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릿 말
인간은 인간에게 하나의 신비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쯤 인간 자신에 대해 질문하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인간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세상과 인간 자신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갈구한다. 그것은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이 그랬다. 아주 옛부터 사람들은 우주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그에 관한 답변을 제시해 왔다. 철학적인 사고를 전개하여 결론을 얻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학적인 논증과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들어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창세기 역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 것이다.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왜 뱀은 기어다니고,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왜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또 죽어야 하는가? 이와같이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뼈져리게 겪고 있는 인간의 실존 여건, 곧 삶과 죽음, 노동, 출산의 고통 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 설명하는 이야기를 원인론적 설화의 성격을 띠우고 있다. 물론 여기에 기술된 설명은 성서 저자 즉, 야휘스트계 저자 또는 제관계 저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오랜 세월을 걸쳐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체험하고 묵상한 결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성서에 근거해서 답변한다. 인간과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창조설화에 근거한 이 이론은 오랫동안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계몽주의자들은 어린이들의 이야기같은 성서의 창조설화를 조소하면서 교회의 창조론을 공격하였다. 교회는 이들에 대해 방어자세로 일관했었다. 성서의 창조진술을 놓고 자연과학과 겨루려했기에 지동설을 주장하던 자연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단죄하였던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였다.
이제 계몽주의자 또는 자연과학자들의 공격도 잦아들고 있다. 이미 그들의 공격이 가해질 만큼 가해진 것도 있겠지만, 성서에 나타난 창조진술이 과학적 지식과 전혀 아무런 관련없이 오로지 종교와 믿음에만 상관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 교회는 성서의 창조진술의 타당성과 창조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면서 아울러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 사목헌장”(Gaudium et Spes)는 이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고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여러가지 교류수단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가족은 점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형성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 대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33항).”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 우주를 하느님께 바쳐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 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34항).”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조건 자체로써 고유한 안정과 진리와 선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각 학문과 기술의 고유한 방법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다르고 윤리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36항).”
오늘날 성서에 대한 연구로 성서의 창조진술이 과학적인 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오늘날 문학은 그 유형을 구별하면서 유형 나름대로 어떤 진실을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아무도 詩적 표현을 두고 거짓이라고, 또는 오류라고 매도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서의 진술이 설화의 양식을 빌어 그들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창세기가 전하는 창조 이야기는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믿나이다”라는 사도신경의 첫 신앙신조와 같은 신앙의 조항이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이 세계가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믿을”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그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고, 하느님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사실은 “하느님 아버지 (성부)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느님 성자는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하느님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라는 교리지식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다”(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요한 복음 1장 3절; 말씀을 통하여)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은 물론 창세기에서 그리스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진리가 변화한다는 말이 아니라, 세월을 두고 조금씩 더 분명하게 밝혀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우리 그리스도교 입장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하게 계시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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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에게 하나의 신비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쯤 인간 자신에 대해 질문하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인간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세상과 인간 자신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갈구한다. 그것은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이 그랬다. 아주 옛부터 사람들은 우주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그에 관한 답변을 제시해 왔다. 철학적인 사고를 전개하여 결론을 얻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학적인 논증과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들어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창세기 역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 것이다.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왜 뱀은 기어다니고,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왜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또 죽어야 하는가? 이와같이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뼈져리게 겪고 있는 인간의 실존 여건, 곧 삶과 죽음, 노동, 출산의 고통 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 설명하는 이야기를 원인론적 설화의 성격을 띠우고 있다. 물론 여기에 기술된 설명은 성서 저자 즉, 야휘스트계 저자 또는 제관계 저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오랜 세월을 걸쳐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체험하고 묵상한 결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성서에 근거해서 답변한다. 인간과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창조설화에 근거한 이 이론은 오랫동안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계몽주의자들은 어린이들의 이야기같은 성서의 창조설화를 조소하면서 교회의 창조론을 공격하였다. 교회는 이들에 대해 방어자세로 일관했었다. 성서의 창조진술을 놓고 자연과학과 겨루려했기에 지동설을 주장하던 자연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단죄하였던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였다.
이제 계몽주의자 또는 자연과학자들의 공격도 잦아들고 있다. 이미 그들의 공격이 가해질 만큼 가해진 것도 있겠지만, 성서에 나타난 창조진술이 과학적 지식과 전혀 아무런 관련없이 오로지 종교와 믿음에만 상관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 교회는 성서의 창조진술의 타당성과 창조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면서 아울러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 사목헌장”(Gaudium et Spes)는 이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고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여러가지 교류수단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가족은 점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형성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 대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33항).”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 우주를 하느님께 바쳐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 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34항).”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조건 자체로써 고유한 안정과 진리와 선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각 학문과 기술의 고유한 방법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다르고 윤리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36항).”
오늘날 성서에 대한 연구로 성서의 창조진술이 과학적인 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오늘날 문학은 그 유형을 구별하면서 유형 나름대로 어떤 진실을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아무도 詩적 표현을 두고 거짓이라고, 또는 오류라고 매도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서의 진술이 설화의 양식을 빌어 그들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창세기가 전하는 창조 이야기는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믿나이다”라는 사도신경의 첫 신앙신조와 같은 신앙의 조항이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이 세계가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믿을”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그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고, 하느님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사실은 “하느님 아버지 (성부)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느님 성자는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하느님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라는 교리지식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다”(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요한 복음 1장 3절; 말씀을 통하여)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은 물론 창세기에서 그리스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진리가 변화한다는 말이 아니라, 세월을 두고 조금씩 더 분명하게 밝혀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우리 그리스도교 입장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하게 계시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