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으로서의 십자가 사건

전승(paradosis) 개념은 예수의 수난, 죽음 이해의 결정적 개념이다. 십자가 사건의 구조를 열게 해준다. 성서에 따라서 이해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수난, 죽음은 하나의 전승사건이다. 구체적으로 예수의 모습을 전해주는 인물을 얘기할 수 있다. 전승은 ‘전하여 주다’, ‘배반하다’라는 뜻도 있다. 유다가 예수를 친구함으로써 배반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전달해야 한다. 이를 잘못할 때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인물로는 유다, 빌라도 등 다수이다. 예수 편에서 볼 때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예수가 살고 있다. 예수가 넘겨지는 과정 뒤에는 유다를 자극하는 사탄의 그림자가 있다.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이것이 어떤 요소를 제공한다. 세상의 죄의 현실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전승의 과정 안에서 수동적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다.” 이런 넘겨지는 과정은 하나의 전승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죄인인 사람들이 예수를 자유롭게 처분하고 예수는 이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인간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세상 안의 죄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전승 과정은 인간이 행동하는 것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능동적으로 하느님의 과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승은 예수와 아버지의 사건이고, 그 전체로 구원론적 의미를 갖는다.
에페 5,2 “그리스도께서 ….” 갈라 2,19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악의 희생에 대한 동기의 암시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로마 8,32 “그분은 당신의 ….않겠습니까?” 이런 숙고는 요한 19,30 “….”의 암시를 통해 제시된다. 이는 성령에 대한 암시이다. 성령은 빠스카 사건의 결실이다. 여기서 교회의 차원이 이미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전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갖는 교회, 그 안에 성령이 현존한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은 상관적 특성을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1. 상관적 특성
사람들과 예수가 개입된 한 사건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세상의 죄의 절정이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다. 예수를 제거하는 것은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들을 위해 죽었다. 이런 인간과 예수의 상관적 모습을 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죄이다. 죄의 현실을 못 보는 곳에서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의미하다.

2. 예수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
아버지는 아들을 넘겼고 이는 다시 아버지에게 자신을 주는 아들의 완전한 봉헌이 나타난다. 이것은 죄의 상황과 연결된다. 죽음의 시간 안에서 예수의 마지막 신앙의 표현과 버려짐 사이의 관계가 나타난다. 즉 죄에 대한 반응으로 하느님의 분노와 하느님의 은총의 사건으로 하느님의 사랑 사이의 관계이다. 여기에 의화에 대한 테마가 관계된다. 한편 아무 은총 없이 사람들은 버려지고,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의화를 체험한다. 바오로는 1고린 5,21에서 의화를 얘기한다. 갈라 3,13
십자가 사건은 그 자체로 상관적 사건이고 대조되는 사건이 드러난다.

3.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종합
유다, 사제 등 여러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했고 예수는 수동적이지만,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예수의 행위 안에서는 수동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예수의 수난, 죽음은 예수의 능동성을 내포한다. 예수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긍정을 한다. 이런 비참한 죽음 안에서의 구원적 은총이 함께 나타난다. 예수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여러 사람들, 죄의 권세도 수동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으로 진행되지만 결국은 패배한다. 이런 과정이 성령이 세상을 인도하는 측면이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사건에 대한 분류는 4가지이다.
1) 예식적 해석
희생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속죄의 사상이 연결되어 있다. 대속의 사상도 포함한다. 봉헌된 희생으로서의 사죄적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대속 사상을 전제하는 공로사상, 청원사상도 포함된다. 교회 안에서 지배적인 해석이다. 이런 해석에 십자가의 죽음과 해석인 성체성사가 나온다.

2) 법적 해석
성 안셀모의 Cur Deus Homo? 에서부터 논증한다. 보속의 가르침과 함께 설명된다.
죄에 의해 파괴된 우주질서에 대한 사상에서 출발한다. 죄는 보속이 요구된다. 단순한 용서는 하느님의 정의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단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속이 요구되는데 인간은 이런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이를 행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하느님과 같은 분만이 이를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안셀모에 의하면 다른 행동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순종적으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근본적인 것이 요구되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을 의무가 없다. 예수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은 보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이론의 이해를 위해서는 주인과 일꾼 사이의 충실성을 나타내는 봉건사회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인은 일꾼을 보호하고, 일꾼은 주인을 추종하고 따른다. 따라서 주인의 일은 전체사회질서에 관계된다. 주인에게 일꾼이 잘못을 범하는 것은 사회질서가 파괴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회질서, 평화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이다. 세상 안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측면이다. 복수심에 가득한 하느님이 아니라 질서의 원천으로서의 하느님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고 창조주로서 당신이 만든 그 질서에 충실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이해에 있어 이러한 안셀모의 의도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투쟁적 해석
이러한 해석은 이미 본 법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권리가 확인되는 힘 위에서, 힘을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의 사건은 전통적으로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는 면에 대한 것이다. 이런 주장 안에서 어둠의 힘이 극복되고 있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관계가 항상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속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러한 모든 법적인 면과 투쟁적인 면이 서로 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을 위해서 지불되는 어떤 값으로부터 이런 모델이 제시된 것이다. 해방을 선서하는 법적인 행위가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종살이로의 구속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동족이나 가장이 팔려 갔을 대 당연히 가장이나 백성은 자기의 동료를 위해서 대신 보속하고 대신 값을 지불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야훼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해방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약에서의 Lytron 해석이라 하겠다.

4)(인격적인) 상관적인 해석
그리스도와 믿는 사이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구원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hyper형식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후에는, 특히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다, 못박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다 라는 다른 여려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예수와 우리사이의 일치를 나타내는 모든 Text들이 이런 맥락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원인을 표현하는 예수의 모든 삶의 맥락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 하느님과 인간의 결속의 최상의 표현이 예수의 죽음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러 모델 중에서 이것을 종합적으로 전체를 보게 해주는 구원론적 해석의 시도가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화해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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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전승(paradosis) 개념은 예수의 수난, 죽음 이해의 결정적 개념이다. 십자가 사건의 구조를 열게 해준다. 성서에 따라서 이해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수난, 죽음은 하나의 전승사건이다. 구체적으로 예수의 모습을 전해주는 인물을 얘기할 수 있다. 전승은 ‘전하여 주다’, ‘배반하다’라는 뜻도 있다. 유다가 예수를 친구함으로써 배반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전달해야 한다. 이를 잘못할 때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인물로는 유다, 빌라도 등 다수이다. 예수 편에서 볼 때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예수가 살고 있다. 예수가 넘겨지는 과정 뒤에는 유다를 자극하는 사탄의 그림자가 있다.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이것이 어떤 요소를 제공한다. 세상의 죄의 현실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전승의 과정 안에서 수동적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다.” 이런 넘겨지는 과정은 하나의 전승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죄인인 사람들이 예수를 자유롭게 처분하고 예수는 이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인간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세상 안의 죄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전승 과정은 인간이 행동하는 것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능동적으로 하느님의 과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승은 예수와 아버지의 사건이고, 그 전체로 구원론적 의미를 갖는다.
    에페 5,2 “그리스도께서 ….” 갈라 2,19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악의 희생에 대한 동기의 암시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로마 8,32 “그분은 당신의 ….않겠습니까?” 이런 숙고는 요한 19,30 “….”의 암시를 통해 제시된다. 이는 성령에 대한 암시이다. 성령은 빠스카 사건의 결실이다. 여기서 교회의 차원이 이미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전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갖는 교회, 그 안에 성령이 현존한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은 상관적 특성을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1. 상관적 특성
    사람들과 예수가 개입된 한 사건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세상의 죄의 절정이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다. 예수를 제거하는 것은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들을 위해 죽었다. 이런 인간과 예수의 상관적 모습을 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죄이다. 죄의 현실을 못 보는 곳에서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의미하다.

    2. 예수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
    아버지는 아들을 넘겼고 이는 다시 아버지에게 자신을 주는 아들의 완전한 봉헌이 나타난다. 이것은 죄의 상황과 연결된다. 죽음의 시간 안에서 예수의 마지막 신앙의 표현과 버려짐 사이의 관계가 나타난다. 즉 죄에 대한 반응으로 하느님의 분노와 하느님의 은총의 사건으로 하느님의 사랑 사이의 관계이다. 여기에 의화에 대한 테마가 관계된다. 한편 아무 은총 없이 사람들은 버려지고,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의화를 체험한다. 바오로는 1고린 5,21에서 의화를 얘기한다. 갈라 3,13
    십자가 사건은 그 자체로 상관적 사건이고 대조되는 사건이 드러난다.

    3.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종합
    유다, 사제 등 여러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했고 예수는 수동적이지만,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예수의 행위 안에서는 수동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예수의 수난, 죽음은 예수의 능동성을 내포한다. 예수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긍정을 한다. 이런 비참한 죽음 안에서의 구원적 은총이 함께 나타난다. 예수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여러 사람들, 죄의 권세도 수동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으로 진행되지만 결국은 패배한다. 이런 과정이 성령이 세상을 인도하는 측면이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사건에 대한 분류는 4가지이다.
    1) 예식적 해석
    희생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속죄의 사상이 연결되어 있다. 대속의 사상도 포함한다. 봉헌된 희생으로서의 사죄적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대속 사상을 전제하는 공로사상, 청원사상도 포함된다. 교회 안에서 지배적인 해석이다. 이런 해석에 십자가의 죽음과 해석인 성체성사가 나온다.

    2) 법적 해석
    성 안셀모의 Cur Deus Homo? 에서부터 논증한다. 보속의 가르침과 함께 설명된다.
    죄에 의해 파괴된 우주질서에 대한 사상에서 출발한다. 죄는 보속이 요구된다. 단순한 용서는 하느님의 정의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단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속이 요구되는데 인간은 이런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이를 행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하느님과 같은 분만이 이를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안셀모에 의하면 다른 행동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순종적으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근본적인 것이 요구되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을 의무가 없다. 예수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은 보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이론의 이해를 위해서는 주인과 일꾼 사이의 충실성을 나타내는 봉건사회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인은 일꾼을 보호하고, 일꾼은 주인을 추종하고 따른다. 따라서 주인의 일은 전체사회질서에 관계된다. 주인에게 일꾼이 잘못을 범하는 것은 사회질서가 파괴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회질서, 평화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이다. 세상 안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측면이다. 복수심에 가득한 하느님이 아니라 질서의 원천으로서의 하느님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고 창조주로서 당신이 만든 그 질서에 충실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이해에 있어 이러한 안셀모의 의도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투쟁적 해석
    이러한 해석은 이미 본 법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권리가 확인되는 힘 위에서, 힘을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의 사건은 전통적으로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는 면에 대한 것이다. 이런 주장 안에서 어둠의 힘이 극복되고 있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관계가 항상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속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러한 모든 법적인 면과 투쟁적인 면이 서로 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을 위해서 지불되는 어떤 값으로부터 이런 모델이 제시된 것이다. 해방을 선서하는 법적인 행위가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종살이로의 구속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동족이나 가장이 팔려 갔을 대 당연히 가장이나 백성은 자기의 동료를 위해서 대신 보속하고 대신 값을 지불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야훼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해방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약에서의 Lytron 해석이라 하겠다.

    4)(인격적인) 상관적인 해석
    그리스도와 믿는 사이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구원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hyper형식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후에는, 특히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다, 못박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다 라는 다른 여려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예수와 우리사이의 일치를 나타내는 모든 Text들이 이런 맥락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원인을 표현하는 예수의 모든 삶의 맥락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 하느님과 인간의 결속의 최상의 표현이 예수의 죽음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러 모델 중에서 이것을 종합적으로 전체를 보게 해주는 구원론적 해석의 시도가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화해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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