의 한 부분을 소유하다’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성서귀절을 두고 과거 여러 세기동안 그리스도교가 자연과 원천에 대한 약탈행위를 정당화 했던 바를 재고 해야한다.
유비적으로 동물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행사함에 있어서 ‘다스림’(dominio)이라는 단어(히브리어로는 rada)가 사용되었다.일부 현대 주석가들은 이 단어를 다른 구약 성서의 귀절들을 상기시키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무엇보다고 1,29이하의 귀절들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 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1,29-30). 여기서 모든 식물은 인간의 양식으로 간주된다. 9,1-3에서는 홍수 이후 인간은 동물을 양식으로 삼기 위해 도살하는 것이 허락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도살은 최후의 경우 양식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9,4-6에서 인간과 동물의 투쟁이 주제가 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하느님은 생명의 보호자. 방어자요, 필요 이상으로 도살하는 자들을 방치하지 않는 심판관으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유배 이전(이사야 11,6; 호세아 2,20), 유배 시기(에제키엘 32,4), 유배이후(이사야 66,24)를 아울러 고려 해 볼 수 있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어울리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이사11,6).
그날 나는 이스라엘을 해치지 못하도록/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밭
의 해충에게 다짐을 받고 활이나 칼같은 무기를 이 땅에서 부수어,
이스라엘이 다리 뻗고 자게 하리라 (호세 2,20).
내가 너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 벌판에 버리면/ 하늘의 온갖 새
가 네 위에 내려 앉고/ 온갖 들짐승이 너를 배부르게 뜯어 먹으리
라.(에제 32,4).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나를 거역하던 자들의 주검들을 보리라/ 그
들을 갉아 먹는 구더기는 죽지 아니하고/ 그들을 사르는 불도 꺼지
지 않으리니 모든 사람이 보고 역겨워하리라 (이사 66,24).
이러한 성서귀절에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평화의 시대, 어린아이가 맹수와 함께 노닐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하느님 역시 동물들과의 화해를 강요하고 계시다. 제관계 작가가 인간을 자연의 주인, 지배자라고 하는 것이 바로 목자라는 입장이라는 측면에서라고 할 때, 제관계작가가 성서의 전체적인 전망과는 다르다고 여기게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유목민으로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의 당시 문화적 배겅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화된 우리의 생활 조건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 이론도 있다. 왜냐하면 제관계는 상당히 발전하고 있는 바빌론의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여러가지 상이한 직종들에 대해서 그 역활과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 제관계는 하느님과 관련해서, 인간사와 관련해서, 하나의 사회가 여러가지 구별되어 있는 노동위에 세워져 있고, 모든 기술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렇게 일정하게 규칙적이어야 하는 규범들에 대해서 잘알고 있었다. 이러한 규범들은 노예상태를 거부한다.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것을 우위에 둔다(출애 35,5-9), 인간이 부여받은 재능에는 하느님의 성령(출애 35,30-33)으로 부터 받은 탄력성있는 카리스마적 능력의 현존을 보게된다. 그리고 신앙의 영감(출애 25,8이하)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걸작품이 하느님의 계획안에 미리 그려지고 있다.
2.1.1.7 제 7일
인간의 창조가 창조과정의 정점을 이루고 있지만, 창조의 최종목적은 아니다. 적어도 제관계작가에게는 하느님이 창조를 완성하신 것은 이렛날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데 두고 있다.(하느님이 이렛날에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창세 2,2)). 세상의 완성은 6일 째 인간 창조에서가 아니라하느님의 안식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휴식, 또는 쉼은 어떤 일의 그침이 아니라 완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제관계 작가는 일곱째 날을 분명히 하루로 계산해 내고 있다. 이를테면 창조 작업이 전개되고 있는 6일간의 날들은 그런 날들과 전혀 다른 어느 한날에 자체의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후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삽밭이라는 안식일에 대한 언급 이상으로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인류를 위해 형성된 한 질서가 자리자고 있는것이다.
시간은 이 질서를 따라 일상의 하루하루와 특수한 날로 나뉘는 것이며, 일상의 하루하루는 그 특수한 날에서 자체의 목표에 도달하른 것이다. 빛이 어둠에서 갈라져 창조가 이루어졌듯이 노동의 하루 하루가 특별한 휴식의 날과 구별되면서 새로운 차원의 창조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휴식은 활동성의 상실이 아니라, ‘축복하다’, ‘명상하다’, ‘다시 결합하다’ 등의 용어와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폰 랏(G. von Rad)은 하느님의 창조에 있어서 그분의 “신비롭고, 호의적인 연계성”을 보고 있다. 제 7일은 거룩한 날이요, 축복받은 날이요 바로 쉬는 샅밭의 날이다. 거룩한 것은 하느님과 관련된 까닭이며, 이세상에 발생할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상징이다. 다시말하면 인간에게 부과된 일은 그 자체가 인간의 목표가 아니다. 인간의 목표는 일곱째 날의 휴식에 암시 되어 있는 영원한 휴식을 목표로하며,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창조의 완성이라는 말이다. 축복받은 날이라 함은 모든 부분적인 축복이 여기서 그들의 총체요 요약으로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며 그날 그날의 창조를 요약하며,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라는 표현으로 모든 창조의 매듭을 짓고 있다.여기에 축적된 축복의 힘은 축복된 실재들의 생명력과 출산과 생식을 통한 생명력의 풍부함을 의미한다. 창조의 결미에 나타나는 생명력의 번성과 지속성의 축복은 동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나타나는데, 제 7일은 그와같이 자연의 내적 지속성안에 생명이 발전하는 것이 하느님의 지향한 뜻이었음을 드러낸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내려준 생명의 지속성안에서 창조 활동을 위임 받았고 그 목표인 영원한 안식을 지향하고 있으며,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곧 모든 창조의 완성 종결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1.1.8 계약
제 7일간의 창조작업에 관한 신학의 계속이 6,9에서 다시 나타나다. 여기서 죄가 암시되고 있다. 땅의 부패와 폭력의 충만함을(6,11)을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 의롭고 흠없는 사람 노아가 그의 자식들과 살고 있다. 하나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1,31에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6,12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세상은 너무나 썩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야휘스트계와 마찬가지로 제관계 문헌 역시도 이러한 썩은 세상 때문에 하느님이 미리 세상의 마지막을 맛보여 줄 것을 결정하였다고 전한다.하지만 다시 창조의 불연속성, 단절을 마음에 드는 작은 집단을 통하여 새롭게 세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시길 원하신다.(이런한 작은 집단, 남은자들의 사상과 하느님의 종이라는 예언자들의 사상의 주제는 예수그리스도가 인간들의 대표자로서 가져온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하느님께서 노아의 가족들과 세우시려는 하느님의 계약안에 있다. 구원의 방주속으로 인도할 때 노아 가족과 모든 동물들을 포함하고 있다(6,19이하).이것은 창조한 모든 것들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계약안에서 그들을 축복하였고, 그들의 음식으로 제공하겠다는 하느님의 계약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홍수 이후 하느님은 계약을 갱신한다.(8,7). 계약은 노아와 그 가족과 맺게 되는데, 여기서 계약이 보다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전 처럼 모든 짐승을 없애버리지 않으리라.“(8,21). ”나는 너희와 계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 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9,11). 이처럼 은총의 계약이 인간과 동물과 땅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다시말하면 창조한 모든 것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여기서 ‘도살’이라는 문제가 거론되는데, 인간에게 동물을 살해하도록 허락된 것은 음식으로 제공되는 한에서 국한된다. 9,1에 모든 짐승이 인간을 무서워 떤다는 말마디로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공연히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일차적으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드러낸다. 피란 바로 생명을 지닌 존재임을 말한다.
두번째로 인간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야만인’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야만성과 폭력적인 사나움은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는 것임을 말한다. 특별히 인간들, 형제들을 죽이는 것은 더욱 더 그렇다. 이러한 경우 하느님은 그 피의 댓가를, 생명의 댓가를 요구하신다. 다른 인간들을 통하여 그 행위에 대한 저주를 수행하신다.(9,5). 창조는 이렇게 계약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계약으로 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보장을 받고있다. 창조는 구원의 징표아래 지속된다. 이것이 제관계 작가의 창조 설화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관점이다. 하느님의 선성은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극복하고 승리하신다. 정의를 위하여 분노를 포기하시지 않는다. 은총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생명의 신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제관계 작가는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권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연주의적인 제관계 작가의 경향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도록하는 데 있어서 무리없이 설득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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