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4 은총의 기원적 모형(모델)
야휘스트계 작가가 인간의 죄악의 자연성과 대조해서 하느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느님을 복수나 앙갚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기 보다는 정의로운 재판 진행에 당연히 필요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느님의 재판은 여러가지 자료들이 종합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변호를 할 기회를 주는 재판과정을 보여준다. 어떤 잘못이든지 무조건적으로 그의 악한 행동을 법에 따라 집행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하느님은 분노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판관이신 하느님께로 소환되어 그 죄를 헤아림 받게 된다. 이러한 재판과정은 대화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 정당하게 변호랄 권리와 자신의 잘못을 재확인 할 권리를 지닌다.
한편 무엇이 선고 되었는가? 우선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친밀성 상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단죄 내용으로 보지 않는다. 분명히 2,17에는 죽음의 위협이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범죄후 이 죽음은 실현되고 있지 않다. 3,19은 인간은 다시 먼지로 되돌아 갈 운명이라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불멸성의 결핍이 단죄 내용은 아니였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89, 48은 “어는 누가 영원히 살아 죽음을 만나지 않으리이까? 저승의 갈고랑이에서 제 목숨을 구할 자 있으리이까?”라고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가까움에 대한 결함으로서의 단죄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어졌다는 사실에서 발견되는 어떤 차이점과 관련되고 있다. 여인은 어머니로서 또 한편 아내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아내로서 남편으로부터 지배받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형벌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어머니로서는 아이를 낳는다는 기쁨이 산고와 근심으로 변화되어 벌의 내용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의 특징이 인간을 괴롭히는 어떤 형벌들의 목록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에 있어서 마지막 날까지 수고로움을 지니기 마련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하느님의 뜻 안에 어떤 하느님의 배려, 은총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단죄를 선고받은 후 즉시 여인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어머니’ 에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그의 임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축복이 되고 있다(4,1이하; 제관계 1,28참조). 낙원으로 추방되는 순간에도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다(3,21).
카인은 더욱 심한 죄를 범했지만 역시 그에게도 재판의 과정이 그대로 진행된다. 결국 저주를 받고 유배되지만(4,10),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고, 카인에게도 자손들이 허락되며, 도시를 건설하고 음악과 금속공예에 종사할 수도 있는 여러가지 직업이 보장된다(4,17-23). 이런 점에서 그 자손들이 저주를 영원히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한편 하느님의 은총은 홍수설화에서도 발견된다. 하느님은 분노, 저주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땅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쓸어버리려는 계획과는 달리 노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이 땅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혜는 노아의 자손들이 아버지 노아에게 한 행실에 따라 베풀어 졌다 (9,22-25).
이처럼 야휘스트계 작가는 하나의 구원역사의 문맥안에서 창조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창조는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부록 : 창조와 구원
우선 구약성서에서 창조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였다는 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다시말해 구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이 세계가 하느님에 의해 창조 되엇다는 사실을 특별히 ‘믿을’일 이 아니었다. 그 것은 그들의 사고에 전제 되어 있었다. 믿는다는 것은 특별히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관련되고 있다. 믿는다는 것은 두가지 이상의 것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 세계의 창조는 선택 가능성을 고려한 어떤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창조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를 위한 전제였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구원 행위는 믿음의 대상일 수가 있어도 하느님의 창조는 믿음의 대상일 수가 없었다.
신앙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계시의 차원에서도 구약성서의 경우 창조는 결코 어떤 계시의 대상이 아니다. 마치 구약성서가 창조의 이야기로서 창조를 증거하는 것처럶 취급한다. 그러나 창조 때는 아무 증인도 있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도 창조 사실에 대한 증거는 있을 수 없다.
한편 구속(Redemption)이란 말은 그리이스어soteria를 라틴어 salus로 번역하여 사용했는데, 희랍어 soteria는 속량, 구해내다의 의미를 지니고, 라틴어와 그 파생어 이태리어, 불어는 행복, 축복등을 포괄하는 ‘안녕’이라는 말의 뜻을 지닌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라는 말은 구제해 내는 것, 구속해 내는 것 등의 행위 대신에 어떤 한 상태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원래 하느님의 구원 행위보다 그 분의 축복행위의 맥락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면 창조와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창조/그리스도의 구원/ 성령의 작용을 진술하면서 하느님의 이 세가지 행위를 신앙의 행위에로 이끌어 들이려고 한다.
우선 구약성서가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은 나중에 가서야 비로서 이루어진다. 우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느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있는 구원행위 안에서다. 하느님의 위엄하심은 구원행위 안에서만이 아니라 창조의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창조와 구원은 양극구조의 관계를 띠고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만 어떤 공통성을 찿게된다. 창조는 구약성서에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전제로서 실제적인 실재였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구원업적을 통해 체험되는 하느님이 바로 전제되고 있는 창조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자 하였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창조 – 타락 – 구원의 도식을 위해 과거 교회가 창조 이야기에서 필요한 부분인 1-3장만을 별도로 취급하였다. 여기서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다시말해 인간이 고급품으로 창조 되었다가 죄로 말미암아 하급품으로 전락하였고 이에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상급품으로 회복된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이미 보았지만 죽음이라든가 노동이라는 것이 타락으로 말미암은 처벌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 완전하지 못한 한계있는 존재로 창조 되었다. 야휘스트계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부족함을 보이면서 흠있는 상태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 불순명으로 하느님을 거스리는 인간, 자기와 같은 종인 인간을 살해 할 수 있는, 다시말해 형제 살해의 잠재력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만을 부리는 인간. 이처럼 인간의 다면적인 결함과 죄스러움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효력있는 축복을 앗기지 않고 보존하며 후손 대대로 이어져 삶을 이루어 나가는 인간실존을 그리고 있다.
물론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도 핵심은 하느님의 구원행업이다.오경의 중심부는 출애급 사건이듯이 다른 일체의 사건들이 이 하느님의 구원행업을 에둘러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 구원행업은 이전에 펼쳐져 내려왔던 것에 그 토대를 구축하지 않고는 이야기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인류의 맨 처음으로까지 거슬러 가 닿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발생한 것은 이스라엘 한 민족에게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류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이 바로 맨 처음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한 일관된 흐름이 자리잡고 있다. 즉 하느님의 구원행업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화를 보이며 나타나는 한 사건인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행업은 단지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 이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제나 계속되는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초기에 가장 위험스러운 위협은 정치적인 영역의 것이었다. 사막에서의 굶주림, 이방인들의 침입이었다. 나중에 가서 이스라엘에게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변화들 중의 하나다. 밖으로부터의 위협이 내부의 위험으로 대치된 것이다. 여기서 예언자들이 출현한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배반의 위험이 백성에게 실질적인 위험이 되었던 때에 출현 하였다. 이때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적들을 괴멸시키는 것으로는 구원이 유효하게 성취될 수없게 되었고, 오로지 이스라엘이 자신의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만 그 구원은 성취될 수 있게 된다. 이런 구원관은 용서라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용서를 바탕으로 구원관을 전개하는 에언자가 바로 제 2 이사야 다. 창조와 구속을 확고하게 연계짓는 예언자도 바로 제 2 이사야 예언자다. 그는 이스라엘이 본집으로 되돌아가리라는 약속 속에서 유배된 처지에 있는 자기의 겨례의 저 무기력하게 남은 자들의 시선을 창조자의 엄위를 향하도록 이끌었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않았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피로하지 않고 고단하지 않은 분이시다”(이사 40,12-31).
다시말해 구원이란 하느님이 창조하여 이세게에 마련해 놓으신 것을 다시 회복 시키고 치유하신다는 의미에서 치유자, 구원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1.3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느님, 예언자들의 창조관
창조에 대한 신학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자료로서 제 2-3이사야서가 있다(40-45; 56-66). 첫번째 자료에 속하는 것들은 거의 제관계 문헌과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시기에 이스라엘은 유배지로부터 새로운 출애급을 희망하고 있었다. 나머지 자료들은 이미 해방이 실현된 상태에서 그 기쁨을 우주적 차원에서 노래하고 있다.
2.1.3.1 새로운 출애급
제 2이사야의 전승은 야휘스트나 제관계 작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행간속에 암시적으로 표현 하며 보존하고 있다.야훼 하느님의 창조적 능력은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이런한 능력은 해방의 능력, 다시말해 이스라엘 백성을 좌절케하고 비참하게 해떤 쇠사슬을 부수는 능력으로서 작용하였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내가 너희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되어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 주어라”(42,6이하).
여기서 ‘야훼의 종’이란 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뽑힌 전 백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빛을 가져다 주는 야훼 하느님의 특혜를 받은 창조물이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43,1). 그에게는 어떤 힘쎈 자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두려워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냐?”(43,3) 이러한 백성은 하느님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백성이요, 그렇게 해서 다른 모든 민족들을 자유롭게 할 도구로서의 민족이 된다. 바빌론으로부터의 해방은 또 다른 출애급으로 기대되었다. 이 새로운 출애급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사막에 대하여(40,3: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443,19: 모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을 트리라. 사막에 물을 대어주고,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 들이리니, 뽑아 세운 내 백성이 양껏 마시고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들이 나를 공경하리라…”
사막이 경작되고 개간 된 땅으로 변하고 (41,18),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유부녀의 아들보다도 더 많이 낳게 되고(54,1), 폐허가 사람들로 꽉차게 된다(49,19).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세상 창조와 더불어 출애급 사건을 묘사하고있다. 이러한 이사야의 표현은 야훼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과 더불어 이방인들의 신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은 구원행위에 있어서나 창조 행위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창조를 구원행위의 방식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보아라. 민족들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요, 천평에 덮인 가는 먼지일뿐. 섬들도 고운 가루보다 더 무겁지 않다. 레바논산 수풀은 장작으로 쓰기에도 모자라고. 거기에 뛰노는 짐승들도 번제물로 바치기에 모자란다. 민족들을 다 모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있으나 마나 허무하여 그 차취도 찿을 수 없다. 하느님이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어떤 모습이 그를 닮을 수 있다는 말이냐? 대장장이가 부어 만든 우상, 은장이가 금박을 입히고 부어 만든 은사슬을 걸친 우상과 같다는 말이냐? 끼리끼리 손발이 맞아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대장장이는 은장이를 부채질하여 ‘잘한다’하고 마치질 하는 자는 모루에 대고 두드리는 자를 칭찬하여 ‘그 쇠 참 잘 붙였다’하며 움직이지 못하게 못을 단단히 박은 우상과는 다르다. 손재간 있는 대장장이가 썩지 않는 나무를 구해서 세워 주어야 넘어지지 않는 우상과는 다르다….”(40,15이하).
여기서 열쇠가 되는 것은 ‘야훼의 종’이라는 인물이다.야훼의 종의 노래(42,1-9; 50,4-9; 52,13 – 53,12)에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야훼의 종은 창조물에 봉사에로 불림을 받으며(42,5), 깜빡거리는 심지의 등불을 끄지 않고(42,3), 이스라엘 백성을 조국으로 되돌아오게 하며(49,5), 민족들의 빛이 되며(49,6), 고달픈 자를 격려하고(50,4), 병자들, 상처 받은 자들을 치유하고(53,5),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고(53,10), 사람들을 떳떳하게 살게 한다(53,11). 이러한 봉사를 통해 구원 행위를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 준다.
2.1.3.2 새하늘과 새 땅
56장부터 제 3 이사야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이 제 3 이사야는 제 2 이사야와 달리 창조행위를 하시는 구원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국을 재건하는 기쁨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재건으(58,12)은 새로운 창조 행위로서 만방의 민족들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61,4-5). 이 축복받은 새로운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에게 개방된 순레의 장소가 되고 있다(60,1-22). 하느님이 창조하신 빛은 새로운 성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으며 모든 이들을 위해서다(60,1 이하; 62,1-12).가난한자들,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큰 축제는 강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66,2): 내가 굽어 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창조주는 그의 성전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받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것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어 만든 것이 아니냐?” 어떤 경우에라도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이 성전의 장엄함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다른 언어를 말하는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처럼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66,19). 이 대축제에는 모든 민족들이 참여하며, 창조주 야훼 하느님을 찬미한다(66,20). 더러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제로 뽑히기까지 한다(66,21).
창조하시는 구원자에 대한 고백은 새로운 종말론적 전망을 열어준다. “보라, 나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라…그렇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땅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내 앞에 남아있으리라..”
성서는 단순히 창조가 구원만이 아니라 마침내는 결정적인 완성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2.1.4 세상과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묵상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구약의 신앙은 시원사건을 다루는데서만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현시안에서도 나타난다. 날마다의 체험의 지평안에 자리 잡고 있다.창조에 관한 이론은 날마다의 체험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시편의 싯적 유산을 포함하는 지혜문학안에서도 발견된다.
2.1.4.1. 창조주하느님께 대한 찬미
유대인들의 전례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부분은 찬미를 드리는 부분이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인간의 생동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다. 찬미를 드리는 것과 찬미하지 않는 것은 마치 삶과 죽음으로 비교된다. 시편의 대부분이 이런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살아계신 그분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산자들의 특별한 대화로 보여진다. 이러한 찬가적 응송의 대상은 창조와 이스라엘에 대해 이루신 구원역사 안에서 체험되었고, 또 체험될 야훼 하느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업적들이다.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미래에 투사시키거나 반영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현재와 메시아 대망의 성격을 고려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생활하면서 체험했던 하느님, 또 개별적으로 지금 여기서 체험했던 하느님, 기꺼이 부탁을 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으로 체험했던 하느님의 역사는
이들로 하여금 찬미의 동기가 되게 하였다. 야훼 하느님이 그분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모든 창조물들을 돌보신다는 인식이 모든 사건 이면에서 지탱해 주고 있다.
이미 이사야서에서 보았듯이 창조의 체험은 여기서도 구원과 단단히 결합 되어 있다. 여기서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정당하게 된다. 시편 136편은, 감사의 찬가로서,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태양과 달을 만드신 분이요, 또한 동시에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구해내신 분, 이스라엘을 사막에서 인도해 주시고,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신분이심을 노래하고 있다.그 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도 입을 가진 모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이 고백되고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 하심에 있어서 바빌론 신화에 나오는 마르둑이 바다의 괴물을 물리치며 세상을 창조한 것 처럼 신화적 표현이 적용되기도 한다(시편 74,13-17; 89,10-13). 그러나 비신화화의 경향을 띠고 하느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 하신다는 표현도 나타난다(33,6-12). 우주의 현상들, 천둥 번개들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29). 모든 별들은, 모세의 법처럼 야훼의 법을 따라 운행되며 하느님의 솜씨와 영광을 드러낸다(19,1-9).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 감사노래를 부르고 신자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신다(145,10). 마침내 시편 104은 자연에 대한 기나긴 묵상을 소개한다.
떼이야르 샤르댕의 말처럼 이성적인 관찰은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것을 거부하기는 커녕 하느님을 찬미하게 한다.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일 것이다. 웅장한 경치라든가, 아니면 아주 부드러운 꽃잎 하나를 보고도, 또는 인간사이의 우정, 사랑을 확인할 때, 이런 모든 것이 찬미기도의 동기가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동기에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구약성서의 자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려움이, 고통이 하느님을 찿게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시편이 22편이다. 이 시편은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하는 모든 고통을 헤아리고 있다. 그러나 처음 귀절에선 하느님의 외면, 저버림을 이야기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 창조주를 ’나의 하느님‘이라 부르고 그 하느님께 찬미하도록 한다. 이 시편을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로 복음사가가 전하는데, 이 시편이야말로 인간이 있는 그대로 의 실존속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구약성서의 창조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2.1.4.2 인간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
한편 지혜문학에서도 하느님의 창조, 하느님이 창조주 이심을 고백하는 자료들을 찿아 볼 수있다. 지혜문학이 좁은 의미에서 주로 실존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주적인 차원을 등한시 하고 있지는 않다. 구약성서의 지혜는 일차적으로 인간적 체험을 주시하고 있다.체험적 지혜는 신학적 지혜와 상이하다. 그렇다고 따로 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측면은 양쪽 기둥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적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소급되지 않고서는 어떤 한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 것은 여전히 반성적인 형식에 머물고 있다. 현상들로부터의 거리를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전해주는 가르침을 찿아낼 수 있다. 우리들의 삶과 연결된 문제들에 직면해서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찰의 양식은 일반적으로 각각의 현상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지닌다. 때때로 이러한 대상들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일상적이며, 무의미한 것을 포함하기도 한다.
욥기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헤로움은 각 개인의 생물학적 발전을따라야 하고, 신생아의 발육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상의 생활을 거쳐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국면을 따라 성찰하도록 한다. 그 결론은 인간 본성의 단명성이다(욥 10,10이하). 이런 전망은 체험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결정적인 진리를 추론하기 위해 인간의 이웃에 대한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이해하면서 그 이해 지평을 넓게 한다. 자주 그 실패는 허영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을 보게된다(잠언 16,18; 10-22). 많이 베푸는 사람이 여전히 부유하다는 것을 적지 않게 경험한다(잠언 11,24). 서로 다른 상황을 설정하게 하고 거기서 또 다른 점을 배우도록 일깨우고 있다: “집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다투는 것보다 누룽지를 먹어도 마음 편한 것이 낫다”(잠언 17, 1이하).
인간의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환경, 처지를 분석하면서, 어떻게해서 인간은 혼돈의 전리품이 되고, 또 질서가 그 것을 다스리게 되는지. 또 어떻게 해서 본성은 인간의 위대한 스승이 되는지. 경험하지 않은 자에게 어떻게 조언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는 지혜롭게 되는지 일깨우고 있다. 지혜문학은 자연적인 사건과 인간의 태도 사이의 유비적 관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풍이 비를 몰아 오듯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 얼굴에 분을 일으킨다“(잠언 25,23), ”숯을 만지면 너도 더러워지고, 오만한 자들과 사귀면 너마저 오만해진다“(짐회서 13,1).
자연현상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태도를 동물을 유비적으로 사용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거머리에게는 달라고 보채는 딸이 둘,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 것이 셋,‘족하다’할 줄 모르는 것이 넷이 있으니,곧 지옥과 애기 못 낳는 모태와 물로 채울수 없는 땅과 ‘족하다’할 줄 모르는 불이다”(잠언 30,15). 비록 작은 생물이지만 보다 영리하다는 것을 말하는 지혜의 글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으면서도 더 없이 지례로운 것이 넷 있으니, 곧 힘은 없지만 여름 동안 먹을 것을 장만하는 개미,연약하지만 돌틈에 집을 마련하는 바위 너구리, 임금도 없는데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손에 잡힐 터인데도 대궐을 드나드는 도마뱀이다.”(잠언 30,24-28).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웃음 거리가 된다는 교훈적 지례를 주는 글도 있다. “당당하게 발을 옮기는 것이 셋,늠름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 넷 있으니,곧 아무 것 앞에서도 물럴서지 않는 동물의 왕 사자, 꼬리를 세우고 걷는 수닭,양떼를 거느리고 가는 수염소,군대를 지휘하는 임금이다.바보처럼 우쭐해지거든 입을 손으로 막고 잘 생각하여라”(잠언 30,29-32)
그러나 지례로움은 단지 일상적이고,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실상을 다스리고 있는 놀라운 질서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광대한 우주적 질서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게 한다. 다시말해 하느님을 체험하게 한다.
“푸른하늘은 지극히 높은 곳의 자랑이며,하늘의 아름다움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별들의 광채는 하늘의 아름다움이며,주님의 높은 곳을 찬란하게 비추는 장식이다…지극히 높으신 분의 분부로 눈이 내린고,번갯불이 심판을 알린다. 그분의 명령으로 하늘 문이 열려 부금들이 새즐처럼 난다. 그분의 큰 힘으로 구름이 엉기고,그분의 뜻을 따라 남풍이 불어 온다. 그분의 천둥소리는 땅을 뒤흔들고,그분의 뜻을 따라 북풍이 불고 회오리바람이 인다…의에 말한 것보다 더 큰 놀라운 일들이 많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업적 등에 극소수를 보았을 뿐이다.(집회서 43,1-32)
이처럼 체험의 지혜는 하느님께로의 찬미로 향하면서 하나의 신학적인 지례가 되게 한다. 이것은 우주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체험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혜,생명을 동리켜보게 ㅏ되는 체험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게한다. 특히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혜와 힘의 한계는 창조주 하느님을 향하게 한다.
생활과 세상을 관찰하는 신학은 지혜의 인격화를 보게된다.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야훼의 은총을 받는다”(잠언8,35). 하느님의 지혜는 하나의 인격으로 나타난다. 잠언8,22-25참조.이미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은 일상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차원으로,그리고 점차로 신학적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여기서 생활의 지례를 통하여 이성과 신앙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있다. 이러한 생명의 철학을 세상의 실상에 바탕을 두면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즉 창조주 하느님께 고무하고,창조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있다.
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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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4 은총의 기원적 모형(모델)
야휘스트계 작가가 인간의 죄악의 자연성과 대조해서 하느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느님을 복수나 앙갚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기 보다는 정의로운 재판 진행에 당연히 필요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느님의 재판은 여러가지 자료들이 종합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변호를 할 기회를 주는 재판과정을 보여준다. 어떤 잘못이든지 무조건적으로 그의 악한 행동을 법에 따라 집행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하느님은 분노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판관이신 하느님께로 소환되어 그 죄를 헤아림 받게 된다. 이러한 재판과정은 대화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 정당하게 변호랄 권리와 자신의 잘못을 재확인 할 권리를 지닌다.
한편 무엇이 선고 되었는가? 우선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친밀성 상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단죄 내용으로 보지 않는다. 분명히 2,17에는 죽음의 위협이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범죄후 이 죽음은 실현되고 있지 않다. 3,19은 인간은 다시 먼지로 되돌아 갈 운명이라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불멸성의 결핍이 단죄 내용은 아니였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89, 48은 “어는 누가 영원히 살아 죽음을 만나지 않으리이까? 저승의 갈고랑이에서 제 목숨을 구할 자 있으리이까?”라고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가까움에 대한 결함으로서의 단죄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어졌다는 사실에서 발견되는 어떤 차이점과 관련되고 있다. 여인은 어머니로서 또 한편 아내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아내로서 남편으로부터 지배받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형벌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어머니로서는 아이를 낳는다는 기쁨이 산고와 근심으로 변화되어 벌의 내용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의 특징이 인간을 괴롭히는 어떤 형벌들의 목록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에 있어서 마지막 날까지 수고로움을 지니기 마련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하느님의 뜻 안에 어떤 하느님의 배려, 은총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단죄를 선고받은 후 즉시 여인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어머니’ 에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그의 임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축복이 되고 있다(4,1이하; 제관계 1,28참조). 낙원으로 추방되는 순간에도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다(3,21).
카인은 더욱 심한 죄를 범했지만 역시 그에게도 재판의 과정이 그대로 진행된다. 결국 저주를 받고 유배되지만(4,10),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고, 카인에게도 자손들이 허락되며, 도시를 건설하고 음악과 금속공예에 종사할 수도 있는 여러가지 직업이 보장된다(4,17-23). 이런 점에서 그 자손들이 저주를 영원히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한편 하느님의 은총은 홍수설화에서도 발견된다. 하느님은 분노, 저주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땅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쓸어버리려는 계획과는 달리 노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이 땅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혜는 노아의 자손들이 아버지 노아에게 한 행실에 따라 베풀어 졌다 (9,22-25).
이처럼 야휘스트계 작가는 하나의 구원역사의 문맥안에서 창조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창조는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부록 : 창조와 구원
우선 구약성서에서 창조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였다는 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다시말해 구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이 세계가 하느님에 의해 창조 되엇다는 사실을 특별히 ‘믿을’일 이 아니었다. 그 것은 그들의 사고에 전제 되어 있었다. 믿는다는 것은 특별히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관련되고 있다. 믿는다는 것은 두가지 이상의 것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 세계의 창조는 선택 가능성을 고려한 어떤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창조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를 위한 전제였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구원 행위는 믿음의 대상일 수가 있어도 하느님의 창조는 믿음의 대상일 수가 없었다.
신앙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계시의 차원에서도 구약성서의 경우 창조는 결코 어떤 계시의 대상이 아니다. 마치 구약성서가 창조의 이야기로서 창조를 증거하는 것처럶 취급한다. 그러나 창조 때는 아무 증인도 있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도 창조 사실에 대한 증거는 있을 수 없다.
한편 구속(Redemption)이란 말은 그리이스어soteria를 라틴어 salus로 번역하여 사용했는데, 희랍어 soteria는 속량, 구해내다의 의미를 지니고, 라틴어와 그 파생어 이태리어, 불어는 행복, 축복등을 포괄하는 ‘안녕’이라는 말의 뜻을 지닌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라는 말은 구제해 내는 것, 구속해 내는 것 등의 행위 대신에 어떤 한 상태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원래 하느님의 구원 행위보다 그 분의 축복행위의 맥락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면 창조와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창조/그리스도의 구원/ 성령의 작용을 진술하면서 하느님의 이 세가지 행위를 신앙의 행위에로 이끌어 들이려고 한다.
우선 구약성서가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은 나중에 가서야 비로서 이루어진다. 우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느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있는 구원행위 안에서다. 하느님의 위엄하심은 구원행위 안에서만이 아니라 창조의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창조와 구원은 양극구조의 관계를 띠고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만 어떤 공통성을 찿게된다. 창조는 구약성서에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전제로서 실제적인 실재였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구원업적을 통해 체험되는 하느님이 바로 전제되고 있는 창조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자 하였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창조 – 타락 – 구원의 도식을 위해 과거 교회가 창조 이야기에서 필요한 부분인 1-3장만을 별도로 취급하였다. 여기서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다시말해 인간이 고급품으로 창조 되었다가 죄로 말미암아 하급품으로 전락하였고 이에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상급품으로 회복된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이미 보았지만 죽음이라든가 노동이라는 것이 타락으로 말미암은 처벌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 완전하지 못한 한계있는 존재로 창조 되었다. 야휘스트계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부족함을 보이면서 흠있는 상태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 불순명으로 하느님을 거스리는 인간, 자기와 같은 종인 인간을 살해 할 수 있는, 다시말해 형제 살해의 잠재력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만을 부리는 인간. 이처럼 인간의 다면적인 결함과 죄스러움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효력있는 축복을 앗기지 않고 보존하며 후손 대대로 이어져 삶을 이루어 나가는 인간실존을 그리고 있다.
물론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도 핵심은 하느님의 구원행업이다.오경의 중심부는 출애급 사건이듯이 다른 일체의 사건들이 이 하느님의 구원행업을 에둘러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 구원행업은 이전에 펼쳐져 내려왔던 것에 그 토대를 구축하지 않고는 이야기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인류의 맨 처음으로까지 거슬러 가 닿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발생한 것은 이스라엘 한 민족에게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류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이 바로 맨 처음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한 일관된 흐름이 자리잡고 있다. 즉 하느님의 구원행업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화를 보이며 나타나는 한 사건인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행업은 단지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 이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제나 계속되는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초기에 가장 위험스러운 위협은 정치적인 영역의 것이었다. 사막에서의 굶주림, 이방인들의 침입이었다. 나중에 가서 이스라엘에게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변화들 중의 하나다. 밖으로부터의 위협이 내부의 위험으로 대치된 것이다. 여기서 예언자들이 출현한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배반의 위험이 백성에게 실질적인 위험이 되었던 때에 출현 하였다. 이때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적들을 괴멸시키는 것으로는 구원이 유효하게 성취될 수없게 되었고, 오로지 이스라엘이 자신의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만 그 구원은 성취될 수 있게 된다. 이런 구원관은 용서라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용서를 바탕으로 구원관을 전개하는 에언자가 바로 제 2 이사야 다. 창조와 구속을 확고하게 연계짓는 예언자도 바로 제 2 이사야 예언자다. 그는 이스라엘이 본집으로 되돌아가리라는 약속 속에서 유배된 처지에 있는 자기의 겨례의 저 무기력하게 남은 자들의 시선을 창조자의 엄위를 향하도록 이끌었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않았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피로하지 않고 고단하지 않은 분이시다”(이사 40,12-31).
다시말해 구원이란 하느님이 창조하여 이세게에 마련해 놓으신 것을 다시 회복 시키고 치유하신다는 의미에서 치유자, 구원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1.3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느님, 예언자들의 창조관
창조에 대한 신학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자료로서 제 2-3이사야서가 있다(40-45; 56-66). 첫번째 자료에 속하는 것들은 거의 제관계 문헌과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시기에 이스라엘은 유배지로부터 새로운 출애급을 희망하고 있었다. 나머지 자료들은 이미 해방이 실현된 상태에서 그 기쁨을 우주적 차원에서 노래하고 있다.
2.1.3.1 새로운 출애급
제 2이사야의 전승은 야휘스트나 제관계 작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행간속에 암시적으로 표현 하며 보존하고 있다.야훼 하느님의 창조적 능력은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이런한 능력은 해방의 능력, 다시말해 이스라엘 백성을 좌절케하고 비참하게 해떤 쇠사슬을 부수는 능력으로서 작용하였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내가 너희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되어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 주어라”(42,6이하).
여기서 ‘야훼의 종’이란 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뽑힌 전 백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빛을 가져다 주는 야훼 하느님의 특혜를 받은 창조물이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43,1). 그에게는 어떤 힘쎈 자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두려워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냐?”(43,3) 이러한 백성은 하느님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백성이요, 그렇게 해서 다른 모든 민족들을 자유롭게 할 도구로서의 민족이 된다. 바빌론으로부터의 해방은 또 다른 출애급으로 기대되었다. 이 새로운 출애급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사막에 대하여(40,3: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443,19: 모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을 트리라. 사막에 물을 대어주고,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 들이리니, 뽑아 세운 내 백성이 양껏 마시고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들이 나를 공경하리라…”
사막이 경작되고 개간 된 땅으로 변하고 (41,18),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유부녀의 아들보다도 더 많이 낳게 되고(54,1), 폐허가 사람들로 꽉차게 된다(49,19).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세상 창조와 더불어 출애급 사건을 묘사하고있다. 이러한 이사야의 표현은 야훼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과 더불어 이방인들의 신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은 구원행위에 있어서나 창조 행위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창조를 구원행위의 방식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보아라. 민족들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요, 천평에 덮인 가는 먼지일뿐. 섬들도 고운 가루보다 더 무겁지 않다. 레바논산 수풀은 장작으로 쓰기에도 모자라고. 거기에 뛰노는 짐승들도 번제물로 바치기에 모자란다. 민족들을 다 모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있으나 마나 허무하여 그 차취도 찿을 수 없다. 하느님이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어떤 모습이 그를 닮을 수 있다는 말이냐? 대장장이가 부어 만든 우상, 은장이가 금박을 입히고 부어 만든 은사슬을 걸친 우상과 같다는 말이냐? 끼리끼리 손발이 맞아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대장장이는 은장이를 부채질하여 ‘잘한다’하고 마치질 하는 자는 모루에 대고 두드리는 자를 칭찬하여 ‘그 쇠 참 잘 붙였다’하며 움직이지 못하게 못을 단단히 박은 우상과는 다르다. 손재간 있는 대장장이가 썩지 않는 나무를 구해서 세워 주어야 넘어지지 않는 우상과는 다르다….”(40,15이하).
여기서 열쇠가 되는 것은 ‘야훼의 종’이라는 인물이다.야훼의 종의 노래(42,1-9; 50,4-9; 52,13 – 53,12)에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야훼의 종은 창조물에 봉사에로 불림을 받으며(42,5), 깜빡거리는 심지의 등불을 끄지 않고(42,3), 이스라엘 백성을 조국으로 되돌아오게 하며(49,5), 민족들의 빛이 되며(49,6), 고달픈 자를 격려하고(50,4), 병자들, 상처 받은 자들을 치유하고(53,5),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고(53,10), 사람들을 떳떳하게 살게 한다(53,11). 이러한 봉사를 통해 구원 행위를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 준다.
2.1.3.2 새하늘과 새 땅
56장부터 제 3 이사야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이 제 3 이사야는 제 2 이사야와 달리 창조행위를 하시는 구원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국을 재건하는 기쁨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재건으(58,12)은 새로운 창조 행위로서 만방의 민족들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61,4-5). 이 축복받은 새로운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에게 개방된 순레의 장소가 되고 있다(60,1-22). 하느님이 창조하신 빛은 새로운 성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으며 모든 이들을 위해서다(60,1 이하; 62,1-12).가난한자들,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큰 축제는 강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66,2): 내가 굽어 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창조주는 그의 성전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받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것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어 만든 것이 아니냐?” 어떤 경우에라도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이 성전의 장엄함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다른 언어를 말하는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처럼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66,19). 이 대축제에는 모든 민족들이 참여하며, 창조주 야훼 하느님을 찬미한다(66,20). 더러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제로 뽑히기까지 한다(66,21).
창조하시는 구원자에 대한 고백은 새로운 종말론적 전망을 열어준다. “보라, 나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라…그렇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땅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내 앞에 남아있으리라..”
성서는 단순히 창조가 구원만이 아니라 마침내는 결정적인 완성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2.1.4 세상과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묵상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구약의 신앙은 시원사건을 다루는데서만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현시안에서도 나타난다. 날마다의 체험의 지평안에 자리 잡고 있다.창조에 관한 이론은 날마다의 체험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시편의 싯적 유산을 포함하는 지혜문학안에서도 발견된다.
2.1.4.1. 창조주하느님께 대한 찬미
유대인들의 전례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부분은 찬미를 드리는 부분이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인간의 생동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다. 찬미를 드리는 것과 찬미하지 않는 것은 마치 삶과 죽음으로 비교된다. 시편의 대부분이 이런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살아계신 그분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산자들의 특별한 대화로 보여진다. 이러한 찬가적 응송의 대상은 창조와 이스라엘에 대해 이루신 구원역사 안에서 체험되었고, 또 체험될 야훼 하느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업적들이다.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미래에 투사시키거나 반영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현재와 메시아 대망의 성격을 고려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생활하면서 체험했던 하느님, 또 개별적으로 지금 여기서 체험했던 하느님, 기꺼이 부탁을 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으로 체험했던 하느님의 역사는
이들로 하여금 찬미의 동기가 되게 하였다. 야훼 하느님이 그분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모든 창조물들을 돌보신다는 인식이 모든 사건 이면에서 지탱해 주고 있다.
이미 이사야서에서 보았듯이 창조의 체험은 여기서도 구원과 단단히 결합 되어 있다. 여기서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정당하게 된다. 시편 136편은, 감사의 찬가로서,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태양과 달을 만드신 분이요, 또한 동시에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구해내신 분, 이스라엘을 사막에서 인도해 주시고,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신분이심을 노래하고 있다.그 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도 입을 가진 모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이 고백되고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 하심에 있어서 바빌론 신화에 나오는 마르둑이 바다의 괴물을 물리치며 세상을 창조한 것 처럼 신화적 표현이 적용되기도 한다(시편 74,13-17; 89,10-13). 그러나 비신화화의 경향을 띠고 하느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 하신다는 표현도 나타난다(33,6-12). 우주의 현상들, 천둥 번개들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29). 모든 별들은, 모세의 법처럼 야훼의 법을 따라 운행되며 하느님의 솜씨와 영광을 드러낸다(19,1-9).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 감사노래를 부르고 신자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신다(145,10). 마침내 시편 104은 자연에 대한 기나긴 묵상을 소개한다.
떼이야르 샤르댕의 말처럼 이성적인 관찰은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것을 거부하기는 커녕 하느님을 찬미하게 한다.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일 것이다. 웅장한 경치라든가, 아니면 아주 부드러운 꽃잎 하나를 보고도, 또는 인간사이의 우정, 사랑을 확인할 때, 이런 모든 것이 찬미기도의 동기가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동기에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구약성서의 자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려움이, 고통이 하느님을 찿게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시편이 22편이다. 이 시편은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하는 모든 고통을 헤아리고 있다. 그러나 처음 귀절에선 하느님의 외면, 저버림을 이야기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 창조주를 ’나의 하느님‘이라 부르고 그 하느님께 찬미하도록 한다. 이 시편을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로 복음사가가 전하는데, 이 시편이야말로 인간이 있는 그대로 의 실존속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구약성서의 창조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2.1.4.2 인간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
한편 지혜문학에서도 하느님의 창조, 하느님이 창조주 이심을 고백하는 자료들을 찿아 볼 수있다. 지혜문학이 좁은 의미에서 주로 실존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주적인 차원을 등한시 하고 있지는 않다. 구약성서의 지혜는 일차적으로 인간적 체험을 주시하고 있다.체험적 지혜는 신학적 지혜와 상이하다. 그렇다고 따로 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측면은 양쪽 기둥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적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소급되지 않고서는 어떤 한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 것은 여전히 반성적인 형식에 머물고 있다. 현상들로부터의 거리를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전해주는 가르침을 찿아낼 수 있다. 우리들의 삶과 연결된 문제들에 직면해서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찰의 양식은 일반적으로 각각의 현상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지닌다. 때때로 이러한 대상들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일상적이며, 무의미한 것을 포함하기도 한다.
욥기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헤로움은 각 개인의 생물학적 발전을따라야 하고, 신생아의 발육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상의 생활을 거쳐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국면을 따라 성찰하도록 한다. 그 결론은 인간 본성의 단명성이다(욥 10,10이하). 이런 전망은 체험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결정적인 진리를 추론하기 위해 인간의 이웃에 대한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이해하면서 그 이해 지평을 넓게 한다. 자주 그 실패는 허영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을 보게된다(잠언 16,18; 10-22). 많이 베푸는 사람이 여전히 부유하다는 것을 적지 않게 경험한다(잠언 11,24). 서로 다른 상황을 설정하게 하고 거기서 또 다른 점을 배우도록 일깨우고 있다: “집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다투는 것보다 누룽지를 먹어도 마음 편한 것이 낫다”(잠언 17, 1이하).
인간의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환경, 처지를 분석하면서, 어떻게해서 인간은 혼돈의 전리품이 되고, 또 질서가 그 것을 다스리게 되는지. 또 어떻게 해서 본성은 인간의 위대한 스승이 되는지. 경험하지 않은 자에게 어떻게 조언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는 지혜롭게 되는지 일깨우고 있다. 지혜문학은 자연적인 사건과 인간의 태도 사이의 유비적 관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풍이 비를 몰아 오듯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 얼굴에 분을 일으킨다“(잠언 25,23), ”숯을 만지면 너도 더러워지고, 오만한 자들과 사귀면 너마저 오만해진다“(짐회서 13,1).
자연현상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태도를 동물을 유비적으로 사용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거머리에게는 달라고 보채는 딸이 둘,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 것이 셋,‘족하다’할 줄 모르는 것이 넷이 있으니,곧 지옥과 애기 못 낳는 모태와 물로 채울수 없는 땅과 ‘족하다’할 줄 모르는 불이다”(잠언 30,15). 비록 작은 생물이지만 보다 영리하다는 것을 말하는 지혜의 글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으면서도 더 없이 지례로운 것이 넷 있으니, 곧 힘은 없지만 여름 동안 먹을 것을 장만하는 개미,연약하지만 돌틈에 집을 마련하는 바위 너구리, 임금도 없는데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손에 잡힐 터인데도 대궐을 드나드는 도마뱀이다.”(잠언 30,24-28).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웃음 거리가 된다는 교훈적 지례를 주는 글도 있다. “당당하게 발을 옮기는 것이 셋,늠름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 넷 있으니,곧 아무 것 앞에서도 물럴서지 않는 동물의 왕 사자, 꼬리를 세우고 걷는 수닭,양떼를 거느리고 가는 수염소,군대를 지휘하는 임금이다.바보처럼 우쭐해지거든 입을 손으로 막고 잘 생각하여라”(잠언 30,29-32)
그러나 지례로움은 단지 일상적이고,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실상을 다스리고 있는 놀라운 질서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광대한 우주적 질서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게 한다. 다시말해 하느님을 체험하게 한다.
“푸른하늘은 지극히 높은 곳의 자랑이며,하늘의 아름다움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별들의 광채는 하늘의 아름다움이며,주님의 높은 곳을 찬란하게 비추는 장식이다…지극히 높으신 분의 분부로 눈이 내린고,번갯불이 심판을 알린다. 그분의 명령으로 하늘 문이 열려 부금들이 새즐처럼 난다. 그분의 큰 힘으로 구름이 엉기고,그분의 뜻을 따라 남풍이 불어 온다. 그분의 천둥소리는 땅을 뒤흔들고,그분의 뜻을 따라 북풍이 불고 회오리바람이 인다…의에 말한 것보다 더 큰 놀라운 일들이 많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업적 등에 극소수를 보았을 뿐이다.(집회서 43,1-32)
이처럼 체험의 지혜는 하느님께로의 찬미로 향하면서 하나의 신학적인 지례가 되게 한다. 이것은 우주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체험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혜,생명을 동리켜보게 ㅏ되는 체험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게한다. 특히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혜와 힘의 한계는 창조주 하느님을 향하게 한다.
생활과 세상을 관찰하는 신학은 지혜의 인격화를 보게된다.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야훼의 은총을 받는다”(잠언8,35). 하느님의 지혜는 하나의 인격으로 나타난다. 잠언8,22-25참조.이미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은 일상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차원으로,그리고 점차로 신학적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여기서 생활의 지례를 통하여 이성과 신앙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있다. 이러한 생명의 철학을 세상의 실상에 바탕을 두면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즉 창조주 하느님께 고무하고,창조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