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지
AUGUSBURG 신조 (Confesio Augustana)
1530년 독일 황제 Karl 5세는 종교분열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던 독일의 일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Augusburg에서 독일 전체 제국회의를 소집, 이 회의를 통해 기존의 가톨릭과 루터의 추종자들간의 화해를 모색, 종교적 일치를 통해 제국의 일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루터는 파문 중이었으므로 제국회의에 참여 할 수 없었다. 루터는 동료요 친구인 Wittenberg대학 신학부 교수 Philipp Melanchton (1497-1560)으로 하여금 새로운 신앙 추종자들의 대표로 제국회의에 참여케 하였다. Melanchton은 제국회의에 참가하여 가톨릭과 토론하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Confesio Augustana – 이 신조는 개신교 전체를 위해 세계사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Melanchton은 회의에서 늘 타협하려 하였다. 근본적으로 Melanchton은 새 신앙을 가톨릭 신앙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신조에서 “이 신조는 가톨릭 교리 전체 안에 존재한다. 저자가 아는 한 이 신조에는 성서나 가톨릭 또는 로마교회에 위반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만 논쟁의 대상은 신앙이 아니라 생활방식이었다. 대체로 다섯 가지로 1.양형성체 배령 2. 대사폐지 3.고해 성사 강요 4.수도자 서원 5.주교의 지나친 재치권 폐지같은 개혁의 요구였다.
Melanchton은 Augusburg에서 체재하던 교황사절 추기경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교황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열을 원하지 않고 로마교회와 하 등의 다른 교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식에서 사소한 차이가 일치를 방해할지언정 교회가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와 로마교회에 충실할 것입니다.”
이러한 화해의 자세는 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Karl 5세도 이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양측은 담판에서 서로 양보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치와 최대한의 타협, 자신의 요구를 최소화하기로 하였고 누구보다도 황제 자신이 그것을 변호하였다. 마침내 5개조항만이 논점으로 남게되었다.
당시 가톨릭측 가장 큰 신학자의 하나인 가예타노 추기경은 이러한 조항들은 규율에 불과하고 신앙문제가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고 Melanchton측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그 결정은 결국 다음 공의회가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일치가 회복되는 듯 기대하였다. 그러나 Luther는 Melanchton의 양보를 신랄히 비난, 모든 토론 거부, 결국 Melanchton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담판이 결렬되었다.
Confesio Augustana는 Melanchton의 작품이다. 루터에게 비난은 받았지만 오늘날까지 개신교의 공식 신앙 고백서요 교리서가 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제 막 생겨나는 새로운 신앙 추종자들 사이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치의 준거점이 없으면 모두들 저마다 자기 신조대로 갈라질 수밖에 없고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불안 심리가 이 신조를 지켜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신앙이 저마다 생겨나는 시대가 되었다. 온갖 신흥 종파들이 저마다 참된 교회를 표방하고 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분열은 근본적으로 인간 전체를 위해 불행하다. (참고, 웨스터 민스트 신앙 고백서 – 장로교파 신앙 고백서로 1647년 영국에서 Augusburg신조를 토대로 작성. 1972년부터 한국 장로 교회 공식 신앙 고백서로 채택)
황제가 그것을 변호하였다. 마침내 이견은 다섯 가지로 좁혀졌다(평신도의 성체 배령, 사제의 결혼, 수도자의 서원,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약탈한 교회재산의 반환, 미사성제의 희생적 성격). 루터는 Melanchton의 양보를 신랄히 비난했고 Melanchton은 흔들렸다. 담판은 좌절되고 의회는 프로테스탄트에게 미결의 차이점은 가톨릭교리에 동의하도록 결정,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체결, 황제에 대항하려 하였다. 황제로서는 상호의 양해 이외에 더 바랄 것이 없었으나 결국 무력으로밖에는 일치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황제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뛰어난 외교적, 군사적 수완으로 1547년 슈말칼덴 동맹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어려운 상대를 제압, 이 와중에 루터는 1546년 사망, 영국왕 헨리 8세는 1547년에,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도 1547년에 사망하였다. 주요한 적대자였던 로마 교황들은 그때까지도 로마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독일의 상황이 로마 교황들에게는 아직까지 대수롭지 않았다. Karl 5세가 독일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교황들은 수수방관하였다. 교황은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신의 대리자로 모든 이가 그 앞에 무릎꿇어 마땅했다. 특히 Karl이 슈말칼덴 동맹과 전쟁 중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도와주지 않았다. 황제는 독일의 종교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결심을 하였다.
1547년 Augusburg제국회의에서 자신의 해결안을 제시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 측도 가톨릭측도 불만이었다. 황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종파에 관계없이 번져갔다. 영주들도 다시 황제에 대항했다. Karl은 점차 힘을 잃고 결국 양측의 일치 노력을 포기, 1555년 Augusburg종교회의를 통해 양측의 공존을 결정, 1 독일의 가톨릭과 루터파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존한다. 2 영주는 자기 영지의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신하들은 종교적 확신에 따라 이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독일의 분열은 고정되었고 루터교는 신속히 전파되었다. 독일 전체의 절반(주로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지역은 완전히 루터교가 되었다.
Luther 이외의 개혁가들은 독일개혁을 보고 자극, 영향을 받음.

별지
AUGUSBURG 신조 (Confesio Augustana)
1530년 독일 황제 Karl 5세는 종교분열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던 독일의 일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Augusburg에서 독일 전체 제국회의를 소집, 이 회의를 통해 기존의 가톨릭과 루터의 추종자들간의 화해를 모색, 종교적 일치를 통해 제국의 일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루터는 파문 중이었으므로 제국회의에 참여 할 수 없었다. 루터는 동료요 친구인 Wittenberg대학 신학부 교수 Philipp Melanchton (1497-1560)으로 하여금 새로운 신앙 추종자들의 대표로 제국회의에 참여케 하였다. Melanchton은 제국회의에 참가하여 가톨릭과 토론하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Confesio Augustana – 이 신조는 개신교 전체를 위해 세계사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Melanchton은 회의에서 늘 타협하려 하였다. 근본적으로 Melanchton은 새 신앙을 가톨릭 신앙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신조에서 “이 신조는 가톨릭 교리 전체 안에 존재한다. 저자가 아는 한 이 신조에는 성서나 가톨릭 또는 로마교회에 위반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만 논쟁의 대상은 신앙이 아니라 생활방식이었다. 대체로 다섯 가지로 1.양형성체 배령 2. 대사폐지 3.고해 성사 강요 4.수도자 서원 5.주교의 지나친 재치권 폐지같은 개혁의 요구였다.
Melanchton은 Augusburg에서 체재하던 교황사절 추기경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교황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열을 원하지 않고 로마교회와 하 등의 다른 교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식에서 사소한 차이가 일치를 방해할지언정 교회가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와 로마교회에 충실할 것입니다.”
이러한 화해의 자세는 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Karl 5세도 이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양측은 담판에서 서로 양보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치와 최대한의 타협, 자신의 요구를 최소화하기로 하였고 누구보다도 황제 자신이 그것을 변호하였다. 마침내 5개조항만이 논점으로 남게되었다.
당시 가톨릭측 가장 큰 신학자의 하나인 가예타노 추기경은 이러한 조항들은 규율에 불과하고 신앙문제가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고 Melanchton측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그 결정은 결국 다음 공의회가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일치가 회복되는 듯 기대하였다. 그러나 Luther는 Melanchton의 양보를 신랄히 비난, 모든 토론 거부, 결국 Melanchton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담판이 결렬되었다.
Confesio Augustana는 Melanchton의 작품이다. 루터에게 비난은 받았지만 오늘날까지 개신교의 공식 신앙 고백서요 교리서가 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제 막 생겨나는 새로운 신앙 추종자들 사이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치의 준거점이 없으면 모두들 저마다 자기 신조대로 갈라질 수밖에 없고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불안 심리가 이 신조를 지켜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신앙이 저마다 생겨나는 시대가 되었다. 온갖 신흥 종파들이 저마다 참된 교회를 표방하고 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분열은 근본적으로 인간 전체를 위해 불행하다. (참고, 웨스터 민스트 신앙 고백서 – 장로교파 신앙 고백서로 1647년 영국에서 Augusburg신조를 토대로 작성. 1972년부터 한국 장로 교회 공식 신앙 고백서로 채택)
황제가 그것을 변호하였다. 마침내 이견은 다섯 가지로 좁혀졌다(평신도의 성체 배령, 사제의 결혼, 수도자의 서원,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약탈한 교회재산의 반환, 미사성제의 희생적 성격). 루터는 Melanchton의 양보를 신랄히 비난했고 Melanchton은 흔들렸다. 담판은 좌절되고 의회는 프로테스탄트에게 미결의 차이점은 가톨릭교리에 동의하도록 결정,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체결, 황제에 대항하려 하였다. 황제로서는 상호의 양해 이외에 더 바랄 것이 없었으나 결국 무력으로밖에는 일치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황제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뛰어난 외교적, 군사적 수완으로 1547년 슈말칼덴 동맹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어려운 상대를 제압, 이 와중에 루터는 1546년 사망, 영국왕 헨리 8세는 1547년에,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도 1547년에 사망하였다. 주요한 적대자였던 로마 교황들은 그때까지도 로마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독일의 상황이 로마 교황들에게는 아직까지 대수롭지 않았다. Karl 5세가 독일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교황들은 수수방관하였다. 교황은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신의 대리자로 모든 이가 그 앞에 무릎꿇어 마땅했다. 특히 Karl이 슈말칼덴 동맹과 전쟁 중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도와주지 않았다. 황제는 독일의 종교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결심을 하였다.
1547년 Augusburg제국회의에서 자신의 해결안을 제시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 측도 가톨릭측도 불만이었다. 황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종파에 관계없이 번져갔다. 영주들도 다시 황제에 대항했다. Karl은 점차 힘을 잃고 결국 양측의 일치 노력을 포기, 1555년 Augusburg종교회의를 통해 양측의 공존을 결정, 1 독일의 가톨릭과 루터파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존한다. 2 영주는 자기 영지의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신하들은 종교적 확신에 따라 이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독일의 분열은 고정되었고 루터교는 신속히 전파되었다. 독일 전체의 절반(주로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지역은 완전히 루터교가 되었다.
Luther 이외의 개혁가들은 독일개혁을 보고 자극, 영향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