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라)

3.4. 종말론과 근대의 진보이념
초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순환적 사고가 유다―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사고로 대치되었다. 이제 역사는 목표를 향해 정향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희망의 대상으로서의 역사의 목표는 구원과 완성이라고 믿게 되었다. 목표에로의 접근이 역사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지 혹은 기대하는 종말이 세계 역사의 상승과 하강을 중단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교 역사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에우세비우스와 프라이싱의 옷토는 첫 번째의 생각을, 아우구스티노는 두 번째의 생각을 선호한다고 하겠다.
종말에 대한 희망은 근대에 들어서 ― 물론 교회와 신학의 밖에서― 역사는 지속적으로 상승발전한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확신으로 변하는데, 이 확신은 학문적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하였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역사학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거의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고, 미리 알아낸 방향으로 역사를 촉신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독일의 계몽주의도 자연적으로 나쁜 것에서 더 나은 것으로 진보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더 강하게 불확실성의 요소로 계산에 넣는다. 그래서 진보는 무엇보다도 윤리적 과제라고 보았다. 19세기에는 자연과학과 기술분야에서 분명히 볼 수 있게 드러난 발전과 성장하는 산업사회에서의 지대한 변화를 통해서 포괄적인 발전, 즉 기술, 사회, 인간에 관련해서 동시에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관념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83)는 생산관계의 발전을 근거로, 그리고 계급투쟁을 수단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 정치적 과제라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진보이념은 생물학에서 유래하는 진화론과 융합된다. 인간의 생성을 포함한 자연계의 역사에 대한 관찰은 이 역사를 지속적인 상승발전으로 향하는 과정으로 인식하도록 하였다. 챨스 다윈(Charles Darwin, +1882)이 특정한 세계관과 결부시키지 않고 제시한 진화론은 에른스트 해켈(Ernst Haeckel, +1919)에 의해서 반종교적 색채를 띄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창조 신앙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 신학과 특히 교회 교도권이 진보이념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거나 배척하는 입장을 취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진화론은 마치 반종교적 태도로 여겨졌고, 마르크스주의는 무신론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적대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교황이 진보이념과 화해할 수 있고, 또 화해해야한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배척하였다(DS 2980).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많은 반대의견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이념은 물론 계몽주의적 사상 내용은 의심을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 +1955)의 저서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그의 저서 대부분은 그가 죽은 이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충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며 동시에 열성적인 자연과학자인 그를 심란하게 한 것은 잘못된 대립구조였다: 한 편에는 인간의 발전과 진보에 무관심한 신앙인, “하늘의 일꾼”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진보를 위해 노력하지만 신앙에는 무관심한 “땅의 일꾼”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세상을 멸시하면서 세상을 떠나야하는가? 혹은 세상을 다스리고 완성하기 위해서 세상에 머물러야 하는가?”(Gedanken, 106). 떼이야르는 자신이 자연을 관찰하면서 얻은 우주관(觀)과 그리스도교 계시신앙에 근거한 희망을 대담하게 연결함으로써 이런 궁지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을 발견하였다.
그의 우주관은 온전히 진화적 생각에 의해서 규정된다. 즉 우주의 발전은 땅의 생성(Geogenese)에서부터 생물의 생성(Biogenese)과 정신의 생성(Noogenese)을 거쳐서 실현되고, 바로 그 안에서 인간의 상승이 실현된다. 다시 인류의 역사 안에서는 수천년간의 세분화, 대결과 투쟁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다시 합치에로 향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이전에 서로 대립해서 전개되던 것이 하나의 목표점에로, 진화 전체의 완성이며 정점(頂點)인 “오메가”(Omega) 점에로 결됩된다. 떼이야르는 이 오메가 점에서 사람이 되시고 재림을 통해서 세상을 완성할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에게 재림에 대한 생각은 지배적인 신학적 주제이다. 이와 관련해서 테이야르는 골로 1,16에 근거를 둔다. “과연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은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도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도다”. 그리고 1고린 15,28에 근거해서 세상이 완성되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으로 본다.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점점 더 커지는 일치에로의 발전을 위한 숨겨진 추진력이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재림하실 분으로서 종말에 서서 역사를 완성에로 이끌어 당기신다. 세상의 역사 전체는 “그리스도화”되는 거대한 과정으로서, 정신의 생성은 “그리스도의 생성”에로 흘러간다.
떼이야르의 사상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폭넓은 반응을 일으켰는데, 일부에서는 열광적으로 수용되었고 일부에서는 반대를 받았다. 두 가지 반응에 대한 흔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5)의『사목헌장』에서도 발견된다. 세상에서 인간의 능력에 관한 장에서 언급하기를: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期待)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세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발언은 떼이야르의 노선과 맥을 같이 하는듯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서, 이에 대해서 다시 변증법적으로, 진보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말한다(사목 39). 이렇게 사목헌장은 “현세적 진보”의 사실을 당연하게 전제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진보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인간의 진보는 인간 복지에 크게 이바지하지만 동시에 큰 유혹도 수반한다”. “증대된 인간의 힘은 인류 자체의 멸망을 위협하고 있다”(사목 37).

4. 조직신학적 고찰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성서에 나타난 강조점을 살리고, 교회사와 신학사의 과정에서 배운 것을 소화하며, 성서와 전통을 현재에 제기되는 질문과 중개할 수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이 형성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오늘날의 종말론은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각기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다양한 견해들를 제시할 뿐이다. 세상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신학적 경향은 아주 단순화시켜서 여덟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겠다.
4.1. 세상 종말에 대한 신학적 견해들
4.1.1. 단절과 새로운 창조
현대 신학은 바로 그 이전 시대의 신학, 즉 신스콜라 신학과 겨루면서 형성되었다. 신스콜라 신학은 종말론을 “마지막 것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하면서 먼 나라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처럼 혹은 먼 장래에 대한 예상 보고서처럼 이해하였다. 신스콜라 신학은 역사가 단절된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한 편으로는 현재와 역사 안에서의 미래, 다른 한 편으로는 종말론적 종결은 분명하게 서로 구별되었다. “마지막 것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것들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간의 활동은 언급되지 않는다. 희망하고 있는 미래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노력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또한 이 종말론에서는 세계 역사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세계 역사의 종말은 우주적 차원의 지옥(대부분은 “불바다”)으로 묘사된다. 모든 두려움과 희망은 세상이 아니라 개개인의 운명에 집중되어 있다. 근본 물음은 ‘완전한 세상이 이루어지는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되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신스콜라 신학의 종말론은 묵시문학적 입장을 강력하게 대변한다. 즉 묵시문학과 같이 현재의 세상과 시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현재(옛 시대)와 대망하는 마지막 사건들(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엄격히 구분하며, ―이 둘과 관련된 것으로서―인간 행동에 대한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인간은 단지 수동적으로 세상의 완성에 참여할 뿐이다). 그러나 신스콜라 신학의 종말론은 묵시문학처럼 긴장된 숨을 쉬지 않는데, 왜냐하면 세상의 종말이 먼 미래에 놓여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종말에는 세상의 역사가 단절된다. 낡은 세상은 침몰하고 새 세상이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4.1.2. 완성에까지 이르는 진화
신스콜라 신학적 신앙이해는 한 편으로는 경건한 신앙인들이 기술적, 사회적 진보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결과를 낳았고(그들에게 이런 발전이란 결국은 무너질 집을 보수하는 헛된 일처럼 여겨진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과 사회 분야에 대한 투신에 신앙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인간의 발전과 진보에 무관심한 신앙인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지만 신앙에는 무관심한 현대인들 사이의 대립을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도전에 대해서 진화론, 창조신앙, 종말론적 희망을 서로 연결하는 독특한 구상으로서 대답하였다(참조: 3.4.).


딜렘마 해결책
내세 Ω




우주


딜렘마: “하늘의 일꾼”은 위에로, “땅의 일꾼”은 앞으로 갈 뿐이다.
해결책: 그리스도교적 “상승”은 인간의 “전진”과 결합한다.
4.1.3. 철저히 현재적인 종말론
개신교의 신약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976)은 아주 다른 차원에서, 즉 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와 실존적 해석을 통해서 종말론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어떤 우주적 파국이나 머나먼 미래의 사건,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신앙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역사의 의미는 여기 현재에 있다. 현재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해서 종말론적 현재로 이해된다면 역사의 의미는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역사 안에 얽혀들어가 있는 나의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탄식하는 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주어야 한다. ‘세계 역사 안에서의 당신 자신을 살펴보지 말아라. 그보다는 당신의 고유한 개인의 역사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늘 당신의 현재에 역사의 의미가 놓여 있는데, 구경군의 입장이 아니라 오직 책임성있는 당신의 결단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볼 수 있다. 매 순간 종말론적 기회가 될 가능성이 사라지려고 한다. 당신은 그 기회를 살려야만 한다”(R.Bultmann, Geschichte und Eschatologie, Tübingen, 1964, 184).
여기서 요한복음의 오래된 전승층에 나타난 철저히 현재적인 종말론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는 아마도 불트만이 요한복음의 전승사 연구에 깊이 간여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그에게서 “종말론적 기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도래는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이나 미래에 역사를 끝맺는 시점에 있을 사건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복음선포와 그것의 신앙적 수용을 통해서 개개인에게서 일어나는 해방과 변화를 수반하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말한다. 불트만의 해석은 (실존철학적 사상이나 감성에 영향을 받고서) 어떤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복음선포를 통해서 개개인이 놀람과 감동을 받는 것에 중점을 두는 많은 신앙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종말은 아주 가깝게, 아주 “실존적”으로, 그러나 탈(脫)세계적으로 되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재와 개인의 내적인 결단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종말 희망과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전망 사이의 관계 규정에 대한 문제를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세계사 세계사

현재와 개인에게로 집중: 종말은 항상 현재에 있다. 세계사는 (더 이상) 구원사가 아니다.

4.1.4.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
4.1.4.1. “희망의 신학”
희망과 생동감이 넘치던 60년대에 개신교의 조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 1926) 은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 München, 1969)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전통 신학이 종말론의 중심적인 차원, 즉 희망을 잊었다고 지적한다. 이 차원을 다시 개발하기 위해서 그는 구약성서에로 돌아간다. 구약성서에는 “이 땅에 대한 메시아적인 미래의 희망으로 가득 차”(11) 있다. 하느님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구약에서 그 약속은 원래적인 의미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신약도 약속의 완성을 가져다 주지 않고, 단지 옛 약속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완성이나 종말의 선취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희망의 징표이다. 부활하신 분은 “영원화”된 것이 아니라 “오실 분”이다. 즉 그분 스스로 마지막 것을 향하여 있고, 고유한 미래를 가지고 있다(참조: 1고린 15,20-28).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주어진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징표는 현재의 세상에 대한 투신에로 이끈다.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부활을 통해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를 “보았다”, “하늘의 영원함이 아니라 십자가가 서 있는 세상의 미래를 보았다”(16). 그러므로 희망을 간직한 자는 “이 세상의 법률과 강제”(17)와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몰트만은 불트만의 탈 세계적 종말론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다. 즉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은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는 것이다. “희망과 철저한 개방성 안에 있는 신앙의 실존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하나의 매카니즘이나 폐쇄적인 작용영역으로서 단지 인간의 객관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희망은 화석화된 세계의 감옥에 갖인 고독한 영혼의 희망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주론적 종말론이 없이는 인간의 종말론적 실존을 말할 수가 없다”(60). 몰트만은 떼이야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세상과 역사에 대한 강한 희망과 연결짓는다. 그러나 몰트만은 떼이야르와는 달리, 이 희망이 자연과학적 확실성, 어떤 경험적 사실이나 “자연의 우호적 경향”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 약속의 말씀을 지키는 하느님의 충실”(332)에 근거를 둔다.
“희망의 신학”이 갖는 의미는 특히 그리스도교와 사회와의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몰트만에 따르면 세상과 관련된 희망을 잠재움으로써 그때 그때의 사회에 동화하거나 그것들을 종교적으로 미화하였다. 그러나 이제 희망의 차원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저항과 그 상태로부터 탈출하도록 이끄는 비판적이고 동적인 힘을 보유하게 된다.

4.1.4.2. “정치신학”
거의 같은 시기에 가톨릭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멧츠(Jahann Baptist Metz, *1928)는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이라는 제목으로 몰트만과 비슷한 구상을 제시하였다(Zur Theologie der Welt, Mainz/München, 1968, 99-116). 이를 통해서 그가 의도하는 바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현재 우리의 사회 조건 속에서 표현하려는 시도”(99)이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은 (신스콜라 신학이나 떼이야르 드 샤르뎅처럼) 우주론적으로, (불트만처럼) 실존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의 유래가 되는 창조적―비판적 희망은 본질적으로 사회로서의 세상과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Theologie, 87). 종말론적 기다림은 단지 “약속된 하느님의 도시”를 완성된 형태와 멀리있는 목표로서 바라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도시를 이룩하도록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그리스도 신자는 약속된 보편적 평화와 정의의 나라 건설의 ‘협력자’이다”(86). 그러므로 종말론은 “위대한 정치적-사회적-기술적 이상향(理想鄕), Utopia)…, 즉 현대 사회에서 자라 나와서 성숙된 약속인 세계의 보편적 인간화에 관심을 갖고 이와 비판적으로 겨루어야 한다”(87).
그러나 나중에 사회를 변혁하려는 행동의 영역에서 실망을 체험하고서 종말론적 유보에 더욱 분명하게 강조점을 두는데, 이렇게 해서 진보이념과 종말론적 희망을 너무 빨리 결합시키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희망 외에) 역시 그리스도교 전통에 속하는 묵시문학적 요소를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묵시문학에 나타나는 “파국의 의식” 안에서 멧츠는 시간의 “불연속성”, “단절”에 대한 의식, “시간 자체의 파국적 본질”에 대한 의식이 주어졌다고 본다(Glaube in Gesellschaft und Geschichte, Mainz, 1977, 155) 그러나 그는 전반적으로 과거의 묵시문학에로 돌아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묵시문학”, “종말임박”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자극을 주기 위해서, 즉 세상의 발전을 마음 놓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고자 하였다. 멧츠는 무엇보다로 종말을 기대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시각과 행동의 압박”에 관심이 있었다(156).
4.1.4.3. 해방신학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중부 유럽에서는 주로 이론적으로 논의되던)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이 제시하는 생각들을 직접적으로 사회적 상황과 연결짓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면서 계속 이론적, 실천적으로 발전시켰다. 정치적인 해방 과정에서 함께 일하였던 라틴 아메리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인간의 해방과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현세적 발전 혹은… 인간의 해방과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온전한 친교, 인간 상호간의 온전한 친교를 지향한다. 둘 다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둘의 길은 평행으로 서로 나란히 달리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역사적으로 해방 안에서 실현되는 하나의 과정이다…”(G.Gutiérrez, Theologie der Befreiung, Mainz, 31978, 171). “인간이 신앙과 복음에 대한 열성에 사로 잡혀서 그리고 굶주리고 정의에 목말라 하는 모든 이들과 결합하여서 이들에게 인간적 여건과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 낼 때 거룩한 도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묵시 21,2)은 세상에서 자리할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C./ L.Boff, Wie treibt man Theologie der Befreiung? Düsseldorf 41990, 114). 클로도비스 보프와 레오나르도 보프는 종말론적 희망을 “역사적 희망”으로 옮겨 놓으면서 점점 더 상승하는 이상향을 제시하였다: “모두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식사할 수 있는 작은 이상향(理想鄕), 착취가 없고 모두가 참여하여 건설하는 사회인 커다란 이상향, 끝으로 완전히 구원된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절대적인 이상향”(Theologie, 114).
그러나 구티에레즈나 레오나르도 보프 모두 세상의 완성은 선물임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구원과 세계 내적인 역사가 서로 얽혀있다고 하지만 그둘은 간단히 동일시될 수가 없다. 해방신학이 영감을 받은 성서적 주제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약속과 역사를 움직이는 그 동력, 특히 출애급(나중에는 군사적 독재의 억압으로 인해서 감옥살이라는 주제도 첨가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이다.
이상의 세 견해를 도식으로 옮겨보면:


목표
희망은 부활 신앙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미래를 본다. 그리고 그 희망은 약속과 현재의 실재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며 신앙인들이 약속된 미래의 방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움직이게 한다.

4.1.5. 역사의 자기 초월 가능성
칼 라너(Karl Rahner, +1984)는 현세적 진보와 하느님 나라의 성장이 서로 얽혀있으면서도 구별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변증법적 진술을 숙고하면서 그리고 60년대에 있었던 그리스도교-맑스주의와의 대화에 자극을 받고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 스스로 만드는 세상은 그 자체로는 별 다른 의미가 없이 단지 윤리적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재료’인가,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도래하면 세상은 그냥 제거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은 비록 알 수 없게 ‘변형’되더라도 본래적인 종말의 것에 들어가는가?… 우리는 궁극적인 것 자체의 실행자인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역사는 비록 죽음과 철저한 변화를 겪더라도 궁극적인 것 안에로 들어가는가?”(“Über die theologische Problematik der ‘Neuen Erde’”, in: Schriften zur Theologie 8, Einsiedeln, 1967, 586f.). 라너는 두 가지 대답의 가능성 중에서 간단히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말한다: 한 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업적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도래하여서 역사를 종결짓고 “지양”(止揚, aufheben)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역사의 자기 초월”로 간주될 수 있다(589).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업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간 역사가 제거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역사는 자기 스스로를 초월해서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전혀 그려낼 수 없는) 미래로, 즉 전적으로 하느님의 미래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역사가 전적으로 보존되고 지양되며 영원화되는 미래로 들어갈 수도 있다.
종말론적 전망과 (인간이 개척하는) 미래적 전망의 상호 연관과 차이는 라너가 사용하는 두 개념 “세계 내적인 미래(innerweltliche Zukunft) ― 절대적인 미래(absolute Zukunft)”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라너에게 “세계 내적인 미래”란 특정한 시대에는 아직 미완의 것이지만 역사 내에서는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란 항상 부분적이며 개별적인 것, 세상의 구성요소와 구조에 관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절대적 미래”란 더 이상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완성, 즉 전체로서의 세상의 초월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라너은 하느님 자신을 절대적인 미래라고 부른다. 세계 내적인 미래와 절대적인 미래가 뒤바뀌어서도 않되지만, 그렇다고 간단히 별개의 것으로 갈라 놓아서도 안된다. 세계 내적인 미래가 항상 인간적 계획과 창조적 활동의 소산이지만, ―순수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계속해서 불명료하고 미완의 열린 형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진보는 계속적인 진보를 위한 새로운 전제, 이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전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라너는 바로 이렇게 원칙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불명료함과 개방성에서 모든 세계 내적 미래가 인간이 좌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미래를 가르키고 있다고 본다. 역으로 모든 미래를 위한 갖가지 설계를 하면서 항상 생각하고 목표로 삼는 절대적인 미래는 세계 내적인 미래를 위한 온갖 노력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두 가지 (사회적 실천을 위해 중요한) 과제를 지닌다. 한 편으로 절대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은 구체적이고 세계 내적이며 역사적인 이상향을 요구하는데, 이 이상향은 현재의 것을 비판하고, 역사를 불안하게 만들며 계속 전진하게 한다. 다른 한편 종말론은 온갖 완벽주의적 이상향에 반대해서 “미래에 대한 무지의 앎”(docta ignorantia futuri)을 수호해야 한다. 어떤 세계 내적인 미래의 목표도 절대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지닌 절대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해서 세계 내적인 미래를 위한 정당한 노력을 과도하게 힘으로 밀어부치려는 유혹에서 보호해야 한다. 즉 모든 세대는 무조건 다음 세대를 위해 존재하고, 연거푸 희생되며 그래서 미래는 몰록 신이 되어서 그 앞에서 실제 인간이 실현되지 않고 계속 기다려야 하는 인간을 위해서 살해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비록 세계 내적인 미래에 근접하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자신의 품위와 침해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는 까닭을 이해하도록 만든다”(Marxistische Utopie und christliche Zukunft des Menschen, 156).
절대적
z1
z2



z3




미래

절대적 미래로서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항상 새로운 세계 내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상대화시킨다.
4.1.6. 희망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은 초반의 희망에 가득 찬 출발 이후에 어두운 전망에 맞부닥쳐야 했다. 비단 해방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체가 60년대에 왕성하게 자라났던 정치적, 사회적 희망이 실망을 거듭하고, 70년대 이후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상황에 직면해서 새롭게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희망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의 연결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몰트만과 멧츠는 십자가를 더욱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눈이 먼 낙관주의가 아니라, 눈이 달린 희망으로서, 이 희망은 고난을 보고 그러면서도 자유를 믿는다. 희망은 비로소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현명한 희망이 된다”고 몰트만은 1970년에 쓰고 있다(Umkehr zur Zukunft, München, 1970,14). 또한 1972년에는 “Der gekreuzigte Gott”(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제시한다. “내가 제시하려는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신학의 뒷면일뿐이다…”(10), “왜냐하면 부활의 희망은 단지 앞을 향해서 알려지지 않는 새로운 것을 비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뒤를 향해서 역사가 만들어 낸 죽은 이들의 묘역(墓域), 특히 그 가운데 있는 저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비춘다”(150).
멧츠가 기획한 독일 교구 시노드(1975)의 문헌 “Unsere Hoffnung”(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고통과 불의에 대해서 기억한다. “어떤 후손의 행복도 선조들의 고난을 보상하지 못하고, 어떤 사회적 발전도 죽은 이들이 겪었던 불의를 달래지 못한다”(I,3). 그리고 같은 본문에서 희망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로 파악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보여준 희망의 역사는 부서짐이 없는 성공의 역사, 우리의 기준에 따른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그 역사는 오히려 고난의 역사로서, 오직 이 고난의 역사 안에서, 그를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에서 우리에게 약속한 그 행복과 기쁨, 자유와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I,2). 이에 대한 윤리적 결론은: “우리의 ‘선진’ 사회에 암암리에 내려진 고난 금지령을 부수고서” 우리 자신이 다시 “고난을 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다른 이들이 당하는 고난에 민감하게 되어 “그들의 삶이 변화되도록 함께 그리고 대신 고난을 당해야 한다”(I, 2f.).
근래에 들어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파국을 기대하면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희망을 선포할 수 있었던 묵시문학을 새롭게 주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라너는 1984년 명시적으로 인간이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막아야 할, 그러나 배제할 수 없는 “두렵고 끔찍한” 가능성, 인류가 비참함의 심연에로 추락할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이 추락이 궁극적으로는 무한히 선하시고, 무한히 전능하신 하느님의 품 안에서 끝나리라”는 것을 희망하였다(Erinnerungen im Gespräch mit Meinold Krauss, Freiburg, 1984, 126). 그래서 새로운 종말론은 더욱 강력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모형은, 있을지 모르는 세상의 “죽음”과 하느님에 의한 바로 이 세상의 구원에 대한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묵시문학에 주목하는 새로운 경향과 함께 떼이야르 드 샤르뎅 이전의 체념적이고 비관적인 신스콜라 신학의 세계관에로 되돌아 간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이 경향이 목표로 하는 바는, 비록 가시적인 성공이 아직 멀리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이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믿음과 불의와 고난에 대항한 싸움을 견지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비록 비록 세상이 낡은 세상의 “죽음”을 통해서 형성되야 하더라도: 비록 고난의 역사라도 궁극적으로는 희망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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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말 론-(라)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4. 종말론과 근대의 진보이념
    초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순환적 사고가 유다―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사고로 대치되었다. 이제 역사는 목표를 향해 정향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희망의 대상으로서의 역사의 목표는 구원과 완성이라고 믿게 되었다. 목표에로의 접근이 역사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지 혹은 기대하는 종말이 세계 역사의 상승과 하강을 중단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교 역사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에우세비우스와 프라이싱의 옷토는 첫 번째의 생각을, 아우구스티노는 두 번째의 생각을 선호한다고 하겠다.
    종말에 대한 희망은 근대에 들어서 ― 물론 교회와 신학의 밖에서― 역사는 지속적으로 상승발전한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확신으로 변하는데, 이 확신은 학문적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하였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역사학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거의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고, 미리 알아낸 방향으로 역사를 촉신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독일의 계몽주의도 자연적으로 나쁜 것에서 더 나은 것으로 진보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더 강하게 불확실성의 요소로 계산에 넣는다. 그래서 진보는 무엇보다도 윤리적 과제라고 보았다. 19세기에는 자연과학과 기술분야에서 분명히 볼 수 있게 드러난 발전과 성장하는 산업사회에서의 지대한 변화를 통해서 포괄적인 발전, 즉 기술, 사회, 인간에 관련해서 동시에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관념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83)는 생산관계의 발전을 근거로, 그리고 계급투쟁을 수단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 정치적 과제라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진보이념은 생물학에서 유래하는 진화론과 융합된다. 인간의 생성을 포함한 자연계의 역사에 대한 관찰은 이 역사를 지속적인 상승발전으로 향하는 과정으로 인식하도록 하였다. 챨스 다윈(Charles Darwin, +1882)이 특정한 세계관과 결부시키지 않고 제시한 진화론은 에른스트 해켈(Ernst Haeckel, +1919)에 의해서 반종교적 색채를 띄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창조 신앙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 신학과 특히 교회 교도권이 진보이념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거나 배척하는 입장을 취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진화론은 마치 반종교적 태도로 여겨졌고, 마르크스주의는 무신론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적대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교황이 진보이념과 화해할 수 있고, 또 화해해야한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배척하였다(DS 2980).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많은 반대의견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이념은 물론 계몽주의적 사상 내용은 의심을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 +1955)의 저서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그의 저서 대부분은 그가 죽은 이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충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며 동시에 열성적인 자연과학자인 그를 심란하게 한 것은 잘못된 대립구조였다: 한 편에는 인간의 발전과 진보에 무관심한 신앙인, “하늘의 일꾼”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진보를 위해 노력하지만 신앙에는 무관심한 “땅의 일꾼”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세상을 멸시하면서 세상을 떠나야하는가? 혹은 세상을 다스리고 완성하기 위해서 세상에 머물러야 하는가?”(Gedanken, 106). 떼이야르는 자신이 자연을 관찰하면서 얻은 우주관(觀)과 그리스도교 계시신앙에 근거한 희망을 대담하게 연결함으로써 이런 궁지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을 발견하였다.
    그의 우주관은 온전히 진화적 생각에 의해서 규정된다. 즉 우주의 발전은 땅의 생성(Geogenese)에서부터 생물의 생성(Biogenese)과 정신의 생성(Noogenese)을 거쳐서 실현되고, 바로 그 안에서 인간의 상승이 실현된다. 다시 인류의 역사 안에서는 수천년간의 세분화, 대결과 투쟁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다시 합치에로 향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이전에 서로 대립해서 전개되던 것이 하나의 목표점에로, 진화 전체의 완성이며 정점(頂點)인 “오메가”(Omega) 점에로 결됩된다. 떼이야르는 이 오메가 점에서 사람이 되시고 재림을 통해서 세상을 완성할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에게 재림에 대한 생각은 지배적인 신학적 주제이다. 이와 관련해서 테이야르는 골로 1,16에 근거를 둔다. “과연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은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도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도다”. 그리고 1고린 15,28에 근거해서 세상이 완성되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으로 본다.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점점 더 커지는 일치에로의 발전을 위한 숨겨진 추진력이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재림하실 분으로서 종말에 서서 역사를 완성에로 이끌어 당기신다. 세상의 역사 전체는 “그리스도화”되는 거대한 과정으로서, 정신의 생성은 “그리스도의 생성”에로 흘러간다.
    떼이야르의 사상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폭넓은 반응을 일으켰는데, 일부에서는 열광적으로 수용되었고 일부에서는 반대를 받았다. 두 가지 반응에 대한 흔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5)의『사목헌장』에서도 발견된다. 세상에서 인간의 능력에 관한 장에서 언급하기를: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期待)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세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발언은 떼이야르의 노선과 맥을 같이 하는듯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서, 이에 대해서 다시 변증법적으로, 진보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말한다(사목 39). 이렇게 사목헌장은 “현세적 진보”의 사실을 당연하게 전제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진보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인간의 진보는 인간 복지에 크게 이바지하지만 동시에 큰 유혹도 수반한다”. “증대된 인간의 힘은 인류 자체의 멸망을 위협하고 있다”(사목 37).

    4. 조직신학적 고찰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성서에 나타난 강조점을 살리고, 교회사와 신학사의 과정에서 배운 것을 소화하며, 성서와 전통을 현재에 제기되는 질문과 중개할 수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이 형성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오늘날의 종말론은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각기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다양한 견해들를 제시할 뿐이다. 세상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신학적 경향은 아주 단순화시켜서 여덟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겠다.
    4.1. 세상 종말에 대한 신학적 견해들
    4.1.1. 단절과 새로운 창조
    현대 신학은 바로 그 이전 시대의 신학, 즉 신스콜라 신학과 겨루면서 형성되었다. 신스콜라 신학은 종말론을 “마지막 것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하면서 먼 나라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처럼 혹은 먼 장래에 대한 예상 보고서처럼 이해하였다. 신스콜라 신학은 역사가 단절된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한 편으로는 현재와 역사 안에서의 미래, 다른 한 편으로는 종말론적 종결은 분명하게 서로 구별되었다. “마지막 것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것들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간의 활동은 언급되지 않는다. 희망하고 있는 미래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노력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또한 이 종말론에서는 세계 역사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세계 역사의 종말은 우주적 차원의 지옥(대부분은 “불바다”)으로 묘사된다. 모든 두려움과 희망은 세상이 아니라 개개인의 운명에 집중되어 있다. 근본 물음은 ‘완전한 세상이 이루어지는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되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신스콜라 신학의 종말론은 묵시문학적 입장을 강력하게 대변한다. 즉 묵시문학과 같이 현재의 세상과 시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현재(옛 시대)와 대망하는 마지막 사건들(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엄격히 구분하며, ―이 둘과 관련된 것으로서―인간 행동에 대한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인간은 단지 수동적으로 세상의 완성에 참여할 뿐이다). 그러나 신스콜라 신학의 종말론은 묵시문학처럼 긴장된 숨을 쉬지 않는데, 왜냐하면 세상의 종말이 먼 미래에 놓여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종말에는 세상의 역사가 단절된다. 낡은 세상은 침몰하고 새 세상이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4.1.2. 완성에까지 이르는 진화
    신스콜라 신학적 신앙이해는 한 편으로는 경건한 신앙인들이 기술적, 사회적 진보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결과를 낳았고(그들에게 이런 발전이란 결국은 무너질 집을 보수하는 헛된 일처럼 여겨진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과 사회 분야에 대한 투신에 신앙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인간의 발전과 진보에 무관심한 신앙인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지만 신앙에는 무관심한 현대인들 사이의 대립을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도전에 대해서 진화론, 창조신앙, 종말론적 희망을 서로 연결하는 독특한 구상으로서 대답하였다(참조: 3.4.).

    딜렘마 해결책
    내세 Ω

    우주


    딜렘마: “하늘의 일꾼”은 위에로, “땅의 일꾼”은 앞으로 갈 뿐이다.
    해결책: 그리스도교적 “상승”은 인간의 “전진”과 결합한다.
    4.1.3. 철저히 현재적인 종말론
    개신교의 신약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976)은 아주 다른 차원에서, 즉 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와 실존적 해석을 통해서 종말론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어떤 우주적 파국이나 머나먼 미래의 사건,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신앙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역사의 의미는 여기 현재에 있다. 현재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해서 종말론적 현재로 이해된다면 역사의 의미는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역사 안에 얽혀들어가 있는 나의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탄식하는 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주어야 한다. ‘세계 역사 안에서의 당신 자신을 살펴보지 말아라. 그보다는 당신의 고유한 개인의 역사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늘 당신의 현재에 역사의 의미가 놓여 있는데, 구경군의 입장이 아니라 오직 책임성있는 당신의 결단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볼 수 있다. 매 순간 종말론적 기회가 될 가능성이 사라지려고 한다. 당신은 그 기회를 살려야만 한다”(R.Bultmann, Geschichte und Eschatologie, Tübingen, 1964, 184).
    여기서 요한복음의 오래된 전승층에 나타난 철저히 현재적인 종말론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는 아마도 불트만이 요한복음의 전승사 연구에 깊이 간여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그에게서 “종말론적 기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도래는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이나 미래에 역사를 끝맺는 시점에 있을 사건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복음선포와 그것의 신앙적 수용을 통해서 개개인에게서 일어나는 해방과 변화를 수반하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말한다. 불트만의 해석은 (실존철학적 사상이나 감성에 영향을 받고서) 어떤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복음선포를 통해서 개개인이 놀람과 감동을 받는 것에 중점을 두는 많은 신앙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종말은 아주 가깝게, 아주 “실존적”으로, 그러나 탈(脫)세계적으로 되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재와 개인의 내적인 결단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종말 희망과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전망 사이의 관계 규정에 대한 문제를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세계사 세계사

    현재와 개인에게로 집중: 종말은 항상 현재에 있다. 세계사는 (더 이상) 구원사가 아니다.

    4.1.4.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
    4.1.4.1. “희망의 신학”
    희망과 생동감이 넘치던 60년대에 개신교의 조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 1926) 은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 München, 1969)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전통 신학이 종말론의 중심적인 차원, 즉 희망을 잊었다고 지적한다. 이 차원을 다시 개발하기 위해서 그는 구약성서에로 돌아간다. 구약성서에는 “이 땅에 대한 메시아적인 미래의 희망으로 가득 차”(11) 있다. 하느님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구약에서 그 약속은 원래적인 의미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신약도 약속의 완성을 가져다 주지 않고, 단지 옛 약속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완성이나 종말의 선취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희망의 징표이다. 부활하신 분은 “영원화”된 것이 아니라 “오실 분”이다. 즉 그분 스스로 마지막 것을 향하여 있고, 고유한 미래를 가지고 있다(참조: 1고린 15,20-28).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주어진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징표는 현재의 세상에 대한 투신에로 이끈다.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부활을 통해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를 “보았다”, “하늘의 영원함이 아니라 십자가가 서 있는 세상의 미래를 보았다”(16). 그러므로 희망을 간직한 자는 “이 세상의 법률과 강제”(17)와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몰트만은 불트만의 탈 세계적 종말론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다. 즉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은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는 것이다. “희망과 철저한 개방성 안에 있는 신앙의 실존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하나의 매카니즘이나 폐쇄적인 작용영역으로서 단지 인간의 객관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희망은 화석화된 세계의 감옥에 갖인 고독한 영혼의 희망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주론적 종말론이 없이는 인간의 종말론적 실존을 말할 수가 없다”(60). 몰트만은 떼이야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세상과 역사에 대한 강한 희망과 연결짓는다. 그러나 몰트만은 떼이야르와는 달리, 이 희망이 자연과학적 확실성, 어떤 경험적 사실이나 “자연의 우호적 경향”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 약속의 말씀을 지키는 하느님의 충실”(332)에 근거를 둔다.
    “희망의 신학”이 갖는 의미는 특히 그리스도교와 사회와의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몰트만에 따르면 세상과 관련된 희망을 잠재움으로써 그때 그때의 사회에 동화하거나 그것들을 종교적으로 미화하였다. 그러나 이제 희망의 차원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저항과 그 상태로부터 탈출하도록 이끄는 비판적이고 동적인 힘을 보유하게 된다.

    4.1.4.2. “정치신학”
    거의 같은 시기에 가톨릭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멧츠(Jahann Baptist Metz, *1928)는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이라는 제목으로 몰트만과 비슷한 구상을 제시하였다(Zur Theologie der Welt, Mainz/München, 1968, 99-116). 이를 통해서 그가 의도하는 바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현재 우리의 사회 조건 속에서 표현하려는 시도”(99)이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은 (신스콜라 신학이나 떼이야르 드 샤르뎅처럼) 우주론적으로, (불트만처럼) 실존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의 유래가 되는 창조적―비판적 희망은 본질적으로 사회로서의 세상과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Theologie, 87). 종말론적 기다림은 단지 “약속된 하느님의 도시”를 완성된 형태와 멀리있는 목표로서 바라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도시를 이룩하도록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그리스도 신자는 약속된 보편적 평화와 정의의 나라 건설의 ‘협력자’이다”(86). 그러므로 종말론은 “위대한 정치적-사회적-기술적 이상향(理想鄕), Utopia)…, 즉 현대 사회에서 자라 나와서 성숙된 약속인 세계의 보편적 인간화에 관심을 갖고 이와 비판적으로 겨루어야 한다”(87).
    그러나 나중에 사회를 변혁하려는 행동의 영역에서 실망을 체험하고서 종말론적 유보에 더욱 분명하게 강조점을 두는데, 이렇게 해서 진보이념과 종말론적 희망을 너무 빨리 결합시키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희망 외에) 역시 그리스도교 전통에 속하는 묵시문학적 요소를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묵시문학에 나타나는 “파국의 의식” 안에서 멧츠는 시간의 “불연속성”, “단절”에 대한 의식, “시간 자체의 파국적 본질”에 대한 의식이 주어졌다고 본다(Glaube in Gesellschaft und Geschichte, Mainz, 1977, 155) 그러나 그는 전반적으로 과거의 묵시문학에로 돌아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묵시문학”, “종말임박”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자극을 주기 위해서, 즉 세상의 발전을 마음 놓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고자 하였다. 멧츠는 무엇보다로 종말을 기대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시각과 행동의 압박”에 관심이 있었다(156).
    4.1.4.3. 해방신학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중부 유럽에서는 주로 이론적으로 논의되던)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이 제시하는 생각들을 직접적으로 사회적 상황과 연결짓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면서 계속 이론적, 실천적으로 발전시켰다. 정치적인 해방 과정에서 함께 일하였던 라틴 아메리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인간의 해방과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현세적 발전 혹은… 인간의 해방과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온전한 친교, 인간 상호간의 온전한 친교를 지향한다. 둘 다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둘의 길은 평행으로 서로 나란히 달리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역사적으로 해방 안에서 실현되는 하나의 과정이다…”(G.Gutiérrez, Theologie der Befreiung, Mainz, 31978, 171). “인간이 신앙과 복음에 대한 열성에 사로 잡혀서 그리고 굶주리고 정의에 목말라 하는 모든 이들과 결합하여서 이들에게 인간적 여건과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 낼 때 거룩한 도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묵시 21,2)은 세상에서 자리할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C./ L.Boff, Wie treibt man Theologie der Befreiung? Düsseldorf 41990, 114). 클로도비스 보프와 레오나르도 보프는 종말론적 희망을 “역사적 희망”으로 옮겨 놓으면서 점점 더 상승하는 이상향을 제시하였다: “모두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식사할 수 있는 작은 이상향(理想鄕), 착취가 없고 모두가 참여하여 건설하는 사회인 커다란 이상향, 끝으로 완전히 구원된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절대적인 이상향”(Theologie, 114).
    그러나 구티에레즈나 레오나르도 보프 모두 세상의 완성은 선물임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구원과 세계 내적인 역사가 서로 얽혀있다고 하지만 그둘은 간단히 동일시될 수가 없다. 해방신학이 영감을 받은 성서적 주제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약속과 역사를 움직이는 그 동력, 특히 출애급(나중에는 군사적 독재의 억압으로 인해서 감옥살이라는 주제도 첨가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이다.
    이상의 세 견해를 도식으로 옮겨보면:

    목표
    희망은 부활 신앙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미래를 본다. 그리고 그 희망은 약속과 현재의 실재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며 신앙인들이 약속된 미래의 방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움직이게 한다.

    4.1.5. 역사의 자기 초월 가능성
    칼 라너(Karl Rahner, +1984)는 현세적 진보와 하느님 나라의 성장이 서로 얽혀있으면서도 구별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변증법적 진술을 숙고하면서 그리고 60년대에 있었던 그리스도교-맑스주의와의 대화에 자극을 받고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 스스로 만드는 세상은 그 자체로는 별 다른 의미가 없이 단지 윤리적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재료’인가,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도래하면 세상은 그냥 제거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은 비록 알 수 없게 ‘변형’되더라도 본래적인 종말의 것에 들어가는가?… 우리는 궁극적인 것 자체의 실행자인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역사는 비록 죽음과 철저한 변화를 겪더라도 궁극적인 것 안에로 들어가는가?”(“Über die theologische Problematik der ‘Neuen Erde’”, in: Schriften zur Theologie 8, Einsiedeln, 1967, 586f.). 라너는 두 가지 대답의 가능성 중에서 간단히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말한다: 한 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업적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도래하여서 역사를 종결짓고 “지양”(止揚, aufheben)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역사의 자기 초월”로 간주될 수 있다(589).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업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간 역사가 제거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역사는 자기 스스로를 초월해서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전혀 그려낼 수 없는) 미래로, 즉 전적으로 하느님의 미래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역사가 전적으로 보존되고 지양되며 영원화되는 미래로 들어갈 수도 있다.
    종말론적 전망과 (인간이 개척하는) 미래적 전망의 상호 연관과 차이는 라너가 사용하는 두 개념 “세계 내적인 미래(innerweltliche Zukunft) ― 절대적인 미래(absolute Zukunft)”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라너에게 “세계 내적인 미래”란 특정한 시대에는 아직 미완의 것이지만 역사 내에서는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란 항상 부분적이며 개별적인 것, 세상의 구성요소와 구조에 관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절대적 미래”란 더 이상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완성, 즉 전체로서의 세상의 초월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라너은 하느님 자신을 절대적인 미래라고 부른다. 세계 내적인 미래와 절대적인 미래가 뒤바뀌어서도 않되지만, 그렇다고 간단히 별개의 것으로 갈라 놓아서도 안된다. 세계 내적인 미래가 항상 인간적 계획과 창조적 활동의 소산이지만, ―순수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계속해서 불명료하고 미완의 열린 형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진보는 계속적인 진보를 위한 새로운 전제, 이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전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라너는 바로 이렇게 원칙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불명료함과 개방성에서 모든 세계 내적 미래가 인간이 좌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미래를 가르키고 있다고 본다. 역으로 모든 미래를 위한 갖가지 설계를 하면서 항상 생각하고 목표로 삼는 절대적인 미래는 세계 내적인 미래를 위한 온갖 노력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두 가지 (사회적 실천을 위해 중요한) 과제를 지닌다. 한 편으로 절대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은 구체적이고 세계 내적이며 역사적인 이상향을 요구하는데, 이 이상향은 현재의 것을 비판하고, 역사를 불안하게 만들며 계속 전진하게 한다. 다른 한편 종말론은 온갖 완벽주의적 이상향에 반대해서 “미래에 대한 무지의 앎”(docta ignorantia futuri)을 수호해야 한다. 어떤 세계 내적인 미래의 목표도 절대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지닌 절대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해서 세계 내적인 미래를 위한 정당한 노력을 과도하게 힘으로 밀어부치려는 유혹에서 보호해야 한다. 즉 모든 세대는 무조건 다음 세대를 위해 존재하고, 연거푸 희생되며 그래서 미래는 몰록 신이 되어서 그 앞에서 실제 인간이 실현되지 않고 계속 기다려야 하는 인간을 위해서 살해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비록 세계 내적인 미래에 근접하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자신의 품위와 침해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는 까닭을 이해하도록 만든다”(Marxistische Utopie und christliche Zukunft des Menschen, 156).
    절대적
    z1
    z2

    z3

    미래

    절대적 미래로서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항상 새로운 세계 내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상대화시킨다.
    4.1.6. 희망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은 초반의 희망에 가득 찬 출발 이후에 어두운 전망에 맞부닥쳐야 했다. 비단 해방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체가 60년대에 왕성하게 자라났던 정치적, 사회적 희망이 실망을 거듭하고, 70년대 이후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상황에 직면해서 새롭게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희망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의 연결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몰트만과 멧츠는 십자가를 더욱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눈이 먼 낙관주의가 아니라, 눈이 달린 희망으로서, 이 희망은 고난을 보고 그러면서도 자유를 믿는다. 희망은 비로소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현명한 희망이 된다”고 몰트만은 1970년에 쓰고 있다(Umkehr zur Zukunft, München, 1970,14). 또한 1972년에는 “Der gekreuzigte Gott”(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제시한다. “내가 제시하려는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신학의 뒷면일뿐이다…”(10), “왜냐하면 부활의 희망은 단지 앞을 향해서 알려지지 않는 새로운 것을 비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뒤를 향해서 역사가 만들어 낸 죽은 이들의 묘역(墓域), 특히 그 가운데 있는 저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비춘다”(150).
    멧츠가 기획한 독일 교구 시노드(1975)의 문헌 “Unsere Hoffnung”(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고통과 불의에 대해서 기억한다. “어떤 후손의 행복도 선조들의 고난을 보상하지 못하고, 어떤 사회적 발전도 죽은 이들이 겪었던 불의를 달래지 못한다”(I,3). 그리고 같은 본문에서 희망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로 파악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보여준 희망의 역사는 부서짐이 없는 성공의 역사, 우리의 기준에 따른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그 역사는 오히려 고난의 역사로서, 오직 이 고난의 역사 안에서, 그를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에서 우리에게 약속한 그 행복과 기쁨, 자유와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I,2). 이에 대한 윤리적 결론은: “우리의 ‘선진’ 사회에 암암리에 내려진 고난 금지령을 부수고서” 우리 자신이 다시 “고난을 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다른 이들이 당하는 고난에 민감하게 되어 “그들의 삶이 변화되도록 함께 그리고 대신 고난을 당해야 한다”(I, 2f.).
    근래에 들어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파국을 기대하면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희망을 선포할 수 있었던 묵시문학을 새롭게 주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라너는 1984년 명시적으로 인간이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막아야 할, 그러나 배제할 수 없는 “두렵고 끔찍한” 가능성, 인류가 비참함의 심연에로 추락할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이 추락이 궁극적으로는 무한히 선하시고, 무한히 전능하신 하느님의 품 안에서 끝나리라”는 것을 희망하였다(Erinnerungen im Gespräch mit Meinold Krauss, Freiburg, 1984, 126). 그래서 새로운 종말론은 더욱 강력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모형은, 있을지 모르는 세상의 “죽음”과 하느님에 의한 바로 이 세상의 구원에 대한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묵시문학에 주목하는 새로운 경향과 함께 떼이야르 드 샤르뎅 이전의 체념적이고 비관적인 신스콜라 신학의 세계관에로 되돌아 간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이 경향이 목표로 하는 바는, 비록 가시적인 성공이 아직 멀리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이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믿음과 불의와 고난에 대항한 싸움을 견지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비록 비록 세상이 낡은 세상의 “죽음”을 통해서 형성되야 하더라도: 비록 고난의 역사라도 궁극적으로는 희망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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