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이해 기점(상)

 

제2장: 은총의 이해 기점




은총의 개념이 다양한 만큼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오늘날 하사품이라는 것은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로부터 받는 구걸과 비슷한 개념으로 경멸시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왕이 베푸는 공덕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화재나 수재 등 긴급한 사태를 맞이하여 복지기관이나 보험을 통해서 ‘우리의 권리’를 되돌려받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사품으로서의 은총을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은총’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을 통해서도 권리 요청을 내세울 수 없고, 오로지 남이 나에게 이르게 해 주는, 그래서 자유로이 받아들여야 하는 인격적인 향함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동전 몇닢을 구걸하는 것을 은총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은총론은 인간 제 스스로의 분수를 받아들이는 겸손을 요구한다. 인간은 분명 제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며 살아간다. 그것이 이웃 인간이든, 비가시적인 초월적 존재이든. 어쩌면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 자체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인간들의 실상을 표현한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비참은 비록 구걸하는 인상으로, 극히 자존심이 상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요구되는 이유는 은총을 이해하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




        1. 인간의 실존: 부조리, 결핍, 나약성, 한계의 체험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논하기에 앞서 그 은총을 건네주고 또 그 은총을 받는 두 주체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동화는 단지 어린 아이에게만 들려주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실존 상황을 요약하여 그려내고 있다. 동화가 담고 있는 소재는 악과 선의 투쟁이다. 상선 벌악이다. 선의 집단은 악의 집단에 대항하기에 무력하다. 악의 세력은 날로 팽창한다. 여기에 항상 제3의 구원자가 등장한다. 즉 부조리한 세계에서 선의 세계에 속한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목적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그려내고 있다. 동화는 바로 인간의 현 실존의 체험을 압축하여 그려낸 것이다. 동화는 인간이 은총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원초적으로 말해준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인간은 인간에게 하나의 신비이다. 그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질문을 시도하였다. 진정 인간 자신을 묻는 일은 중요하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질문함으로써 초월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라”는 명제로 자연 중심에서 인간 중심에로 철학의 중심을 옮겼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의 핵심 주제는 항상 인간이었다. 맹자 역시 인간 자신을 묻은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어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의롭다는 것은 사람이 걸어가야 될 길을 말한다. 그 길을 버리고 걸어가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고 찾을 줄 모른다. 슬픈 일이다. 사람은 닭이나 개를 놓치면 찾을 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잃었으면서도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그 놓친 마음을 찾는데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을 찾는 것이 학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키에르케골도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자신의 자아를 상실케하는 가장 큰 위험은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다른 상실, 즉 팔이나 다리를 상실했거나 만원짜리 돈을 분실하면 그 즉시 알아차린다”. 칸트도 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는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4가지 물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중간적 존재’라는데 대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다.파스칼은 인간을 천사와 악마의 중간 존재라고 말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데싸우어도 인간을 ‘중간자적 생물체’로 규정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우주의 생성에 비해서 짧은 연륜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당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또한 이 전체 우주의 종말기에 가서까지도 존속하는 것이 아닌 ‘중간자’이며, 공간적으로도 인간과는 비할 수 없을 이 만큼 거대한 객체, 예컨대 은하계에 자리 잡은 수십억개나 되는 태양 중에 단 하나에 불과한 극히 소규모의 혹성 위에 자리잡은 미세한 생명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시적 우주 세계와 미시적 생물 세계의 ‘중간자’로 규정한다. 현대 천문학은 1000억개의 별들을 지닌 항성이 1000억개 정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는 200억 광년이다. 그 이상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은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이다. 인간의 몸은 약 6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신경세포나 조직이 정밀하고 치밀한 것은 감히 하나의 우주라고 말할만 하다. 인간의 육체만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우주를 초월한다. 성서는 그러한 인간의 위대함을 비추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말한다. 흔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허사는 아니다. 니이체는 인간은 초인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죽여서까지. 창세기는 하느님이 되고 싶어했던 인간의 욕망을 낙원설화를 통해서 말한다. 한계를 지닌 존재이면서도 초월을 향하는, 무한을 향하는, 영원한 삶을 향하는  무한을 갈망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이러한 갈망은 허공에 대고 외치는 메아리가 아니라 그 실제 대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치 볼 것이 있기에 눈이 있고, 들을 것이 있기에 청각이 있는 것처럼. 그처럼 무한에 개방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인간 안에는 위대함과 비참함이 공존하고 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인간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인간의 두가지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보는 창세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이 보시기에 대단히 좋은’ 존재요, 작품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다. 하느님을 언제나 인간의 “아버지”로서 소개하고 있다. 예수에게 인간이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일차적인 인간 이해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아버지이시라는데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의 구별도,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구별도 없다(마태 6, 45). 여성과 남성의 차별도 없다. 오히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조차도 업신 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마태 6, 30-31).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머리카락 하나까지 허락하고 돌보시는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를 악으로 인도하는 잘못은 엄청나고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반대로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베푼 일은 물 한잔이나 빵 한조각처럼 비록 작은 것일 망정 그 대가로 베풀어지는 상급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하느님 나라가 된다. 그 ‘보잘 것 없는 형제’마저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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