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인간학-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중)

 

C. 신학적 인간학이 ‘주체에로의 전환’ 그 이전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해 서는 안된다.


우리가 모든 신학적 언사를 규정하는 ‘주체에로의 전환’이 지니는 신학적 정당성은 강조해야 한다. 기실 모든 신학적 언사들은 동시에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에 분명히 한편으로는 인간학적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다음의 3가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① 앞서 언급한 신학의 인간 중심적 전환은 오늘날 복음선포와 신학이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정신사적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사적 흐름에 대한 비판은 이 시대의 정신사적 흐름의 ‘총체적 지평’(Context)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희랍 사상의 언어와 개념의 총체적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 초기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적 언사들이 희랍 사상적 사고의 전제들을 강력히 비판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당시의 정신사적 흐름이었던 다신론적 희랍 사고에 그리스도교적 유일신론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와 개념을 바탕으로 그들의 선 이해를 비판해야 했다.  “Disfunktion” – 교회의 사회적 역기능)


신학이 자신 앞에 소여(所與)된 정신사적 상황과 대화하면서 단순히 수용해야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복음을 율법으로 만드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복음이 청취자의 체험의 총체적 지평 안에서, 다시 말하면 복음의 청취자가 자신을 싸고도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다양한 질문 안에서 복음이 그 청취자에게 해방으로서 동시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복음은 그 청취자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고, 자신 안에 폐쇄되어 있는 그 자신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복음의 복음적 의미인 기쁜 소식을 위해서도 오직 하느님을 통해 권능을 지니고 ‘밖에서 오는 복음’(extra nos)이 ‘고착된 위로부터’라는 정식으로 일방적으로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이해지평, 그들의 개념으로 수용될 수 있어야 할 것)  그렇기에 오직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해 말하고, 또 인간적 개념 안에서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② 이런 복음의 본질에 대한 숙고가 내포되어 있는 청취자의 상황으로부터, 즉 사목적(Pastoral)으로 다루어지는 연구는 복음의 성격으로 보아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 Pastor –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Pastoral(司牧)이란 인간을 구원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총체적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사목이란 예수의 구원 행위를 오늘에 다시 현재화(Aggiornamento)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선 예수의 총체적 행위를 오늘날 어떻게 현대화시키고 가시화시킬 수 있는가가 사목의 초점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내포하는 내용을 근거로 하면 모든 신학적 언명은 인간을 위해 의미를 지녀야 하고, 그 신학적 언사들은 인간학적이라는 기본 바탕 위에서 질문되어야 한다. 인간이 복음을 인간 스스로 요청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복음을 그런 모습으로 원했고 창조와 함께 인간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하느님(하느님의 所與性)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스스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끝없는 질적(質的) 간격(거리)”이 존립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경쟁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③ 모든 신학적 언명들의 인간학적 전환의 당위성은 이런 신학적 언사들이 근본적인 인간의 행위를 통해 극명하게 잘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 행위는 다름 아닌 ‘믿음’인 것이다. 믿는다는 실존적 결단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믿는다는 실존적 결단의 행위를 통해 신학적 언사들은 의미를 지닌다. 신앙의 언사와 거기서 연유하는 신학적 언사는 주체를 초월하는 대상성, 단순히 말하면 그들의 실제 내용과 관련시킬 때 그 내용을 더 이상 규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개로 분류될 수 있는 투사(projection)의 혐의를 인식론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런 인식론적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언사들의 인식론적 구조는 다른 일반 학문들의 인식론적 구조와 다른 원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적 언사의 인식론적 구조는 체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바탕 혹은 이성적 귀납의 바탕, 제어되지 않는 직관의 바탕 위에 정초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신학적 언사의 인식론적 구조는 오히려 “자유의 행위”(선택,결단)에 바탕을 둔 것이고, 이러한 자유의 행위를 매번 새롭게 내포하는 것이다. 신앙의 언사나 신학적 언사는 강요될 수 없는 본인의 결단에서 오는 인정(認定,수용)의 바탕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인식에는 회의와 확신 사이의 긴장이 신앙에서처럼 모든 신학적 표현들 안에 통틀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묵주의 비유)


신학적 언사들의 낯설음은 정상적이 아닌 단지 언어구사법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인상은 신앙의 실재개념을 신앙 외부에서 도입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령, 계시, 부활, 죄, 구원, 특히 하느님이라는 기본 개념이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신학의 작업은 힘들고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변화될 수 있고 해묵은 언어적 도구와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언사가 보유하고 있는 보화를 구별할 수 있어야한다. 그것이 이러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간학적 인식 구조, 즉 믿음을 고려하고 인간의 인식 구조를 신학적 언사라는 고유의 언사로 표현하기에 신학적 언사들은 인간학적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누가 신학적 언사가 ‘사실확인’(역검증)이라는 모델이나, 일반 학문의 모델에 따라 파악하려 한다면, 그는 신학적 언명의 기본 성격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 안에 신학적 언사의 기본적인 인간학적 내용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즉 신학적 언사는 우리가 믿음이라 칭하는 인간의 총체적 행위라는 무리한 기대까지도 내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