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예수가 창조를 의도하고 있는 방식
공관복음과 요한 복음이 예수께서 친히 발설하신 권위있는 말씀들을 모두 고찰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예수님 말씀의 종합을 시도하면서 인간과 세상과 역사의 창조주에 대해 예수가 지녔던 이미지를 찿아보고자 한다.
마태오 19,4이하: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고 대답하셨다.(병행귀절 마르꼬 10,1이하).
마태오 6,25-34: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루까 12,22-34 병행).
마태오 10,26-31: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마리가 단돈 한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루까 12,2-7).
한걸음 더 나아가, 인자는 세게가 창조되면서부터 함께 마련되어 있는 하느님의 나라(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창조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 하여라)의 완성자, 심판자이시다(마태 25,31-46). 또한 인자는 ”내가 말할 때에는 비유로 말하겠고, 천지창조때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하신 말씀을 이루신 결정적인 종말론적 계시자이시다(마태 13,35).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깥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창조의 주님이시다(마태 5,45). 예수 자신은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사랑하신 분”이시다(요한 17,24).
이와같이 예수의 말씀에서 밑바닥에 깔린 창조에 관한 믿음과 신뢰를 찿아볼 수가 있다. 촛점은 구원이지만 구원신앙은 먼저 창조주께 대한 신앙에서만, 그리고 예수의 종말론은 이러한 구원관을 바탕으로 하여 올바로 전개되어 나갈 수 있다.
3.1.1 긴박한 하느님 나라
예수의 가르침과 설교가 긴박한 세상의 종말이라는 전망의 표징을 띄고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마치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무용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예수에게서 보여지고 있는 종말론이 한편으로 묵시문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광신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그의 생생한 인격적인 면모를 고려해야 한다.예수는 결코 묵시적인 입장에서 단식과 금육등의 엄격한 생활을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미워 하는 사람들이 “먹보, 술보”(마태 11,19)라는 별호를 붙일만큼, 그런 의미에서의 금욕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나자렛 예수는 구약성서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자연성과 육체성에 대해서 여전히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본다. 예수는 자주 시편을 암송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받은 모든 선물을 위해 창조주께 감사하기 위해 시편의 창조주에 대한 찬미가가 무엇보다 합당한 기도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은둔지에서 어떤 묵시적 환시를 본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과 어떤 거리를 전혀 두고 있지 않다. 예수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형제적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서로를 상해거나 업수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하고 있다(마태 5,21-24). 하느님은 이웃을 무시하도록 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때, 특별하게 돌발적으로 그 나라가 돌입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예수를 환영하지 않는 마을에 대해서 제자들이 불의 심판을 내리도록 청했을 때도 예수는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었다.(루까 9,54). 인자는 사람들을 파멸하도록 버려두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자들을 찿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루까 19,10).
예수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비록 가족과의 종속적인 역활을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냉정한 간격의 긴급성을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마르 3,31-36; 6,1-6). 그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다음엔 제자들에게도 그랬지만, 바로 복음에 대한 사랑때문에 가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마르 10,29; 루까 14,25).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창조물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며, 당신 나름대로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창조물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재앙에 관한 말씀과 위로를 주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양극성 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잠시동안 사라져 버릴 하늘과 땅(마르 13,31)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이어서 인간을 시험하기 위한 시련으로서 재난과 역경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다(마르 13,24이하). 여기서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위협적인 심판이라는 소재를 취하고 있다(이사 13,10; 34,4 참조). 동시에 상징적인 묵시적 요소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자의 날”은 바로 최후의 심판의 종말적인 서곡으로서 간주되고 있다. 여기에는 인류의 역사 시초에 있었던 대홍수에 관한 기억이 반영되고 있다(마태 24,37-41). 다른 한편으로 이런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창조”의 시련의 기간으로 나타나고,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이 창조가 모든 시련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창조는 그분의 손을 벗어나 도망칠 수 없으며, 파괴의 세력의 노획물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우주적인 부활의 창조(bara)를 기대하고 있음을 본다(마르 13,24-27). 이러한 부활은 하느님의 생기넘치는 힘으로 새롭게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때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3.1.2 필요한 것을 알고 돌보아 주시는 사려깊은 아버지
“인자의 날”을 기다리는 데 있어서 창조물들에게 기쁨의 동기를 제공하는 여러가지 약속들이 반영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가까우심은 단죄의 판결을 제공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세상의 재판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분은 인견적 본성의 가까우심안에 체험될 수 있는 천상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노아에게 당신이 이루실 어떤 날의 대한 신앙의 약속을 보지(保持)하고 계시는 그분의 다스림에 대한 약속이다: “내가 다시는 전처럼 살아 있는 생명을 저주하거나 쓸어 버리지 않으리라”(창 8,21). 동시에 그분은 더욱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선한 사람이거나 악한 사람이거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사려 깊은 아버지(마르 5,43이하), 또는 동물들까지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마태 6,25-35)이시다. 이런 사랑 깊으신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축복과 권한을 주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머리카락의 수를 헤아려두시고, 참새까지도 당신에 의해 생명이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 깊으신 창조주의 모습은 용서의 차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마르 11,25 이하: 서로 등진 사람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기꺼이 청할 수 있게 된다(마태 7,11: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인간과 자연에 가까우신 하느님은 비유라는 것을 통하여 적절하게 선포될 수 있다. 비유야말로 창조된 모든 것으로부터 이미지와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한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이야기에 창조의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음을 본다. 진주, 누룩, 겨자씨, 그물, 10명의 처녀, 잔치…등등. 이런점에서 예수야말로 종말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정밀한 관찰자였으며,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를 구별할 줄 아는, 시대의 징조를 읽을 줄 아는 분이었다(마태 9.37이하; 마르 4,26 참조). 그가 참으로 애정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은 착한 목자의 이야기(마태 9,35-38)에서 느낄 수 있다. 더우기 예수는 독신자로서 여성들에게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만남을 이끌고 있다. 그분에게서 어떤 냉정함이나 금욕적 고행도 찿아보지 못한다. 더우기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보호하심 아래 형제로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자신의 생을 마감함에 있어서 어떤 광신적인 것도 찿아볼 수가 없다. 또 그렇다고 이 세상을 타락한 채로 버려두고 있지도 않다. 여기서 전형적인 히브리적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예수는 죽음을 찿지도 않았으며, 죽음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죽음에 대해 극도의 번민을 체험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맡겼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생명의 창조주,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의 권능안에 내맡겼다. 그의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의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한계없는 신뢰와 생명에 대한 구약성서적인 사랑에 대한 변론적인 증언이다. 식사는 전통의식을 따라 거행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구원자에 대한 찬미로 짜임새를 이루고 있다(마르 14,22이하; 마태 26,26.) 여기에 속하는 신학은 신명기와 제 3이사야의 신학이다. 이 구약의 신학들은 출애급의 하느님이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는 동시에 세상의 창조주의 하느님의 은총에도 감사드리고 있다. 예수의 특징 역시 이러한 전망을 띠고 있으며 오히려 한걸음 앞서서 새 창조를 향하고 있다. 이별을 기념하는 식사에서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이런 모임을 갖게 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 잘 들어라.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 포도로 빚은 것을 나는 결코 마시지 않겠다”(루까 22,18). 새롭게 구원 안에서의 신앙과 더불어 창조 안에서의 신앙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 마지막에 이루어지고 완성된 확실한 희망하에 구원이 새로운 창조로 나타난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모형이요 전형이다. 이 최후의 만찬은 죽음에 직면해서 어떤 조용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기는 커녕, 확실히 보호해 주실 하느님 아버지 손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는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역시 연약한 BASAR로서의 자신의 몸을 희생으로 봉헌하고 있다는 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까 22,20). 이 최후의 만찬은 이미 예수가 선포하고 그것 때문에 살았던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3.1 예수가 창조를 의도하고 있는 방식
공관복음과 요한 복음이 예수께서 친히 발설하신 권위있는 말씀들을 모두 고찰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예수님 말씀의 종합을 시도하면서 인간과 세상과 역사의 창조주에 대해 예수가 지녔던 이미지를 찿아보고자 한다.
마태오 19,4이하: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고 대답하셨다.(병행귀절 마르꼬 10,1이하).
마태오 6,25-34: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루까 12,22-34 병행).
마태오 10,26-31: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마리가 단돈 한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루까 12,2-7).
한걸음 더 나아가, 인자는 세게가 창조되면서부터 함께 마련되어 있는 하느님의 나라(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창조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 하여라)의 완성자, 심판자이시다(마태 25,31-46). 또한 인자는 ”내가 말할 때에는 비유로 말하겠고, 천지창조때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하신 말씀을 이루신 결정적인 종말론적 계시자이시다(마태 13,35).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깥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창조의 주님이시다(마태 5,45). 예수 자신은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사랑하신 분”이시다(요한 17,24).
이와같이 예수의 말씀에서 밑바닥에 깔린 창조에 관한 믿음과 신뢰를 찿아볼 수가 있다. 촛점은 구원이지만 구원신앙은 먼저 창조주께 대한 신앙에서만, 그리고 예수의 종말론은 이러한 구원관을 바탕으로 하여 올바로 전개되어 나갈 수 있다.
3.1.1 긴박한 하느님 나라
예수의 가르침과 설교가 긴박한 세상의 종말이라는 전망의 표징을 띄고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마치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무용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예수에게서 보여지고 있는 종말론이 한편으로 묵시문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광신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그의 생생한 인격적인 면모를 고려해야 한다.예수는 결코 묵시적인 입장에서 단식과 금육등의 엄격한 생활을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미워 하는 사람들이 “먹보, 술보”(마태 11,19)라는 별호를 붙일만큼, 그런 의미에서의 금욕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나자렛 예수는 구약성서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자연성과 육체성에 대해서 여전히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본다. 예수는 자주 시편을 암송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받은 모든 선물을 위해 창조주께 감사하기 위해 시편의 창조주에 대한 찬미가가 무엇보다 합당한 기도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은둔지에서 어떤 묵시적 환시를 본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과 어떤 거리를 전혀 두고 있지 않다. 예수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형제적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서로를 상해거나 업수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하고 있다(마태 5,21-24). 하느님은 이웃을 무시하도록 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때, 특별하게 돌발적으로 그 나라가 돌입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예수를 환영하지 않는 마을에 대해서 제자들이 불의 심판을 내리도록 청했을 때도 예수는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었다.(루까 9,54). 인자는 사람들을 파멸하도록 버려두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자들을 찿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루까 19,10).
예수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비록 가족과의 종속적인 역활을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냉정한 간격의 긴급성을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마르 3,31-36; 6,1-6). 그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다음엔 제자들에게도 그랬지만, 바로 복음에 대한 사랑때문에 가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마르 10,29; 루까 14,25).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창조물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며, 당신 나름대로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창조물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재앙에 관한 말씀과 위로를 주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양극성 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잠시동안 사라져 버릴 하늘과 땅(마르 13,31)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이어서 인간을 시험하기 위한 시련으로서 재난과 역경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다(마르 13,24이하). 여기서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위협적인 심판이라는 소재를 취하고 있다(이사 13,10; 34,4 참조). 동시에 상징적인 묵시적 요소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자의 날”은 바로 최후의 심판의 종말적인 서곡으로서 간주되고 있다. 여기에는 인류의 역사 시초에 있었던 대홍수에 관한 기억이 반영되고 있다(마태 24,37-41). 다른 한편으로 이런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창조”의 시련의 기간으로 나타나고,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이 창조가 모든 시련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창조는 그분의 손을 벗어나 도망칠 수 없으며, 파괴의 세력의 노획물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우주적인 부활의 창조(bara)를 기대하고 있음을 본다(마르 13,24-27). 이러한 부활은 하느님의 생기넘치는 힘으로 새롭게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때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3.1.2 필요한 것을 알고 돌보아 주시는 사려깊은 아버지
“인자의 날”을 기다리는 데 있어서 창조물들에게 기쁨의 동기를 제공하는 여러가지 약속들이 반영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가까우심은 단죄의 판결을 제공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세상의 재판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분은 인견적 본성의 가까우심안에 체험될 수 있는 천상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노아에게 당신이 이루실 어떤 날의 대한 신앙의 약속을 보지(保持)하고 계시는 그분의 다스림에 대한 약속이다: “내가 다시는 전처럼 살아 있는 생명을 저주하거나 쓸어 버리지 않으리라”(창 8,21). 동시에 그분은 더욱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선한 사람이거나 악한 사람이거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사려 깊은 아버지(마르 5,43이하), 또는 동물들까지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마태 6,25-35)이시다. 이런 사랑 깊으신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축복과 권한을 주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머리카락의 수를 헤아려두시고, 참새까지도 당신에 의해 생명이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 깊으신 창조주의 모습은 용서의 차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마르 11,25 이하: 서로 등진 사람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기꺼이 청할 수 있게 된다(마태 7,11: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인간과 자연에 가까우신 하느님은 비유라는 것을 통하여 적절하게 선포될 수 있다. 비유야말로 창조된 모든 것으로부터 이미지와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한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이야기에 창조의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음을 본다. 진주, 누룩, 겨자씨, 그물, 10명의 처녀, 잔치…등등. 이런점에서 예수야말로 종말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정밀한 관찰자였으며,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를 구별할 줄 아는, 시대의 징조를 읽을 줄 아는 분이었다(마태 9.37이하; 마르 4,26 참조). 그가 참으로 애정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은 착한 목자의 이야기(마태 9,35-38)에서 느낄 수 있다. 더우기 예수는 독신자로서 여성들에게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만남을 이끌고 있다. 그분에게서 어떤 냉정함이나 금욕적 고행도 찿아보지 못한다. 더우기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보호하심 아래 형제로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자신의 생을 마감함에 있어서 어떤 광신적인 것도 찿아볼 수가 없다. 또 그렇다고 이 세상을 타락한 채로 버려두고 있지도 않다. 여기서 전형적인 히브리적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예수는 죽음을 찿지도 않았으며, 죽음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죽음에 대해 극도의 번민을 체험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맡겼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생명의 창조주,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의 권능안에 내맡겼다. 그의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의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한계없는 신뢰와 생명에 대한 구약성서적인 사랑에 대한 변론적인 증언이다. 식사는 전통의식을 따라 거행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구원자에 대한 찬미로 짜임새를 이루고 있다(마르 14,22이하; 마태 26,26.) 여기에 속하는 신학은 신명기와 제 3이사야의 신학이다. 이 구약의 신학들은 출애급의 하느님이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는 동시에 세상의 창조주의 하느님의 은총에도 감사드리고 있다. 예수의 특징 역시 이러한 전망을 띠고 있으며 오히려 한걸음 앞서서 새 창조를 향하고 있다. 이별을 기념하는 식사에서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이런 모임을 갖게 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 잘 들어라.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 포도로 빚은 것을 나는 결코 마시지 않겠다”(루까 22,18). 새롭게 구원 안에서의 신앙과 더불어 창조 안에서의 신앙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 마지막에 이루어지고 완성된 확실한 희망하에 구원이 새로운 창조로 나타난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모형이요 전형이다. 이 최후의 만찬은 죽음에 직면해서 어떤 조용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기는 커녕, 확실히 보호해 주실 하느님 아버지 손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는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역시 연약한 BASAR로서의 자신의 몸을 희생으로 봉헌하고 있다는 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까 22,20). 이 최후의 만찬은 이미 예수가 선포하고 그것 때문에 살았던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