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3. 1. 공통 사제직(Sacerdotium commune)
종교 개혁 이후로 개신교 신학에서 모든 신자들이 보편적 사제직(Sacerdotium universale)을 주장하면서 교계의 직무 사제직을 부인하는데 대하여 가톨릭에서는 직무 사제직을 강조하였고, 소위 보편적 사제직이라는 것은 ‘루터의 우스꽝스러운 발견’(Scheffmacher)이라고 비꼬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은 ‘보편적’이라는 말 대신에 ‘공통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에 공통된 사제직이란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일반적 성격에 참여함을 뜻한다. 세례로써 인간은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자격을 얻고 견진으로 이 자격을 완성한다. 성서에서 흔히 신자는 성령의 날인을 받았다고 하는데(에페 1, 13), 이런 표현은 은총을 통하여 성령께서 신자에게 내주(內住)하심을 뜻하지만 부차적으로는 어떤 특정 자격을 받았음을 의미한다.1)
토마스는 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성사들은 다 인간을 죄악에서 정화하는 성화의 은총을 주지만, 어떤 성사는 하느님 예배를 담당하도록 인간을 속사에서 갈라놓는(consecrare) ‘인호’(印號)를 박아준다”(Sum. Theol. Ⅲ, q. 63, a. 6, ad 2). 이런 인호를 주는 성사는 세례와 견진과 신품성사인데 그 중에서도 세례는 기본적인 사제 자격을 주는 성사이다. 세례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합체되어 그리스도의 모든 은총과 사명에 참여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드리는 제사에 유권적으로 참여하는 공동 집전자가 되는 것이다.2)
세례 성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 모든 신자는 평신도나 성직자나 다 같이 교회의 공통 사제직에 참여한다. 성직자도 신자임에는 틀림없다. 모든 신자는 신자가 된 그 순간부터 자기의 생명과 자기 주위에 있는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 하느님께 바칠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3) 옛 이스라엘 백성이 사제적 백성으로 선택되었을 때에는 아주 세밀한 제사 법규를 받았다. 그들은 추수한 첫 열매나 짐승의 맏배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사의 본 뜻을 망각하고 형식적 제례(祭禮)에 빠졌을 때에 예언자들은 물질은 바치는 제례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이사 56, 7; 예레 33, 11), 하느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물질이 아니고 인간 자신의 봉헌임을 강조한다.4) 그래서 그리스도교 모든 신자는 ‘자기 생활 속에서’ 십자가상의 제사를 계속해야 한다. 이것으로 자신의 희생을 제물로 바치는 사제가 되는 것이다. 제사는 자기가 소유한 것이나 자기 수고의 대가로 얻은 수확의 일부를 떼서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제사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생명을 바친 제사이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자신이나 자신의 일부를 떼서 바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즉,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를 라틴어로 Sacrificium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또한 ‘희생’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희생이 없이 제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5) 공의회는 이렇게 말한다. “나그네같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 의탁하며 재물의 지배를 벗어나 영원한 보화를 동경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넓히며,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현세 질서를 개조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6)
이렇게 모든 신자는 제관의 자격으로 제례에 참여하고 성사를 집전하거나 수령하며, 애덕의 실천으로 영신적 희생을 바침으로써 스스로를 성화하고 타인을 하느님께 인도하여 성화하고, 하느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7) 그리스도 신자는 어디서나 성스러운 행위자, 예배자로서 하느님께 세상 자체를 봉헌하며 성화한다. 공통 사제직은 그 존재, 그 전 생활을 통해 하느님께 향한 희생의 봉헌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축성되고 성신에 의해 도유된 자, 곧 사제로서 자기를 봉헌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를 성화해서 하느님께 봉헌한다. 이것이 공통 사제직이다. 이것이 영적 예배이고, 영적 희생의 봉헌이고, 세상의 성화(consecratio mundi)이다.8)
그런데 이렇게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이 사제직을 오랫동안 상징적 또는, 유추적 사제직이라고 불러왔다. 또한 종교 개혁 때부터 개신교는 이를 보편적 사제직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보편적’이라는 말 대신에 ‘공통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사제직이 ‘실질적’ 사제직임을 분명히 하였다. 공통 사제직은 직무 사제직에서 연역하여 생각해 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일반적이고도 기본적인 특성에서 연역되는 개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제 1단계 표현이다. 세례와 견진으로 기본적인 사제 자격을 받은 그리스도 신자중 어떤이는 신품 성사를 통해 제 2단계의 직무 사제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공통 사제직은 기반적 사제직이다.9)
이상의 공의회의 가르침은 모든 신자가 수행하는 공통 사제직이 단순히 상징적이거나 부차적인 사제직이 아닌 본연의 실질적 사제직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에 의해 집전되는 경신-성사적 생활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여하기만 하거나, 이른바 세속사에만 종사하는 교회 지체가 아니라, 성직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교회의 구원 직무를 책임있게 수행하는 지체이다.10)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자 개개인이 자신의 공통 사제직을 통해 바치는 제사없이 미사 성제를 드린다는 것은 불완전한 미사는 아닐지라도 부족한 감을 준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제사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제사에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신자들의 희생이 전제된다. 희생은 꼭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마음, 운명, 생명, 건강, 시간, 이상(理想) 등등 모든 것이 사랑의 의도로 바쳐질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물이 된다. 사제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정식으로 의식을 따라서 공동체 앞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