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2부-(라)

4.2.2. “나그네살이의 종결”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삶을 “나그네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삶이 ‘도중에 있음’이며 결단의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대한 반대는 도착했음, 결정됨이다. 신학의 전통에서 흔히 사용되는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것을 말하고자 한다: 죽음과 함께 결단의 시간은 중단된다. 죽는 순간에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결단이 내려진다. 죽음은 단지 지금의 삶을 끝맺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을 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인간의 실존의 무게가 온전히 드러난다: 나의 삶은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다. 기회는 임의대로 자주 반복되지 않는다. 내 결정은 잠정적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진술의 성서적 근거로서 신약성서에 나타난 깨어있으라는 촉구와 시간을 잘 사용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라는 경고를 제시한다(마태 13,33-37; 마태 25,13; 요한 9,4; 에페 5,16; 골로 4,5). 물론 이 말씀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서 한계 지워진 일반적 상황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 특별한 구원의 상황을 대상으로 발설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이 이 세상 삶의 유일회성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결단이 지니는 영원한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런 표현은 내용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성서적 진술과 다소간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4.2.3. 부설: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죽음에서 삶에로의 귀환은 있을 수가 업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의학적으로 죽음이 확인된 사람이 다시 소생한 것에 대한 보고서가 널리 전파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의학으로부터 예상하지 않았던 지원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살아있다는 표지(맥박, 심전도)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가 의학적 소생 조처를 통해서 “다시 살아난” 환자들과 그들이 “죽음”과 “다시 얻는 삶” 사이의 시간에 겪었던 체험에 관한 몇몇 의사들의 기록은 많은 관심을 이끌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환자들은 의사가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그들의 몸밖에 나와 있는 것을 체험하고, 이와 동시에 수술대 위에 남겨진 자신의 육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친척, 친구들이 자신에게 다가 와서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다. 그들에게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빛나는 존재”, “사랑과 온기를 발산하는 존재”가 나타난다. R.A.Moody, Leben nach dem Tod, Reinbek, 1977, 28.
그들은 이 존재로부터 말이 필요 없는 어떤 질문이 나오는 것을 느끼는데, 이 질문은 그들 삶의 전체를 개관(槪觀)하고 평가하도록 한다. 그들은 섬광과 같는 짧은 순간에 그들 삶의 중요한 단계들을 다시 한 번 되돌이켜 본다. 그런 과정에서 “기쁨, 사랑, 평화의 감정이 압도적으로” Ibid.,
채워지고, 그래서 그들중 대부분은 내적인 저항이나 슬픔과 실망 속에서 삶에로 귀환하여 그들의 원래 육신과의 재결합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모두가 이런 체험들을 다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부 사항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보도를 종합하면,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본적 틀을 알아낼 수 있다.
신학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보고서에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죽음, 육신과 영혼의 분리, 변용(變容)된 육신, 죽은 이들과의 재회, 심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새로운 삶 안에서 누리는 행복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내세에 대한 목격 증인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하느님, 초월, 죽음 이후의 삶이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인가?
결정적인 질문은 무엇을 “죽음”이라고 보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 내용상 아주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학의 발전이 스스로 죽음에 대해서 구분을 하기 때문이다. 즉 심장의 정지에 의한 죽음, 뇌사, 세포사 등이다. 신학이 “죽음”(그리고 “죽음 다음의 삶”)을 말할 때 그것은 삶의 결정적인 종점, 이승의 삶으로의 회귀가 더 이상 불가능한 “지점(地點)”을 의미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면 소위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보고서는 근본적으로 “죽은 후의 삶”의 체험이 아니라, 죽음에 근접한 체험, 삶의 가장 끝자리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저승에서의 귀환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 상황에서의 귀환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관심을 갖고 이런 보고서를 대한다. 인간이 극단의 상황에서 체험한 것, 아마도 모든 의지적-이성적 조정이 멈춘 상태에서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른 것, 그것은 아마도 인간 안에 초월에로 향하는 “안테나”가 있다는 간접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여기서 초월이란 인간 안에 깊숙히 자리한 희망,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전하는 희망의 내용에 상응하는 그런 희망에로 향하는 “안테나”를 뜻한다. 이런 한에서 소생에 대한 보고서(그것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간주되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린 시절에 종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환자들까지 포함하는 경우라면)는 초월에 대한 증명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인간의 초월에로의 경향성에 대한 참조가 될 수 있겠다.
개신교 신학자 요한 크리스토프 함페(Johann Christoph Hampe) 참조: J.Ch.Hampe, Sterben ist doch ganz anders, Stuttgart, 1975.
는 이 보고서가 실천 신학적 측면에서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고서는 대체적으로 죽는 것(여기서는 죽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다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이 어둠, 비좁음, 차거움, 외로운, 두려움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따뜻함, 빛, 사랑, 기쁨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도록 한다.

4.2.4.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로 파악한다.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서 때때로 인용되는 창세 2,16-17과 3,19는 사실상 명확한 성서적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창세 2,17에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창세 3장에서 아담의 범죄 이후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에게서는 죄와 죽음의 관련이 명백해진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뚫고 들어왔습니다”(로마 5,12). 그래서 교회 전통은 죄와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통상적으로 로마서를 인용한다(DS 372; 1512 참조).
그러나 죄와 죽음과의 관련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다. 이렇게 해석이 다양한 데에는 “죄에 대한 벌”이란 개념 이해의 차이가 한 몫을 한다(4.5.1. 참조).
전통적인 해석은 낙원에서의 인간은 범죄 이전에는 죽지 않는 “과성(過性) 은혜”를 간직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비로소 죄를 지음으로써 이 은혜를 상실하고 죽게 되었고, 낙원의 원조와 함께 전 인류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해석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 외의 자연 사이의 생물학적, 발생적 관련을 인식하고서도 원래는 인간이 모든 생물에게 해당하는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환경학적, 사회학적으로 볼 때 첫 인간과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았다면 늦게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갈 기회는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심리학적으로 끝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과연 바랄만한 것일까? 바로 인생의 유한성 때문에 삶의 매 순간이 가치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말로 한다면,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닐까,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특별히 성서에 근거를 두고 물어야 할 것이다: 믿는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데도 어떻게 바오로는 죽음이 힘을 잃었다고 찬양할 수 있었을까?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는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는냐?”(1고린 15,55).
여기서 죽음에 대한 승리는 죽음의 제거가 아닌 그 변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죄로 인해서 죽음 그 자체가 왔다고 하기 보다는 죽음을 달리 체험하게 되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근래의 신학은 바로 이런 해석의 방향으로 나간다: 현세의 삶이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가 어느날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죽음을 적대적으로 체험하는 것, 즉 삶의 단절, 삶의 역동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래서 삶 전체의 의미를 의문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체험하는 사실이 죄의 결과이다. “낙원”의 인간은 죽음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사랑의 헌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행복한 탄생으로서 평화롭게 맞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죄는 신뢰와 사랑의 부족이다. 죄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가 와서 내면으로부터 오염시켰다는 것(로마 5,12 참조)이 옳다면, 죄와 죽음의 체험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완성으로 맞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죽음,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 죽음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죄의 결과다. 죽음에 대한 이런 체험은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벌하신 때문이라기 보다는 상황 자체에서 기인한다. 이 “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죄에서 흘러나오는 이기주의적인 자기폐쇄라고 하겠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죄는 “죽음의 독침”(1고린 15,56)인 것이다.

4.2.5. 헌신으로서의 죽음
신학적 전통은 대부분 죽음의 한 면만을 얘기한다. 즉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운명적 불행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이런 부정적 특성은 종말론에서 죄의 극복을 통한 죽음의 무력화보다는 죽음과 죄의 관계를 더 분명한 주제로 삼음로써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신학적 전통은 성서적 진술을 온전히 반영하기 못한채 머무른다고 하겠다.
성서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죽음에 대한 승리(2.8. 참조)와 이미 세상에서 가능하게 된 “죽음에서 삶에로의 전이(轉移)”(요한 5,24; 1요한 3,14)만을 언급하지 않고, 믿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죽음은 적극적 행동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수난”으로, 예수가 찾거나 원하지 않고 참아 받은 것으로서 표현되는데, 예수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지녔고(마태 14,32-41) 이 죽음은 예수를 극도로 버림받은 상태로 내몰았다(마르 15,34). 그러나 다른 한편 특별히 루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이 죽음을 그의 적극적 행동으로서, 아버지의 손에 내맡기는 것(루가 23,46), “아버지께로 가는 것”(요한 14,2.12.28;16,7), “헌신”과 마지막 “실현”(요한 19,30)로 해석한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를 추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로마 6,1-11)으로, 생명을 바치는 것(요한 15,13), 자신을 버리는 것(마르 8,35; 마태 10,39; 16,25; 루가 9,24; 17,33; 요한 12,25),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단순히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늘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2고린 4,10-11)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인생의 종점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상대화시키는데, 그래서 바오로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삶의 능동적 실현이고 “마지막” 죽음, 즉 생을 종결하는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닥쳐와서 인간이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죽음은 능동적 행동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 실존의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특별히 칼 라너에 의해 근래의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는 죽음의 “실제-존재론적 변증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죽음은 “외부의 개입에 의한 단절, 파멸,… 갑작스런 사건,…인간을 극도로 무력화시키는 사건”으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활동적인 완성, 능동적으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 삶의 성과의 참됨을 끝까지 증거하는 것, 자신을 전적으로 소유하는 행동” K.Rahner, Theologie des Todes, Freiburg, 1957, 30.
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라너의 추상적인듯한 명제는 그의 제자 라디슬라우스 보로슈(Ladislaus Boros, +1981)가 “최후결단(Endentscheidung)”이라는 이론을 내세움으로써 구체화된다. 보로슈에 의하면 마지막에,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최초로 모든 것을 결단하는 온전한 인격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안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 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인 행동을 방해하는 육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므로 바로 이 순간에, 아니 비로소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결단과 무조건적인 신앙적 결단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신학에서는 최후결단의 이론에 점점 더 많은 비판이 가해 진다: 죽음 안에서 특별한 결단의 상황을 맞게 된다는 가정은 성서에서는 물론 체험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이론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에 신학에서 의문에 처하게 된 인간학적 모델(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은 실존적-윤리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죽음 이전의 모든 결단은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최후의 결단”을 위해 평가 절하되고 이와 함께 현재 삶에서 진지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죽음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죽는 순간에 아마도 아주 특별한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 보다는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강도(强度)있는 삶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을 선사하며, 신뢰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전체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실존, 이와 함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용상으로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헌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맞는 죽음은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살면서 실현한 사랑의 마지막 완성의 가능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아오는 중에 이미 자신을 하나 하나 하느님께 넘겨 드렸는데, 죽음 안에서 하느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넘겨 드린다.
그러나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무조건 다 실제로 상대방을 위하는 죽음은 아니다. 또한 모든 죽음이 헌신의 죽음은 아니다: 죽음이 단지 패배, 의미없는 단절, 손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생명을 그냥 던져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대로― 투신의 결과, 아끼는 사람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것, 그가 실천해온 헌신적인 삶의 최종적 단계가 될 수 있다. 헌신으로서의 죽음, 이것이야말로 의미 가득하고, 원래 목표로 하는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굶주림, 전쟁, 부주의로 인한 교통 사고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데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주 폭력이나 때 이른 죽음은 자신의 인간에게 사랑의 투신과 자유로운 헌신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명을 보호하고 족진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게 된다.
헌신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에 대한 논리적 전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신앙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항상 부활 사상에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주제로 넘어간다.

4.3. 부활
4.3.1. 성서적 희망의 역사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오랜 동안 개인의 부활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덜 발전된 신앙 역사에 따르는 결핍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후대의 계시 역사는 그 이전의 계시 역사를 폐지하지 않고 계속 이끌어 나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구약성서적 희망이 지닌 세계성과 현세성을 대신하지 않고 포함하며 확대한다. 예수의 설교의 중심에도 죽은 이들의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 세상에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이 자리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가까이 오심으로 가능하게 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킨다: 이 삶의 방식은 이미 지금 현재의 삶에서 실현되고 체험될 수 있으며, 물론 현재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2.7.3. 참조).
이 새로운 삶의 힘을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체험하였다. 동시에 이 체험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부활 이해는 내용적으로 더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부활은 이 세상과 그안의 인간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도있게 관련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부활 사화는 바로 이것을 증언한다: 여러 장소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생동적인 가까움을 체험한다. 부활은 기존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살아온 삶을 유효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의 육신에서 그분 삶의 역사의 흔적이 계속 남아있는 것(요한 20,20 참조)을 “본다”. 부활은 세상을 포함하며, 삶아가면서 맺은 관계를 심하시키고 역사를 완성하는 “육신적” 부활이다.
4.3.2.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교의 전승 역사 안에는 비록 다른 강조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부활의 육신성에 대한 신앙을 증언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육신”과 “육신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이미 바오로 사도를 숙고하도록 이끌었던 질문(1고린 15,33)으로서 신학의 역사에서 항상 새로운 착안점을 불러일으켰는데,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로 대답된다.
자주 사람들은 “육신”(Leib)과 물질적인 “육체”(Körper)을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육신의 부활이란 죽음과 함께 궤멸하기 시작하는 물질적인 육체의 재건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신스콜라 신학은 다소간 이런 상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의 대다수는 인격적인 육신의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세상 안에 있음(In-der-Welt-Sein), 다른 사람과의 통교 그리고 역사 안에 연루되어 있음이 속한다. 이런 세 가지 서로 관련되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들이 인간의 육신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이란, 온전한 인간이 자신 삶의 역사 전체와 함께, 다른 사람과 맺었던 모든 관계와 함께 미래를 갖는다는 것과 그리고 인간의 완성 안에서 세상의 일부도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 조직신학자 빌헬름 브로이닝(Wilhelm Breuning) 이렇게 이해한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은 죽음의 순간에 육체 안에서 발견되는 분자(分子) 그 이상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온갖 수고의 낙인과 또한 나그네살이에서 겪는 끊임 없는 갈망의 낙인이 찍힌 육신을 사랑하신다. 이 육체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 세상에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고, 세상은 이런 흔적으로 인해서 더욱 인간적으로 되었다… 육신의 부활이란 이러한 모든 것 중에서 어느 하나도 하느님에게는 사라져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눈물을 모으시고, 그분에게는 미소 하나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는다. 육신의 부활이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 전체를 다시 찾는 것을 의미한다”. W.Breuning, “Gericht und Auferweckung von den Toten als Kennzeichen des Vollendungshandelns Gottes durch Jesus Christus”, in: J.Feiner/M.Löhrer(Hrsg.), Mysterium Salutis, Bd. V, Zürich, 1976, 882.

이렇게 이해된 육신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영지주의적-유심론적-개인주의적인 구원이해와 대치시켜 놓을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구원된다; 인간은 역사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과 맺은 모든 관계를 뒤로 할 필요가 없다. 삶의 역사와 그 안에서 형성된 관계들이 함께 인간의 완성 안에로 들어간다. 현재의 (세상과 연계된) 삶이 미래의 (순전한 정신적) 삶으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 변화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근대의 종교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부활신앙은 현재와 지금의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모든 행동과 모든 인격적 관계, 지상의 삶 전체와 인간이 형성한 역사가 영원한 미래를 갖는다고 하면,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다.
인격적인 육신 이해에서 물질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분자의 미래 대신에 인간 관계의 미래를 말한다면 물질은 그 의미가 없어지는가? 비록 “육신성”이라는 말을 간직한다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다시금 새로운 유심론이 주장되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와 그 궁극적 완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만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1) 정신만이 완성되고 물질은 소멸되거나 혹은 별 의미 없이 뒤에 남는다. 이것은 유심론적 입장이라고 하겠다. 가톨릭 신학자 누구도 이런 입장을 따르지 않는다.
(2) 정신과 물질 둘은 서로 연관된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르게 완성된다. 이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의 배경을 이룬다. 즉 마지막 날에 죽은 이들의 육신이 재건되어서 그에 속한 영혼과 합치된다는 것이다.
(3) 물질은 “내면화(verinnerlicht)”, 정신화되고, 정신에로의 초월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런 해석의 배경에는 진화적 세계상이 자리한다. 그레사케는 칼 라너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 안에서의 인간의 완성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 육신성과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주체가 세상과 육신성 안에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서 물질은 내면화되어 정신의 완성에 지속적인 요인이 된다”. G,Greshake, “Leib-Seele-Problematik und die Vollendung der Welt”, in: ders.,/G.Lohfink, Naherwartung-Auferstehung-Unsterblichkeit, Freiburg, 41982, 172.
다른 말로 하면: 물질은 완성되지만, “그 자체 안에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 안에”, 즉 정신 안에서 완성된다. Ibid., 162f.


4.4.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 영혼의 불멸?
죽음과 부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오늘날의 신학에서 이 질문은 영혼의 불명에 대한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토론은 지난 수십년 간 종말론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3.2.9. 참조).
4.4.1. 전통적 견해
신학의 전통에서 고전적으로 된 견해에 따르면 죽는 순간에 불멸의 영혼은 사멸할 육신에서 분리된다. 영혼은 죽은 후 즉시 그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심판(사심판)을 대하는데, 죄로 말미암은 벌에 대해 보속을 해야한다면 일정 기간의 정화를 거친 다음에 영원한 행복에 당도하게 된다. 혹은 즉은 후 즉시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세상 역사의 마지막 날에 육신은 부활하여 영혼과 합치될 것이다. 그 다음에 모든 인간이 영혼과 육신을 함께 한 채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벌에 이르는 공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견해에 특징적인 점들은, (1) 죽음을 육신과 영혼의 분리로 이해, (2) 철학적으로 근거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확신, (3) (개개인의 삶의 역사에 마지막에 오는) 죽음과 (세상 역사의 종말에 있을) 부활 사이의 중간 시기의 인정, (4) 이 중간 상태에 존재하는 육신이 없는 영혼(“anima separata”)에 대한 생각 등이다.
4.4.2. 근래의 토론
이런 견해가 형성된 길고 복잡한 전개 과정은 교의사에서 다루었다(3.2 참조). 근래에 가톨릭 신학에서는 이에 대한 토론이 두 가지 입장으로 집약된다. 기베르트 그레사케와 게하르트 로핑크가 전개한 모델인 “죽음 안에서의 부활”과 이와 대립해서 요셉 랕찡어가 내세우는 영혼 개념의 복권(復權)과 변형이 그것이다.
4.4.2.1. “죽음 안에서의 부활”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 내용으로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한 부분인 “육신”만이 아니라 전체 인간이 죽고, 죽는 순간에 전체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서 부활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간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전통적 신학이 주장하는 육신 없는 영혼(anima separata)이 존재하는 시간, 근래의 개신교 신학의 “총체적 죽음”(Ganztod) 이론에서처럼(3.2.9. 참조) 종말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실 때까지 인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로핑크는 이런 생각을 계속 전개하여서 극단적으로 변형시켰다. 현재와 마지막 날의 인류 역사의 완성과의 시간적 간격은 죽은 다음에는 더 이상 고려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어서 시간을 등지게 되면, 그는 나머지 전체 역사가, 설사 그 나머지 역사가 현세적 시간의 차원에서는 무한히 많이 거리를 아직 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그와 함께 ‘동시에’ 종말에 이르는 ‘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직선상의 시간에 세상의 종말이 있느냐는 물음은 참된 신학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G.Lohfink, “Zur Möglichkeit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in: G.Greshake/ders., Op.cit. 72.
헤르베르트 포그리물러(Herbert Vorgimler)는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아직 남아 있는 역사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한 미래의 결정들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또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모든 곤경이 개인의 죽음에서 이미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H.Vorgrimler, Der Tod im Denken und Leben des Christen, Düsseldorf, 21982, 125f.

이와는 달리 그레사케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을 과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안에서의 부활과 마지막 날의 부활은 시간적으로 앞서고 뒤따른 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전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부되어 있다: 개개인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이가 완성될 때에야 비로소 충만에 이르는 ‘육신’의 한 지체가 늘 완성되는 것이다”. G.Greshake, “‘Seele’ in de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Ein Durchblick”, in: W.Breuning(Hrsg.), Seele. Problembegriff christlicher Eschatologie, Freiburg, 1986, 152.

4.4.2.2. “대화적 불멸성 (Dialogische Unsterblichkeit)”
요셉 랕찡어도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의 부활희망과 그리스적 영혼불멸성의 사상을 내용적으로 서로 반대된다는 데에서 출발해서 그리스적 사고를 수용하는 신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그리스적 육신-영혼 이원론을 성서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대(相對)관계로 대치하였다. 즉 인간은 그 자체로서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대화 상대로서 불멸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한다”. J.Ratzinger, Die sakramentale Begründung christlicher Existenz, Freising, 1966, 16.
랕찡어에게 하느님과의 이런 관계가 인간의 정의에 속한다. “인간에게서 이 관계를 삭제하면 인간 대신에 단지 고등 동물만 남게 된다”. Ibid.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따른 ‘영혼’ 개념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다분히 실체론(實體論)적 언어로 ‘영혼을 갖는다’라고 부르던 것을 좀더 역사적이고 현실적으로 ‘하느님과의 대화상대가 된다’라고 표현하려는 것이다”. J.Ratzinger, Einfuhrung in das Christentum. Munchen, 1968, 296.
이렇게 해서 랕씽어는 마침내 “금기로 여겨진 ‘불멸성’과 ‘영혼’ 개념의 복권” J.Ratzinger, “Jenseits des Todes”, in: IKaZ(1972), 241f.
을 위해 노력하는데, 물론 이 개념들은 대화적-관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랕찡어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라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이 견해는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과는 달리 다시금 영혼에 비해서 육신을 업신여기는 이원론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물질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내면화되어서 정신 안에서 완성에 이르른다는 주장은 “창조물을 갈라 놓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물질계 전체를 창조의 목표에서 제외시켜서 이차적 단계의 실재로 만드는 이원론을 뜻한다”. J.Ratzinger, Eschatologie ― Tod und ewiges Leben, Regensburg, 61990, 159.

이런 맥락에서 랕찡어는 사람이 죽음 안에서 자신의 역사와 함께 하느님께 나가더라도 아직 완전한 부활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다른 근거로써 인간이 역사 속에 남긴 죄의 자취를 내세운다. “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당하는 이가 있고, 그가 지은 죄가 아직 세상에 계속 남아서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이 다 완성되어 목표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까? […] 계속 남아 있는 죄는 내 자신의 일부이며, 내 자신 안에까지 미치고 그래서 내버려진 내 자신의 한 부분으로서 시간 속에 계속 남아 있다. 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실제로 계속 고통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그 시간을 나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Ibid., 155.

마침내 이에 관한 토론은 그레사케와 로핑크가 종말에 관한 “다양한 모델의 병립” G.Lohfink, “Zeitproblem und die Vollendung der Welt”, in: G.Greshake/ders., op.cit., 152.
혹은 “상호보완적 모델들” G.Greshake, “‘Seele’ in de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158.
안에서 생각할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가라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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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말 론 2부-(라)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4.2.2. “나그네살이의 종결”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삶을 “나그네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삶이 ‘도중에 있음’이며 결단의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대한 반대는 도착했음, 결정됨이다. 신학의 전통에서 흔히 사용되는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것을 말하고자 한다: 죽음과 함께 결단의 시간은 중단된다. 죽는 순간에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결단이 내려진다. 죽음은 단지 지금의 삶을 끝맺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을 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인간의 실존의 무게가 온전히 드러난다: 나의 삶은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다. 기회는 임의대로 자주 반복되지 않는다. 내 결정은 잠정적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진술의 성서적 근거로서 신약성서에 나타난 깨어있으라는 촉구와 시간을 잘 사용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라는 경고를 제시한다(마태 13,33-37; 마태 25,13; 요한 9,4; 에페 5,16; 골로 4,5). 물론 이 말씀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서 한계 지워진 일반적 상황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일회적인 의미를 지닌 특별한 구원의 상황을 대상으로 발설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그네살이의 종결”이라는 문장이 이 세상 삶의 유일회성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결단이 지니는 영원한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런 표현은 내용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성서적 진술과 다소간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4.2.3. 부설: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죽음에서 삶에로의 귀환은 있을 수가 업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의학적으로 죽음이 확인된 사람이 다시 소생한 것에 대한 보고서가 널리 전파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의학으로부터 예상하지 않았던 지원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살아있다는 표지(맥박, 심전도)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가 의학적 소생 조처를 통해서 “다시 살아난” 환자들과 그들이 “죽음”과 “다시 얻는 삶” 사이의 시간에 겪었던 체험에 관한 몇몇 의사들의 기록은 많은 관심을 이끌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환자들은 의사가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그들의 몸밖에 나와 있는 것을 체험하고, 이와 동시에 수술대 위에 남겨진 자신의 육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친척, 친구들이 자신에게 다가 와서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다. 그들에게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빛나는 존재”, “사랑과 온기를 발산하는 존재”가 나타난다. R.A.Moody, Leben nach dem Tod, Reinbek, 1977, 28.
    그들은 이 존재로부터 말이 필요 없는 어떤 질문이 나오는 것을 느끼는데, 이 질문은 그들 삶의 전체를 개관(槪觀)하고 평가하도록 한다. 그들은 섬광과 같는 짧은 순간에 그들 삶의 중요한 단계들을 다시 한 번 되돌이켜 본다. 그런 과정에서 “기쁨, 사랑, 평화의 감정이 압도적으로” Ibid.,
    채워지고, 그래서 그들중 대부분은 내적인 저항이나 슬픔과 실망 속에서 삶에로 귀환하여 그들의 원래 육신과의 재결합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모두가 이런 체험들을 다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부 사항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보도를 종합하면,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본적 틀을 알아낼 수 있다.
    신학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보고서에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죽음, 육신과 영혼의 분리, 변용(變容)된 육신, 죽은 이들과의 재회, 심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새로운 삶 안에서 누리는 행복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내세에 대한 목격 증인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하느님, 초월, 죽음 이후의 삶이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인가?
    결정적인 질문은 무엇을 “죽음”이라고 보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 내용상 아주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학의 발전이 스스로 죽음에 대해서 구분을 하기 때문이다. 즉 심장의 정지에 의한 죽음, 뇌사, 세포사 등이다. 신학이 “죽음”(그리고 “죽음 다음의 삶”)을 말할 때 그것은 삶의 결정적인 종점, 이승의 삶으로의 회귀가 더 이상 불가능한 “지점(地點)”을 의미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면 소위 죽음에서 소생한 사람들에 관한 보고서는 근본적으로 “죽은 후의 삶”의 체험이 아니라, 죽음에 근접한 체험, 삶의 가장 끝자리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저승에서의 귀환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 상황에서의 귀환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관심을 갖고 이런 보고서를 대한다. 인간이 극단의 상황에서 체험한 것, 아마도 모든 의지적-이성적 조정이 멈춘 상태에서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른 것, 그것은 아마도 인간 안에 초월에로 향하는 “안테나”가 있다는 간접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여기서 초월이란 인간 안에 깊숙히 자리한 희망,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전하는 희망의 내용에 상응하는 그런 희망에로 향하는 “안테나”를 뜻한다. 이런 한에서 소생에 대한 보고서(그것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간주되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린 시절에 종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환자들까지 포함하는 경우라면)는 초월에 대한 증명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인간의 초월에로의 경향성에 대한 참조가 될 수 있겠다.
    개신교 신학자 요한 크리스토프 함페(Johann Christoph Hampe) 참조: J.Ch.Hampe, Sterben ist doch ganz anders, Stuttgart, 1975.
    는 이 보고서가 실천 신학적 측면에서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고서는 대체적으로 죽는 것(여기서는 죽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다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이 어둠, 비좁음, 차거움, 외로운, 두려움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따뜻함, 빛, 사랑, 기쁨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도록 한다.

    4.2.4.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로 파악한다.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서 때때로 인용되는 창세 2,16-17과 3,19는 사실상 명확한 성서적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창세 2,17에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창세 3장에서 아담의 범죄 이후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에게서는 죄와 죽음의 관련이 명백해진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뚫고 들어왔습니다”(로마 5,12). 그래서 교회 전통은 죄와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통상적으로 로마서를 인용한다(DS 372; 1512 참조).
    그러나 죄와 죽음과의 관련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다. 이렇게 해석이 다양한 데에는 “죄에 대한 벌”이란 개념 이해의 차이가 한 몫을 한다(4.5.1. 참조).
    전통적인 해석은 낙원에서의 인간은 범죄 이전에는 죽지 않는 “과성(過性) 은혜”를 간직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비로소 죄를 지음으로써 이 은혜를 상실하고 죽게 되었고, 낙원의 원조와 함께 전 인류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해석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 외의 자연 사이의 생물학적, 발생적 관련을 인식하고서도 원래는 인간이 모든 생물에게 해당하는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환경학적, 사회학적으로 볼 때 첫 인간과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았다면 늦게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갈 기회는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심리학적으로 끝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과연 바랄만한 것일까? 바로 인생의 유한성 때문에 삶의 매 순간이 가치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말로 한다면,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닐까,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특별히 성서에 근거를 두고 물어야 할 것이다: 믿는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데도 어떻게 바오로는 죽음이 힘을 잃었다고 찬양할 수 있었을까?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는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는냐?”(1고린 15,55).
    여기서 죽음에 대한 승리는 죽음의 제거가 아닌 그 변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죄로 인해서 죽음 그 자체가 왔다고 하기 보다는 죽음을 달리 체험하게 되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근래의 신학은 바로 이런 해석의 방향으로 나간다: 현세의 삶이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가 어느날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죽음을 적대적으로 체험하는 것, 즉 삶의 단절, 삶의 역동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래서 삶 전체의 의미를 의문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체험하는 사실이 죄의 결과이다. “낙원”의 인간은 죽음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사랑의 헌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행복한 탄생으로서 평화롭게 맞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죄는 신뢰와 사랑의 부족이다. 죄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가 와서 내면으로부터 오염시켰다는 것(로마 5,12 참조)이 옳다면, 죄와 죽음의 체험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완성으로 맞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죽음,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 죽음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죄의 결과다. 죽음에 대한 이런 체험은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벌하신 때문이라기 보다는 상황 자체에서 기인한다. 이 “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죄에서 흘러나오는 이기주의적인 자기폐쇄라고 하겠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죄는 “죽음의 독침”(1고린 15,56)인 것이다.

    4.2.5. 헌신으로서의 죽음
    신학적 전통은 대부분 죽음의 한 면만을 얘기한다. 즉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운명적 불행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이런 부정적 특성은 종말론에서 죄의 극복을 통한 죽음의 무력화보다는 죽음과 죄의 관계를 더 분명한 주제로 삼음로써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신학적 전통은 성서적 진술을 온전히 반영하기 못한채 머무른다고 하겠다.
    성서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죽음에 대한 승리(2.8. 참조)와 이미 세상에서 가능하게 된 “죽음에서 삶에로의 전이(轉移)”(요한 5,24; 1요한 3,14)만을 언급하지 않고, 믿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죽음은 적극적 행동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수난”으로, 예수가 찾거나 원하지 않고 참아 받은 것으로서 표현되는데, 예수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지녔고(마태 14,32-41) 이 죽음은 예수를 극도로 버림받은 상태로 내몰았다(마르 15,34). 그러나 다른 한편 특별히 루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이 죽음을 그의 적극적 행동으로서, 아버지의 손에 내맡기는 것(루가 23,46), “아버지께로 가는 것”(요한 14,2.12.28;16,7), “헌신”과 마지막 “실현”(요한 19,30)로 해석한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를 추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로마 6,1-11)으로, 생명을 바치는 것(요한 15,13), 자신을 버리는 것(마르 8,35; 마태 10,39; 16,25; 루가 9,24; 17,33; 요한 12,25),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단순히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늘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2고린 4,10-11)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인생의 종점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상대화시키는데, 그래서 바오로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삶의 능동적 실현이고 “마지막” 죽음, 즉 생을 종결하는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닥쳐와서 인간이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죽음은 능동적 행동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 실존의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특별히 칼 라너에 의해 근래의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는 죽음의 “실제-존재론적 변증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죽음은 “외부의 개입에 의한 단절, 파멸,… 갑작스런 사건,…인간을 극도로 무력화시키는 사건”으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활동적인 완성, 능동적으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 삶의 성과의 참됨을 끝까지 증거하는 것, 자신을 전적으로 소유하는 행동” K.Rahner, Theologie des Todes, Freiburg, 1957, 30.
    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라너의 추상적인듯한 명제는 그의 제자 라디슬라우스 보로슈(Ladislaus Boros, +1981)가 “최후결단(Endentscheidung)”이라는 이론을 내세움으로써 구체화된다. 보로슈에 의하면 마지막에,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최초로 모든 것을 결단하는 온전한 인격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안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 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인 행동을 방해하는 육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므로 바로 이 순간에, 아니 비로소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결단과 무조건적인 신앙적 결단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신학에서는 최후결단의 이론에 점점 더 많은 비판이 가해 진다: 죽음 안에서 특별한 결단의 상황을 맞게 된다는 가정은 성서에서는 물론 체험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이론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에 신학에서 의문에 처하게 된 인간학적 모델(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은 실존적-윤리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죽음 이전의 모든 결단은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최후의 결단”을 위해 평가 절하되고 이와 함께 현재 삶에서 진지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죽음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죽는 순간에 아마도 아주 특별한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 보다는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강도(强度)있는 삶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을 선사하며, 신뢰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전체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실존, 이와 함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용상으로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헌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맞는 죽음은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살면서 실현한 사랑의 마지막 완성의 가능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아오는 중에 이미 자신을 하나 하나 하느님께 넘겨 드렸는데, 죽음 안에서 하느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넘겨 드린다.
    그러나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무조건 다 실제로 상대방을 위하는 죽음은 아니다. 또한 모든 죽음이 헌신의 죽음은 아니다: 죽음이 단지 패배, 의미없는 단절, 손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생명을 그냥 던져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대로― 투신의 결과, 아끼는 사람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것, 그가 실천해온 헌신적인 삶의 최종적 단계가 될 수 있다. 헌신으로서의 죽음, 이것이야말로 의미 가득하고, 원래 목표로 하는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굶주림, 전쟁, 부주의로 인한 교통 사고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데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주 폭력이나 때 이른 죽음은 자신의 인간에게 사랑의 투신과 자유로운 헌신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명을 보호하고 족진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게 된다.
    헌신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에 대한 논리적 전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신앙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항상 부활 사상에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주제로 넘어간다.

    4.3. 부활
    4.3.1. 성서적 희망의 역사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오랜 동안 개인의 부활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덜 발전된 신앙 역사에 따르는 결핍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후대의 계시 역사는 그 이전의 계시 역사를 폐지하지 않고 계속 이끌어 나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구약성서적 희망이 지닌 세계성과 현세성을 대신하지 않고 포함하며 확대한다. 예수의 설교의 중심에도 죽은 이들의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 세상에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이 자리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가까이 오심으로 가능하게 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킨다: 이 삶의 방식은 이미 지금 현재의 삶에서 실현되고 체험될 수 있으며, 물론 현재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2.7.3. 참조).
    이 새로운 삶의 힘을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체험하였다. 동시에 이 체험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부활 이해는 내용적으로 더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부활은 이 세상과 그안의 인간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도있게 관련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부활 사화는 바로 이것을 증언한다: 여러 장소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생동적인 가까움을 체험한다. 부활은 기존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살아온 삶을 유효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의 육신에서 그분 삶의 역사의 흔적이 계속 남아있는 것(요한 20,20 참조)을 “본다”. 부활은 세상을 포함하며, 삶아가면서 맺은 관계를 심하시키고 역사를 완성하는 “육신적” 부활이다.
    4.3.2.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교의 전승 역사 안에는 비록 다른 강조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부활의 육신성에 대한 신앙을 증언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육신”과 “육신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이미 바오로 사도를 숙고하도록 이끌었던 질문(1고린 15,33)으로서 신학의 역사에서 항상 새로운 착안점을 불러일으켰는데,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로 대답된다.
    자주 사람들은 “육신”(Leib)과 물질적인 “육체”(Körper)을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육신의 부활이란 죽음과 함께 궤멸하기 시작하는 물질적인 육체의 재건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신스콜라 신학은 다소간 이런 상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의 대다수는 인격적인 육신의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세상 안에 있음(In-der-Welt-Sein), 다른 사람과의 통교 그리고 역사 안에 연루되어 있음이 속한다. 이런 세 가지 서로 관련되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들이 인간의 육신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이란, 온전한 인간이 자신 삶의 역사 전체와 함께, 다른 사람과 맺었던 모든 관계와 함께 미래를 갖는다는 것과 그리고 인간의 완성 안에서 세상의 일부도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 조직신학자 빌헬름 브로이닝(Wilhelm Breuning) 이렇게 이해한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은 죽음의 순간에 육체 안에서 발견되는 분자(分子) 그 이상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온갖 수고의 낙인과 또한 나그네살이에서 겪는 끊임 없는 갈망의 낙인이 찍힌 육신을 사랑하신다. 이 육체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 세상에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고, 세상은 이런 흔적으로 인해서 더욱 인간적으로 되었다… 육신의 부활이란 이러한 모든 것 중에서 어느 하나도 하느님에게는 사라져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눈물을 모으시고, 그분에게는 미소 하나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는다. 육신의 부활이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 전체를 다시 찾는 것을 의미한다”. W.Breuning, “Gericht und Auferweckung von den Toten als Kennzeichen des Vollendungshandelns Gottes durch Jesus Christus”, in: J.Feiner/M.Löhrer(Hrsg.), Mysterium Salutis, Bd. V, Zürich, 1976, 882.

    이렇게 이해된 육신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영지주의적-유심론적-개인주의적인 구원이해와 대치시켜 놓을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구원된다; 인간은 역사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과 맺은 모든 관계를 뒤로 할 필요가 없다. 삶의 역사와 그 안에서 형성된 관계들이 함께 인간의 완성 안에로 들어간다. 현재의 (세상과 연계된) 삶이 미래의 (순전한 정신적) 삶으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 변화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근대의 종교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부활신앙은 현재와 지금의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모든 행동과 모든 인격적 관계, 지상의 삶 전체와 인간이 형성한 역사가 영원한 미래를 갖는다고 하면,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다.
    인격적인 육신 이해에서 물질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분자의 미래 대신에 인간 관계의 미래를 말한다면 물질은 그 의미가 없어지는가? 비록 “육신성”이라는 말을 간직한다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다시금 새로운 유심론이 주장되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와 그 궁극적 완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만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1) 정신만이 완성되고 물질은 소멸되거나 혹은 별 의미 없이 뒤에 남는다. 이것은 유심론적 입장이라고 하겠다. 가톨릭 신학자 누구도 이런 입장을 따르지 않는다.
    (2) 정신과 물질 둘은 서로 연관된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르게 완성된다. 이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의 배경을 이룬다. 즉 마지막 날에 죽은 이들의 육신이 재건되어서 그에 속한 영혼과 합치된다는 것이다.
    (3) 물질은 “내면화(verinnerlicht)”, 정신화되고, 정신에로의 초월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런 해석의 배경에는 진화적 세계상이 자리한다. 그레사케는 칼 라너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 안에서의 인간의 완성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 육신성과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주체가 세상과 육신성 안에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서 물질은 내면화되어 정신의 완성에 지속적인 요인이 된다”. G,Greshake, “Leib-Seele-Problematik und die Vollendung der Welt”, in: ders.,/G.Lohfink, Naherwartung-Auferstehung-Unsterblichkeit, Freiburg, 41982, 172.
    다른 말로 하면: 물질은 완성되지만, “그 자체 안에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 안에”, 즉 정신 안에서 완성된다. Ibid., 162f.

    4.4.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 영혼의 불멸?
    죽음과 부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오늘날의 신학에서 이 질문은 영혼의 불명에 대한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토론은 지난 수십년 간 종말론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3.2.9. 참조).
    4.4.1. 전통적 견해
    신학의 전통에서 고전적으로 된 견해에 따르면 죽는 순간에 불멸의 영혼은 사멸할 육신에서 분리된다. 영혼은 죽은 후 즉시 그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심판(사심판)을 대하는데, 죄로 말미암은 벌에 대해 보속을 해야한다면 일정 기간의 정화를 거친 다음에 영원한 행복에 당도하게 된다. 혹은 즉은 후 즉시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세상 역사의 마지막 날에 육신은 부활하여 영혼과 합치될 것이다. 그 다음에 모든 인간이 영혼과 육신을 함께 한 채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벌에 이르는 공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견해에 특징적인 점들은, (1) 죽음을 육신과 영혼의 분리로 이해, (2) 철학적으로 근거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확신, (3) (개개인의 삶의 역사에 마지막에 오는) 죽음과 (세상 역사의 종말에 있을) 부활 사이의 중간 시기의 인정, (4) 이 중간 상태에 존재하는 육신이 없는 영혼(“anima separata”)에 대한 생각 등이다.
    4.4.2. 근래의 토론
    이런 견해가 형성된 길고 복잡한 전개 과정은 교의사에서 다루었다(3.2 참조). 근래에 가톨릭 신학에서는 이에 대한 토론이 두 가지 입장으로 집약된다. 기베르트 그레사케와 게하르트 로핑크가 전개한 모델인 “죽음 안에서의 부활”과 이와 대립해서 요셉 랕찡어가 내세우는 영혼 개념의 복권(復權)과 변형이 그것이다.
    4.4.2.1. “죽음 안에서의 부활”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 내용으로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한 부분인 “육신”만이 아니라 전체 인간이 죽고, 죽는 순간에 전체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서 부활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간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전통적 신학이 주장하는 육신 없는 영혼(anima separata)이 존재하는 시간, 근래의 개신교 신학의 “총체적 죽음”(Ganztod) 이론에서처럼(3.2.9. 참조) 종말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실 때까지 인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로핑크는 이런 생각을 계속 전개하여서 극단적으로 변형시켰다. 현재와 마지막 날의 인류 역사의 완성과의 시간적 간격은 죽은 다음에는 더 이상 고려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어서 시간을 등지게 되면, 그는 나머지 전체 역사가, 설사 그 나머지 역사가 현세적 시간의 차원에서는 무한히 많이 거리를 아직 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그와 함께 ‘동시에’ 종말에 이르는 ‘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직선상의 시간에 세상의 종말이 있느냐는 물음은 참된 신학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G.Lohfink, “Zur Möglichkeit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in: G.Greshake/ders., Op.cit. 72.
    헤르베르트 포그리물러(Herbert Vorgimler)는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아직 남아 있는 역사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한 미래의 결정들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또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모든 곤경이 개인의 죽음에서 이미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H.Vorgrimler, Der Tod im Denken und Leben des Christen, Düsseldorf, 21982, 125f.

    이와는 달리 그레사케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을 과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안에서의 부활과 마지막 날의 부활은 시간적으로 앞서고 뒤따른 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전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부되어 있다: 개개인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이가 완성될 때에야 비로소 충만에 이르는 ‘육신’의 한 지체가 늘 완성되는 것이다”. G.Greshake, “‘Seele’ in de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Ein Durchblick”, in: W.Breuning(Hrsg.), Seele. Problembegriff christlicher Eschatologie, Freiburg, 1986, 152.

    4.4.2.2. “대화적 불멸성 (Dialogische Unsterblichkeit)”
    요셉 랕찡어도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의 부활희망과 그리스적 영혼불멸성의 사상을 내용적으로 서로 반대된다는 데에서 출발해서 그리스적 사고를 수용하는 신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그리스적 육신-영혼 이원론을 성서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대(相對)관계로 대치하였다. 즉 인간은 그 자체로서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대화 상대로서 불멸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한다”. J.Ratzinger, Die sakramentale Begründung christlicher Existenz, Freising, 1966, 16.
    랕찡어에게 하느님과의 이런 관계가 인간의 정의에 속한다. “인간에게서 이 관계를 삭제하면 인간 대신에 단지 고등 동물만 남게 된다”. Ibid.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따른 ‘영혼’ 개념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다분히 실체론(實體論)적 언어로 ‘영혼을 갖는다’라고 부르던 것을 좀더 역사적이고 현실적으로 ‘하느님과의 대화상대가 된다’라고 표현하려는 것이다”. J.Ratzinger, Einfuhrung in das Christentum. Munchen, 1968, 296.
    이렇게 해서 랕씽어는 마침내 “금기로 여겨진 ‘불멸성’과 ‘영혼’ 개념의 복권” J.Ratzinger, “Jenseits des Todes”, in: IKaZ(1972), 241f.
    을 위해 노력하는데, 물론 이 개념들은 대화적-관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랕찡어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라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이 견해는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과는 달리 다시금 영혼에 비해서 육신을 업신여기는 이원론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물질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내면화되어서 정신 안에서 완성에 이르른다는 주장은 “창조물을 갈라 놓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물질계 전체를 창조의 목표에서 제외시켜서 이차적 단계의 실재로 만드는 이원론을 뜻한다”. J.Ratzinger, Eschatologie ― Tod und ewiges Leben, Regensburg, 61990, 159.

    이런 맥락에서 랕찡어는 사람이 죽음 안에서 자신의 역사와 함께 하느님께 나가더라도 아직 완전한 부활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다른 근거로써 인간이 역사 속에 남긴 죄의 자취를 내세운다. “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당하는 이가 있고, 그가 지은 죄가 아직 세상에 계속 남아서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이 다 완성되어 목표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까? […] 계속 남아 있는 죄는 내 자신의 일부이며, 내 자신 안에까지 미치고 그래서 내버려진 내 자신의 한 부분으로서 시간 속에 계속 남아 있다. 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실제로 계속 고통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그 시간을 나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Ibid., 155.

    마침내 이에 관한 토론은 그레사케와 로핑크가 종말에 관한 “다양한 모델의 병립” G.Lohfink, “Zeitproblem und die Vollendung der Welt”, in: G.Greshake/ders., op.cit., 152.
    혹은 “상호보완적 모델들” G.Greshake, “‘Seele’ in de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158.
    안에서 생각할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가라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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