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이해 기점(중)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죄짓는 인간이다. 이것이 성서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바다. 인간의 한계, 나약성이 진술되고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에와 실낙원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하느님과 결별하게 된 인간은 거의 무에 가깝다. 인간을 표현하는 한가지 용어 basar는 인간의 이러한 허약성을 잘 드러낸다. 시편 작가는 고백하고 있다. ‘(인간이 감히 이 몸을 어찌 하리이까?)나에게 바사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실낙원의 이야기와 유사하게 바울로 역시 인간의 비참함을 고백하고 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고,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로마 7, 18-19)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누구나 의식하고, 인정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서 성찰할 때, 어느 순간 대단한 것 같고, 또 어느 순간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낄 때가 있다. 자신만만할 때가 있고 의기소침할 때가 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사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매우 열악한 존재이다. 어떤 삶의 지혜를 습득하는 일을 비교한다면, 또는 환경에 적응하는 생존 능력을 따지면, 대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느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라는 소설을 써서 인기 작가가 되었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개미들의 일에 대한 열성과 치밀성을 보면 오랜 세월동안 학습해야 하는 인간은 너무 하잘 것 없다. 본능적으로 철 따라 움직이고 집을 짓는 새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대자연의 웅장함 속에서 인간은 입을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천재지변이 휩쓸고 간 들녁에서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할 뿐이다. 무엇보다 죽음에 직면해서 인간은 허무나 무력함을 뼈져리게 느끼게된다. 난치병에 걸린 가족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평생을 왕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다가 병들어 죽어가는 신하를 위로하기 위해서 찰스 5세는 병문안을 갔다. 왕은 한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들어주겠다고. 신하는 “전하, 폐하로부터 받고 싶은게 딱 하나 있습니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단 하루만”. 왕은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어떻게 하겠나. 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왕 중 하나인데도 자네가 요청하는 것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네. 오직 하느님 만이 삶의 선물을 하사하시고 유지하실 수 있네”.  그 신하는 자신의 평생 충성이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죽어가는 신하는 말했다. “그렇다면 속세의 왕을 모시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하느님을 모시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 건데 제가 무척 어리석었군요”.(J. 모러스, “잠깐만요”, 54) 자신의 죽음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결정적인 한계를 느낀다. 죽음의 어둠과 그 앞에서 선 인간의 무력함이 하느님의 은총을 요구하게 된다. 죄는 인간이 용서와 은총을 필요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의 나약함 한계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자신의 무력함 속에서 겸손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수긍하게되고 요청하게된다. 자신의 힘으로 아직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펠라지오적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펠라지오적 인간을 만난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과 기계 기술로 보다 나은 세계, 나아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러한 시도를 전개하였다. 철인정치를 네세우면서 지혜로운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완전한 국가를 제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엔 히틀러처럼 보잘 것 없는 인간은 설 자리가 없다. 인간은 완벽한 세상을 위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대조되는 하느님 나라가 예수에게서는 하느님의 선물로 소개된다.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도 무시되지 않는 그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업적이나 노력으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룩된다. 인간이 온전히 자유롭게 되고 구원되는 일은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은총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이다.






        2. 사랑: 잉여가치




        창조되지 않은 은총, 하느님의 사랑 자체를 가장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인간의 한계, 죄라는 것은 은총을 이해하게 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하면, 사랑은 은총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기점이다. 사랑이 무엇이냐? 오늘날 인간들이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주제이다. 대부분의 가요나 시나 소설이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으로 주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로 이해된다. 사실 사랑이라는 말 역시도 너무 남용되어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고, 사랑이라는 말의 가치가 평가절하되었다.


        오늘날 흔히 사랑은 남녀간의 열렬한 애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그리이스 철학은 사랑을 에피튜미아적 (wish, desire) 사랑, 에로스적 사랑,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으로 구분하였다. 욕구적 사랑, 성애적 사랑, 그리고 헌신적 사랑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에피튜미아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남녀간에 서로 애틋하게 보고 싶어하고 가까이 있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시작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경우 그 사랑은 상대방을 사랑한다기보다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본다. 상대방의 아름다움이나 상대방의 이점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방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사랑한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사랑이 시작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루이 에블리는 묻는다. “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왜 나는 나를 부인하고, 나를 묵살하고 나의 실존에 양해를 구하는 것일까? 나의 야망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무시하는 너무 큰 교만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에 대해 무지나 자기에 대한 부재와 혼동한 자기 망각에 대해 배워 온 ‘그리스도교적’ 교육 때문일까?”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너 자신에 대해 없는 사랑과 존경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없다. 너는 하느님의 첫 모습이기 때문이다. 네가 복사판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 원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너는 하느님이 네게 주신 첫 번째 선물이다. 네가 그 선물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선물의 주인공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너는 너를 무시하면서 그분을 무시하고 있고 너를 회피하면서 그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하느님이 너를 위탁하시는 첫 ‘이웃’인데 너는 그 누구에게도 감히 그렇게 대하지 못할 정도로 그 ‘이웃’에게 냉랭하고 엄중하고 무례하게 대하고 있다. 너는 네가 너를 사랑할 때만 존재한다. 너의 실존을 거부하면서, 너는 그 실존을 그들에게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을 위해 존재하기 전에 우선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 보다 성숙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사랑의 정의가 아직까지는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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