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Martin Luther(1493 – 1546)

 

2.3.  Martin Luther(1493 – 1546)


Luther는 1483. 11. 30.  Eisleben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Erfurt에서 공부하였다. 광부의 아들로서 중세후기 민중신심의 분위기를 겪으면서 자랐던 그는 법학자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1505(22세)년에  Augustin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507년에 사제품을 받는다. 그후  Wittenberg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1512). 성서학 강의 -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1512-1519) -를 하였다. 이 기간 중 Wittenberg 수도원 탑 안에 있는 방에서 일어난 ‘탑의 체험’이 그의 사상 기본 바탕에 주요한 토대가 된다. 로마서 1, 17 묵상도중 ‘의화’의 개념을 확신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정의’가 죄인에게 냉혹한 심판을 하는 ‘재판관적 정의’가 아니라, 성자를 믿는 죄인을 자비로써 의인으로 만드는 ‘은총의 정의’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탑의 체험 이후 가톨릭적 성사와 교회개념을 의심하게 되고 신앙 만으로의 의화에 대한 새로운 관념 형성하였다. 그는 점차 자신의 주관적 확신에 따라 성사적 표지가 은총을 중재한다는 전통적 인식을 버리고, 오직 은총의 중재는 신앙만으로(Sola fides) 이루어지며, 구원은 은총에 의해서만(Sola gratia) 가능하고, 여기에 결정적인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만(Sola scriptura)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렇게 해서 구원의 도구로서의 교회, 은총의 표지로서의 성사가 완벽하게 제외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종교개혁의 세 가지 기본 토대가 형성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직 신앙, 은총, 성서 이 세 가지 요소였다. 이것이 대체로 1519년까지였다. 그리고 곧바로 서방 가톨릭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분열의 발단은 대사문제였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대사를 통해 많은 모금(헌금, 기부금)을 하고 있었다. 또한 죄의 용서 대가로 많은 모금을 유도했다.  Luther는 이것을 상거래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1517. 10. 31. 대사의 본질과 사용을 발표했던 주교들(Magdeburg-Mainz, Brandenburg)과 몇몇의 학자 친구들에게 95개의 토론 명제를 보냈다.  Luther는 대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대사의 남용과 심히 거래적인 관념에 대해(예컨대 “동전이 상자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는 설교 등) 해명을 요청하고 절제를 주장했다. 그의 친구 Christoph Scheurl은  Luther의 양해도 없이 이 명제를 인쇄하여 전체 독일에 유포되게 하여 이것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대사 거래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전체 독일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던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Mainz의 대주교 Albrecht는  Luther에 회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Luther를 로마에 고발하였다. 대주교는 대사 설교를 중단할 수가 없었다. Fugger 은행으로부터 미리 선불 받은 거액을 대사로 인한 모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518년 로마에서  Luther에 대한 심의 시작되었다.  Luther는 로마에서 자신을 변명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그의 선제후 Sachsen의  Friedrich의 노력으로 Augusburg에 파견된 Cajetan추기경 앞에서 신문 받게 되었다. 여기서  Luther는 자신의 명제를 철회할 것을 거부하고 몸을 피신하여 교황에게 직접 공소하였다.


같은 시기, 이 논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가 신학자 Johannes Eck(1486-1543)였는데,  Eck는 그 논제가 대사자체의 비판을 훨씬 넘어서서 대사를 부여할 수 있는 교황의 권한, 교회의 성사적 기본구조 자체를 문제삼고 있음을 직시하였다. Leipzig토론회(1519)에서 Eck와  Luther가 대결하게 된다. 이미 대사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무류성, 교회의 성사가 문제였다.  Luther는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고 공의회의 무류성을 부정했다. Eck는 이러한 결과를 갖고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Luther에 대한 심의가 재개되었다. 로마는, 만일  Luther가 95개 논제 가운데 41개 오류 조목을 60일 내에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할 것이다는 결정을 내렸다(1520. 6. 15).


처음에  Luther는 중세 후기 교회의 여러 폐해들을 우려하고 개혁하려는 순수한 동기였고 우선 대사의 남용에 대한 자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폭넓게 팽배해있던 교회에 대한 불만 분위기와 세력과 합쳐지면서 순식간에 문제가 커져버렸다. 특히  Leipzig에서 Eck와의 토론이후  Luther는 처음으로 교회전체 문제를 깊이 숙고하였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지 어떤 중재자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돌연, 성사나 교계제도 모든 것이 오히려 하느님께로 나가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확신이 서자  Luther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Luther는 교황직과 교회 전체를 모든 과실과 함께 마구 공격하였다. 이제는 내적인 개혁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투쟁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의 3대 저서는 다음과 같다.


             ①그리스도교 개혁에 관해 독일 국가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


             ②교회의 바빌론 유폐에 대하여


             ③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Luther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오래 전부터 개혁이 요구되어오던 교회의 폐해의 급소를 감동적인 표현으로 들추어냈고 일반 사람들이 로마에 대해 가지고 있던 거부감의 대변자로 전면에 등장했다.  Luther는 수개월 사이에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1520. 12. 20. 로마에서 전달된 파문위협칙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교회와의 단절을 공적으로 드러냈다. 1521. 1. 3. 정식으로  Luther에 대한 파문이 로마에서 결정되었다. 뼈아픈 분열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독일 황제 Karl Ⅴ(1519-1556)는 황제로 선출될 당시 교황 Leo Ⅹ(1513-1521)로부터 격심한 반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 대관식 이후 처음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면해야 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Luther가 로마에서 파문되자 황제는 그에게 국가적 조치를 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Luther의 보호자였던 Sachsen의 선제후Friedrich의 주장을 받아들여  Luther를 Worms에서 신문하기로 하였다.


Luther는 개선장군처럼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Worms에 도착했다. 이제 황제와 대결하게 된 것이다.  Luther는 의회에서 잘 준비된 연설을 하였다.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주 오류를 범하였고 스스로 모순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르친 것 가운데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연설은 의회 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다음날 황제도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독일국가 황제들은 모두 죽기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아들들이었고 수호자였습니다. 그들의 후예인 나는 그들의 모범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자기 양심을 토대로 전체 그리스도교에 대항할 때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자체가 1500년이나 오류를 범해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ㆍㆍㆍ 나는 Luther를 처리하는데 주저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그의 말을 다시는 듣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그를 공공연한 이단자로 여겨 조치할 것입니다.”


이단자에 대한 황제의 조처는 그를 국가법밖에 두는 것이다. 아무나 그를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는다. Sachsen의 선제후 Friedrich는  Luther를 Wartburg으로 숨겼다. 황제는  Luther와 그의 신봉자들에게 국가적 처벌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Worms칙서). 이 결정은 시행되지 못했다. 자기가 내린 결정을 강력하게 실행해왔던 황제가 국외의 전쟁으로 인해 부득이 9년 동안이나 독일을 떠나 있어야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 동안  Luther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교리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우선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가톨릭교회를 공격하였다. 미사, 사제직, 독신제, 교황직, 수도자 신분 등등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새로운 인쇄술이 그것을 대량으로 유포시켰다.


독일 곳곳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Wittenberg주변은 극심했다.  Luther의 추종자들은 성당을 점령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를 폭행하였다(교회재산 강탈, 접수). 수도자들이 줄지어 수도원을 떠났고 Augustin회 독일관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사제들도 줄줄이 환속하였다. 그 와중에 Nürnberg의 글라라 수녀원은 온갖 박해에도 저항하여 끝까지 로마 가톨릭에 충실하였다. 1522년 은신생활에서 Wittenberg로 돌아온 Luther는 순회설교를 다녔다. 1524년 시토회 수녀였던 가타리나와 결혼하였다.


독일 제국의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교회를 습격하였다. 개혁을 빌미로 교회 재산을 탈취하기 위함이었다. 기사들은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였으나 대부분 격퇴되고 주동자들은 살해되었다.


1524년 이러한 불안한 사회조건과 Luther에 의해 자극된 농민들도 봉기했다. 농민들은 닥치는 대로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Luther는 농민들에게 평온과 인내를 요구하였으나 농민들의 폭거에 격분, 제후의 편으로 돌아서서 제후들을 부추겼다 : “지금은 칼과 분노의 시기이지 은총의 시기가 아니다. 닥치는 대로 찌르고 쳐부셔서 죽여라. 죽은 채 매달아 놓아라. 이것은 바로 신의 말씀에 따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전멸로 끝난 농민전쟁으로 하층 민중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은 크게 압박되었고    Luther에게 환멸을 느낀 농민들로 Luther는 많은 것을 잃었다. Luther는 농민들을 버리고 제후와 영주들을 택했다. 이제는 민중에 의한 영신적 교회는 포기되고 영주가 수장으로 종교 문제를 결정하는 제도적인 영방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1530년, 황제 Karl Ⅴ가 9년만에 독일로 돌아온 즉시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의 지지자들은 이미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신앙의 대립을 평화적인 협의로 극복하고자 한 황제는 1530년 Augusburg에서 제국회의를 개회하였다. Luther측에서 Luther의 동료요 친구였던 Philipp Melanchton(1497-1560)은 새신앙고백서인 ‘아욱스부르크 신조(Confessio Augustana)’를 작성하였고 가톨릭 측에서는 Eck를 중심으로 ‘아욱스부르크 반박서’*를 작성하여 이를 토대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담판에서 서로를 양보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치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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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Martin Luther(1493 – 1546)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3.  Martin Luther(1493 – 1546)

    Luther는 1483. 11. 30.  Eisleben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Erfurt에서 공부하였다. 광부의 아들로서 중세후기 민중신심의 분위기를 겪으면서 자랐던 그는 법학자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1505(22세)년에  Augustin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507년에 사제품을 받는다. 그후  Wittenberg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1512). 성서학 강의 -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1512-1519) -를 하였다. 이 기간 중 Wittenberg 수도원 탑 안에 있는 방에서 일어난 ‘탑의 체험’이 그의 사상 기본 바탕에 주요한 토대가 된다. 로마서 1, 17 묵상도중 ‘의화’의 개념을 확신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정의’가 죄인에게 냉혹한 심판을 하는 ‘재판관적 정의’가 아니라, 성자를 믿는 죄인을 자비로써 의인으로 만드는 ‘은총의 정의’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탑의 체험 이후 가톨릭적 성사와 교회개념을 의심하게 되고 신앙 만으로의 의화에 대한 새로운 관념 형성하였다. 그는 점차 자신의 주관적 확신에 따라 성사적 표지가 은총을 중재한다는 전통적 인식을 버리고, 오직 은총의 중재는 신앙만으로(Sola fides) 이루어지며, 구원은 은총에 의해서만(Sola gratia) 가능하고, 여기에 결정적인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만(Sola scriptura)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렇게 해서 구원의 도구로서의 교회, 은총의 표지로서의 성사가 완벽하게 제외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종교개혁의 세 가지 기본 토대가 형성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직 신앙, 은총, 성서 이 세 가지 요소였다. 이것이 대체로 1519년까지였다. 그리고 곧바로 서방 가톨릭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분열의 발단은 대사문제였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대사를 통해 많은 모금(헌금, 기부금)을 하고 있었다. 또한 죄의 용서 대가로 많은 모금을 유도했다.  Luther는 이것을 상거래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1517. 10. 31. 대사의 본질과 사용을 발표했던 주교들(Magdeburg-Mainz, Brandenburg)과 몇몇의 학자 친구들에게 95개의 토론 명제를 보냈다.  Luther는 대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대사의 남용과 심히 거래적인 관념에 대해(예컨대 “동전이 상자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는 설교 등) 해명을 요청하고 절제를 주장했다. 그의 친구 Christoph Scheurl은  Luther의 양해도 없이 이 명제를 인쇄하여 전체 독일에 유포되게 하여 이것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대사 거래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전체 독일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던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Mainz의 대주교 Albrecht는  Luther에 회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Luther를 로마에 고발하였다. 대주교는 대사 설교를 중단할 수가 없었다. Fugger 은행으로부터 미리 선불 받은 거액을 대사로 인한 모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518년 로마에서  Luther에 대한 심의 시작되었다.  Luther는 로마에서 자신을 변명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그의 선제후 Sachsen의  Friedrich의 노력으로 Augusburg에 파견된 Cajetan추기경 앞에서 신문 받게 되었다. 여기서  Luther는 자신의 명제를 철회할 것을 거부하고 몸을 피신하여 교황에게 직접 공소하였다.

    같은 시기, 이 논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가 신학자 Johannes Eck(1486-1543)였는데,  Eck는 그 논제가 대사자체의 비판을 훨씬 넘어서서 대사를 부여할 수 있는 교황의 권한, 교회의 성사적 기본구조 자체를 문제삼고 있음을 직시하였다. Leipzig토론회(1519)에서 Eck와  Luther가 대결하게 된다. 이미 대사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무류성, 교회의 성사가 문제였다.  Luther는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고 공의회의 무류성을 부정했다. Eck는 이러한 결과를 갖고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Luther에 대한 심의가 재개되었다. 로마는, 만일  Luther가 95개 논제 가운데 41개 오류 조목을 60일 내에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할 것이다는 결정을 내렸다(1520. 6. 15).

    처음에  Luther는 중세 후기 교회의 여러 폐해들을 우려하고 개혁하려는 순수한 동기였고 우선 대사의 남용에 대한 자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폭넓게 팽배해있던 교회에 대한 불만 분위기와 세력과 합쳐지면서 순식간에 문제가 커져버렸다. 특히  Leipzig에서 Eck와의 토론이후  Luther는 처음으로 교회전체 문제를 깊이 숙고하였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지 어떤 중재자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돌연, 성사나 교계제도 모든 것이 오히려 하느님께로 나가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확신이 서자  Luther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Luther는 교황직과 교회 전체를 모든 과실과 함께 마구 공격하였다. 이제는 내적인 개혁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투쟁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의 3대 저서는 다음과 같다.

                 ①그리스도교 개혁에 관해 독일 국가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

                 ②교회의 바빌론 유폐에 대하여

                 ③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Luther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오래 전부터 개혁이 요구되어오던 교회의 폐해의 급소를 감동적인 표현으로 들추어냈고 일반 사람들이 로마에 대해 가지고 있던 거부감의 대변자로 전면에 등장했다.  Luther는 수개월 사이에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1520. 12. 20. 로마에서 전달된 파문위협칙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교회와의 단절을 공적으로 드러냈다. 1521. 1. 3. 정식으로  Luther에 대한 파문이 로마에서 결정되었다. 뼈아픈 분열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독일 황제 Karl Ⅴ(1519-1556)는 황제로 선출될 당시 교황 Leo Ⅹ(1513-1521)로부터 격심한 반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 대관식 이후 처음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면해야 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Luther가 로마에서 파문되자 황제는 그에게 국가적 조치를 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Luther의 보호자였던 Sachsen의 선제후Friedrich의 주장을 받아들여  Luther를 Worms에서 신문하기로 하였다.

    Luther는 개선장군처럼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Worms에 도착했다. 이제 황제와 대결하게 된 것이다.  Luther는 의회에서 잘 준비된 연설을 하였다.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주 오류를 범하였고 스스로 모순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르친 것 가운데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연설은 의회 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다음날 황제도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독일국가 황제들은 모두 죽기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아들들이었고 수호자였습니다. 그들의 후예인 나는 그들의 모범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자기 양심을 토대로 전체 그리스도교에 대항할 때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자체가 1500년이나 오류를 범해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ㆍㆍㆍ 나는 Luther를 처리하는데 주저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그의 말을 다시는 듣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그를 공공연한 이단자로 여겨 조치할 것입니다.”

    이단자에 대한 황제의 조처는 그를 국가법밖에 두는 것이다. 아무나 그를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는다. Sachsen의 선제후 Friedrich는  Luther를 Wartburg으로 숨겼다. 황제는  Luther와 그의 신봉자들에게 국가적 처벌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Worms칙서). 이 결정은 시행되지 못했다. 자기가 내린 결정을 강력하게 실행해왔던 황제가 국외의 전쟁으로 인해 부득이 9년 동안이나 독일을 떠나 있어야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 동안  Luther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교리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우선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가톨릭교회를 공격하였다. 미사, 사제직, 독신제, 교황직, 수도자 신분 등등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새로운 인쇄술이 그것을 대량으로 유포시켰다.

    독일 곳곳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Wittenberg주변은 극심했다.  Luther의 추종자들은 성당을 점령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를 폭행하였다(교회재산 강탈, 접수). 수도자들이 줄지어 수도원을 떠났고 Augustin회 독일관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사제들도 줄줄이 환속하였다. 그 와중에 Nürnberg의 글라라 수녀원은 온갖 박해에도 저항하여 끝까지 로마 가톨릭에 충실하였다. 1522년 은신생활에서 Wittenberg로 돌아온 Luther는 순회설교를 다녔다. 1524년 시토회 수녀였던 가타리나와 결혼하였다.

    독일 제국의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교회를 습격하였다. 개혁을 빌미로 교회 재산을 탈취하기 위함이었다. 기사들은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였으나 대부분 격퇴되고 주동자들은 살해되었다.

    1524년 이러한 불안한 사회조건과 Luther에 의해 자극된 농민들도 봉기했다. 농민들은 닥치는 대로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Luther는 농민들에게 평온과 인내를 요구하였으나 농민들의 폭거에 격분, 제후의 편으로 돌아서서 제후들을 부추겼다 : “지금은 칼과 분노의 시기이지 은총의 시기가 아니다. 닥치는 대로 찌르고 쳐부셔서 죽여라. 죽은 채 매달아 놓아라. 이것은 바로 신의 말씀에 따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전멸로 끝난 농민전쟁으로 하층 민중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은 크게 압박되었고    Luther에게 환멸을 느낀 농민들로 Luther는 많은 것을 잃었다. Luther는 농민들을 버리고 제후와 영주들을 택했다. 이제는 민중에 의한 영신적 교회는 포기되고 영주가 수장으로 종교 문제를 결정하는 제도적인 영방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1530년, 황제 Karl Ⅴ가 9년만에 독일로 돌아온 즉시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의 지지자들은 이미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신앙의 대립을 평화적인 협의로 극복하고자 한 황제는 1530년 Augusburg에서 제국회의를 개회하였다. Luther측에서 Luther의 동료요 친구였던 Philipp Melanchton(1497-1560)은 새신앙고백서인 ‘아욱스부르크 신조(Confessio Augustana)’를 작성하였고 가톨릭 측에서는 Eck를 중심으로 ‘아욱스부르크 반박서’*를 작성하여 이를 토대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담판에서 서로를 양보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치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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