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인 교회 건설-제2차 바티칸 공의회(준비와 과정)

준비와 과정

일의 추진을 위한 방법으로 공의회에서 토의할 삶의 각 분야별 초안을 작성할 준비 위원회의 설립이 필요했다. 이 준비 기간 동안 새로운 접근법이 개발되고 있다는 중요한 두 가지 조짐이 있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사무국이 교황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이 사무국이 40명의 참관인을 공의회에 초대했는데, 이 숫자는 공의회 기간 동안 100여명이 넘었다.
둘째로 저개발 국가들에서 로마로 온 많은 주교들이다.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42%나 되는 주교들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new ways of being the Church)을 찾고 있었다.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이 사실을 ‘세계교회가 이렇게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 하기 시작한 역사상 첫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저하게 부족했던 구성원들도 있었다; 평신도와 수녀는 참가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39명의 남녀 평신도와 9명의 수녀들이 참가했으나 청취자에 불과했다. 공의회는 2,500명의 주교들과 남자 수도회 장상들로 이루어진 지금까지 개최된 공의회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전체 4회기로 이루어졌고 1962-65까지 1년에 1회기씩 개최되었다. 각 회기는 8주간 씩 지속되었고 위원회에서 상정된 초안들을 토론하고 투표로 결정하였다.
영국 출신의 공의회 교부 중 한사람인 수도원장 크리스토퍼 버틀러(Abbot Christopher Butler)는 회기가 전개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의회의 초기에는 교회가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쇄신하게 될 것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3회기가 끝날 때쯤 우리는 이것이 피상적인 조정에 그치지 않고 급진적인 쇄신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가톨릭 신앙의 급진적인 재검토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것이 진보적인 소수의 견해일 뿐만이 아니라 공의회의 중심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은 공의회가 몇몇 초안들을 거부하고, 결국 준비 위원회가 작성한 어떤 초안도 없이 「현대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을 썼다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전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절정을 이룬 것이었다.
만약 교황 요한의 공의회가 교회를 바꾸었다면 그의 성격이 교황직을 바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쾌활했으나 조용했고 단순했으나 세련되었다; 그는 잘 웃고 농담을 잘 했으며 죄수들을 돌보고 종종 본당을 방문했다. 그는 아주 인간적인 교황으로서 세상을 단죄하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답례로 세상도 그를 사랑했다.
교황 요한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젊은 묜시뇰 데렉 월록(Derek Worlock)이 교황 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놀랍게도 교황은 그를 가까이 끌어당겨 강하게 포옹했다. 깊이 감동된 묜시뇰 월록이 막 떠난 후, 교황은 비서 신부를 보내 복도를 줄달음질쳐 젊은 묜시뇰을 뒤쫓게 하였다: 교황이 이르시기를, “그 젊은이에게 말하게, 내가 누구를 포옹할 때 그것은 진심이야”. 대주교 월록은 이 사건을 되돌아 보면서 교황의 그 말씀은 ‘모든 교회와 국가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회고했다.
교황 요한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한 보좌관에게 말했다, “내 사목의 비밀은 자네가 볼 수 있는 내 침대 저편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있다네. 십자가를 걸어 둔 것은 일어나자마자 보고, 잠들기 전에 보기 위해서라네. 똑바로 보게, 내가 보는 것 같이 보게나. 벌리고 있는 양팔은 내 직무의 계획표였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이 전부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어느 누구도 그분의 사랑과 용서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는 걸세.”
그의 일생의 사업은 그가 죽을 때 침상에서 하신 말씀에 간추려져 있다: “복음이 변화된 것은 아닐세; 우리가 복음을 보다 잘 이해하기 시작한 거지”

◈ 교황 바오로 6세(1898-1978)

교황 요한은 공의회의 1회기를 마치고 돌아가셨고 밀라노의 대주교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가 승계 했다. 그는 양식 있고 풍족한 집안 출신으로 그의 선임자 보다 냉정했다. 어쨌든 그는 선임자의 정신을 따라 공의회를 계속했고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다.

교회가 공의회의 개혁을 실행했을 때 어떤 이들은 교황 바오로는 너무 빠르다고 했고 또다른 이들은 너무 느리다고 했다. 이것이 그를 몹시 괴롭혔다. 그러나 공의회의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일들을 정직하고 겸손 되이 수행했다.

여러 가지 교황직 수행의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1968년에 발표한 「인간 생명에 관하여(On Human life)」라는 회칙에 대한 소란스런 반응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교회의 인공적인 피임 반대를 확인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가장 지지를 받은 업적은 저개발 국가들에 대한 격려,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회칙들의 반포와 방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단연 돋보이는 것들은 남미 방문과 유엔 총회의 연설; 성공회와 가톨릭의 대화를 위한 위원회 설립; 발에 입을 맞추며 맞이한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 총주교와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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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준비와 과정

    일의 추진을 위한 방법으로 공의회에서 토의할 삶의 각 분야별 초안을 작성할 준비 위원회의 설립이 필요했다. 이 준비 기간 동안 새로운 접근법이 개발되고 있다는 중요한 두 가지 조짐이 있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사무국이 교황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이 사무국이 40명의 참관인을 공의회에 초대했는데, 이 숫자는 공의회 기간 동안 100여명이 넘었다.
    둘째로 저개발 국가들에서 로마로 온 많은 주교들이다.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42%나 되는 주교들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new ways of being the Church)을 찾고 있었다.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이 사실을 ‘세계교회가 이렇게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 하기 시작한 역사상 첫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저하게 부족했던 구성원들도 있었다; 평신도와 수녀는 참가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39명의 남녀 평신도와 9명의 수녀들이 참가했으나 청취자에 불과했다. 공의회는 2,500명의 주교들과 남자 수도회 장상들로 이루어진 지금까지 개최된 공의회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전체 4회기로 이루어졌고 1962-65까지 1년에 1회기씩 개최되었다. 각 회기는 8주간 씩 지속되었고 위원회에서 상정된 초안들을 토론하고 투표로 결정하였다.
    영국 출신의 공의회 교부 중 한사람인 수도원장 크리스토퍼 버틀러(Abbot Christopher Butler)는 회기가 전개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의회의 초기에는 교회가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쇄신하게 될 것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3회기가 끝날 때쯤 우리는 이것이 피상적인 조정에 그치지 않고 급진적인 쇄신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가톨릭 신앙의 급진적인 재검토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것이 진보적인 소수의 견해일 뿐만이 아니라 공의회의 중심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은 공의회가 몇몇 초안들을 거부하고, 결국 준비 위원회가 작성한 어떤 초안도 없이 「현대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을 썼다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전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절정을 이룬 것이었다.
    만약 교황 요한의 공의회가 교회를 바꾸었다면 그의 성격이 교황직을 바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쾌활했으나 조용했고 단순했으나 세련되었다; 그는 잘 웃고 농담을 잘 했으며 죄수들을 돌보고 종종 본당을 방문했다. 그는 아주 인간적인 교황으로서 세상을 단죄하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답례로 세상도 그를 사랑했다.
    교황 요한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젊은 묜시뇰 데렉 월록(Derek Worlock)이 교황 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놀랍게도 교황은 그를 가까이 끌어당겨 강하게 포옹했다. 깊이 감동된 묜시뇰 월록이 막 떠난 후, 교황은 비서 신부를 보내 복도를 줄달음질쳐 젊은 묜시뇰을 뒤쫓게 하였다: 교황이 이르시기를, “그 젊은이에게 말하게, 내가 누구를 포옹할 때 그것은 진심이야”. 대주교 월록은 이 사건을 되돌아 보면서 교황의 그 말씀은 ‘모든 교회와 국가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회고했다.
    교황 요한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한 보좌관에게 말했다, “내 사목의 비밀은 자네가 볼 수 있는 내 침대 저편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있다네. 십자가를 걸어 둔 것은 일어나자마자 보고, 잠들기 전에 보기 위해서라네. 똑바로 보게, 내가 보는 것 같이 보게나. 벌리고 있는 양팔은 내 직무의 계획표였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이 전부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어느 누구도 그분의 사랑과 용서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는 걸세.”
    그의 일생의 사업은 그가 죽을 때 침상에서 하신 말씀에 간추려져 있다: “복음이 변화된 것은 아닐세; 우리가 복음을 보다 잘 이해하기 시작한 거지”

    ◈ 교황 바오로 6세(1898-1978)

    교황 요한은 공의회의 1회기를 마치고 돌아가셨고 밀라노의 대주교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가 승계 했다. 그는 양식 있고 풍족한 집안 출신으로 그의 선임자 보다 냉정했다. 어쨌든 그는 선임자의 정신을 따라 공의회를 계속했고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다.

    교회가 공의회의 개혁을 실행했을 때 어떤 이들은 교황 바오로는 너무 빠르다고 했고 또다른 이들은 너무 느리다고 했다. 이것이 그를 몹시 괴롭혔다. 그러나 공의회의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일들을 정직하고 겸손 되이 수행했다.

    여러 가지 교황직 수행의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1968년에 발표한 「인간 생명에 관하여(On Human life)」라는 회칙에 대한 소란스런 반응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교회의 인공적인 피임 반대를 확인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가장 지지를 받은 업적은 저개발 국가들에 대한 격려,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회칙들의 반포와 방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단연 돋보이는 것들은 남미 방문과 유엔 총회의 연설; 성공회와 가톨릭의 대화를 위한 위원회 설립; 발에 입을 맞추며 맞이한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 총주교와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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