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버지의 주권적 행위

1) 하느님 아버지의 주권적 행위
예수의 부활 안에서 하느님이 어떠하신 분인가가 계시되어진다. Rom 4, 17 처럼 죽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아직 생명이 없는 것을 존재케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로서의 부활도 말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이에 바울로는 영광스러운 예수에 대해 말한다. Phil 3, 21에서는 우리의 육체를 변화시키실 분으로 제시된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영광스러운 예수의 모습을 갖는 신앙이다. 예수는 주님(κυριοs)이시라고 말하는 이것은 현재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2) 역사와의 관계
부활은 초월적 종말적 사건이지만 역사와의 관계를 갖는다. Rom 4, 17처럼 부활을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비유하고 있다. 창조에 있어서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비교하고 있다. novum quid(어떤 새로운 것)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에는 그 위에 어떤 출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활에 있어서는 다른 출발점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이지만 죄를 짊어진 예수, 나자렛 예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인물에게 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키시며 당신의 긍정적 대답을 주신다. 역사적으로 예수와 현양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부활은 지속성을 갖는다. 이에 따라서 우리 인간의 역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속성을 갖는 관계는 육체적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체적 부활만 강조할 때 첫번째 삶과 부활된 삶을 혼동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성에는 유효하다.

3) 예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의 관계
2 Cor 4, 14 이런 예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의 관계는 “우리를 예수처럼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1 Cor 15장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 개인사건이 아니고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역사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초월적 종말적 사건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역사를 내포하며 역사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예수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연결시 확실해 진다. 죽음의 승리로 지적되므로 우리의 역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의 발현의 기능에 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4) 그리스도의 발현 기능에 대한 이해
이런 발현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부활의 초월적 현실과 그 자체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알 수 없는 종말적 영역에로 통과를 말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 자료는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시는 그분의 자발적 계시이다. 그분의 inisiative를 나타내고 있음. 우리가 고정시킬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자료에 대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움으로 넘어가는 통과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성서에서 발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이는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나타남, 곁에 있어도 모름, 만지라 하고 만지지 못하게 하심 등등 – 이는 순수한 역사적 확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과 초월적 종말적 현실로서의 통과라는 사실 안에서 볼 때 역사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가 거부해야 되겠는가? 이런 것을 표현하기 위해 성서는 예식이나 종교적 통교 안에서 이러한 발현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여러 문학적 자료가 삽입되어 있으나 발현에 대한 특수 자료도 삽입되어 있다. 발현은 역사 안에서 부활에 대한 증거이며 우리에게 부활의 신비를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K. Rehmann은,
① 발현(ophte) 안에서 계시된 내용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② 현실에 있어서 강조점은 현실을 보는 주체 위에 놓임보다는 보여지는 객체 위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볼 수 있음은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③ 인간 전체를 내거는 인간의 과제를 요구하는 능동적인 분으로서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의도적이고 인격적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런 특성은 내적인 발현과 외적 발현을 선행하고 있다. 이에 있어서 베드로 앞에서의 발현은 바울로와는 다른 특별 발현이라 주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④ 이는 심리적 면에 대한 관심이 있다. 체험 후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시대를 흐르며 형성된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중립적 체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는(①은) 인간의 주관적 관점을 배제하고 있다. ②는 모든 거짓된 객관주의를 배척하고 있다. 이는 신앙에서 사명으로 옮겨가는 목적을 갖는다. 그리스도의 발현에 있어서는 구체적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실제적 사명을 주고 증거를 요구하고 부르시는 사건이 있고 이것이 언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언어의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 Ebeling, Hucks는 성서에 대해 언어의 사건이라 말한다(해석학에 있어서). 모든 언어는 진실된 언어일수록 진실된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언어가 발현에 대한 체험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Emmaus 사건, 1 Cor 15장의 발현(주께서 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은 발현과 성서적 언어의 사건이 긴밀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무덤의 안치와 십자가 사건이 분명히 관계를 갖는 것처럼(인간적 편에서 볼 때) 발현과 부활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여기서 발현들은 예수에 대한 인식에 항상 관계해 있는 것이다. 발현은 그분의 영광스런 모습의 통교보다 지속성, 동일성 그분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분의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발현은 유일하게 한 가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부활하셨음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기억이나 회상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을 인식하며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우리를 향하게 하는 과거의 그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주님을 본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증거의 사명이다. 항상 세례의 사명에 관계되어 있는 증거자의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냄. 따라서 이것이 교회론적 특성을 갖고 교회적 사명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시대와 이후 교회가 구분되어 있다. 사도 시대의 교회의 구성적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의 교회는 사도 시대의 증거에 기초하고 있고 사도 시대 주님 부활에 대한 근거 없이는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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