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자)

3.1.3 마지막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
예수가 살았던 그 사회는 거의 분명하게 의논할 여지가 없는 권력있는 자들과 부유한자들의 우위권을 제시해 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은 무가치한 존재요, 고전적인 지도자들의 착취와 놀이의 대상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 이스라엘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적인 ETHOS(관습. 윤리)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선별’이 행해지고 있었다. 생명을 위해 투쟁적인 법조차도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보증이 되어주지 못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예수의 선택은 꼴찌들을 선호하고 있다. 이런 선택은 힘있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행세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보인다. 세상의 흐름은 창조의 신학의 윤곽 안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과 연결되고 있는 어떤 비판적이고 발효적인 기능을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이러한 선택과 더불어 하나의 부패, 새로운 동향을 체험하고 있는 자연 자체는 이제까지 따랐던 법을 넘어서 새로운 징표, 내재적 힘에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메시지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다(루까 4,18). 이 기쁜 소식은 초자연적이며, 그리스도교적 창조이론을 순수한 자연의 철학적 이론과의 구분하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창조의 창조적인 역동성의 효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안에서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수사학적 언어가 아닌 이론의 재해석으로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전적인 결실이 맺어져야 할 것이다. 이 결실에서 다시 고유한 언어가 이끌어져 나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의 산상수훈의 “참된 행복”에서 추구할 수 있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부터 그들에게 약속될 때, 사회적 관계안에 어떤 내재적 상호성을 내다보면서 그들을 위로하려고 한 것을 의도하진 않았다. 예수의 일상생활 자체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 병든이들, 불명예와 격리와 소외를 겪는 이들 가운데 사셨다.바로 이런 사람들 하나 하나를 선호하신 것이다. 예수가 돕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굶주린 배를 채우고, 용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한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는 그들의 가난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하느님 자신 역시 이와 같은 모양으로 자신의 잘못으로든지 또는 어떤 이유로든지 잃어버린 개별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위치에 서 계신다. 사람의 아들은 그들을 찿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다(참조 루까 19,10; 15,1-7). 사람의 아들이 행하는 것은 역시 하느님께서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탕자에게 보여준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한 위치에 있음을 본다(루까 15, 11-32). 이러한 신-인의 용서와 선사의 실행은 이사야 42,1-4에서 나오는 부러진 갈대(마태 12,20)로 비유되는 작은자들을 향햔 창조적 경향이다(마태 18,14). 부러진 갈대로 표현되는 작은자들은 그야말로 불쌍한 사람들, 마태오 25,40에 나타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중의 하나“로 간주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억눌린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은 단순히 개별적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거룩한 안식일의 제도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적 측면과도 관련되고 있다. 예수는 스스로의 모범과 더불어 안식일 법은 이웃들의 선과 안녕을 위해 활용되도록 가르쳤다. 예수는 그런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창조주로부터 축성된 제 7일이 피조물에게 축복된 날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 시켜주고 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중의 하나였던 허리 굽은 여인을 예수는 바로 안식일에 치유하였다(루까 13,10-17).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마르 2,27; 루까 13,10-17; 14,1-6).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연장으로 이해되고 있다. 복음 사가들은 이런 점에서 안식일에 많은 기적으로 병자들을 고친 이야기를 전한다. 때대로 악마추방의 기적도 포함하고 있다(마르 1,23-28.32; 5,1-20; 7,24-30; 9,14-29). 고통받는 인간들, 병으로 신음하는 개별적인 인간들, 장애자들, 육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병들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 그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약속한다. 아니 예수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악의 세력을 추방하면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함을 보여주고 있다(루까 11,20). 바로 살아 있는 생명체, nefesch hajja, 인간존재가 어느 무엇보다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기존제도가 무효화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엉키게 하는 혼돈의 것이 아니라면 모두 새로운 창조의 질서안에서 자리를 잡는다.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모든 제도가 하느님의 나라, 생명의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예수는 자신의 이윤을 위해 권력을 악용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질책하셨다. 예수의 제자들, 교회의 사람들은 그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마르 10,41: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약한 자를 착취하고 악용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여 주려고 기도는 오래하는 이런 사람이야 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마르 12,40).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폭력의 형태도 배제한다. ”이 뱀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나는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매달도 또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며 이 동네 저 동네로 잡으러 다닐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무죄한 아벨의 피로써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된 바라키야의 아들 즈카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흐린 모든 무죄한 피값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마태 23,33-36). ” 만일그가 악한 종이어서 속으로 주인이 더디오려니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한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주인은 그 종을 자르고 위선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보낼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할 것이다“(마태 24,48-51). 하느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창조된 생명의 귀중함을 대변하고 있다. 보잘 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고,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고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의 불 속에 들어 가는 것 보다 낫다고 하신다(마르 9, 42-48). 생명은 생명을 존중한다. 어떤 생명도 그보다 나은 것도, 그 보다 못한 것도 없다. 여기서 예수의 절대적인 계명이 나온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 하느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이런 사랑은 바로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물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데서 비롯된다.
이와같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창조라는 사상이 구체적인 단어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구원 사상속에 깊이 깔려있음을 보았다.

3.2 바오로계 문헌에서의 창조신학
당시 유대교 신학은 민족주의적 특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시온이 종말시기에 세계의 중심이되고, 다른 모든 민족들은 이 시온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모여든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예수의 제자들에게까지도 퍼져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권력을 장악하면 시온이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다가 왔다고 믿고 있었다. 성신강림 직전까지도 제자들의 이러한 믿음이 지속되고 있었다. 예수가 승천할 무렵 제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줄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사도 1,6).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약성서적 표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느님이 곧 세계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세계는 그 분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고 믿고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으로부터 석방되었을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느님이 인간의 모든 역사를 이끌어 나가신다고 고백하였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의 조상이며, 주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빌어 성령의 힘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어찌하여 이방인들이 떠들어 대고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세상의 왕들이 들고 일어나고 군주들이 함께 작당하였다(시편 2,1-2)“(사도 4,24-26).
역사의 주인이시며 세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대한 시사는 이방인들을 향한 전교활동에서 행해진 설교에서도 찿아볼 수 있다.
1차 전도여행, 바울로와 바르나바, 리스트라에서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 것을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 주셨읍니다“(사도 14,17)
2차 전도 여행, 바울로와 실라, , 아테네에서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 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 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읍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찿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4-27).
어떻든 바울로는 그의 서간에서 윤리적 요청의 근거를, 하느님 인식에 관한 신학적 통찰의 근거를 창조신앙으로부터 정립해내고 있다. 예컨데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따질 수 없듯이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께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로마 9,20이하).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셔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읍니다”(로마 1,19).
분명히 창조에 관한 가르침의 일부만이 기술되어 있다. 또 창조 이론이 따로 독립해서 형성되고 있지 않다. 창조 이론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선포, 무엇보다도 그 분의 부활 사건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 사실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그들의 핵심 주제였다.

3.3 고린토 전서.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읍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 갑니다”(8,6).
이러한 진술의 배경은 고린토 교회가 우상앞에 놓았던 제물을 놓고 먹어도 좋은지 여부에 대한 토론입니다. 여기서 다른 종교와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대처해야 하는지를 묻는 의미깊은 물음이 됩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견해는, 우선 우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배라는 그 행위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이와같은 신앙고백은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온 핵심 신앙이다. 이 한분이신 하느님, 곧 아버지와 주님이신 그리스도 두분이 세계를 창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결정적인 물음이 제기되는데, 그 것은 아버지와 주님이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이 분들의 창조행위에의 참여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문제는 바오로가 사용하고 있는 전치사에서 해답을 찿을 수가 있다. 우선 성부에 대해서는 ex ou (그분으로부터) 창조가 이루어지고, eis auton(그분를 향해서) 우리가 존재하게 되는 그분으로 표현되고 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만물이 di auto (그분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고 표현한다.
물론 dia (통해서)라는 표현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독점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11,36에는 만사가 아버지를 “dia”(통해서) 존재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οτι εξ αυτου και δι αυτου εισ αυτον τα παντα )
반대로 eis(향하여)라는 전치사가 반드시 아버지만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골로새서 1,16에는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ex(로부터)라는 전치사는 성부께만 해당되는 고유한 창조적활동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말해서 성부는 만물의 절대적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가 사용하고 있는 dia (통해서)라는 전치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고, 또 예수를 두고 kyrios(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점에서 예수에게도 하느님의 활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중보적 활동성의 의미로 예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다.
전치사의 용법에서 암시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창조성이 모든 부분에서 똑같지는 않지만 역시 하느님의 창조성을 의미한다. 이점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똑같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아울러 두분의 특징이 각각 고유하게 나타난다. 만물은 아버지를 ‘향하여’ 존재하지만, 이 존재는 우리 주님의 중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