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인간학-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상)

 

1. 신학적 인간학


1.1   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


A. 인문과학에로의 종속을 거부한다.


여기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주지하는바 처럼 은총론의 이해를 위한 전제로서의 신학적 인간학이다, 그런 한에서 이 신학적 인간학은 신학 안에서 신론과 그리스도론과 함께 중심적인 테마이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적 인간학의 기점은 그 주제의 본성상 인간에 대한 인문과학적 지식이나 – 순수한 인간학 -, 그 인문과학적 주장을 대변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은 충족되지 못한 존재로서 무제한적으로 세계에 개방(Weltoffenheit:세계 개방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단순한 주장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문과학(인간학)의 주장이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성서적 증언들에 근거를 둔 표현임을 제시하려 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에 대한 신학 외적인 주장들이 논의과정에 진지하게 수용되고 숙고되고 또한 비판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문과학의 주장들이 신학적 인간학의 방법론적 출발점은 되지 않을 것이다.




B. 인간 중심주의(Anthropozentrismus)를 배격한다.


인간학이 부정적 의미의 인간 중심적, 즉 “더 커다란 하느님”에게로 향할 수 있는 시각을 막아버리는 그런 기점은 신학적 인간학의 기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초월적 파트너다’라는 표현보다 하느님은 더 큰 존재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업적은 오로지 단순한 인간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주장보다도 큰 것이다.(개념할 수 없는 하느님,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  신학은 언제나 가능한 대로 개인주의적으로 이해된 하느님의 구원으로 국한시키고 다른 모든 것은 허락될 수 없는 공론으로 비약시키는 것은 신학적 관심의 주가 되는 “신학의 인간학적 축소”를 거슬러 늘 새롭게 경계하고 대항해야 한다. 신학은 이런 연유에서 Luther의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인간학이 창조되지 않은 신학의 여러 유형들과 또한 그들의 현대적 변형들도 진지하게 참작하여야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공동의 전통 안에서 핵심을 형성하는 신학적 인간학에서 개인 이기주의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칫 인간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신학적 인간학 안에서 하느님의 하느님성과 하느님의 창조는 부수적인 것이 될 뿐이고, 최선의 경우 단지 초신학적 성찰의 주제나 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학을 전개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개인체험이 본질적인 것으로 자리잡으면 신학은 인간학적 축소가 이뤄지게 되고 그럼에 따라 신학은 부수적인 것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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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인간학-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상)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 신학적 인간학

    1.1   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

    A. 인문과학에로의 종속을 거부한다.

    여기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주지하는바 처럼 은총론의 이해를 위한 전제로서의 신학적 인간학이다, 그런 한에서 이 신학적 인간학은 신학 안에서 신론과 그리스도론과 함께 중심적인 테마이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적 인간학의 기점은 그 주제의 본성상 인간에 대한 인문과학적 지식이나 – 순수한 인간학 -, 그 인문과학적 주장을 대변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은 충족되지 못한 존재로서 무제한적으로 세계에 개방(Weltoffenheit:세계 개방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단순한 주장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문과학(인간학)의 주장이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성서적 증언들에 근거를 둔 표현임을 제시하려 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에 대한 신학 외적인 주장들이 논의과정에 진지하게 수용되고 숙고되고 또한 비판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문과학의 주장들이 신학적 인간학의 방법론적 출발점은 되지 않을 것이다.


    B. 인간 중심주의(Anthropozentrismus)를 배격한다.

    인간학이 부정적 의미의 인간 중심적, 즉 “더 커다란 하느님”에게로 향할 수 있는 시각을 막아버리는 그런 기점은 신학적 인간학의 기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초월적 파트너다’라는 표현보다 하느님은 더 큰 존재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업적은 오로지 단순한 인간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주장보다도 큰 것이다.(개념할 수 없는 하느님,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  신학은 언제나 가능한 대로 개인주의적으로 이해된 하느님의 구원으로 국한시키고 다른 모든 것은 허락될 수 없는 공론으로 비약시키는 것은 신학적 관심의 주가 되는 “신학의 인간학적 축소”를 거슬러 늘 새롭게 경계하고 대항해야 한다. 신학은 이런 연유에서 Luther의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인간학이 창조되지 않은 신학의 여러 유형들과 또한 그들의 현대적 변형들도 진지하게 참작하여야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공동의 전통 안에서 핵심을 형성하는 신학적 인간학에서 개인 이기주의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칫 인간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신학적 인간학 안에서 하느님의 하느님성과 하느님의 창조는 부수적인 것이 될 뿐이고, 최선의 경우 단지 초신학적 성찰의 주제나 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학을 전개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개인체험이 본질적인 것으로 자리잡으면 신학은 인간학적 축소가 이뤄지게 되고 그럼에 따라 신학은 부수적인 것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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