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

여러가지 성서 안에서 그대로 묘사된 역사적 자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다른 책 참조) 예수의 죽음이 가장 중요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예수의 생애 안에서 역사적 예수를 고찰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예수의 죽음이다. 1Cor 1,22에 보면 “유대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능력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고 예수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 사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가 곤란하다. 실제로 죽음의 신학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체험해 보고 완전히 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간접적인 체험에 의해서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38선과 같은 접경지대에 놓여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가 죽음을 체험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도 역사적으로 고찰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이러한 접경지대를 넘어갈 수 없다. 이남에서 이북을 바라볼 수 밖에, 그리고 희미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죽음의 접경지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삶의 현상에서 죽음의 현존을 체험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안에 죽음이 이미 현전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고뇌를 살아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간 특별한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한번 완전히 넘어갔다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죽음의 현실이 우리에게 영원히 감추어져 있게 된다. 죽음에 대한 역사 비판학적 방법 역시 이 선을 넘어갈 수 없다.
모든 삶의 역사적 전기, 역사적 자료는 죽음으로서 끝나게 되어 있다. 만일 역사 안에 계속 살아남아 있다면 그의 삶이 이어지는 역사 안에서 의미를 갖고 어떤 결실을 맺고 그런다는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 비판학적인 방법론에 의하면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그분이 죽었다 라는 것은 확실한 자료로 증명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것을 틀림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초기 교회 안에서도 부활에 대한 신앙의 당혹함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혹한 사실일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은 이렇게 접경지대의 특성을 갖고 있다. 일반 사람들의 죽음처럼 예수의 죽음 역시 당신 죽음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삶의 맥락 안에 삽입되어 있다. 죽음에 대하여 말할 때 이러한 면을 고찰하여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죽음을 해석할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안에서 예수가 분명하게 죽으셨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죽음을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것들은 세가지 자료, 원천들로부터 제시될 수 있다. 특히 빠스카에 대한 체험, 그리고 두번째로 예수의 지상 발현, 세번째로 죽음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약성서이다. 빠스카에 대한 체험은 십자가가 그 의미를 잃었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부활의 빛에 따라 볼 때 십자가가 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의 신비가, 십자가의 신비가 아버지께로 통과하는 것으로만 해석될 때 잘못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일시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러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발현은 어떤 특정한 인물의 죽음을 역사적 맥락에 따라서 보여 주고 있다. 구약성서는 예수의 죽음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해 주는 여러가지 해석의 모델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느님 백성의 구원론적 체험을 상기시키면서 예수의 죽음을 해석하여 준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역사의 예수 안에 드러난 죽음을 살펴볼 수 있다.

1. 역사의 예수 안에 드러난 죽음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확실하게 증명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평온하게 침상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자동차 사고나 기차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 백성의 기다림과 정반대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스캔들이 되고 이교도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부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닌다든지 양복에 걸고 다닌다든지 보석으로 치장한 장식품으로 달고 다닌다는 것은 인간과 십자가가 친숙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의 추악함, 일반적 사고와 정반대되는 그러한 모습도 드러난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의해서 여러가지 충돌이 야기되었고 여기에서부터 죽음의 원인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가 죄인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를 단죄하도록 이끈 동기는 Deu 17,12 로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야훼를 섬기는 당직사제나 재판관의 말을 업신여기고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라.” 후기 유다이즘에서는 바로 이 구절을 가지고 거짓 예언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적용시켰다. 의회 앞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예수의 정통성,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판단하는 유대아 최고 법정 앞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그들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단죄를 야기시켰다. 이스라엘 최고 권위에 대한 경멸이 역사적으로 볼 때 아마도 예수를 단죄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아 최고 권위와 반대 입장을 취한 사람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반대하였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일치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로마 통치관 빌라도가 여기에 동의하게 되는데 빌라도는 정치적인 여러 이유 때문에 예수를 제거해야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단죄하기 위한 정확한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의도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복잡해진다.
수난 예고나 수난 이야기에서 이미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쩌면 크리스찬적 해석(편집)이 이미 가미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부터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게 된다. 경우에 따라 첫번째로 예수를 치명자 혹은 치명하신 예언자로 보고 후에 거양된 분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성서에 따라 해석하면서 구원 경륜 안에서 죽어야만 했다는 그러한 이론도 나올 수 있고 혹은 예수의 죽음 안에서 사람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강조하는 도식도 나타날 수 있다.
어떻게 예수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는가? 여기에서 Bultmann은 이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예수가 정말로 죽음 안에서 파멸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Marxen에 의하면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구원의 사건으로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가는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퐥틀은 어느 정도 Marxen의 이론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해 슈르만 같은 이들이 반박을 하고 가톨릭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는 -두가지 인데- 역사적 예수와 선포된 그리스도와의 지속성에 관계되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파멸하고 그 죽음에 아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역사의 예수와 선포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또다른 하나는 예수 죽음의 의미가 역사의 예수 안의 여러가지 행적,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삶과 아무런 관계를 갖고 있지 않고 빠스카 이후 해석일 뿐이다 라고 할 때 예수의 전체 삶 안에 드러나는 예수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여기에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위타존재이다.
예수의 원인이 지상 안에서 선포된 여러가지 사건 혹은 그분의 메시지가 부활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빠스카 이후의 단순한 해석이라고 볼 때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빠스카 이후의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성체성사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아남네시스(회상, 기념)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죽음 안에서 예수 자신이 행한 것을 따르는 것에 대한 것일 수는 없다. 예수 자신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찬 삶은 어떻게 정의해야 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먼저 Bultmann의 이론에 대해서 보면 Bultmann의 이론은 자신의 케리그마 신학과 연결되어 있다. 전제로 역사의 예수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모든 연결점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에 이를 수 있다. 전에 말한 대로 위타존재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역사의 예수를 탐구하면서 케리그마를 무기력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본적인 원칙에 따라서 역사적 예수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계시의 충만한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Marxen이나 푁터에 의하면 예수의 의식은 아마도 당신의 실천 안에 당신의 가르침 안에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신의 설교와 모순될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당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신학적인 기본적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예수 설교의 종말론적인 면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의하면 예수는 아버지를 향해서 항상 개방된 당신의 여정을 생활했다. 하느님의 다양한 가능성에 완전히 열려져 있었다. 하느님의 가능성(뜻)이 어떤 식을 전개될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열려져 있다. 이러한 것은 예수 삶의 역사 안에서 예수의 체험과 예수의 인식이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성장되고 있다(더욱더 심화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연극하는 배우처럼 첫 장면을 연출하면서 그 다음 장면이나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다 알면서 프로그램에 따라서 진행하고 있다. 예수가 이미 알고 있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당신 삶의 여정을 성취하였다고 전제할 수가 없다. 예수는 당신 시간의 맥락 안에서 여러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점진적으로 점차적으로 실현했다. 이러한 것은 성서 안에서 신학적 심리학적 방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역사적 삶 안에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다. 예수에게 다른 가능성을 선택하도록 유혹하는 장면도 무수히 많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 안에서 유대인들과 충돌, 세례자 요한의 운명 등.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사형 언도가 예기치 않은 것으로 예수에게 주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가 I.Q.가 50 밖에 안된다면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정상적인 한 인간으로 생활했다면 그러한 위험, 여러가지 상황을 볼 때 사형언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감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예수에게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일방적으로 비판학적인 선택의 원칙을 따르면서 즉 유다이즘 전통에도 속하지 않고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에도 속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역사적 자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면서 특정한 자료만을 선택할 때 Bultmann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는 수난 예고와 같은 Text는 전승에 의해서 선택된 것일 수도 있다. 부활사건에 대한 부활 이후 주석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고 한다. 대속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적용된 선택원칙은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한 Text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삽입된 예수의 전체 삶과 전체 메시지의 맥락 위에 기초해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최후 만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일치하는 일치의 잔을 내주었고 이것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명 안에서 죽음을 성취하였다는 표징이 될 수 있다. 예수는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당신의 죽음을 인간을 위한 죽음, 인간을 위한 원인으로서 또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하느님의 원의에 대한 봉사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위타존재는 너희를 위하여(pro vobis), 이것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전체적 삶은 죽는 순간까지 예수 전체 삶과 행위의 역사적인 구체적인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삶 전체를 고려해 보아야 하며 예수의 삶 전체는 당신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 대한 해석의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신 자신이 순간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면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이 삶의 전체 맥락 안에서는 확인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종합이 KASPER의 그리스도론에서 주어지고 있다.

1) 예수 죽음의 종말론적 의미
첫번째 면은 예수 죽음의 종말론적인 면이다. 이러한 전망 안에서 유혹 또는 시험이라는 개념이 다시 해석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하는 기도이다. 하느님 나라와 종말적 고뇌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판적 순간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바로 이러한 맥락 안에 포도원 농부들의 우화(MC 12, 1-12)도 삽입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를 죽이려고 의도하는 자들의 심판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여정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게 배척되었다. 예수도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위험 속에 당신 자신을 노출시킨다. 예수가 충돌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성서 안의 충돌도 고찰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충돌과 예수의 단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러한 맥락 안에서 성전에서의 충돌도 볼 수 있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는 유대아 권위에서 볼 때 어떤 자극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예수 죽음의 종말론적인 면은 최후 만찬 전승 안에서도(MC 14,25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시게 될 그날까지 포도나무로 빚은 것을 결코 더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 표현되고 있다. 상징적인 종말적 행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행위 안에서 예수가 당신의 죽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 행위의 특성과 하느님 나라 사이의 관계를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느님 편에서 버림을 받은 것 같은 십자가의 울부짖음은 하나의 절망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신앙의 어두움을 체험한 사람의 울부짖음, 하나의 기도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간절히 원하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희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인도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일치 안에 있는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자의 마지막 기도로 이해될 수 있다.

2) 구원론적 의미
다른 하나는 예수의 구원론적 의미이다. 구원에 대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크리스찬 공동체의 신앙의 자료가 대부분 삽입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후대 크리스찬 공동체의 해석과 예수 안에 드러나는 자료와의 관계점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diaconia(봉사)개념. Lk 22,27 “섬기는 사람이 되라. 상 받고 앉은 사람과 섬기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높겠습니까? 상 받고 앉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합니다.” 사제들이,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항상 반성하고 항상 자신의 행위와 말을 반성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단순한 제시가 아니라 죽기까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 죽기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하는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근본적인 명령 이상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신 삶 전체 안에서 위타존재에 대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한 당신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맥락 안에 삽입되어 있다. 종합하여 보면 예수는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그러한 구체적인 행위를 생활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위타존재로 생활하였다. 따라서 예수가 당신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구원론적 해석을 제시하였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 권위, exousia를 갖고 있는 그러한 분으로 무능력함을 받아들이면서 죽음의 사건을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인 대답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함축적 그리스도론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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