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현재와 미래

3. 교회의 현재와 미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 안에서 정치와 종교의 혼합은 본의도를 벗어난 것이다. 역사 안에서 약 1000년 이상 정교 일치라는 혼합이 있었다. 313년 이래 콘스탄티누스전환 이후로 천년이 넘게 지속된 정교 혼합은 원칙적으로 순수한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로마 황제들은 제국의 일치를 종교의 일치를 통하여 보존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한 니체아 공의회 소집. 그 당시 아리우스파의 분열의 조짐이 있자 니체아 공의회를 통한 종교 일치로 제국을 일치시키려 하였다.
또한 황제들은 종교적인 결정을 국가 권력의 뒷받침으로 내세웠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편승하여 이단을 분쇄하고 종교일치를 보존하려 하였다. 따라서 양대의 권위와 상호협력과 혼합은 국가를 위해서나 종교를 위해서나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국가적 종교적 일치는 이방인 종교, 이방인 문화를 절멸시켰다. 로마 제국 시대에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인은 이제 스스로 혹독한 박해 자가 된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유대인을 박해하고 또 종교전쟁을 일으키고 마녀를 학살하고 종교재판을 통해서 이단자를 처형하고 식민지를 점거하고 마침내 1864년 비오 9세 “오류에 관한 선언”에서 확인된 종교자유 금지로까지 이어진다(DS 2977).. 또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교회의 모든 문서 형식은 “누가 ~게 말하면 파문이다”, “누가 ~게 말하지 않으면 파문이다” 이런 형식이었다. “누가 종교 자유에 대해서 말하면 파문이다.” 이런 식으로 종교 자유를 금지하였다. 누가 이러이러한 것을 믿지 않으면 파문이다, 누가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면 파문이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런데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보면 이러한 정식을 포기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선언하는, 판결하는 정식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정식은 사뭇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이제 로마 가톨릭만이 유일무이한 교회,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하게 된다.

역사 안에서 보면 예수는 소외된 자를 찾고 그들 편이 됨으로써, 예수 스스로 이스라엘 기존 세력으로부터 소외되는 길을 택하였다.. 예를 들면 죄인들, 세리들, 온갖 병자들, 과부, 창녀들, 고아들, 이런 기존 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섰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예수를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소외시켜 버렸다(파문, 종교재판으로 사형). 또 기존의 국가 사회 세력도 소외시켜 버렸다. 교회의 이러한 아이러니컬한 측면을 우리는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를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았던 기존의 이스라엘의 역할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제와 교황의 협력은 역사 안에서 필연적으로 양자의 힘겨루기,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투쟁을 낳게 된다. 특히 이런 투쟁은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때부터 첨예하게 대립된다..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국가란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만 인정된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국가 권력자들은 교회의 신앙을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이럴 때 교회는 국가 권력자들의 교회 봉사 안에서 그 사람들에게 내적인 품위와 세상 권력의 정당성을 주게 된다. 한 마디로 정치 세력은 교회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은 계속 심화되어서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를 거쳐서. 그레고리오 7세는 회칙 “Dictatus papae”(교황의 독재)에서, 교황이 보편법의 증여자이며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교황은 새 법령을 반포할 수 있다. 황제를 임명하고 파면시킬 수 있다. 주교를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다. 절대권을 가진다는 말이다.
보니파시오 8세(1294-1303). 보니파시오 8세는 회칙 “Unam sanctam”을 통해서 로마 교황에게 종속되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에 이르러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하여, 교황권은 황제를 압도하고 명실공히 최고 권위에 앉게 된다.
그 와중에 로마 가톨릭은 동방교회와의 분열을 겪는다. 1054년에 쌍방 서로에게 파문을 선고한다. 분열의 원인을 대체로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신학의 차이이다. 동방 교회는 계속해서 신(新)플라토니즘의 영향에 있다. 서방교회는 로마법과 게르만적인 것의 특성을 갖는다. 이래서 신학적으로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게 된다(물론 근본적으로 같은 내용이지만). 두 번째로 황제의 역할에 차이가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의 주교들은 황제로부터 독립적이었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주교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맞서서 황제와 투쟁해왔다. 사실 유럽지도를 보면 대체로 알바니아쪽 특히 오스트리아를 기준으로 해서 오른쪽으로는 서방과 크게 다르다. 민족도 슬라브 민족, 서방은 위쪽이 게르만, 남유럽은 라틴이다. 서로 다른 민족적, 문화적 차이를 지니고 있다. 동방과 서방은 로마(473년 멸망)와 콘스탄티노플(1053년 멸망)을 중심으로 갈라지게 된다. 대체로 이런 신학적, 정치적인 차이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동방교회는 로마주교의 특별한 지위 즉 교회 내에서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거부한다. 그래서 어느 한 지역의 주교(로마)만이 교회의 전권을 가진다는 것을 거절한다. 로마 가톨릭도 콘스탄티노플 주교에 대해서 마찬가지 입장이다. 그래서 쌍방이 서로 거부하는 입장이다.

이런 정교혼합의 역사는,
로마제국시대는 황제나 교황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제국과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중세의 교황권은 황제와 대립하게 된다. 교황과 황제간에 힘겨루기가 진행되었다. 서로가 최고 지상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투쟁하게 된다. 그 와중에 교회도 심대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주 강력한 정교혼합(-무엇이 종교적인 요소이고 무엇이 정치, 사회적인 요소 인지의 구별이 모호한 정교혼합-)이 1000년 이상 동안 유럽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교혼합의 잔재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성직자들 사이에서 만연되어 있는 특권의식 같은 것).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토였던 “현대 세계로의 적응”(Aggiornamento) 개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 하니까 세상은 교회를 피한다. 이런 상황에서 더이상 지시하고 명령하는 입장에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모토 아래 “대화와 자성”이라는 구호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스스로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째로, “도대체 오늘날의 세상에서 새롭게 인간을 교회와 하느님과의 관계로 이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러한 질문은 2차 바티칸 공의회전부터 해 왔던 질문이었다.
둘째로, “도대체 교회가 일치를 잃지 않으면서 이런 중앙 집권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세째로, “도대체 전례로부터,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새로운 이해를 마련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교회에 대하여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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