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은총 이해-공관복음: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자녀됨(하)

 

마르 2, 1-12에서 전하고 있는 반신불수의 치유 기적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이러한 처신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신체적인 건강 회복과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온전한 인간의 회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진술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죄의 용서를 ‘사람의 아들’ 예수가 베풀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체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이러한 회복은 특별한 인간적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와 자비로운 활동에 기인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수에게서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는 선물이요, 은총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무상적 사랑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충만한 미래를 향하도록 하신다. 아울러 모든 차원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적 존재를 실현하게 하신다.




        바리사이파의 율법과 사랑의 법


        예수로부터 공박당하는 것으로 성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불의한 사람들로 볼 수 없다. 오랜 세기동안 그들을 유다이즘의 대표적 인물들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그들의 가르침은 좁은 의미의 윤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음에도 또 다른 형태의 펠라지아니즘을 보이고 있다. 바리사이즘은 “스스로의 구원”의 종교를 시도하고 있었다. 운명에 관한 전통적 이념과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가운데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유다이즘을 헬레니즘화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바리사이파 사람들 자신들은 계속 보존해야 하는 전통들을 거부하였다. 그들의 협의적 보수주의는 사람들의 영혼과 제도 안에 성령께서 일할 공간을 마련해두지 못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거슬러 싸우신 한가지 이유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마태 23, 23). 예수께서는 참다운 종교와 종교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주장하신다. 짐을 지우는 문자적 의미에서 떠나 그 본 정신을 추구하신다. 그들이 하느님을 엄격한 주인, 무서운 주인으로 의식하는 것에 대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소개하신다. 기꺼이 죄인들의 회개를 받아주시는 분, 죄를 용서하시는 분,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소개하신다(루가 15, 132; 18, 9-14; 요한 8,1-11).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종교 이해를 거슬러 투쟁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예언자들의 일을 계속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은 이미 전례적 축제보다, 희생 제물보다, 종교 의식적 예배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선언하였다(이사 58, 6-7). 그리고 만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죄인들이나 죄녀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면(마르 2, 1; 루가 15, 1-2; 7, 39),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조상들의 잘못에 대하여 4세대까지 그 벌을 부과하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전히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아울러 언급하고 있다. “좀처럼 화를 내시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에 넘치는 하느님이시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출애 34, 6-7). 이러한 하느님을 그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자비의 개념을 포착하기 이전에 오랜 하느님의 교육과정이 필요하였다. 그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에게 돌을 던졌고, 그의 자손들은 계속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려하고 있다(마태 21, 33).


        예수는 그의 가르침의 강조점을 자녀로서의 영과 하느님의 부성적 섭리에 두고 있다(마태 6, 25; 10, 31). 그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마치 아버지처럼 여기며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마태 6, 5-16). 그리고 하느님께 영적인 호의와 은총을 청하도록 그들을 초대하신다(마태 6, 31.33). 이것이 그분이 가르친 진정한 신앙의 교육이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자녀로서의 정신은 이숭에 대한 사랑을 요구한다(마태 5, 38-48).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보증한다(마태 6, 12; 8, 32). 그리고 율법 전체는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마태 22, 37). 하느님의 사랑은 구약성서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분명 새로운 계명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는 고상한 이방인들의 철학이나 윤리를 초월한다. 그리고 랍비들의 상세한 계명과 규율들을 만들어 내는 노력을 뛰어 넘는다.




        하느님 아들이라는 선물


        비록 율법이 단순화된다 하더라도 쉽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무수한 계율을 완수하는 대신에 그보다 앞서서 그들이 해야할 일을 직면하게 된다. 더욱이 모든 것에 앞서서 사랑하는 하느님은 모든 계율들을 준수하는 것보다 더욱 인간의 힘을 탁월하게 하신다. 아들됨의 정신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해방의 결실이다(요한 8, 36). 베드로가 예수의 신성을 고백했을 때, 그분은 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배웠다(마태 16, 17). 사도들이 법정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했을 때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입술을 통하여 말하게 하였다(마태 10, 19).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부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게 된다(마르 10, 27). 인간의 영적인 삶 안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의 결과이다. 여기서부터 기도를 할 필요성이 발생한다.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마태 26, 41). 더욱이 인간이 해야할 일을 할 때 그는 아무것도할 수 없고 자신이 쓸모없는 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루가 17, 10) 구원의 업적 안에서 모든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주도권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는 역시 성령을 보내신다(요한 14, 16). 그 성령은 성자에게 모든 것을 완성하도록 파견되시기도 하신다(루가 4,1. 18).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은 이러한 복음의 기초적 개념을 담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복음이 우리는 모든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를 저주해야하다고 결론짓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처럼, 그는 인간은 하느님의 선물들이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맡겨진 것은 보존되어야 하며 생활한 것으로 증진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와 아퀴나스는 이러한 복음의 가르침을 탁월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정의는 없다. 오히려 하느님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아버지처럼 보다 높은 삶으로 이끌어 주신다. 물론 그 첫 선물의 사용의 능력도 하느님의 자유로음의 결과이다.


        이러한 소묘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기도가 그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스도의 기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한다. 그 전형은 궁극적으로 모방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위해서 창조의 기도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죄스러운 창조물의 기도일 것이다.) 여전히 커다란 그리스도교적 신비는, 그의 명상적 삶 안에서 사도들의 활동에서 처럼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켜야 한다. 스토이즘을 위해서 현명한 인간들은 덕의 yardstick(척도)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척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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