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배경
금세기 초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완전한 사회(perfect society)로서의 교회, 거짓된 세상 안에 종교적 진리를 간직한 제도(institution)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단적인 견해는 당국에서 내리는 규칙에 의하여 배척되었다. 어찌되었던 금세기 중엽에, 두 가지 발전이 이러한 교회에 대한 견해를 바꾸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이유로서 교회의 제도적 당국은 평신도들의 수동적인 협력보다는 능동적인 협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1920년 교황 비오 11세(Pius Ⅺ)는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이라 알려진 가톨릭 협의회의 결성을 장려하였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과 함께 가톨릭 산업조합, 가톨릭 소년 소녀단, 청년 신자 노동자단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촉진시켰다. 교황은 이것을 ‘교계적 사도직에 평신도의 협력과 참여’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평신도의 고유한 사도직의 이행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학분야에 있어서 초세기의 신학자들인 ‘교부들’의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도 역시 냉담한 세상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투쟁하던 시절에 살았다. 그들로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는 세상에 생명을 준다는 교회에 대한 성서 신학이 풍성히 나오게 되었다. 이 신학이 가톨릭 액션 분야의 실제적인 발전과 맞아떨어졌고 그리고 이것이 1943년 교황 비오 12세(Pius Ⅻ)의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대하여(Mystici Corporis Christi)’로 공식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교회의 자기 이해의 발전에 분수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자국을 재개종시키 위해서는 새로운 교회 방법들이 필요하다며 전교 대상국으로 선포하였다. 독일은 분열된 교회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발의는 동시에 두 방향을 연구함으로서 시작되었다. 하나는 원천에로 돌아가는 것(혹 그리스도교의 기원)이고 하나는 현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마리-도미니끄 세뉴(Marie-Dominique Chenu), 이브 꽁가르(Yves Congar) 그리고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신부들이 이 분야에서 획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프랑스의 세분의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은총과 자연의 관계, 평신도의 역할, 그리스도교의 일치, 교회 구조의 개혁 등을 논의했다. 그들은 그들의 연구를 당시에 가르치던 중세의 스콜라 신학의 언어와는 대단히 다른 성서와 교부들의 언어로 표현했다. 이 새로운 양식은 문제를 일으켰고 세 사람 모두 짧은 기간이나마 저술활동과 강의를 금지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마침내 드 뤼박은 추기경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