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그리스도인 봉사로서 선교
한 사람이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멸망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더이상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도 여전히 남아 있다. 구원에 이르는 여러 다른 길이 존재한다면 굳이 왜 선교라는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가의 문제가 첫번째로 제기된다. 우리는 이 Dilemma앞에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선택과 파견이라는 사상을 생각할 수 있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은 선교에의 봉사를 다음과 같이 핵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그리스도 신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1)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보화가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오직 한가지, 파견이다. 그리스도인 존재는 파견이라는 특성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타인을 위해 그리스도인이다. 자기 자신만을 알고 생각하는 이기성으로부터 나와 타인을 위해 사는 존재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존재의 근거가 된다. (인간 존재 두가지 ①흙 ②타인을 위한 존재)
사실 이스라엘 선택되었던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 보편성에로의 봉사에 있었다. 그리스도 또한 이 봉사의 신비를 그 죽음과 부활로서 채움으로써 온전히 우리 인간을 위한 존재라 되었다. 교회 또한 온전히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회 존립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인 또한 타자를 위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것,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개 그리스도인의 파견은 두 가지 동기를 가지고 있다 : 하나는 하느님 나라이고 또하나는 믿음, 희망과 사랑이 그것이다. 이러한 파견은 형제적인 봉사에 그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다. 사도직에로의 파견은 곧 선교를 지향한다. 사실 사도란 파견된 자(Gesandtes), 라틴말로는 선교사 (Missionar)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직이란 선교에로의 사명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은 이 파견, 선교에로의 명령과 결부되어 있는데, 이 부르심은 타인을 위한 봉사에 그 마지막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교 명령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은 예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실현하는데 있다.
이와 함께 교회라는 존재의 기능이 도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 업적을 역사안에 현존시키는 것이다’ 개개의 그리스도 신자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에 참여한다.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에로의 개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교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정당성을 가지지만 비그스도교 지역 특히 종교적 다원성이 존재하는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보다 신중한 태도가 요청된다. 이 다원주의는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를 포함하고 있고 새로운 타협과 조화를 요청한다. 무종교지역과는 달리 그리스도교는 고도의 종교와 대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만의 우월성이나 배타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서로 다른 차원을 깊이 사색해야 한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께로 이르는 자기 고유의 의미와 길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종교는 도일한 차원의 종교로 받아들여진다. 아시아 신학에서 이 선교 신학은 근본적인 테마로 문제되고 있다. 아시아 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선교는 비그리스도교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부식시키거나 비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교로 회개시키는 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다른 종교들과의 개방된 대화를 통해 우호적인 관계와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요청되었다. 이 지역에서의 선교는 먼저 이 지역의 그리스도교화라기 보다는 종교들 사이의 만남과 조화, 즉 인간과 역사의 원천이라는 공통점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나라에서 절박하게 요청된다. 한 종교의 배타적 주장이 사회적 평화와 공동체의 공존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증거를 배타적으로 부식하기를 고집 한다면 불가피하게 분쟁을 야기하게 되고 그리스도교는 배척받기 십상이다. 이것은 오히려 넓게 보아 선교에 역행하는 좁은 안목일 수 있다. 인내가 하나의 해결책이다. 선교 명령 앞에 우리는 겸허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나머지 모든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자리는 십자가 곁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