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를 가장 많이 연구한 학자가 Pannenberg이다. 그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해서 역사적 신빙성을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그에 있어서 문제점은 우리가 역사의 유비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만일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인을 위해서는 아무런 자리가 없게 된다. 아니면 부활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료를 취해야 하는가가 제기된다.
부활에 대한 언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 선이해의 중요성이다. 모든 신학자들이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자료에서부터 이런 것을 알 수 있다. 부활을 부인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부터 알 수 있다. Bultmann이나 Marxen과 대화하는 것과 아오스딩이나 데레사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부활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믿는가 아니면 믿기 때문에 부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인가? 신학자들 사이의 다양한 의견은 그들의 Text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에서부터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 선이해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면 발현의 문제에서 역사뿐 아니라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Bultmann의 경우에 1고린 15장에 나타나는 부활의 사실, 부활의 논증을 받아들이는 시각이 다르게 나타난다. 즉 신학적 선입견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Bultmann에 있어서 이 선입견은 선포된 예수와 역사의 예수와의 관계를 우리와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선포된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의 신학은 케리그마의 신학 혹은 선포의 신학이고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 위에 신앙이 기초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따라서 Bultmann은 부활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부활의 신앙 안에 내포되어 있는 나를 위한 것에 집중되어 잇다. 어찌 보면 구원사건으로써 십자가에 대한 신앙일 뿐이다.
그러나 이 신앙은 케리그마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종말적 사건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단순히 케리그마 안에 부활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한다. 실지로 Bultmann은 케리그마 자체도 종말적 사건임을 전제하고 실제로 예수가 케리그마 안에 현존하고 있다고 확인한다. 또한 그 안에 있는 예수가 부활을 통해 그들을 변화시키고 의미를 제공한다. 케리그마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바로 이것이 근본적인 의미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볼 때 W.Kasper의 이야기처럼 부활이 예수 안에 무엇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제자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부활과 신앙을 그 자체,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동일시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리스도론이 구원론에 흡수되고 만다.
그러나 Bultmann 이후 역사적 예수의 문제로 돌아가려는 신학자들의 선이해는 Bultmann과는 또 다르다. 예를 들어 Marxen의 경우에 그도 부활에 대한 언급을 부활의 의미에 초점을 둔다. 어찌보면 Bultmann과 같이 우리가 현재 믿고 있기 때문에 부활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Marxen은 Bultmann과는 달리 케리그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전망 안에서 볼 때 부활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적 자료로 고려될 수 없다. 다만 예수의 원인(Sache Jesu)이 지속된다는 전제하에 부활이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역사의 예수 안에 이미 현존하여 있는 것, 그것이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된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게속시켜주는 매개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Pannenberg는 또 다르다. 그 역시 역사의 예수에서 출발한다. Marxen과의 차이는 역사적 예수의 종말적 주장이 부활에 대한 확인 없이는 무의미하다 라는 관점에서 다르다. 즉 부활의 역사적인 면이 가장 중요하다. 이같이 입장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선이해에 달려 있다.
역사적 과제와 교의적 과제 사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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