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포자로서의 교회(Herald)
이 교회관은 ‘말씀’을 교회의 본질의 일차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성사’는 이차적 의미만을 부여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여 소집되고 형성된 회중(會衆)이다. 교회의 사명은 자신이 듣고 믿으며 위임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교회관은 하느님의 백성과 같은 공동체적 교회관과 많이 닮았지만 상호 인격적인 관계나 신비적 친교보다 신앙과 복음선포를 강조하는 점에서 공동체적 교회관과 구별된다. 여기서 교회는 왕의 공식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사자(Herald)나 전령으로 비견된다. 이 교회관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일차적인 증언으로서 성서에 집중되어 있는 한편 일차적 과제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말씀의 선포이다(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복음으로 선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한다; Kerygma-선포되는 그리스도).
바르트(K. Barth, 1886-1968)에 있어서 교회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설립되어 있긴 하나 역사에 일회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교회는 복음을 계속 전하고 증언하며 들음으로서 늘 새롭게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하느님은 복음선포 속에 현존하시며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이 믿어지는 만큼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교회는 인간을 참회와 쇄신으로 계속적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여 함께 모인 회중이니만큼 교회는 자신의 비천함을 공공연히 인정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느님께 불러모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 내에 갇히거나 교회가 선포되어야 할 내용이어서는 안 된다(가톨릭 비판).
큉(H. Kung)에게 있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투신하여 이 사건을 전 인류의 희망으로 증거 하는 공동체(The Eschatological Community of Salvation)이므로 교회의 사명은 이 사건에 봉사하는 것이다. 교회(Ekklesia)는 본시 ‘호출되어 소집된 자들’의 모임인데 ‘집결되는 과정’과 ‘집결된 공동체’의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교회는 역사상 일회적으로 형성되고 설립되어 불변한 째 머무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체적 모임이 반복되는 사건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교회관 안에서는 지역교회(The local Church)가 교회의 한 부분이나 하부기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기 위해 모인 참으로 하나의 온전한 교회이다(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수용).
이 복음선포적 교회관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신앙(복음에의 응답)이다. 복음은 추상적인 명제적 진리나 단순히 쓰여진 문서가 아니라 선포되는 사건이다. 개신교의 전통에 의하면 성사는 가시적인 말씀으로서 공동체 신앙의 표지나 극화 정도로 이해된다. 지역교회가 온전한 교회이기에 세계적 어떤 구조에 예속되지 않는다(큉). 그러나 지역교회들간의 유대는 상호간의 이익을 위해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가운데의 그리스도가 교회이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있는 곳 어디에나 교회는 존재한다. 복음에 대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도록 요청하는 것이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설교 자체가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설교자로부터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힘으로 청자에게 전해져 이를 믿는 사람들을 ‘지금 여기서’ 구원하기 때문이다.
이 교회관은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과 신약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지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로서의 선교적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교회관은 주님의 주권과 인간과의 거리를 의식하도록 유도하며 회개와 쇄신을 위한 순종과 겸손을 준비하게끔 이끈다. 이 교회관은 풍부한 말씀의 신학을 제공하는데 말씀은 단순히 하나의 아이디어 제공이나 정보의 원천이나 실재에 대한 해설 이상의 것이다. 말씀은 인격의 표현으로서 대화 속에서의 인격적인 친교를 말한다. 성사는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나 말씀은 분명하게 어떤 것이 있고 없는가 혹은 무엇이 있고 없는 가를 밝힐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이 개신교회식의 교회관은 의식과 성사에 치중하는 가톨릭을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교회관은 그리스도 신앙계시의 강생적 국면을 무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말(言)이 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는 교회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세계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실재적이고 가시적인 공동체로 형성된 회중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역상 안에서 지속되려면 제도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 교회관은 행동을 지나치게 등한시하고 증언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이 세상에서 보다 낳은 사회를 건설하고 또 이 노력에 협력해야 하는 신자의 사명이나 의무를 생각한다면 이 교회관은 너무 정적이다.
바티칸 공의회는 말씀의 신학적인 측면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나 약간은 다르다.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 안에도 현존하시니,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끝으로 ‘두 사람이나 혹은 세 사람이 나의 이름을 위하여 모인 곳에는 나도 그 가운데 있겠다’(마태 18,20)고 약속하신 대로, 성교회가 기도하거나 노래할 때 거기에도 그리스도께서는 현존하신다.”(전례7). 그러나 같은 항에서 성사 안에 현존 특히 성체성사 안에 현존을 언급하면서 간단히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