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제2부-(마)

4.6. 정화
4.6.1. 연옥 – 완성을 위한 고통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연옥(purgatorium)이라는 단어는 죽은 후에 아직 인간에게 남아있는 죄를 씻어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아직 덜 성숙된 인간이 완성에로 인도된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이들이 기도와 선업을 통해서 죽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이 큰 중요성을 지닌다.
연옥에 대한 명시적인 성서의 증언은 찾을 수 없다. 연옥과 관련해서 오리게네스 이래로 자주 인용된 1고린 3,12-15(“…자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다만 마치 불을 거쳐서 가듯 할 것입니다”)은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 구원의 어려움에 대해서 표현한 것이기에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과 연관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성서적 주제를 연결함으로써 죽은 이후의 정화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1) 예언자들의 선포에 나타난 심판과 정화의 연결: 심판의 목표는 인간을 멸망시키거나 끝없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정화하여서 마침내 구원하는 것이다(I,2.5 참조). (2) 2 마카 12,42-45에 나타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2.5.2. 참조). 교회의 가르침이 전개(3.2.5. 그리고 3.2.7. 이하 참조).
동방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만 그러나 오리게네스의 만물회복설과 근접해있다는 이유에서 연옥 교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대사의 판매와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연옥 교리를 배척하였다. 오늘날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연옥 교리가 성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신앙에 의해서 의화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고 해서 이를 거부한다.
근래의 가톨릭 신학에서는 “부활”과 “심판”에서와 비슷하게 연옥이란 주제에서도 과거의 사물적이고 공간적인 관념 대신에 인격적인 범주가 들어서게 되었다. 즉 “불”을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연옥을 더 이상 “장소”로서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심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죄의 찌꺼기는 녹아버리고, 이기주의로 경직된 것이 풀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옥은 정화로서, 완성을 위한 고통으로 파악된다: 정화는 자유롭게 하고 완성에로 이끌기 때문에 행복하고, 동시에 나의 일부가 된 죄의 찌꺼기를 제거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정화는 심판과는 별개의 고유한 과정이 아니라 심판의 한 순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한 순간이다. 심판을 자기심판으로 해석하고, 죄에 대한 벌을 죄에 대한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으로 이해할 때 이런 정화의 개념에 근접하게 된다.
연옥을 이렇게 이해할 때 두려움이 아닌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게 된다. 즉 인간은 죽은 후에(혹은 죽음 안에서)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와 이 죄로 인한 자기 소외(疏外)와 자기 왜곡(歪曲)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온갖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에 마침내 본래 되어야 할 내 자신이 될 수 있다. 또한 정화의 정도는 살아 생전에 실현한 사랑과 회개의 정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화에 대한 희망은 이미 지금의 삶에서 사랑 안에서 성장할 것을 촉구한다.

4.6.2. 부설 1: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4.6.2.1. 문제점
심판과 연옥을 인격적인 범주를 바탕에 두고 재해석할 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통상적으로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연옥불을 면하게 해달라거나, 연옥의 고통을 짧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1) 그러나 부활은 이미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고 정화를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연옥벌이 시간적으로 지속된다고 말하기가 곤란한다. 또한 연옥벌의 “단축”이라는 생각도 문제시된다. (2) 심판은하느님이 죄인에게 벌을 내림으로써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판결하는 “자기심판”이라고 한다면, 즉 심판은 죄 자체에 따라오는 고통스로운 결과라고 본다면, 벌의 소멸은 하느님께서 단순히 벌을 사해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정화는 완성을 위해서 명백하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정화의 당사자를 위해서도 정화를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정화의 포기는 완성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4.6.2.2. 문제에 대한 대답
첫 번째 문제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라는 주제 자체가 야기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종말론이 예전부터 안고 있던 문제라고 하겠다. 즉 죽음 건너 편에서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현세의 범주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다음의 사정에 대해서 말하려면 공간과 시간의 범주를 부득불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는 다른 범주는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또한 종말과 관련된 우리의 행동도 공간과 시간에 매어있다. 이승의 삶과 죽은 다음의 삶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분명한 비교불가능성이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의미는 죽은 이들이 “아직” 정화 중에 있는가하는 물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문제는 중재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숙고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중재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관계와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가 동시에 실현되고, 두 관계는 서로 연결된다. 중재기도는 사랑과 가까움을 실현하고 표현한다. 그런데 사랑과 가까움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하고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가까움이 그러하다. 즉 그분과의 만남에서 정화가 실현된다. 인간의 가까움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재기도 중에 기도하는 이는 그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이는 “효력을 발휘한다”: 내가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없었고 그들의 동반과 지원을 받거나 혹은 버림을 받았듯이, 내 삶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풍요롭게 되었거나 혹은 그것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빈약해졌듯이, 신뢰하고 희망하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통해서 좌우되었듯이, 다시 말해서 살아 생전에 구원을 선사하는 하느님의 가까이 오심은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 중재되었듯이,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실현되는 정화사건에서도 다른 사람이 사랑 안에서 나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하게 된다. 이는 나를 지탱하고 개방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목표는 그들에게 정화를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 중에 있는 그들을 지원하고, 정화의 성공에 기여하는 데에 있고, 이런 의미에서 정화를 가볍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4.6.2.3. 상호관계성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일방적이 아니라 큰 맥락에서 상호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죽은 이들을 사랑 안에서 기억하는 것은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이라고 부르는 공동체적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는 “주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세상 여정에 남아 있고 어떤 이는 죽어 단련을 받고 어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슴을 실제로 뵈오며’ 영광을 누리고 잇으나 우리는 모두 다 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서로 다른 정도와 방법으로 교류(交流)하고 있으며 우리 하느님께 같은 영광의 찬미가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한 교뢰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에페 4,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형제들과 지상 여정의 형제들 사이의 결합이 죽음으로써 서로 중단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영신적 보화의 교류로 말미암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이다”(교회헌장 49).
이렇게 볼 때 죽은 이들을 위한 살아 있는 이들의 기도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죽은 이들의 기도, 그리고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에게 말하는 것과 죽은 이들이 산이들에게 말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겠다.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통교를 믿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죽은 혼을 불러내어 이야기한다는 일종의 영교술(靈交術)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둘 사이의 차이는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이들의 삶에 참여하고, 산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생동적이고 실제적인 관계가 있다는 확신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영교술도 모두 이를 받아들인다. 차이는 이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현하느냐에 있다. (1)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따르면 죽은 이들과의 접촉은 어떤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을 대상으로 한 마술적 실천은 물론 죽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술적 실천도 금지되어 있다. 죽은 이들과의 접촉을 위한 그리스도교적 “매개물”은 신앙 안에서의 기도, 다시 말해서 알수 없는 신비에로 인도되는 신뢰의 행동이다. (2)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죽은 이들이 산 이들에게 갖는 관심이 물리적 현상으로(예를 들어 음성 녹음) 객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죽은 이들의 현존과 근접은 하느님의 숨어계심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만이 죽은 이들의 근접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4.6.3. 부설 2: 환생?
환생설이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부합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정화라는 주제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에 여기에서 논하게 된 것이다.
에집트, 고대 그리스, 영지주의의 일부, 인도의 종교들을 거쳐서 최근에까지 지속되는 환생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영혼, 혹은 자아가 죽은 다음에 다른 육체로 태어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환생설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업(業)이라는 개념이다. 즉 오늘날 내 삶의 운명은 내 전생의 좋은 혹은 잘못된 행동의 결과이고, 현재의 행동은 다음 생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환생을 무거운 짐으로 보면서 환생의 종결로서의 구원을 희망한다. 환생을 종결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업을 착한 행실로 상쇄(相殺)해야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구원에 이르는 정화의 필요성과 비교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종말론이 가르치는 죽은 후의 정화를 환생이라는 상상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칼 라너는 이에 대해서 약간의 개방성을 보인다. “고풍스럽게 여겨지는 가톨릭 교회에서의 ‘중간상태’라는 상상이 어쩌면 동양의 여러 문화권에 유포되어 당연하게 간주되는 가르침인 ‘영혼의 이주(移住)’, ‘환생’과 좀더 낫게, 긍정적으로 관계할 수있는 실마리가 주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단, 적어도 그러한 환생이 결코 중단되지 않고 시간적으로 항상 계속되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K.Rahner, Grundkurs des Glaubens, Freiburg, 1976, 425.

라너가 전제로 내걸은 조건은 그리스도교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즉 인간 삶은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정향된 일회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대략 4가지 이유를 내세워서 환생설을 거부한다. (1) 환생설은 인간 삶의 유일회적인 의미와 진지함을 감소한다. (2) 환생설은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지닌 방향적 구조, 즉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역사에 희망을 두는 것과 대치된다. (3) 환생설은 육체와 영혼의 일체성을 해체시킨다. (4) 자신의 업을 반드시 남김 없이 소멸해야한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환생설은 종말의 완성이 지닌 선물의 성격에 대한 여지가 없다. 인간의 완성과 이를 위한 정화에서 비록 인간이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이해에 따르면 인간의 완성을 희망할 수 있는 근거는 정체 불명의 우주적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이시다.
교황청의 국제신학위원회는 최근 종말론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와 비슷한 반대 논거를 제시한다. 우선 환생이론을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승을 직접적으로 거스리는 이방인 사상의 유아(幼兒)” Commission Theologica Internationalis, “De quibusdam quaestionibus actualibus circa eschatologiam”, in: Gregorianum Vol. 73/3, 1992, 426.
라고 규정짓고., 이 이론을 거부하는 이유로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 이 이론은 반복할 수 없는 유일회적인 삶을 거부하고 있다. (2)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로써 영원한 벌과 영원한 행복을 거부하고 있다. (3) 자신의 공과 벌을 철저하게 자신의 처지에서 정화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느님의 은통의 여지를 박탈하고 있다. (4) 영혼을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육체로부터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참조: 위의 글, 427-428.


4.7. 결정적 실패의 가능성
영원한 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종말론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영원한 벌이란 말은 과거에 많이 남용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적 미래의 전망이 두려움과 공포로 물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실패의 가능성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속한다. 하지만 신앙의 직접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희망을 표현하는 어두운 배경으로서 말이다.
4.7.1. “지옥”이란?
예수는 자신을 영원히 상실(裳失)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한다. 공관복음서(특히 마태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이와 관련해서 그 당시의 묵시문학의 표상들을 사용한다. “불”(마태 5,22; 13,42; 18,8; 25,41; 마르 9,43.48). “어두움”(마태 8,12; 22.13; 25,30). “울부짓고 이를 갈음”(마태 8,12; 13,42.50; 22.13; 24,51; 25,30; 루가 13,28).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묵시문학이 “지옥”에 대해서 공상적이고 무시무시하게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신약성서는 꾸밈이 없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신약성서에 나타난 표상들만이라도 글자그대로의 정확한 정보라고 받아들일 것인가? 표상들이 서로가 모순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불과 극도의 어두움이 그런 경우다. 또한 예수는 그가 경고하는 위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전혀 다른 표상들, 예컨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이라는 표상이 아니라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 잔치에서 쫓겨나 바깥에 머무른다(마태 25,1-13; 루가 14,16-24)는 표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지적들은 여기서 말해지는 위험을 가볍게 보려는 것이 아니라, 표상은 표상으로 인식하면서 표상이 의도하는 본래의 내용을 알아내자는 것이다.
전통 신학에서는 지옥벌의 본질을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직관하는 것(혹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관계)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았다. 지옥은 모든 공동체로부터 배척되는 것이다. 이런 배척은 -이미 앞에서 죄에 대한 벌과 관련해서 살펴보았듯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벌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죄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불행한 상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모든 사랑을 지속적으로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결국에는 전혀 사랑할 수 없도록 뒤틀려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자신의 이웃은 물론 자기 자신 마저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은 속속들이 사랑하도록 규정된 존재이기에 이런 상황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다. 그러므로 “사랑에서의 제외”라는 말보다는 “사랑의 불능(不能)”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하겠다. 물론 이런 불능은 당사자 자신이 자유롭게 결단한 삶의 역사에서 형성된 것이다.
짱 뽈 사르뜨르(Jean-Paul Sartres)의 드라마 “닫혀진 문(Huis clos)”에는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서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적어도 서로 성가시지 않게 하지도 못하면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거의 끝부분에서 가리용(Garion)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난 결코 생각하재 못했던 바이다… 여러분들 기억해 두십시오. 유황, 불, 장작 더미, 불에 굽는 석쇠… 농담도! 어떤 석쇠도 필요없어, 지옥,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상응하는 의미로 말하자면, 지옥 그것은 내 자신이다. 사랑에 굶주리지만 동시에 사랑할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현재 함께 살면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기 때문다. 즉 지옥에 대한 언급은 일차적으로 저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전망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태도를 통해서 “세상에서의 지옥”을 만들 수 있는가를 발견하고 이런 태도로서 삶이 굳어지지 않기를 경고하기 위해서 지옥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표상으로 돌아가서 “영원한 벌”을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 서 있지만, 그분의 사랑하는 시선을 내 안에 받아들일 능력이 전혀 없게 되었다.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내 자신 너무 굳고 차가워졌고, 이것이 원래의 내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명백히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머무른다.’ 혹은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표상으로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복된 사람들의 도시 한 가운데에 나도 살고 있으면서 행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개방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탱되어 가는지를 본다. 동시에 내 자신은 영원히 자신 안에 갖혀서 이기주의적으로 다른 이들을 거부하면서 머무르는 것을 본다. 비록 이런 것이 무한하게 나를 괴롭게 만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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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말 론 제2부-(마)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4.6. 정화
    4.6.1. 연옥 – 완성을 위한 고통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연옥(purgatorium)이라는 단어는 죽은 후에 아직 인간에게 남아있는 죄를 씻어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아직 덜 성숙된 인간이 완성에로 인도된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이들이 기도와 선업을 통해서 죽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이 큰 중요성을 지닌다.
    연옥에 대한 명시적인 성서의 증언은 찾을 수 없다. 연옥과 관련해서 오리게네스 이래로 자주 인용된 1고린 3,12-15(“…자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다만 마치 불을 거쳐서 가듯 할 것입니다”)은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 구원의 어려움에 대해서 표현한 것이기에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과 연관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성서적 주제를 연결함으로써 죽은 이후의 정화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1) 예언자들의 선포에 나타난 심판과 정화의 연결: 심판의 목표는 인간을 멸망시키거나 끝없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정화하여서 마침내 구원하는 것이다(I,2.5 참조). (2) 2 마카 12,42-45에 나타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2.5.2. 참조). 교회의 가르침이 전개(3.2.5. 그리고 3.2.7. 이하 참조).
    동방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만 그러나 오리게네스의 만물회복설과 근접해있다는 이유에서 연옥 교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대사의 판매와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연옥 교리를 배척하였다. 오늘날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연옥 교리가 성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신앙에 의해서 의화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고 해서 이를 거부한다.
    근래의 가톨릭 신학에서는 “부활”과 “심판”에서와 비슷하게 연옥이란 주제에서도 과거의 사물적이고 공간적인 관념 대신에 인격적인 범주가 들어서게 되었다. 즉 “불”을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연옥을 더 이상 “장소”로서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심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죄의 찌꺼기는 녹아버리고, 이기주의로 경직된 것이 풀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옥은 정화로서, 완성을 위한 고통으로 파악된다: 정화는 자유롭게 하고 완성에로 이끌기 때문에 행복하고, 동시에 나의 일부가 된 죄의 찌꺼기를 제거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정화는 심판과는 별개의 고유한 과정이 아니라 심판의 한 순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한 순간이다. 심판을 자기심판으로 해석하고, 죄에 대한 벌을 죄에 대한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으로 이해할 때 이런 정화의 개념에 근접하게 된다.
    연옥을 이렇게 이해할 때 두려움이 아닌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게 된다. 즉 인간은 죽은 후에(혹은 죽음 안에서)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와 이 죄로 인한 자기 소외(疏外)와 자기 왜곡(歪曲)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온갖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에 마침내 본래 되어야 할 내 자신이 될 수 있다. 또한 정화의 정도는 살아 생전에 실현한 사랑과 회개의 정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화에 대한 희망은 이미 지금의 삶에서 사랑 안에서 성장할 것을 촉구한다.

    4.6.2. 부설 1: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4.6.2.1. 문제점
    심판과 연옥을 인격적인 범주를 바탕에 두고 재해석할 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통상적으로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연옥불을 면하게 해달라거나, 연옥의 고통을 짧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1) 그러나 부활은 이미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고 정화를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연옥벌이 시간적으로 지속된다고 말하기가 곤란한다. 또한 연옥벌의 “단축”이라는 생각도 문제시된다. (2) 심판은하느님이 죄인에게 벌을 내림으로써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판결하는 “자기심판”이라고 한다면, 즉 심판은 죄 자체에 따라오는 고통스로운 결과라고 본다면, 벌의 소멸은 하느님께서 단순히 벌을 사해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정화는 완성을 위해서 명백하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정화의 당사자를 위해서도 정화를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정화의 포기는 완성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4.6.2.2. 문제에 대한 대답
    첫 번째 문제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라는 주제 자체가 야기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종말론이 예전부터 안고 있던 문제라고 하겠다. 즉 죽음 건너 편에서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현세의 범주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다음의 사정에 대해서 말하려면 공간과 시간의 범주를 부득불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는 다른 범주는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또한 종말과 관련된 우리의 행동도 공간과 시간에 매어있다. 이승의 삶과 죽은 다음의 삶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분명한 비교불가능성이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의미는 죽은 이들이 “아직” 정화 중에 있는가하는 물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문제는 중재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숙고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중재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관계와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가 동시에 실현되고, 두 관계는 서로 연결된다. 중재기도는 사랑과 가까움을 실현하고 표현한다. 그런데 사랑과 가까움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하고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가까움이 그러하다. 즉 그분과의 만남에서 정화가 실현된다. 인간의 가까움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재기도 중에 기도하는 이는 그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이는 “효력을 발휘한다”: 내가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없었고 그들의 동반과 지원을 받거나 혹은 버림을 받았듯이, 내 삶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풍요롭게 되었거나 혹은 그것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빈약해졌듯이, 신뢰하고 희망하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통해서 좌우되었듯이, 다시 말해서 살아 생전에 구원을 선사하는 하느님의 가까이 오심은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 중재되었듯이,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실현되는 정화사건에서도 다른 사람이 사랑 안에서 나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하게 된다. 이는 나를 지탱하고 개방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목표는 그들에게 정화를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 중에 있는 그들을 지원하고, 정화의 성공에 기여하는 데에 있고, 이런 의미에서 정화를 가볍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4.6.2.3. 상호관계성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일방적이 아니라 큰 맥락에서 상호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죽은 이들을 사랑 안에서 기억하는 것은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이라고 부르는 공동체적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는 “주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세상 여정에 남아 있고 어떤 이는 죽어 단련을 받고 어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슴을 실제로 뵈오며’ 영광을 누리고 잇으나 우리는 모두 다 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서로 다른 정도와 방법으로 교류(交流)하고 있으며 우리 하느님께 같은 영광의 찬미가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한 교뢰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에페 4,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형제들과 지상 여정의 형제들 사이의 결합이 죽음으로써 서로 중단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영신적 보화의 교류로 말미암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이다”(교회헌장 49).
    이렇게 볼 때 죽은 이들을 위한 살아 있는 이들의 기도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죽은 이들의 기도, 그리고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에게 말하는 것과 죽은 이들이 산이들에게 말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겠다.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통교를 믿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죽은 혼을 불러내어 이야기한다는 일종의 영교술(靈交術)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둘 사이의 차이는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이들의 삶에 참여하고, 산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생동적이고 실제적인 관계가 있다는 확신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영교술도 모두 이를 받아들인다. 차이는 이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현하느냐에 있다. (1)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따르면 죽은 이들과의 접촉은 어떤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을 대상으로 한 마술적 실천은 물론 죽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술적 실천도 금지되어 있다. 죽은 이들과의 접촉을 위한 그리스도교적 “매개물”은 신앙 안에서의 기도, 다시 말해서 알수 없는 신비에로 인도되는 신뢰의 행동이다. (2)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죽은 이들이 산 이들에게 갖는 관심이 물리적 현상으로(예를 들어 음성 녹음) 객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죽은 이들의 현존과 근접은 하느님의 숨어계심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만이 죽은 이들의 근접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4.6.3. 부설 2: 환생?
    환생설이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부합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정화라는 주제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에 여기에서 논하게 된 것이다.
    에집트, 고대 그리스, 영지주의의 일부, 인도의 종교들을 거쳐서 최근에까지 지속되는 환생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영혼, 혹은 자아가 죽은 다음에 다른 육체로 태어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환생설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업(業)이라는 개념이다. 즉 오늘날 내 삶의 운명은 내 전생의 좋은 혹은 잘못된 행동의 결과이고, 현재의 행동은 다음 생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환생을 무거운 짐으로 보면서 환생의 종결로서의 구원을 희망한다. 환생을 종결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업을 착한 행실로 상쇄(相殺)해야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구원에 이르는 정화의 필요성과 비교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종말론이 가르치는 죽은 후의 정화를 환생이라는 상상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칼 라너는 이에 대해서 약간의 개방성을 보인다. “고풍스럽게 여겨지는 가톨릭 교회에서의 ‘중간상태’라는 상상이 어쩌면 동양의 여러 문화권에 유포되어 당연하게 간주되는 가르침인 ‘영혼의 이주(移住)’, ‘환생’과 좀더 낫게, 긍정적으로 관계할 수있는 실마리가 주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단, 적어도 그러한 환생이 결코 중단되지 않고 시간적으로 항상 계속되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K.Rahner, Grundkurs des Glaubens, Freiburg, 1976, 425.

    라너가 전제로 내걸은 조건은 그리스도교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즉 인간 삶은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정향된 일회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대략 4가지 이유를 내세워서 환생설을 거부한다. (1) 환생설은 인간 삶의 유일회적인 의미와 진지함을 감소한다. (2) 환생설은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지닌 방향적 구조, 즉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역사에 희망을 두는 것과 대치된다. (3) 환생설은 육체와 영혼의 일체성을 해체시킨다. (4) 자신의 업을 반드시 남김 없이 소멸해야한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환생설은 종말의 완성이 지닌 선물의 성격에 대한 여지가 없다. 인간의 완성과 이를 위한 정화에서 비록 인간이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이해에 따르면 인간의 완성을 희망할 수 있는 근거는 정체 불명의 우주적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이시다.
    교황청의 국제신학위원회는 최근 종말론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와 비슷한 반대 논거를 제시한다. 우선 환생이론을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승을 직접적으로 거스리는 이방인 사상의 유아(幼兒)” Commission Theologica Internationalis, “De quibusdam quaestionibus actualibus circa eschatologiam”, in: Gregorianum Vol. 73/3, 1992, 426.
    라고 규정짓고., 이 이론을 거부하는 이유로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 이 이론은 반복할 수 없는 유일회적인 삶을 거부하고 있다. (2)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로써 영원한 벌과 영원한 행복을 거부하고 있다. (3) 자신의 공과 벌을 철저하게 자신의 처지에서 정화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느님의 은통의 여지를 박탈하고 있다. (4) 영혼을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육체로부터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참조: 위의 글, 427-428.

    4.7. 결정적 실패의 가능성
    영원한 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종말론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영원한 벌이란 말은 과거에 많이 남용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적 미래의 전망이 두려움과 공포로 물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실패의 가능성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속한다. 하지만 신앙의 직접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희망을 표현하는 어두운 배경으로서 말이다.
    4.7.1. “지옥”이란?
    예수는 자신을 영원히 상실(裳失)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한다. 공관복음서(특히 마태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이와 관련해서 그 당시의 묵시문학의 표상들을 사용한다. “불”(마태 5,22; 13,42; 18,8; 25,41; 마르 9,43.48). “어두움”(마태 8,12; 22.13; 25,30). “울부짓고 이를 갈음”(마태 8,12; 13,42.50; 22.13; 24,51; 25,30; 루가 13,28).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묵시문학이 “지옥”에 대해서 공상적이고 무시무시하게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신약성서는 꾸밈이 없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신약성서에 나타난 표상들만이라도 글자그대로의 정확한 정보라고 받아들일 것인가? 표상들이 서로가 모순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불과 극도의 어두움이 그런 경우다. 또한 예수는 그가 경고하는 위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전혀 다른 표상들, 예컨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이라는 표상이 아니라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 잔치에서 쫓겨나 바깥에 머무른다(마태 25,1-13; 루가 14,16-24)는 표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지적들은 여기서 말해지는 위험을 가볍게 보려는 것이 아니라, 표상은 표상으로 인식하면서 표상이 의도하는 본래의 내용을 알아내자는 것이다.
    전통 신학에서는 지옥벌의 본질을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직관하는 것(혹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관계)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았다. 지옥은 모든 공동체로부터 배척되는 것이다. 이런 배척은 -이미 앞에서 죄에 대한 벌과 관련해서 살펴보았듯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벌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죄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불행한 상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모든 사랑을 지속적으로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결국에는 전혀 사랑할 수 없도록 뒤틀려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자신의 이웃은 물론 자기 자신 마저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은 속속들이 사랑하도록 규정된 존재이기에 이런 상황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다. 그러므로 “사랑에서의 제외”라는 말보다는 “사랑의 불능(不能)”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하겠다. 물론 이런 불능은 당사자 자신이 자유롭게 결단한 삶의 역사에서 형성된 것이다.
    짱 뽈 사르뜨르(Jean-Paul Sartres)의 드라마 “닫혀진 문(Huis clos)”에는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서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적어도 서로 성가시지 않게 하지도 못하면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거의 끝부분에서 가리용(Garion)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난 결코 생각하재 못했던 바이다… 여러분들 기억해 두십시오. 유황, 불, 장작 더미, 불에 굽는 석쇠… 농담도! 어떤 석쇠도 필요없어, 지옥,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상응하는 의미로 말하자면, 지옥 그것은 내 자신이다. 사랑에 굶주리지만 동시에 사랑할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현재 함께 살면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기 때문다. 즉 지옥에 대한 언급은 일차적으로 저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전망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태도를 통해서 “세상에서의 지옥”을 만들 수 있는가를 발견하고 이런 태도로서 삶이 굳어지지 않기를 경고하기 위해서 지옥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표상으로 돌아가서 “영원한 벌”을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 서 있지만, 그분의 사랑하는 시선을 내 안에 받아들일 능력이 전혀 없게 되었다.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내 자신 너무 굳고 차가워졌고, 이것이 원래의 내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명백히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머무른다.’ 혹은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표상으로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복된 사람들의 도시 한 가운데에 나도 살고 있으면서 행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개방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탱되어 가는지를 본다. 동시에 내 자신은 영원히 자신 안에 갖혀서 이기주의적으로 다른 이들을 거부하면서 머무르는 것을 본다. 비록 이런 것이 무한하게 나를 괴롭게 만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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