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성전

성전(예절)에 대한 예수의 행위는 평범한 것 같지만 독특하게 보이고 오늘날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예수는 당시 사람들처럼 성전에 자주 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전이 그의 가르침과 행위의 중심적 장소는 아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진리 안에 새로운 예식을 선포하였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진실한 예배자의 행위를 선포한다. 요한 4, 21 “나를 믿으시고. …때가 왔습니다.” 예수와 성전의 관계는 성전 정화의 얘기 안에서 나온다(요한 2,13-22).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예수의 공적인 삶의 마지막 시기에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것이 곧 수난을 자처한 것 같이 보인다. 성전 안에 여러 상인이 제물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는 구약예식을 위한 합법적인 것이었다. 예수는 장사꾼들을 쫓아냈다. 즉 예수의 성전 정화이다. 이런 예수의 행위는 구약의 예언과 일치한다. 이사 56,7 “나의 집은 …불리리라.” 예례 7,11 “나의 … 보이느냐” 즈가 14,21 “그날이 오면….못하리라.” 따라서 성전과의 관계에서 예수는 물질로 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예식이 완성된다는 잘못을 교정한다. 이러한 예배로는 새로운 종말의 시기,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성벽이 없는, 모든 이에게 개방된 새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예수의 행위는 새로움의 표징이다. 이는 당시의 성전, 예식의 마지막을 고하는 선포였다. 실제로 장사꾼을 추방하는 것은 전통적 예식을 불가능하게 했다. 말라 3,1-3 “보아라….그는 너희가….너희는…보아라..바치게 되리라” 성전에서 율법에 규정된 예식에 따라 믿음의 변화가 없다면 희생, 제물, 성전의 불필요성을 말한다. 실제로 유대인은 예수의 행위를 메시아적 행위로 볼 수 있었지만 평범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이 무엇인지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는 여기서 메시아적 의미를 강조한다.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예수는 당신의 행위로 벽으로 둘러싸인 성전의 마지막을 선포한다. 새 성전을 동시에 선포한다. 죽은 후 3일 후에 재건될 영광스런 당신의 몸을 나타낸다. 당신이 계시는 그곳이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무엇인가? 성전과 율법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해방되고 성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의해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사제상을 제시한다. 참된 사제상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유행처럼 요구되는 사제상은 참된 것이 아니다. 참된 사제상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기초해야 한다. 현실적 사제상을 그리면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왜곡할 수도 있다. 여러 사제직이 있지만 이는 유일하고 모두가 이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 사제들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진다. 유대 사제직을 존중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원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예수를 사형으로 단죄하면서 유대종교의 권위는 하느님의 현존과 단절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종교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야훼 하느님의 현존이 중심으로 되어 있지 않는 율법 중심의 모든 사도직을 허물라는 것이다.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가 성전을 자신과 동일시 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함을 세상에 전해주는 것이다. 거룩함을 물건에서 찾지 말고 인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전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거룩함을 밝히기 위해 성전이 필요한 것이다.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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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성전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성전(예절)에 대한 예수의 행위는 평범한 것 같지만 독특하게 보이고 오늘날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예수는 당시 사람들처럼 성전에 자주 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전이 그의 가르침과 행위의 중심적 장소는 아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진리 안에 새로운 예식을 선포하였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진실한 예배자의 행위를 선포한다. 요한 4, 21 “나를 믿으시고. …때가 왔습니다.” 예수와 성전의 관계는 성전 정화의 얘기 안에서 나온다(요한 2,13-22).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예수의 공적인 삶의 마지막 시기에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것이 곧 수난을 자처한 것 같이 보인다. 성전 안에 여러 상인이 제물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는 구약예식을 위한 합법적인 것이었다. 예수는 장사꾼들을 쫓아냈다. 즉 예수의 성전 정화이다. 이런 예수의 행위는 구약의 예언과 일치한다. 이사 56,7 “나의 집은 …불리리라.” 예례 7,11 “나의 … 보이느냐” 즈가 14,21 “그날이 오면….못하리라.” 따라서 성전과의 관계에서 예수는 물질로 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예식이 완성된다는 잘못을 교정한다. 이러한 예배로는 새로운 종말의 시기,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성벽이 없는, 모든 이에게 개방된 새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예수의 행위는 새로움의 표징이다. 이는 당시의 성전, 예식의 마지막을 고하는 선포였다. 실제로 장사꾼을 추방하는 것은 전통적 예식을 불가능하게 했다. 말라 3,1-3 “보아라….그는 너희가….너희는…보아라..바치게 되리라” 성전에서 율법에 규정된 예식에 따라 믿음의 변화가 없다면 희생, 제물, 성전의 불필요성을 말한다. 실제로 유대인은 예수의 행위를 메시아적 행위로 볼 수 있었지만 평범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이 무엇인지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는 여기서 메시아적 의미를 강조한다.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예수는 당신의 행위로 벽으로 둘러싸인 성전의 마지막을 선포한다. 새 성전을 동시에 선포한다. 죽은 후 3일 후에 재건될 영광스런 당신의 몸을 나타낸다. 당신이 계시는 그곳이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무엇인가? 성전과 율법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해방되고 성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의해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사제상을 제시한다. 참된 사제상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유행처럼 요구되는 사제상은 참된 것이 아니다. 참된 사제상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기초해야 한다. 현실적 사제상을 그리면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왜곡할 수도 있다. 여러 사제직이 있지만 이는 유일하고 모두가 이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 사제들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진다. 유대 사제직을 존중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원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예수를 사형으로 단죄하면서 유대종교의 권위는 하느님의 현존과 단절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종교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야훼 하느님의 현존이 중심으로 되어 있지 않는 율법 중심의 모든 사도직을 허물라는 것이다.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가 성전을 자신과 동일시 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함을 세상에 전해주는 것이다. 거룩함을 물건에서 찾지 말고 인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전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거룩함을 밝히기 위해 성전이 필요한 것이다.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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