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성찰(묵상)-하느님에 대한 언사(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우리가 체험하)

 

5.1.2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우리가 체험하는 것


이런 질문 앞에 우리의 침묵은 더욱 골이 깊은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다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랑의 사건 위해선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 즉 사랑의 대상이 내 앞에 있다면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의 몸짓을 보면, 그가 거기 있음을, 만질 수 있다면 나는 비로소 사랑에 감동되고 사랑에 응답이 가능하다.


내가 이런 방법으로 하느님에 대한 나의 인식에 의해(신앙 또는 철학적 성격을 지닐 수 있는 것들) 감동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배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신 가능한 것은 검증 가능한 감동(사랑)의 대상을 나의 체험과 어떤 의미로든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감동시키는 작용은 하느님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 자체에 대해 감동한다는 것은 그 감동이 하느님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성찰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사건으로서 사랑의 모든 영역은 결국 하느님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문장의 해석을 유리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이란 말이 의미 지니려면 그것은 오로지 윤리적 행위로서의 사랑, 즉 선물처럼 뜻밖에 내게 건네주는 좋은 것들, 사랑이 선사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여진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근본적 상황의 전제를 통해서 분명해진다. 피조적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속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문제는 오늘의 지평에서 누구도 무엇에 의해서 예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 하느님의 선물에 우리는 의존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이해지평에서 누구도 선물에 의존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로서 하느님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선물에 예속됨을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자기 위대성(영광성)을 비하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랑은 예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이런 관계(창조-피조)를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점, 즉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피조물이며 동시에 그 유명한 반란자인 우리에게 풍성한 선물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묘사한다.


하느님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말은 실재하는 모든 선물을 바로 하느님에게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이 우리에게 모두 선사되었는지에 대한 첨예한 시각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전하는 사랑에 관한 다른 생각에 의해 퇴색되고, 그 관념의 척도에 의해 하느님의 사랑이 재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 지혜, 정의에 관한 언급이 의미하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이 말과 관련시켜 하느님과 사랑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달콤하고 자극적인 표현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말은 오늘날 흔히 인간의 자유라는 이름 안에서 하느님 사랑에로의 예측을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하느님 사랑은 인간의 자유라는 이름의 거부를 통해 결국 그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손상을 입게 된다. 즉 하느님 사랑에 대한 말의 홍수로 인해 하느님 사랑에 사고로 그 빛을 잃을 뿐 아니라 그 뜻이 불분명해진다. 하느님 사랑의 선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말과 일치시킬 수 없는 삶의 운명의 시기에 시달리기도 한다.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삶의 바탕에 두고 스스로가 미움, 증오의 피조물이 아닌가 숙고해보기도 한다. 이에 마틴 루터도 이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표현한다:‘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그분이 마치 마귀인 것처럼 행동하신다’. 이는 벌써 현대에서의 하느님 부재의 체험이 앞당겨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 사랑을 이런 체험(하느님의 부재, 삶의 체험, 고통의 체험등)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느님 사랑은 오로지 믿음의 단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동기를 내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 Trotzdem)’라는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의 운명들 앞에 어떤 이론도 우리에게 ‘왜’라는 물음에 답을 줄 수 없다. 고통의 이론에 대한 모든 것도 그 고통이 사랑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론을 어떻게 그 고통을 잘 짊어지고 가는지의 전략이다.       


바로 이 해결되지 않고 대답되지 않는 질문에 십자가에 대한 사신이 계시된다. 하느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계시하신다는 가르침을 발터 카스퍼등의 신학자들은 그점을 더 강조해서 제시해준다. 이런 신학자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고 믿는 이들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 역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최고의 역설적 표현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강제로 주님이 시켜주는 것을 밖에 의미할 수 없게 여겨진다. 즉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의 초월적 탁월한 계시이다. 이렇게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를 언급함으로써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Theodicee’문제라고 한다)에 매어 달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Theodicee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조건 없는 사랑으로서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십자가에 대한 모든 주장 때문에 질문은 더 첨예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주장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것을 통해서 주장되어질 수 없는 것인지? 왜냐하면 그것은 십자가 자체에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부활하신 분의 십자가로 믿고 고백할 수 있다면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고통의 문제가 새로운 측면에서 조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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