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에 대한 요약 및 평가



〈 요약 〉


여러분의 젊음은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미래로 열려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희망은 그리스도교적이고도 인간적인 덕행으로서 인간의 행복에 대한 기대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는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소원한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젊은이와 만나는 많은 대목 중 마르10,17-22의 기사는 특별한 의미를 전한다. 즉,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있어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젊음에 관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젊음이라는 특별한 보화를 지닌 이들은 자신의 실존과 더불어 제시되는 인간 근본적인 이 물음에 답변해 주실 적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한다. 이 젊음은 유년기와 구분되며 또 완전한 성숙한 시기와도 구분된다. 이 시기는 ‘나’를 발견하는 시기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완전한 가치와 온전한 의미를 찾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게 되는 시기이다. 또한 사회환경이나 선천적 결함으로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 중에 있는 젊은이에게도 이 물음을 똑 같이 제기 된다. 복음서의 내용을 조금 풀어 본다면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나의 삶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겠습니까?’ 라는 물음에 그리스도의 답변은 선하신 하느님만이 모든 가치의 궁극적인 토대이며 우리 인간 실존에 대한 궁극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선하신 하느님만이 모든 물음에 합당한 답을 주실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물음의 원인과 토대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을 사랑하시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없이 인간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하느님을 떠나서는 자기를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젊음은 죽음과 거리가 먼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으나 젊음이 인생 전체의 계획이라 볼 때 그 계획은 의미와 가치 판단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에 젊은 시절 종말에 관한 물음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문명, 과학기술, 여러 가지 세계관, 이념들 속에 있는 현대의 젊은이들도 복음서의 그 젊은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 해야한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내적인 자유를 지니며 영원한 생명에 관해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없이 거듭거듭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 나라를 전설 해야하는 인간의 소명과 본질적 관계를 지닌 ‘도덕법전’은 시나이산의 십계명, 산상수훈, 사랑의 계명 외에도 다른 형태로 인간의 양심 안에 도덕률로 자리잡고 있다. 모든 인간은 어려서부터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전인생의 계획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이 양심의 올바름에 달려있다. 이 양심은 모든 세대, 문화와 역사 위에 있으며, 이 내적 보화인 양심을 통해 인간은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도덕적 의식 상태와 양심의 상태를 여러분에게 묻고 계신다. 또한 여러분은 이미 관련되어 있거나 앞으로 관련되어질 모든 공동체와 인간관계 안에서 막중한 공헌을 하길 바라고 또 할 수 있으며 해야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은 인간을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개방시켜 줌으로써 다른 이들과 하나가 되도록 한다. 복음의 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의 계명 안에서,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 모든 선을 이웃에게 해주기를 의무 짓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내면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확인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모든 인간을 사랑의 시선으로 유심히 바로 보시고 대견해 하시는 그분의 시선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으며,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어 영원히 사랑 받고있다는 사살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 모욕당하고 짓밟힐 때, 그 시련과 굴욕과 박해와 좌절의 순간에 그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것이다.


한 인간의 도덕적인 양심, 나아가 자신의 전생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젊은이의 양심 안에는 그이상의 무엇에 대한 열망이 감추어져 있다. 사라져 가는 현세의 가치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리스도께서는 계명들에다 새롭고도 복음적인 가치를 부여하신다. 즉, 그리스도교 도덕률의 계명은 복음적인 권고로써 완성된다. 이 권고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구체적이고 특별한 방법으로 드러내신다. 계명을 따르는 삶에서 은총을 깨닫는 삶에로 옮겨진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성소인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로 나타난다. 이시대는 더욱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내고,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그리스도의 배우자적인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을 필요로 한다. ‘나를 따르라’는 이와 같은 부르심은 젊은 시절에 때로는 어려서부터 들이는 까닭에 여러분은 이 특별한 성소들을 위해 기도하며, 또한 스승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성소는 하느님께서 모든 각 사람에게 하나의 과업을 부여하시는 것으로 ‘삶의 성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특히 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소에 대하여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에 국한된 시야를 넓혀주고 있다. 즉, 공의회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성화 성소의 보편성인 그리스도인의 성소로서 복음적인 부르심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모든 삶의 성소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소인 한, 교회의 성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삶의 성소는 우리 신앙의 성사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는 그 중요성이 더하다. 또한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됨으로 인해 경험적이고도 창조적인 방법으로 모든 젊은 남녀의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결과로 결혼성소의 길을 들어서게 되는 경우 그들은 혼인 성사의 위대한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신비를 통해 그들은 부부의 사랑을 배우고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은 위대한 모험일 수 있으나 또한 거대한 과업이기도하다. 그런데 오늘날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교 윤리는 ‘진보적’이고 ‘현대적’이라는 미명아래 사회 환경 안에서 왜곡되고 변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대한 사랑의 내용(부부의 사랑) 그 전체가 ‘환락’으로 격하되고 이것은 양당사자 모두가 기쁨을 누린다해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것이며, 자녀들은 갈수록 귀찮은 부수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왜곡된 부부의 사랑에서 교회와 인류는 여러분 젊은이들이 그 사랑의 재생을 가져오리라고 믿는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개방되어 있기에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보다 폭 넓고 광범위한 조국이라는 사회의 공동선에 참여한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와 가정, 민족과 국가를 통하여 창조주로부터 재능을 받았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인 유산을 받아들여 이를 확인하고 유지하고 증대시키도록 해야한다. 또한 여러분의 재능과 역량은 노동을 통하여 발휘되어진다. 그런데 젊은 시기를 특징짓는 노동은 무엇보다도 성인의 노동을 위한 준비이며, 그러기에 그 노동은 학교, 교육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교육은 인간 문명의 기본적인 혜택으로써 사회 전체의 미래이기도하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 지성의 빛인 진리에 대한 봉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봉사는 또한 여러분이 교육 과정을 다 마친 후에 부름 받을 그 노동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써 젊은이들이 실업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경제적 사회적으로 노동을 보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젊은이들 각자가 자신에 대한 자아교육의 노고를 떠맡고 있지 않는 한, 가정과 학교 교육은 모두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자아교육의 핵심은 젊은이들에게 천부적으로 지닌 ‘진리 의식’이며 이 진리는 자유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자유는 그 자체 안에 진리의 규준과 진리의 기강을 담고 있으며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아교육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즉, 신랄한 냉소주의, 회의주의, 광고 기술의 악용, 소비주의 등 많은 것들로부터 유혹 받고 있다. 행복과 의미를 찾는 여러분들의 열정과 역량을 오도하고 착취하려는 세상의 거짓에 대항하여 여러분 자신을 지켜야할 것이다.


젊음은 또한 ‘성장’이다. 이는 ‘몸’의 성장과 함께 지혜와 은총의 성장이 따라야 한다. 이것을 위해 먼저, 눈에 볼 수 있는 세계, 자연과의 접촉이 대단히 중요하다. 자연과의 만남은 창조의 신비를 깨닫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에 흔히 따르게 되는 노고와 노력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성장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분을 지혜가 자라게 해야한다. 이것은 비판적인 판단 능력과 분별력을 가져다주며 다른 이간들을 아는 법과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또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성장을 권고한다. 하느님을 만나는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이며 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보다 교회는 특별한 방법으로 젊은이들 안에서 그 자신을 보고 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은 교회의 희망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은 현실의 상황에 ‘왜?’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살고 있고 내일의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할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변혁시킬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물어야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체험 안에서 복음 전체가 확인되는 것이며 또한 젊은이와 그리스도의 대화 속에 내포된 진리를 확인하고 있다. 여러분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분열도 갈등도 차별도 없는 모든 사람들의 순수한 형제애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있다. 이 형제애를 향한 열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면 이것이 곧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산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강하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알고 있기에 또 죄악을 거슬러 투쟁하기에 강하다.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아 갈 때 죄악의 원천과 그 공작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점진적으로 세계의 변화에 그 변혁에 성공하여, 더욱 인간적이고 보다 형제적인 세계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께 더욱 맞갖는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교회는 젊은이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기를” 기도하고 있다. 교회의 미래는 젊은이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책임을 적극 떠맡아라.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현대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여러분 앞에 놓인 책임을 맡기를 당부한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에 대한 요약 및 평가

    〈 요약 〉

    여러분의 젊음은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미래로 열려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희망은 그리스도교적이고도 인간적인 덕행으로서 인간의 행복에 대한 기대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는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소원한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젊은이와 만나는 많은 대목 중 마르10,17-22의 기사는 특별한 의미를 전한다. 즉,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있어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젊음에 관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젊음이라는 특별한 보화를 지닌 이들은 자신의 실존과 더불어 제시되는 인간 근본적인 이 물음에 답변해 주실 적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한다. 이 젊음은 유년기와 구분되며 또 완전한 성숙한 시기와도 구분된다. 이 시기는 ‘나’를 발견하는 시기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완전한 가치와 온전한 의미를 찾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게 되는 시기이다. 또한 사회환경이나 선천적 결함으로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 중에 있는 젊은이에게도 이 물음을 똑 같이 제기 된다. 복음서의 내용을 조금 풀어 본다면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나의 삶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겠습니까?’ 라는 물음에 그리스도의 답변은 선하신 하느님만이 모든 가치의 궁극적인 토대이며 우리 인간 실존에 대한 궁극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선하신 하느님만이 모든 물음에 합당한 답을 주실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물음의 원인과 토대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을 사랑하시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없이 인간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하느님을 떠나서는 자기를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젊음은 죽음과 거리가 먼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으나 젊음이 인생 전체의 계획이라 볼 때 그 계획은 의미와 가치 판단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에 젊은 시절 종말에 관한 물음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문명, 과학기술, 여러 가지 세계관, 이념들 속에 있는 현대의 젊은이들도 복음서의 그 젊은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 해야한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내적인 자유를 지니며 영원한 생명에 관해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없이 거듭거듭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 나라를 전설 해야하는 인간의 소명과 본질적 관계를 지닌 ‘도덕법전’은 시나이산의 십계명, 산상수훈, 사랑의 계명 외에도 다른 형태로 인간의 양심 안에 도덕률로 자리잡고 있다. 모든 인간은 어려서부터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전인생의 계획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이 양심의 올바름에 달려있다. 이 양심은 모든 세대, 문화와 역사 위에 있으며, 이 내적 보화인 양심을 통해 인간은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도덕적 의식 상태와 양심의 상태를 여러분에게 묻고 계신다. 또한 여러분은 이미 관련되어 있거나 앞으로 관련되어질 모든 공동체와 인간관계 안에서 막중한 공헌을 하길 바라고 또 할 수 있으며 해야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은 인간을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개방시켜 줌으로써 다른 이들과 하나가 되도록 한다. 복음의 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의 계명 안에서,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 모든 선을 이웃에게 해주기를 의무 짓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내면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확인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모든 인간을 사랑의 시선으로 유심히 바로 보시고 대견해 하시는 그분의 시선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으며,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어 영원히 사랑 받고있다는 사살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 모욕당하고 짓밟힐 때, 그 시련과 굴욕과 박해와 좌절의 순간에 그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것이다.

    한 인간의 도덕적인 양심, 나아가 자신의 전생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젊은이의 양심 안에는 그이상의 무엇에 대한 열망이 감추어져 있다. 사라져 가는 현세의 가치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리스도께서는 계명들에다 새롭고도 복음적인 가치를 부여하신다. 즉, 그리스도교 도덕률의 계명은 복음적인 권고로써 완성된다. 이 권고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구체적이고 특별한 방법으로 드러내신다. 계명을 따르는 삶에서 은총을 깨닫는 삶에로 옮겨진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성소인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로 나타난다. 이시대는 더욱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내고,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그리스도의 배우자적인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을 필요로 한다. ‘나를 따르라’는 이와 같은 부르심은 젊은 시절에 때로는 어려서부터 들이는 까닭에 여러분은 이 특별한 성소들을 위해 기도하며, 또한 스승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성소는 하느님께서 모든 각 사람에게 하나의 과업을 부여하시는 것으로 ‘삶의 성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특히 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소에 대하여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에 국한된 시야를 넓혀주고 있다. 즉, 공의회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성화 성소의 보편성인 그리스도인의 성소로서 복음적인 부르심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모든 삶의 성소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소인 한, 교회의 성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삶의 성소는 우리 신앙의 성사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는 그 중요성이 더하다. 또한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됨으로 인해 경험적이고도 창조적인 방법으로 모든 젊은 남녀의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결과로 결혼성소의 길을 들어서게 되는 경우 그들은 혼인 성사의 위대한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신비를 통해 그들은 부부의 사랑을 배우고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은 위대한 모험일 수 있으나 또한 거대한 과업이기도하다. 그런데 오늘날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교 윤리는 ‘진보적’이고 ‘현대적’이라는 미명아래 사회 환경 안에서 왜곡되고 변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대한 사랑의 내용(부부의 사랑) 그 전체가 ‘환락’으로 격하되고 이것은 양당사자 모두가 기쁨을 누린다해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것이며, 자녀들은 갈수록 귀찮은 부수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왜곡된 부부의 사랑에서 교회와 인류는 여러분 젊은이들이 그 사랑의 재생을 가져오리라고 믿는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개방되어 있기에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보다 폭 넓고 광범위한 조국이라는 사회의 공동선에 참여한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와 가정, 민족과 국가를 통하여 창조주로부터 재능을 받았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인 유산을 받아들여 이를 확인하고 유지하고 증대시키도록 해야한다. 또한 여러분의 재능과 역량은 노동을 통하여 발휘되어진다. 그런데 젊은 시기를 특징짓는 노동은 무엇보다도 성인의 노동을 위한 준비이며, 그러기에 그 노동은 학교, 교육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교육은 인간 문명의 기본적인 혜택으로써 사회 전체의 미래이기도하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 지성의 빛인 진리에 대한 봉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봉사는 또한 여러분이 교육 과정을 다 마친 후에 부름 받을 그 노동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써 젊은이들이 실업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경제적 사회적으로 노동을 보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젊은이들 각자가 자신에 대한 자아교육의 노고를 떠맡고 있지 않는 한, 가정과 학교 교육은 모두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자아교육의 핵심은 젊은이들에게 천부적으로 지닌 ‘진리 의식’이며 이 진리는 자유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자유는 그 자체 안에 진리의 규준과 진리의 기강을 담고 있으며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아교육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즉, 신랄한 냉소주의, 회의주의, 광고 기술의 악용, 소비주의 등 많은 것들로부터 유혹 받고 있다. 행복과 의미를 찾는 여러분들의 열정과 역량을 오도하고 착취하려는 세상의 거짓에 대항하여 여러분 자신을 지켜야할 것이다.

    젊음은 또한 ‘성장’이다. 이는 ‘몸’의 성장과 함께 지혜와 은총의 성장이 따라야 한다. 이것을 위해 먼저, 눈에 볼 수 있는 세계, 자연과의 접촉이 대단히 중요하다. 자연과의 만남은 창조의 신비를 깨닫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에 흔히 따르게 되는 노고와 노력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성장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분을 지혜가 자라게 해야한다. 이것은 비판적인 판단 능력과 분별력을 가져다주며 다른 이간들을 아는 법과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또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성장을 권고한다. 하느님을 만나는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이며 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보다 교회는 특별한 방법으로 젊은이들 안에서 그 자신을 보고 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은 교회의 희망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은 현실의 상황에 ‘왜?’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살고 있고 내일의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할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변혁시킬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물어야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체험 안에서 복음 전체가 확인되는 것이며 또한 젊은이와 그리스도의 대화 속에 내포된 진리를 확인하고 있다. 여러분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분열도 갈등도 차별도 없는 모든 사람들의 순수한 형제애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있다. 이 형제애를 향한 열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면 이것이 곧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산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강하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알고 있기에 또 죄악을 거슬러 투쟁하기에 강하다.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아 갈 때 죄악의 원천과 그 공작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점진적으로 세계의 변화에 그 변혁에 성공하여, 더욱 인간적이고 보다 형제적인 세계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께 더욱 맞갖는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교회는 젊은이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기를” 기도하고 있다. 교회의 미래는 젊은이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책임을 적극 떠맡아라.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현대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여러분 앞에 놓인 책임을 맡기를 당부한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