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론-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의 모습)

 


 


4.2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의 모습


이제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고 성사여야만 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것인가라는 문제가 떠오른다. 여기에 대한 답을하기 위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를 가장 가까이서 접하고 예수와 함께 그 나라의 실현에 동참했던 ‘제자 공동체’의 삶과 초대 교회의 삶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예수의 제자 공동체의 삶과 생활을 연구한 G.로핑크는 그 공동체를 ‘대조사회’라 칭하면서 일반적인 사회 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갖추고 있는, 그리고 세상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며 빛과 소금으로서의 공동체였음을 이야기 한다.1)


먼저 그 공동체는 ‘새 가정’이었다. 예수의 제자들2)은 그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는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릅니다.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으로서 그 백배를 되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현세에서는 박해도 당하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되받고 또한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입니다”(마르 10.29-30).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표현 이면에는 태고적부터 성화(聖化)된 가부장적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자녀들은 근동인들의 생명, 생활보장과도 같은 의미이고 토지는 하느님으로부터 보장된 유산으로서 극히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예수에 의해 상대화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복음을 믿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만나게 된다. 제자들은 그들의 가정을 떠났으나 제자 무리 속에서 새로운 부모들,형제자매들을 만난다. 새로운 땅으로서의 확고한 공동체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5). 예수는 이렇게 제자들을 불러 모아 형제자매의 새 가정을 이루어 그들 자신이 돌입하는 하느님 나라의 징표가 되도록 하였다.3)


이 새 가정의 구조는 다른 여타의 사회구조와 다르다. 그 당시의 ‘가부장적 지배구조의 사회’라는 현실에 반하여 이 새로운 가정은 봉사와 섬김을 구조원리로 갖게 된다. 스승인 예수는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 시중을 든다. 그리고 제자들도 자신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한다(요한 13,1-20).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한다(루가 22,27).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 예수는 자신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 일반 사회의 지배 – 종속 관계의 구조가 아닌 봉사와 섬김으로써 다스리는 특이한 공동체 구조를 요구한 것이다.4) 이러한 봉사의 질서는 초대 교회에서도 계속 이어진다.5)


이제 성령의 힘찬 활동이 있었던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체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청년이거나 노인이거나 자유인이거나 비자유인이거나 모두 차별 없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사도 2,17-18참조) 모두 같은 신앙인으로서 사회적 차별들이 지양된다. 이방인들도 이 구원의 행렬에 참여한다(사도 10,44-48참조). 압도적인 영의 체험이 사회적 장벽들을 철폐하게 만들고 모든 이를 소외됨 없이 평등하게 수용함으로써 형제애가 넘치는 개방적 구조를 지닌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도록 이끈다. 여기서는 모든 이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14-46 참조). 한마디로 아가페적 사랑이 두드러졌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새로운 질서와 형태의 사회가 등장한 것이다.6) 


이제까지의 고찰에서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려는 예수의 결의가 초기 선교공동체 안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되고 있음”7)을 볼 수 있다. 로핑크는 하느님에 기초하여 전혀 다른 형태의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면서 이 공동체를 이상적이면서도 표지의 역할을 하는 ‘대조사회’라고 표현하고 있다8)


그러나 이렇게 이상적으로 자리매김 된 대조사회 혹은 대안의 사회로서의 제자 공동체와 초기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라는 궁극적인 실재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들로써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공동체의 모습들 안에서 역대 어느 교회 보다도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성사적으로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어째든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들을 집약할 수 있는 말들을 찾아서 종합해 보자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뛰어드는 ‘자기포기의 투신’ 그리고 他에 대한 지배가 아닌 ‘헌신적 사랑의 봉사와 섬김’ 그리고 모든이가 소외됨 없이 받아들여지는 ‘수용성(개방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형제애적 사랑’이라는 말들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이런 ‘말’들을 실천적 삶으로 ‘육화’시키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성사적으로 드러난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본 론-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의 모습)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4.2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의 모습

    이제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고 성사여야만 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것인가라는 문제가 떠오른다. 여기에 대한 답을하기 위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를 가장 가까이서 접하고 예수와 함께 그 나라의 실현에 동참했던 ‘제자 공동체’의 삶과 초대 교회의 삶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예수의 제자 공동체의 삶과 생활을 연구한 G.로핑크는 그 공동체를 ‘대조사회’라 칭하면서 일반적인 사회 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갖추고 있는, 그리고 세상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며 빛과 소금으로서의 공동체였음을 이야기 한다.1)

    먼저 그 공동체는 ‘새 가정’이었다. 예수의 제자들2)은 그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는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릅니다.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으로서 그 백배를 되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현세에서는 박해도 당하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되받고 또한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입니다”(마르 10.29-30).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표현 이면에는 태고적부터 성화(聖化)된 가부장적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자녀들은 근동인들의 생명, 생활보장과도 같은 의미이고 토지는 하느님으로부터 보장된 유산으로서 극히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예수에 의해 상대화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복음을 믿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만나게 된다. 제자들은 그들의 가정을 떠났으나 제자 무리 속에서 새로운 부모들,형제자매들을 만난다. 새로운 땅으로서의 확고한 공동체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5). 예수는 이렇게 제자들을 불러 모아 형제자매의 새 가정을 이루어 그들 자신이 돌입하는 하느님 나라의 징표가 되도록 하였다.3)

    이 새 가정의 구조는 다른 여타의 사회구조와 다르다. 그 당시의 ‘가부장적 지배구조의 사회’라는 현실에 반하여 이 새로운 가정은 봉사와 섬김을 구조원리로 갖게 된다. 스승인 예수는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 시중을 든다. 그리고 제자들도 자신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한다(요한 13,1-20).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한다(루가 22,27).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 예수는 자신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 일반 사회의 지배 – 종속 관계의 구조가 아닌 봉사와 섬김으로써 다스리는 특이한 공동체 구조를 요구한 것이다.4) 이러한 봉사의 질서는 초대 교회에서도 계속 이어진다.5)

    이제 성령의 힘찬 활동이 있었던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체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청년이거나 노인이거나 자유인이거나 비자유인이거나 모두 차별 없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사도 2,17-18참조) 모두 같은 신앙인으로서 사회적 차별들이 지양된다. 이방인들도 이 구원의 행렬에 참여한다(사도 10,44-48참조). 압도적인 영의 체험이 사회적 장벽들을 철폐하게 만들고 모든 이를 소외됨 없이 평등하게 수용함으로써 형제애가 넘치는 개방적 구조를 지닌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도록 이끈다. 여기서는 모든 이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14-46 참조). 한마디로 아가페적 사랑이 두드러졌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새로운 질서와 형태의 사회가 등장한 것이다.6) 

    이제까지의 고찰에서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려는 예수의 결의가 초기 선교공동체 안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되고 있음”7)을 볼 수 있다. 로핑크는 하느님에 기초하여 전혀 다른 형태의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면서 이 공동체를 이상적이면서도 표지의 역할을 하는 ‘대조사회’라고 표현하고 있다8)

    그러나 이렇게 이상적으로 자리매김 된 대조사회 혹은 대안의 사회로서의 제자 공동체와 초기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라는 궁극적인 실재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들로써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공동체의 모습들 안에서 역대 어느 교회 보다도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성사적으로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어째든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들을 집약할 수 있는 말들을 찾아서 종합해 보자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뛰어드는 ‘자기포기의 투신’ 그리고 他에 대한 지배가 아닌 ‘헌신적 사랑의 봉사와 섬김’ 그리고 모든이가 소외됨 없이 받아들여지는 ‘수용성(개방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형제애적 사랑’이라는 말들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이런 ‘말’들을 실천적 삶으로 ‘육화’시키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성사적으로 드러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