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 章 敎會의 構造-사제, 평신도, 수도자(수도자-수도생활 쇄신 방향)

 

1.4.3.4. 수도생활 쇄신 방향


수도신분을 개인적인 완덕의 신분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의 증인이라고 보는 교회헌장은 수도회쇄신의 기본 방향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수도회 쇄신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수도회의 적응이라는 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수도자 신원의 순수성을 재각성하는 것이다.


①자기 폐쇄에서 공동체 이념으로


교회의 종말적 증인이라는 수도 신분은 수도자가 개인적 수덕관에서부터 특히 교회의 예언직에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안에 어떤 별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수도회의 사명을 오해하고 있는 수도회도 있다. 수도신분의 사명을 정확이 인식하지 못하면 성직 신분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것을 가질 수도 있고 평신도에 대한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질 유혹이 있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헌장은 수도 신분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중간단계가 아님을 밝히고 교회내에 고유한 하나의 신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수도자 개인으로서는 착하고 희생적이면서도 어떤 회의 일원으로서는 말할 수없이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우리 수도회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집단 이기주의 태도의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성직자는 개인이 잘낫거나 못낫거나 그 신품성사로 교회의 직무를 담당한다. 교회의 직무를 예언직 사제직 왕직(사목직)으로 구별할 때 사제는 이 직무의 책임을 담당한다. 본당에서의 사목자는 본당 신부요 본당신부가 유고 일때는 평협회장이 본당 신부를 대리한다. 수도자는 사목선상의 책임자가 아님에도 본당에서 사목적 문제로 본당 신부와 수도자간에 다툼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구체적 개별 사안을 다 지적 할 수 없다. 요컨데 우리의 목표는 수도회의 쇄신이라는 것이다. 교회 쇄신의 초점은 신자 각각의 윤리적 개심이나 회두, 또는 성직자들의 악행이나 행정적 과오를 교정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교회에 대한 신원을 재각성하는데 있다. 수도회의 쇄신도 수도 신원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재각성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 수도회 공동체 이념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장차 완성될  교회의 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수도회 쇄신의 첫 자리라 할 것이다.




②세속주의로부터의 탈피


현대 문명과 과학의 발달, 고도의 정보화와 전문화는 수도회가 참여해왔던 기존 사회내에서의 역할에 새로운 도전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 수도자들이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로 공헌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수도자의 신분으로 세상의 전문가와 경쟁하기에는 이미 세상이 너무 커져 버렸다. 아지고 많은 수도자들이 현세적 사업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 교육, 의료, 언론, 기타, 자선 및 봉사 사업이 여전히 수도자들의 활동 무대요, 때때로 너무 깊이 관여하고 있는 현상도 속일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수도회는 수도회가 관여하는 사업의 정당성을 정확히 직시하고 또한 세속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교구 – ‘본당과 사업’갈등)


수도회 장상들은 그런 사업을 전해해야 수도회를 경제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유능한 인재를 구할수 있다는 명분으로 수도회의 내적인 소산, 영적인 소산보다 수도회 조직의 유지와 관리에 더욱 치중하는 경우도 있다. 평수도자들도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대한 깊은 인시과 무장보다 현실적으로 더욱 유능한 기능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분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경쟁속에 수도자간에 미묘한 갈등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하느님 사업을 한다는 명부능로 온갖 시간과 힘을 투자하면 사업의 성과는 얻을 수 일을지 몰라도 수도자의 유일한 재산인 하느님을 잃어 버릴 수 있다. 수도자간의 일치와 진정한 형제애를 잃어버리고 내적으로 갈갈이 찢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치원 하나 잘 해보겠다고 원장 신부와 싸우고 학부모들 들 볶고 본당과 미묘한 갈등을 일으켜 본당 신자들로부터 갈라 선다면 유치원은 잘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종교교육의 결정적중요성이라는 명분이 수도자라는 신분을 압도하고 있고 본당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 유치원을 자꾸 없애려고 하는가?) 모든 사업은 수도자신분의 보조 수단인 것이지 사업 자체에 매달리는 것은 비수도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안에는 모성, 감사, 명상. 아름다움의 신비, 한마디로 세상에서는 쓸모 없는 것으로 보이는 가치들의 신비가 살아 있다. 많은 수도자들이 행동의 이데올로기로 한정되어버린 교회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교회에는 신비적인, 영적인 체험이라고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행동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고 명상하기 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매달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쉴새없이 추구하고  매달려 얻는 성과에 만족한다. 이 성과를 지키고 더 크게 하기 위하여 또 추구하고  매달리는 순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를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에 비유. (세상의 논리 – 힘과 경쟁의 논리, 교회의 논리 – 십자가와 희생의 논리)


기도의 부족은 신앙을 냉각시킨다. 일차적으로 자신의 사고와 생활을 정지 정돈해 나아가야 한다.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묵상고 기도에 철저한 사람중에 가끔은 오히려 말할 수 없이 완고하고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관대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아심을 버리지 못한채 묵상과 기도에 시간을 할애할뿐인 결과이다. 반대로 묵상과 기도 보다는 안간관계의 중요성에 더욱 치중하는 사람이 타인에 너그럽고 인내심이 강하고 관대한 경우도 종종 본다. 이 경우는 임의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 두입장을 보고 균형을 찾아야 한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테라폰트와 조시마’; 옮긴 이 역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두 수도자를 지칭한다.)




③미래를 지향하는 신분의 표지


수도 신분이 미래에 완성될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이미 현세에서 증거하고 구현하는 것이라면 수도 생활은 단연코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찬 것이라야 한다. 수도자의 몫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있다.


그러나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어차피 현세를 피할 수 없고 현세 활동의 성공이나 실패 또한 피할수가 없다. 이 간격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사실 많은 수도자들이 참된 수도자로 살려면 현재 부득이 맡고 있는 직책들을 떠나야 한다고 양심적으로 느끼고 있다. 정상의 책임을 맡고 잇는 수도자는 어려움에 시달리는 나머지 차라리 평수도자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랄때도 있을 것이고 병원에서, 학교에서, 언론기관에서, 기타 여러단체에서 일하는 수도자들이 자신의 신원과 직책사이에서 갈등을 깊이 느끼고 고민하고 있다. 일에 시달려 내적으로는 황페화디고 있음을 느낀다. 내적인 고갈이 주는 공허함을 종종느끼는 것이다.


한편으로 수도자가 맡은 소임의 현실적 성공은 자기 만족을 자극하고 그 일에 몰두하려는 유혹을 가져다 주며 계속적인 성공은 그 자리에 수도자를 오랫동안 붙들어 둠으로써 진정한 자아 포기와 순명을 잃어버리게 할 위험이 있다. 마찬가지로 소임의 현실적 실패 또한 수도자로 하여금 용기를 잃게 하고 체면과 자존심을 살리려고 억지를 쓰게 하고 때로는 핑계와 변명꺼리를 찾게하고 마침내 스스로의 실의와 좌절을 부르게할 위험이 있다.


소임의 성공과 실패 모두 위험한 함정을 가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수도회에 더 큰 시련을 줄 수 있다. 수도자가 내면적 가치보다 능력있는 기능인으로 양성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현대의 고삐 풀린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이 시련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다.


많은 지원자들이 수도회에 들어와 신원을 이해하고 영적인  가치들을 깊이 체득하기도 전에 벌써 효과 있는 활동을 생각하고 있고,때로는 수도회장상들까지도 저 친구가 우리회에 무슨 기여를 할수 있는지부터 먼저 생각하는 수도 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느님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눈으로는 실패의 상징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부활의 도구로 삼았고 우리에게 희망으로 제시했다. 교회의 위치는 단연코 십자가 곁이어야 한다.


수도자는 허원으로 자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매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놀라움이 되고 희랍인에게는 조소거리가 되었지만 바오로에게는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현대의 풍토는 십자가를 알지 못한다. 편리함과 안일함, 허영에 바람이 들어 있는 현대인들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희망의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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